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주세력의 결집․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이종회(범국민대책위 상황실장 \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 사무처장)
12월 26일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개악을 계기로 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은 한국사회 계급구성의 현단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23일 동안의 총파업투쟁에 400만
여명이 한 번 이상 파업투쟁에 참가했으며, 이것은 하루에 평균
19만 여명이 파업에 참가한 꼴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권과
자본의 상상을 분명히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아울러 노동자
총파업투쟁의 위력에 우리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한편, 노동자의 총파업과 함께 한 제민주세력의 투쟁 또한
예상을 뛰어 넘고 있었다. 제민주단체의 시국성명 또는
시국선언의 참여자가 총 2만명을 넘어서고, 교수들은 87년 6월
항쟁과 95년 5․18선언 이후 세 번째로 학교별 시국선언을
하였으며, 기독교의 경우는 각 교단별로, 보건의료는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약사 등이 각자, 그리고 불교, 천주교, 교사,
문화예술인, 변호사 등 각계에서 시국성명과 함께 항의행동에
나섰다.
이러한 제 민주단체들의 연대투쟁은 ‘경제적 내용을 담은
법개정을 둘러싼 정치파업’으로서의 노동자 총파업을 ‘정권과
자본에 대한 보편적인 정치투쟁’으로 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제민주세력의 투쟁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이후 투쟁을 준비하는
근거를 도출해 내는 것이야말로 의미있는 작업일 수 있다.
1. 노동자 총파업과 제민주세력의 연대 및
지지․지원투쟁
민주노총 산하 전 조합원이 즉각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함을
신호로 하여 제 민주세력들의 투쟁이 경쟁적이라할 정도의
역동성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제민주세력의 총파업에 대한 연대투쟁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이나
꾸미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성공회 전국청년연합회 시국성명에서),
‘우리는 10년전 전두환군사독재의 호헌선언에 맞서 이의
부당함과 민주회복을 주장하며 경향각지의 치과의사들이 뜻을
모아서 서명운동을 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그러나
꼭 10년이 지난 오늘 … 우리 치과의사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을 하게 되었다’(치과의사 시국선언에서)
위에서 보듯이, 역대 민주화투쟁에서 나섰던 민주세력들이
노동자투쟁의 연대투쟁에 나섰다. 정권에 대한 정치적
태도표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투쟁에 나선 것이다. 그간
선두에서 전열을 이끌었던 교수, 변호사의 시국성명과 거리행진,
항의농성을 위시하여 불교, 기독교, 천주교의 종교인들이
시국법회, 시국기도회, 시국미사를 통해 신도들과 함께 거리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문화예술인의 시국선언과 여성계의 거리굿,
‘보통주부 1105인 선언’ 등이 이어지면서 민주적인
사회세력들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12․26 노동자 총파업투쟁의 촉발로 시작된
제민주세력의 투쟁은 농민, 빈민 등 기층대중조직의 투쟁까지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주로 지식인 계층과 양심적인 세력의
투쟁으로 한정지워져 있었다는 점이 제민주세력 투쟁의 한계이자
12․26 이후 투쟁의 한계로 귀결된다. 진보적인 지식인층과
양심적인 세력의 열띤 연대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이외의
여타 기층계급대중의 투쟁을 조직하지 못함으로써 그
투쟁동력이나 폭발력이 제한되어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라는 지적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민주세력의 총파업에 대한 지지․지원투쟁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투쟁소식은 즉각
전세계로 전해지고 있었다. 범국민대책위의
정보통신운동단체들이 「정보통신지원단」을
구성하여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총파업과 관련한 내용들을 전하는
한편, 각국의 지지성명과 투쟁,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모아
국내에 전달함으로써 날치기 개악 노동법․안기부법
철회투쟁을 고무시키고, 국제연대의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공동영상지원단」의 지원을 받아
총파업투쟁소식을 영상으로 편집하여 운영한 명동민주방송국은
투쟁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직접 대중에게 전달하였다.
이렇듯 「정보통신지원단」과 영상활동단체들의
「공동영상지원단」, 민예총의 문예활동지원 등의
활동은 일간지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질만큼 특출한 활동이었다.
이러한 제 사회단체들 나름의 노동자투쟁에 대한 직접적인
지지․지원투쟁은 총파업 이전부터 있어 왔다. 노개위
공익안 제정을 앞두고 「민주적 노사관계와 사회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전문가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법 개정방향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 ‘노동관계법의
올바른 개정을 위한 국회청원서’, ‘공익안에 대한
노사관계전문가 81명의 의견’ 발표와 ‘노동법학자, 노동법
개정에 대한 설문조사와 설문조사 결과 분석’과 같은 활동이
제한적이나마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총파업
과정에도 계속되어 ‘총파업에 대한 노동법․형법학자들의
견해’, ‘구인장에 대한 번호사 의견서’, ‘파업은 불법이
아니다’(곽노현, 방통대교수), ‘검찰의 사전구속영장에 대한
민변의 견해’, ‘노동법 개악철회를 요구하는 파업은 불법이
아니다’(이광택, 국민대교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총파업투쟁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과 엄호를 하였다.
