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와 경제위기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해서*1)
ꠏ 정태인 박사의 무지와 악의로 ‘엮어진 논리’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채 만 수
부소장
야비하고 음흉한 뒤통수치기
경제위기가 폭발․급격히 심화되면서 기왕에 만연하던 기이하고 비참한 현상도 도를 더해가고 있다. 직접적으로 경제위기에 따른 생활파괴를 비관한 자살자만도 지난 수개월 사이에 7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널리 보도되고 있고, 대량실업사태와 노숙자(홈리스)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해 있다. 국민정부임을 자처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시정(施政)의 두 축으로 삼겠다는 김대중 정권은, 한편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구성하겠다면서, 예컨대 최근의 안양민청련이나 진보민청 회원들의 대량 구속에서 보는 것처럼, 옛 군사정권과 다름없이 양심수․정치범을 양산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민주적 시장경제’ 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위기에 처한 생산양식 그 자체에 비하면 아직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 은행들을 폐쇄하여 위기심화를 자초하는 등의 기행을 서슴없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데올로그들의 기행도 지지 않는다. 자본의 탐욕과 위기의식이 얽혀 나온 96~97년의 ‘경제위기’ 주장을 덩달아 대변하던 자들은 97년 4/4분기 이후에 폭발한 경제위기를 자신들의 오류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는커녕, 어이없게도 이를 자신들의 잘못된 주장을 합리화하는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96~97년의 경제상황을 경제위기로 규정하는 주장들을 비판했던 나는, 경제위기 폭발 이후 이놈저놈이 “봐라, 상황이 이런 데도 채 아무개는 경제위기가 아니었다고 했다”며 심심풀이 삼아, 혹은 심술궂게 걷어차는 동네북이 되었는데, 끝내는 아주 야비하고 악의에 가득 찬 방식으로 뒤통수를 치면서 음흉한 방식으로 그 계급적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정태인 박사1)란 망나니까지 만나야 했다.
그는, 최근 한국 노동운동의 한 경향을 뚜렷이 반영․선도하고 있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월간 기관지 ꡔ노동사회ꡕ 98년 6월호에 “IMF 관리 체제 반년 점검, IMF체제와 한국경제의 개혁”이란 글을 기고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에 다음과 같은 망발을 늘어놓고 있다. 왈,
“특히 1년 전까지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단순한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주장하다가), 불과 몇 달 만에 ‘대위기-대투쟁’을 설파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리고 한국경제 자체는 과잉생산이 아니었지만 세계차원의 과잉생산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닥쳤다는 논리도 현실성이 없다. 지금은 원론적인 해석보다는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한 때이다. ‘원론’에 사로잡혀 ‘파멸적인’ 실천전술을 끌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2)
이렇게도 말한다. 왈,
“불행하게도 지금, (특히 노동계에) 뿌려진 글들은 하나의 논리로 하나의 실천을 이야기하고 있다.”(p. 26, 강조는 인용자)
내가 이 글을 ‘야비하고 악의에 찬, 그리고 음흉한 뒤통수치기’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그 동안의 논쟁구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아하, 화살이 누구를 향하고 있구나’ 하고 알 정도로 명확하게, 누군가에게 악의에 찬 비판을 퍼붓고 있으면서도, 글의 어디에서도 그 비판이 누구의 어떤 글이나 주장에 겨누어져 있는지를 결코 밝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의 논지와 주장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제시한 위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대신에, 돈키호테가 풍차를 기사(騎士)라고 공격하듯이, 그것을 왜곡하여 자신이 환상으로 창조한 주장을 상대방의 주장이라고 제시하며 비판하고, 또 가당찮게도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화려한 말장난과 거짓말로 대중을 현혹하여 자신의 계급적 관점을 강요해내려는 잔꾀를 부리고 있다.
물론 아래에서 명백히 하는 것처럼, 그의 논의․주장은 사실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한번 웃어넘기고 간혹 길에서라도 만나면 얼굴에 침이나 한번 뱉어주면 그만일 정도로 유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치한 논의․주장이 당당히 시민권을 얻는 것을 넘어 지배권을 쥐고 활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이 부르조아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에, 가히 그 전형을 이루는 그의 논의를 소재로 삼아 그들의 오류, 야비하고 음흉한 의도 등을 밝혀 보기로 하자.
