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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번 : [88호/컬럼] 4.3 항쟁, 그 진실과 현실
글쓴이: 김창후 등록: 2003-06-20 00:00:00 조회: 1630



4.3 항쟁, 그 진실과 현실


김 창 후/ 제주4‧3연구소 부소장





1. 해방과 4․3
일제의 빠른 항복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일본군 제58군은 미군이 상륙했을 경우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서 유격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제주도는 제2의 오끼나와가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오끼나와에서 일본군은 오끼나와 주민은 물론 조선인 강제 징용자까지 모두 동원하여 1948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석 달 동안 옥쇄작전을 벌인 결과 26만여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제주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이 세계 최초로 일본 본토에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해서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제주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북해도나 남양군도로 징용됐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일본에서 어렵게 노동을 하며 살아가던 사람들도 귀환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지도 못한 채 4․3을 맞았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4․3이 지난 반세기 동안 제주도민들에게 강제한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이 1999년 12월 16일 온 국민의 노력으로 제정되고, 2003년 3월 29일에는 마침내 정부 차원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됐다. 제주도민들이 50여 년 동안 그토록 외쳐댔던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4․3특별법의 제정과 <보고서>의 채택으로 4․3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4․3운동은 제도화시대를 맞아 과거를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오늘을 반성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쉽지 않은 과제를 안게 됐다.
이 글에서 필자는 4․3항쟁의 진실과 현실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4․3이란 무엇이고, 4․3특별법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으며,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간략히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2003년 3월 29일 정부에서 통과된 <4․3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은 어떠하며,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2. 4․3특별법과 4․3
1) 4․3이란 무엇인가?
제주4․3 특별법은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와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만 갖고는 4․3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법안 입안자들이 4․3에 대해서는 당시까지만 해도 재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임을 감안하여 그 기점을 3․1사건이 발생한 1947년 3월 1일로 하고,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을 종료일로 한다는 명확한 사실 이외의 진상에 대해서는 모호한 그대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럼 불완전한대로나마 4․3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제주도는 옛부터 자연의 혜택도 외면한 땅이었다. 도민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중앙정부의 온갖 착취의 대상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어떠한 중앙정부의 착취에도, 외세의 침탈에도 전통적으로 부단히 저항하며 도민의 권익을 지켜왔다. 이러한 전통은 해방공간에서도 이어졌다. 해방 후 제주도는 타지와 마찬가지로 일제식민지 잔재를 일소하여 자주적 독립국가를 수립하고, 식민지 경제구조를 개혁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제주도는 일제에 대항하여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벌인 경험도 있어서 이러한 개혁운동을 벌일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별 탈 없이 자주적으로 행정을 벌여나가던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미군정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47년 3월 1일이었다. 이 날, ‘제28주기 3․1 운동’ 기념식이 전도에서 개최된다. 대회는 각 읍․면 단위로 열렸는데 제주읍 대회에만도 3만 인파가 모였다. 그러나 기념식이 끝나고 귀가하기 위해 참여자들이 흩어져가고 있을 무렵, 관덕정 마당에서 응원경찰이 구경꾼을 향해 발포하여 6명의 사망자와 8명의 중상자를 내면서 마찰은 시작된다. 사건 후 제주도민들은 군정경찰의 사과와 발포 경찰의 파면을 요구하며 3월 10일 도청을 비롯한 전도의 관공서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총파업에는 관청, 학교, 은행, 통신기관, 경찰 일부 등 제주도의 165개의 관공서와 국영기업체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내도하면서 제주도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발포에 대한 한 마디 사과도 없이 타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하고 무차별 검거를 시작하여 500명 이상을 체포하고, 200여 명을 구속하였다. 당시 도지사였던 박경훈은 이러한 미군정의 조치에 반발하는 완곡한 표현의 사직서를 쓰고 지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년 동안 미군정은 지식인, 청년 등의 인사 2,500여 명을 옥석의 구별 없이 무차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1948년 3월 조천, 모슬포 지서 등지에서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는 해방 직후 귀환자들의 실직난, 친일 경찰 및 관리의 재등용,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300여 명의 희생,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에 이은 식량공출(일제시대와 달리 ‘誠出’이라 했음) 등에 겹쳐 도민들의 분노를 가일층 격화시켜 놓았다. 그런데 때마침 김구와 김규식 선생 등도 반대하는 5․10단선 결정이 내려지고 선거 감시를 위해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입국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1,500여 명의 좌익무장대들이 행동을 개시하여 제주도 내 11개 지서와 서청, 대청 등 우익단체 요인을 습격하는 것으로 4․3은 시작되었다. 5․10단선이 임박하자 제주도 전역은 더욱 긴장감에 휩싸였다. 무장대는 선거사무소를 습격하고 사무원들을 납치하기도 하였다. 결국 5월 10일의 단선에서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는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는 전국 유일의 사태가 벌어졌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단선이 무효화되자 충격에 휩싸였다. 