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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번 : [90호/컬럼] 한국에서의 반전운동과 반미운동에 대하여 |
글쓴이: 고민택 |
등록: 2003-09-20 00:00:00 |
조회: 1494 |
한국에서의 반전운동과 반미운동에 대하여
고 민 택
연구위원
들어가며
미국 제국주의의 이라크 침략을 앞두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진 반전운동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긴 힘든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양상을 새롭게 보여주었다. 지난
2월 15일 반전을 위한 국제공동행동의 날 하루 동안 전
세계적으로 역 1500만 명의 사람들이 반전 운동에 나섰다.
미국의 뉴욕 타임지는 이를 두고, 미국이 세계적으로 하나의
슈퍼 파워라면, 미국 외에 또 하나의 슈퍼 파워가 등장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이 날, 비록 유럽 대도시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한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수이긴 하지만, 약 5천~1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참여도 한국의 역사에서는 그 의미가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반전운동의 전통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서,
동시에 국내 문제가 아닌(?) 일에 이 정도의 사람들이 시위에
나섰다는 것은 앞으로 반전운동이 더욱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뒤 한국군 파병을 앞두고
그와 같은 반전 시위가 노무현 정권 및 지배계급에게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세계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반전운동이 갖는 정치적
의미와 방향에 대한 태도와 견해가 하나로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크게 두 측면에서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다.
하나는 반전운동이 직접적인 전쟁 행위 자체만을 지나치게 또는
특권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전체 피억압 계급이 일상적으로 벌이고
있는 나머지 여타의 투쟁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다른
하나는 반전운동이 정작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는 그 동력이
급격히 약화되거나 동시에 반전운동 세력 내부의
분화․분열을 불러오는 약점을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없지 않지만,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반전운동에서 반미운동이 차지하는 의미를 둘러싸고
커다란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고 있다.
이라크 전쟁 이후의 반미․반전운동
미국은 이라크 침략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지 UN의 동의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실패했다. 참전국도 91년 걸프 전
당시에는 28개국이었던데 반해 이번에는 불과 4개국만이
참전했다. 고립된 건 이라크가 아니라 미국 제국주의
자신이었다. 이런 상황은 전쟁 종결(?)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시 정권이 침략의 이유로 내세웠던, 이라크가 갖고
있다던 대량살상무기(WMD)는 나오지 않았으며,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함으로써 ‘해방군’으로 대접을 받겠다던 공언은
오히려 이라크 민중들로부터 ‘점령군’으로서의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영국의 블레어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이로써 세계 반전운동이 정치적으로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미국 제국주의는 침략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패권을 발휘했지만 결과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더욱 큰 반발, 즉
반미를 불러오는 효과를 가져왔다. 중동 내 친미 정권은 전쟁
전에 비해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려 있다.
한편 부시의 이라크 침략은 북의 정권으로 하여금 ‘핵’ 무장의
필요성을 더욱 유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 정권은 “… 그
어떤 첨단 무기에 의한 공격도 압도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적 억제력을 갖추어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의 노동자 민중도 한반도 전쟁 위기의
주범이 북의 ‘핵’ 무장 여부가 아니라 바로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 패권 전략과 부시 정권이 고집하고 있는 북에 대한 위협
정책이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한국에서의 반미 감정(?)도 더욱
확산되고 있다. 미국은 이 때문에, 비록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지만,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과 함께 미군 재배치를 내비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세계 반전운동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6월 21일 영국
런던에서는 6백 여명 이상이 전쟁저지연합(Stop the War
Coalition) 주최의 반전 시위에 참가했다. 전쟁저지연합은
이라크 점령 중단과 영국군 철수를 요구하기 위한 제2차
민중회의를 8월30일에 열기로 결정한 바 있다. 또한 제2차
인티파바(팔레스타인 봉기) 3주년이 되는 9월27일에는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점령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국제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미국에서도 지난 5월 17~18일 뉴욕에서 ‘전쟁 저지와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즉각 행동’(ANSWER)이 후원한 ‘전쟁,
식민지 점령,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전국대회’가 약 8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미국의 또 다른 반전운동 단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단결’(UFPJ)도 6월 6~8일 시카고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지난 5월 일본에서 열린 ‘국제연대포럼’에 참가한
일본, 한국, 영국, 미국의 참가자들도 반전을 내용으로 하는
‘도쿄선언’을 채택했다.
