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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번 : [58호/연재-기획] 총선거의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쓴이: 다케오 데루오 등록: 2000-09-01 00:00:00 조회: 1531

국제노동

총선거의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대립의 기본축은 여당 대 야당이 아니라 바로 독점자본 대 노동자 인민 -


다케이 데루오 (武井昭夫)



편집자 주 : 이 글은 일본의 ‘活動家集團 思想運動’이 매월 1일과 15일에 발행하는 정치신문 ꡔ思想運動ꡕ No. 632 (2000. 7. 1.)에 실린, 武井昭夫 「總選擧の結果をどうみるべきか ꠏꠏ 對立の基軸は与党對野党ではなく, 獨占資本と勞動者人民こそある」를 번역한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들을 사민주의적 선거정당으로 조직해내지 못해 안달하면서 그것을 바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고 하는 강변이 횡행하는 우리 운동의 현실을 염두에 두면서 읽어주기를.




이번 6․25 총선거 결과를 총괄하여 대부분의 매스컴은 연립여당인 “절대 안정다수를 확보”, 야당 측에서는 “민주당과 사민당이 약진”, “공산당은 후퇴”라고 그 특징을 규정했다. 득표 및 획득의석 수로 본, 의회 내 여․야당의 성쇠라는 면에서는 그렇게 개괄해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의연히 4할 가까운 기권, 넓고 깊은 정치불신

오부치-모리(小淵-森) 정권에 대한 유권자(選擧民)의 비판은, 이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자민-공명-보수당(그리고 개혁구락부)이 각각 의회해산시에 보유하고 있던 의석에 비해서 38, 11, 11, 5라는 합계 65개 의석이 감소한 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특히 수도권을 필두로 전국 주요 도시지역에서의 자민-공명-보수 정권에 대한 비판의 바람은 강했고, 민주․사민당을 밀어 올렸다. 자민당의 노나카(野中) 간사장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으로 모리 정권은 신임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유권자의 비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선거구제라고 하는 지극히 불합리한 제도(소선거구의 득표에서 자민당이 41%의 득표율로 59%의 의석, 공산당은 12%의 득표율로 의석은 0%)에 방해를 받기도 해서 모리 정권이 계투(繼投)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에 머문 것도 사실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ꡔ아사히신문ꡕ(朝日新聞) 등은 선거 종반의 모리 발언 “(무당파 선거민이) 이대로 잠자 주었으면 …”을 포착하여,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무당파 여러분, 투표소로 가라”고 호소하고, 그들의 조사에서는 투표를 하겠다는 유권자의 의사표시는 80% 내지 그 이상으로까지 올라갔다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실제의 투표율은 그다지 올라가지 않았다. 사상 최저였던 지난번을 겨우 3% 상회했을 뿐, 사상 두 번째로 낮은 62.49%. 기권은 37.5%로 정치적 무관심파를 포함해서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니힐리즘(허무주의)은 여전히 넓고 깊은 것 같다.
기권자 가운데 어느 만큼인가 의식적으로 보이코트를 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설령 자민-공명-보수당이 과반수에 못 미치더라도 자유당이나 민주당에서 그 부족을 메울 것이고, 그들이나 이들이나 모두 같은 굴(窟)의 너구리들이라고. 민주당이 축(軸)이 되는 정권은 어떨까? (그러나) 의식적으로 보이코트를 한 사람들은 무라야마(村山) 정권 90년대 중반, 사회당의 당수인 무라야마가 수상을 했던 사회-자민 연립정권.
의 여러 잘못을 상기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도 있어서였는지, 부재자 투표를 용이하게 하고 투표 마감시간을 연장한 조치도, 전자(前者)는 아무래도 자민-공명당의 동원표에 보다 많이 활용된 듯하고, 후자는, 아마 대도시 지역의 투표소였겠지만 매스컴 각사(各社)의 이른바 출구조사에 의한 예측에서는 “자민당 대승”였었는데 실제의 결과에서는 “자민-공명-보수 3당 합해서 겨우 절대안정다수”라고 하는 불일치가 보여주는 것처럼, 아마 민주당에 유리하게 작용한 정도였다.
아무튼 그러한 것들을 포함해서 이번 선거의 결과는 모두(冒頭)에서 말한 것처럼 끝났다.


