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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번 : [88호/컬럼] 맑스 꼬뮤날레 참관기 |
글쓴이: 김경근 |
등록: 2003-06-20 00:00:00 |
조회: 1561 |
맑스 꼬뮤날레 참관기
김 경 근
서울대학술동아리 「단풍」
http//danpoong.jinbo.net
marx 꼬뮤날레 혹은 mars 꼬뮤날레
지구 옆에는 화성이라는 별이 있다. 그 붉디 붉은 별에서는 예전
그 언젠가 생명체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자기가 어느
별에 살고 있는지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 같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 그들이 말하는 더 나은 세상은 화성에 있는
그 것 같기만 하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화성에서 지구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맑스는 자신이 맑스주의자임을 한없이
부끄러워 할 것만 같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관념에 매료되어 화성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Marsist
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설명해내고, 변화시킬수 있는 Marxist 이다.
지구화 시대 맑스의 현재성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이화여대에서 제 1회
맑스코뮤날레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수많은 주관단체와
수많은 후원단체들의 힘을 모아 진보진영의 비상한 관심을
받으며 이루어졌다. 한자리에 모이기조차 힘들었던 많은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성과를 내놓고 동료연구자들과
토론하며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아주 소중한 자리였다. 이러한
뜻깊은 자리에 커다란 기대를 갖고 학술동아리 ‘단풍’에서도
맑스 코뮤날레에 참여하기를 결정했다.
첫째날
이화여대 후문에 있다는 삼성교육관을 찾아 나섰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겨우 삼성교육관을 찾을 수 있었다. 정문에
맑스꼬뮤날레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예쁜 전시물들이 놓여있었다. 예술에 문외한인지라
정확히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 진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맑스의 현재성을 테마로 하기 때문인지 전시물도 무척이나
현대적이란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벌써 꼬뮤날레는 시작하고 있었고 사람들도
꽤나 많이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처음 꼬뮤날레의
진행방식을 접하고는 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표 15분에
논평 5분 다시 발표자 5분 청중들의 질문 5분으로 주어지는
형식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기에는 턱없이 짧게 느껴졌다.
발제문을 모은 책을 사지 않고서는 도저히 진행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책이 있다해도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맑스잉여가치론의 재해석”이라는 류동민의 발표는 착취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결합 노동으로 인한 잉여가치의
전유를 강조한다. 즉 노동자 계급의 몫을 자본가 계급이
착취한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잉여생산물의 처분을 자본가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착취라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평자는
굳이 잉여가치론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라고
반문하며 행태주의적 가치론을 소개하는 글 같다라는 지적을
하였다. 류동민은 가치 규정이 철학적․종교적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고 가치의 양적 규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맑스주의 이론에서 부족한 점들을 찾아서 이를 보완하고 새롭게
고쳐나가는 작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이를 지지한다. 하지만
기존의 이론으로는 착취 상태를 극복할 수 없으므로 착취의
철폐를 위해서 새로운 개념 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조금 의아스러움을 느낀다. 즉 그러한 설명은 자칫하면 이론 그
자체의 적실성을 논하기 보다 자신의 목적에 합당하는
이론체계를 선택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은
당연히 현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이론이
‘옳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공황이론의 재검토”라는 김수행의 발표는 기존의 공황론에
대해 평가하고 자신의 가설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김수행은
이제까지의 맑스주의자들이 공황을 맑스주의적으로 이론화하는데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이것은 ‘자본론’에서 공황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세계 시장의 공황 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주된
원인으로 간주한 가설을 제시하였다. 김수행은 아직까지 자신의
가설이 부족하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제까지 올바른 공황론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할 뿐, 자신의
완성된 이론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예비적 연구 작업의
내용만을 발표하는 것은 조금 아쉽다. 게다가 논평자가 김수행과
별반 이론적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이어서 깊이 있는 토론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었다. 좀더 심층적이고 발전적인 토론을
꾀한다면 발표문의 완성도와 논평자의 선정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실천, 실천의 철학”이라는 박영균의 발표는
맑스철학의 핵심이 실천이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지나친
해체로 인해 철학이 ‘철학 자체의 환상’만을 생산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철학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박영균은
알티세르와 그람시의 입장을 비교 분석한 후에 철학의
노동자계급과의 결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논평자는 철학보다
실천을 강조하다 보니 실천과 결부되지 않는 독자적 영역에서의
철학의 존재 의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론하였다.
