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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번 : [93호/알림-소식] KAL858기 실종사건 관련자료
글쓴이: 디지털 말외 등록: 2003-12-24 00:00:00 조회: 1670

편집자 주 : 87년 KAL기 폭파사건과 관련한 의혹이 최근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물론 사건 당시부터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되어 왔으나, ‘당사자’인 김현희의 잠적으로 번지고 있는 논란과 관
련한 자료입니다. 디지털 말 12월호(2003년 12월, 제210호)에 실린 글과,

KAL858기 실종사건 관련자료
한겨레21 제487호
(2003년 12월 3일) [특별기고]에 실린 두 글을 싣습니다.


“‘꽃을 든 소녀’는 김현희가 아니었다”
16주년 맞은 KAL858기 실종사건의 전말과 진실

정지환 디지털말 편집위원·『시민의 신문』 취재부장



1987년 11월 29일.
김대중 평민당 대통령 후보가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유세를 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승무원과 승객 1백15명을 태운 바그다드발 서울행 KAL 858기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와 방콕사이에 있는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바레인을 탈출하려던 폭파범 용의자 중 한 명인 김현희가 생포되었으며, 대선 하루 전인 12월 15일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됐다.
너무나 절묘한(?) 시점에 이뤄진 압송작전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다음 날 모든 신문은 큼지막한 활자로 ‘노태우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대다수 승객이 중동 근로자였던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뉴스가 처음 알려졌을 때만 해도 한반도와 한국민은 일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건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대한민국 당국은 가족의 시신만이라도 찾아달라는 유가족들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무성의한 자세로 일관하다 비행기 잔해와 블랙박스 추적을 열흘 만에 중단하고 만다.
그리고 수사를 주도한 안기부는 이듬해인 1988년 1월 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김정일이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게 친필지령을 내려 KAL858기를 폭파시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2년 4개월 만인 1990년 3월 대법원이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살인 등 6개 항의 무시무시한 죄목을 적용해 사형선고를 확정했지만, 그것은 곧바로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현희가 사형선고 한 달 만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은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제목의 수기를 써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으며, 한 남성과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KAL858기 실종사건’의 악몽은 그렇게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돼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주인공인 김현희는 어떤 인물인가.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KAL858기 실종사건의 악몽
김현희(일본명 하치야 마유미)는 1962년 1월 27일 평양에서 북한 외교관 김원석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안기부가 밝힌 김원석의 직책은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 김현희의 당시 직책은 북한 노동당 조사부 직원으로, 김옥화(북한), 마유미(일본), 백취혜(중국) 등의 가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발표됐다.
한편 김현희는 인민학교 시절 「딸의 심정」 등 두 편의 영화에 아역배우로 출연했으며, 평양 중신중 1학년 때인 1972년 11월 2일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 남한측 부대표 장기영(당시 『한국일보』 사장, 전 경제부총리)에게 화환을 증정한 화동(花童)이었다고 발표됐다.
그러나 안기부 수사발표 당시부터 김현희의 인적사항은 곧바로 진위 논란에 빠지고 말았다. 우선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 주재 외교관이라고 했지만,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이 곧바로 확인한 결과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도 앙골라에는 북한 무역대표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산대표라는 직책도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의혹이 제기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잇따라 나온 이러한 의혹 제기는 정부 당국과 국내 언론에 의해 철저히 묵살당했다.
그렇다면 KAL858기 실종사건 희생자 가족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가족들은 현재까지도 ‘유족(遺族)’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실종된 가족들의 시신 하나, 유품 하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파’의 물증이 없으니 ‘실종’된 것이고, 가족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족’이라는 말은 쓸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한 맺힌 주장이다.