공산당 후퇴만이 예상외로, 모두 예상했던 대로

중복되지만, 여기에서 또 한번 이번 선거의 결과를 개괄해두자.
(1) 자민-공명-보수당의 여당 측은 각각 상당 수 의석이 줄었지만, 3당을 합해서 절대안정다수를 확보하고, 제2차 모리 내각을 성립시켰다.
(2) 여당연합이 줄어든 몫만큼 야당 중에서 민주당과 사민당이 각각 득표와 의석 수를 늘려 ‘약진’을 이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민-공명-보수 연합정권을 대체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3) 야당 중에서 오직 공산당만이 득표는 정체(소선거구는 절대 수와 비율에서 모두 대략 지난번과 비슷, 비례구는 모두 약간 감퇴)했고, 의석은 대부분의 예상에 반해서 지난번의 26석에서 이번의 20석으로 후퇴했다.
(1)과 (2)를 예측 내지 예감했던 사람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텔레비전의 정치 프로그램으로 친숙한 한 대학 교수가, 선거전 개시에 즈음해서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민-공명-보수당의 승리는 움직일 수 없다고 그의 예측을 말하고 있었다. 동석한 다른 해설자나 평론가는 변화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담아 여․야당 역전의 가능성을 말하는 가운데 그는 단호하게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고, 또 입수 가능한 조사자료에 의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 후 선거전 속에서 모리 수상의 ‘실언’(이라고 칭하는 ‘속마음’의 토로)이 계속되고, ‘무당파’ 유권자에 대한 매스컴의 호소가 강화되기도 했지만, 그러한 것들을 감안하여 조정한 바가 (1)과 (2)의 결과 예측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3)을 예상한 사람은 적지 않았을까? 앞에서 언급한 대학교수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이러한 결과와 결부시킬 수 있는 사전의 상황분석은 적어도 매스컴의 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전 논평은 “상당히 신장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본지(本紙)의 독자 중에도 이 결과를 이외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공산당 자신이 상당한 쇼크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퇴의 진정한 원인 규명이야말로 급선무

개표 다음 날 ꡔ아카하타ꡕ(赤旗)는 “총선거의 결과에 관해서”라는 제목의 중앙위 상임간사의 성명과 후와(不破) 위원장의 기자회견 담화, 그리고 일본테레비에서의 시이(志位) 서기국장의 발언을 게재했는데, 그것들은 한결같이 낙담을 숨기지 않는 힘빠진 것이었다. 그 다음다음 날의 ꡔ아카하타ꡕ의 주장 “선거의 실태가 제기한 것”을 포함해서, 발표된 문건은 대체로 모호하고, 이번 선거 결과를 초래한 원인과 관련해서는 그것을 선거기간 중에 전국 각지에서 대량으로 배포된 반공삐라나 팜플렛 탓으로 돌리면서 이 “반공모략작전”을 기획․실시한 자민당․공명당․창가학회를 비난하는 것으로 시종했다.
하지만 과연 공산당의 후퇴는 자민-공명-보수 세력이 획책한 반공삐라․팜플렛의 대량 배포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ꡔ아카하타ꡕ에 의하면, 그 양이 1억 수천만 매라니까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는 오부치-모리의 자자공(자민-자유-공명당) ꠏ 자공보(자민-공명-보수)로 이어지는 연합정권의 정책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 가운데 얼만가의 표가 공산당으로 흐르는 것을 저지하는 역할 정도였을 것이다. 중상과 모략에 찬 저질의 인쇄물을 보고 더욱더 자민-공명-보수의 연합을 정권의 자리에 놔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통감한 사람들 쪽이 많지는 않았을까?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 자자공-자공보라는 연합정권과 싸워온 사람들, 그 과정에서 공산당에 마음을 기울여 온 사람들이 그러한 삐라나 팜플렛에 현혹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더 깊은 것, 더 근본적인 사정과 관련된 곳에 있다는 것을 일본공산당은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공산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당에 미래를 맡기려고 지지하는 사람들, 비판적이지만 다른 길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 나아가서는 이 당을 극복하려는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문제는 없을까?
이번 총선거가 제기하는 문제 가운데 요점은 거기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제는 거기에서부터 생각해보자.


