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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번 : [46호/연재-기획] 레닌의 철학: 정치유물론‘과 탈근대적 정치학
글쓴이: 이진경 등록: 1998-08-02 00:00:00 조회: 1386


월례토론회
레닌의 철학: 정치유물론‘과 탈근대적 정치학

이 진 경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이 글은 지난 6월 12일 제39차 콜로키움에서 이진경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이 발표한 글「레닌의 철학 -ꡐ정치유물론ꡑ과 탈근대적 정치학」에 대한 토론내용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다. 원래 당일 발표된 글을 실으려고 하였지만 이미 다른 계간지에 실려 있는 상태라 토론내용만 싣게 되었다.






토론에서는 이 글이 흥미롭고, 레닌을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제시된다는 점, 그리고 글의 옳고 그름을 떠나 독창적이며, 클리나멘의 비껴나감에 대한 중요한 해석 등의 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말하는 내재하는 외부라든지, 비껴나감 등에 대한 고민을 언제부터 했으며, 그 배경과 궁극적으로 논자의 바램이 무엇인가 등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다.
한편 첫째, 과연 이 텍스트가 다른 해석을 제시했는가. 둘째, 그 해석은 옳은가, 셋째, 논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문제제기 1> 근대성과 탈근대성

존재했던 레닌과 존재하지 않던 레닌 사이의 치열한 긴장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 자체가 포스트 모던한 레닌체의 효과인 것이다. 혼란 내지 새로운 생각을 주장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자의적인 텍스트의 재구성과 해석이 적지않게 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첫째, 이 글이 의도하는 것이 탈근대적 정치학인데, 근대적 정치학이 무엇인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그래야 레닌에 대한 논지의 설득력이 강화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 탈근대적 정치학을 말할 때, 곳곳에서 근대적 정치학에 대한 이해가 편협해 보인다,

레닌을 살리는 걸 목적으로 한다거나 레닌만 탈근대적이라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익숙하게 알던 레닌의 모습, 교과서적으로 정식화된 모습에 대해 비껴나가는 해석을 통해서 어떤 접선을 갖기 때문에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기존에 익숙하던 걸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고자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길은 몰락한 역사는 버려야할 것으로만 여기게 되어 아무 것도 배울 게 없게 된다. 과거도 현재 속에서 새로이 생산되어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맑스주의자로서 이해할 수 없던 역사라는 점에서, 내가 알던 맑스주의 안에서 해봤자 알 수 없던 것들이 사회주의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왜 사회주의는 망했으며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았을까가 핵심적 화두이다. 그런 문제인식 속에서 사회주의는 근대적 사회주의였다. 공산주의적 인민 또는 사회주의적 인민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라고 하기는 하는데, 깨지든 말든 내 관심사가 아니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공산당은 무엇이었을까. 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이익 공동체 범위도 가족 범위에서 행하고 주어진 것 속에서 행하는 사람들이 근대인이었다는 생각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근대를 넘어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근대는 초극해야 한다.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새로 찾아내야 한다. 맑스주의자들 안에서조차 탈근대적 요소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람시 등도 그런 요소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과거에 로자와 레닌을 대비시킨 것에 대해서도, 로자는 완전한 반근대주의자고 레닌은 근대주의자라는 식의 대비는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반근대적, 탈근대적 요소들을 추출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맑스도 그런 요소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상가는 한 면모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사상가는 시대를 바꿔가면서 새로이 태어났고 맑스 등도 불멸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아니다. 당시의 상황 속에서 다른 얼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것이 불멸의 조건들을 확보해가는 것이다.
새로운 면모들을 찾아내지 않으면, 이 낡은 사람들은 그냥 죽어버릴 것이다. 이들이 부적당한 평가에 의해 묻혀버리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해서 이런 비껴남이 당혹을 유발하길 바랬다. 맑스주의를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하는 새로이 계열화된 선들을 찾아내는 것의 의미가 있다.
나 역시 레닌을 오류 없는 탈근대주의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레닌이 규율에 대해 말할 때는 근대주의자이다. 근대적 요소들이 있다는 식의 설명은 불필요하다. 볼세비키조차도 당 개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개념이 작동한다. 소비에트 정권이라는 것에서 반란에 대한 것이 문제제기 된다. 동독 베를린 봉기나 중국 문화혁명 등과 같은 방식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근대, 탈근대라는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다. 근대적 프로젝트들이 있었고 이에 대한 아방가르드적인 실천들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탈근대라고 할 기획들이 있었는가.