미소를 주축으로 하는 동서냉전구도가 구축되어 가는 가운데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구상했던 미국은 국제적으로 그들의 정당성이 훼손되자 군경에 의한 토벌작전을 수립했다. 이 토벌작전은 도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예고하고 있었다. 군경합동의 대토벌작전은 단선 직후부터 다음해 5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될 때까지 집중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1948년 11월 중순부터 소개작전(유격대의 거점이 되고 있다며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을 불지르고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내쫓는 작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엄청난 인명 피해는 물론 제주도의 160개 마을이 참화를 입었다.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1949년 4월 1일자에 작성한 「제주도 사태」란 자료에 따르면 도민 희생 중 최소한 80%가 군경토벌대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도민 희생의 대다수는 군경토벌대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미국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좌익무장대의 공격으로 시작된 4․3은 군경토벌대의 과잉진압이 겹쳐 3만여 명이 희생되고 사태는 끝났다. 그러나 1954년 9월 21일로 4․3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제주도민들에게는 ‘빨갱이’, 혹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의 굴레가 씌어져 각종 사회생활에서 침탈을 받았다. 4․3특별법 제정이 민간인 희생만이 아니라 이 모든 제주도민들의 희생에 대한 진상규명의 장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2) 4․3 특별법, 무엇을 담고 있나?
전문 10조와 부칙으로 이루어진 4․3특별법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킴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제정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이어 4․3특별법은 제주4․3사건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나서, ‘희생자’와 ‘유족’의 범주를 정하고 있다. 희생자에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뿐만 아니라 후유장애자까지를 포함했다. 유족으로는 혼인신고를 못 했다 하더라도 희생자의 사실상의 배우자를 포함했고, 직계존비속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자매를 유족의 범주에 넣었다.
이 법은 4․3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누구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 가운데 자유스럽게 진상을 증언할 수 있게 하였고, 관련기관이나 단체는 자료의 발굴이나 열람에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다. 또한 관련 자료가 외국(특히 미국)에 있을 경우 정부는 자료입수를 위해 당사국과 성실히 교섭토록 했다. 이에 따라 이제까지 제대로 당시 진상을 밝히지 못했던 희생자나 유족들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증언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군이나 경찰 등 관계기관의 자료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특히 진상규명이 늦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료수집이나 분석을 2년 이내에 완료하고, 이로부터 6개월 이내에 진상보고서를 작성토록 했다.
또한 이 법은 위령사업과 관련해서 국가예산으로 위령묘역 조성, 위령탑 건립, 4․3 사료관 건립, 위령공원 조성, 기타 위령 관련 사업 등을 벌이도록 하고 있다. 또한 희생자 중 치료와 개호(介護: 곁에서 돌보기)가 필요한 사람인 경우에는 이에 소요되는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을 정부가 부담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이 법은 호적 등재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즉 당시 호적부가 불에 타 없어짐으로써 호적등재가 안 되었거나 기재된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유족들이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조항은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사망일자 등의 기재에 있어서 연좌제가 두려워 4․3 시기에 사망했음에도 사망 년도를 달리 기재한 경우가 많아 이의 정정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3) 4․3특별법의 과제
4․3특별법의 제정은 4․3의 진상규명운동의 시작에 불과하다. 향후 4․3특별법의 탄력적 운용이나 개정 등을 통해 우선 고려돼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4․3특별법에 따라 신고된 희생자수는 14,028명이다. 이 중에는 중복된 신고도 있어서 그 수는 더 적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공직에 있거나, 후손이 없다거나, 혹은 어린이를 신고해서 뭐하나 하는 등의 이유로 신고되지 않은 희생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피해 실태 파악은 4․3 진상규명의 지름길이다. 추가 희생자 신고를 반드시 받을 필요가 있다.
둘째, 이번 4․3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법안심사소위원회 등에서 논의는 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제외된 조항에 대한 문제이다. 우선 이 문제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희생자 ‘배상’ 부분이다. 입안자들은 국가 예산 문제를 염두에 두고 배상 부분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희생자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일정한 배상이 있어야 한다. 진상조사가 마무리되면 후속 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셋째, 평화재단을 설립하여 향후 4․3 관련 사항이나 4․3평화공원의 여러 업무를 실질적으로 주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4․3운동이 제도권과의 제휴가 필연적인 현실에서 평화공원 운영도 민․관이 협력하는 체제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3.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그 내용과 과제
1) <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나?
2003년 3월 29일, 4․3중앙위원회에서 심의 확정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579쪽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보고서에는 4․3일지, 참고 문헌, 토벌대․무장대 조직표 등이 부록으로 들어있기도 하다. 보고서는 △ 4․3사건 진상조사 개요 △ 4․3사건의 배경과 기점 △ 4․3사건 전개과정 △ 피해상황 △ 조사 결론 △ 건의 등 크게 6개 항목으로 4․3에 대한 2년여에 걸친 정부의 조사 결과를 방대한 자료와 증언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4․3진상조사보고서> 는 쟁점이 되는 다음의 주요 사항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정리했다.

