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승리21’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 세 균

소장

“이 화석화된 관계를 그 자신의 멜로디에 따라 춤추게 하라”

- 칼 마르크스(Karl Marx)

“이 단절(지배이데올로기와의 단절: 필자)은 하나의 투쟁이지만, 끝이 없는 투쟁이다”

- 루이  알뛰세르(Louis Althusser)

“우리의 프로그램을 약간만 완화하고 약간은 수용하고 약간은 타협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이제는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파멸의 길이다. 우리의 말에 세상이 귀기울이게 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왜곡되거나 귀기울일 가치가 없을 정도로 변질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 우리의 신념을 선언하고 가르치자. 어디에서든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든지, 소수의 사람 앞에서든지. 우리의 운동 규모가 적다고 걱정하지 말고, 운동의 질을 더 생각하자. 연구하자. 열심히 노력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삭감하지도 않으며 겁을 내 피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본 데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을, 전체의 진실을 이야기하자.

- 레오 후버만(Leo Huberman)

들어가면서

지난 1월25일 ‘국민승리21’은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각계각층의 여러 인사들을 초청해 ‘진보정당 창당 제안을 위한 (제1차) 원탁회의’를 개최하고, 원탁회의의 결의라는 형식을 빌려 오는 5월에 진보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로써, 비록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국민승리21이 중심이 된 진보정당이 조만간 출범하는 것은 기성사실화 되었다. 이와 더불어 노동자․민중운동의 진전과 진보정치의 활성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제 어떤 형태이든지 국민승리21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이때 제기되는 문제의 초점은 국민승리21이 주축이 되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과연 그들이 밝히고 있는 대로 노동자․민중운동의 대의에 부합하고 한국 진보정치의 올곧은 성장에 기여하는 조직이 될 것인 지의 여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본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국민승리21이 그간 취해온 국민후보론적 운동노선 및 선점주의적-패권주의적 활동방식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자기비판하지 않는 한, 국민승리21이 주축이 된 진보정당의 건설은 필연코 노동자․민중운동의 대의를 왜곡하고, 한국 진보정치의 올곧은 성장을 방해할 것이다. 때문에 그 정당은 비록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힘을 보태어 가꾸어 나가야 할 조직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조직 내지 정당의 건설을 통해 대체되어야 할 조직이다.’

이 글을 통해 본인은 본인이 왜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리는 지의 이유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이 글은 한국에서 노동자․민중정치 내지 진보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한, 앞으로 본격화되어야 할 대중적 토론을 위한 한 개인의 소견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본인은 이 글이 어디까지나 그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대중적 토론의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1. ‘국민승리21’ 운동의 모태로서의

   민주노총 제1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국민승리21 의 경과와 일반적인 특징

‘국민승리21’은 애초에는 15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의 상층간부 및 ‘진보정치연합’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진보진영 주류파인)진보진영 우파의 15대 대선대책기구로서 출발했다. 이 15대 대선대책기구는 동시에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통해 민주노총으로부터 조직적․재정적 뒷받침을 받게 됨으로써 커다란 무게가 실린 조직이 되었다. 이 기구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은 후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정치연대(준)’(정치연대) 및 (민교협교수 중심의)진보적 교수들이 함께 참여,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로 재편되어 97년 10월26일에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로써 국민승리21은 ― 현재 ‘청년진보당’으로 모인 부분들을 제외하고 ― 거의 대부분의 진보진영 인사들을 결집시킨 범 진보진영의 15대 대선대책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개편된 이후에도 이 기구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세력이 애초에 참여한 조직들의 인사들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대선 이후 국민승리21은 98년 2월21일에 열린 국민승리21의 제2차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5대 대선대책기구’에서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조직’으로 전환되었는데, 국민승리21의 이러한 전환을 정치연대와 전국연합은 각각 다른 이유에서 반대했다. 이로 인해 현재 국민승리21의 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인사들은 애초에 조직될 때와 유사하게 권영길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계 인사들과 진정추계 인사들 및 전국연합에서 탈퇴한 구전국연합계 인사들이다. 현재의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제1대 위원장이었고 국민승리21의 대통령후보였던 권영길 개인의 명망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를 지낸 적이 있는 주대환 같은 이조차 최근에 발표한 글에서 ‘우리에게는 권영길 대표가 있다’와 같은, 개인찬양에 가까운 발언을 내놓기까지 하고 있다.¹⁾ 그러나 국민승리21이 권영길 개인의 명망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조직이긴 하지만, 그 명망성에 기대어 내부적으로는 진정추계가 갈수록 영향력을 넓혀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대환의 그런 발언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했을지 모른다.

국민승리21의 출범과 민주노총 1기

국민승리21이 애초에 15대 대선대책기구로서 출범할 무렵 노동자․민중진영 내지 진보진영에서 최대의 쟁점이 된 것은 (1) 진보진영 좌파 및 많은 현장 조합원들의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대선대책기구의 이름을 (예를 들어 ‘노동자․민중승리21’ 등이 아니라) ‘국민승리21’로, 그리고 진보진영의 후보명칭을 ‘노동자(․민중)후보’가 아니라 ‘국민후보’로 정하는 등, 가능하면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탈계급적이고 탈민중적인 이름으로 대선운동에 임하려고 하는가와, (2) 진보진영의 대선대책기구를 구성하면서 왜 그간 노동자투쟁에 적극 참여해 왔고 민중후보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던 노동자․민중진영 내지 진보진영의 좌파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는가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서는 국민승리21의 출범이 무엇보다 민주노총이 창립대회에서 (‘산별노조의 건설’과 더불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민주노조운동의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의 하나로서 제기하고, 그 결정에 따라 민주노총 내부에 ‘정치위원회’를 구성해 정치세력화를 위한 제반 사업에 착수한 것에 결정적으로 힘입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만큼 진보진영의 15대 대선대책기구가 국민승리21의 형태로 출범한 사정 등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에 앞서 민주노총 제1기의 운동노선과 활동에 대한 사전 평가가 불가피하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특징

1995 11월11일의 민주노총 결성은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87년 7~9월 투쟁 이후에 줄기차게 제기된 민주노조 진영 모두의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민주노총의 결성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건설은 다른 한편으로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보다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부분의 꿈이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현실적 힘관계에 밀려 좌절당하는, 그리하여 흔히들 ‘전노협 정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흐름이 희석화되고 약화되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민주노총은 언론노조운동 출신으로서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 그간 우파적 흐름을 주도해 온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체계를 갖추고 출범했다.

민주노총이 우파세력의 헤게모니 아래에서 조직되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운동노선과 활동방식에서는 이전의 전노협의 운동노선과 활동방식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의 전노협 노선에는 ‘노동해방’과 ‘평등세상 앞당기는 전노협’이라는 구호로 집약되는 변혁지향성이 숨쉬고 있었다.²⁾ 이와는 달리 ‘민주노총 1기 지도부노선’ (내지 ‘민주노총 1기 노선’)은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구호 속에 집중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비록 그것이 구호적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긴 하지만, 그 구호를 통해 표현하려고 한 이념적․실천적 지향성 및 그러한 지향성과 연결되어 나타난 민주노총의 정책과 활동방식 등에 비추어 보아 민주노총 제1기가 추구한 ‘한국 노동운동의  총노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민주노총 1기가 제창한 ‘한국노동운동의 새로운 총노선’으로서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닌 것이었다.

(1) 변혁지향성의 포기와 ‘체제 내적 개혁’의 추구: 이전에 전노협은 대체로 전노협의 사수,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호와 초보적인 사회경제적․정치적 권익 옹호와 같은 매우 낮은 수준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투쟁 속에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노동자․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변혁지향성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 점은 ‘노동해방’ 등의 현수막과 구호가 물결친 전노협 주최의 거의 모든 집회나 시위, 파업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변혁지향성이 생동하는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통해 전노협은 투쟁에 참여한 대중들을 적어도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변혁적 주체로 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한, ―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는 실리주의적 현실주의자들에게는 도저히 포착될 수 없는 ― 투쟁의 직접적인 목표의 달성을 넘어서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전노협 투쟁은 ’개혁을 위한 투쟁을 통해 변혁역량을 확대․강화함으로써 당면과제의 해결을 위한 개혁적 투쟁을 변혁을 위한 투쟁과 결합시키는 데에 기여한 투쟁‘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노협투쟁을 통해 연결된 ‘개혁과 변혁의 변증법적 결합’의 고리는 민주노총 1기의 운동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민주노총은 창립 강령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통일조국, 민주사회’라는 매우 모호한 사회상을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상으로서 제시했다. 또한 민주노총 1기가 제시한 당면의 기본과제는 많은 부분에서 노동자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충족된다고 할지라도 기껏해야 ‘민주적 자본주의체제’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제반 개혁적 과제들이었다.³⁾ 더욱이 민주노총의 창립 강령에는 개혁적 과제들이 노동운동이 추구해야 할 최종목표의 형태로 제시되어 있음으로 해서 개혁이 지녀야 할 변혁적 의미가 거세되고 있고 개혁만이 특권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은 강령보다는 민주노총 1기의 실천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민주노총 1기가 주도한 모든 투쟁에서는 개혁을 위한 투쟁을 변혁을 위한 과제의 달성과 결합시키려는 일체의 노력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그 결과 그 투쟁에서는 투쟁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표출되어 나오는 노동자 대중의 밑으로부터의 변혁지향적 열망이 최대한 억압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모든 집회 등에서 ‘노동해방’이나 ‘변혁’과 같은 구호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게 된 반면 그것을 대신해 ‘개혁’만을 특권적으로 내세우는 목소리들만이 외쳐지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민주노총 1기의 운동이념은 말 그대로 ‘체제 내적 개혁(내지 개량)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제창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은 바로 그러한 체제 내적 개혁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념이었다.

