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번/역
세계 경제의 빈곤과 불평등*1)
마이클 예이쓰
수백 살이 된 자본주의는 오늘날 지구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그 옹호자들은 자본주의가 여태까지 세계가 보아 온 가장 큰 생산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는 지구의 모든 사람의 삶의 기준을 높이는 능력에 있어서 유일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때문에 우리는 모두 “유토피아를 향해 느리게 나아가고 있다” ― 이 어구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경제학자 J. 브랜포드 드롱(J. Branford DeLong)이 만들었다 ―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모두가 미국식 중간계급 생활을 달성하는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1)
자본주의의 오랜 지배권과 그것의 지지자들의 끊임없는 논증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유토피아를 향해 느리게 나아가고 있다”는 게 정당한지를 묻는 것이 정당해 보인다. 세 가지를 살펴보자: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빈곤과 불평등의 확장―미국에서의, 세계의 가난한 국가들에서 빈곤과 불평등의 확장, 자본주의 무리의 상층에 있는 국가들과 그 바닥에 있는 국가들 간의 간극.
미국은 흔히 중간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가난한 사람이 재산가가 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국가라 일컬어진다. 여기에는, 기회 균등의 법칙이 있다고 말해진다. “중간 계급”과 “기회의 균등” 같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힘들지만, 그러한 사회는 널리 퍼진 빈곤이 있는 곳이어서는 안되고 그곳의 사람들이 큰 정도의 경제적 이동성을 가진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 정당하다.
빈곤과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대한 자료는 이런 이미지에 매우 잘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연방 정부는 “소득의 빈곤 정도”를 가족들이 가난하게 되는 정도 이하로 정의했었다. 그것은 가족이 심각한 문제없이 살기에 힘든 정도 그리고 예를 들어 어린이의 질병 혹은 노동 상해 같은 종류의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현실적 위험에 놓이게 하는 정도 이하의 수입이다. 이 공식적인 수입의 빈곤 정도는 농업국(Department of Agriculture)에서 계산한 최소 식량 비용의 세 배와 같은데, 그 비용은 가난한 가족들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식품을 살 수 있으며 가장 싼 식품을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전환하는 법을 알 것이라는 것과 같은 수많은 제한적이고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 기초하고 있는 매우 신중한 기준이다. 2002년에 이것은 4인 가족에게 18,392 달러 또는 매일 한 사람에게 12.60 달러였다. 2002년에는 인구의 12.1%인 3,460만 명의 사람들이 빈곤하게 살았다. 빈곤의 발생률은 흑인에게는 24%, 히스패닉에게는 21.8%였다. 2001년에는 (나는 2002년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흑인 어린이의 35.2%가 빈곤 하에 살았고 6세 이하의 29.1%의 히스패닉 어린이가 그러했다. 이 수는 시간이 가면서 등락하고 최근에는 상승하는 동안 미국 경제의 막대한 생산력과 그 능력이 200년 이상 동안 서서히 상승했음을 고려할 때 그것은 여전히 두드러지게 높다. 그리고 우리가 더 현실적인 빈곤의 정의 ― 이분의 일 대표값 수입과 같은 ― 를 사용한다면 빈곤 비율은 17%(1997년) 혹은 4,500만 명까지 극적으로 증가한다.2)
이 확장되는 빈곤이 제거될 수 있는 가망이 무엇일까? 이 빈곤이 소득과 부 양자에서의 크고 증가 중인 불평등과 일치한다면, 매우 높지 않은 불평등이 자본주의 운동의 법칙에 스며든다.
