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쌀의 국가관과

독일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영향과 의미

정 병 기/연구기획실장

¹⁾

요약

독일 사민주의 정당운동은 라쌀이 창당한 전독일노동자연맹과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민주의노동자당이 1875년 통합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창당된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분리를 거치면서 오늘날 사민당으로 발전해 왔다.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 전개된 강령 논쟁은 대개 라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둘러싼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연구와 분석 또한 사민당에 대한 양자의 영향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일반적인 결론은 마르크스의 선구적 이론이 라쌀적으로 계승되었다거나, 일정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도 마르크스적 이념과 라쌀적 실천이 관철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으로 건설된 사민주의노동자당 강령에서부터 이미 라쌀주의의 영향은 근본적으로 나타났으며, 현대 사민당에 이르기까지 라쌀주의의 의미는 실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강령적인 면에서도 결코 퇴색하지 않고 있다. 독일 사민주의 정치의 변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혁명적 성격을 수정해 온 결과가 아니라, 라쌀의 전통에 마르크스를 이론적으로 접목하려던 과정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 글은 현대 독일 사민주의 정치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해 그 핵심적 뿌리인 라쌀의 국가관을 살펴보고 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영향과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라쌀의 국가관과 관련해서는 헤겔과 피히테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국가관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계급 국가관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먼저 이를 라쌀의 국가관과 연결시키기 위해 그의 현실 정치를 살펴본 후 사민당의 발전단계를 구분하고 그에 따라 구체적인 영향과 의미를 추적하였다.

* 주제어 : 라쌀, 노동자 생산조합, 노동자국가, 사민주의, 사민당

1. 서론

페르디난드 라쌀(Ferdinand Lassalle)은 최초의 독일 노동자 정치조직인 전독일노동자연맹(ADAV, 1863)을 결성한 인물로서 독일 사민주의와 노동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869년 베벨(August Bebel)과 리프크네흐트(Wilhelm Liebknecht)가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을 결성한 이후 수정주의 논쟁을 거치기까지 독일 노동자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특히 1875년 전독일노동자연맹과 사민주의노동자당이 통합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SAP)으로 재건설된 이후부터는 라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독일 사민주의와 노동자운동에 어떻게 그리고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영향을 미쳤는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실제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이후 양자의 영향은 때로는 조화를 이룬 듯하나 또 때로는 상호 경쟁과 갈등 속에서 당의 이론과 실천의 방향을 결정해 왔다. 우선 고타(Gotha)에서 건설된 이 통합정당은 마르크스주의와 라쌀주의의 접목에 의해 가능했는데, 이는 고타 강령 표지에 마르크스와 라쌀의 초상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 것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1891년의 에어푸르트(Erfurt) 강령개정에서는 카우츠키가 작성한 이론 부분에서 라쌀의 영향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던 반면,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에 의해 기술된 실천 부분에서는 라쌀의 영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박호성이 독일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천착하는 가운데 1차대전 이전의 독일 노동자운동이 가졌던 특징을 마르크스주의와 라쌀주의의 이론적 갈등 및 라쌀주의의 이중성에 따른 이론과 실천의 괴리로 파악한 것도 이러한 부분에 주목한 것이다(박호성 1994, 35, 55).

독일 사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와 라쌀주의의 영향에 관한 연구들은 마르크스의 선구적 이론과 그 이론의 라쌀적 계승을 주장하는가 하면, 일정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도 마르크스적 이념과 라쌀적 실천이 관철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1차대전을 전후한 수정주의 논쟁을 거쳐 2차대전 후 국민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독일 노동운동과 사민주의 정치에 대한 라쌀의 영향은 비록 공공연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작용해 왔다. 독일 사민주의 정치의 변화는 마르크스의 전통에서 혁명적 성격을 수정해 온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라쌀의 전통에 마르크스를 이론적으로 접목하려던 과정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 사민주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와 엄격히 구별되는 라쌀주의의 전통은 무엇보다 라쌀의 국가관과 관련된다. 따라서 독일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영향과 의미는 라쌀의 국가관에 뿌리를 두면서 그의 현실 정치력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현대 독일 사민주의 정치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해 그 핵심적 뿌리인 라쌀의 국가관을 살펴보고 위와 같은 관점에서 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영향과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가관과 관련해서는 라쌀주의가 독일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는 관점에서 역사적 존재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먼저 살펴본 다음 라쌀의 국가관을 구체적으로 고찰해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먼저 이를 라쌀의 국가관과 연결시키기 위해 그의 현실 정치를 살펴본 후 구체적인 영향과 의미를 추적할 것이다.