논평자가 발표자가 쓰는 용어의 뜻에 대해 질문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함으로써 효율적인 토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전에
의견교환 과정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발표자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실천의 담지자가
노동자 계급이라는 주장하는 것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의 근거들이 좀 더 명확하게 나타나야만
원론적인 선언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고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상품 개념과 재현의 문제”라는 박성수의 발표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을 설명하고 가치 형태의 변증법에서 맑스와
들뢰즈를 접목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과연 15분만에
들뢰즈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더 나아가 그것을 맑스의
사유와 접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는 무척이나 회의스럽다.
적어도 내 자신은 도저히 발표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반드시 청중이 발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글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논평자마저 자신이 들뢰즈를 잘
모른다고 말하는 상황에서라면 발전적인 토론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네그리와 맑스: 자율적 맑스주의”라는 윤수종의 발표는
네그리의 이론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윤수종은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담보하는 주체형성을 강조하며 또한 자본론보다는
그룬트리세를 더 중요하게 평가하며 노동자의 주도성을
강조했다. 논평자는 주체를 강조할 뿐 능동적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다고 지적하고 네그리는 맑스주의
운동이 아니라 NGO운동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번 발표
역시 네그리 이론에 대한 20여분 동안의 소개와 5분여의 비판이
있었을뿐 상호간의 발전적인 논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전시간의 발표들이 아주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본격적인 비판보다는 질문이나 우회적 표현에 머물렀다면 오후
발표는 좌석이 꽉 차서 서서 볼 정도로 청중들이 많아진 것과
함께 발표자와 논평자 그리고 청중들간의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관하여”라는 이진경의 발표는 이날 회의장을 가장 뜨겁게 달군
발표였다. 사실 발표 내용을 들을 때에는 내 지적능력에 비해
내용이 너무 난해해서 정확히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논평자의 지적을 듣고서야 논의 내용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논평자는 이진경의 논리는 분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주류경제학에 대해 반론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진경은 가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기계도 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류동민이 “그럴 바에야 맑스주의를
폐기하면 되지 뭐하러 맑스의 이름을 내거는 것인가” 라고
반문했지만 시간부족으로 더 이상의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에라도 이 것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맑스에게로의 복귀: 푸코의 담론 실천 개념을 중심으로”라는
이구표의 발표는 맑스와 푸코와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있어
사상사적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담론적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구표는 전통적인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푸코는 맑스의 한계를 분석하고 이를 발전시켰다고 말하면서
푸코의 사유를 받아서 맑스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논평자는 푸코의 비판을 인정할 경우
맑스주의의 최소한의 범주마저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푸코와 맑스는 분명히 사유의 출발점부터 다르다고 지적하고
어떠한 지점에서 양자가 만날수 있는지에 대해 반문했다. 이에
대해 이구표는 맑스주의의 정체성 즉 맑시즘의 정형화된 틀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며 푸코와 맑스는 분명 건널 수 없는
단절이 있긴 하지만 양자의 결합은 분명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답했다.
“칸트와 들뢰즈를 경유한 맑스: 문화사회의 인식적 지도
그리기”라는 심광현의 발표는 네그리의 제국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네그리의 네트워크 개념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역동적이고 다층적인 네트워크를 구현하기 위해 칸트와
들뢰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주체의식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헤겔적 유산을 칸트로
대체하고, 공산주의의 전망을 절대정신이 아니라 자기규제적
목표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또한 주체화 과정을 기존의
맑스주의로서는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들뢰즈의 배치의
작동원리에 대한 사고를 수용해야만,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재생산과정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논평자는 심광현이 말하는 ‘변증법적․철학적 배치’라는
것은 맑스의 사상이 아니라 들뢰즈의 사상이라고 지적하며
맑스를 들뢰즈에 짜맞추고 있다고 비판한다. 논평자는
맑스주의는 결국 계급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산주의의
전망을 자기규제적 목표로 잡는 것은 맑스의 역사 분석 방법론을
모두 폐기하는 것이며 구성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는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헤겔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칸트를 임의적으로 구분해서 특정 개념만을 받아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심광현은 계급을
강조하는 것만이 맑스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규제적 이념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과제이며 토대-상부구조의
단순결정에서 벗어나서 각 영역의 상대적 자율성과 중층결정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반론했다.