한국에서도 반전운동에 대한 전열이 새롭게 정비되고 있다. 그
동안 여러 형태로 분리되어 진행되던 반전 연대체들이 하나의
형식으로 새롭게 틀을 짜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으며
9․27 세계 공동행동의 날에 대한 계획도 준비되고 있다.
특히 그 동안 반전운동 대열에서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노동운동
쪽에서 조직적인 참여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지난 8월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제출된 사업계획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 한반도 전쟁 정책을 저지하고
한반도와 전세계적 차원에서 반제반전평화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노동자․민중의 반전투쟁전선을 일국적, 국제적 차원에서
확대강화해 나간다.
2)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미군기지 문제 해결, 동북아
지역의 MD체제 및 군비증강 반대,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통한
국방비 증액 저지 등을 통해 반제 평화군축운동을 전개한다.
3)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을 노동운동의 전략적
투쟁의 중심축으로 발전시켜나가면서 미국의 대북압박정책과
전지구적 대테러전쟁에 추종하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대전선을 강화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전망과 관련하여
정세반전의 계기로 삼는다.
4) 미국의 아프칸, 이라크 침략전쟁과 파병저지투쟁,
대북적대정책 중단과 한반도 평화체제구축투쟁, 불평등한
한미관계 청산과 주한미군문제 해결 등을 구축하여 하반기
정세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도록 한다.
오늘날의 반제국주의의 의미와 성격
20세기 초반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성격을 제국주의로 규정짓는
것에 대해서조차 논란과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오늘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성격을 제국주의로 규정짓고자 할
때에는 훨씬 많은 문제제기가 던져지고 있다.
여기서 일단 제국주의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제국주의는 크게 두 측면의 통일로서 이해되고 있다. 하나는
경제적 측면으로, 이 때 제국주의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독점자본주의에서는 산업(독점)자본과
은행(독점)자본이 유착․융합한 형태의 금융자본이
성립․등장함으로써 금융과두제의 지배가 나타난다. 동시에
독점자본주의에서는 독점가격에 따르는 자본의 초과 이윤 발생과
과잉자본이 형성된다. 이로부터 이전 시기의 상품수출과
대비되는 ‘자본수출’을 필연화 한다. 또 하나는 정치적 측면인
데, 이 때의 제국주의는 특정 국가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
성격은 국가가 독점자본주의의 국내적 지배와 대외적 팽창을
지원․선도하는 것을 말한다. 즉 세계시장에서 국제독점체
사이의 경제적 분할 경쟁과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영토적 분할
경쟁을 국가가 지원․선도하고 나아가 이의 재분할로부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군사적 경쟁, 즉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렇게 본다면 제국주의는 민족국가가 도달한 자본의
발전(축적)단계와 그를 유지․지속․강화시키고자
하는 상부구조(국가)의 역할을 합한(통일시킨) 개념이 된다.
그런데 노동계급이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든, 오늘의 세계에
대해서든 그것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극복하려는 데 있다. 즉
‘이행’을 위한 실천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
답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위에서 살펴본
제국주의(론)은 과연 ‘과학인가’라는 의문과 오늘날에도
실천적으로 여전히 유효한 개념인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의(마지막) 단계이자
사멸하는 단계로 규정하는 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로부터 다름 아닌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그것도
항상적․일반적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자본주의 ‘붕괴론’으로까지 독해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위기의 성격을 자본운동 내재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제국주의는 이미 낡은 것이 된다. 이 때문에 과거의
제국주의론으로는, 오늘의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설명할 수 없거나 최소한 어려우며, 그것은 특정 시기(만)의
전술․실천을 위한 일종의 방법론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 있다.