2. 라쌀 국가관의 사상적 연원: 헤겔, 피히테, 마르크스의 영향

라쌀에 있어 역사는 헤겔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의 발전’으로 이해된다. 라쌀의 역사관은 무엇보다 헤겔의 영향 속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라쌀이 본 역사는 자연상태와의 투쟁, 즉 빈곤, 무지, 무기력 등 모든 종류의 부자유(예속)에 대한 투쟁이다. 이러한 제반 예속에 대한 투쟁과 승리는 변증법적 과정을 밟아 자유의 발전으로 이어진다(Lassalle 1964, 234-235).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의미하는 자유는 헤겔이 볼 때 그 역시 원칙적으로 하나의 예속에 해당하는 ‘자유의지(Willkur)’이다. 자연법적․자유주의적 자유란 무엇보다 객관적․초개인적 존재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로서 구체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의식적으로 해방된 상태라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 개념은 낭만주의와 보수주의에 의해 평가절하된 것으로서, ‘구체적․적극적 자유’가 아닌 ‘추상적․소극적 자유’에 불과하다. 계몽주의 시대 초기에는 이러한 자연상태에서의 ‘추상적․소극적 자유’가 추구되었다면, 말기에 가서는 헤겔이 말하는 국가 안에서의 ‘구체적․적극적 자유’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라쌀의 관점에서 자유는 교육과 지식 및 의지를 통해 쟁취될 수 있다. 따라서 헤겔식으로 이해할 때 세계의 역사는 “자유로의 발전”인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에서와 달리 헤겔에게 있어 초개인적인 존재는 개인의 도덕에 대해 윤리적 우위를 갖는다. 곧 개인은 자유의지(Willkur)가 구체적․적극적 자유를 향해 지양되고 그 필연성이 인정될 때에만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개인적 존재로서의 국가는 자유의지를 제한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구체적․적극적 자유는 비로소 국가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결국 국가를 통해서만 모든 가치를 담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가 ‘윤리적 삼라만상(sittliche Universum)’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국가의 윤리적 자율(sittliche Autonomie)에 대한 헤겔의 고찰은 가족과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가족은 자연적인 사랑의 윤리성에 기초하며, 시민사회는 하나의 목적조합(Zweckgenossenschaft)¹⁾을 성립시키는 특수한 목적에 의해 지배된다. 목적조합에서 각 구성원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한에서 타인의 복지를 충족시킨다. 시민사회는 곧 특수성의 원리에 기초한 개인의 욕망체계와 보편성의 원리에 기초한 상호의존의 체계라는 두 가지 원리를 바탕으로 일정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하일민 1995, 57). 그러나 사회적 주체가 자신의 욕망충족을 위해 타인과 결합하는 사적 개인이므로 이 통합은 참된 의미의 통합은 아니다. 목적조합의 특수성과 보편성은 이성국가로서의 국가에 의해 비로소 진정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다. 곧 국가는 목적조합을 향상시키고 개선하여 그 특수성을 가장 높은 차원의 윤리적 목적 아래 통제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가장 높은 차원으로 발전된 이성국가를 유기적 총체(organisches Ganzes)라고 하였다. 따라서 라쌀에게 있어 국가의 존재는 헤겔이 본 바와 같이 절대정신의 논리적 필연성의 하나이며, 결코 지양될 수 없는 것이다(Vogel 1925, 85).

그러나 역사의 종말 또는 지속과 관련하여 라쌀은 헤겔의 입장을 부정하였다. 자유로의 발전이라는 의미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헤겔의 입장과 달리, 현대는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의 중간에 해당한다고 라쌀은 본 것이다. 라쌀에게 있어 철학적 방법론의 비밀은 “역사의 운동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Speier 1929a, 118; 1929b, 362). 슈파이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역사의 지속성에 대한 라쌀의 이러한 관점은 피히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²⁾

한편 노동자운동과 관련된 실천적인 면에서 라쌀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는 그의 ‘노동자강령(Arbeiterprogramm)’에 나타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라쌀이 볼 때 프랑스 혁명은 자유로운 인간성의 계발이 처음부터 신분적 특권에 의해 저지된 중세 신분국가의 부정이었다. 이 혁명은 주체의 권리가 특정한 하나의 신분에 종속된 중세 국가와는 반대로 추상적 인간성의 절대적 권리의 원칙을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단순한 형식적 권리에 머문 채 절대적 권리로 선언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을 통해 달성된 자유는 하나의 추상적이고도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개인은 재산이나 소유 또는 금전 등과 같은 자신의 생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 이 모든 형식적․법적 인정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적 자유는 일반적 자유의 원칙과 조화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라쌀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비귀족적 계급이 두 개의 다른 하위계급, 즉 노동자계급³⁾과 부르조아지로 와해되어 가고 있음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Lassalle 1964a, 213-4; Na’aman 1970, 460-1). 프랑스 혁명은 토지소유의 원칙과 예속의 원칙을 자본의 원칙과 자유의지(Willkur) 또는 “연대 없는 자유(Freiheit ohne Gemeinsamkeit)”의 원칙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였다.