이미 독자들은 능히 짐작하겠지만, 이하의 논의에서 나는 그의 무지, 야비함, 악의, 음흉함이 당연히 받아야 할 한없는 경멸과 분노, 그리고 조롱을 조금도 숨기지 않을 것인데, 다만 독자들은 경멸과 분노, 조롱이라는 포장만이 아니라 모름지기 그 속에 담긴 내용, 즉 최근 시기의 경제정세의 성격, 그것을 보는 기본적 시각, 그에 대한 대응과 그러한 대응이 필요한 이유․근거 등을 함께 읽어주기 바란다.
음흉한 말장난으로서의 ‘엮어진 논리’
정태인 박사께서는 글의 서두에서, (최근의 상황을 반영하여) “많은 얘기가” “각자의 처지에 따라 이 차원의 이야기와 저 차원의 이야기가 섞여서 혼란스럽”게 “쏟아지고 있”고, “각 차원은 자기 나름의 논리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후에 가소롭게도 감히 이렇게 훈시한다. 왈,
“현실에서는 모두 합쳐 하나겠지만 현실을 하나의 논리로 꿰뚫을 수는 없다. 각각을 하나의 논리로 설명하고 연후에 그 논리를 엮어야 한다. 이렇듯 복잡한 현실에 대응하는 것이 실천이다. 그러므로 실천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단순한 하나의 방향일지라도 엮어진 논리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 하나의 논리에서 도출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실천을 염두에 둔 글이라면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p. 26)
그리고 나서 위에서 인용한, ‘특히 노동계에 뿌려진 글들은 불행하게도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이 뒤를 잇는다.
정 박사의 훈시는 얼핏 현란하게 들린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깊게 위 훈시문을 들여다보면, 정신분열증 환자나 씀직한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던 어떤 노승의 잠꼬대를 능가하는 선문답인가?
“(많은 논리․주장․얘기들이) 현실에서는 모두 합쳐 하나겠지만 현실을 하나의 논리로 꿰뚫을 수는 없다”? 일종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거기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일종의 불가지론을 선언하면서도, 마치 자신은 예외라는 듯이, 혹은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무언가 음흉하게 ‘엮어진 논리’를 “혼란스럽게” 주절댄다. 개념이 없는 곳에 소리만 요란한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그러나 그 상대방의 주장을 명확히 하지는 않은 채, “‘원론’에 사로 잡혀 ‘파멸적인’ 실천전술을 끌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p. 30)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가 이 외침을 통해서 무엇을 꾀하려 했는지를 우리는 뒤에서 다시 검토하겠지만, 그는 도대체 상대방이 제시하는 “어떠한 전술이 왜 파멸적인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외침, 소리, 외침, 소리 ― 그것들만 있을 뿐이다.
왜 그렇게 처리했을까? 그 전술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 타당성 여부를 “현실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자기 주장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음흉하게도, “원론적인 해석보다는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한 때이다. ‘원론’에 사로잡혀 ‘파멸적인’ 실천전술을 끌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소리만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아무런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 분석’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96년~97년 3/4분기의 기간은 경제위기의 시기였는가?
주지하듯이, 반노동자․반민중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본격화한 김영삼 문민정권이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노동계급 관리․통제정책을 발표한 후, 그것을 법제화․기구화하기 위해서 이른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상층지도부가 거기에 가담한 이래로 특히 96년 ~ 97년은 노동자․민중이 독점자본측의 ‘경제위기’ 이데올로기 공세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린 기간이었다. 많은 ‘진보적인’ 경제․사회학자 등도, 여러 주관적 동기에서, 사실상 객관적으로는 이 공세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특히 1년 전까지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단순한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주장하다가), 불과 몇 달 만에 ‘대위기-대투쟁’을 설파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는 발언을 통해서, 정 박사도 당시에 내심 그 편에 서 있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3)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는 내심, 내가 지난해 5월에 토론회를 통해서 발표했던 “‘경제위기’ 공세와 노동운동의 대응방향” 및 월간 ꡔ말ꡕ의 금년 2월호에 실린 나의 “막오른 경제대공황, 노동자 총력투쟁으로 저지해야” 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특히 그가 ‘대위기-대투쟁’ 운운할 때는 분명 ꡔ말ꡕ지 상의 글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참고로 말하면, ꡔ말ꡕ지에 실렸던 글의 문제점은 거기에서 “‘대위기-대투쟁’을 설파”하고 있었던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 총력투쟁으로 대공황을 저지해야’ 한다던 제목에 있었다. 이는 ꡔ말ꡕ지의 편집부가 필시 상업주의적인 고려에서 임의로 글의 제목을 바꾼 데에서 발생했다. 내가 달았던 원래의 제목은 “새로운 대공황?”이었고, 또한 글 내용 전체 어디를 보아도 “공황을 저지해야” 따위의 황당한 주장은 없다.