이렇듯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각개약진하면서 활동해 온
진보진영은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날치기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사회운동세력과 함께 민주주의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2. 준비되지 못한 투쟁의 한계
노동자 총파업투쟁과 교차된 제사회세력의 투쟁
1월 10일 전국의 무려 866개 단체가 「전국사회단체
비상연석회의」를 개최하고 각계 대표를 중심으로
‘1997인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산발적이던 사회운동세력의
투쟁은 한차례 호흡을 고르고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그 성과는 1월 11일 범국민결의대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의 집회와는 달리 시민의 참여가 확대되고 각계의 특성을
살린 투쟁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이날 집회는 약 5천명 정도의
비조직대중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각계각층이 고유의
복장을 하고 사전결의대회를 거쳐 입장하는 등의 기획아래
그간의 노동자 총파업투쟁이 범국민적 투쟁으로 전화하는 단초가
마련되고 있었다. 이로써 그간 조합원 조직대중의 집회, 행진,
집회로 이어지는 투쟁양식을 극복할 계기가 마련한 된 것에
상당히 고무되기도 하였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월 15, 18일의
범국민투쟁 결의대회를 이어감으로써, 범국민적인 민주주의
투쟁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졌다.
그러나 산발적이던 제사회세력의 투쟁이 모아져 국민적인
투쟁으로 확산되는 물꼬를 트기 시작하는 순간, 노동자 투쟁은
20여일 간의 총파업으로 뒷심이 딸리고 있었다. 노동자와 여타
민주세력과의 투쟁 사이클이 하강과 상승으로 교차되면서,
정부․여당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개악으로
시작된 노동자와 제 민주세력의 역사적인 투쟁은 고비를 맞게
된다.
준비되지 못한 투쟁
현재의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이하 범국민대책위) 이전의
「민주적 노사관계와 사회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조차도 96년 9월 11일, 노개위 국면에
즈음하여 ‘공익적 관점에서 본 노사관계 개혁’이라는 공청회를
거쳐 ‘노사관계 개혁에 관한 시민․사회․종교단체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뒤늦게 발족하였다.
12월 26일 이전 민교협, 민변, 종교계 등에서 제한적이나마
「민주적 노사관계와 사회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와의 관계를 통해 노동법 개정방향에 대한
의견 및 청원서 제출, 항의행진 등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2월
26일 정부․여당이 개악 노동법․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하고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돌입하자 12월 29일에 들어
범국민대책위로 개편하는 등 노동법․안기부법 정국에 대한
준비정도는 투쟁에 한걸음 뒤쳐져 있었다.
민주노총이 노개위 불참과 총파업을 거론하고 있을 즈음에도
사회운동진영은 단일한 대오로 결집한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92년 전국연합 창립 이후 집결되어 있던 진보역량들이
여전히 단일 대오로 결집되어 있지 못한 상태가 현 시점에서
또다시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해야 하는, 그리고 주동적으로
구성하지 못하는 뼈아픈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 점은
진보진영이 반성의 기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준비상태에서 맞이한 날치기 개악 노동법․안기부법
국면에서의 사회운동세력의 폭발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날치기 개악 국면에 접어든 초기에
각계각층의 시국성명과 농성, 행진 등과 함께 종교계의
시국법회, 기도회, 미사 등이 경쟁적으로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 효과를 높이는 차원에서 배치되지 못함으로써
산발적 투쟁이 되어버렸다. 또한 민주적 제세력이지만 주로
지식인과 양심세력 중심의 투쟁이 노동자 이외의 여타 계급대중
투쟁을 이끌어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함으로 해서 전체적인
투쟁의 수준과 성격이 지원투쟁으로 규정지워졌다.
한편 이러한 조직상태의 반영으로 전술운용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동원 역량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직동원과
전술운용에 관한 한 민주노총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으로 해서
독자적인 전술구사에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된
대중의 집회, 행진, 집회의 투쟁전술을 극복하여 미조직대중 즉
일반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노동자 총파업투쟁과
제사회세력의 투쟁을 범국민적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핵심적
요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술적으로 조직하지 못하였다.