탈근대는 근대비판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있는 탈근대이다. 꼬뮤니즘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작동하는, 현재하는 외부라 생각한다. 탈근대적 요소를 어느 방향으로 구부리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꼬뮤니즘이 망상이 아니려면, 정세를 타면서 구부려야 하듯이 핵심적으로는 정반대의 자유주의로 구부러질 수도 있으므로 근대와 탈근대를 대립상으로 보지 않는다.
생산양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활동방식, 생활방식, 주체들의 삶의 방식들이 있고 그런 영역에 한정해서 근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 면에서 레닌의 철학은 탈근대적 면모들이 있다.


문제제기 2> 정세분석의 필요성과 계열화 틀

정세분석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새로운 관점, 주체역량, 주체요인이 아닌 주체과 객관의 근대적 이분법을 가로지르며 작동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맑스는 그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해석의 시도는 그람시에게도 충분히 발견되는 현상이고 당대 운동가들이 모조리 주체와 객체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사례들이 부족한 것 같다. 또한 정세분석이 내용을 계열화하는 틀의 분석이라는데, 만약 경제구조라면 계열화라는 개념 뿐만 아니라 계통성도 있다. 사회경제구조와 백터간의 작용, 반작용이라는 부분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정세적 클리나멘은 만들기 힘들지만, 그에 대한 이론적 클리나멘, 즉 구부리기는 할 수 있다. 이는 전혀 근거없지 않으며 또 다른 사유를 자극할 수 있다고 본다. 때 아니게, 즉 하필 이 때에 레닌을 문제삼는 것은 잘 안다고 생각하던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뜻 있는 작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리나멘을 만드는 것, 그것은 당황스러움을 유발하는 것이며, 그게 실제 내가 원하는 바이다.


문제제기 3> 클리나멘-모순과 대립

클리나멘 문제에 대한 해석에서 레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모순과 대립이 아닌가. 벗어남과 구부림에 대한 강조보다 훨씬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모순과 대립을 말한 것 아닌가. 이 글은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적 구분이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마키아벨리에서의 비르투(Virtu)나 포투나(Fortuna) 등은 상황과 주체의 행위의 계열성에 대한 관점과 인식들이 이미 발견됐다고 본다.
다른 한편, 후기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주의에서 말하는 걸 보면, 차이는 있는데 왜 대립과 모순은 없는가. 그람시의 경우, 이미 수십 년 전에 마르크스주의를 오직 차이 개념으로 해소하려는 크로체적 경향을 비판했고, 나아가 진정한 변증법의 정신이란 대립물의 모순과 통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과 차이, 특수성의 여러 단계, 그리고 그러한 단계 내에서의 다기한 모순들간의 대립을 온전히 재구성해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모순과 대립을 말하면서도 차이, 즉 클리나멘을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차이만을 강조하는가.

클리나멘의 정의에 대해서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클리나멘이란, 즉 벗어남의 선이라는 개념은 결코 아무대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성분을 갖는다.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빠져나가는 곡선, 즉 객관적 요인을 분석하면서 대내적 관성의 힘을 타는 것이고 이것을 비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시간성, 때아닌 시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굽어지게 만드는 힘을 가하는 것, 능동성이 클리나멘을 만든 힘이라는 것이다. 이때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객관, 즉 보편법칙은 흔히 말하는 역사법칙이다. 맨셰비키들은 부르주아 혁명이 필요한 정세 등등을 말했는데, 이는 사실상 사회구성체 변화의 필연성만을 지칭한 것이다. 이와 달리 레닌은 보편, 특수 개념이 아닌 또 다른 개념을 갖고 있었다. 레닌은 보편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힘들이 작용하고, 그에 따라 뜻밖의 선이 그려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때 특이하다는 것은 평범하다 혹은 통상적이이다는 것과는 반대되는 그러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세를 미분한다는 의미, 따라서 선의 개념을 즐긴다는 것은 사실상 그것이 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힘을 사용하려는 의지와 힘, 그 자체가 클리나멘의 최소한의 요소이다. 정세는 언제나 힘들로 구성되는 특정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 그 자체라기보다 그러한 힘을 쓰려는 의지와 힘의 방향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힘 자체와 무엇을 하려는 것의 문제는 다른 것 아닌가. 중요한 것은 정세의 기울기 속에서 그 정세를 공유하면서도 힘이 어디로 가야하는가의 문제이다.