1970년에는 가장 부유한 5%의 가계 전체가 가장 가난한 20%의 가계 보다 4배의 소득을 얻었는데 이것이 6배의 소득으로 상승한 이것은 2000년 미국에서 소득 불평등은 1920년대 이래 어느 시기보다 컸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만(Paul Krugman, 그는 뉴욕 타임즈 칼럼에서 부시 행정부를 솜씨 있게 공격해왔다)의 연구는 1980년대 미국에서의 소득 증가의 70%가 아마도 모든 가족들 중 가장 부유한 1%로 갔다고 계산한다. 부의 측면에서 1995년의 미국은 모든 가계들 중 가장 부유한 1%가 모든 주식의 44.2%, 모든 기금의 55.7%, 모든 신용의 44.2%, 비법인 거래의 71.4%, 비주택 부동산의 36.9%를 소유했다. 소득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이 불평등은 최소한 과거 20년 동안 상승해왔다.3)
거대하고 증가 중인 불평등은 기회 균등 개념을 조롱한다. 한 상상 실험을 살펴보라:
펜실베니아의 피츠버그에서 … 그곳에 수억 달러의 순 가치를 가진 힐먼이라는 현저하게 부유한 가족이 있다. 그들 집 중 하나는 상류 계급이 모이는 5번 가에 큰 지가를 가진 거대한 저택이다. 이 구역에서 약 3마일 동쪽에는 그것의 중심가가 작가 쟌 에드가 와이드만에 의해 유명해진 홈우드 구역이 있다. 노스 랑 스트릿에는 세 개의 연결관 아파트가 줄지어 있다. 한쪽 끝은 설치류들과 마약 중독자들에 내맡겨져 있다. … 깊고 만성화된 가난이 이 거리와 동네에 만연되어있는데 이 곳은 전국에서 유아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두 어린이를 생각해보라, 한 명은 힐먼 집에서 태어났고 다른 한 명은 노스 랑 스트릿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전자에는 두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부모가 있고 후자에는 세 어린 아이를 가진 밤에 일하는 편모가 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어느 쪽 어머니가 정기적인 의사의 방문. 필요한 경우 투약, 건강에 좋은 식사 같은 최상의 보살핌을 줄 것인가. 어느 쪽 아이가 정상적인 출생 체중일 것 같은가? 어느 어린이가 어린 시절에 적합한 영양 섭취와 좋은 보살핌을 받을 것인가? 가난한 어린이가 이런 것들을 가지지 못한다면, 누가 이 어린이에게 그 결과로서 오는 뇌세포의 손실을 되돌려 줄 것인가? 어느 어린이가 납중독의 나쁜 결과에 고통받기 쉬운가? 두 어린이가 밤중에 아프게 되면, 어느 쪽 어린이가 시간에 맞춰 응급실에 도착할 것인가? …
두 어린이가 성장했을 때, 그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을 만날 것인가? 만일 그들이 대학 입학 허가를 원하거나 직업을 구하거나 또는 사업을 위한 자금을 찾을 때 어느 쪽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사람을 만날 것 같은가? … 누가 더 좋은 학교에 다닐 것인가? 누가 가정에서 책, 잡지, 신문, 컴퓨터에 접근할 것인가? 누가 시설 좋고 안전한 학교의 보육 교사를 만나기 쉬운가? 어느 쪽이 집에서 크레용과 색종이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걸 교사에게 말하기 두려워하게 될 것인가? … 두 어린이가 노동 시장에 마주친다면[물론 부자 어린이는 가난한 어린이가 직면하는 의미에서의 노동 시장에는 결코 직면할 필요가 없다], 어느 쪽이 더 이익을 얻을 것인가?4)
우리는 우리의 상상 실험을 경험적 증거로서 보강할 수 있다. 미국에서 ― 그 곳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항상 “너는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건 될 수 있다”는 신화를 선전한다 ― “성공의 비밀은 성공한 부모를 갖는 것임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다”는 게 이제 명확해 보인가. 만일 당신의 부모의 수입이 가족 수입 분포의 상위 20%에 있다면 당신의 수입도 결국 상위에 있을 가능성은 42.3%이지만 하위 20%로 떨어질 가능성은 불과 6.3%임을 최근 연구는 보여준다. 만일 당신 부모의 수입이 하위 20%에 있다면 당신은 불과 7.3%의 상위 20% 상승 가능성을 갖는다. 이 상호 관계는 수입뿐만 아니라 부를 고려한다면 더욱 확실할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너의 부모가 소득 분포의 상위 1%에 있다면(그리고 또한 재산이 만을 것인데, 상위 20% 중 하위에 있는 부모들은 재산이 많지 않을 것이다) 네가 결국 상위 20%에 있을 가능성은 분명 42.3%보다 높을 것이다.5)
빈곤 제거의 비현실성이 배가되는 것은 불평등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많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에 있다. 불평등 연구는 우리가 미국의 두 주 또는 같은 평균 소득을 가진 두 국가를 고려할 때 우리가 “사회 위생”(social health)라고 부르는 것은 더 큰 소득 불평등을 가진 주 혹은 국가에서 더 빈약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더 큰 소득 불평등을 가진 국가 혹은 주에 살 때, 많은 사회적 지표의 견지에서 볼 때, 더 악화될 것이다. 모든 미국 주에서 가장 빈곤한 50%에게 가는 수입의 몫은 불평등의 척도로 사용하여, 연구자들은 이 몫이 주의 도덕 비율(morality rate)과는 역의(반대 방향으로의) 변이를 보임을 발견하였다. 게다가,
