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 방미투쟁의 성과
홍 근 수
여중생 범대위 상임공동대표,
방미단 고문이사, GMO반대생명운동연대 집행위원장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여중생
범대위)에서 일하는 핵심간부 등을 포함한 ‘2002년
방미투쟁단’은 국내 투쟁의 절정에서 그 바쁜 틈을 내어 약
10여일 간의 일정으로 12월 2일 방미 길에 올랐다. 대표는 모두
7인으로 고문으로 필자가, 단장으로 한상렬 목사, 실무책임자로
공동집행위원장 김종일 선생, 단원으로 전민특위의 김혜숙 선생,
민중의 소리 기자인 이강현 기자, 한총련 대표 이효원양, 이번
방미투쟁의 모든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비디오 촬영을
담당한 광주의 최성욱 선생 등이었다.
그 바쁜 중에 국내 투쟁 상황에서 투쟁현장을 떠나서 방미하는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흔히 무슨 일을 하고 그 공로의
‘대가’로 해외 여행을 가서 즐기자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
상황이 복잡하고 긴박한 데도 불구하고 방미투쟁 또한 중요하게
필요하였다는 것이 범대위의 판단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큰
결단이 필요하였다.
우선 미군의 심장부인 미국의 수도 워싱턴 D. C.에 가서 우리의
문제를 직접 호소하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중생 살해 사건을
일으키고 무죄판결을 내린 것은 모두 미군의 짓이고 그 최종적인
책임은 미국의 수뇌부에서 어떤 결단이 있었기에 그런 몹쓸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요구사항을 담은 130만 서명지와 함께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항의서한을 그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 서명지에는 적어도 미필적 고의로 살인행위를 자행한
혐의자들에 대한 형사재판권은 한국 사법당국이 행사하는 것이
순리라고 믿기에 미국이 형사재판권을 이양하여 한국법정에서
제대로 재판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 부시 대통령이 한국민에게
직접, 공개리에, 진지하게 사과하여야 한다는 것, 이러한 모든
불법과 부조리를 가져온 현 한․미 소파의 전면적인 개정을
원한다는 것 등을 촉구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한 미군의
부당한 짓을 미국시민의 도덕적 양심에 도전하여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민족자주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미국방문단은 다만 미국 정부에 대하여 항의하는 것만이 대표단
파견 목적은 아니었다. 뉴욕․워싱턴 D.C., 로스엔젤레스
등에는 우리 동포들 100 여만 명이 살고 있다. 동포들이 국제적
문제가 된 여중생 범대위가 말하는 미군의 만행을 제대로 알고
동참하도록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지금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의
진정한 변화는 안팎에서 모두 일어나야 하지만, 밖에서 있어야
할 중요한 변수를 결코 잊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밖에서의 변화는 바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앞장서서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방문단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의 소굴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미국을 향했다. 우리는 100여년 전의 이준 열사를
생각하면서 배를 가르는 심정으로 방미 투쟁에 임하였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고 아쉬운 점도 적지 않았다.
미국 동포들과 미국민은 물론 전 세계 시민들에게 지구의 한
귀퉁이인 남한에서 미군의 야만적인 불법행위로 벌어진 두
여중생의 비극을 알리는 것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방문단의 1차 목적인 집회, 기자회견, 미 상, 하원
국회의원 면담 등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엔 본부 앞에서나 미국 백악관 앞 시위 집회는 우리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에게 우리의
요구사항과 편지를 전하려 했지만, 입구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유엔 본부 건물 맞은 편에서 시위하려던 계획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유엔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관료주의화되고 제도화되어
우리의 공개서한을 받지 않는 유엔을 보면서 서글픔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상항(San Francisco)의 국회의원 면담은 아예
취소되어 샌프란시스코 행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현지의 애로는 무엇보다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없고 너무
촉박한 시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그 때는
미국의 최대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추수감사절(11월 27일, 목) 날
후로 그 후부터 양력 설 연휴가 지나기까지 일종의
‘정치방학’과 같은 기간이어서 워싱턴 D.C에서는 의원들을
만날 수 없었다. 또 한국 운동 단체들 간의 현지의 복잡미묘한
사정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역사는 창조적 소수자에 의해
이룩되고 변화되는 법이려니 생각하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유엔 본부 건물 맞은 편에 위치한 인터쳐치(interchurch)
건물에서 가졌던 기자회견 역시 외신 미디어가 여럿 오기는
했으나 우리가 기대한 만큼은 오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우리는 유엔본부 앞에서 타임 스케어까지 평화행진을
감행하였다. 날은 흐렸고 예상 밖의 급작스러운 강추위가
엄습해서 예상했던 현지 교포들의 대거 참여는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당일 아침 한국에서 직접 도착했다는 두어 분들이
시가행진 계획을 알고 찾아와서 참가하였을 뿐 현지민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소수의 시가행진을 벌린 셈이었다.
그러나 큰 성공이었다고 할 프로그램들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우선 다음날 이른 아침 시간에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방송인 WBAI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하여 40여분 동안 우리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과 불평등한 소파 개정 이야기를
생방송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보람된 일로 기억된다. 그
후 맨해탄의 미국 좌파 운동의 본부라 할 수 있는 램지 클락 전
법무장관을 사무실로 방문하여 만났고 그와 그의 직원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일, 미국연합감리교회의
세계선교회를 찾아서 거기서 일하던 모든 직원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일, 그리고 국제행동센타에서 국제포럼을
성황리에 가진 일 등은 중요한 활동이었다.