여기서 우선 정 박사와 관련한 문제점은 그가 “공황을 저지해야” 따위의 주장(제목)이 갖는 황당함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엉뚱한 데에 헛발질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20여년 이상 그가 부르주아 정책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익혔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의 속물적인 학문적 소양에 비추어 보면 이는 어쩌면 당연지사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96~97년 3/4분기가 경제위기의 시기였다고 사후적으로 명확히 주장하고 있는데, 당시에 그가 어떤 견해를 표방하고 있었는가를 말하는 자료를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때문에 간접적인 방식, 즉 그와 함께 일하고 있으며 그가 그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비판적 언급도 가하지 않은, 그리하여 암묵적으로 견해를 같이 한다고 보이는 그의 동료들의 당시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사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미 96년 5월의 글에서 언급하고 준열히 비판한 적이 있는데,4) 이 비판이 그의 악의를 더욱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정 박사께서 지금 ‘연구위원’으로 계시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기관지 ꡔ동향과 전망ꡕ 96년 겨울호에 정건화․김상조 두 교수는 “신경제정책하 한국경제와 1996년판 경제위기론”이라는, 공동 집필의 글을 발표하고 있는데, 그들은 당시의 경제상황을 ‘경기침체’(위 글 P. 82), ‘1995년 4/4분기를 전환점으로 해서 하강국면으로 돌입한 …경기둔화’(p. 83), ‘1995년 4/4분기 이후 경기하강’(p. 100) 등으로 파악하고 있다. 말하자면, 당시의 많은 강단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점자본측, 즉 정부측의 자료에 따라서 당시의 경제적 성격을 “지난 1970년대 이후 여섯 번째인 경기순환”의 하강국면(p. 86)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만, 그들은, 정 박사가 사후적으로 ‘경제위기’로 규정하는 것과는 달리(?), ‘경제위기론’이 갖는 “이데올로기적인 담론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 당시의 상황을 ‘경제위기’로 규정하는 것은 피하고 있는데,5)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일 뿐 그들이 ‘순환적 경기하강’의 존재를 주장하는 한 그들 역시 객관적으로는 ‘경제위기’, 특히 ‘70년대 이후의 여섯 번째 공황’6)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기타의 많은 강단 학자들이 말하는 ‘경기하강’이란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이었는가? 그들은 말한다.
“분기별 성장률은 1995년 3/4분기 GDP 성장률 9.8%에서 4/4분기 6.8%, 1996년 1/4분기 7.9%에 이어 2/4분기에는 6.7%를 기록해서 경기가 점진적으로 하강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경기가 1995년 4/4분기를 전환점으로 해서 하강국면에 돌입한 것을 의미하며 경기둔화는 올 하반기부터 내년(1997년; 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정건화 등, 위 글, pp. 82~83)
당시에도 말했지만, 이것이 정부로부터 강단의 ‘진보적인’ 경제․사회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경제위기 혹은 경기하강을 주장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의 핵심적 근거이다. 그런데, 통계 자체의 신빙성 여부는 그것을 동원하고 있는 그들 자신들도 문제삼지 않고 있으니까 제쳐두더라도, 과연 이른바 ‘GDP 성장률’의 위와 같은 ‘둔화’를 들어 과연 ‘경기하강’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당시 나는 독자들에게 한 실험을 하게 했었는데, 이번엔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산의 등성이를 타고 산길을 걷고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 지점에서 기울기 9.8도의 능선을 일정거리 오르다가 기울기가 바뀌어 6.8도의 능선을 걷고, 다른 지점에서 7.9도, 다시 6.7도 식으로 기울기가 바뀌어 걷는다면, 여러분은 9.8도로부터 6.8도로의 변환점을 전환점으로 해서 산을 오르다가 내려오고 있는가?7)
결코 내려오고 있지 않다. 거꾸로 계속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기라성 같은 경제학, 사회학 교수, 박사님들께서는 “하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작년 4/4분기의 어떤 시점을 경계로 정말 하강, 그것도 급속한 추락을 하자, “봐라, 하강하고 있었지 않느냐?!”고 왜장치고 있다.