파업과 집회전술구사의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범국민대책위의 독자적인 전술구사를 위한 동원력의 한계 또한
문제를 노정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1월 11일
종묘집회에서부터 결집하기 시작한 시민대중을 포괄한
노동자대중을 투쟁으로 배치하여 범국민적 투쟁으로 전화시키지
못한 뼈아픈 결과를 가져왔다.
투쟁기조 역시 투쟁과정에서 정립해야 했다. 투쟁 초기에
‘김영삼정권 퇴진’ 구호가 들어가는 것과 슬그머니 빠지게된
과정은 범국민대책위원회의 조직적 결의 수준을 나타내준다.
투쟁방향과 기조가 조직적으로 정립된 상태가 아니어서, 소모적
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제 민주세력의 총파업 연대투쟁의 성과
범국민대책위가 총력투쟁을 준비하고 민주노총의 4단계투쟁을
앞두고 있는 현재, 범국민대책위에 가입하고 있는 단체는
87개이며, 지금 현재도 구성되고 있는 지역공대위는 56개에
달한다. 이로써 그동안의 확산된 사회운동세력과 함께
진보운동진영의 분열을 극복하고 이후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앞으로는 결합하고
있는 제사회세력의 조직적 성격 또는 전문성을 감안하여 조직과
투쟁으로 배치하는 것이 조직적으로 의미있는 형태일 것이다.
그간의 뿌리없는 시민운동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성과일 것이다.
3. 세계화와 노동자, 그리고 사회운동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의 배경은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신보수주의적 정치재편의 흐름에 기초하며,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개악국면에서의 노동자 총파업에
대한 국제적인 연대는 여기에 연유한다. 제사회세력의 투쟁 배경
역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한국적 형태인 ‘세계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구화와 국민총동원
독일의 데페교수가 정의한 지구화에 대한 개념을 짚어본다면,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이 마이크로전자기술을 응용한
‘유연적 전문화’와 탈테일러리즘적인 노동조직을 통해서
신자유주의로 구현되고, 개방, 탈규제, 시장만능, 자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세계경제구조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자본의 경영권과 각국 정부의 정책을 통해
대량해고와 공장이전 폐쇄 등을 통한 고용불안, 임금동결과
삭감,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나아가 민주주의적 성과에 대한
공격 등 노동자에 대한 분할 통제, 노동조합운동, 민주주의
운동의 무력화 기도 등의 신보수주의와 함께하며, 사회국가 혹은
복지국가의 위기로서 사회국가적 보장체계의 위기로서의
재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지구화는 모든 사회분야들을 동원해 사회가 오직
지구적 경제력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게 하는 것인데, 지구적
경쟁력의 기초는 바로 국제적으로 더욱 유연해지고 있는 자본을
위한 ‘생산입지’의 이윤성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구
전체를 ‘경제전쟁’에 동원하는 일이다. 이 전쟁에서는 민족
자체가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파악될 때 승리할 가능성이
커진다.’ 월간 「현장에서 미래를」 96.5. 10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이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경제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국제적으로 OECD에 가입하여 독점자본의 세계적 진출을
준비하고, 노동현장에는 신경영전략이 도입될 때, 모든
사회세력은 세계화와 개혁의 이름아래 총동원을 요구받고 있다.
날치기 개악 노동법․안기부법이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의
제도적 관철을 위한 것이며 노동자 총파업이 세계화의 법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자본과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서의 정치적
성격을 띄고 있다면 제 사회세력의 투쟁 역시 그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 각계각층에 대한 김영삼의 ‘세계화’
김영삼정권 출범 이후 개혁의 이름으로 각계 각층에 대한
세계화가 진행되었다.