라쌀에 있어 완전한 자유란 “자유 속의 연대(Solidaritat in der Freiheit)”이다. 이러한 자유는 시민적 소유국가에서 물질이나 우연에 대한 인간의 종속을 지양하는 것으로서 공산주의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라쌀이 의미하는 공산주의 사회란 ‘죽은 객관성의 예속(Banden der toten Objektivitat)’, 즉 물질적 종속으로부터 주체들이 해방된 사회이기 때문에 소유의 원칙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자유의 개념은 연대의 상태와 동일하며 연대의 상태는 다시 그 자체로 자유 개념의 실현이므로 공산주의에서는 자유가 가장 높은 차원의 공동성(共同性, Gemeinsamkeit)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Lassalle 1920, 321).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부자유에 대한 역사적 투쟁들을 각자 개별적으로 수행했거나 수행한다면, 진보는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곧 국가가 자유의 발전과 자유로 향하는 인간의 발전을 실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Lassalle 1964a, 235). 국가는 라쌀에게 있어 “윤리적 총체 속에 개인들이 통일된 존재(Einheit der Individuen in einem sittlichen Ganzen)”이며, 이 통일체 내에 속한 모든 개별적 인간들의 힘은 이 통일체를 통해 수백만배로 증폭된다고 한다(Lassalle 1964a, 235). 따라서 라쌀은 국가의 목적을 “인간 존재를 긍정적인 발전과 진보적 계발로 이끄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Menschliche Bestimmung)―인간에 알맞은 문화―을 실존으로 형성”해 내는 데 있다고 보고, 이를 “자유를 향한 인간의 교육과 발전(Erziehung und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 zur Freiheit)”이라고 규정하였다(Lassalle 1964a, 235).

3. 라쌀 국가관의 이중성: ‘노동자 국가’의 이중적 성격

포겔(P. Vogel)은 라쌀을 순수한 사회주의자로 지적하였는데, 이는 라쌀이 국가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Vogel 1925, 326 참조). 포겔에 따르면 라쌀은 국가를 높은 차원의 사회적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으로 간주했으며, 람(Th. Ramm)의 지적에서도 라쌀의 국가는 최종지점에서 사라지는 것이다(Ramm 1953). 실제 라쌀에 있어 국가는 헤겔에 있어서와 같이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포겔과 람의 지적에서와 같이 라쌀이 파악하는 국가가 현존 사회질서의 극복을 위한 일시적 수단인 것도 아니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국가는 노바(Fr. Nova)가 지적한 것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것이다(Nova 1980, 55). 그 하나가 절대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으로서 인간의 교육이라는 도덕적․정신적 의무와 관련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권력(Macht)의 측면을 말한다. 부르조아의 국가이념과 노동자의 국가이념을 구분 짓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으로서 국가는 “구원의 손길로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 삶의 조건을 실현”해 내는 의무를 갖는다고 라쌀은 언급하였다(Lassalle 1964b, 349). 그에 따르면 부르조아지는 국가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권력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르조아지들에게 있어 국가의 목적은 “개별 사회구성원들에게 단지 개인적 자유와 소유를 보호”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Lassalle 1964a, 235). 이들의 국가란 곧 야경국가를 의미한다(Lassalle 1964a, 234). 라쌀의 판단에 따르면 부르조아지의 개인적 이해관계와 민족의 문화발전은 대립관계에 있으므로 사회의 고위 신분으로서 부르조아지는 하나의 “필연적인 비윤리성”으로 전락하게 된다(Lassalle 1964a, 232). 그에 따라 부르조아지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는 윤리적 성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부르조아지와는 반대로 노동자계급은 국가를 국가의 고유한 목적으로부터 괴리시킴으로써 옹호해 나가야 할 어떠한 특권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면 “가장 고차원의 온전한 의식”을 가지고 국가의 진실한 “윤리적 본성을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는데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라쌀은 확신한다(Lassalle 1964a, 236). 라쌀은 또한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경향성과 계급상태 개선 노력이 “전체 인민의 발전과 이념의 승리 및 문화의 진보 그리고 역사의 생존원칙 자체”와 조화를 이루며, 궁극적으로는 “자유의 발전”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했다(Lassalle 1964a, 236). 라쌀에 의하면 노동자계급은 역사에서 이해관계와 공동성(共同性) 및 호혜주의의 연대라는 윤리적 이념을 관철시킨다(Lassalle 1964a, 227, 234). 따라서 국가의 윤리적 성격과 권력적 성격은 노동자계급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에서만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그 후에야 국가는 일정하게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도 권력으로서의 국가는 사라지되, ‘윤리적 총체 속에서의 개인들의 통일된 존재’라는 순수한 의미의 국가는 지속된다. 이러한 점에서 라쌀적 의미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도구로 파악됨으로써 계급모순의 지양을 통해 전체적으로 소멸하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국가와는 엄격히 구별된다.