수지김 사건에서도 그 가족들이 힘없는 서민이었기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했듯이, 이 사건의 희생자들도 공교롭게 승무원을 제외하곤 대다수가 중동에서 근무하다 귀국하던 노동자들이었다. 그 동안 이들 희생자 가족들의 억장은 무너졌지만, 국가안보와 반공이념이라는 절대적 명제가 지배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침묵을 강요당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억눌려 있던 희생자 가족들의 단말마적 목소리가 그나마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우선 지난 14년 동안 진상을 추적해온 전 감사원 직원 현준희씨가 그동안 축적한 각종 의혹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그해 11월 23일 천주교인권위원회와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KAL858기 실종사건에 대한 7대 의혹’을 제기하면서 정부와 국회 차원의 재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소리가 그동안 세상과 단절된 이유는 무엇인가. 희생자 가족들은 안기부와 그 후신인 국정원의 방해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가족들은 당시 검찰의 조사로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한 수지김 사건을 보면서 더욱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게다가 그해 가을 김현희라는 인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내외저널』과 『월간조선』 간에 벌어진 지상공방을 지켜보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김현희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은 수없이 많지만, 여기선 2001년 『내외저널』 10월호와 『월간조선』 11월호에 잇따라 보도된 기사에서 핵심이 된 ‘김현희의 귀 모양을 둘러싼 논쟁’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주연배우 김현희
1988년 1월 15일 안기부 강당.
안기부는 1백여 명이 넘는 국내외 언론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KAL858기 실종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1987년 11월 29일 사건이 발생한 지 47일 만에 열린 기자회견에는 김현희도 직접 참석했다. 이날 안기부는 ‘승무원과 근로자 등 1백15명의 민간인이 타고 있던 비행기를 폭파시킨 테러범’ 김현희가 ‘북한 출신 공작원’이 분명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결정적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문을 전면에 걸쳐 소개한 1988년 1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에도 이 자료가 큼지막하게 소개돼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 장의 사진이었다.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 문구가 붙어 있었다.
“김현희는 중학교 1학년 때인 지난 72년 11월 2일 남북조절위 대표단의 평양 방문 때 당시 장기영 대표에게 화환을 증정했다.”
한편 기자회견 막바지에 안기부 수사관과 기자들의 일문일답이 진행됐다. 첫 질문은 “김현희가 북괴공작원이라는 심증을 굳힌 근거는 무엇인가”였다. 이에 대해 안기부 수사관은 “김현희의 진술 내용이 방증 수사를 통해 수집한 자료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여기서 ‘안기부가 방증 수사를 통해 수집한 자료’란 ‘김현희 소녀시절 사진’을 가리킨다. 그것은 곧바로 이어진 안기부 직원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도 그대로 확인됐다.
“지난 72년 11월 2일 우리측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김현희가 대표단의 차에서 두 번째 내리는 사람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고 진술했는데, 수사과정에서 장기영 대표(작고)에게 꽃다발을 걸어주고 있는 김의 사진이 확인돼 김이 북괴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당시 안기부가 공개한 이 한 장의 사진은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김현희가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이 분명하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아가 수사결과 발표 바로 다음 날인 1월 16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안기부 직원과의 인터뷰 기사는 그 ‘믿음’을 아예 ‘확신’으로 바꾸도록 만들었다. 당시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김현희가 1972년 남북조절위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사실은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그러자 안기부 직원은 이렇게 답했다.
“김현희가 먼저 말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당연했다.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가 전적으로 김현희의 자백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기부가 제시한 사진 속의 화동이 자신이라고 밝힌 장본인은 김현희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안기부 직원이 심문을 하면서 “사진 속의 인물과 닮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하자 김현희는 자신의 귀와 사진 속 소녀의 귀를 번갈아 가리키며 “내 귀와 사진의 귀가 똑같지 않느냐”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이로써 사건 발생 초기에 제기됐던 각종 의혹은 해소된 것처럼 보였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김현희 자백에 전적으로 의존한 안기부 발표 내용은 각종 의혹 제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전격적으로 공개된 이 한 장의 사진은 “김현희가 북의 공작원임을 증명한 가장 극적인 물증”(<월간조선> 1989년 6월호에서 조갑제 기자가 쓴 표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극적인 물증’은 도리어 김현희의 진위(眞僞) 논란만 불러오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일보 기자와 인터뷰했던 안기부 직원이 상식적 관찰력만으로도 이미 발견했듯이, 무엇보다 먼저 김현희의 ‘칼귀’(▽)와 사진 속 화동의 ‘둥근귀’(○)는 누가 보더라도 전혀 달랐던 것이다.