대중투쟁을 망각하고 국회 내의 대안당으로

이번 선거에 임하면서 공산당은 “일본개혁”의 제안으로서, 예컨대 공공사업비를 앞당겨 쓰는 경기자극책에 반대하여 “고용확대와 사회보장의 충실”에 의한 “개인소비 확대”, 그에 의한 “경기회복”을 주장하고, 이를 자민-공명-보수 연립정권의 정책에 대한 대안 제출이라고 부르면서 “당당한 정책논쟁”을 거는 것이라고 자찬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걸림돌이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본래 노동자 인민의 투쟁의 선두부대이자 전위여야 할 이 당을 단순한 의회 내 야당, 대안(代案)의 제출자로 유도하는 것, 그것이 자민당 등 지배계급 정당의 노림이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자. 지금까지의 오부치 정권의 “규제완화”란 이름의, 노동자 인민의 기존의 권리에 대한 난폭한 침해, 나아가서는 “구조조정”이라고 부르는 교활한 인원삭감(그리고 노동강화)에 대해서 일본공산당은 어떠한 현실적인 투쟁을 조직하여 왔는가? 하다 못해 조직하려고 해 왔는가? 또한 무자비하게 강행된 사회보장의 삭감․감축, “개호보험”(介護保險)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의한 인민 층에 대한 강제적인 부담 증가, 게다가 실질적인 개호의 내용 저하에 대해서 어떠한 대중적 반대투쟁을 조직했는가? 적어도 투쟁을 계획하고 호소했던가? 후와-시이 지도부는 그저 ‘반대’를 표명했을 뿐이었다. 즉, 그들은 오부치 정권의 ‘룰(rule) 없는 자본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그들이 말하는 ‘룰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선전하여 그것에 대치시켜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또 하나만 더 얘기하자. “오키나와 정상회담”이라는 ‘덫’을 설치해서 당시의 오다(大田) 지사까지 거기에 빠뜨려 오키나와의 반(미군)기지투쟁을 억누르려 해온 지배계급의 간특한 흉계에 항거하여 이 당의 지도부는 도대체 어느 만큼이나 일을 했던가? 선거 한번에 드는 에네르기(돈과 사람과 지혜)의 10분의 1이라도 쏟아 부어 본토의 투쟁을 조직하려고 해 왔던가? 천 번을 물어도 아니다. 이는, 오키나와 현지투쟁에 연대하고, 그것을 자신의 투쟁으로 삼아 분주해온 공산당원이 있다면, 그들이 증언해줄 것이다.
그 동안 후와-시이 지도부가 할 수 있었던 ‘지도’는 “다가오는 국정선거에서 자민당 지배를 타파하자. 우리 당의 진출이야말로 상황을 바꾼다”고 하는 호소였다.


‘약진’ ‘승리’의 환상, 신정권 참가를 몽상

일본공산당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총선거가 3년 8개월만에 찾아 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노동자 인민의 투쟁의 커다란 물결이 말로 다할 수 없는 폭정을 거듭한 자민당 중심의 연립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선거는 아니었다. 오부치 수상의 갑작스런 사망이 오키나와 정상회담 후의 임기 만료에 의한 총선거라는 일정을 앞당겨 정상회담 전에 시행하게 한 것이다.
당은 투지를 다하여 선거전에 임했다. 준비를 하면서 후와 위원장은 100석 획득을 목표로 한다는 실언도 했다. 역시 시이 서기국장이 곧바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다음 번엔 100석이지만 이번에 당장 목표로 하는 것은 50석이라고 실질적으로 이를 수정했다. 어떻든 그들은 이번 총선거에서의 ‘약진’과 ‘승리’를 크게 기대하고 거의 그 실현을 믿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자기 당의 ‘승리’ ‘약진’의 이면에서는, 자민-공명-보수 세 여당이 어쩌면 과반수에 못 미치지 않나 하는 기대와, 그에 기초한 연합정권(‘보다 나은 정권’)에의 참가라는 환상까지 움트고 있었을 것이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질문을 받자 시이 서기국장은 “정책만 일치하면 연합정부에 참가할 용의가 있고, 그때에는 자위대의 축소나 그 점차적 해소, 혹은 안보조약의 파기는 주장하지 않는다”는 뜻을 언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원래 자민-공명-보수당을 대체할 신정권이라면, 연립의 대상은 민주당을 축으로 사민당과 자유당의 3당이 있을 뿐이다. 오자와(小澤)의 자유당은 말할 나위도 없고, 민주당 당수 하토야마(鳩山)는 (무력 사용을 영구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 역자) 9조를 중심으로 한 개헌의 제언자이고, 게다가 그의 재정정책으로 말하자면, 소득세의 과세면제액의 인하를 제일로 내거는 등 자본가 본위의 재정개혁론자다. 도대체 어디에 “정책의 일치” 같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기어코 하겠다고 한다면, 공산당 쪽에서 몸을 굽혀 갈 수밖에는 없다. 이 당은 과거 20년 이상에 걸쳐서, 아니 벌써 30년인가, 그것을 실천해 왔던 것인데, 이번 선거에서는 마침내 그러한 자세를 노골적으로 취했던 것이다.