라쌀은 또한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에 국가의 권력은 결코 약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강화된다고 했다. 라쌀은 자신의 ‘론스도르프 연설(Ronsdorfer Rede)’에서 “통합된 민주주의에서의 통찰의 독재(Diktatur der Einsicht in der integralen Demokratie)”라는 개념으로 이를 근거지웠다(Na’aman 1963, 65). 구(舊) 민주주의에서 일정한 형태의 독재가 항상 존재했는데, 라쌀에 의하면 속류민주주의자들이 구체제의 유지를 청산하고 새로운 지배질서를 창출․안정화시키기 위해 요구하는 통치자개인에 의한 독재도 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에서 나타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형식적으로 본다면 공산주의자에 의한 독재로서 라쌀이 말하면 이성의 독재(Diktatur der Vernunft)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Na’aman 1963, 65). 인민은 지성(Wissenschaft), 즉 통찰(Einsicht)을 인정하며 그에 복종한다고 라쌀은 본다. 이러한 지성의 지배가 곧 ‘통찰의 독재’인 것이며, 통찰은 또한 환언하면 이성을 의미한다. 통찰은 곧 무엇을 알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실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민은 이러한 독재의 필연성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통찰에게 위임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가 곧 라쌀이 언급하는 통합된 민주주의(integrale Demokratie)의 개념적 표현이 된다(Na’aman 1963, 65).

4. 라쌀의 노동자국가관의 정치적 실천방향: ‘노동자생산조합’ 건설과 의회진출

라쌀은 새로운 사회의 실현을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과제로 규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개체적 개인으로서 배타적이고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경주한다면 어떠한 진보도 이루어낼 수 없다고 한다. 개인들의 자유로운 노동자결사체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결사체가 이러한 과제들을 자신의 수중에 실현할 수 있도록 가능케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자 과제라고 라쌀은 설파한다. 다시 말해 개인들의 자유로운 노동자결사체는 “국가의 지원과 원조”에 의해 가능하며, 이러한 결사체가 바로 노동자들이 처한 상태인 “황무지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된다는 것이다(Lassalle 1964c, 262).

그밖에도 라쌀은 사회적 자구(soziale Selbsthilfe) 행동과 관련하여 임금의 “경제적 철칙”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철칙이란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평균 임금은 생존과 재생산에 필요한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항상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Lassalle 1964c, 253).⁴⁾ 곧 평균최저생계비를 초과하는 임금인상이 이루어진다면 결혼과 출산이 증가하여 노동인구, 즉 노동력공급이 증가할 것이며 그 결과 임금은 다시 하락한다는 것이다. 이때 임금하락은 일시적으로 최저생계비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으나 이러한 상황이 결코 지속될 수는 없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의 빈곤화가 초래됨으로써 출산이 다시 감소하고 유랑이 증가하여 노동력 공급이 감소하며 그에 따라 임금이 다시 상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노동조합의 활동은 ‘시지푸스의 도로(徒勞)’이다. 라쌀에게 있어 노동조합은 원칙적으로 임금인상투쟁을 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Auerbach 1972, 61-81; 정병기 2001, 58).