사실 제국주의(론)에 따른 현상은 러시아 이후의 역사에서
재등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두 번의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라진 것은 오히려
‘현실사회주의’다. 신식민지라는 개념에 대한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식민지는 분명 축소되었다. 오늘날 자본수출은 자본유치
경쟁과 함께 가고 있으며 이는 선진자본주의(제국주의)조차
예외가 아니다. 세계자본주의 질서는 WTO 체제, 블록화(EU, FTA
등), 국경을 넘는 자본간 제휴․합병, 초국적 자본의 등장
등으로 인해, 그것들이 비록 자본간 국가간 경쟁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경쟁만이 아니라 협력과 타협, 즉 조절이 가능한 듯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 때문에 자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특정 성격, 즉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금융세계화가 문제이며, 국가 또는 제국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 또는 제국주의의 특정 성격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이는 국가의 민주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역사상 가장
낮거나 심지어 사라졌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미국
제국주의의 제3세계 국가에 대한 군사적
개입․침공․침략일 뿐이라는 인식과 진단이 ‘좌파’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반제국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인가? 보다 직접적으로 왜
반제국주의를 제기하고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크게 세
측면의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는,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여전히 제국주의로 규정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과학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유효․타당한가라는 측면이다. 결론은 그렇다. 특히
자본주의가 지금 항상적․일반적 위기에 빠져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제국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도 바로
이것이다. 위에서 말한 제국주의의 여섯 가지 특징 또는 표지는
그 후의 세계에서 변화해왔으며, 변화했다. 문제는 그 변화가
과연 자본주의가 항상적․일반적 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일진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의 자본주의가
도달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지구화, 금융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극에 달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비록
유의해서 독해해야 하지만 지배계급에서조차 오늘의 세계를
이른바 ‘경제 전쟁’ 시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
전쟁’은 일상적으로는 끝없는 ‘군비 경쟁’을, 최종적으로는
‘진짜 전쟁’ 이외에는 달리 도달할 길이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둘째는, 반제국주의의 상대 개념 또는 지향이 무엇인가이다.
여기가 20세기 초의 반제국주의에 비해 오늘날의 반제국주의가
보다 확장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가장 반동적인 것으로는 스스로
제국주의 국가가 되자는 이데올로기이다. 예컨대 ‘국가경쟁력
강화’, ‘선진국 진입’, ‘2만 달러 시대’,
‘동북아중심국가건설’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면 자유주의 세력 및 노동자 민중진영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권국가’, ‘자주국가’,
‘민족자존’ 등은 비록 전술적 측면에서 수용할 바가 없지
않지만 그것들이 노자관계를 배제하거나 등한시한다면, 또는
시간적 선후 문제나 중심과 부차의 문제에서 노자관계를 뒤로
돌린다면 그 역시 오늘날의 반제국주의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반제국주의의 상대 개념 또는
지향은 ‘반자본’, ‘노자관계 지양’, ‘이행’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반제국주의는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셋째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구체적 대상과 실천 프로그램
문제이다. 여기에서도 20세기 초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오늘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구체성이 달라진다. 위에서 말한
반제국주의가 지향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반자본’, ‘노자관계
지양’, ‘이행’은, 자본이 ‘민족국가’ 단위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원칙적으로 일국(내)에서의 투쟁을
기본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바로 자본운동이
일국적 또는 민족국가 단위로 폐쇄되거나 완성되지 않는 것
때문에 성립한다는 점에서 ‘자본’에 대한 투쟁이 일국 내로
제한․제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대응, 타국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연대, 타국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경제․군사적 개입에 대한 반대, 자본(운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제도나 규약, 즉 WTO 체제, FTA, IMF,
OECD, G8, 투자협정, 경제특구 등에 대한 반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일국(내)에서의 투쟁과 이러한 투쟁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실천 프로그램도 그리 어렵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이 두 투쟁은 상당 부분 중복․중첩되어 있다. 다만
지리(공간)적․시간적으로 투쟁의 성격이나 대상이 보다
구체화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일국에서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은 물론 전통적인 임금인상, 단협쟁취, 노동조건개선,
노동조합활동보장 투쟁 등은 각국의 구체적 조건에 따른
구체성이 있기 마련이지만, WTO 각료회의, IMF 총회, G8 회담
등이 열리는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투쟁에의 참여나, 반전을
주제로 한 집회나 시위의 개최 등은 전지구적, 지역적 동시성을
띠고 있다.