꼬뮤날레 첫날의 느낌은 실망과 아쉬움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 주제의 발표시간이 너무나도 짧다보니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기는커녕 발표 내용에 대한 설명조차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렇게 짧은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을 감안해서 발표자나 논평자 모두 이에 대비해서 적절한
준비를 해왔더라면 훨씬 상황은 좋았겠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청중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청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사전에 발표자는 자신의 내용을
적절히 요약해서 오는 노력을 했어야 하고 아울러 논평자와 미리
핵심쟁점에 대해 의논을 해야 한다. 꼬뮤날레를 하나의
공연이라고 가정한다면 공연의 출연자들은 너무나도 불성실했다.
비록 그 공연이 흥행성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작품성만큼은
낙제점에 가까웠다.
또 하나 크게 아쉬웠던 점은 논쟁이 핵심을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전 시간에는 논평자가 발제 내용에 대한 질문에
주력하거나 공격적인 질문을 자제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리
활발한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논쟁이 활발해지고
첨예하게 이루어진 오후 시간조차 논쟁은 핵심에 접근하지
못했다. 오후 시간은 맑스의 사상을 완전히 재사유하거나
네그리, 칸트, 푸코, 들뢰즈 등의 여러 사상가들과 맑스를
접목하는 내용의 발표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유들에 대한 이론적 점검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토론이 각자의
입장 표명 수준에서 맴돌았다는 것이다. 즉 발표하는 내용 그
자체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발표내용이
맑스주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공방에 머무른 것이다. 주로
논평자들은 발제내용이 맑스주의가 아님을 주장하고 발표자들은
맑스주의가 맞음을 주장하는, 토론 아닌 토론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 것은 발표자와 논평자 모두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인 것 같다.
먼저 일부 발표 내용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다른 사상, 다른 사유들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맑스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다른 사상가의 이론을 수용함에
있어 왜 그 이론을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맑스주의 이론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맑스주의의
외연을 넓히고자 한다면 그러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밝혀야 한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명료화하기 위해선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하는 맑스주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할 것이다. 왜 특정 이론을 수용해서 맑스주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면, 막연히 요즘
유행하는 사상가들의 사상을 수입해서 거기에 맑스주의를 갖다
붙인 뒤, 그 이론을 우리나라 현실에 끼워 맞추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
문제의식을 밝히는 첫번째 단계를 거쳤다면 두 번째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수용하고자 하는 이론의
타당성과 한국 사회에의 적용 가능성에 대해 논증하는 것이다.
자신이 수용하는 이론이 왜 옳은 것인지, 그것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한 입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처음 가졌던 문제의식이 옳다 할지라도
자신이 수많은 이론 중에서 왜 그 이론을 수용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그 다음 세 번째로 다른 사상과의 접목으로
인해 탄생한 ‘변화된 맑스주의 이론’ 그 자체의 적합성과 한국
사회의 적용 가능성에 논증해야 한다. 맑스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이론이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변화된 맑스주의의 타당성을 담보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결국 이 세 번째 단계를 입증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과정을
거쳐온 것이다.
그런데 발표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수용하려는 이론과 맑스주의가
가지는 유사점에 대해, 자신이 수용하려는 이론과 맑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접목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열심히 논하거나 자신의
맑스주의가 기존의 맑스주의보다 발전된 것임을 강변하는
수준에서 머무른 것 같다.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입증 수준이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결국 그들의 이론은 맑스주의의 이름을 빌린
네그리 알리기, 들뢰즈 알리기, 푸코 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맑스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알려낸다라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이론으로는 세상 그 어느 곳의 현실을
바꾸기는커녕 설명해낼 수도 없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맑스의 요소를 가미한 들뢰즈주의, 네그리주의, 푸코주의, 혹은
발표자의 이름을 딴 주의가 아니라 들뢰즈와 네그리, 푸코,
그리고 자신의 사유를 수용한 맑스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철저한 고민과 입증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논평자들의 접근 역시 대단히 불만족스럽다. 발표 내용이 기존의
맑스주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두고 공격하는 모습은
어떠한 발전적 토론도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 설령 발표 내용이
맑스주의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이론 자체가 타당하며 현실을 잘 설명해낼 수 있다면 굳이
맑스주의의 틀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이론이 잘못된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따라서 당신의 이론은 맑스주의가 아니다”
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대단히 궁색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발표자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이 맑스주의의
틀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맑스주의에 대해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 이론이 맑스주의인지
아닌지에 대해 어떠한 결론도 도출할 수 없다. 따라서
논평자들은 발표 내용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어야 한다.