한편 자본의 이윤은 소비자가 지불하는 생산품가격과 기업가가 지불하는 임금간의 차이, 즉 노동자들(생산)의 노동기여소득(Arbeitsertrag)과 노동임금간의 차이로 형성된다고 한다(Grigorovici 1910, 16).⁵⁾ 라쌀은 교환가치(가격)와 사용가치를 구별한 마르크스와 달리 가치와 가격에 관한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소비자가 지불하는 상품가격을 생산에 대한 노동기여소득과 일치시켰던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에 시장의 수요를 가미한 그의 가치론에 근거한다.⁶⁾ 물론 여기에서 기업가의 경영 활동에 대한 대가인 기업가소득 역시 정신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임금에 해당한다. 따라서 자본의 이윤은 정신노동을 포함하여 생산활동에 투여된 일체의 노동기여분에 따른 총소득과 시장에서 거래된 결과인 상품가격 총액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이윤과 임금철칙을 지양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임금을 ‘노동기여소득(Arbeitsertrag)’으로 대체해 생산에 기여한 노동의 가치를 온전하게 보상받거나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기업가가 되는 것이라고 라쌀은 주장한다(Lassalle 1964c, 261). 이는 곧 생산수단이 노동자계급에게 전유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노동임금과 이윤이 모두 노동자에게 귀속하게 되는 것이다. 라쌀에게 있어 노동임금과 자본가이윤은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노동기여소득의 두 요소이기 때문이다(Na’aman 1961, 446-7).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용이하고도 필요한 과도적 수단으로서 라쌀이 제시하는 것은 국가가 지원하는 노동자생산조합(Produktivgenossenschaft der Arbeiter mit Staatshilfe)이다. 라쌀의 이러한 구상은 분명 루이 블랑(Louis Blanc)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라쌀이 구상한 생산조합에 대한 국가의 기능은 블랑에서와 달리 자금의 지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생산조합의 규약 승인뿐만 아니라 사업운영상 이해관계의 안정을 위한 통제까지도 국가의 역할로 규정된 것이다(Mayer, 1894, 69).⁷⁾

라쌀은 다른 한편 노동자층은 독립적인 정치조직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의회로 진출하는 것이 라쌀에게 있어서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동등권과 자유를 인정받는 것임과 동시에 계급으로서의 이해관계를 인간으로서의 이해관계와 동일화시킨 특정 계급의 지배를 이룩하는 길을 닦는 것이다(Miller 1974, 41-2).⁸⁾ 이러한 의미에서 라쌀은 “독일 입법부에 노동자층의 대표를 파견하는 것, 이것만이 노동자층의 정당한 이해관계를 정치적 관점에서 충족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선동을 조직하는 것, 이것이 정치적 관점에서 노동자정당의 강령이며 강령이 되어야 한다”(Lassalle 1964c, 245)고 하였다.

라쌀에 있어 헌법의 문제는 원칙적으로 법(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Macht)의 문제이다. 곧 한 국가에 실재하는 헌법은 그 국가의 현실 권력관계에서만 실질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Lassalle 1919, 60). 민주주의를 요구할 때 민주적 결사체의 권능에 대해 법형식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러한 결사체의 현실적 능력은 그 배후에 어떤 실재적 권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배후 권력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는 그 권력의 소유자가 가진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한 라쌀의 노력은 우선적으로 의회 진입을 달성하는데 집중되었다(Miller 1974, 40-1). 구체적으로 그는 “수적으로나 역량 면에서 무한히 압도적인 무산자계급의 이해관계”를 의회에서 권력화 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선전활동을 보통․직접 선거권의 확보에 배타적으로 집중하였던 것이다(Lassalle 1964d, 306 참조).⁹⁾

라쌀에 의하면 보통․직접 선거권은 노동자운동의 사회적 요구에 있어 “도끼의 자루(Stiel der Axt)”와 같은 존재이다(Lassalle 1967, 332). 라쌀은 보통․직접 선거권을 “일시적 오판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요술지팡이(Wunschlrute)”로 보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는 오히려 보통․직접선거권을 “일시적 오용을 결과할 수 있는 오판을 그 자체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였다(Lassalle 1964a, 228). 보통․직접 선거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는 사회적 요구들을 실현하는 실질적 수단을 갖지 못한 상태에 다름 아니며, 그러한 상태에서 노동자계급은 단지 “하나의 철학 교습소나 종교적 분파에 지나지 않거니와 결코 하나의 정당” 세력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Lassalle 1967, 332; Bernstein 1919, 117). 이러한 주장에 따라 라쌀은 보통․직접 선거권 획득을 “국가개입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상태 개선”이라는 노동자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동자정당의 깃발”로 삼을 것을 선언하였다(Lassalle 1964c, 245; 1964d, 295-6; 1964e, 401 각주 1).