문제제기 4> 대의제와 자발성-능동성과 외부

‘새로운 종류의 혁명’ 개념을 만들어 낸다는 식의 관점은 이미 엥겔스 말기에 다수자 혁명, 인민혁명관점으로 이미 알려진 것이다. 부르주아 대의와 의회민주주의적 대의제를 비판, 착목한 것은, 이 비판이 올바르고 또한, 이 비판이 레닌뿐만 아니라 칼 슈미트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관계로 말미암아 과연 대의제 그 자체가 근대적 혁명개념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체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다. 이 글은 일관되게 부르주아지 대표나 대의제에 대한 비판을 주장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체의 대표 대의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가.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대의제를 대체한 인민의 대의기관이 아니었던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노동운동에서 대의제에 대한 현실적 비판은 그것이 민주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안되는 것에 일단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러한 비판이 곧 일체의 대의제를 해체하고 아우토노미아라는 자율주의로 가야 한다는 필연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전위라는 것, 아방가르드,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서 촉발 개념을 매개로 대중 자신이 올바른 투쟁방향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레닌의 전위 개념이고, 그리고 그것이 구부림을 갖는 클리나멘이라면, 이 글에서는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시기, 레닌의 클리나멘이 작용하지 않던 역사적 국면(예컨대 혁명이후의 크론슈타트의 반란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는 결국 그것이 잘 맞아 떨어져 대중과 전위의 호흡이 일치했던 사건만을 특권화할 뿐, 두 개가 대립했던 모순적 국면에 대해서는 분석이 없다. 이는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을 자의적으로, 그리고 사후적으로 적용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외부개념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일례로 아방가르드로서의 전위 역시 지도, 의식성, 계급의 선진적 역량이라기보다는 대중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는 계기 정도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만일 전위의 역할이 촉발의 문제, 단순히 계기점으로서 작용하는 문제로만 본다면 그것이 계급동맹 등 구체적인 정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단지 촉발이 문제라면, 조합주의․경제주의적 투쟁을 통해 투쟁이 촉발되는 것과 아방가르드에 의해 계기점으로 촉발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촉발이 근대를 깨는 작용점이 되겠는가.

이 글의 중심내용은 대의제적 조직과 대표 자임 등에 대한 것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멸하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은 결국 외부개념을 그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전위와 대중의 상충지점에 대한 분석이 관심사는 아니었으며, 단지 아방가르드로서의 당개념을 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유물론의 중심내용으로 능동성, 주동성의 철학을 말하는데, 어찌보면 처음 제시한 개념의 크기에 비해서 제시하는 내용은 진부한 것 같다. 레닌이 아니라도 로자, 그람시 등은 능동성, 주동성, 의식성을 대단히 강조해왔고 정통성 이해에 따르면, 레닌은 의식성을 더 말해왔다. 이 글은 의도적으로 의식성이라는 개념을 회피하고 있는데, 이는 다분히 포스트모던한 개념 전략하고 궤를 같이하는 시도라 본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지적하면, 정통적으로 사용해 온 지도의 문제, 레닌의 외부설정에서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인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하의 당의 의식적 지도라는 문제설정을 이 글에서는 배제하고 있다.
아우토노미아와 관련하면, 자율성은 대중 자신이 올바른 투쟁방향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혁명 조직의 규율성, 혁명적 규율의 문제도 자율성 못지 않게 강조했고 또한 상식적으로 보면 투쟁 순간에 필요한 건 대중의 자율성이라기보다는 강고한 조직, 확고한 규율이라는 측면들이 이 글에서는 소거되어 있다.
또한 외부개념이 나의 이익, 우리 이익이라는 조합적 이해관계라는 편협적 이해관계의 외부라는 설정 자체는 설득력 있지만 문제는 안과 밖, 평면적 관계로서 보기보다는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나의 이익이 우리의 이익이 되고 전체의 이익이 되는가의 문제, 즉 외부라는 것은 헤게모니에 의해 매개되어 새롭게 구성되고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그러한 개념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안과 밖의 문제일 수 없을 것이다.