① 4․3의 발발 원인
발발 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긴장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 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 사건 등이 있었다. 당시 조직이 노출되어 수세에 몰렸던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런 긴장상황을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남로당 개입과 역할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
③ 무장대의 조직과 활동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4․3사건 전 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기는 4월 3일 소총 30정으로부터 시작해 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④ 희생자 숫자
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확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본 조사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 피해를 2만5천~3만명으로 추정했다.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만7,719명과 한국전쟁 이후 발생된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 3,000여 명도 감안된 숫자이나,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⑤ 가해별 통계구분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78.1%(1만955명), 무장대 12.6%(1,764명), 공란 9%(1,266명) 등으로 나타났다. 가해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해서 토벌대와 무장대와의 비율로만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된다. 이 통계는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이 사망했다는 미군 보고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3%․2,985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⑥ 무장대에 의한 피해
제주도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내외로 추정된다. 또 경찰 전사자는 14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4․3사건 당시 희생된 서청, 대청, 민보단 등 우익단체원들은ꡐ국가유공자ꡑ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고 있다. 보훈처에 등록된 4․3사건 관련 민간인 국가유공자는 모두 639명이다.
⑦ 서북청년회의 개입과 역할
서청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⑧ 초토화작전에 의한 피해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 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진압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으로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 결국 이 강경진압 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 희생되었다.
⑨ 집단피해 마을 및 물적 피해
9연대에 이어 제주에 들어온 2연대도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즉결처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주민 집단총살사건인 ꡐ북촌사건ꡑ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 위원회에 신고된 자료에 의하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곳에 이른다.
⑩ 군법회의 적법여부
1948년 12월(871명)과 1949년 6월(1,659명) 등 모두 두 차례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는 ‘4․3사건 군법회의’는 다각적인 조사 결과, 재판서․공판조서 등 소송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 재판이 없었거나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이 통보되는 등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 하루에 수백 명 씩 심리 없이 처리하는 한편, 이틀만에 345명을 사형 선고했다고 하나 이런 사실이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점, 그 시신들이 암매장된 점 등 당시 제반 정황을 볼 때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⑪ 계엄령 집행 문제
1948년 11월 17일 선포돼 그 해 12월 31일 해제된 ‘4․3 계엄령’에 대해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법적 근거 없이 발효됐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측과 일제 계엄령이 계속 효력을 갖고 있기에 적법하다는 측의 다툼이 있다. 여기서는 계엄의 법적 근거 여부를 떠나서 제주도에서의 계엄령 집행이 법 테두리를 벗어나 이탈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계엄령 하에서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이 빈번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군 지휘관들조차 계엄령을 잘 알지 못했는데, 심지어 계엄령 해제 후인 1949년 제주작전에 참여한 2연대 대대장이나 독립대대 대대장은 그때까지도 계엄령이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⑫ 집단 인명피해 지휘체계
집단 인명피해 지휘체계를 볼 때, 중산간 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두 연대장의 작전기간인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6개월 동안에 전체 희생의 80% 이상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본색원해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착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강경작전을 지시한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밝혀졌다.
⑬ 미군 개입 범위와 역할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해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계속 보유하였고, 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였다. 특히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켰던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송요찬 연대장의 활동상을 대통령의 성명 등을 통해 널리 알리도록 한국정부에 요청한 기록도 있다.
⑭ 연좌제 피해
연좌제에 의한 피해도 극심하였다.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4․3 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4․3의 상흔들이 그 유족들에까지 대물림된 것이었다.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은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인하여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되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유족들이 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48년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제노사이드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돼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명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은 전시(戰時)에서도 민간인에 대해서 △ 고의적인 살인 △ 고문 등 비인간적 행위 △ 고의적인 괴롭힘이나 신체 상해 △ 군사적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 파괴와 약탈 등을 금하도록 규정했다. 더 나아가 모든 재판상의 보장을 부여하는 재판에 의하지 않은 판결 및 형의 집행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1948년 제주섬은 이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 특히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토벌대가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며 과오이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였다고 판단된다. 바로 이 점이 4․3의 진상규명을 50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 조사는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4․3의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 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 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한다.