편견이 없이 현실을 바라본다면, 누구나 작년 4/4분기의 어느 시점을 경계로, 저들이 그 전이나 이후나 똑 같은 ‘경제위기’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주요한 것들이 판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판이함이야말로 바로 ‘경제위기’ 전과 이후를 반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지난해 4/4분기의 경제위기의 폭발이야말로 그 이전에 주장되던 ‘위기’론의 오류를 증명하는 생생한 증거가 아닌가?8) 그런데도 저들은 청맹과니처럼 그 본질적 차이를 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운운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정 박사의 악의적 왜곡 : 누군가 “한국경제 자체는 과잉생산이 아니었지만 세계 차원의 과잉생산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닥쳤다”고 주장했는가?
정 박사는 자신의 비판대상이 “한국경제 자체는 과잉생산이 아니었지만 세계 차원의 과잉생산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닥쳤다는 논리”를 폈다고 주장하고 있다(p. 30). 그것이 야비하게 사실상 나의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임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수 있다.9) 그렇다면, 바로 내가 그러한 해괴한 논리를 편 것으로 된다.
그런데 그는 증거를 댈 수 있는가? 아직 나는 그를 ‘인간도 아니다’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가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스스로 사람다움을 증명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나는, 그리고 내가 알기에 어느 누구도, 결코 그러한 해괴한 논리를 편 적도, 그리고 폈을 리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가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과는 반대로 나는 “한국경제 자체는 과잉생산이 아니었지만 세계 차원의 과잉생산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닥쳤다는 논리”를 편 대신에, 위기의 원인을 ‘한국경제’ 혹은 ‘동아시아경제’의 ‘구조적 결함’에서 찾는, 정 박사와 같은 얼뜨기 경제․사회학자 등의 완고한 무지와 자본측 나팔수들의 악의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중점적으로 논의했던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현재 진행중인 외환․금융위기, 경제위기의 원인을 ‘한국경제’에서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한국경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래야 겨우, ‘왜 위기가 외환․금융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였는가?’ ‘왜 좀더 빨리나 좀더 늦게가 아니라 바로 지난달에 폭발했는가?’ 정도일 것이고, 그것도 자본주의 세계시장과의 관련하에서가 아니면 사실은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위기의 본질은 과잉생산 공황이고, 따라서 그 원인도 세계시장에서의 과잉생산․과잉축적이다.
한국에 한발 앞서서 위기 = 공황 상태에 들어간 동남아 국가들이나 91년의 이른바 ‘버블 파탄’10) 이후 장기적인 침체․저성장 상태에 있으면서 다시 새로운 위기 = 공황을 맞고 있는 이웃 일본 등을 잠시 제켜 두자.
그러면, 한국경제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제수지의 적자 누적과 몇몇 거대 기업군(재벌)의 도산에 따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증인데, 이 양쪽 모두 현시기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극대화된 생산과잉의 직접적 결과이다. 국제시장에서 거의 모든 상품이 과잉상태에 있고,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상품인 자동차, 철강, 메모리 반도체, 석유화학 원료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국내외 시장이 심각한 과잉상태에 있어서 판매 및 수출에 애로가 발생했고, 가격 등의 교역조건이 악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이 국제수지 적자, 이윤 압박으로 되면서 재무구조가 부실하여 이자부담이 큰 기업들을 파산시켜 왔다. 금년 정초부터 한보가 쓰러지기 시작하여 위기가 폭발하기 전까지 기아까지 쓰러지면서 위기를 준비해 왔는데, 이들 기업의 도산의 원인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주력 상품의 과잉생산, 이윤압박, 이자부담 과중이었다.