(2) (상위 수준의)자본이데올로기의 수용과 계급타협주의의 옹호: 민주노총 1기 노선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적극 극복하려는 변혁지향성을 제거한 체제 내적 개혁주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때문에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산별건설을 통한 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극복 등은 주창했지만, 당연하게도 국가경쟁력 강화와 생산성 향상과 같은 상위수준의 자본이데올로기들을 기본적으로 수용했다. 그리하여 민주노총은 예를 들어 97년에 들어 ― 반독점자본 투쟁, 즉 독점자본에 대한 민주적․민중적 통제의 강화와 독점자본의 사회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 ‘경제를 살리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임금인상투쟁의 수위를 낮추는 것과 더불어)경제개혁․재벌개혁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방침을 채택했다.⁴⁾

민주노총 1기가 ‘국가경쟁력 강화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위수준의 자본이데올로기를 수용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설령 하위수준의 자본이데올로기를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노동을 결국 자본의 하위동반자로 위치지우고, 노동운동이 결국 ‘(한국)자본과 함께 하는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또한 이로써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철저한 저항의 조직화를 방해했다. 더욱이 민주노총 1기는 출범 초기부터 제반 노사정위원회에의 참여와 이른바 ‘정책참가’를 옹호했으며,⁵⁾ 97년에는 경제 살리기 등을 위해 ‘경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적극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민주노총 1기가 ‘경쟁력 강화’와 같은 자본이 추구하는 목표와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지만, 다만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본이 내세우는 방안과는 구분되는 다른 방안의 관철을 위해 투쟁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민주노총 1기가 노동운동을 자본지배에 대항하는 새로운 대안적 사회․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기보다는 자본과 화해하고 ‘노사동반자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흔히들 말하는 ‘노사대등관계’의 수립 ― 그러나 이러한 ‘노사대등관계’란 사실은 노동을 자본에 협력적인 하위동반자로 안착시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및 이에 기초한 코포라티즘적 계급타협체제의 구축을 목표로 하여 운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총 1기는 ‘노사대등관계’의 형성과 같은, 계급타협체제의 구축에 요구되는 제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다면 정권과 자본에 대해 기꺼이 협력하려는 타협주의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권과 자본을 상대로 투쟁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정권과 자본이 그러한 타협에 요구되는 양보를 거부한 데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3) 시민운동적 성격의 운동 추구: 민주노총 1기 지도부노선이 체제 내적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민주노총 제1기 운동은 체제 내적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체제의 원활한 유지․재생산을 추구하는 (부르주아 인텔리 및 신중간층 중심의)시민운동의 성격을 다량으로 지닌 운동으로 변질됐다.

이 점은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의 강령이나 이후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제출된 제반 요구들이 실제로 시민운동 수준에서 제기하는 개혁의 요구와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실제로 개혁의 요구일지라도 ‘어떤 개혁을 중시할 것인가’와 ‘개혁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서 시민운동적 관점과 노동자․민중적 관점에는 커다란 차이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민주노총 1기가 요구한 개혁의 요구조항과 내용은, 노동조합 운동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부분이 강조되고 있는 점을 제외한다면, 시민운동이 제기하고 있는 그것과 큰 차이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⁶⁾

나아가 이전의 전노협은 변혁지향적 노동단체들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타 계급․계층과의 연대를 추구함에 있어서도 ‘민중적 연대’의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건설된 이후 그러한 노동단체들은 민주노총에게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존재가 된 반면, ‘경실련’이나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운동 단체들은 민주노총이 공을 기우려 협력을 얻어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우군과 같은 존재로 격상했다.⁷⁾ 이러한 과정은 민주노조운동의 시민운동화를 촉진시키는 것이었는데, 민주노조운동이 시민운동화되는 만큼 민주노총 운동은 ‘계급적․민중적 이익’보다 (실제로는 중산층의 계급적 이해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국민적 이익’을 앞세우는 운동으로 변했으며 보수언론에서 말하는 국민여론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하는 운동으로 변했다.

민주노총 1기의 활동: 96~97년 총파업투쟁까지

위에서 우리는 민주노총 제1기가 대변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 지닌 기본적인 특징으로서 (1) 변혁지향성의 포기와 ‘체제 내적 개혁’의 추구, (2) (상위 수준의)자본이데올로기의 수용과 계급타협주의의 옹호, (3) 시민운동적 성격의 운동 추구라는 세 가지를 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의 노동운동 노선이란 권영길 지도부의 출범과 더불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1990년대 초에 전노협운동이 지닌 전투적․변혁지향적 운동을 비판하면서 ‘진보적 노사관계론’이나 ‘민주적 코포라티즘론’ 내지 ‘신코포라티즘론’ 등을 제기한 사람들이 주창한 ‘노동운동 혁신론’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혁신론 아닌 혁신론’이 민주노총 제1기 노선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중간층적 의식을 지닌 부분들이 민주노조 진영에 대거 참여하게 된 데에다가 이들의 발언권이 내부적으로 대폭 강화된 데에도 크게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민주노총 1기가 그러한 특징들을 지닌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한국 노동운동이 이후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되었는가 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김영삼정권이 ‘노사관계’를 (‘노동력 사용의 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신자유주의적 노사관계’로 개편할 목적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발족시킬 무렵 ― 노개위의 정식 발족 일자는 97년 4월24일이었는데 ― 청와대로 초청 받은 권영길위원장이 대통령으로부터 ‘민주노총의 합법화’에 대한 언질을 받은 후 민주노총이 ‘참여와 투쟁의 병행’을 명분으로 노개위 참여를 결정한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당시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정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정부의 노동법 개정 시도는 노동자대중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점에서 설령 정부가 집단적 노사관계법에서 일정하게 양보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의 어떤 개정안도 민주노조 진영으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되 돌이켜 본다면 만일 정부가 노개위의 공익위원안에 준하는 안을 정부안으로 국회에 상정했더라면, 복수노조의 허용과 같은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개정을 중시했던 민주노총 1기가 별다른 투쟁도 조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부는 이후 어떤 양보도 배제하는 최악의 개정안을 그것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는데, 민주노총 위원장이 총파업투쟁을 지시한 것은 아무리 타협주의적이라고 할지라도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면 총파업투쟁을 더 이상 유보시킬 수 없는 최악의 한계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총파업투쟁이 노동자대중의 헌신적 참여로 폭발적인 위력을 지닌 투쟁으로 발전하고 각계각층의 연대투쟁이 광범위하게 조직됨으로써 권영길 위원장은 전평 총파업 이후 최대의 총파업투쟁을 조직해 낸, 그리고 전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가해진 이후 그 공세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저항을 조직해 낸 노동운동 지도자로서 일약 전국적,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총파업투쟁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이념적, 실천적 함의에서는 민주노총 1기 노선인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파탄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그러한 총파업투쟁의 의미를 옳게 되새기고 자신의 과거의 실천을 반성했더라면, 그리하여 총파업투쟁을 대중의 원망을 참답게 반영하는 투쟁으로 끝까지 이끌어 나가는 동시에 총파업투쟁 이후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이념적․실천적 결론을 내렸더라면, 그것은 총파업투쟁의 진행 양상 및 총파업투쟁의 종결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는 달리 나타나도록 만들었을 것이며, 투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일차적으로 민주노총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을 폐기하고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혁신하는 작업을 가져 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주노총이 새롭게 재출발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전투적․변혁적 전통을 복원시키고, 한국의 노동운동을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노동자․민중에게 참다운 희망을 안겨주는 운동으로 도약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제1기 지도부는 그들이 실행하기를 꺼렸지만, 그럼에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총파업투쟁을 참으로 자신의 노선인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에 걸맞게 진행시키고 종결시켰으며, 총파업투쟁 이후의 사업 역시 그 노선에 걸맞게 추진하는 데에 머물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전술적 고려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에서, 다시 말해 투쟁에 참여한 이라면 누가 보아도 참으로 과도할 정도로 그  투쟁이 보다 전투적인 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그럴 수도 있다고 백번 양해한다고 할지라도 보수언론들조차 (파업 종결과 더불어)정부의 일정한 양보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시점에, 김영삼정권이 일정하게라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시점에, 사회 각계각층의 연대투쟁과 국제적 연대투쟁이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최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시점에 ― 그리하여 파업투쟁에 대해 유보적이었던 시민단체들조차 연대를 표명하면서 투쟁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하고, 초기에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야당 국회의원들이 대거 파업장소로 찾아와 밤을 새기 시작한 시점에 ―, (민주노총도 참여한)‘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중심이 되어 정권에 마지막 압박을 가할 대규모 집회․시위 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에, 정권과 자본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핵심적인 부분에서 양보를 받아낼 수 있는 최상의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던 시점에, 다시 말해 한번 더 일격을 가하면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 대통령을 만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정부가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약속했다는 언질을 단지 전해 듣는 것으로, 그것도 투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범대위 측과는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민주노총 지도부는 내부동력의 소진, 국민여론의 존중 등을 명분으로 ‘사실상의 총파업투쟁 철회’를 결정해 버렸다.⁸⁾

이로써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노동자대중에게 총파업투쟁에 나서도록 요구했지만, 정권과 자본이 조금이라도 양보한다면 애초부터 총파업투쟁에 나설 의사가 없었고, 또 언제든지 총파업투쟁을 철회할 의사를 지니고 있었음을 실제로 입증했다. 그런데 총파업투쟁의 철회와 더불어 ‘합리적이고 온건한 노조운동 지도자’라는 권영길 위원장에 대한 부르주아언론들의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노동법 개정문제는 국가와 자본 대 노동간의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대결(과 협상)의 대상물에서 부르주아정치인들에 독점되어 있는 국회에서의 흥정의 대상물로 전락했는데, 그러한 흥정의 결과는 정부가 이미 공언한 대로 복수노조의 허용 등을 가져왔지만 총파업투쟁을 통해 노동자대중이 쟁취하고자 했던 목표들을 모두 무효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총파업투쟁은 권영길 위원장의 개인적 명망성을 높이고 민주노총 합법화의 길은 열었지만, 총파업투쟁에 나선 노동자대중의 꿈을 좌절시키고 지도부와 노동자대중과의 괴리를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이후 총파업투쟁을 통해 자본 우위의 사회적 세력관계를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다.⁹⁾ 그러나 정확히 말한다면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은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그 승리로 인해 노동자대중은 심대한 패배를 경험했던 것이다.

더욱이 권영길이 대선 출마를 위해 위원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의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IMF사태가 터지고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야말로 ‘경제를 살리는 데에 협력한다’는 명분으로 ― 그것도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뒤엎어 버리고 ― ‘노사정위원회’에서 조합주의적 이익에 관계되는 몇몇 조항에 대한 양보를 얻어내는 대신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과 직결되는, 그리고 바로 그 철폐를 위해 총파업투쟁이 일어난 ‘정리해고제’를 법제화’하는 데에 찬성했다. 이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 노동자대중에게 ‘좌절’을 안겨 준 데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의 선까지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배신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에 이미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총파업투쟁이 일어날 때와는 다른 조건 속에서 현재화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민주노총 제1의 출범과 더불어 이미 싹트기 시작하여 총파업투쟁의 종결과 더불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총파업투쟁이 김영삼정권을 궁지에 내몬 사실에 의해, 그리고 총파업투쟁에 보내진 국내외의 찬사에 묻혀 겉으로 봉합되어 오다가 정리해고의 법제화 찬성에 이르러 마침내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 자체를 뒤흔드는 위기로 폭발했던 것이다.