“김현희가 맞다고 99% 확신한다”
문제는 안기부 직원의 상식적 관찰력조차 따라가지 못한 국내 언론에게 있었다. ‘칼귀’의 김현희 기자회견 사진을 1면에, ‘둥근귀’의 화동 사진을 3면에 버젓이 배치하고도 누구 하나 그 차이를 지적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과 관련된 것이라면 객관적 사실조차 마음대로 거론할 수 없었던 당시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도 언론이 전해 주는 안기부 발표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안데르센 동화집』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연상시키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풍경’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대다수 한국인은 속옷만 입은 벌거숭이 임금을 보고도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칭송했던 어리석은 백성이었고, 그들을 보기 좋게 속여먹은 안기부와 언론사는 ‘사기꾼 재단사’과 ‘간신배 신하들’인 셈이었다.
한국 언론의 추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현희의 어린 시절 모습이 분명하다며 KBS가 공개하고 대다수 언론이 인용해 보도한 또 다른 화동 사진이 곧바로 오류로 밝혀져 도리어 망신살만 뻗친 것이다. 언론의 ‘오버’는 안기부가 공개한 기존 사진에 대한 신빙성마저 뒤흔들었고, 국민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있었으니, 하기하라 료(萩原遼)라는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일본 공산당이 발행하는 사진잡지 『그라프 곤니찌와』 3월호에 ‘김현희인 듯한 소녀’라는 제목을 붙인 한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안기부가 공개한 사진이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장면’인 반면 하기하라가 공개한 사진은 ‘꽃다발을 전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하기하라는 친절하게 ‘김현희인 듯한 소녀’의 머리 위에 화살표까지 그려 넣었다.
국내 언론이 이번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1988년 3월 5일자 <조선일보>는 “이 사진은 1972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의 평양특파원으로 있던 하기하라씨가 한국 대표단의 북한 도착 광경을 취재하던 중 평양 교외의 헬리포트에서 잡은 것”이라고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하기하라 발언까지 자세히 소개했다.
“하기하라씨는 ‘한국 대표단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러 가던 소녀 중의 하나가 단정한 얼굴 모습, 유난히 기품이 있어 보이는 분위기로 눈길을 끌었는데, 지금 보니 텔레비전 회견 중의 김현희를 그대로 빼닮았다’고 말하고 ‘99% 김으로 확신한다’고 동일 인물임을 증언했다.”
이번 기회에 진위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는 마음이 너무 앞선 것일까. 하기하라가 ‘김현희인 듯한 소녀’ 혹은 ‘99% 확신한다’(즉100% 보장은 못한다는 말이었다)는 다소 조심스런 표현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안기부의 보호를 받고 있던 김현희가 직접 나섰다.
안기부 직원을 인터뷰한 3월 6일자 서울신문에 따르면, 김현희는 “일본 기자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소녀가 16년 전 내 모습이 확실하다”고 말했으며 “어떻게 이 사진을 구했느냐”고 반문하면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기하라 기자 ‘오류’를 인정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기부 직원이 “사진 속 소녀의 뺨 부분이 지금의 김현희씨보다 더 통통하다”면서 얼굴 생김새가 조금 다른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답변했다.
“중학교 때는 제가 살이 올라 뺨이 통통했어요. 조금 더 자세히 보세요. 사진 속 여학생의 이마, 눈썹, 눈두덩, 귀 등의 모습과 윤곽이 지금의 나와 똑 같지 않아요? 당시 나는 단발머리를 오른쪽으로 모아 머리핀을 꽂고 다녔습니다.”
당사자가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증언하는 데야 누가 믿지 않겠는가. 더욱이 김현희는 1년여가 흐른 뒤인 1989년 5월 안기부의 특별한 배려로 닷새 동안 진행된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저의 앞에 섰던 아이 하고는 버스 안에서 바로 옆에 앉아 이야기도 하고 해서 (하기하라가 제시한) 이 사진을 보고는 단박에 (나라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이번에야말로 사진 진위 논란은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기하라가 “99% 김현희가 확실하다”고 강조했고, 김현희도 자신이 분명하다고 두 차례나 확인해 주었던 사진 속의 여중생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여인이 나타나면서 진실게임은 제2라운드를 기약해야 했다.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여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사진의 여학생은 김현희가 아니라 자신이라며 같은 현장에서 하기하라와 반대 방향에서 찍은 사진까지 제시한 뒤 이렇게 증언했다.(물론 남한 언론이 그의 증언을 무시했기 때문에 당시의 국민들은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주장이다.)
“이 사진은 그 당시 우리가 서울의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며, 나는 그때 두 번째 줄에 있었습니다. 2번이 저이고 내 앞에 선 3번은 남금석이라는 아이예요. 헬리콥터를 타고 온 남한 대표단에게 헌화하려고 기다리던 학생들은 금성, 창전, 종로여자중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금성중학이었습니다. 남금석과 그 뒤편의 4번은 김성희, 5번은 김정애입니다. 이 소녀들은 모두 제 급우들이에요. 그리고 1번은 박옥심이고 창전중학교 학생입니다.”
남북의 두 여인이 16년 전 사진을 놓고 서로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를 구해야 할 정도로 난감한 사태에 직면하자 일본의 한 방송사에서는 문제의 화동 사진과 두 여인의 모습을 TV 화면에 동시에 소개하고 시청자가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까지 마련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근거 때문에 남한의 김현희보다 북한의 정희선이 화동에 가깝다는 여론이 일본에서 많았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근거’란 두 사람의 전혀 다른 귀 모양이거니와, 귀 모양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문처럼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법의학계의 통설이다. 그래서 형사사건을 수사할 때도 귀 모양은 문제 해결의 주요 단서가 되고 있다.
그런데 국내 언론은 또다시 객관적 보도를 포기했다. “일본 TV를 통해 이 장면을 본 많은 사람들은 꽃다발을 든 소녀가 정 여인과 그다지 닮지 않고 오히려 김현희와 더 닮았다”(<서울신문> 1988년 3월 17일자)고 전혀 다르게 보도한 것이다. 조갑제 기자도 1989년 <월간조선> 6월호에서 “북한은 이 증거(하기하라의 사진을 말함)가 아팠던지 엉뚱한 여자를 내세워 ‘꽃다발을 준 것은 나다’고 주장하게 하였다”고 강조했다.