이번 총선의 진짜 쟁점은 무엇이었는가

이번 총선거의 최대의 쟁점으로 되었어야 할 노동자 인민 측의 요구와 주장은, 첫째로 헌법의 옹호, 그 원칙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이고, 둘째로는 그에 기초하여 신(新)가이드라인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미일군사동맹을 향한 발걸음의 저지․저항이고, 셋째로 노동자 인민의 제 권리와 생활을 파괴해 마지않는 독점자본 본위의 경제정책․노동정책․사회정책과의 투쟁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지금 미제국주의를 선두로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대결과 결부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고, 바로 이를 위해서 표를 모으는 것이어서, 이를 버리고 표를 모으기에 나서는 것은 본말(本末)의 전도(顚倒) ꠏꠏ 다름 아니라 공산당이 공산당으로서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공산당은 이번 총선에서 위의 어느 하나도 적극적으로 쟁점으로서 내걸려고 하지 않았다. 자민당과 자유당, 게다가 민주당이 각각 일본자본주의의 요청을 내걸고, 일본의 노동자 인민에게 그에 참고 복종할 것을 설교하고 있던 때에 말이다. 아니러니하게도 사민당의 도이다카코(土井たか子)가 혼자서 평화와 헌법의 옹호,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의 방어를 호소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라고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 당의 당수였던 무라야마[村山]가 자민당에 속아 수상의 자리에 앉자 철면피하게도 “자위대 합헌, 안보 용인(容認)”을 공언한 장본인이고, 도이는 새로운 당수로서 아직까지 공공연히는 그것을 부인하고 반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총선거에서 앞에서 말한 기본적 쟁점과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의 대결에 관해서 후와-시이의 입으로부터 어떠한 투쟁의 결의를 들을 수 있었던가? 거듭 말하지만, 획득한 표의 수나 의석 수의 증감을 묻기 전에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선적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대중적 전위의 길로부터 집표기(集票機)로