끝으로 반제국주의, 즉 제국주의의 성립 또는 성격과 관련한
역사적․이론적 논쟁을 여기서 다 다루지는 않았다는 것을
일러둔다. 다만 레닌이 말한 제국주의론을
도그마․교조화할 때 발생하는 폐해에 대해서는 마땅히
경계해야 하며, ‘종속이론’적 접근이나, ‘민족주의적’ 접근
역시 노동계급으로서는 피해야 할 논리라는 것을 말해둔다. 또한
네그리와 하트가 제기하고 있는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지나치게 민족 또는 지리적 범주로
분석하는 것에 대한 경계로서는 취할 점이 없지 않지만,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만 지적해 둔다.
그리고 제국주의라 하더라도 그 내부의 자본 분파간 대립과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며 따라서 제국주의(총자본)이라는 개념이
현실 세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자본의 특정 분파 또는 주도
분파의 움직임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즉 실사구시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선에서 받아들이고자 한다.
한국에서의 반전운동과 반미운동에 대하여
한국의 ‘진보진영’의 경우 반전운동 자체의 필요성에 관한 한
대부분 인정하고 있으며 동의하고 있다. 다만 세계
‘진보진영’이 보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전운동의 위상과
성격, 주체 형성 문제, 대중투쟁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둘러싸고는 견해의 차이가 없지 않다. 여기서는 반전운동의
위상과 성격에 제한하여 보기로 하겠다.
그랬을 때 예컨대 반전운동이 부르주아 체제, 즉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는 속에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운동이 그 주된
목적이 되어야 하는 지, 아니면 그것이 반제국주의 운동의 일환,
즉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진전되어야
하는 지를 둘러싼 정치적 태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조선)반도 전체 차원에서 볼 때 반전운동이 민족주의에
근간을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국제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사이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곧 반전운동과 반미운동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연결되고 있다.
반미는 오늘의 세계,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그만큼 미국, 정확히는 미국 제국주의, 더
구체적으로는 부시 정권이 세계 및 특히 한국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및 한국사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실제로는 약화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역사적으로 축소되어왔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미국이 이토록 부각되고 있는 것은 멀리는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미국이 세계 유일의
군사강국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과 가까이는 9․11 사태
이후 부시 정권이 취하고 있는 행보 때문이다. 또한 한국사회와
관련해서는 ‘북 핵’ - 이영희 선생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의
제네바 합의 불이행’ -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세계 노동자 민중이 미국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마땅하다. 그런데 왜 반미가 문제인가? 아니
한국사회 노동자 민중진영 일부에서 반미를 왜 문제삼고 있는가?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반미를 국가 대
국가의 대립과 갈등으로 보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이럴 경우
미국에 반대하는 것은 국내 지배․피지배 관계, 즉
노자관계가 은폐․왜곡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 둘째 한국사회에 실체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반미주의자’, 즉 ‘민족주의 정치 세력’에 대한 반대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반미는 분명 위 첫째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노동자 민중에게
끼치는 폐해가 크다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셋째
반미는 결국 ‘친북’으로 귀결되거나 최소한 ‘북’에 대한
환상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의 반대이다. 이 모든 것의 귀결은
결국 노동계급에게 국가주의 또는 애국주의를 심어주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판단이 반미를 문제삼는 배경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반전운동은 되지만 반미운동은
안 된다는 정치적 태도를 갖는 세력을 보면,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은 물론 자유주의 세력이 그러하며, 나아가
좌파의 일부가 또한, 비록 지배계급 및 자유주의 세력의
논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배계급은, 특히 이른바 수구․보수 세력은,
사실상 반전운동 자체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반전운동 자체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경우
아래로부터의 불만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반전운동을
반미운동과 동일시시키면서 애둘러 반전운동 자체를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자유주의 세력은
바로 이 때문에 반전운동과 반미운동을 분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다. 이들은 반전운동을 반미운동이
아닌 반전평화운동으로 이끌고자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민족주의 세력 중 반미자주를 주장하는 세력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또한 수구․보수세력에 대한 정치적 대응을 해야
하는 필요 때문에 민족주의 세력과 사실상 정치적 연대를
끌어내고자 한다.