김영삼정권은 교육개혁위원회(이하 교개위)를 출범시켜
‘신교육체계의 구축’이라는 방향아래 새로운 교육체제의
기본적 구상을 제시하였다. 즉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대응할
열린교육체제를 전체적 전망으로 가지면서, 교육과정의 다양화와
분권화, 총점위주 교육의 지양, 교육자치제의 개선, 대학정원 및
학사일정의 자율화 등을 내걸고 있다. 1996년 1월 말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사법개혁을 중심과제로 내세워 미국식
로스쿨(Law school)안의 도입, 사법시험 합격자 2,000명으로의
확대 등이 거론되었으나 개혁의 주체인 국민과 무관하게 이권적
논쟁으로 진행되다 결국 흐지부지되어버린 것도 그 한 예이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미 거대자본이 된 언론의 반노동자적,
반민주적 논조의 문제의 문제뿐만 아니라, 언론자본 간의
무한경쟁에서의 국민의 권리위축, 노동강도의 강화, 노무관리의
개편의 문제가 발등의 불로 다가오고 있다. 김영삼정권의 마지막
개혁이라는 금융개혁은 또 한차례 회오리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 모든 것이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의 구호아래 경제전쟁에
대한 전국가적 동원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개혁(?)이자
사회운동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운동의 지위와 김영삼정권의 사회운동통제전략
대구대학교 최병두교수의 정리를 인용하면, ‘1980년대 말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성장과 곧이은 상대적 이완과 달리 새로운
유형의 개량적 사회운동들이 대두하게 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운동들은 모두 생산영역이 아니라 생활 및 환경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도시사회운동의 유형으로 전교조활동에
기반 둔 참교육운동, 의료보장제 도입 등과 관련한
보건의료운동, 민변활동에 기초한 인권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경실련이 등장하여 시민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가치증식을 위한 자본의 논리가 상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의 영역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생활의 영역, 그리고 이러한 생산과 생활에 필수적인
환경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보편적 규제자가 되었음을
뜻한다.’월간 「현장에서 미래를」 96.1. 6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이렇듯 사회운동이 확장되면서 김영삼정권은 시민운동을 앞세운
사회적 합의라는 모양을 취하면서 실제적으로는 계급분할정책을
구사해왔다. 그간 관변단체라 지칭되던 단체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는 대신 일부 시민운동단체를 앞세워 진보적 사회운동을
분리시키는 계급배제전략을 구체화해 온 것이다.
시민운동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경실련 전 사무총장 서경석씨는
투쟁이 한층 고조되고 있을 때인 1월 7일에 ‘정부안은 약간
기업쪽에 치우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거의 공익안에 기초한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를 하면서 공익적
성격을 사실상 상당한 정도로 포기하는 입법’이었다. 하지만
노동자가 ‘파업을 철회하고 평화적인 켐페인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원로들에게 촉구하는 제안문을
회람하고 이의 집행을 경실련에 맡기자고 제안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간의 시민운동의 이름으로
진행되어 온 관변적 사회적 합의의 성격이 확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러한 김영삼정권의 계급배제전략조차도 노동자의 총파업전선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 사회의 가장 주요세력으로서의
노동자의 선도적 투쟁이 제사회세력의 진출에 물꼬를 튼 것이다.
즉 노동자총파업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의 90%에 가까운 지지율은
계급적 토대없는 시민의 개념은 설정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오히려 관변적 시민운동단체를 동원한
김영삼정권의 계급분할정책을 극복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4. 범국민대책위의 이후 과제
87년 6월 항쟁을 상기해 본다면,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약 5개월의 예열기간을 가지고 투쟁했으며 그 과정은 제
민주세력을 6월 항쟁을 이끌어 낸 국민운동본부라는 대오를
구축하는 기간이었다. 평면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지난
12․1월의 노동자와 제 사회세력의 투쟁을 예열과정으로
배치하는 시각을 유지해야만 지금까지의 투쟁을 승리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이후 투쟁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
범국민대책위는 상반기투쟁의 징검다리로서 민주노총의
4단계투쟁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러한 시기적 중요성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곳은 오히려 관변적 시민운동세력인 것 같아 보인다. 이는
민주노총 4단계 투쟁을 앞두고 소강상태에 접어든 현재
‘(가칭)정치개혁과 경제살리기 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의 목표는 현재의 투쟁을
잠재우는 것이며 전술은 전선교란인 것이다.
민주노총의 4단계투쟁을 앞두고 지금까지의 조직적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범국민대책위의 임무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범국민대책위에 결합한 각 부문의 투쟁을 배치하고 지역투쟁을
집중하는 차원에서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조직
집중을 강화하기 위한 제민주세력의 결의를 모아내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지만, 오히려 투쟁을 매개로 하면서 조직결속과
재편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현단계의 주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날치기 개악 노동법이 시행되는 3월 1일 이전의
투쟁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하는 점이 현재 설치된 정권과 자본에
대한 전선을 확장, 재편하는 주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이후 국민운동본부라는 조직적 목표를 설정한다할지라도 현재
민주세력의 결합정도, 투쟁의 성숙정도를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날치기 개악 노동법․안기부법의 원천무효와 재심의라는
단기간의 목표 외에도 건국이래 최대의 비리라고 하는 한보사건
등을 앞세운 투쟁을 통하여, 그리고 이후 단기적인 전술적
사안을 중심으로 한 제사회세력의 결집정도를 감안한 투쟁체를
매개로 하면서 자본과 정권에 대한 전선을 재편해 나가는 것이
당면의 조직적 과제이다.
위기 ‘관리’를 위한 김영삼 정권의 모색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봉합적인 수준의 조치로는 현 정세를 돌파(?)하거나 장악할 수
없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욱 공세적으로
전선을 설치할 때 정세의 주도성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한
민주세력이 장악할 것이다. 이것만이 올바른 전선재편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 97년 2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