그런데, 서술에 앞서, 이러한 병폐가 일본공산당을 좀먹은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병의 원인과 병력(病歷)을 모르고는 병을 치료하거나 극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병폐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은 대략 1970년대, 일본공산당이 미야모토-후와(宮本-不破) 지도부를 확립시킨 이래의 일이다. 그 이래 이 당은 일본의 노동자 인민의 선두에 서서 독점자본의 공격에 대해서 사람들을 투쟁으로 유도하는 전위로서의 임무를 차츰차츰 방기하고, 스스로 그 기능을 녹슬도록 내팽개쳐 왔다. 사람들을 투쟁하도록 유도하기는커녕 사람들을 투쟁으로부터 떼어놓기까지 했다. 표가 모이지 않는 곳엔 오지 않는다. 표를 잃을지 모르는 것으로부터는 몸을 피한다 ― 이렇게 하고 어떻게 “고립돼 있는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선거전에 들어가서는 자본측의 인민공격에 대해서 그에 대한 분노나 원한을 의식상으로든 행동에 의해서든 대중적으로 표현하는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본래 공산당의 본연의 자세를 아는 자에게는 초보 중의 초보인데도), 대중적 계급투쟁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자신을 단련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미야모토-후와의 관료적 지도와 그 조직노선이 확립․관철되어감에 따라서 이 당은 스스로를 고도로 조직화된 집표기(集票機)로 만들어가 버렸다. 지도부는 그렇다 치고, 그에 맹종하는 하부도 자신을 집표기화하는 데에는 부심(腐心)하지만, 대중적 계급투쟁 ― 특히 그 집약적 형태인 대중적 정치투쟁 ― 을 조직하는 능력을 익히는 노력을 태만히 하여, 차츰 그 기능을 상실해 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여 오로지 중앙 및 지방의 선거에 집중하는 길을 걸은 지 이미 수십 년이 된다. 그 사이에 노동운동에서는 총평(總評)이 해체되고 렌고(連合)가 제패(制覇)했고, 평화운동, 청년운동, 학생운동에는 분열과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 일반적인 침체가 왔고, 여성해방이나 환경보전 투쟁의 ‘시민주의’화가 진행되었다.
정당의 분야에서는 자민당의 보수에 대한 사회-공산당의 혁신의 대치(對峙)라는 55년 체제가 붕괴되고, 자민당이 갈라져서 지금 또 곡절을 거치면서 이윽고 자민당을 축으로 하여 자유당과 민주당에 의한 정권담당을 다투는 경합으로의 길이 출현했고, 예전의 의회에서는 혁신야당의 축으로 되어 있던 사회당은 분열․해체되어 그 우파는 민사당과 함께 민주당 속에 흡수되고, 중간파는 의회 내의 소수당파가 되어 사민당을 칭하면서 그 동안 집표기능을 강화해온 공산당을 추종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그 좌파는 신사회당으로서 결집을 꾀하고 있다. 우리는 그 재건이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호헌과 평화, 사회주의의 당과는 서로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집표기, 그 기능은 한계에

공산당의 미야모토-후와 지도부는 ― 그후에 후와-시이 체제로 바뀌었지만 ― 자기 당의 득표와 의석의 증감에만 눈을 빼앗겨, 의회 내에서의 자기 당의 사소한 성장이, 첫째로 자기 당이 의회주의적으로 위축되고 있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둘째로 적어도 의회 내의 의원 수에서 과거의 혁신․호헌세력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던 사회당의 해체․소멸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아직도 부지런히 자기 당의 집표기화를 추진해온 후와-시이 지도부와 그에 충실한 당 관료들은 이번 총선거를 앞두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듯이 분발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때 30년이나 걸쳐서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집표기의 기능에 결정적인 그늘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이번 총선거의 결과에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기계가 기능해야 할 토양이 황폐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갈되어 온 이 토양에 사상이라는 자양분을 주고, 이것을 다시 갈(耕)지 않는 한, 공산당(만이 아니라 널리 공산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에게 있어 새로운 표의 수확은 이미 많이는 바랄 수 없는 시대에 와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표밭이라고 생각되는 운동분야에 종파주의적인 울타리를 치고 교묘하게 표를 모으면 되었다. 지역에서는 기피하지 않도록 계급성을 깎아 내리고 다가가면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정신을 차려서 보면, 표밭의 대상 자체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투쟁을 모르는 세대가 유권자의 대수가 되고 있다. 대중투쟁 속에서의, 그것을 매개로 한 의식형성 운동 ― 그것 없이는 집표기도 기능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90년대에 진행된 시대상황의 대변동