포럼 같은 것을 많이 해 보았지만, 그 날 그곳에서 가졌던
국제포럼은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보통 교실 만한 크기의
방을 가득 메운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비디오와 상영,
사진 전시 등과 우리의 발표 등을 통하여 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대부분들의 참석자들은 백인들이었는데 특히
전직 교사라는 한 남자 노인은 즉석에서 일어나서 일장 웅변을
토하면서 우리와 우리들의 운동을 칭찬하였다. 이날 100여명의
많은 참석자들은 우리의 발표에 대하여 깊은 공감대와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열성적으로 표현하였다.
방미투쟁단은 뉴욕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미국의 수도가 있는
워싱턴 D.C를 뉴욕 동지들의 수고로 자동차 편으로 갔다. 백악관
앞에서 사진 전시회와 침묵 시위를 전개했고, 또 다른 한편 하원
외교분과위원장의 전문위원들과 퀘이커들의 로비 사무실 등에
가서 약속된 대로 일꾼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특히 외교분과위원장의 전문위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역시
그들은 미국인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악관 앞인 펜실바니아 에베뉴에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2년 동안 농성투쟁하는 여성도 있었고,
바닥에 앉아서 북을 치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모두 연대의 따뜻한 말을 하였다. 우리는
130만명의 서명지를 백악관에 전달하려 했으나 거부함으로써
방미투쟁단장인 한상렬 목사가 그의 부채에 혈서로
‘민족자주’라고 쓰고 그것을 들고 시위를 하였다. 이는 아마도
이준 열사가 할복한 것에 비할 수 있을지......
토요일 집회는 15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잘 치러졌으나
뉴욕에서 온 한 교사가 경찰관 구타 등의 혐의로 연행되어
월요일에야 재판을 받고 풀려나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로스엔젤레스에 가서는 동포들의 융숭한 대접이 있었고 그곳
동포들에게도 역시 다른 지역 동포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본국에서의 뜨거운 반미 투쟁의 열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북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있고 호전적인 북의 군대가
있는데 어찌 한미 소파 개정을 운운하느냐는 것이 미국에 살고
있는 일부 우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동포들은 물론 미국
정치인들의 우려인 것 같았다.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문제는 미국이 만들어 낸 문제로, 주한
미군 문제와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분야, 특히
인구분야와 경제분야가 남한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북한이 군사적으로, 전쟁 수행능력 면에서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잘못된 우편향의 시각을 고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본국의 민족자주를 향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동포들에게 전하고 진보적인 미국인들의 의식 세계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제한된 의미에서의 성공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전체적으로 큰 호응이 있었고 특히 우리의
방미투쟁 후 거의 미국 전역에서 촛불시위 등 여러 가지
행사들이 계획, 발표되는 것을 볼 때 정말 우리의 방미투쟁이
결실이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미국 각 지역에 있는
후원단체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서청원 대표가 한국내의 반미시위에 대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직적 확산”이라는 발언을 한 것은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소파개정의 의사표명이 표를 의식한 거짓일 뿐이란 것을 천하에
명백히 들어낸 것이다. 나는 서청원 의원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직적 확산”이라는 발언에 대하여 ‘보이는 손’을
보여주고 싶다. 이 운동이 조직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확산되는 것이
아니다. 여중생 범대위에 불교, 원불교, 기독교(개신교와
카톨릭교회를 포함) 신자들을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반미운동을 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 진관 스님,
문정현 신부, 한상렬 목사, 문대골 목사, 정진우 목사, 장창환
목사, 홍근수 본인 등이 서 있다.
만약 여중생 살해 사건의 바른 해결을 위하여 미국 당국과 한국
당국이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미운동은 미군 철수운동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그야말로
반미운동으로 발전할 것임을 경고하는 바이다. 이것이
방미투쟁단이 한 일이고 앞으로 여중생 범대위가 그런 방향으로
운동을 주도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까지 방미투쟁단의 경험에 의하면 미국이나
한국 당국이 우리의 이러한 경고를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으며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내에서
일어나는 반미운동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것은 한나라당의
소파개정에 대한 의사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표명하는 것일
뿐으로 큰 실망을 금치 못한다. 의로운 민족자주의 칼을 맞아
부셔질 자는 한 나라당, 딴 나라당을 구별하지 않는다.
우리 대표단은 뉴욕과 워싱턴 D.C 지역, 로스엔젤레스 등, 아니
전 미주,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가는 곳마다 교포 언론들 ―
결국 국내 본사에서 파견 나온 지사라 할 수 있다―이
대서특필하고 방미대표단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여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국내의 열기가 전 세계로 향해
번져나가고 있었고 그 반대도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비록 우리가 계획했던 것을 많이 이루지는 못했으나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 때를 맞추어 회담장소인 미국 펜타곤을 찾아간
것이나 미국의 대한 정책에 반기를 들고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의 백악관 앞에서 혈서 등을 앞세우며 시위를 벌린 것 등
미국 정책입안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에,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미국은 종전의 대 한국인 인식과 정책에 대하여 많은 반성을
하고 새로운 한국인 인식, 새로운 한반도 정책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방미투쟁단의 활동은 제한적인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