이 불평등의 정도는 건강 외에도 다른 사회적 조건에 거스르게 측정되었다. 소득 분배의 더 큰 불평등을 가진 주들은 또한 더 높은 실업률, 더 높은 수감율, 소득 보조와 식량 카드를 받는 사람의 더 높은 비율, 그리고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의 더 높은 비율을 가졌다. 다시 말하자면, 부자와 빈자간의 간극이 최상의 가늠자이지 주의 평균 수입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더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가진 주는 또한 일인당 교육에 적게 지출하고, 학교에 일인당 더 적은 책을 가지며, 더 나쁜 읽기 능력, 나쁜 수학 실력,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는 더 낮은 비율을 포함하여 더 빈약한 교육 성취를 갖는다.
그 큰 소득 불평등을 가진 주는 또한 낮은 출산 체중 어린이의 비율이 더 높고, 살인 범죄율이 높으며, 강력 범죄율이 높고, 장애로 일을 할 수 없는 인구 비율이 더 높으며, 흡연 인구 비중이 더 높고, 일하지 않으려는 인구 비율이 더 높다.6)
거대하고 증가하는 불평등은 하층의 사람들의 정치적 권력을 점차 약화시키는데, 그것은 빈곤의 해로운 결과를 악화시켜주는 사회 복지 프로그램이 바닥부터 파괴되는 것이 더 쉽게 하며, 그와 동시에 부자를 더 선호하는 정책들이 자리를 잡아가기 용이하게 만든다. 빈자는 그들이 그들과 상위 계층 사이의 지루한 간격을 생각 할 때, 더욱 암울함과 절망으로 가득하게 된다.7)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거대한 빈곤과 불평등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세계 경제의 큰 부분, 자본가 국가와 가난한 국가 양자에서 발견되는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 세계은행은 다른 국가들에서 그리고 세계 전체에서 하루 1, 2달러 이하로 연명하는 사람 수를 계산하였다. 나이지리아에서,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에 90.8%의 사람들이 하루 2달러 또는 그 이하로 살았고, 인도에서 그 숫자는 1997년에 86.2%이었다. 세계은행은 세계 인구 60억 중에서 28억(약45%)이 하루 2달러 또는 그 이하로 살아가고 12억(약20%)은 하루 1달러 혹은 그 이하로 산다고 측정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또한 미국의 소득빈곤선과 비교하는 수치를 사용한다. 2002년 미국의 빈곤선은 일인당 하루에 12.60달러로 측정되었음을 기억하라. 세계은행이 측정한 가난한 국가들의 빈곤선은 현재 하루 1달러를 약간 넘는다. 이 수치를 사용하면 1990년대에 걸쳐 빈곤은 세계적으로 감소했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의심스럽다. 물가가 더 싸기 때문에 가난한 국가에서 하루 1달러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미국에서의 하루 1달러는 분명 한 사람을 빈곤하게 하지만 매우 가난한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난한 국가에서 물가는 하락하고 다른 것들은 같다면 빈곤한 사람의 수는 하락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나, 세계은행이 가난한 국가의 물가를 말할 때, 그것은 모든 가격 목록을 의미하지 가난한 사람이 사는 물건들의 가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대적으로 가장 낮고 대부분의 가난한 국가들에서 점점 하락하는 가격은 가난한 사람들이 소비할만하지 않는 서비스들의 가격이다. 저널리스트인 조지 몬비옷(George Monbiot)은 말한다, “빈자의 구매력에 대한 [세계은행의] 계산은 한 경제가 제공해야하는 모든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는 그들의 능력 정도에 기초한다: 음식, 물, 주거뿐만 아니라 항공기 표, 발톱 가꾸기, 건강트레이닝을 포함한다. 문제는 기본 상품이 부자국가보다 가난한 국가에서 종종 더 비싼 반면에 서비스들은 훨씬 싼 경향이 있다는데 있다 [가난한 국가에서 잉여 노동의 막대한 저수지를 반영한다] …”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극빈자는 물론 세탁, 운전, 두발 미용의 서비스를 지불하지 않는다.” 콜롬비아 대학의 두 연구자는 세계은행의 방법론상의 문제점을 교정한다면, 근거 없이 주장된 감소분이 완전히 제거되면서, 절대적 빈곤에 사는 사람의 수는 30%에서 40%로 증가한다.8)