독일 사민주의와 관련된 라쌀의 국가관은 비단 노동자운동과 관련해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시 비스마르크의 통일정책이 수행되는 시점에서 민족국가의 문제 역시 라쌀에게는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었으며, 이 점에서 라쌀은 마르크스보다 피히테와 헤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라쌀이 이해하는 민족 또는 민족국가란 세계정신(Weltgeist)이 그 역사적 형태를 인민의 정신(Volksgeist)으로 획득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특권계급이 지배하는 곳에서 인민(Volk)은 폐쇄된 개인성과 예속을 완전히 탈피하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세계정신에서는 자유와 전체성이 직접적으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인민의 정신으로 구체화된 세계정신이 올바로 현상하려면 민주주의(Demokratie)와 민족성(Nationalitat)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라쌀은 주장하였다.¹⁰⁾

이 때 민주주의는 “인민의 대내적 자결(Selbstbestimmung des Volkes nach Innen)”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민족국가 내에서 인민들이 자율성과 직접적인 입법권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Bernstein 1920, 13). 그리고 민족성이란 “대외적 자결(Selbstbestimmung nach Außen)”이란 의미에서 “대외적 민주주의”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곧 한 인민의 삶이 외국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 있음을 말한다(Bernstein 1920, 13). 이 때 민족성, 즉 외부적 자결은 “대내적 민주주의의 어머니이자 기초”로서 그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며, 그 결과 ‘대내적 자결’과 ‘대외적 자결’은 ‘변증법적 통일’을 이룬다고 한다(Bernstein 1920, 13).

라쌀은 물론 대외정책에서도 이러한 민주주의가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자유를 요구하는 민주주의가 타국에 대해서도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부 민주주의와 대외적 민족성의 원칙이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그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독일의 국가통일 및 민족국가수립과 관련해 라쌀을 “메시아적 희망”을 가지고 독일 통일을 추구한 “민족주의적 독일 국내정치가”로 규정케 하기도 하였다(Park 1986, 63; Na’aman 1971, 392 참조). 한 민족의 대외적 자기 실현 능력을 내면적 자유의 전제로 보았다는 점에서 라쌀은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라쌀의 국가관은 특히 내부 민주주의와 민족성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민족국가간의 전쟁이 허용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5. 독일 사민당의 변화 과정과 라쌀주의의 영향

독일 사민주의에 대한 라쌀주의의 영향은 이와 관련된 사민당의 발전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자유주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라쌀이 창당한 전독일노동자연맹(ADAV)과 베벨과 리프크네흐트가 창당한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이 자유주의로부터 노동자층을 분리해 내기 시작한 단계로서, 독일노동자운동의 분리와 태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라쌀은 1863년 3월 1일에 쓴 ‘라이프치히의 전국독일노동자대의원대회 소집을 위한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 답변’을 통해 보통․직접 선거권의 확보와 국가지원의 생산조합이라는 두 가지 정치적 요구들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이 글을 같은 해 5월 23일의 전독일노동자연맹 창당대회에서 강령으로 제출하였다.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추종하던 대부분의 사민주의노동자당 지도자들은 국가지원에 의한 생산조합만은 거부하였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요구는 바로 라쌀주의 노동자운동의 분파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는 근거였으며, 엥겔스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당시의 상황에서 이 요구는 비스마르크의 국가와 조직노동자들의 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에 따르면 라쌀의 주장들은 필연적으로 소시민 민주주의적 부르조아의 지배와 영향 아래 노동자계급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Engels 1863, 354).

그러나 사민주의노동자당에 대한 라쌀의 영향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작성된 사민주의노동자당 강령도 실제로는 라쌀주의적으로 각인되는 표현을 보이고 있었다. 곧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권이 이 강령의 첫 번째 요구사항으로 올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합설립에 대한 국가 차원의 요구”와 “민주적 보장을 담보하는 선에서 자유로운 생산조합을 위한 국가의 자금 지원”을 10대 요구의 마지막 사항으로 설정한 것이었다(Mayer 1969, 149; Programm der Sozialdemokratischen Arbeiterpartei, Eisenach 1869, 282-3).

두 번째 단계는 1875년 고타에서 사민주의노동자당과 전독일노동자연맹이 합당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SAP)을 건설함으로써 시작되는, 노동자정치운동의 통합이 태동하는 시기이다. 고타 강령의 요구에서도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권의 획득뿐만 아니라 국가지원에 의한 생산조합의 건설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표현과 “노동하는 인민들의 민주적 통제 아래”라는 수식어가 붙어, 라쌀의 생산조합 요구는 “노동하는 인민들의 민주적 통제 아래 국가가 지원하는 사회주의적 생산조합”의 건설로 변경되었다(Programm der Sozialistischen Arbeiterpartei Deutschlands, Gotha 1875, 284-5).