그런데 과잉생산은 그것이 심화될수록 경쟁을 격화시키고, 이것이 다시 과잉생산을 심화시키는 식으로, 원인이 결과를 낳고 다시 결과가 원인이 되는 파국적 과정을 밟고 있다. 사실 근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전개과정은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 해 온 것인데, 최근 수년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성립하여 전지구적 차원의 ‘자유무역’이 강화되고, 유럽연합,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등 각 지역의 경제통합이 가속화되는 등의 움직임도 과잉생산과 경쟁의 격화에 대한 독점자본의 대응이자 과잉생산과 경쟁을 격화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멕시코나 동남아, 한국 등의 외환․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 등이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전면적인 시장개방․자유화를 강요하는 것도 그러한 과잉생산과 격화된 경쟁을 반영한 ‘너죽고 나살기’(dog-eat-dog)에 불과하다.”11)
여기 어디에 “한국경제 자체는 과잉생산이 아니었지만 세계 차원의 과잉생산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닥쳤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가? 여기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상품인 자동차, 철강, 메모리 반도체, 석유화학 원료 등”의 “국내외 시장의 심각한 과잉상태”, 그리고 파산 대기업 “주력 상품의 과잉생산, 이윤압박, 이자부담 과중”이 아닌가?
이 글을 “한국경제 자체는 과잉생산이 아니었지만 세계 차원의 과잉생산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닥쳤다는 논리”를 폈다고 읽을 수 있는 정 박사 등의 재주, 혹은 그렇게 왜곡할 수 있는 정 박사 등의 뻔뻔한 배포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현시기 위기의 본질은 ‘외환’ 문제인가?
정 박사께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왈,
“위기의 원인을 설명하는데 가장 고질적인 것은 ‘원론의 관철’을 증명하려는 자세이다. 물론 옳은 방법이긴 한데 문제는 관철의 양상에 눈감는 데 있다. 누가 이번 위기에 대해 써야 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왜 그것이 외환위기로 닥쳐왔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과잉생산과 이윤율 저하’를 원인으로 하는 것은 하나의 이론틀 안에서는 항상 옳겠지만, 그것이 외환위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오히려 훨씬 중요한 과제이다.”(p. 30)
이러한 논법이야말로 정 박사와 같은, 야비하고 교활한 자들이 즐겨 쓰는 항용 수법이다. 그는 정면으로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물론 옳은 방법이긴 한데” 운운하고 또 “항상 옳겠지만” 운운하면서 무언가 수긍하는 듯한 자세를 보이면서, 실제로 그가 교활하게 하는 작업은 “그것이 결코, 그리고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부정직하게 설득하는 것이다. 또 그가 가당찮게도 “지금은 원론적인 해석보다는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한 때이다”라고 훈시할 때도, 그의 문제의식은 ‘원론적 해석’ 혹은 ‘원론’을 부인하는 데에 있다.
실제로 현시기 위기의 원인과 관련하여 그가 현란한 말 바꾸기와 기회주의적 언사를 동원하면서 벌이는 작업목표는 ‘과잉생산과 이윤율 저하’를 원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를 “가장 고질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매장하고, 그의 날도깨비 같은 이른바 ‘제도주의적 설명’, “이전의 축적체제에 민간의 해외 자본 조달이 끼어든 데서 온 제도적 불일치”(p. 30)를 원인으로 확인시키려는 데에 있다. 그러자니 위기의 본질을 ‘외환위기’로 규정할 필요가 “무엇보다도” “오히려 훨씬 중요한 과제”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참고로 독자들은 시간 여유가 있다면, 이렇게 “원론적인 해석보다는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왜장치고 있는 정 박사님의 ꡔ노동사회ꡕ 98년 6월호의 글과, 그가 그토록 강한 어조로 ‘고질적으로 원론의 관철을 증명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 관철의 양상에 눈감는다’고 왜곡․매도하고 있는 나의 97년 12월 14일 토론회 발제문12)을 비교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의 글 속에 “원론적인 해석보다는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왜장 말고 어떤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이 있는지, 또 내 글 속에 ‘과잉생산과 이윤율 저하’의 관철의 양상이나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 분석이 없는지 말이다.