코너 몰린 『월간조선』의 의도적 실수?
그러나 정작 아파했던 것은 북한이 아니라 하기하라였다. 그는 1989년 9월 발간한 『서울과 평양』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는데, “나는 ‘김현희인 듯한 소녀’라고 말했을 뿐 단정은 하지 않았다”고 한발 빼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 ‘김현희인 듯한 소녀’의 실제 주인공이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김현희의 특징은 ‘가미솔(면도날)’처럼 귀밑이 얇다”는 그의 고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누가 봐도 다르게 보이는 귀 모양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곤혹스러워했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하기하라는 정희선이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전달한 소녀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근거는 두 가지였다.
첫째, “조선(북한을 말함)의 관례”는 “서열을 유별나게 신경 쓰는”데 정희선이 남한 대표단을 기다리고 있던 화동 중에서 두 번째 순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화동들이 두 줄이 아니라 한 줄로 서 있는 새로운 사진을 제시했다. 하기하라는 이 사진에서 네 번째 소녀가 정희선이라고 전제(물론 그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한 뒤 “네 번째에 있던 소녀가 어떻게 두 번째로 꽃다발을 전달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박했다.
둘째, 정희선이 총련계 신문인 『조선신보』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김현희’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마유미’라고 부른 것은 “김현희가 북쪽 사람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현희라는 이름을 공표하는 순간 모든 것이 들통 날 것이 두려워 그랬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주장은 조갑제 기자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주장은 당장 반론에 직면해야 했다. 우선 하기하라는 <화동사진 3>에 과연 김현희가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1990년 2월 한국에서 번역, 발간된 『서울과 평양』을 기자가 직접 구해 정독한 결과에 따르면, 그는 “이 한 무리의 소녀 중에 김현희가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만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선신보』 1988년 3월 25일자에 ‘김현희’라는 표현이 무려 13회나 등장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주장도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최근에 발생했다. <월간조선>은 2001년 11월호를 통해 하기하라가 화동사진3에서 세 번째에 서 있는 화동을 김현희로 주장한 것처럼 보도했다. 일본어 원판에는 그런 대목이 있는지 모르지만,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한국어판에서 하기하라는 그런 명시적 표현을 절대 쓰지 않았다.(또다시 사실이 뒤집힐 경우 기자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명시적 표현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진상규명은 이제야 시작됐다
월간조선의 실수와 ‘오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동사진 2>(1988년 3월 공개)와 <화동사진 3>(1989년 9월 공개)의 공개 순서 시점을 바꿔버린 것이다. 월간조선은 1988년 3월 정희선이 『조선신보』와 회견을 갖는 등 공방이 가열되자 하기하라 기자가 반박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 <화동사진 3>이며, 코너에 몰린 북한이 새롭게 내놓은 것이 <화동사진 2>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화동사진 2>에 공교롭게도 김현희의 모습(<월간조선>은 <화동사진 2>의 4번이 김현희라고 주장했다)이 등장해 제 무덤을 판 꼴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기자가 앞에서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 것처럼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화동사진3의 세 번째 소녀가 김현희라는 <월간조선>의 주장을 일단 수용한다고 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서열을 유별나게 신경 쓰는 북한의 관례” 운운하며 정희선을 공박했던 하기하라의 주장과 정면으로 이율배반이 되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은 “세 번째에 있던 소녀가 어떻게 두 번째로 꽃다발을 전달할 수 있었겠느냐”는 하기하라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우리가 결코 흔들림 없는 진실이라고 믿어 왔고, 믿고 싶었던 안기부의 KAL858기 실종사건 수사결과는 사실 이렇게 처음부터 허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 천주교 신부 2백2인의 KAL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주도한 신성국 신부(청주교구 안중근학교 교장)의 발언은 시사적이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1차 자료인 수사·재판기록조차 아직도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상식과 정설이라고 믿어왔던 이 사건의 유일한 근거가 사실은 김현희의 자백뿐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수사·재판기록이 공개되면 김현희가 가짜로 밝혀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KAL858기 실종사건의 진상규명은 이제야 시작됐을 뿐이다.”
월간조선 2001년 11월호 기사의 제목처럼 “상식의 눈으로 보면 진실이 보인다.”