이와 달리 좌파의 일부는 반전운동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간 한 반미운동으로 전개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반미운동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즉 처음부터 반미운동을
문제삼음으로써 반전운동이 민족주의에 입각 한 반미운동으로
후퇴하지 않고 반제국주의 운동 또는 반자본주의 운동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열망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반전운동과 반미운동에 대해 과연 어떤
정치적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는가. 필자의 견해 역시
반전운동이 반제국주의 운동 또는 반자본주의 운동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반미운동을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정치적 결론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반미운동이 갖는 정치적 약점과 그것이 낳을 수 있는 오류에
대해 비판하거나 문제삼는 것과 현실운동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는 반미운동에 대해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판단 기준은
이런 것이다. 즉 반전운동 내부에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동의할
수 없는 세력이 있다고 할 때, 지금의 정세 조건에서, 그 속에
들어가서 운동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는 분리된 독자적인
운동을 할 것인가이다. 또 하나의 판단 기준은 한국에서의
반미운동은 현재 정세에서 과연 해악이 되는가를 묻는 일이다.
반미운동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정치적으로 그 한계와 오류를
낳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조건에서 반미운동은 오히려 미약하다. 최소한 지배계급이
주장하고 있는 “반미는 안 된다”는 전선을 돌파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한국사회에서 최소한 반미가 소수의 활동가들 사이에서의 문제를
넘어 대중적으로 제기될 수 있게 된 가장 최근의 계기는
‘미선이 효순의 죽음이다.’ 그런데 ‘미선이 효순이가 죽임을
당한 것’ 때문만으로 곧 한국사회에서 반미가 대중화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과거에도 그와 비슷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지만 그와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진실은 노자관계가 그 어느 시기보다
그 자체로 투명하게 격화되고 있으며, ‘민족주의 세력’ 내의
한 분파인 ‘친북’ 세력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있고, ‘북’에
대한 환상도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미는 오히려 이와
같은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정세에서 좌파 일부에서 비판하고 있는 반미운동이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정치 현실을 도외시한 관념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행동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야말로 반미를 바로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의 논리에 입각해 비판을 하고 있는 꼴이다.
모든 반미운동이 반드시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반미운동이 반드시 민족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열려 있다. 현실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반미운동이 반제국주의
운동 또는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될 가능성을
배제해야 할 필연적인 근거는 없다. 한국에서의 반미운동이,
분단 조건과 지난 50여 년 동안 이어 온 한미, 북미 관계의
역사를 고려할 때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반미운동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미국
제국주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및 그
연장에서 패권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침략 정책에 대한 거부와
반대의 의미가 상당 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곧 한(조선)반도
정세를 단순히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 즉 국제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반전운동
세력 내부에는 분명히 정치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반전평화와 반미자주를 주장하는 세력이 그와
같은 예가 된다. 반전평화와 반미자주와 같은 노선 또는
이데올로기는 하루아침에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은, 대중이든 지도부든, 행동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면서 변화를 꾀할 때
그들로부터 정치적 신뢰와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반전평화와 반미자주가 갖고 있는 정치적 약점과 한계를
대중들에게 폭로할 수 있는 기회, 즉 발언권을 비로소 획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반미에 포함되어 있는 비과학적 인식이나 탈계급적
내용을 문제삼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좀 더 반미가 진전되어야
한다. ‘민족주의 세력’이 끼치는 정치적 영향력은 “반미는 안
된다”라는 선동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미는
공통분모이되, 그 방향은 앞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반제국주의’ 나아가 ‘반자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밀어야 하며, 현실적으로는 반미가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전 투쟁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선동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인식은 투쟁과 함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상승 또는
후퇴하는 것이지 고정적이지 않다. 문제는 매 시기 슬로건이나
전술에서 개입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가 이며,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이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가 문제이다. 물론 이처럼 반미를
둘러싸고 나타나고 있는 고통과 고민은 노동계급 또는 변혁
세력이 역사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세력화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를 일시에, 무매개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의 복수는 있으되, 공짜는 없다.