세계은행의 빈곤선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은행이 가난한 국가들의 대규모 수출 농업을 증진시키는 도구로 기능해왔다는 점이다. 세계은행 빈곤선 이하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화폐경제 외부에서 겨우 살아가는 농부들이다. 그들의 경제적 복지는 하루 1달러가 가리키는 것보다 더 크다. 그들은 사실상 은행이 장려하는 농업에 의해 소유권이 박탈되어 도시 지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들의 화폐 수입은 세계은행 빈곤선을 초과할 수 있지만, 그들은 사실 시골에 살 때보다 훨씬 더 나빠진다.
지구적 규모의 빈곤은 거대하고 증가하는 수입 불평등에 필적되는데 하나의 사실이 2002년 11월 이 잡지의 월간 논평에 아주 자세히 개진되었다. 거기에서 말해진 것은 부연, 보충될만하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이자 경제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국가들 가운데 두 국가인 중국과 인도에서는 불평등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 예전엔 극히 평등주의적인 국가였던 중국에서 소득의 불균등은 이제 미국의 그것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중국에서는 역사상 아마 가장 거대한 소득 재분배를 경험 중에 있다. 인도에서는 “급속한 경제성장의 … 혜택은 대부분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20%에게 돌아가고 있다.” 거기에서는, “3억5천만 명 ― 인구의 3분의 1 이상 ― 이 극단적인 빈곤상태에서 살고 있고 … 캘커타에서만도 25만 명의 어린이가 매일 밤 길거리에서 자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
세계은행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빅(Branco Milanovic)은 세계적 소득 불평등을 측정하는 세련된 시도를 해왔다. 전 세계를 망라하는 대량의 가계 조사를 사용하여 그는 발견했다,
세계의 가장 부유한 1%가 가장 가난한 57% 만큼의 소득을 얻는다. 부유한 5%의 평균 소득은 가장 가난한 5%의 평균 소득의 114배인데 1988년의 78배에서 상승한 것이다. 가난한 5%는 그들 실질 소득의 25%를 상실하여 더 가난해지는 반면, 부유한 20%는 그들의 실질 소득이 12% 상승하여 세계 소득 평균의 2배가 됨을 보았다. 세계의 불평등은 증가하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 그리고 국가 안의 불평등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국가는 더 가난해지는데, 각각의 국가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자의 희생으로 더 부유해진다. 밀라노빅은 부자들은 기준 통화에 따라 세계의 소득 지니 계수[불평등이 증가함에 따라 0에서 1까지 증가하는 불평등 단위]가 0.66에서 어마어마한 0.88 사이에 있음을 계산하였다.10)
밀라노빅의 발견을 보강해주는 UN의 최근 『인간 개발 보고서』는 가장 부유한 미국인 2,500만의 소득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억의 소득과 같다고 말한다(20억은 2,500만의 80배이다). 1820년에 서유럽에서 1인당 소득은 아프리카의 그것의 3배였는데 1990년에 그것은 13배 이상으로 높았다. 이 숫자들에 인간적인 의미를 덧붙여서, 그 보고서는 말하길 “오늘의 통계는 수치스럽다: 지난 10년 간 1,300만 어린이가 설사병으로 죽었다, 매년 50만 명 이상, 1분에 1명 꼴로 여자들이 임신과 출산으로 죽는다. 8억 명 이상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다.” 부가하여, “많은 국가들에 있어서 1990년대는 절망의 10년이었다. 54개국이 1990년보다 지금이 더 가난하다. 21개국에서 더 많은 비율이 굶주리고 있다. 14개국에서 더 많은 어린이가 5세 이전에 사망한다. 12개국에서 초등학교 등록률이 줄어들었다. 34개국에서 평균 수명이 감소하였다. 생존에서의 이런 역전은 과거에는 보기 힘든 것이다” 경제학자 제임스 갈브레이쓰(James Galbraith)가 말하길 “넓은 범위의 개발도상국들을 볼 때, 텍사스 대학의 불평등 연구는 그들 중 대부분에서 증가하는 불평등을, 적은 곳에서 하락하는 불평등을 발견했다.” 베트남에서 1999년과 2001년 사이 불과 2년 동안 가장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간격은 거의 2배가 되었다.11)
자본주의의 옹호자가 기회 균등이 실현되었음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오늘날의 가난한 국가들의 경제가 언젠간 부자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또한 이야기한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국가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간격은 국가들 사이에서 그것과 평행을 이룬다. 국가들마다 인구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국가들을 비교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국내총생산(GDP)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비교는 국가들 간에 극단적인 큰 차이를 보여준다. 