편집자 주 : 아래 글은 한겨레21 제487호(2003년 12월 3일) [특별기고]에 실린 글입니다.

김현희는 왜 김신조처럼 못 사는가

현준희 | 전 감사원 직원



80년대부터 KAL기 사건을 추적해 온 현준희씨가 일각의 조작의혹 반박논리를 재반박한다
주검 없는 살인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정황이 그럴듯하고 용의자의 자백이 있더라도 주검이 없는 한 범죄구성 요건이 안 된다. 그런데 16년 전, 13대 대통령 선거(노태우 후보 당선)를 18일 앞둔 1987년 11월29일 115명이 탄 여객기가 폭파되었는데도 주검 한 구, 유품 한점 없는 ‘엽기적’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KAL기 폭파사건’이다.

80년대, 일본에서 조작의혹을 접하다
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에선 이 사건을 ‘김정일의 친필지령에 따라 88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KAL 858기를 폭파’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사실로 밝혀진 것은 3가지뿐이다. 첫째, 순항 중인 KAL기가 갑자기 사라진 것. 둘째, 일본인 여권을 가진 두 사람이 KAL 858기가 실종되기 전 내린 것. 셋째, 바레인 공항에서 두 사람이 음독자살을 기도해 한명은 즉사하고, 한 명은 미수에 그친 것. 이 세 가지 말고는 확실하게 밝혀진 게 없다. 안기부는 오직 김현희의 자백만으로 이 사건을 북한의 테러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자백은 곧바로 거짓말로 드러났고, 이로 인해 과연 그녀가 북한 출신인지, 본명이 김현희인지도 알 수 없게 됐다.
그때 나는 감사원 현직 공무원으로 일본 회계검사원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KAL기가 사라진 하루 전날(11월28일) 일본인 승객 47명이 탄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속 여객기가 인도양 모리셔스섬 북방해역에 추락했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두 대형 사건에 당시 일본 언론은 사고 해역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도양에 추락한 비행기에서는 주검은 물론 비행기 잔해, 승객 유품이 엄청나게 떠올랐는데, KAL기가 사라졌다는 버마 안다만 해역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세계 여객기 사고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인데다 대선 막바지에 발생한 사건인 만큼 일본에선 조작 의혹이 자연스럽게 제기됐다. 당시만 해도 국내 언론 상황은 검열이 매우 심해 이러한 의혹 보도는 철저히 차단됐지만, 일본에서 이런 보도를 자유롭게 접하고 의문을 품게 된 나는 1988년 1월 15일 안기부 발표한 수사내용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그 중에서도 1972년 11월 2일 남북조절위원회 남쪽대표로 평양을 방문한 장기영 부대표의 사진에 등장하는 ‘화동’ 김현희의 모습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서울로 압송된 뒤 카메라 앞에 선 김현희의 귀는 역삼각형 칼귀. 반면 사진 속 화동의 귀는 귓불이 도톰한 일반형이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세모와 동그라미의 차이다. 귀 모양은 지문과 같이 만인부동(萬人不同), 종생불변(終生不變)으로 신원확인에 결정적 단서가 된다. 따라서 김현희는 범인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나쁜 놈들…” 하고 욕이 나왔다.
수사 발표 뒤 김현희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1987년 대선 하루 전날인 12월 14일 입에 자해방지용 테이프를 물고 손목붕대에 묶여 김포공항에 압송된 김현희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잔혹한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했고, 그런 ‘퍼포먼스’는 노태우 후보의 승리에 일등공신이 됐다. 안기부로 끌려간 그날부터 수사 발표 때까지 한 달간 김현희의 근황에 관한 공식 발표는 일절 없었음에도 ‘온몸에 문신’ ‘단련된 허벅지 근육’ ‘어깨에 칼자국’ ‘주먹에 굳은살’ 등의 언론보도가 난무했다.