2) <4․3진상조사 보고서> 대정부 건의문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를 통해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칠순노인까지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름아래 죽임을 당한 충격적인 사실도 확인됐다. 4․3 관련 희생자와 그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하나로 반 세기동안 불명예와 사회적 편견에 시달려 왔음도 부인할 길이 없다.
생명존엄을 유린하고 국민과 정부사이의 불신을 초래했던 이 불행한 사건을 치유하고 그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것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함과 동시에 진정한 화해를 함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데 그 뜻이 있다. 또한 전 사회적 차원의 기억과 추모는 불행했던 과거사를 되돌아보고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본 위원회는 진상조사결과를 토대로 정부가 취해야할 조치를 다음과 같이 건의하고자 한다.

1. 정부는 <4․3진상조사 보고서>에서 규명된 내용에 따라 제주도민, 그리고 4․3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2. 정부는 4․3 추모기념일을 지정해 억울한 넋을 위무하고, 다시는 그런 불행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3. 정부는 <4․3진상조사 보고서>의 내용을 평화와 인권교육 등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
4. 정부는 추모공원인 ‘4․3 평화공원’조성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5. 정부는 생활이 어려운 4․3 관련 유가족들에게 실질적인 생계비를 지원해야 한다.
6. 정부는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해야 하며, 유해 발굴절차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해야 한다.
7. 정부는 진상규명사업과 기념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나가야 한다.

3) <4․3진상조사 보고서>의 과제
4․3보고서작성기획단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2년여에 걸쳐 많은 활동을 했다. 철저한 자료조사 작업을 위해 국내에서는 부산과 대전의 국립문서보관소,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 등에서 조사했고, 국외로는 미국․러시아․일본에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당시 4․3을 경험했던 제주도민들과 군․경 출신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많은 구술자료를 얻었다. 그러나 발간된 <4․3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노력한 만큼 4․3의 진실이 밝혀졌는가 하는 데에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번 보고서는 4․3항쟁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중간과정의 보고서 정도쯤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 <4․3진상조사 보고서>의 향후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첫째, 자료의 절대 부족을 들 수 있다. 기획단이 많은 시간을 들여 자료조사를 했지만 진상규명에 필요한 핵심적 군경 자료, 미국 자료는 전무하다. 그래서 누가 초토화작전과 민간인학살을 명령했고, 민간인학살이 왜 방치됐으며, 미군사고문단은 이러한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하는 것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국방부와 미국정부의 비협조 탓이긴 하지만 정부기관을 통하여 국방부나 미국정부에 보다 강력히 자료공개를 요구했어야 했다.
둘째,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서술하는 데 있어서, 치열한 역사적 소명의식 없이 편년체적으로 사건의 경과만을 기록하여 앞으로도 4․3의 성격 논쟁은 재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4․3을 지칭하는 용어는 항쟁, 봉기, 민중항쟁, 사건, 반란, 폭동 등 많다. 4․3은 남북분단체제가 구축되어 가는 시기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에 반대하여 일어난 통일운동이었다. 기획단이 사회정서를 감안하여 4․3의 성격규명은 뒤로 미루었을지 모르나 아쉬움이 남는다.
셋째, 4․3항쟁은 미군정시기에 일어났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이전의 모든 문제, 즉 4․3 발발 원인 제공 문제와 이 시기 민간인 학살 등은 모두 미국의 책임이다. 한국 정부 수립이후 1948년 겨울에 발생한 대량인명학살도 일정 부분 미국에 책임이 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의 모든 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이러한 미국의 책임을 자료 부족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규명하지 못했다. 앞으로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하는 등의 방법으로 미국의 책임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넷째, 3만 명의 인명을 학살한 명령책임자의 책임 소재가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유족들은 가해자와 정부를 향해 ‘화해’와 ‘상생’을 외치고 있다. 본말이 철저히 전도된 특이한 사례로, 가해자들은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한 정당한 대응이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미화하고 있다.
다섯째, 보다 정확한 피해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 문서자료가 부족하다면 경험자들을 인터뷰한 구술자료가 사건 진상규명에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인적․물적 피해, 사회 변동, 정신적 상흔 치유 등을 위한 구술자료 확보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는 제주공동체의 회복을 통한 평화의 섬 정착에 필수적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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