상위에는 우리가 “부자 국가”라 부르는 것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일차적으로 산업화된 자본주의 국가들로 정복과 식민화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 동남아까지 세계의 많은 부분을 지배해왔다. 바닥에는 “가난한 국가들” 중 가장 가난한 곳이 있는데 그들은 부자 국가들의 무력 팽창의 표적이 되었다. 미국, 노르웨이, 일본, 독일, 프랑스 같은 국가들의 1인당 GDP는 에티오피아, 말라위, 볼리비아 같은 국가들의 100배 이상이다. 부자국가 대부분은 자본주의가 일차적으로 생긴 곳이지만 가난한 국가의 대부분은 식민지와 제국주의 지배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1인당 GDP의 견지에서, 어느 라틴 아메리카 국가도 상위 35위에 들지 못했고, 어떤 아프리카 국가도 상위 55위에 들지 못했다. 최빈국 50개국 중 절반이 아프리카에 있다. 상위 50위 중 60%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있다.
우리가 국가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비화폐적 측정법을 사용한다 해도, 우리는 비슷한 차이를 본다. 미국에서 여성 평균 수명은 약 80세, 스위스에서는 82세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46세, 시에라레온은 36세이다. 1,000명 당 유아 사망률은 노르웨이에서는 3.98명이지만 에티오피아에서는 101명이다.12)
주류 경제학자들은 가난한 국가들은 단지 “발전 사다리”의 아래쪽을 딛고 있을 뿐이며, 시간이 지나면, 특히 그들이 “자유 시장”의 원리(기본적으로 보호 무역 장벽, 보호적 노동법, 빈자 보조, 공공 기업, 토지 판매 제한과 같은 사용자가 돈 버는 데의 모든 장벽을 제거)를 채택하기만 한다면, 가난한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부자 국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수렴 가설은 증명하기 힘들다. 예전에 가난했던 국가들의 매우 적은 수가, 주로 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하였지만(예를 들어 남한), 대부분은 가난한 채로 있다. 사실, 세계은행의 경제학자 랜스 프릿쳇(Lance Pritchett)은 세계의 가장 가난한 국가들이 1870년부터 1960년까지 1인당 수입의 견지에서 분화되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프릿쳇의 방법론에 내재된 논리는 아주 흥미롭다. 그는 가장 부자국가 중 하나인 미국과 가장 가난한 국가의 하나인 에티오피아를 비교한다. 그는 일인당 GDP 비율을 1960년의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수치로 비교한다(미국 일인당 GDP를 에티오피아 일인당 GDP로 나눈다), 그리고 1870년의 GDP 차이가 더 크다면 소득의 수렴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다. 1870년의 에티오피아 1인당 GDP는 삶을 유지하기엔 너무 낮았다! 그래서 프릿쳇은 분화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1960년대 이후에 그러한 분화가 계속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도입된 “자유시장”정책이 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가장 높은 일인당 GDP를 갖는 국가들이 가장 크게 성장했는데 이는 국가들 사이에 불평등이 증가했음을 암시한다.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국제적 불평등이 감소했음을 믿는 경제학자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모든 국가의 일인당 GDP를 인구수로서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인구가 가장 많은 두 국가인 인도와 중국이 이 시기에 매우 높은 평균 성장률을 보였으며, 인구로 조정된 성장률의 견지에서 보면 세계적 빈곤은 감소한다는 것을 우리는 볼 것이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가 주목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보았다시피, 인도와 중국 내의 불평등은, 특히 중국에서, 상승했다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일인당 GDP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평균적인 중국인과 인도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실에 직면하여, 불평등이 하락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우리가 부자 국가보다 더 빠르게 성장해온 가난한 국가를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1인당 소득이 수렴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성장률이 매우 장기간 동안 지속되어야만 한다. 