KAL기 사건 명분 삼은 김정일 답방 반대
그런데 정작 수사 발표장 TV 카메라 앞에는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가 아닌 청초한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전국에 생방송된 깜짝쇼에 모두들 넋이 나갔다. 그녀의 ‘눈물 인터뷰’에 “맞아, 저런 여성에게 폭파지령을 내린 김정일이 죽일 놈이지 김현희가 무슨 죄야…”라며 여론은 동정론으로 급속히 돌아섰다. 의혹은 ‘물 건너간 얘기’가 되고 말았다.
눈물의 인터뷰 이후 ‘김현희 스타 만들기’는 전국적 열풍이 됐다. 전국 52개 방송사와 30여개 일간지와 잡지들이 김현희 체포 이후 두 달 동안 10만 건의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 내용도 코미디 수준이다. ‘코를 높였다’에서 ‘유방이 크고 검은 편이다’ ‘히프가 펑퍼짐하다’ ‘온몸에 잔털이 많다’ 등. 여기에 ‘처녀다’ ‘아니다’까지 가세해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직접 본 사람은 없다. 이런 선정적 기사에 빠질수록 의혹은 멀어졌다.
나는 1991년 국비로 2년간 다시 일본에 유학할 기회가 생겼다. 1987년 사건 발생 이후 4년 동안 국내에는 KAL기 의혹 자료라곤 하나 없었지만, 일본에는 사건의 동기 분석부터 비행기 폭파 여부에 관한 엄청난 자료가 있었다. 창피했다. 정작 사건 당사국인 한국의 언론은 김현희의 미모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일본에서는 집요하게 진상을 추적하고 있었으니(일본은 올 7월에도 김현희 특집프로를 방영했다)…. 그 중에서도 김현희의 행적을 직접 현지 취재한 노다 미네오 선생에게 감복했다. 일본에서 나는 100가지가 넘는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새 천년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6·15 공동선언이 있었다. 이젠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차례. 그러나 국내 보수세력은 KAL기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2001년 2월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김정일의 지령에 관한 물증이 없으니 사건을 잠시 덮어두자’는 발언을 하자 우익 보수진영에선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세계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사라예보 방문 오스트리아 황태자 저격사건’이 떠올랐다.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서울을 답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불길한 생각에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자 10년 가까이 모은 자료를 풀어 집필을 시작했다. ‘북한이 했다’는, ‘폭파됐다’는 증거가 없는 실종사건일 뿐이라고.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나는 KAL858기 가족회와 김현희 KAL기사건 대책위원회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 언론사, 시민단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을 뛰어다녔다. 모두들 엄청난 사건이라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으나 확보한 증거들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올 들어 이 사건의 의혹을 제기한 서현우씨의 소설 <배후>와 일본 노다 선생의 추적기를 번역한 <김현희는 가짜다>라는 책이 나온 이후 이 사건에 대한 관심과 진상 규명의 필요성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발생 초기부터 이 사건을 추적해온 사람으로서 만감이 교차한다.