정 박사 같은 청맹과니가 아니라면, 정 박사의 글에는 ‘금융자본에 대한 국제적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니, ‘아시아지역경제권을 구상해 봄직하다’느니, ‘기초체력(fundamental)'이니, “팡글로스 밸류(Pangloss value)'니, ‘도덕적 해이’ 혹은 ‘기강 해이’니, ‘단순한 금융공황’이니, ‘학습효과’니, ‘제도주의적 설명’ 혹은 ‘제도적 불일치’니, ‘조정’이니 하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의 상투적이고 기만적․위선적인 언사들, 간단히 말해 구역질나는 쓰레기만 가득 차 있음에 비해서, 나의 발제문(아니, 위에 인용한 몇 개의 문단에만도)에야말로, 비록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이긴 하지만, 과잉생산 공황의 ‘관철 양상’,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이 훨씬 풍부하게 담겨 있음을 알 것이다.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은 정 박사처럼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을 왜장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내용으로 수행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그가 말하는, ‘무엇보다도 오히려 훨씬 중요한 문제’로서의 위기의 본질 혹은 핵심으로서의 ‘외환위기’ 문제로 오면, 나는 여기 정 박사나 그의 동아리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 한국경제 혹은 동아시아 경제의 범위를 넘어, 각국의 국제수지의 상태에 상관없이, 세계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는 위기에서 ‘무엇보다도 오히려 훨씬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역시 ‘외환위기’ 문제인가? 아니면, 현시기 위기의 본질, 아니 ‘무엇보다도 오히려 훨씬 중요한 문제’는 각국마다의 특수성에 따라서 개별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가?
‘서당개 풍월 읊는다’던가? 정 박사는 그 쓰레기 같은 논의를 전개하면서 “…는 그 현상형태일 뿐이다”(p. 31)는 표현을 동원하고 있다. 진지하게 묻건대, ‘외환위기’는 한국을 위시한 몇몇 나라에서의 현시기 과잉생산 위기의 현상형태일 뿐이지 않은가?!
다음과 같은, 구역질나는 쓰레기로 짜여진 논의에 대한 검토․비판은 생략한다
‘기초체력(fundamental)’이니, “팡글로스 밸류”(Pangloss value)니, ‘도덕적 해이’ 혹은 ‘기강 해이’니, ‘단순한 금융공황’이니, ‘학습효과’니, ‘제도주의적 설명’ 혹은 ‘제도적 불일치’니, ‘조정’이니 하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의 상투적이고 기만적․위선적인 언사들로 짜여진 논의들.
다만, 정 박사의 논의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경제위기는 근대의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책적 ‘조정’이나 ‘조절’의 우연적 실패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는 데에 그치자. 그는, 여러 가지 기회주의적 언사로 이러한 단정(斷定)에서 몸을 피할 궁리를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논의가 너무나 강고하다.
희대의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정태인 박사
정태인 박사는, “그럼 만신창이의 한국경제를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한 후에, 실로 희대의 경세가답게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몇밤 몇일 머리를 싸매도 발상하지 못할 여러 놀라운 방략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들 몇 가지를 열거해보기 전에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가롯 유다와 달리 그는 영특한 학자님답게 ‘저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말한다. 왈, “이러한 고민은 모든 것이 ‘부르주아’ 프로젝트일 뿐이라며 비판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 즉, 그는 있을지 모를 비판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프로젝트”에 헌신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제시하는 ‘개혁방향’(p. 31)은 한결같이 부르주아적이다. 아니, 부르주아적 환상과 주관 그리고 무지에 가득 찬 것이다.
물론 그는 여기에서도 내용 없는 왜장치기로 자신의 주장에 부당한 설득력을 더하려는, 예의 장기(長技)를 유감없이 발휘하는데, 이렇게 외친다. 왈, “정확한 상황판단과 구체적인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경제의 개혁문제를 다뤄야 한다.” ꠏꠏꠏ 그가 이른바 ‘개혁문제’를 다룸에 있어 언필칭 ‘정확한 상황판단과 구체적인 현실 분석’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요란한 ‘소리’ 외에는 그 중 어느 하나도 없다는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다.