논평자들은 발표자들의 이론 그 자체에 대해 비판을 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 다른 사상과 맑스주의를 접목시켜 만들어낸 이론 그
자체가 어떠한 오류를 안고 있으며, 어떠한 이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점에서 적합하지 않은지를
논해야 한다. 이것이 선행되어야만 발표자들의 맑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짚어내는 것이나, 발표자들이 수용하는 이론
자체의 오류를 짚어내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맑스주의를 옹호하고자 한다면 맑스주의를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에 대해 그것은 맑스주의가 아니라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왜 맑스주의를 그런 방식으로 변화시키면 안되는
것인지, 맑스주의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이론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게 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른 이론을
수용하는 이들의 문제의식을 기존의 맑스주의로서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들이 뒷받침되어야만 맑스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진정으로 맑스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더 얘기하자면 발표 사이에 나왔던
슬라이드 영상에 관한 것이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영상물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청중들을 위해 조금만
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면 슬라이드 영상물이 그저 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으로만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개막 문화제
일정이 끝나고 장장 1시간 30분이나 되는 엄청난 저녁식사
시간을 견딘 후에 드디어 개막 문화제를 볼 수 있었다. 발표
시간에 쫓겨 질문도 받지 않은 채 회의장 불을 꺼버리던 그
급박함은 어디로 가고, 하루에 총 쉬는 시간을 자그마치 3시간
30분이나 잡은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근처 식당도 별로
없으니 정문까지 갔다 오라는 배려였을까? 그 시간에 주최측에서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이었을까? 평소 학생 행사만 다녀서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인진 몰라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문화제가 요식행사가 아니라면 좀더 많은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첫 번째 준비된 공연이 취소되면서 하루종일의 그 꿀꿀한 기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참 투덜투덜거리던 나는 어느샌가
투덜거림을 멈추고 마냥 즐거워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김수행의 짧고 굵은 인사말과 함께 시작된 문화제는 가슴 아픈
하지만 그만큼이나 가슴 벅찬 영상물들, 박창근, 선언, 최도은의
다양한 색깔의 정말로 멋진 공연들이 이어졌다. 정말이지 단순한
나는 어느새 맑스꼬뮤날레에 정말 잘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변덕스러움이 부끄럽긴 했지만 더 이상 내게
맑스꼬뮤날레에 대한 불만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날
“기로에 선 한국 노사관계: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열사투쟁”이라는 이종래의 발표는 두산중공업 투쟁 즉
배달호 열사 분신 투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한
설명이었다.
무엇보다 기억남는 두 가지는 배달호 열사가 조합원들이 작업할
때 호루라기를 불며 정신차려야 된다고 소리쳐서 호루라기
아저씨라 불렸다는 사실과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내려와서 사측의
방해공작이 한동안 없었을 때조차도 전체 노동자 4700명중의
700명만이 집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얘기들이었다. 이종래는 합법주의 하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명백히 다른 법적용을 받는 현실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해야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문제들”이라는 김인식의 발표는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내전의 영향을 중시했다. 내전으로 인해 경제가
파탄나고 혁명계급이 감소함으로써 볼셰비키 중앙정부에게
권력이 집중됐다는 것이다. 즉 레닌의 권력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백군의 공격으로 인한 어쩔수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영향으로 장기적으로 관료층이 비대해지고
계급화하여 레닌 사후 스탈린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낳는다. “공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가?” 라는 플로어질문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김인식은 “당시 전세계적 생산력 수준은 충분히 발전된
상태였으며 노동자들의 혁명이 중단되었다면 바로 반혁명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일국적 견지가 아니라 국제적
조건을 살펴야하고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산시켜야 했다”라고
말했다.