그러나 이와 같이 긴 수식어를 동반한 요구사항도 그 핵심에는 라쌀의 정치적 요구에 기반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특히 강령의 두 번째 서문에서 라쌀의 영향은 더욱 잘 드러났는데, 그 중에서도 ‘임금 철칙’에 관한 언급과 법적 수단에 의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관한 명시가 단적인 예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의 서문은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임금노동체제의 폐지를 통해 임금철칙이 극복된 새로운 사회와 자유로운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노력한다”라고 서술되어 있었다(Programm der Sozialistischen Arbeiterpartei Deutschlands, Gotha 1875, 284). 물론 이 문구는 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노동자운동의 선구적 이론가이며 라쌀은 그들의 고집스러우나 재능 있는 제자라는 입장에서 그들간에 일정한 동의가 구축된 증거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라쌀이 요구한 국가지원에 의한 생산조합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대안으로 주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Nova 1980, 99). 부르조아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함스(Harms, 1919), 트라우트바인(Trautwein 1913), 온켄(Oncken 1923) 그리고 이후에는 람(Ramm, 1953)과 노바(Nova 1980)도 지적했던 것처럼 라쌀은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국가의 비개입이라는 자유주의적 사고를 불식시키고 사회주의적 국가라는 명분으로 국가개입을 정당화시켰을 뿐이었다.

전독일노동자연맹과 사민주의노동자당의 통합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1878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사회주의자탄압법(Sozialistengesetz)에 근거한 탄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역설적이지만 노동자운동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도 일정하게 강화되었다. 마르크스에 의해 비판받았던 고타 강령이 1891년 에어푸르트(Erfurt) 강령으로 대체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독일사민주의당 강령이라는 이름으로 제정된 이 에어푸르트 강령과 함께 시작된다.

에어푸르트 강령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과 혁명적 노동자운동이라는 투쟁목표를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를 명확히 제기하였다. 이 강령은 이론 부분과 실천 부분으로 나뉘어 작성되었는데, 카우츠키가 작성한 이론 부분은 구체적으로 생산수단의 집중과 독점, 중소기업과 중간계급의 몰락, 계급의 양극화, 노동계급과 인터내셔널의 역할, 계급투쟁의 필연성 등을 명시함으로써 라쌀주의에서 탈피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하고자 시도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원칙도 명확히 언급되었다(Programm der Sozialdemokratischen Partei Deutschlands, Erfurt 1891, 286-8). 라쌀주의의 엄격한 배제와 마르크스주의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한 대목이다.

그러나 쉬미트(C. Schmid)가 올바로 지적한 것처럼 사민당 내에서 실현된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승리는 “외견상의 승리(Scheinsieg)”에 불과했다(Schmid 1973, 280). 쉬미트에 따르면 라쌀의 사상이 비록 강령적 언급에서 배제되었다 할지라도, 당의 구체적인 일상정치에서는 오히려 명백히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는 “변형된 형태(in seinem Anders-Sein)”로 실현되었을 뿐이었다(Schmid 1973, 280). 강령 중에서도 베른슈타인이 작성한 실천 부분은 보통․직접 선거권의 대(對)여성 확대, 교회와 국가의 분리, 누진적 소득세 부과, 1일 8시간 노동 보장, 15세 미만 아동 노동 금지, 국가 부담 노동자보험, 노동자단결권 존중 등 현실적․개량주의적 요구들을 의회주의적으로 실천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론에서 죽은” 듯한 라쌀이 “실천에서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박호성 1994, 63-4; Oncken 1923, 526). 더욱이 이론적인 부분도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정의하지 못하는 등 새로운 사회의 특성과 사회주의 혁명방법에 관한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핵심을 외면했다. 이론적으로 추구된 마르크스주의의 도입조차 혁명적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실천으로부터 괴리된 채 지도부의 대기주의(Attentismus)에서 공허하게 맴돌았던 것이다.

라쌀의 영향과 관련된 독일 사민주의 변화의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이러한 이중적 성격과 맥락에 기원을 둔다. 곧 네 번째 단계는 다수파사민당(Mehrheitssozialist)과 독립사민당(USPD, 1917)의 분열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분리(1918)¹¹⁾로 이어진 시기로부터 출발한다. 이 시기 이후의 특징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한 세력들이 분리해 나감으로써 사민당의 국가 의존 경향이 더욱 짙어져 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까지 주로 부르조아계급과 노동운동간에 전개된, 라쌀과 관련된 이념 논쟁은 이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간의 논쟁으로 전화되었다. 사민주의의 ‘기회주의’에 대항한 공산주의 진영의 정치적 투쟁은 라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조화가 불가능함을 증명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라쌀은 ‘소시민적 속류사회주의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면 다수파사민당에게 라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이것 아니면 저것(Entweder-Oder)’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라쌀의 국가관은 마르크스 이론을 필수적으로 보완한 형태였던 것이다. 특히 수정 사회주의의 선구자인 베른슈타인의 경우는 모든 사유재산의 급작스런 박탈이나 모든 법적 소유관계의 무효화 선언은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적법한’ 입법과정만이 인민들의 정서에 부합한다고 보았던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관련 입법을 통한 점진적인 몰수가 바람직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이와 관련된 라쌀의 구상에서 점진적인 몰수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재발견했다고 믿었다(Nova 1980, 48).