프릿쳇은 한동안 미국보다 빠르게 성장했었고 또 현재 급속히 성장 중인 인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소수의 개발 도상국들은 실제로 “수렴하고 있다,” 즉 그들은 미국 보다 빨리 성장한다. 이런 운 좋게 “따라잡는 국가”들이 미국을 앞지를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인도는, 예를 들어, 1980년에서 1993년 사이 매년 3%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만일 인도가 이 페이스를 100년 동안 지속한다면, 그 소득은 현재의 높은 소득 국가의 수준에 도달한다. 그리고 만약에 인도가 이 성장 정도를 377년 동안 유지한다면 나의 손자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은 인도의 “수렴된” 소득 수준을 볼 때까지 살 것이다.13)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국가들 내부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서의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고유의 질병이 아니라고 결론 내리기는 힘들다. 왜 그런지 알기란 어렵지 않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는 당연히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아닌 생산수단(주류 경제학자들이 “자본”이라 부르는)이 모든 인간들 중에서 작은 소수에 의해 소유되는 경제 체제이다. 시장에서의 부의 불평등은 그 시스템 본성의 결과로서 반드시 소득의 불평등을 산출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항상 가장 강한 자의 기초 위에 선다, 즉 다른 조건이 동등하다면 출발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많은 몫을 가져가게 된다. 따라서서 자본주의 경제가 제한과 규제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재된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계급적 본성이다. 소유하는 소수는 소유하지 못한 소수자와 비교해서 작업장 안에서 경제적 권력과 사회에서의 정치적 힘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내재적인 이점을 갖는다. 그들은 할 수 있을 때마다 그들 사회의 수입에서 더 큰 몫을 획득하기 위해 그러한 이점을 강제한다. 그 예들은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가 안에서 늘어나는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은 소유자의 커져가는 권력과 노동자의 (그리고 물론 가난한 국가에서는 농민의) 하락하는 권력이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국가의 소득은 노동자와 농민의 권력이 강할수록 더욱 더 평등하게 분배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국가에서 그들이 허약할 때, 그 국가들은 더 단단하게 부자 국가들의 손아귀에 의해 쥐어지고 국가 간 불평등은 상승한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국가들 내부의 불평등 역시 상승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겨우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생활수준이 하락할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1인당 GDP가 높은 비율로 상승할 때에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부자 국가들에서도 노동자가 약할수록 불평등이 커지고, 노동자들이 가난한 국가의 그들의 형제 자매들과 연대할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미국이 모든 부자 국가 가운데에서 가장 약한 노동 운동과 가장 큰 불평등 소득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득과 부에서의 불평등 (그리고 이런 불평등과 연관된 모든 사회 지표들)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뿌리깊은 모순이다. 노동자와 그들의 고용주는 관념적으로는 노동 시장에서 평등하게 만나고, 양자는 자유로이 거래한다. 그러나 이 거래의 결과는 놀랄만한 정도로 자본가를 편애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모든 사람은 돈을 벌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적은 수에만 해당되는 사실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평등의 가치를 신봉하지만 그것의 정상적 작동의 결과들은 현저하게 불평등적이다. 같은 모순은 국가들의 관계에서 명확하다. 국가들은 자유 무역 관계에 들어가지만, 이 무역의 결과는 1인당 GDP의 큰 불균형이다.