96~97년 총파업투쟁 이후: 국민승리21 결성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은 이처럼 총파업투쟁에서 노동자대중에게 커다란 좌절을 안겨준 데에 이어 IMF 사태가 터진 이후에는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배신했으며, 민주노동운동에게 심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안겨주었다. 이와는 달리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96~97년 총파업투쟁을 통해 자신의 과거의 노선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끌어내어 총파업투쟁을 노동자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투쟁으로 발전시키고 그러한 투쟁에 상응하는 이념적․실천적 결론을 이끌어 냈다면, 총파업투쟁이 종결된 이후 민주노총이 추진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역시 실제로 이루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방향은 아마도 총파업투쟁 과정에서 헌신적으로 운동한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고 연대투쟁에 앞장선 인사들이 적극 참여하는 조직을, 그리고 그 이념적 지향성이 확고하게 계급적․민중적이며 의회진출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대중투쟁의 성장․발전에 복무하는 정치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총파업투쟁 철회 결정이 있은 이후 그 결정에 강력하게 항의한 범대위는 민주노총 지도부에게는 하루아침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민주노총은 이후 범대위를 계승․발전시켜 그 조직을 보다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전선조직으로 재편한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단체들이 참여하는 매우 느슨한 새로운 협의체로 대체해 버렸다.

이어 민주노총은 1997년 3월27일에 열린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97년 대선에서 독자적 영역 구축’, ‘98년 지자제 선거에 대거 진출’, ‘98~99년 정당 건설’, ‘200년 총선에서 원내 진출 달성’을 결의했으며, 이후에 열린 여러 회의와 대회를 통해 (1) 새롭게 건설되는 정당은 이념정당이나 계급정당이 아니라 ‘개혁적 국민정당’이 되어야 하고, (2) 97년 대선에서는 ‘국민후보 운동’을 전개하고 국민후보 운동을 지지하는 개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정치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 등을 결의했다.¹⁰⁾ 이러한 결정들로부터 우리는 민주노총 1기가 추진한 정치세력화란 체제 내적 개혁을 추구하는 탈계급적이고 시민운동적 성격의 정치운동을 추구하는 것이고, 선거 참여와 의회 진출을 중심으로 정치세력화를 사고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무렵에는 (과거에 민중후보 추대운동에 참여했지만, 이후에는 민주당 ‘구당파’(求黨派) 내부의 개혁모임, ‘정치개혁시민연대’ 등이 주동이 된 ‘개혁적 국민정당’ 건설에 참여하는 등 급격히 우경화의 길을 밟았던)진보정치연합이 ― 학계의 정대화 교수 등과 나란히 ― ‘운동권 후보가 아닌 국민후보 만들기 운동’을 제창하고 있었으며, 전국연합의 지도부 역시 민주연합을 대표하는 ‘우리 후보’인 ‘국민후보’를 내야 한다고 주창하고 있었는데, 민주노총의 결정은 바로 그러한 일련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민주노총 1기는 ― 지도노선의 잘못이 아니라 ― 제도정치권에서의 정치적 영향력과 교섭력의 부족 등을 파업 성과 부진의 원인으로 돌리면서 ‘개혁적 국민정당’이라는 부르주아개혁정당과 유사한 정당을 건설할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연합과 진보정치연합 등과 더불어 ‘국민후보’ 운동을 전개할 ‘국민승리21’의 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적극적인 발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요구하는 형식으로 (97년 8월18일에 개최된 ‘국민후보 추진을 위한 선언자대회’를 통해 97년 8월18일부터 ‘추진위’의 형태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국민승리21을 민주노총이 인적․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며, 권영길을 국민승리21의 대선 후보로 추천한다는 결정을 9월5일에 열린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어 9월7일에 열린 ‘국민승리21’ 준비위원회 발족식에서 권영길은 국민승리21의 대선 후보로 정식 추대받기에 이른다.¹¹⁾

그런데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1) 그간 줄기차게 제기되어온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요구가 15대 대선을 앞두고 다름 아닌 ‘국민승리21’ 결성과 ‘국민후보’ 추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무엇보다 민주노총 1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2) 그러한 정치세력화란 민주노조운동을 살아 있는 운동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던 전투적․변혁적 노동운동에 대한 정치적 부정이자 단절이었으며, 정치세력화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계급적 요구를 위로부터 왜곡한 것이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결론으로부터 (1) 국민승리21 운동을 추진한 세력이 왜 하필이면 진보진영의 15대 대선대책기구 명칭을 ‘국민승리2’1로, 그리고 진보진영의 후보명칭을 ‘국민후보’로 정했는가를, 그리고 (2) 진보진영의 대선대책기구를 구성하면서 그들이 왜 진보진영의 좌파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국민승리21’ 운동의 성격과 특징

위에서 우리는 국민승리21의 발족과 국민후보의 추대가 무엇보다 민주노총 1기가 대변한, 최종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심대한 정체성의 위기로 몰아넣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표현이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위로부터 왜곡한 것이라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간의 국민승리21 운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1) 제1국면 : 97년 10월26일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의 이름으로 국민승리21이 정식 발족하기 이전까지

2) 제2국면 : 정식 발족한 이후부터 15대 대선 운동이 끝날 때까지

3) 제3국면 : 대선 이후부터 현재까지

1) 제1국면: 국민승리21의 정식 발족 이전까지

왜 국민승리21로 조직했는가?

국민승리21이 추진위의 이름으로 발족할 때까지 그 발족을 가져온 중요한 계기들에는 (1) 97년 2월22일에 열린 전국연합 6기 대의원대회가 “민주노총 등과 더불어 ‘우리 후보’ 방침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고 결정한 것, (2) 97년 3월27일 열린 민주노총 2기 대의원대회가 새로운 정당 건설과 대선 참여를 결의한 것, (3) 전국연합 6기 임시대의원대회가 민주세력의 공동선거기구 구성과 ‘국민후보’ 추대를 결의한 것 ― 이 양대 조직의 결의에 따라 6월14일에는 양대 조직과 진보정치연합의 간부 및 기타 인사들이 참여하여 ‘국민후보운동 추진을 위한 실무모임’이 구성된다 ―, 그리고 (4) 7월6일에 열린 진보정치연합 2기 임시 대의원대회가 국민후보운동 전개와 진보적 정치세력화 추진을 결의한 것 등이 있다.

이 과정에서 국민승리21의 초동추진 주체들이 애초에 가장 심혈을 기우려 주장한 것은 진보진영이 대선에서 독자후보를 내야 한다는 점, 이 독자후보는 그 함의하고 있는 의미에서 계급성과 변혁지향성이 담겨 있는 용어인 ‘민중후보’ 등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국민후보’여야 한다는 점¹²⁾, 국민후보 운동을 통해 새로운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점등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민중후보론’ 등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때로는 ‘철부지 없는 관념적 과격파’로, ‘정치의 ABC도 제대로 모르는 아마추어 활동가’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들이 진보진영의 대선대책기구를 꾸리기 위해 활동할 때 진보진영 좌파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방식을 특징짓는 측면의 하나는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하는 방식’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꾸린 다음 애초에 따돌린 사람들이 그 조직에 ― 대체로 하나의 세력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 들어오도록 유도한다. 이때 그들은 대체로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 상의하지 못해 죄송하다. 그러나 일이 이왕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 양해하고 같이 하자”라든지, “우리는 언제나 문호를 개방하고 있으며 진보진영 전체의 단결을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지 않은 자들은 분열주의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의 실제적 관계를 보면 분열주의적으로 처신하는 자들은 그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민주노총 1기의 노선이 민주노조운동을 지배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노선에 따른 정치세력화가 추진됨으로써 (그 용어를 떳떳하게 외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려 싸워 온) ‘노동해방’, ‘민중해방’, ‘민중후보’ 등의 용어들은 진보진영에서조차 입에 올리기에 거북스러운 용어가 되고 말았다.

국민승리21 정식발족까지의 국민승리21 운동의 특징

이런 과정을 거쳐 97년 8월18일에는 ‘국민승리21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어 9월7일에는 ‘국민승리21 준비위원회’가 발족하는 동시에 권영길이 국민승리21의 대통령후보로 추대되었는데 ― 이러한 대회에서는 ‘민중의례’ 대신 ‘국민의례’ 등이 행해졌는데, 이는 진보진영의 집회에서는 처음으로 생겨난 일로서 역사의 기록에 남길만한 일이다 ―, 이 때부터 국민승리21의 대선 활동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국민승리21이 정식 출범하기까지의 시기는 ‘국민후보’ 운동의 최초의 대중적 시험기이기도 했다. 국민승리21이 정식으로 발족하기 전까지 국민승리21의 대선 운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것이었다.

(1) 국민승리21은 이 시기에 이른바 ‘노동자 + α 전략’ 내지 ‘계급투표전략 + 집단이익 고취전략’이라는 득표전략을 추구했다. 그런데 봉급생활자, 납세자, 분단비용, 정리해고, 퇴직금, 5대 질병 무한책임 등이 집단이익 개념에 포함되고, 노동자들은 추상화된 국민의 한 부분으로만 간주되었는데, 이로 인해 계급투표전략, 즉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요구를 기초로 하는 계급투표전략다운 투표전략은 부재했다.

