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제106호 이전)

현장에서 미래를 > 권두언 > 글읽기

1621번 : [93호/권두언] 역치를 생각한다: 2004년을 어떻게 열 것인가
글쓴이: 이성우 등록: 2003-12-24 00:00:00 조회: 1884

역치를 생각한다: 2004년을 어떻게 열 것인가


이 성 우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위원장






노무현 정권 출범 첫해부터 노동자․민중은 70~80년대 군부독재시대를 떠올릴 정도로 분신으로 시작하여 자결과 투신으로 이어지는 한해를 보냈다. 국민소득 2만불을 외치는 시대에 이게 웬 시대착오적인 얘기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철이 없거나 한국사회에서 제법 인간답게 살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상위 10% 이내쯤 드는 소득수준을 구가하는 사람이겠다. 김대중 정권이 IMF를 빌미로 대량 정리해고와 실업을 동반하는 파괴적 구조조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삶의 토대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면,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민중이 이 땅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백주대낮에 젊은 애비가 어린 자식들을 산채로 한강에 던져버렸다. 인천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비정한 어미가 세 아이들과 함께 11층에서 투신자살했다. 부부와 딸 셋, 아들 일가족 여섯 명이 유서를 써놓고 여관에서 자살했다. 가족 동반 자살이 줄을 잇고, 320만 명에 달하는 실질적 빈곤층에다가, 신용불량자는 400만 명에 육박하고,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57%에 이르고 있는 사회, 한 해에 자살로 숨지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많은 나라, 이것이 대한민국의 2003년도 자화상이다. 노동자․민중의 태반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고 비현실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면 반성할 때도 되었건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에너지, 철도, 통신 등 공공부문 사유화 정책은 강행되어,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보편적 서비스를 축소하고 알짜배기 우량기업을 초국적 자본에 송두리째 넘겨버리고 있다. 의료, 교육, 주택 등 사회복지가 전무하다시피 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한 가운데, 하위 20%의 월평균 소득이 99만 원인데 상위 20%의 월평균 소득은 529만 원으로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사회 불평등의 척도라고 하는 지니계수는 IMF 이전의 0.283-0.291에서 IMF 이후 0.317-0.320으로 수직 상승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연금법 개악안을 만들고 강행하려 한다.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의 합법화로 인하여 노동시장은 세계 첫째라는 미국에 견줄만큼 유연화되었다고 하는데 비정규직은 확대일로에 있고 그 차별은 더욱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듯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은 아랑곳없이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한 켠에서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과 투자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초국적 자본의 세계화 공세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노무현 정권은 경제자유구역 시행령 통과와 노동운동에 대한 폭압적 탄압을 통하여 이에 호응하고 있으며, 이라크 파병 결정과 위도 핵 폐기장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대미종속적이고 반민중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언필칭 ‘참여정부’라는 구호는 일찌감치 수사로만 끝나고 자본만을 위한 개혁이 판치는 노무현 정권 아래, 노사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최소화, 유연하고 안정된 노동시장의 구현, 근로계층간 격차 완화라고 하는 정부의 노사관계 개혁방향의 3대 목표가 자본의 이해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 인수위는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노사분규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을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취임한 지 넉 달도 되지 않은 6월 19일 시흥안산지역일반노조 금창공업에 공권력을 투입하더니 한국오웬스코닝, 철도노조, KGI증권, 화물연대 당진한보철강분회, 성남 낙원택시, 세원테크 등에 주저없이 공원력을 투입하였다. 3월에 손배․가압류와 관련해서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던 정부가 8월에는 철도노조의 파업에 75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오히려 공공부문에서 손배․가압류를 더 악용한다는 비난을 초래하였다. 나중에 철도노조에 대한 가압류는 불법임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2003년 10월말 현재 총 46개 사업장 1천481억7천만 원의 손배․가압류 중에서 공공부문이 총 5개 사업장 394억 7천만 원으로 전체 액수대비 26.7%를 차지하여, 공공부문 사업장 비율 11.1%에 비추어 매우 과도한 것으로 나타나 정부는 더욱 할말이 없게 되었다.

역대 정권마다 반복해온 노동자 구속의 악습 역시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지 4개월 만에 되살아나서 지난 6개월 동안에만 204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고, 올해의 대표적인 투쟁사업장인 세원테크의 경우에는 상호 고소․고발을 취하하기로 한 약속을 사용자가 이행하지 않아 노동조합의 사무국장이 끝내 구속되고야 말았다. 천막농성, 전면파업, 상경투쟁 등 장기투쟁사업장의 실태를 보면 기업주의 야만적인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는 일체 문제삼지 않는 노무현 정권의 사용자 편향성을 금세 알 수 있고, 경찰의 비호 또는 방조 아래 공공연히 이루어진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 경호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한국오웬스코닝 등에서의 용역깡패 투입사례를 보면 공권력과 사적 폭력의 경계조차 모호해질 정도로 전근대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에 의존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2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구속되는 동안에 정부는 단 1명의 기업주라도 부당노동행위로 구속한 적이 없다.

따라서 2003년 한국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노동자․민중에게 투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죽음 또한 저항의 극한적 수단의 하나이자 사회적 타살의 한 형태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1월 9일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의 분신,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의 농민운동가 이경해의 할복, 10월 17일 한진중공업지회장 김주익의 자결, 10월 23일 세원테크지회장 이해남의 분신,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광주전남지역본부장 이용석의 분신, 10월 30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곽재규의 투신으로 이어진 죽음은 노무현 정권과 초국적 자본의 핍박과 착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수없는 노동자․민중의 분노와 서러움의 응어리가 뭉쳐진 결정체이다.