아무튼 그의 경세방략으로 돌아가 보자.
대전제로 그는 “지금은 시장에 맡길 때가 아니라 시장 자체를 만들어야 한다”(p. 32)고 주장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리지 모르지만, 가장 솔직한 신자유주의적 주장의 하나이다. 주지하듯이,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기만적으로 표방하는 바의 ‘국가 개입을 배제한 시장’은 항상적 만성적 위기로 가득찬 현대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신자유주의란 국가라는, 사회로부터 소외된 독점자본의 특수한 공적 폭력을, 시장을 매개로 보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보다 밀접히 독점자본의 이해에 종속시키려는, 70년대 이후 새로운 전반적 위기 시대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불과하다. 이를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 배제’라는 기만적인 언사로 표현함에 비해서, 정 박사는 의외로 솔직담백하게 “지금은 (국가가) 시장 자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김대중 정권과 IMF가 강력하게 실행하고 있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시장 만들기’를 그는 뒤늦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시장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 자신 그에 못지 않은 ‘시장주의자’임은 지각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보다 구체적 문제로, 그는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인기 높은’ 상투적인 재벌문제를 들고 나오고 있는데, 이 역시 상대적으로 솔직하게, 그리고 제법 역설어법까지 동원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왈,
“신속하고 과감하게 하나의 사업에 몰두하는 대기업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시장이 모든 재벌을 무너뜨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그리고 불행하게도 이것이 지금의 ‘개혁’을 담당하고 있는 경제학자들의 사고이다).13)
… 재벌의 그 많은 빚을 주식으로 바꿔서 은행이 소유하게 하는 것은 은행의 시급한 부실채권 처리, 그리고 재벌통제에도 도움이 되고 재벌 스스로 전문 대기업으로 살아나가게 하는 길일 것이다.”(p. 32)
“재벌의 그 많은 빚을 주식으로 바꿔서 은행이 소유하게 한다?” ꠏꠏꠏ 이는 재벌의 빚을 탕감해주라는 말의 가장 부정직한 표현이다. 여기서 그가 봉사하고자 하는 바가 ‘독점부르주아지’임이 명확해졌는데, 흥미 있는 것은 그가 지향하는 바가 다름 아닌, ‘은행자본과 거대 산업자본의 결합’으로서의 금융자본 형태라는 점이다.
특이한 점은 그가 지향해야 할 금융체제로 이른바 ‘영미식 자본주의’ 대신에 ‘일본/독일형 은행제도’를 제시하고 있는 점인데, 그 논거 또한 흥미롭다. 왈,
“영국과 미국 방식의 금융 제도는 광범위한 자본시장(주식, 채권시장)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한국의 산업체제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 영미식 자본주의에서는 장기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주의 단기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식시장이, 즉 주주가 기업주를 통제한다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수많은 주주 가운데 누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기업주를 주주총회에서 통제하는 힘든 일을 감당하려고 할 것인가? 이른바 주주의 도덕적 해이14)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p. 32)
과문한 나로서는 과연 ‘영미식 자본주의’ 혹은 ‘영미식 금융제도’와 ‘일본/독일식 은행 제도’ 사이에 정 박사가 주장하는 내용의 차이가 과연 있는 것인지, 특히 그 차이를 원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광범위한 자본시장’의 존재 유무와 관련하여, 과연 일본과 독일의 자본주의는 그러한 ‘광범위한 자본시장’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 것인지, 그의 주장에 의심은 가지만, 그 여부를 단언하고 싶은 생각도 능력도 없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그토록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분석’이나 ‘구체적인 현실 분석’을 강조하시는 정 박사께서 최근의 한국의 새로운 현실을 무시하고, “그 수많은 주주 가운데 누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기업주를 주주총회에서 통제하는 힘든 일을 감당하려고 할 것인가? 이른바 주주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는 오늘날 날고 뛰는 변호사, 교수, 언론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참여연대’가 수액주주의 권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심지어 그 주주가 국제투기자본, 다국적 독점자본일지라도 ‘소액주주’이기만 하면 그 권한을 위임받아서 그 권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헌신적, 공격적으로 정말 미친‘듯이(?)’ 벌이고 있는 현실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빛(光)나는 자(人)들끼리는 서로를 못 알아 보나?