그러나 그 전략에 따라 한편으로는 권영길을 앞세워 민주노조 조합원의 지지를 끌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급생활자나 일반시민에게 권영길을 적극 홍보해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 기간 중 권영길은 조합원의 지지를 끌어내고 지부 건설사업 등을 지원할 목적으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그리고 국민승리21은 봉급생활자 등 일반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 ‘국민후보’의 선거전술에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 권영길이 ‘비타협적이고 과격한’ 노조운동 지도자가 아니라 도덕성과 높은 경륜을 지닌, ‘온건하고 합리적인 진보주의자‘라는 점을 널리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대국민 홍보용으로 만든 리플엣 등에서 권영길은 ―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이가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과 유사하게 ― ‘도덕적 감각, 합리적 사고방식을 두루 갖춘 지도자’, ‘국민의 기본의무인 교육, 납세,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 온 도덕성을 겸비한 후보이며, 8년간의 파리 특파원 생활을 통해 국제적 감각과 합리적 사고방식을 갖추고 있는 후보’, ‘부드러운 원칙주의자’, ‘오랜 언론계 생활로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세련된 감각을 익힌 합리적인 진보주의자’, ‘권영길 후보와 함께 활짝 웃어봅시다’ 등으로, 그리고 총파업투쟁과 관련해서는 ‘날치기항의 총파업으로 3김을 누른 지도자’, 즉 노동자대중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본과 권력의 공세를 총파업투쟁으로 맞선 지도자가 아니라  법안의 날치기 통과에 항거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총파업투쟁을 행한 지도자 등으로 소개되고 있다. 권영길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 만들기에 걸맞게 국민승리21 역시 “활짝 웃는 세상, 희망의 정치”, “웃음꽃 환한 세상을 열어 갈 국민승리21” 등으로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한 슬로건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국민승리21은 자신의 이름으로 낸 거의 모든 글에서 노동자나 민중과 같은 단어의 사용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 그 대신 ‘국민’이나 ‘일하는 사람들’과 같은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2) 그러나 국민승리21은 노동자들과의 만남에서는 권영길이 ‘국민후보’라는 점을 앞세우기보다는 ‘노동자후보’라는 점을, 진보적 학생들과의 만남에서는 권영길이 매우 진보적이고 권력과 자본에 굴하지 않는 투쟁적 지도자라는 점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서 국민승리21의 대선 운동은 처음부터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접근해 어디에서든지 표를 획득하려 하는, 그래서 잘되면 이런 저런 층들 모두로부터 표를 얻어낼 수 있지만 잘못되면 어떤 층으로부터도 표를 얻을 수 없는 이른바 ‘모두 붙들기 전략’(all-catching strategy)이라는 부르주아적 득표전략에 입각한 선거운동으로 전개했다.

(3) 이 시기에 국민승리21은 ‘사회복지 대혁명’을 통한 ‘사회보장 선진국’ 내지 ‘21세기 선진복지국가’의 건설을 자신의 선거강령의 핵심으로 내세웠다.¹³⁾ 국민승리21이 당시에 사회복지체제의 완비를 앞세운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민중의 이익만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전국민적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조직으로 선전하는 데에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민후보론적 운동의 한계

권영길이 민중후보와는 구분되는 국민후보이며 온건하고 합리적인 진보주의자라는 점등을 앞세우고 전개된 이 시기의 선거운동은 그러나 그 성과 면에서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권영길은 그가 전국을 돌며 만난 많은 현장간부들과 조합원들로부터 무엇보다 “왜 떳떳하게 노동자후보나 민중후보로 나서지 않고 국민후보의 이름으로 나섰는가?”와 같은 항의에 부딪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점에 대한 그의 구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보다도 현장의 선진노동자층들이 그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불신의 장벽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다. 이들 노동자층의 많은 부분은 이미 국민후보 운동을 통한 노동자정치세력화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지향성과 대의에 어긋난다는 점등을 들어 국민승리21 운동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었다.¹⁴⁾ 그러나 이들은 사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력부대가 되어야 할 부분이었고, 옳게 출발했더라면 그의 선거운동을 위해 누구보다 가장 적극 나서 줄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던 노동자층이었다.

한편 국민승리21이 권영길을 온건하고 합리적인 진보주의자로 선전하면서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공을 기울였던 봉급생활자나 일반시민들로부터 권영길이 지지를 받아낸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이 금방 드러났다. 이들은 당시 대체로 정권교체론 등에 경도해 있었다. 게다가 이들에게도 ‘총파업지도자로서의 권영길’이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지, ‘온건하고 합리적인 진보주의자’로서의 권영길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국민후보 운동을 통해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획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시민으로부터 지지를 확보하려 한 국민승리21의 선거운동은 초장부터 ‘두 마리 토기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난관에 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진보진영 전체의 공동대응을 위한 논의가 결실을 맺어 97년 8월16일에 발족한 정치연대도 참여하는 진보진영의 공동 대선대책기구인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이 10월26일에 정식 발족하기에 이른다. 정식발족에 앞서 10월9일 국민승리21 측을 대표한 권영길 후보와 정치연대 측을 대표한 오세철 교수는 (교수모임을 대표한 김상곤 교수와 함께) (1) 대통령후보는 ‘노동자․민중의 대의와 정치세력화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후보’여야 하고 ― 이는 국민승리21 측이, 정치연대 측이 요구한, 진보진영의 후보가 ‘노동자․민중후보’여야 한다는 점을 완곡한 형태로 받아들인 반면, 전국연합 등에서 제기할 가능성이 있었던 ‘후보사퇴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 (2) 선거강령에 재벌해체와 독점자본에 대한 민주적․민중적 규제 확대 강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 민중탄압 분쇄와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한 투쟁, 환경, 성, 보건의료, 교육 등 부문과 영역에 대한 민중적 대안 제시와 투쟁, 남북한 평화군축체제 확립과 민주적․민중적 통일방안의 제시를 포함시키며, (3) 대중투쟁과 결합하는 선거투쟁을 하기 위하여 제 민중세력과 함께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한다는 것 등에 합의했다.¹⁵⁾ 또한 문서화되지는 않았지만, 국민승리21 측은 앞으로 ‘국민후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민주진보후보’의 말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승리21 측이 정치연대 등과 더불어 공동선거대책기구를 만드는 데에 동의한 이유로서는 (1) 국민후보로 나선 권영길 후보에 대한 현장조합원의 불신과 불만이 예상외로 커 그 불신과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정치연대 등과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점, (2) 대선 대책기구의 조직체계가 이미 거의 완비된 상태에서 정치연대가 참여한 들 정치연대가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점, (3) 정치연대가 공동선거대책기구의 수립을 요구해 온 마당에 진보세력의 대단결이라는 명분을 거부하기 어려웠다는 점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 제2국면: 국민승리21의 정식 발족으로부터 대선이 끝나기까지

선거운동의 전반적인 특징

진보진영의 공동선거대책기구로서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이 정식 발족한 이후에도 국민승리21의 대선 운동은 거의 기존의 국민승리21 측이 의도하는 바대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국민후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용어는 이후에도 가장 빈번히 후보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사용되었다. 또한 선거투쟁을 대중투쟁과 결합시키겠다고 합의했지만 공투본의 구성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선거투쟁과 노동자․민중투쟁을 결합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 역시 행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정치연대 측은 대선 운동에 계급성․민중성을 각인하고 선거투쟁을 대중투쟁과 결합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 이런 노력에 힘입어 예를 들어 사회복지 관련 공약을 첫번째 공약으로 내세운 원래의 ‘국민승리21 10대 공약’을 노동자․민중 생존권 관련 공약을 첫번째 공약사항으로, 사회복지 관련 공약을 4번째 공약사항으로 삼는 ‘10대 공약’으로 바꿀 수 있었고, 그 내용 면에서는 거의 수정을 가하지 못했지만 ‘재벌개혁’이 아니라 ‘재벌해체’가 공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¹⁶⁾  그런데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연대 측은 ‘사회복지 대혁명’이 아니라 ‘반보수반재벌 민주진보혁명’의 수행을 국민승리21의 모토로 삼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¹⁷⁾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국민후보를 주창한 세력들이 지향하는 바의 대선 운동 기조를 바꾸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국민승리21이 정식 출범한 직후부터는 중간층이나 일반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인 민주노조 조합원들의 권영길에 대한 지지도 역시 매우 저조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민승리21은 중간층이나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득표활동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고 ― 이러한 인식은 사실은 그들이 그들 스스로, 그간 자신들이 열렬히 주장해 왔던 국민후보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최초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노동자층에게 선거운동을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로부터 선거운동은 주로 노동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일정하게는 선거운동이 계급성․민중성을 띄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민후보론에 상응하는 내용의 유인물과 리플렛 등이 계속 제작되었고, 선거운동 방식 역시 ― 그 적극적 활용이  불가능한 미디어정치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를 광범위하게 조직하려 하기보다는 ― ‘70% 이상은 언론에 의해 결정된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언론을 의식한 후보 일정 만들기’, ‘기사거리의 끊임없는 제공’, ‘언론과의 호의적 관계 만들기’ 등의 미디어정치를 통한 선거 활동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투쟁의 조직화와 투쟁과의 결합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강연과 유세를 통해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일상적 방식의 선거운동이 중심적인 사업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거운동의 내용과 방식은 특히 노동자 대표성이 강한 지역과 민주노총이 각 지역 등에 조직한 ‘정치실천단’의 여러 부분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는 위에서 내려보낸 유인물들을 폐기해 버리고 그 대신 자신들이 만든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게다가 권영길은 노동자들에게 투쟁의 주체, 정치의 주체가 될 것을 호소하기보다는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 무엇을 하겠다“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벌렸다. 그러한 방식의 선거운동의 문제점이 내부에서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유세방식을 계속 버리지 않았다.

선거용 정당 등록 문제

국민승리21이 정식 발족한 이후 최초로 내부를 크게 동요시킨 문제는 다수파가 선거운동의 어려움 등을 들어 ‘선거용 정당’ 창립을 주창하고 나온 일이었다. 이에 대해 정치연대 측은, 선거용 정당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공동선거대책기구 구성의 암묵적 전제였으며, 무소속후보의 어려움은 그러한 편의주의적․합법주의적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적 힘의 조직화에 의거해 돌파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파는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선거용 정당 설립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켜 버렸는데, 이 결정에 대한 항의가 밑으로부터 거세게 일어나자 선대위는 결정과정에서 내부의 민주성을 훼손시킨 것을 사과하는 공문을 공동대표 이창복의 이름으로 내려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

투표일자가 가까워질 무렵 한국경제가 외환․금융위기에 빠지고, 한국이 IMF관리체제 아래에 놓이게 된 것과 같은, 선거운동의 지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정세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이렇게 변화된 정세에 대응하여 어떤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는가 역시 국민승리21에게도 매우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이 무렵에 내부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이 바로 ‘일어나라! 코리아’를 슬로건으로 한 현수막과 벽보의 제작․배포 건이다. 그런데 국민승리21의 대선 운동을 상징하는 슬로건을 내건 현수막과 벽보 등을 확정하는 일은 그 기획은 홍보위원회에서 맡지만 그 내용의 외부로의 사전 유출 방지 등을 위해 ‘참여하는 각 부분의 의견을 성실하게 반영한다’는 양해 아래 선대본 위원장을 비롯한 몇몇 주요간부가 참여하는 소모임에 위임되어 있었는데, 홍보위원회에 소속한 한 부서원이 작업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몇몇 선대위 위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몇몇 집행위원들은 선대위에서 그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자고 요구했지만 이미 위임된 사항이라는 점을 들어 그 요구가 묵살되었다. 그렇지만 그 건이 내부에서 계속 문제되자 홍보위원장이 선대위 위원들을 불러모아 그간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일종의 설명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정치연대 측과 조직위원장이 그 표어에 반대하는 의사를 강력하게 개진하고 몇몇 위원들이 타협안을 내놓는 가운데 그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설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찬성한 측은 그 표어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그 표어의 부수적 설명이나 앞으로 제작될 비디오 등에서 한국을 다시 일어나게 할 주체가 노동자, 서민대중임을 충분히 밝힐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 반대한 측은 가장 큰 글자로 표기될 그 표어가 주는 상징성이 문제가 되며, 그 표어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노동자․민중적 문제의식과는 동떨어진다는 점등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서는 그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에 커다란 이견이 존재하며, 이 이견이 적합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내부적으로 커다란 동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설명회가 끝난 후 ― 반대측의 주장이 최소한이라도 반영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 선대위 위원장은 그 문제를 선대위에서 다시 안건으로 부침이 없이 위임된 사항으로 간주, 위임받은 모임의 논의를 거쳐 원래의 안대로 제작토록 결정해 버렸다.