반미에 개입하지 않고 반미의 한계와 약점을 선동할 수는 없는
일이며, 별개의 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다.
반전투쟁의 중요성
반미운동이 일정한 긍정성 또는 진보성을 담지할 수 있다면 그
것은 반미운동이 반제국주의 또는 반 자본주의 운동의 상징점
또는 집중점이 되도록 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를
위해 현 단계에서 전술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가 요구된다.
하나는 반미운동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미국 제국주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및 미국 제국주의
세력이 세계 패권 전략의 일환으로 자행하고 있는 침략 정책에
반대하는 부위를 강화하는 길이다. 이는 곧 반미운동을
민족주의적 시각을 넘어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반미운동을 한(조선)반도의 역사적
특수성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이 전개하고
있는 국제 반전운동의 일환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이, 특히 좌파 정치 세력이 반미운동에 적극 개입해야 하는
필요성도 바로 여기에서 주어진다.
지금 시기에 반전은 앞에서 반제와 반미를
정치적․계급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중요한 계기 또는
고리로 위치지어야 한다. 지난 미국 제국주의의 이라크 침략을
앞두고 벌어진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반전 투쟁은 세계
노동계급과 민중이 나아가야 할 정치적 방향과 투쟁 방향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미국 지배 언론이 반전 투쟁을 일컬어
‘또 하나의 슈퍼 파워’로 지목한 것은 괜한 너스레가
아니다.
1999년 시애틀 투쟁이 일어났을 당시에만 해도 그 투쟁이 이후
갖는 정치적 성격과 파급에 대해 쉽게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과성으로 그칠지, 하나의 이벤트에 머무르고 말지,
일국 내의 투쟁과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그야말로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시애틀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날로 강화되어 갔으며, 세계 노동자 민중 투쟁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경로로서 자리매김 되고 있다는 것을 그
후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하면 반전 투쟁은, 물론 최근의 반전 투쟁은 바로 시애틀
이후의 반세계화 투쟁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
실체가 너무도 명백하고 뚜렷하다. 또 다시 이라크 침략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 때의 반전 투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는 사실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실체와 전망이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지난 반전 투쟁에 비해 훨씬
역동적․폭발적으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반전 투쟁에도 정치적․계급적 약점이 있다. 예컨대
반전 투쟁이 앞에서 우려한 바와 같은 내용의 반미 투쟁으로
흐르거나, 반미로까지 나아가지도 못한 채 평화운동에서 그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반전 투쟁을 노동계급이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약점은 그대로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는 바로 노동계급이 지금 시기 반전 투쟁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정치적․계급적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한(조선)반도의 현실을 대입하면 반전 투쟁이 갖는 의미는
더욱 증폭된다. 미국이 전 세계 반전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침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의 하나는 바로 이라크
국내 노동계급의 역량이 거의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한(조선)반도에서 전쟁 위협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변수는
바로 남한 노동계급과 민중의 정치적 역량 및 투쟁 강도이다.
물론 미국의 세계 전략 및 국제정치 역학과 북의 태도가 훨씬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에도 남한 노동계급이
갖는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최근 전개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할 때 ‘북 핵’을 매개로 또는 ‘북
핵’이 아니더라도 일본의 재무장 및 노무현 정권이 말하고 있는
국방비 증액(군비 강화) 계획을 볼 때 반전 투쟁이 갖는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반전 투쟁이야말로
오늘의 남한 노동계급이 부여잡아야 할 긴급한 정치․계급
투쟁이다. 반전 투쟁 좌우로 반제, 반미 투쟁을 결합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연대를 형성해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무현 정권과의 전선을 설치해 나간다면 정세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며, 그럴 경우 현안 투쟁을 벌이는 데에
있어서도 고지를 점령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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