김인식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설명은 내게 커다란 의문을
남겼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일당 독재와 나아가 스탈린의
집권이, 역사적 상황에 따른 어쩔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러시아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러시아 혁명의 실패가 자본주의 진영의 방해로 인한
것이라고만 간주해버린다면 러시아 혁명기의 오류들과 그 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의 오류들을 모두 합리화시키고 우리
스스로의 발전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북한의 주체형 사회주의와 현시기 북한의 변화과정”이라는
배성인의 발표는 북한의 체제를 주체형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이러한 북한 체제가 80년대 후반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담론을 강조함으로써 위기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담론으로서 PT계급보다 군대를 강조하는
선군정치를 예로 들고 있다. 배성인은 주체형 사회주의가 56년
종파사건을 계기로 발전한 것이며 북한의 당유일체계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경제위기와 정치갈등 해결을 위해 80년대 후반에는 우리식
사회주의와 조선민족 제일주의라는 담론을 내세웠고
90년대부터는 선군정치와 강성대국론을 내세우고 있다.
“수령론이 스탈린주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라는 플로어의
질문에는 수령론에는 사회정치적 생명체 이론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이로 인해 스탈린주의와 다르다라고 주장했다.
배성인의 발표에서도 앞에서와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북한의
현존 모습 그리고 북한의 역사적 발전 모습들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의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런 설명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즉
시대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면 현재의 모습은 모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는 반드시 특정 형태가
조응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역사를 통해 과연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현재적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시대적 상황에 근거해 사후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을 분석하고 그러한 시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었는지 또한 그러한 시대 상황 하에서
현재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어야 하는지에 대해 더
중점을 기울어야 한다고 믿는다.
“현시기 한국사회 계급투쟁 지형 분석”이라는 고민택의 발표는
지금이 노자간의 헤게모니 전선이 본격화되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87년 이후 아래로부터의 투쟁의 성과를 자유주의 세력이
수렴해가고 있다고 말하며 세계적 차원의 계급투쟁이 격화되고
지배계급의 폭력성이 재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후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석을 행하고 있다.
정세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현실에서의 실천이 정세분석에
기반한 것이며 당면 목표와 전술 역시 정세분석에서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맑스꼬큐날레에 나오는 정세분석은 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얼마나 현실에 대한 파악을 잘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정세분석에 대한 원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맑스주의자에게 있어 정세분석이
왜 필요한 것인지, 맑스주의자가 정세분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맑스주의자는 정세분석을 통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정세분석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꼬뮤날레에서
발표되는 의미는 훨씬 퇴색될 것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와 민주노동당의 실천”이라는 장상환의
발표는 좌파, 사회주의란 개념과 맑스주의의 타당성에 대해
근본적 수준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해서 소개하고 현시기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제시한다.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공간에 대해 알려나가는 작업은 중요하다.
특히나 자신의 공간이 진보진영에서 논쟁의 한가운데 위치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주어진 짧은 시간 중의 대부분을
민주노동당이 어떠한 곳인지, 어떤 활동을 해나가는지
설명하는데 소비하는 것은 무척이나 아쉽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론적 쟁점에 대해 집중하거나 민노당이 안고
있는 조직적․정책적 쟁점에 대한 심화된 접근을 보여주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맑스주의의 여러 면의 타당성을
점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민주노동당이라는 의회전술의 타당성과
유효성을 입증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을 홍보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뜻깊은 논의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시기 좌파 정치조직운동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과제”라는
박성인의 발표는 한국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역사와 전망에 대한
글이었다. 사회주의 정치 운동 주체에서 ‘비민노당 좌파’ 만을
논의대상으로 삼은 박성인은 이념과 전망이 부재하고 고립
분산되었으며 노동자 계급과 결합이 취약하다는 것을 한계점으로
꼽았다. 하지만 박성인은 지금의 위기가 90년대 초처럼 청산의
위기가 아니라 부활의 위기라고 주장하며 향후의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공통 지반으로서
반자본투쟁의 진전에 복무할 것, 의회주의적 전략이 아닌
변혁전략을 추구할 것,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노동자 국제주의에
동의할 것, 부문운동에 대해 모색할 것을 제시했다.