이런 과정을 거쳐 휘날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표어를 새긴 벽보 및 그 슬로건을 새긴 현수막이 전국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이 벽보와 현수막이 전국에 배포되자마자 이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밑으로부터, 특히 노동부분에서 빗발치듯 일어났다. 이로 인해 선대위는 허겁지겁 원래의 벽보를 폐기하고 다른 표어들도 선정, 각 지역의 사정에 적합한 내용의 현수막을 붙일 것을 결정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발생했다. 며칠도 못가 폐기할 결정을 그들은 내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우직할 정도로, 그러나 실제로는 그야말로 패권주의적으로 밀어붙이는 우(愚)를 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지역에서는 ‘현수막 바꿔 달기’가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는 등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는 민주노총이 만든 ‘일어나라! 노동자여’를 새긴 새로운 벽보가 대거 부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결정과정에서 권영길 후보의 의사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를 본인은 알 수 없다. 대선이 끝난 이후 어느 토론장에서 권영길은 그 사건을 단지 일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우연적 해프닝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 예를 들어 ‘민중의례’ 대신 ‘국민의례’를 행한 것 등에서 이미 드러난 ― 국민후보론적인 정치관에 내재해 있는 이념적 성향이 IMF사태를 만나 집약적으로 표출되어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막바지  선거운동 - 국민후보론적 운동의 실질적 포기

대선 운동은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을 거치는 가운데 종반부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한편으로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국민승리21 운동에 참여한 많은 부분에서조차 이탈의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IMF사태로 인한 고용불안의 증대 및 재벌지배체제와 보수정치에 대한 노동자대중의 불만이 크게 증대하기 시작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노동자층으로부터 표를 얻지 못하는 한 어디에서도 더 이상 표를 얻을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들에게 단지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과 적극 결합하는 선거운동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 이와 관련해 종반부 선거운동의 초엽에 발생한 ‘일어나라! 코리아사건’이 이후의 선거운동 전개에 얼마나 많은 악영향을 미쳤는가를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국민승리21의 종반부 선거운동은,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이 역으로 선거운동의 내용과 방식의 전환을 결정적으로 재촉하는 가운데, 한마디로 ‘국민후보’ 운동의 성격을 탈피하고 거의 전적으로 ‘노동자․민중후보’에 가까운 운동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국민승리21의 선거운동은 ― 그야말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후에, 그리고 너무나 때늦게 ― (‘웃음꽃이 활짝 피는 한반도’ 등이 아니라) ‘고용안정, 재벌해체’의 구호를 전면적으로 내거는 운동으로, 그리고 노동자투쟁을 촉발하고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투쟁에 적극 결합하며 ― ‘국민후보’ 운동을 제창한 사람들이 애초에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 ―, ‘운동권 방식’의 운동에 준하는 운동으로 변하게 되었다. 권영길 후보 역시 대선 후보로서는 파격적으로 삭발을 감행하고 ‘일자리 지키기 투쟁’에 앞장서는 그야말로 ‘노동자․민중후보’이자 ‘운동권후보’다운 면모를 보이면서 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막바지 운동을 통해 노동자층에서 처음으로 그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국민승리21 후보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음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흐름이 막 싹트고 있는 시점에, 그로 인해 그 흐름이 보다 큰 흐름으로 확산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에 투표일은 찾아왔고, 이로써 대선 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선거운동이 종반부에 접어들 무렵에 생긴 또 하나의 사건은 97년 11월23일에 개최된 전국연합 제6기 2차 임시대의원대회가 “전국연합은 지난 6월14일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민주적 정권교체’의 대선 방침 중 민주적 정권교체를 위한 노력이 국민승리21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며, 국민승리21 후보가 ‘민주적 정권교체와 야권후보 단일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이를 위해 전국연합은 국민승리21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결정한 사실이다.

이 결정은 전국연합이 국민승리21의 활동에 적극 참여해 민주적 정권교체를 위해 권영길 후보를 사퇴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정치연대 측은 ‘전국연합 대의원대회의 결정은 보수정치, 정권교체론 등을 비판해온 국민승리21의 운동기조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인 만큼 국민승리21에 참여하고 있는 전국연합 회원은 야권후보 단일화를 위해 활동하려면 국민승리21에서 나가야 하고, 국민승리21의 기조에 합당한 활동을 하려면 전국연합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참여인사들의 정치적 양심에 맡기는 형태로 처리되었다. 실제로 전국연합은 ― 개별인사나 특정부분을 제외하고 ― ‘조직적으로는’ 국민승리21의 대선 운동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3) 대선이 끝난 이후부터 현재까지

정치조직으로의 전환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기대에 전혀 못 미치는 수준인, 14대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의 득표보다 겨우 7만표가 더 많은, 306,026표(득표율로서는 1.2%)를 획득했다. 민주노총과 같은 대중조직이 공식적으로 지원했고, 80여개 지부, 220개 선거연락사무소, 700여명의 상근자, 1500여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 및 4만 여명의 회원을 두었던 국민승리21의 활동 결과로서는 너무나 비참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노동자 밀집지역, 특히 대공장 소재지역에서 권영길 후보 지지율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이다.

대선이 끝난 이후 일차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 선거용 정당으로 등록한 국민승리21을 해체시키는 일과, 빚 정리와 같은 실무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문제들과 더불어 ― 그간의 대선 활동을 평가하고, 그 평가에 기초하여 대선대책기구로서의 국민승리21의 진로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국민승리21을 대선대책기구에서 ‘진보정당 창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조직’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이 있기까지 정치연대는 국민승리21의 정치조직으로의 직접적인 전환에 반대하며, 새로운 정치조직은 적어도 ‘국민승리21의 대선 활동에 대한 포괄적이고 대중적인 평가’에 기초하여 새롭게 조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97대선 활동 평가를 위한 기초토론 자료’가 98년 1월17일 임시중앙위원회에서 제출되었을 뿐 대선 활동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조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전국연합은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제7기 정기대의원대회를 98년 3월1일에 개최한다는 일정을 올려놓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 전환이 결정되기 이전에 전보정치연합을 제외한다면, 국민승리21 운동을 그간 지탱해온 주요한 3개 조직은 그러한 전환에 반대하거나 입장을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¹⁸⁾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98년 2월21일에 열린 국민승리21의 제2차 운영위원회는 국민승리21을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조직’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한 결정은 국민승리21이 애초에 민주노총 등의 결의에 힘입어 조직되긴 했지만 개인 자격의 회원제에 기초한 조직으로, 그리고 소속 조직이나 참여한 단체들에 따라 할당된 사람들 중 100만원을 낸 사람은 중앙위원으로, 10만원을 낸 사람들을 대의원으로 삼는다는 규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정치조직으로의 전환 건은 안건의 중요성에 비추어 대의원대회에서 처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안건의 처리가 대의원대회에서 이미 중앙위원회에 위임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 대의원대회에서 이미 그런 결정이 있었을 지의 여부는 본인으로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 그 결정은 규약 상으로는 하자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승리21 주도파가 중앙위원회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활용해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그간 국민승리21 운동을 지탱해온 주요 3개 조직의 의사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중앙위원들이 회원들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위원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지닌 것이었다.

실제로 국민승리21 주도파들의 이러한 활동방식이란,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애초에 국민승리21의 결성과정에서 보인 바와 같이, 일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이 선점한 고지를 최대한 이용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세를 넓혀나가는 자기중심주의적이고, 선점주의적․패권주의적인 실천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국민승리21 규약에서 기부금 액수에 따라 중앙위원, 대의원의 자격을 부여하도록 규정한 것은 재정문제가 아무리 절박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진보진영의 조직으로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조직원리 및 재정확보 원리였다는 점이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대선 활동에 대한 국민승리21의 자체 평가

어쨌든 그러한 과정을 거쳐 국민승리21은 15대 대선대책기구에서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조직’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정치조직으로 전환하기 위해 국민승리21의 제2차 운영위원회에 제출된 국민승리21 주도파의 대선 평가¹⁹⁾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15대 대선 투쟁의 목표는 단순한 지지층을 확보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계급적․정치적 각성을 촉진시키고 이들을 투쟁과 정치의 진정한 주체로 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하는 것으로 삼아야 했다. 그렇지만 ‘득표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어떤 지역에서 어떤 계층에서 어느 정도 표가 나왔고, 미흡한 득표의 원인이 무엇인가 등이 평가의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은 이들이 지닌 선거주의적․득표주의적 정치관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2) 미흡한 득표의 첫번째 원인으로 ‘자원동원 실패’를 들고 있는데,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함에 있어 목표한 조직과 돈의 미흡한 동원, 민주노총 주요간부의 결합의 부족과 조합원들의 무관심, 논의 및 추진과정의 불충분함과 선거기조를 둘러싼 혼란과 분열, 권리와 의무의 부조응 등 가시적으로 나타난 이런 저런 현상들만을 지적하고 있을 뿐, 그러한 현상을 나타나게 한 심층적 원인에 대한 분석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왜 재정이 백기완 후보의 선거운동 때보다 더 큰 어려움에 봉착했는가, 재정의 어려움을 왜 ‘민중적 재정확보’의 원리에 따라 극복하지 못했는가 등에 대한 원인분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3) 미흡한 득표의 두번째 이유로서 ‘대중적 슬로건과 비전을 전달치 못함으로 말미암아 범국민적 대안세력으로 부각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그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서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인 매스미디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우리 후보가 전파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원천봉쇄 당했지만”, “이와 같은 장벽을 넘을 만한 시도를 하였는가, 언론이 바라는 상품성 있는 뉴스를 제공했는가를 뒤짚어 보면 우리의 주체적 노력 역시 부족하였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 미디어정치가 부르주아정치의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 최대의 무기라는 점을, 그리고 미디어정치에 집착할수록 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화시키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한, 진보정치 역시 부르주아정치를 모방해야 한다고 보는 국민후보론적 노선에 내재된 관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오히려 미디어정치를 대중투쟁의 조직화와 대중투쟁과의 굳건한 결합 등으로 극복했어야만 했다고 지적해야 마땅하다.