이렇게 노골적인 모순은 해결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노동자와 농민은 체제가 산출한 불평등을 전복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층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때때로 소유자의 양보를 쥐어짜낼 때도 있고 더 드문 경우긴 하지만 전체 체제를 변형시키는 혁명에 성공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자본가들과 그들의 청부업자 무리들은 그들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운동에 대한 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강제와 폭력은 지배계급의 무기 창고의 결정적 요소이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이 위협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많은 무기들도 가지고 있다. 노동자 계급과 농민의 지도자들을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끼워주는 것, 전략적인 양보를 하는 것 (가장 좋은 예로서 서유럽의 고용주와 노동조합 사이의 “사회적 협약” 그리고 훨씬 약한 정도의 미국의 것을 들 수 있다),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통해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모순이 전혀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같은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마지막 것에 대해 살펴보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의 선전선동을 매일 매일 식사하듯이 몸 속으로 집어 넣고 있는 셈이다. 그런 선전 선동은 진실을 감춘 혹은 왜곡한 정보들에 의해 완성된다. 노동자들은 실제로 “협력하는 공범”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자들은 빈자를 희생하여 이익을 얻는다는 지적은 “증오의 정치”로 탄핵 당한다. 가난한 국가들은 그들이 충분한 자유시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한 국가들에 점점 더 뒤처지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런 선전은 계속된다.
자본주의 세계의 모든 곳에서 명확한 강렬하고 증대하는 불평등은 거대한 저항을 이미 낳았다. 사실 미국에서 노동자는 종종 부동산 세금의 폐지와 부자에게 강하게 치우친 소득세의 감면 같은 그들의 이익에 불리한 정부 정책을 지지한다.14) 그러나 거기에는 부자와 권력에게 파란을 일으키는 분쟁의 징조들이 있다. 전 세계의 가난한 이웃들이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전쟁”같은 것들이 레이더 망에 잡힌다. 이 전쟁은 가끔 계급 간의 폭력을 수반하고 있으며, 이것은 엘리트들을 경악하게 한다.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에서 이그나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가 말하기를:
언론이 ‘불안정’이라 부르는 것의 상승하는 흐름에 직면하여, 몇 국가 ― 멕시코,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를 포함한 ― 에서는 현재 국방비보다 이 사회적 전쟁을 치루는 데 비용을 더 많이 지출하고 있다. 브라질은 GDP의 2%를 군대에 쓰고 10.6% 이상을 빈자의 자포자기에 대항해서 부자를 보호하는데 쓴다.15)
이런 저런 방법으로 지구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운동이 더 공공연해지고 있다: 콜롬비아와 네팔의 무장 혁명 투쟁, 가장 최근에는 볼리비아에서 있었던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광범위한 농민 운동,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처럼 전혀 공통점 없는 국가들에서의 공통적인 빈자와 실업자 운동, 급격히 상승하고 있으며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는 ‘올바른 세계화’ 운동, 그리고 제3세계 부채, 아동 노동, 노동 착취 공장, 무역 협정, 토지 강탈, 환경 파괴에 반대하는 캠페인 등.
“근원적”이면서도 이전 보다는 좀 더 의식적인 이런 모든 저항들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수 십년간의 정치적 투쟁은 현대 자본주의의 특질이 된 극심하고 부조리한 불평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아래 끓어오르는 불만들을 억누르는 데 완전히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번역 : 민새얼(연구원)
* 마이클 예이쓰는 Monthly Review의 편집고문으로 있으며 존스톤에 있는 피츠버그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수년간 재직했다. 그의 저서로는 『Longer Hours』, 『Fewer jobs: Employment and Unemployment in the United States』(1994), 『Why Unions Matter』(1998), 『Naming the System : Inequality and Work in the Global System』(2004)가 있으며 모두 먼쓸리리뷰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이글은 Monthly Review 55호(2004. 2)에 실린 “세계경제의 빈곤과 불평등”을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http://monthlyreview.org/0204yates.htm 참조.