‘이은혜=다구치 야에코’ 확인 안 됐다
이 사건을 추적하면서 내내 가증스러운 것은 이제까지 안기부 대북 관련 부서에서는 김정일의 친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이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을 밝히면 정부의 거짓이 드러나고 보수우익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 두려워 쉬쉬하며 ‘벌거숭이 임금님’ 같은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발바닥이 가려운데 신바닥만 긁는 것을 격화소양(隔靴搔瘍)이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통일이란 상대방이 있는데 아무 증거 없이 상대방쪽 지도자를 살인범으로 몰고 서울에 오면 잡아 죽인다고 살기등등한데 이건 통일을 하지 말자는 얘기와 무엇이 다른가. 이런 진짜 걸림돌을 놔두고 남북회담이니, 무슨 세미나니 엉뚱한 곳만 긁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혹자는 나의 주장에 대해 “너 친북 주사파 아니야”라고 힐난하지만 나는 주사파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평범한 중생이다. 어디까지나 사실과 상식의 차원일 뿐, 행여 사실이 아니고 상식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라도 공개 토론할 용의가 있다.
5공 시절 <조선일보>와 안기부의 ‘끈적끈적한’ 관계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원죄’를 안고 있는 <조선일보>는 2003년 11월 24일치 ‘만물상’이란 코너에서 음모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싣는다. “김현희가 만일 남쪽 정보기관에서 키운 공작원이었다면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된 그녀를 안다는 사람이 왜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사건만 추적해온 나의 눈에는 바로 교활함이 드러난다.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김현희가 떳떳하다면 왜 김신조 등 다른 귀순 전향 간첩처럼 일반인과 어울려 살지 못할까?” KAL기 피해자 가족들이 해칠까봐?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사건 초기부터 김현희가 범인이 아니라고 보고 그녀의 양심선언을 요구하고 있다. 하여튼 김현희는 1997년 결혼 뒤 6년째 종적을 감추었으며 한국과 일본의 집요한 언론추적에도 불구하고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과연 그녀의 개인 의지로 가능한 일일까?
안기부를 옹호하는 <조선일보>의 단골 메뉴는 또 있다. “김현희의 진술로 그녀에게 일본말을 가르쳤던 ‘이은혜’가 1978년 니가타에서 납치된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북한은 지난해 다구치씨의 납치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까지 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납치라는 용서받지 못할 엉뚱한 짓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은혜=다구치’라는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설명”이라고 2002년 10월 1일 최성홍 외교부 장관이 국회에서 답변한 바 있다.