(4) 그런데도 “선거기조 전반이 잘못 설정된 것이 선거 실패로 이어졌다는 의견도 있다”는 전제 아래에 “선거기조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위해 각각의 의견을 병렬한다”고 지적하면서 평가항목을 1) 전략기조 - 후보의 상, 2) 정책기조, 3) 홍보기조, 4) 선거기조 종합평가로 나누어 각 항목에 대한 국민후보론자들의 견해와 주로 정치연대 측이 제시한 견해를 싣고 있다.

선거기조와 관련하여 평가를 유보한 채 단지 상반되는 견해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자신들의 운동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활동에 어떤 문제점과 잘못이 있었는가’를 공개적으로는 시인하거나 반성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무반성적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 부분에서 상반되는 견해들을 단지 소개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제출한 평가서를 완전히 우스꽝스러운 문서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상반된 견해란 그 부분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가와 관련되는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있었으며, 따라서 선거운동 기조에 관련되는 그 부분을 그렇게 서술했다면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마땅히 상반되는 견해들을 제시하는 선에서 서술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아가 그로부터 상반되는 견해들에 대한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이 조직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의 결론을 내려야되는데도 다른 부분에서는 득표주의적․선거주의적인 국민후보론적 관점 등을 옹호하는 자신들만의 견해를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미흡한 득표의 3번째 원인으로서 ‘선거 종반의 지지이탈’을 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각종 언론의 ‘박빙 보도’가 유권자들의 사표방지 심리를 자극 한 것, 백기완의 주요 지지층이었던 학생, 지식인, 전문직 등이 최종 순간에 이탈하여 전략적 투표를 한 것 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에서 그들은 백기완 후보를 지지한 과거의 진보적 지식인층이 ‘국민후보’ 지지자가 아니라 ‘민중후보’ 지지자였음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리고 전국연합이 ― 정책연합론을 제기한 한국노총과 마찬가지로 ― 정권교체론을 대중적으로 파급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 그리고 과거의 백기완 지지층의 이탈에 대해 언급했다면 ‘국민후보론’을 지지한 사람들 중 상당한 부분이 정권교체론에 계속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 과거의 백기완 지지층과는 다른 이류로 ― 대거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는 점도 마땅히 지적되어야만 했다.

(6) 선거운동상의 문제점의 하나로 제시된 ‘준비기의 문제점’으로서 광범위한 연대의 미성사, 대중적 논의와 추진의 불충분, 선거용 정당 문제의 혼란, 정권교체론에 대한 논리 개발과 대응의 부족이 지적되고 있다.

먼저 광범위한 연대의 미성사와 관련하여 민중운동, 시민운동 등을 아우르고 장기적 전망을 제시할만한 정치적 지도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운동부분을 아우르는 선거운동을 하려 한 것이 바로 ‘국민후보론’을 제창한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긴 하지만, 바로 그러한 선거운동을 하려 한 것이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에 속한다는 점과, 그와는 달리 15대 대선에서의 목표는 그들의 표현을 빈다면 “핵심 대오를 엄호할 주변세력을 폭넓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는)핵심대오 자체의 확고한 구축에 기여하는 데에 있었다는 점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적 논의와 추진의 불충분과 관련하여서는 “국민승리21의 선거기조와 제반 활동은 조직대중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리라는 전제하에 잡혀진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들이 (놀랍게도)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선거운동 기조를 잡았다고 한다면 조직대중의 상태에 대해 그처럼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주제넘게도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나섰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선거용 정당문제와 관련하여서 “그 문제에 대한 논의를 좀더 일찍 시작하고 결의 과정에 만전을 기하였어야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국민승리21의 제반 활동과 재정 마련은 선거용 정당등록에 의해 가능했다”라고 변명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식으로서는 과거의 백기완 후보 진영은 그러한 정당을 등록시키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제반 활동을 행하고 재정을 마련할 수 있었던 가라는 문제에 대해 옳게 답할 수가 없다.

나아가 정권교체론에 안일하게 대처했다는 지적과 관련하여 오직 노동자․민중적 관점에서만 그 주장에 적극 대응할 논리를 제출할 수 있다는 점이 옳게 지적되었어야만 했다.

(7) 선거운동상의 문제점의 하나로 ‘의사결정력과 집행력의 취약함’도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되어 지적되고 있는 제반 문제점들은 그야말로 관료주의적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들이다. 즉 국민승리21은 일상적인 단체협의체에 가까운 조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오히려 더 큰 문제점은 주요사항들이 주도파에 의해 결정되고 비주도파의 견해는 거의 무시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상임집행위원회(선거대책위원회: 필자)는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논쟁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그러한 관점으로서는 예를 들어 선대위에서 정치연대 측이 행한 문제제기들은 모두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논의를 가져온 것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집행력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실은 모든 것이 선거대책위원회에 위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밑으로부터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구조가 결여되어 있었고, 그러한 구조를 만들려는 의지 역시 부족했던 것이 더 큰 문제점이었다.

(8) ‘의미와 교훈’과 관련하여서는 ‘재벌해체, 고용보장 정책의 승리’, ‘IMF정국의 영향’, ‘일상적 정치활동축적’의 중요성이 지적되고 있고, ‘IMF정국의 영향’으로는 노동자들이 대자적 계급의식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노동자들에게서 초보적 계급의식이 생겨나고 계급적 투표 행태가 대두하게 된 것을 들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노동자 밀집지역, 특히 대공장 소재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득표율이 높았다는 득표분석에 기초하여, 비록 선거주의적․득표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평가이긴 하지만, ‘총평’에서 대선 활동의 성과로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정치세력화 단초를 발굴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이 평가서가 지닌 합리적인 측면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 지적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대중에게 굳건하게 뿌리를 내릴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국민후보론적 선거운동과의 사실상의 단절이었던 종반부의 선거운동이 옳았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나중에 말하겠지만, 오늘날 국민승리21이 행하고 있는 일련의 변신 시도를 이해하는 데에도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그러나 평가자들은 선거활동을 통해 그러한 교훈을 끄집어내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교훈으로부터 국민후보론적 관점을 과감히 청산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국민후보론적 관점을 폐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노동자대중이 대자적 계급의식에 이르지 못했지만 초보적 계급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중에서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득표주의적 관점에서 일상적 정치활동을 통해 관악구가 서울에서 유일하게 1.5%대를 넘은 득표율을 올릴 수 있었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득표주의적 관점이 지닌 문제점을 가장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 앞에서 노동자들의 지지율이 높아진 것을 보고 노동자들에게서 초보적 계급의식이 생겨나고 있다고 기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 여기서는 ‘일어나라! 코리아“ 현수막을 끝까지 부착할 정도로 소부르주아적이고 애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인 관악구 대선 활동 주도세력의 계급적․정치적 성격을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관점은 진보정당운동에게는 참으로 해악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점에서는 노동자들로부터 표를 많이 받을 것으로 보이면 자신의 정당을 노동자정당으로 앞세우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높아졌다고 칭찬하겠지만, 소부르주아층으로부터 표가 많이 나올 것 같으면 자신의 정당을 소부르주아적 개혁정당이라고 내세우는 정당으로 변신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현재적․잠재적 지지층의 동향에 따라 겉으로 내세우는 정당의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기회주의적인 ‘상황추수주의적 정당’이란 결코 그 이름에 합당한 노동자정당 내지 노동자․민중정당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

(9) 마지막으로 서술되어 있는 ‘전망과 과제’에서는 “98년 전반기에는 … 지자제 선거에 대응하고, 재벌해체, 고용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당면투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과, “진보정당 건설은 국민승리21의 대국민 공약이다. … 그 절차와 형식이 어떤 것이든, 진보정당은 국민승리21의 확대, 발전, 심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라는 점들이 강조되고 있다.

그들에게 선거대응은 가장 중요한 정치활동 영역이기 때문에도 다가오는 지자제선거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재벌해체, 고용안정을 핵심으로 하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은 선거활동을 통해 그들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진보정당 건설은 대국민 공약이다’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을 내세우면서 ‘진보정당은 국민승리21의 확대, 발전, 심화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자 오만한 자기중심주의의 백미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선거운동 기조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어떤 일관된 평가도 내리지 못하고 있고, 앞에서는 국민후보론적 관점을 그대로 고수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폐기하고 있는 평가서의 전반적인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민중의 관점을 철저히 견지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반성한다. 그러한 반성에 기초하여 우리는 앞으로 고용안정, 재벌해체를 위한 투쟁 등 노동자․민중의 이익을 확고하게 대변하는 투쟁을 앞장서겠으며, 투쟁을 통해 우리 자신을 대중으로부터 검증받아 그 이름에 합당한 노동자․민중의 정당을 만드는 데에 일익을 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와는 달리 그들은 이 평가서에서 그들 스스로도 내면적으로는 인정하는 탈계급적․탈민중적인 국민후보론적 운동에 대한 비판의 일부라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기 반성하려는 최소한의 겸손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진보정당은 국민승리21의 확대, 발전, 심화여야 한다’는 결론을 그야말로 돌출적으로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국민승리21 주도파들이, 자신들이 제출한 평가서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선거활동을 통해 자기 반성적인 중요한 몇 가지 교훈들을 끌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고 있고 자기중심주의적인 사고에 빠져 있다는 점, 국민후보론적 정치관에 계속 연연해 있고 그와 연동되어 있는 선거주의적․득표주의적 정치관을 고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조직으로서의 전환 이후의 국민승리21