되돌아보면,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걸쳐서 70년을 이어온 쏘련․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차례로 붕괴되었을 때, “이기면 관군이요 지면 역적”이라는 식의,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반공․반사회주의 보도와 정보의 탁류가 우리의 주변을 솟구쳐 소용돌이쳤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홍수 속에서 행선지를 잃어, 혹은 후방으로 밀리고, 혹은 수몰되어 갔다. 사상전향은 속속 끊이지 않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때 한편에서는 승리한 세계자본주의도, 74, 5년의 공황을 상회하는 파괴력을 떨친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경제위기 속에 있었다. 90년대 전반(前半)의 이 혼란 속에서 새로운 제국주의적 세계지배 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의 정책, 그 세계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와 병행해서 진행된 사회주의 세계체제 붕괴와 그후의 혼란이 마찬가지로 위기에 선 자본주의 세계의 회복, 신자유주의의 길로의 탈출을 도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 자본주의도 역시 이른바 ‘버블(거품) 붕괴’의 후유증에 허덕이면서 신자유주의 체제 만들기 속에서의 자기의 지위와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90년대 전반의 탁류에 이어 후반인 최근 수년 동안에 일본의 지배계급은 자기 나라의 노동자 인민에 대해서 차례로 기존의 권리를 뿌리째 뽑을 듯한 공격을 전개했다. 그 기치가 ‘규제완화’이고,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이며, 표어가 ‘자주노력’, ‘수익자 부담’이어서, 말하자면 ‘구조조정’이 유행했다. 공격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의 지배계급 측과 노동자 인민 측의 힘 관계는 최근 수년 동안에 급격히, 또한 크게 지배계급 측으로 기울었다.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여유는 없지만, 이 급격한 변동의 원인은, 앞에서 그 일단을 본 것처럼, 오랜 기간에 걸친 계급투쟁의 추이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착실히 배양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화(顯在化)하는 과정은 아주 맹렬하다.


공산당은 방향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번 큐슈․오키나와 정상회담을 앞두고 오부치 정권이 일사천리로 해치운 미일가이드라인 관련 제 법률의 제정으로부터 국민총고유번호제의 착수, ‘기미가요’(국가), ‘히노마루’(국기)의 법제화, 2년 후의 개헌을 전제한 국회 내 헌법조사회의 설치와 그 심의 진행의 강행군 등에서 볼 수 있다. 갈팡질팡하는 속도로 일은 진행돼 왔는데, 후와-시이 지도부 하의 일본공산당은 오부치-모리-노나카(野中) 등 자민당 주류가 강행하는 완력정치에 대해서 어떠한 반격․저지투쟁을 조직할 수 있었는가?
거대한 집표기는 선거연설회라도 되면 수도의 각 터미널 역 주변에 연일 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 그 중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구경꾼도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도 계산한 선거전략은 뛰어나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것이다. 만일 유사시에 투쟁하는 노동자 인민의 선두에 서지 않는 전위, 역전에서 자기 당의 지도자나 후보의 손을 흔들 수는 있지만 가이드라인 관련법에 반대하여 파업을 조직하고 데모의 물결로 국회를 에워쌀 역량과 기개를 잃고, 무슨 ‘공산당’인가?
선거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각 텔레비전 방송국의 해설저들로부터 한결같이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그만두고, ‘강령’도 바꾸면 어떠냐는 공격을 받기도 하고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미 그 실체를 잃고 있는 것이다. 후와 위원장이 계속 집필해온 ꡔ레닌과 「자본론」ꡕ(5권)은 그 자신의 이론상의 전향의 기록이었는데, 동시에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당 자체의 집단 전향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보았듯이, 거대한 집표조직으로서의 기능의 한계를 본 이 당은 지금 선두에 선 ‘하메룬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이끌려 지금부터 어디로 향할까, 우리는 그것을 단지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미제(美帝)와 손을 잡고 나아가고 있는 일본제국주의를 어떻게 해서든 억눌러 그 진로를 바꾸게 하고, 이 나라와 사회 자체를 사회주의를 향해 변혁시키려고 지향하는 사람 전체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추기]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글은 의회를 경시하는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의회로 수렴하는 사고에 반대하고, 의회선거에 당의 기본적 활동을 집약하는 것의 위험을 여기서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당을 표 모으는 기계로 만들어온 당 지도부의 방침에 대한 비판이다. 선거 투쟁에 임해서 당이 득표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고, 각급 당조직이나 당원이 그에 헌신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당원이 지역이나 직장에서의 일상활동을 통해서 만들어 가는 인간관계가 득표활동으로 연결되는 것도 당연하다. 대지의 소금과 같은 이러한 사람들이 활동이 없이는 오늘날까지의 공산당의 의회 내에서의 지위도 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끊임없이 그것을 가장 중요시하고, 모든 것을 거기에 집약시켜버리는 지도방침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한/노/정/연


번역 : 편집기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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