라쌀에 천착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노동가치론을 비판하고 사회적 분화와 중간계급의 존속을 주장했고, 철학적 측면에서는 유물론을 “신(神)없는 칼비니스트”에 비유하며 부정했다(박호성 1994, 81-86). 뿐만 아니라 “국가 속에서의 모든 개량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운동이라 규정짓고 최종목표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운동을 강조하며 “사회의 각 부문과 조직의 꾸준한 성장을 통한 사회주의의 점진적 실현”을 정치적 대안으로 내 놓았다(박호성 1994, 81-86). 베른슈타인이 원했던 것은 마르크스가 라쌀을 비판했고 라쌀의 정치적 실천이 실제로 그러했듯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확산과 관철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다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나치즘 정권 시절 강고한 투쟁 의지를 갖지 못했고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국민정당화해간 독일 사민당의 굴절은 라쌀에서부터 베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이미 그 복선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초이너(B. Zeuner)가 독일 노동조합의 국가의존성을 분석하면서 사민당이 라쌀의 국가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도 이러한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Zeuner 1976 참조).

6. 결 론

라쌀의 현실정치적 요구사항들이 오늘날의 독일 사회에까지 적절한 것은 아니다.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권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획득되었으며, 라쌀이 거부했던 노동조합은 노사관계의 한 지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밀러(S. Miller)가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국가지원을 강조하는 그의 국가관은 의회내 정당활동에 대한 강조와 함께 적어도 사회법제정의 문제에 있어 독일 사민당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Miller 1974, 48).

라쌀에게 있어 국가는 ‘자유 속의 연대’라는 완전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간들을 교육하는 절대적 존재로서 권력적 측면과 달리 그 본질적인 측면은 결코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라쌀이 진력했던 보통․직접 선거권의 획득도 ‘입법과 국가 개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상태를 개선’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수단이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의 활동에 보다 근접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적 장치를 요구한 것이었다.

라쌀이 노동자계급의 윤리성을 믿고 새로운 사회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주체로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와 함께 그는 노동자들의 개체적 활동보다 노동자결사체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하며 노동자들의 생산조합 건설을 주장하는 한편 노동자계급의 정당세력화를 위해 전력을 투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들을 노동자 결사체의 신성한 의무로 만들어 추동해 내는 것은 다시금 국가의 역할로 환원되었다. 라쌀이 요구한 국가지원에 의한 생산조합은 계급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계급투쟁에 대한 대안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며, 노동자정당의 건설도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무계급사회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근접하기 위한 의회 진입의 수단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라쌀의 영향은 독일노동자운동의 태동기에 전독일노동자연맹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조직된 사민주의노동자당의 강령에도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이후 사회주의자탄압법 정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일정하게 확대되어 이론적으로는 라쌀주의가 축출되는 듯 했으나, 이러한 승리도 그 혁명적 핵심을 외면한 외견상의 승리에 불과했으며, 일상정치와 실천 및 강령적 요구에서 라쌀주의는 엄연히 살아 있었다.

한편 헤겔과 피히테의 영향을 받아 민족성에 대한 강조와 독일 통일에 대한 메시아적 믿음으로까지 이어진 라쌀의 국가관은 1차대전을 전후한 전쟁참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파시즘 정권과 2차대전 당시에도 적극적인 투쟁을 수행해 내지 못하는 사상적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라쌀의 국가관과 현실정치적 요구는 베른슈타인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뿐 아니라 라쌀주의에 반영된 마르크스적 요소까지 포기하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발굴을 근거 짓는데 사용됨으로써 이후 독일 사민당이 자본주의 극복의 정치조직이기를 포기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 질서 내에서 노동자상태의 개선을 추구하는 개량주의적 노선의 ‘친근로자적 국민정당화’화해 가는 틀을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사민당과 사민주의 정치는 결코 마르크스를 선구자로 하여 라쌀이 그의 수제자로서 독일의 특수성 속에 발전시킨 이념에서 발전해 온 것도 아니며, 마르크스적 이념과 라쌀적 실천이 결합한 형태도 아니다. 독일의 사민주의는 라쌀주의 국가관의 영향에 각인된 독일 노동자운동 속에 마르크스주의가 특수한 정치경제적 조건에서 시도했던 진입이 외견상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 라쌀주의가 뿌리에서부터 작동해 왔고 결국은 다시 살아나는 궤적을 밟아 온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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