로자는 레닌의 자생성과 달리,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생성을 말하고 무의식적인 힘으로서의 자발성을 말한다. 자발성과 자생성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런 점에서 로자는 그 힘의 폭발을 중시했다면 레닌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1905년 혁명이나 1917년 혁명 등 그 힘을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자생성, 자발성을 찬탄하는 입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레닌에게는 자생성과 자발성이라는 것에 새겨진, 대중의 신체에 새겨진 부르주아지의 흔적들 때문에 자생성이 올바른 길로 가지는 않고 조합주의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고, 외부로부터의 주입이라고 생각하는 폭발과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생성과 자발성을 말하는 것과 촉발이라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자생성과 자발성이 자기 스스로의 촉발을 통해 올바르게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외부를 인정하지 않을 때 그것이 조합주의적으로 갈 경우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생성과 자발성은 외부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문제라는 것에 대해 닫혀있다면 편협해진 것이고 자멸하는 길일 수 있다. 외부촉발을 열고, 촉발에 대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재적인 것이다. 레닌이 보기에 표면적으로는 자기가 하는 경우에도 부르주아적인 의식이 있는 한에서는 능동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자발성은 능동성과 수동성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것에서 더 나아가는 것, 어떻게 프롤레타리아의 능동성으로 바꿔내는가가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그것이 능동성의 문제이다. 외부와 자발성의 문제를 같이 말해야 하는 이유다. 그람시가 말하는 자신의 철학, 상식, 삶의 원칙, 행동의 원칙, 사유의 원칙에 있을 때 철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레닌도 엥겔스도 철학이 있다고 본다. 일관성을 형성하고 있던 것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조직의 난립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남들은 전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은 전위라고 말하는 것, 좌파의 문제들에 대해서, 다수성, 복수가 문제가 아니라, 복수가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문제가 된 것 아닌가. 당이라는 형식이 아닌 것도 꼬뮨주의를 지향하면서 일군의 사람들로 써클이 조직된다면, 그것이 적극적인 사례가 되고 사람들을 촉발할 수 있다면 그것도 아방가르드다. 대표라는 것만 벗아나면 삶의 영역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강약을 가지고 촉발하고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심지어 하나가 될 수 있기도 하지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가 되면 깨져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 떄문에 종파주의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다. 전위와 대중을 구별하는 절대성은 없다. 대중 스스로 독자적 조직을 만들어서 앞에서 치고 나가면 그것이 아방가르드다. 때아닌 계기에 있어서 핵심을 꼬뮨주의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 얼마나 노동을 포섭하기 위해 애를 쓰는가, 클리나멘에서 어느 쪽으로 구부릴 것인가는 외부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세의 외부가 있어야 한다. 현 정세와 무관하다고 보이는 그 외부가 결정적 요소이다.
꼬뮨주의라는 일정한 벡터가 있다면, 이때 정세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로 나타나거나,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실상 직선이 아닌 곡선이라 할 수 있는데, 꼬뮨주의로 가는 경로란 정세를 무시하고 그것을 임의로 그릴 수는 없지만, 그러한 곡선을 타면서 이것을 다른 방향으로 벗어나게 만들 수는 있다. 즉 이는 꼬뮨주의 방향성 속에서 구부리는 것이다. 정세에 대한 판단은 한 지역이나 혹은 하나의 조직인 경우에도 그 정세가 어느 지점인가에 따라서 동일한 판단이 나올 수 없다. 노조 안에서 패미니즘을 하겠다는 사람이 동일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며 그것은 적대가 아니다. 내 주장은 복수의 아방가르드적 개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분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세분석도 복수적일 수 있다. 이 각각의 특이점을 형성하는 흐름들은 그런 것들의 모임에 의해서 우연적 종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전체를 기획할 수는 없다. 설령 기획한다 해도 그렇게는 안될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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