‘정치조직’으로 전환한 이후 국민승리21은 한편으로는 민주노총과 더불어 지자제선거에 대응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실업운동을 조직하고 선거제도 개선을 중심으로 한 정치개혁 사업을 행하는 동시에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정당 건설문제와 관련하여 국민승리21은 98년 9월17일 열린 제3차 중앙위원회에서 “진보정당 창당에 동의하는 모든 민주진보세력과 함께 늦어도 99년 5월까지 진보정당을 창당하며”, “진보정당 건설에 뜻을 같이하는 단체 및 개인들과 함께 98년 말까지 창당추진기구를 구성하여 진보정당을 공동으로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등을 결의했다. 99년 5월까지 창당해야 하는 이유로서 98년 12월2일에 열린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토론회에서 권영길은 IMF사태의 발생과 같은 민주노총 건설 당시보다 더욱 절박한 정세가 조성되어 있고, 2천년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그때가지 창당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²⁰⁾

그렇지만 ‘진보정당 건설에 뜻을 같이하는 단체 및 개인들과 함께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결의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그들의 활동방식에 미루어 본다면 하나의 수사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 최근에 조직한 원탁회의와 같은, 자기주장 관철을 위한 모임을 개최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 타 세력들에게 허심탄회한 토론을 한번도 제안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국민승리21이 애초에 만들어질 때에도 확인되었던 바이고, 국민승리21 제2차 운영위원회에서 국민승리21의 정치조직으로의 전환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활동 방식을 나는 앞에서 (권력정치적 관점을 우선시하는)선점주의적․패권주의적 활동 방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그들이 실제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당 건설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모아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한 토론회 석상에서 노회찬(정책위원장)이, 정치연대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함이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유일하게 ‘청년진보당’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개혁 대 수구의 대립을 중시하면서 개혁세력에게 힘을 몰아줘야 한다는 사람,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고 보는 조직이란 ‘청년진보당’밖에 없는 셈이다. 게다가 그는 “청년진보당이 당을 만들면서 ‘당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한 적도, ‘우리가 당을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구한 적도 없다는 점을 들어 진보청년당이 종파주의적이라고 규정하면서 같이하려면 ― 청년진보당의 강령문제와 더불어 ― 이 문제가 사전에 해결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청년진보당이 종파주의적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종파주의의 원조인 셈이다.

모순되는 발언들의 표출

다른 한편 정치조직으로 전환한 이후 국민승리21에서 흘러나오는 발언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예를 들어 필자 미상의 어떤 글에서는 ”선거공간을 활용하는 것의 중요성, 제도적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의 중요함은 향후 10여년을 좌우할 중요한 화두이다.“고 주장하고 있고,²¹⁾ 노회찬은 어떤 토론장에서 선거정치에 전문적인 식견이 없으면 정치적인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반면 최규엽(집행위원장)은 “2000년 총선 때 의석을 몇 석을 얻을 수 있는가가 진보정당 창당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 탄압에 견딜 수 있고, 재생산이 가능하며 특히 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결합력을 갖고 있다면 너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진보정당은 투쟁에 필요하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다”, “민중들과 함께 전국적 쟁점을 … 투쟁을 통해서 쟁취해 나가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다”²²⁾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건설될 진보정당이 노동자․민중에 뿌리를 둔 투쟁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정당을 의회주의정당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변혁적 투쟁정당으로 만들 것인가는 한 정당 내에서 서로 공생할 수 있는 노선이 아니라, 서로 분리되어야 할 두 개의 정당노선에 속한다. 다른 한편 주대환(창원지부 위원장)은 사민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선 이른바 ‘제3의 길’을 제창하고 있는 현시기 유럽의 좌파정권의 노선을 ‘현대적 사회주의’ 내지 ‘신좌파노선’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²³⁾ 반면 권영길은 새롭게 건설될 진보정당의 이념은 ‘자본주의를 극복한 평등사회의 건설’이 될 것임을 공언하고 있으며, 노회찬은 “진보정당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임은 상식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는 정당이 진보정당일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²⁴⁾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노회찬이 “청년진보당의 강령은 과거 평민당 수준의 강령이다. 매우 우경화되어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앞에서 언급한)청년진보당이 종파주의적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이 문제가 풀려야 그들과 당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²⁵⁾

그런데 예를 들어 현시기 유럽의 좌파정권이 자본주의의 극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권임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청년진보당의 강령이 우경화 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당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주장한 노회찬은 주대환의 발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다. 자기 정당에 소속하지 않은 사람의 우경적 발언은 비판하더라도 자기 당원이 그와 유사한 발언을 하면 ‘우리 당은  민주적 정당이기 때문에 당원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발표할 권리가 있다’는 정도로 그를 감싼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정서적으로 또는 그에 준하는 다른 이유로 뭉친 붕당(朋黨)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더 있다. 지난 대선 당시의 선거공약 조항들의 순서를 우경적인 관점에서 재배치한 것에 불과한 현재의 ‘국민승리21 강령’의 경제관련 조항에는 본인이 보기에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지향성이 결여되어 있다.²⁶⁾ 아직 그런 정도의 강령을 공식적으로 내걸고 있는 정치조직이 청년진보당이 우경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가 궁금하다.

게다가 같은 토론회 석상에서 권영길은 최근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독일금속노조가 사민당을 지지해 사민당정권을 세우는 데에 기여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²⁷⁾ 그러나 독일 금속노조는 오늘날 대표적으로 ‘노사동반자 관계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노조이고 독일의 슈뢰더 정권은 영국의 블레어정권과 유사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 자본주의 극복을 지향하는 정당을 건설하겠다는 정치조직의 대표가 그런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자본주의 극복관이 무엇인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나아가 ‘진보정당 창당 제안 원탁회의’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당의 이미지를 ‘서구를 휩쓸고 있는 좌파정권의 신화를 한국에서 재현하는 당’으로 홍보하겠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러한 이미지는 변혁정당의 이미지와는 떨어져도 한참으로 동떨어진 이미지이다.

국민승리21의 노선전환(?)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노선적 난맥상 속에서도 대선 이후에 정치조직으로 재편된 국민승리21의 현재의 실천에는 과거의 그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국민승리21은 신중간층 등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보다는 노동자들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실업운동에 나서고 있고, 노동자들의 투쟁과 적극 결합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행보가 국민승리21로 하여금 노동자대중을 획득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 그들이 건설할 정당이 투쟁정당적 성격을 대거 가진 정당이 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국민승리21의 이름으로 나오는 최근의 문건들은 과거의 문건들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차이란 과거의 문건들이 모두 ‘국민’을 앞세우고 있고 가능한 한 탈계급적․탈민중적인 용어를 사용하려고 했다면, 현재의 문건은 노동자․민중을 앞세우고 있고 가능한 한 계급적․민중적 용어들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최근에 개최된 ‘진보정당 창당 제안 원탁회의’를 위한 자료를 보면 앞으로 건설될 진보정당은 ‘자본주의의 극복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천명하는 강령을 가질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국민승리21이 주도해 만들 진보정당이 최소한 이념면에서라도 변혁지향성을 천명하는 정당이 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 국민승리21 내부에서는 국민승리21이 더 이상 ‘개혁적 국민정당’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정당’을 지향하는 정치조직으로, 그리고 의회주의 정당이 아니라 ‘변혁적이고 전투적인 정당’을 지향하는 정치조직으로 되어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게 대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적어도 그 주된 경향성에 있어서는, 국민승리21이 개혁적 국민정당의 건설을 목표로 국민후보운동을 전개할 때의 자신의 노선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고, 국민승리21 운동을 비판해온 진보진영 좌파의 노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국민승리21은 그 주된 경향에서 좌경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국민승리21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소한 ‘좌경화된 우파’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진보진영 좌파의 눈으로 본다면 분명히 ‘긍정적’ 변화라고 할만 한 현재의 국민승리21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가 문제가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온 가장 주요한 원인은 노동자들의 획득 없이, 특히 민주노총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획득 없이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진보정당의 미래가 없음을, 그리고 그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탈계급적․탈민중적인 주장과 실천이 아니라 계급적․민중적인 주장과 실천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그들이 대선 기간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IMF사태라는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미증유로 증대시키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조건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운동이 이제 그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하는 ‘노동해방’과 ‘자본주의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평등사회의 건설’에 참으로 이바지하는 것이 되려면, 또 이를 위해 노동자․민중운동의 발전과 진보정치의 좌파적 발전에 참으로 기여하는 것이 되려면, 그리고 그들이 현재 보이고 있는 변화가 위선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되고 진보정치의 목표가 실현될 때가지 항구적인 것이 되려면, 그들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다음의 일을 행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이란, 국민후보론과 그것에 입각해 행한 15대 대선 기간 중의 국민후보론적 운동의 문제점을, 그리고 그러한 노선과 운동을 낳게 한 ― 한국의 전투적․변혁적 노동운동의 전통을 부정하고 성립한 ―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과 ― 변혁적 진보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성립한 ― ‘개혁적 국민정당론’이 지닌 문제점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그러한 노선을 추구한 데에 대해 자기비판하는 일이다.