‘그냥 덮기를’ 바라는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또 “아무리 사실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적 연결고리의 일부가 사라졌다 해도,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까지 자기 생각대로 상상의 게임을 펼쳐놓는 것은 신중치 못한 일이다”라고 보도했다.
마침내 ‘그냥 덮어놓았으면 하는’ 속내가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논리적 연결고리의 일부가 사라졌다 해도’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안기부를 비호하지만, 귀 모양이 다른데 김현희를 범인으로 볼 수 있는가. 범인이 다르면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뒤집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115명이나 죽었다는데 왜 주검 한 구, 잔해 한점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을 계속 추적함이 마땅하다.
퓰리처상을 제정한 미국의 조지프 퓰리처는 “보도의 정확성은 여인의 정조와 같다”고 했다. 나는 적어도 이 KAL기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는 정조를 잃었다고 본다.
이 사건은 1988년 유엔에서도 증거 부족으로 대북규탄 결의안이 채택되지 못했고, ‘영악한’ 미국도 최근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 사유에서 KAL기 사건을 슬그머니 빼고 케케묵은 요도호 사건(1970년 일본 적군파가 하이재킹을 한 뒤 평양에 피신)으로 바꿔 넣었다.
나는 이제까지 안기부 수사의 문제점을 추적하면서 진상이 밝혀질 경우 그 파장과 우리나라가 세계적 망신을 살 거라는 점에서 곤혹스럽다. 이번 이라크 파병에서도 보듯 걸핏하면 국익 논쟁에 말려드는데, 나는 진상을 밝히는 것이 분명 인류와 한국의 이익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추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적 망신거리라는 점 때문에 국익을 위해 그만 덮어두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자. 과거 금강산댐 사기 성금모금, 수지김 사건이 밝혀졌어도 어디 나라가 망했는가, 그리고 안기부가 없어졌는가. 지나고 보니 진실이 밝혀지는 게 역사의 발전이고 국익이었음을 수긍할 것이다. “국익은 악인의 마지막 도피처”라는 서양속담같이 이 사건이 밝혀짐으로써 입을 손해는 한줌의 5, 6공 잔재와 왜곡언론의 사익뿐이다.

KAL기 진실규명이 주는 국익들
반면 이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통일 문제만 봐도 그렇다. 첫째,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이 사건으로 인해 좌절됐다. 당시 <월간조선>에선 서울에 오면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앙앙불락이었다. 정말 친필지령이 사실이라면 나부터 광화문 네거리에서 답방 저지 투쟁을 벌이겠다. 김 위원장의 답방은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다.
둘째, 북한이 테러지원국이 됐다. 1988년 1월 정부가 KAL기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 요청해 벌써 15년째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혀 있다. 테러국이 되면 경제봉쇄 조처를 당하고, 대외 원조나 투자가 끊긴다. 오늘날 북한이 못사는 이유도 테러국으로 찍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국의 도움을 못 받으니 우리가 홀로 도와야 하는데 그 때문에 ‘퍼주기 논쟁’까지 벌어졌다. 지나고 보니 자업자득한 바보짓임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최근 정부는 미국에게 북한을 테러국에서 빼주도록 간청하지만 정작 그 원인인 KAL기 사건의 진상에 대해선 나몰라라 하고 있다.
셋째, 한반도의 전쟁 위험이다. 부시 정권 들어 전쟁 원인의 1순위는 단연 테러다. 미국은 심심하면 북한을 예고 없이 폭격하겠다고 을러댄다. 그 말 한마디면 국내 주가는 폭락하고 경제는 엉망이 된다. 미국의 폭격은 말릴 수도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유사시 한반도는 불바다가 된다. 타국의 말 한마디로 나라가 흔들리고, 자국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에 휘말린다면 이건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이 비극의 씨앗도 KAL기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전쟁의 뇌관, 즉 KAL기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미국에 “북한의 테러 증거가 없었다”고 화끈히 밝히는 것이다. 증거가 없다는데 미국인들 어떻게 하겠는가.
부질없는 일이 돼버렸지만 88올림픽이 남북한 공동 개최로 한 국기 아래, 한 국가 대표선수로 치러지고 2년 전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성사됐다면, 통일은 상당히 진척됐을 것이다.
진상 규명을 하기에 부끄럽기도 하고 보수우익의 반발로 정부 스스로 나서기도 곤란한 사건이 KAL기 사건이다. 그러나 창피는 순간이요, 민족은 영원하다.
나는 단언한다. KAL기 사건 해결 없이 통일 없고, 통일 없이 미래 없다고….
따라서 하루빨리 KAL기 사건을 재조사해 통일의 걸림돌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115명의 실종자를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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