내용의 수준을 떠나서 발제문이 청중들에게 제공되지 않은 것은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수준 낮은 발제문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불성실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내용 자체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글이다. 하지만 구체성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고
앞으로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라는 원론적인 선에서만
그치고 구체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논의의 어떠한
진전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의 본질과 문제점”이라는 한만중의
발표는 최근 불거지고 있는 교육계의 여러 문제들과 결부되어
많은 관심을 가진 주제였다. 이제까지 피상적으로만 인식하던
교육계의 문제점과 개혁방안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발표자가 제시한 교육 개혁의 대안 중에서
신자유주의를 직접적으로 타파할 수 있는 대안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대안이 신자유주의와의 투쟁으로 귀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육의 문제점이 신자유주의에 기인한다면 대안에
있어서도 교육계 고유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신자유주의에 근본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뉴라운드, 경제특구와 한국 사회”라는 김영선의 발표는 최근
가장 중요한 당면 투쟁과제중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관한 것이다. WTO와 경제특구에 대해
설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투쟁까지 평가하는 이 발표는 아주
시의적절한 주제들을 다양하게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하나 하나의 주제를 세밀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또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왜 민중운동 진영이 ‘모든’ 투쟁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반대 및 WTO반대 전선으로 집중시켜야
하는지 그 주장의 명확함에 비해 논거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노동자 문화와 노동자 조직 엘리트주의적 의미생산과 그
조직적 귀결”이라는 신병현의 발표는 노동자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노동자에 대한 계몽적 태도를
거부하고 노동자 계급의 주체형성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대공장 노조들과 민주노총 상층부의 예를 들며 지금의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적 역할이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신병현은 지금의 노동자 문화는 엘리트들이
슬로건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파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노조운동을 강력히 비판하는 그는 대안으로서
교육운동과 노동자 문화운동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논평자는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대중적 계몽을 중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노동자 문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신병현은 최근 한국에서 폭넓게 논의되고 있는
들뢰즈와 네그리의 이론들에 대해 반대를 표하며 엘리트주의와
엘리트가 주도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현존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전시키는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플로어에서 장상환은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며 지금의 엘리트주의, 관료주의는
노동자 문화의 하나의 표현이며 노조 간부는 노동자들의 수준에
조응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노조간부의 필요성마저
부인해서는 안된다 라고 주장했다.
신병현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또한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가 과연
무엇인가? 그 프로젝트를 제시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그 주장이
옳다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물론 들뢰즈나
네그리의 대중관이나 장상환이 노조 상층부를 바라보는 관점처럼
원론적인 지점에서의 입장 차는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원론적인
부분을 점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론을 타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이론과 논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급투쟁의 의미생산과 문화정치”라는 강내희의 발표는
문화와 정치경제와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글이었다. 문화와
정치경제는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하며 의미생산과정을
중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코드 중심의 생산을 넘어 비코드적
생산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문화적 공공성은 정치경제에서의
계급투쟁을 승리한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방송국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면 구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내재성을
강조하며 문화정치를 미학화하는 것은 나치즘을 보듯이 매우
위험하다”는 플로어의 주장에 대해 강내희는 비코드적 생산을
중시하는 문화정치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보다 아방가르드를
더 중요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나 미학 분야에 무지하다 보니 논의 내용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정치경제 영역에서의 투쟁 뿐만 아니라 문화
영역에서의 투쟁과 노력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비코드적 생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또한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하는지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특히나 인간 해방을 위해
아방가르드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좀더 많은
논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날은 4군데 방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각각의 방이
거의 꽉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특히 룸1은
하루종일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전반적 진행에서 첫째날보다는 많은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각자 자신들의 흥미에 따라 주제를 골라서 들을 수 있었고
토론시간도 훨씬 더 많이 주어졌다. 똑같은 시간에 겹칠 경우
어느 한가지는 듣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꼬뮤날레의 모습은 둘째날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좀 더 많은 흥미를 가질 수 있고, 좀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할 수
있고, 좀 더 많은 토론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꼬뮤날레의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진행 방식을 좀더 고민하고
발전시켜서 훨씬 더 멋진 꼬뮤날레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둘째날에는 플로어 토론이 많았다. 그런데 이 플로어 토론을
운영하면서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플로어 토론을 하는 이유는
청중들과 소통을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청중의 질문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한 노력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자기의 의견을
설파하려고 온 특정 인물이 계속해서 발언권을 가짐으로써
진지한 논의가 봉쇄되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
개인이 하루종일 발언권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꼬뮤날레에는 다양한 특성을 가진 청중들이 참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만큼 플로어 토론의 사회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었던 점은 민주노동당, 노동자의 힘, 다함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면서 벌어졌던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묘한 신경전이다. 나는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론을 주장하고 다른 정파를 비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근슬쩍 그러한 지점들을
건드리기보다는 아예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름을 걸고 전면적인
토론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것이 맑스꼬뮤날레에서 이루어질 이유는 없다.