1) Slouching Toward Utopia를 포함한 드롱의 주장을 자세히 보려면,
1) Slouching Toward Utopia를 포함한 드롱의 주장을 자세히 보려면,
http://econ161.berkeley.edu/TCEH/Slouch_title.html.
2) 빈곤에 대해 자세한 것은For details on poverty, Lawrence Mishel, Jared Bernstein, and Heather Boushey, The State of Working America, 2002-2003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309-56을 보라. 가장 최근의 미 통계청 자료는 http://www .census.gov을 보라. 50%의 대푯값 소득 분표를 사용한 국제 비교는 Mishel, State, 416쪽을 보라.
3) 소득 불평등에 대해서는 On income inequality, see Mishel, Berstein, & Boushey, State, 33-112쪽을 보라. 이 문단의 소득 자료는 http://www.census.gov에서 가져왔다. 부에 대한 자료는 Doug Henwood, “Distributing the Booty”, http://www.panix.com/~dhenwood /Wealth_distrib.html에서 가져왔다. 크루그만의 자료는 Paul Krugman, “The Rich, the Right, and the Facts”, The American Prospect 11 (fall 1992), 19-31에서 왔다.
4) Michael D. Yates, Naming the System: Inequality and Work in the Global Econom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3), 58-59.
5) 경제학자 앨런 B 크루거(Economist Alan B. Krueger) reports on the relevant studies in “The Apple Falls Close to the Tree, Even in the Land of Opportunity,” New York Times, November 14, 2002에서 당면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6) 이 인용은 Yates, Naming, 60의 것이다. 이것은 Peter Montague, “Economic Inequality and Health,” http://www.korpios.org/resurgent/Inequality&Health.htm에서 따왔다.
7) Helen Epstein, “Enough to Make You Sick?,” New York Times Magazine, October 12, 2003을 보라.
8) 빈곤에 대한 세계은행 자료는 the Bank‘s World Development Reports, http://www.worldbank.org을 보라. 빈곤 비율을 계산함에 있어서 세계은행의 방법론의 부적절함에 대해서는 http://www.columbia.edu~sr793/에 볼 수 있는 기사가 있다. 인용은 George Monbiot, “Poor but Pedicured,” The Guardian, May 6, 2003에서 왔다.
9) Paul Watson, “In India, No Job is Too Small,” Los Angeles Times, October 25, 2003.
10) 인용은 Yates, Naming, 57~58에서 왔다. 본래의 기사는 Branko Milanovic, “True World Income Distribution, 1988 and 1993: First Calculations Based on Household Surveys Alone,” The Economic Journal 112 (January 2002), 51~92이다.
11) UN 보고서의 요약은 Larry Elliot, “The Lost Decade,” The Guardian, July 9, 2003을 보라. 갈브레이쓰 인용은 James Galbraith, “Globalisation and Inequality: the Economist Gets it Wrong,” http://www.opendemocracy.net/debates/article-7-30-1483.jsp에서 왔다. 베트남에서의 불평등은 “Vietnamese Earn More but Rich-Poor Gap Widens,” http://www.globalpolicy.org/socecon/inequal/2003 /0114vietnam.htm을 보라.
12) 생산품, 위생, 평균 수명, 노동 시장, 그리고 다른 경제적 지표에 대한 광범위한 통계는International Labor Office, Key Indicators of the Labour Market 2001-2002 (Geneva, Switzerland: International Labour Office, 2002)을 보라.
13) 프릿쳇의 방법론과 인용은 Lance Pritchett, ��Forget Convergence: Divergence Past, Present, and Future,�� http://www.worldbank.org/fandd/english/0696/articles/090696.htm에 있다. 일인당 GDP 상승에 대한 논의는 Galbraith, “Globalisation.”을 볼 것.
14) 예를 보려면, Alan B. Krueger, “Cloudy Thinking on Tax Cuts”, New York Times, October 16, 2003.
15) Ignacio Ramonet, “The Social Wars”, Le Monde Diplomatique, November 2002, http://mondediplo.com/2002/11/에서 영어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