실제로 이 문제는 그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실천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나아가 그들이 진보진영의 참다운 단결에 이바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관건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이다. 그들은 국민후보론적 노선 등을 대변할 때에는 자신들이 왜 그러한 노선을 추구하는가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입장에 서서 진보진영 좌파를 비판해 왔고 노동자․민중운동 및 진보운동 전체를 그 노선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므로 이전의 노선을 폐기하고 있다면 이전의 노선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폐기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이전에 잘못된 노선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민중운동과 진보정치의 진정한 발전을 저해해 온 데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할 때에만 자신들의 진실성은 입증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그러한 공개적인 시인과 자기비판이 없다면, 그 전환은 위선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변화된 상황에 적합하게 자신을 변신시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겠다는 ‘상황추수주의적인’ 권력정치적 관심의 작동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시인과 자기비판이 없다면, 그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좌파적으로 보이는 것이 자신의 헤게모니를 추구함에 유리하기 때문에 ‘좌파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이 조성되면 그 가면을 언제든지 벗어 던질 우파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런 우파에게 정치란 얼마나 ‘살아 움직이는 실체’가 아닌가! 그리고 이런 우파는 현재로서는 운동의 좌파적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좌파적 발언과 처신으로 한편으로는 좌파를 짓밟고,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의 참다운 좌파적 발전을 저해하는 우파’로서 ‘우파임을 당당히 내세우는 우파’보다 운동의 장기적인 좌파적 발전에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이 그러한 공개적인 시인과 자기비판을 행할 기미는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들리는 것은 과거에 자신들이 추구한 노선과 운동에 대한 구구한 변명과 적당히 얼버무려 버리거나 책임을 딴 데로 돌리는 발언들이며, 행해지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선점주의적․패권주의적 실천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그들이 노동자 대상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한 글에서 ‘지난 대선 투쟁은 대단히 불만스러웠습니다. 또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문항에 대해 “일어나라 코리아로 대표되는 계급적 관점을 벗어난 선거운동의 기조 등 지난 대선 투쟁에 대해 많은 동지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민주노총, 간부 및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문제를 바꾸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정당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적극 참여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지난 대선 투쟁의 오류는 능히 극복 가능합니다”라고 답하고 있다.²⁸⁾ 이 글에서는 지난 대선 투쟁의 선거운동 기조에는 계급적 관점에서 벗어난 문제점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노동자들의 참여가 적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언급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국민승리21의 홈페이지에 오른 ｢진보정당 10문10답｣에서는 지난 대선과 관련하여 “국민승리21이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것을 겸허히 인정한다”고 하면서 패배의 주체적 원인으로서 “국민승리21은 … 조직 노동자의 정치의식과 활동력을 상당히 신뢰하였고, 선거운동이 노동계급을 넘어 일반 국민에게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조합원들은 고도의 정치활동인 대선에서 명확한 행동을 취할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국민승리21은 노동계급을 향한 선전활동으로 다시금 돌아서야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²⁹⁾ 국민후보론적 운동을 전개한 것이 ― 소부르주아적 정치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 조직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활동력에 대한 신뢰 때문에 나온 것이라는 이 언급은 지난 대선 운동 기조가 탈계급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앞의 글의 취지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민후보론적 운동에 대한 그야말로 무반성적인 변명을 담고 있는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진보정당 창당에 동의하는 모든 민주진보세력과 함께” 진보정당을 창당하겠다고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것은 진보정당 창당에 찬성하는 모든 민주진보세력이 아니라 국민승리21 중심의 진보정당 창당에 찬성하는 사람들만을 결집시켜 창당을 서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민주노총이 1998년 5월20일에 열린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행해진 ‘국민승리21의 확대․개편을 통한 진보정당 건설’ 결정을 ― 그러한 결정이 나오도록 국민승리21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공지의 사실이지만 ― 자신들의 세 불리기를 위한 최대의 무기로 삼고 있는데, 이는 국민승리21이 민주노총을 자신의 세 확대의 볼모로 붙들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의 회원확대 사업은 의회주의정당의 실천을 특징짓는 ‘최다 획득주의’에 입각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최다 획득주의는 예를 들어 민주노총 노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지라도 세 불리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그 노선에 대해 침묵토록 만드는 요인이 되는데, 그러한 정치적 실천은 언젠가는 변혁을 지향하는 정당의 자기부정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변혁적 전투적 정당’ 등에 대한 언급들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국민승리21의 기본기조는 권영길이나 노회찬 등의 발언에서 나타나다시피 의회주의정당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런 발언들은 지금 현재 투쟁정당인 것처럼 처신하고 있는 것이 자신들의 의회 진출에 도움을 준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끝으로,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들은 민주노총 내부의 개량주의적․관료주의적 세력과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3. 결론: 새로운 정치조직의 건설 및 민주노동운동 혁신의 필요성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 나는 국민승리21이 애초에 출발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쇄신시키고 있지만, 그러한 쇄신에도 불구하고 그 쇄신이 자기자신의 과거의 노선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자기비판에서가 아니라 변화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헤게모니를 견지해 나가려는 패권주의적 실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오늘날 국민승리21이 진보정당 건설을 주도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볼 때 국민승리21의 그러한 실천을 극복하는 일은 한국의 노동자․민중정치 내지 진보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민승리21이 그러한 실천을 계속 행하고 있는 한 그 극복은 무엇보다 노동자․민중의 새로운 정치조직 내지 정당의 창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국민승리21 운동을 탄생시킨 모체가 무엇보다 민주노총 1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점을, 그리하여 국민승리21이 애초에 민주노총의 결의에 결정적으로 힘입어 결성되었다는 점을, 나아가  98년 5월20일의 민주노총 임시 대의원대회 결정을 통해 민주노총이 오늘날 국민승리21의 세 불리기와 정당성 확보의 볼모가 되고 있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³⁰⁾ 이 점에서 국민승리21 운동은 동시에 민주노총 노선의 과감한 혁신을 통해 대중적으로 극복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현재의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에게 심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야기한 바로 그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극복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탄생한 지도부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노총을 그러한 지도부가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15대 대선 활동에 대한 ‘정치실천단’의 평가에 기초한 민주노총 대의원 평가조차 조직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98년 5월20일의 임시 대의원대회가 ‘“국민승리21을 확대․개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적극 지원 연대한다”고 결정한 것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결정은 우리가 상식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민주노총은 15대 대선 활동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여 앞으로도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의 건설을 적극 지원 연대한다”라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저런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민주노총 2기 지도부의 방침과 관련해 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주로 노조운동 수준에서만 문제삼음으로써 그 노선의 이념적․정치적 측면이라는,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측면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 이로 인해 그들은 민주노동운동의 ‘혁신’을 추구하긴 했지만 그 혁신이 지향해야 하는 바의 이념적․정치적 전망에 대해 명확한 상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과는 달리 그러한 이념적․정치적 전망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정을 지지했거나 방치했다면, 그것은 그 문제로 인해 민주노조 진영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민주노조운동의 직접적․현재적 이익을 위해 민주노동운동의 중장기적인 정치적 이익을 희생시킨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대의원대회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민주노총이 국민승리21을 통해 최초로 본격적인 정치세력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국민승리21에 대해 지닌 남다른 애정이나 자신의 옛 동료들이 국민승리21에서 많이 일하고 있는 데에서 오는 동료의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우나 고우나 국민승리21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설령 지지하는 경우에도 잃어서는 안될 비판적 판단력을 스스로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국민승리21이 남이 아니지 않는가’라는 의식은 ‘니가 남이가’라는 지역주의적 패거리 의식과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많은 대의원들이 단지 그러한 애정과 동료의식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동의했다면, 이는 대의원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로에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를 친지의 길흉사에 부조금을 보내는 문제 정도로 취급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특히 민주노조 진영의 상층간부진들 속에 국민승리21을 옹호하는 세력이 강력하게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은 오늘날 민주노총 1기가 대변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식의 노동운동을 지지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이 전투적․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성장․발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주도한 총파업투쟁이 (‘정책참가론’의 입장에서 옹호된)노사정위원회에의 참여가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발전하는 것을 강력하게 저지해 왔다. 이 점에서 민주노총이 2기 지도부 아래에서 지그재그식의 행보를 보이게 된 것은 투쟁노선을 견지하려는 지도부의 의지력과 집행력의 부족에도 크게 기인했지만 그러한 투쟁노선의 견지를 어렵도록 만든 이들의 훼방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실현 가능한 것의 추구’와 ‘정책참가를 통한 노동운동의 사회적․정치적 영향력 행사의 증대’ 등을 옹호하는 ‘사회적 조합주의론’이 일각에서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³¹⁾ 이러한 사회적 조합주의론의 관점에 서면 민주노총의 투쟁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온 이들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현 시기에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조합주의론이란 민주노조진영의 상층 간부진 속에 강력하게 포진해 있는 개량주의적․관료주의적 세력의 운동노선을 옹호하는 이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 조합주의노선을 제창하고 있는 이들은 또한 민주노총 1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높이 치켜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은 오늘날 사회적 조합주의의 이름으로 되살아나 여전히 민주노조진영 내부의 개량주의적․관료주의적 흐름을 옹호하는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민주노조진영 내부에서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화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고 있다시피, ― 오늘날에는 스스로 변혁적 계급정당을 지향한다고 자처하기 시작한 ― 현재의 국민승리21과 민주노조진영 내부의 개량주의적․관료주의적 세력간에는 강력한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동맹관계는, 국민승리21이 현재 스스로 행하고 있는 노선전환이 진실한 것이라면,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동맹관계이다. 때문에 국민승리21이 정말로 변혁적 계급정당을 지향하는 정치조직이라면, 국민승리21은  민주노조진영 내부의 개량주의적․관료주의적 세력 내지 명시적이거나 경향적으로 사회적 조합주의노선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동맹관계를 공개적으로 청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이 그런 길을 걸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혁신’의 과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조진영이 내부의 개량주의적․관료주의적 흐름을 이겨내고 전투적․변혁적 노동운동의 전통을 다시 복원해 내는 것, 그리고 그러한 복원에 기초하여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에 상응하는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것, 즉 국민승리21을 통한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국민승리21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조직 내지 정당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에게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혁신의 과제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민주노총 자체가 노동자 정치조직 내지 정당의 추진주체가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정파가 노동자․민중의 정치조직 내지 정당운동을 주도하든, 민주노총이 스스로 특정 정파에 직접 손을 들어주는 일은 대중운동의 전개에 결코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민주노총은 우선적으로 ‘국민승리21의 확대․개편을 통한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이전의 대의원대회 결정을 시급히 폐기해야 할 것이다.

이를 전제로 민주노총은 뚜렷한 원칙을 가지고 노동자․민중의 정치조직 내지 정당건설에 찬성하는 모든 세력들이 단합할 수 있는 조건을 앞장서서 만들어 나가든지, 아니면 정치조직 내지 정당 건설문제는 정치세력들에게 맡기고 보수정치를 비판하고 진보정치가 나아가야 할 일반적인 방향 등에 대한 교육․선전사업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 정치조직 내지 정당의 건설, 이것은 한국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을 위해 지금 착수해야 하는 노동운동의 주요한 당면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 정치조직 (내지 정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어떤 성격의 정치조직 (내지 정당)을 건설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민주노총이 건설된 직후에 쓴 본인의 논문 중의 한 구절을 여기에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하려고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오늘 어떠한 한 걸음을 내딛는가는 그 자체로서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한 걸음이 노동운동의 진로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맹아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사소한 차이를 은폐하거나 얼버무려 버리려고 하기보다는 그 차이가 지닌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의미를 분석하고 그 심대한 결과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오늘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해방에 참으로 기여하는 것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를 지니고 있다.”³²⁾

한/노/정/연

16) 현재의 ‘국민승리21강령’에서는 그 순서가 원래의 순서대로 다시 바꾸어져 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국민승리 홈페이지(http://www.jinbo.net/~vic21/fmain.htm)에 올려져 있는 ‘국민승리21 강령’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