하지만 각 정파들이 생각하는 맑스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유의미성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재날에 아쉬운 점은 발제문이 준비되지 않거나 책에 포함되지
않은채 프린트물로 나눠진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준비자들이
기본적인 성실성을 갖추기를 기대해본다.
셋째날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주권합성과 계급구성”이라는 조정환의
발표는 민중과 시민의 분할이 극복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
주권 합성과 계급 구성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민중사회론과
시민사회론을 비판했다. 그는 민중이라는 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계급 구성의 주체로서 ‘다중’을 제시한다. 조정환은
붉은 악마를 다중의 출현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중앙의 지도 없이 자발적으로 발생했던 87년․96년의
투쟁들, 현재의 반전운동과 함께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러한 비매개적이고 비주권적인 힘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문화사회론: 좌파의 사회운동 혁신과 그 쟁점들”이라는
문화과학의 발표는 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문화과학은 다중을 사회변혁의 축으로 상정하고 좌파적
시각에서의 분석 전망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통 좌파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자발적 주체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
것을 사회적 참여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좌파적 주체성인 다중이 행하는 계급투쟁을 설명하면서
노동사회에서 문화 사회로의 이행테제를 제시한다. 경제적
계급적 지표로만 인간해방을 말할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욕망의
미시정책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다중의 원천과 동력, 다중적
움직임을 포착하지 않으면 이행전략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들은 두가지 발표가 공교롭게도 둘 다 “다중” 개념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다중 개념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 다중이라는 개념이 커다란 유의미성을
지닌다고 믿고 있다.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변하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들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또한 끊임없이
주체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라는 점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다중이라는 개념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싶은 욕심이 강한 나머지
그 개념을 무분별하게 도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든다. 플로어 토론에서의 김성구처럼 “사전에 존재하지도 않는
다중이라는 개념을 왜 쓰냐” 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왜 구태여 기존의 개념들을 폐기하고 ‘다중’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음은 지적하고
싶다. 다중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자발적 주체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전의 민중으로서는 이러한 의미를 담기에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이제까지의 ‘민중’으로서는 사회변혁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촛불 시위를 말하고
심지어 붉은 악마를 말한다.
그런데 나는 다중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4.19 혁명, 80년
광주, 87년 6월 민중들의 투쟁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해방
이후의 격동기, 그리고 군사독재와의 투쟁에서 우리나라의
민중들의 자발적 주체성이 발현되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던 변혁을 담보할 주체는 붉은 악마가 아니라
이제까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던 바로 그 민중들이다. 역사의
전환점마다 우리의 민중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일어났었다. 민중들은 언제가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지식인들은 제멋대로 자기 머릿속에서 민중을 혁명
계급으로 규정하더니 이제는 제멋대로 포기하고 다중이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다중을 예기하는 이들이 이런 점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까지 맑스주의 운동이 대중을 바라보고
접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다중이라는 개념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실
누가 옳은 것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중이 옳은지 민중이
옳은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결코 말할 수 없다. 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지 않는다면, 철저히 현실에 기반해서 논하지 않는다면
누가 무엇을 말하건 간에 그것은 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다중적 주체의 창발을 포착해야 한다’거나 ‘자발적이고
역능적인 주체가 질적 변환을 낳을 것이다.’,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라는 선언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다중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결코 판단할 수 없다.