노무현 정권의 노동자 배제와 노동탄압 실상,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극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권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는 노동자들은 있다. 대통령 당선자의 자격으로 민주노총을 방문했을 때, 노무현 자신은 신자유주의의 대세를 거스를 생각이 없다고 고백하고 민주노총으로부터 퇴임할 때 장미꽃을 받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사회통합 추진을 위한 노사화합’을 정책방향으로 밝혔던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대가 아주 식지는 않고 있다. 전교조와의 NEIS 폐기 합의를 번복하고, 철도노조와 화물연대와의 노정합의도 뒤집고, 대통령 후보 시절의 노동관련 공약을 모두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11월 6일 한겨레 보도), ‘불법폭력시위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11월 1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발언)고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깎아내리더니, 급기야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하는 단체가 아니다’(11월 10일 4당 대표단 면담 발언) 하며 노동운동 자체를 적대시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라며 동정적으로 바라보는 노동자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민중의 뜻을 거스르는 권력 그 자체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최고도에 이르는 시점에서야 온다. 87년 6월 항쟁이 그랬고, 87년 7, 8, 9 노동자 대투쟁이 그랬다. 96년 12월부터 97년 1월에 걸친 전국적 총파업투쟁도 그 결과를 제쳐놓고 보면 김영삼 정권의 말로와 후계구도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노무현 정권은 결코 스스로 변화할 수 없으며, 노동자․민중에게 먼저 악수를 청할 수 없다. 열사투쟁국면을 거치면서 정권의 반노동자성과 반민중성이 여실히 폭로된 이후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2004년은 어떻게 열 것인가.

역치라는 말이 있다. 생물학에서 유기체의 감각에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최소한의 자극의 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역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극은 아무런 변화도 불러오지 못한다. IMF 이후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추악한 권력과 간교한 자본의 공고한 동맹 관계를 파괴하고 민주화의 내용을 채워가는 참된 진보와 변혁의 흐름을 야기할 만큼 강력한 투쟁(자극)을 조직하지 못했다. 손배․가압류와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쟁점화한 점이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총파업투쟁을 성사시키고 10만이 참가하는 전국노동자대회를 조직한 점, 민중진영의 연대투쟁을 활발히 조직하고 노무현 정권의 반민중적․반노동자적 성격을 명확히 드러낸 측면에서, 10월에서 12월까지 진행된 총력투쟁은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지만, 단위노조의 문제들은 일부 종료시켰을지언정 전체 노동자들의 당면 현안들에 대한 법적․제도적 개혁의 장치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당초 2003년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의제로 등장했던 사회공공성 강화투쟁이 열사투쟁 국면에서 실종되어 버린 것을 상기할 때이다. 국민연금 개악 저지, 비정규직 차별철폐, 사용자대항권 등 노동탄압 분쇄, 파병반대 등 민주노총의 4대 핵심요구를 내건 투쟁계획도 모두 열사투쟁 국면에 묻혀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기업별 임금인상투쟁은 소득재분배의 효과가 현격히 떨어지고 있고, 게다가 공공부문에서는 정부의 예산지침의 범위 안에서 노사협의의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적으로는 소득불평등 증대, 사업장과 사업장 사이 임금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기업내 임금인상과 기업복지 등 시장임금 쟁취투쟁에서 더 나아가 4대 보험, 기초생활보장, 공공주택, 공교육, 공공육아 등 모든 노동자․민중의 요구가 반영되고 모든 (산별)노동조합이 함께 주체가 되는 사회임금 쟁취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기 집중의 의미가 아니다. 노무현 정권과 초국적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인 한국사회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역치를 정확히 계산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중장기적인 전략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변수들이 놓여있다.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이전투구가 혼전을 거듭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들도 재편되고 있다. 무엇보다 4월 총선은 다시 한번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자의식을 시험대에 올릴 기세이다.

때마침 민주노총은 4기 임원선거를 앞두고 있다. 한국노동운동의 방향을 놓고 한바탕 거침없는 논쟁을 벌여줄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각 후보진영마다 저마다의 정체성과 이념을 명확히 해줄 것을 바란다. 사회공공성 강화투쟁과 비정규직 차별철폐투쟁의 실천과제,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민주노동당에 대한 견해의 차이, 2004년 투쟁방향에 대한 계획들, 노무현 정권의 성격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노동정책에 대한 입장의 차이, 산별노조의 올바른 추진방식에 대한 고민들을 털어놓고,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기대와 희망을 넉넉하게 청취하고 겸허하게 수렴하기 바란다. 그리고 투쟁뿐만 아니라 대중과 함께 결정한 사업은 끝까지 책임지기 바란다.

아울러 입만 열면 ‘글로벌 스탠다드’를 강조하는 노무현 정권에게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 “글로벌 스탠다드나 좋은 기업지배구조는 경제성장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다. 경제가 성숙해 선진국에 진입한 다음에 형성된 것이지,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도입한 게 아니다.” 세계화와 무역자유화가 개도국․후진국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지난 200년간의 선진 각국 자본주의 발전연구 등 역사적 실증을 통해 폭로하고 세계화에 대한 이론적 저항을 해온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의 말이다. 노무현식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깨뜨릴 역치는 어느 정도면 될까. 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동지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이 3일만 집에 가만히 있으면 될낀데, 그래 그걸 못하는기요?” 2004년을 그런 결의와 다짐으로 열어 제끼자.
한/노/정/연


의견글쓰기
이 글에 대한 의견보기  다른글 의견보기
아직 올라온 의견글이 없습니다


정규표현식
[ 0.02 sec ]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글쓰기 | 관련글쓰기 | 수정 | 삭제 |

(구)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0-272) 서울시 중구 필동2가 128-11 상전빌딩 301호   Tel.(02)2277-7957(팩스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