셋째날은 아쉽게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회의장에서 발표를
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단지
두가지 발표만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셋째날은 전체
회의장에서의 플로어토론이었고 둘째날처럼 청중의 질문을
조절하는 데 있어 사회의 문제가 약간 있긴 했지만 참가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던 것 같다. 많은
발표를 듣지 못해서 더 이상의 내용적 평가를 내리긴 힘들지만,
다만 셋째날까지도 많은 이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참석자들이
맑스꼬뮤날레에 크게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폐막 문화제
폐막문화제의 모토인 즐거운 혁명, 젊은 연대에 걸맞는 정말로
젊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치 락 콘서트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멋있는 문화제였다. 특히나 오프닝 공연을 한
디스코트럭은 이런 묘한 자리에서 처음 공연하는 밴드와 이런
공연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청중이 만나서 생긴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정말로 젊음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함께 부르던 천지인의 청계천 8가를 끝으로 나는
아쉽게도 먼저 나서야 했다.
끝까지 같이 하진 못했지만 폐막 문화제 역시 아주 훌륭했다.
개막 문화제와는 또다른 감동과 재미를 주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은 이왕이면 노래운동을
하는 이들과, 함께 운동을 하는 이들과 맑스꼬뮤날레의 마무리를
함께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과는 약간 다른 것을 만나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이다. 또한
엄숙하고 아카데믹할 것만 같은 맑스꼬뮤날레에 즐거움을
가져오고 젊음을 가져온 것은 무척 좋은 시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시도의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노래로서 운동을 고민하는
이들과 함께 했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운동진영에서조차
문화의 영역에서 그들이 폭넓게 대중화되고 널리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투쟁의 공간에서만 환영받을 뿐
우리네 삶의 공간에서 살아있지는 못한 것 같다.
맑스꼬뮤날레에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정치적 색깔이 옅은
인디밴드들을 초청한 것은 아마도 우리의 노래운동 동지들은
엄숙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문화를 우리가 즐기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즐기겠는가?
즐거움과 젊음은 우리 내부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끼리끼리 모여서 놀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가 따돌리지 말자는 것이다. 문화를 학술의 진정한
연대 상대로 생각한다면, 우리 자신의 문화를 투쟁의 문화만으로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맑스 꼬뮤날레의 마지막을 문화의 영역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여러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야
한다고 믿는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맑스 꼬뮤날레에 대해 너무 안 좋게만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같이 참석했던 친구는 자신은 별로 불만이 없다며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게 아니냐라고 물었다. 그렇다. 나는
맑스꼬뮤날레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
커다란 기대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맑스꼬뮤날레가 여느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학술 모임처럼 사교나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자신들이
진정으로 맑스주의자라고 믿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자신의 운동의 결과로서 제출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땅의 그
유명한 맑스주의 지식인들이 내놓은 운동의 결과는 현장에서
헌신하는 활동가들과 자신들의 삶을 걸고 투쟁하는 민중들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하다. 고작 자신들의 연구 계획서나, 삽화적
글들, 검증되지 않은 글들을 발표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모은
것이 부끄럽지 않을까?
맑스꼬뮤날레의 성과를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맑스꼬뮤날레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남긴
행사였다. 그리고 맑스꼬뮤날레는 처음으로 시도된 행사였고
그러하기에 많은 부족한 점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3일간의
행사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도 안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맑스꼬뮤날레가 끝나고 나서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또 다른 공간들을 통해 계속적인 토론을 벌여나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
꼬뮤날레의 성과물이 학자 개개인의 연구 결과물로 남는다면,
꼬뮤날레로 인해 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진다면,
그렇게 해서 맑스주의가 더욱 다양하고 깊이 있게 발전한다면
그것은 꼬뮤날레가 의도했던 바를 뛰어 넘어 남한 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 개인의 지적 수준의 저열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건방지게도
여러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에게 엉터리 비판을 해댄 것 같다.
하지만 겉으로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만 투덜거리는
것보다는 내 자신이 틀릴지라도 명확하게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예의라고 생각했다. 내 글이 맑스꼬뮤날레의 발전에 나아가
맑스주의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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