과연 그의 주장대로 “독일의 유니버셜 뱅킹제도나 일본의 주거래은행제도처럼 은행이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고 자신의 대출회수권을 이용해서 기업을 통제하는 선택”(p. 33)을 한다면, 이른바 “제도적 불일치”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국내의 금융관행과 실제 자본조달원의 행동방식 사이의 괴리”(p.31)가 예방되거나 ‘조정․조절’(pp. 28, 31 등)될 수 있는 것인지?
정 박사의 글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하고 직접적인 답은 들을 수가 없다. 대신에, “한국경제 위기의 원인”을 논하던 곳(pp. 30~ 31)에서는 그 위기의 직접원인을 “제도적 불일치”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국내의 금융관행과 실제 자본조달원의 행동방식 사이의 괴리”라고 하더니, 이제는 그 주요 원인을 말하자면 ‘국내의 금융관행’에서만 찾으면서 그 이른바 ‘예방․조절양식’을 그와 관련해서 찾는, 다소 엉뚱한 언동과 만날 뿐이다. 그는 말한다. 왈,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재벌이 은행의 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과잉투자가 항상 일어난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은행은 누가 소유하고 통제할 것인가?”(p. 33)
독자들이여, 기대하시라. 드디어 노동자와 국민의 권익 옹호에 전투적인 대경세방략가, “노동자와 국민의 힘을” “민주적으로 동원”하여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을 제압”(p. 33)하자고 외치는 정태인 선생, 아니 돈돈키키호호테 정태인 박사가 나가신다.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던가 뭐래던가?
― 경제위기 시기의 노동운동의 대응문제와 관련하여
“그렇다면 은행은 누가 소유하고 통제할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한 정태인 박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글을 잇는다. 왈,
“기본적으로 은행에서 일하는 ‘은행원’들이 소유와 통제를 해야 한다. 모든 통제의 기본은 내부 통제여야 한다. 이른바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이다.”(p. 33; 강조는 인용자. 이하 같음)
히스테리적인 ‘퇴출조치’로 실업의 위협에 떨고 있는 수천 ‘은행원’들이여, 감격스러운 광명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정태인 박사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왈,
“이것은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현재의 제도에서 노동조합에 그러한 통제 임무가 일부 맡겨져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강력한 효율적 방법(감시비용의 절감)이다.”(p. 33)
이제, 모든 노동자들이여, 여기에 광명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선 뭔가 수상하다. “모든 통제의 기본은 내부 통제여야 한다”더니, 여기서는 왜 갑자기 “일부 맡겨져야 한다”고 제한을 가하는 걸까? 왜 (은행을 제외한) ‘기업’의 경우는 노동자들이 그것을 ‘소유와 통제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제도에서 노동조합에 그러한 통제 임무가 일부 맡겨져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발언의 배후에는 어떤 흉계가 숨어 있을까? 왈,
“나아가서 노동조합은 단순한 감시를 넘어서 스스로 경영에 참여하여야 한다. 경영에 참여할 때 비로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기업 차원에서의 효율성의 향상도 보장할 수 있다.”(p. 33)
“노동조합은 스스로 경영에 참여하여야 한다?” ― 그렇다면, 지금까지 노동조합은 스스로 경영참여를 거부해 왔단 말인가?
“경영에 참여할 때 비로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 아하, 역시 노동자의 책임이 문제였구나? 주기적 위기를 필연적으로 기구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것은 ‘불가침․불가촉’인 채 노동자에게 어쨌든 그 위기의 책임을 묻는다?
“기업 차원에서의 효율성의 향상도 보장할 수 있다?” ― 역시 구제불능의 자본의 더러운 도구군!
* * *
여기서 우리는 정 박사가 나의 뒤통수를 치면서, “‘원론’에 사로잡혀 ‘파멸적인’ 실천전술을 끌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p. 30)고 일갈했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은 채 “‘파멸적인’ 실천전술”이라고 매도했던 것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익히 아는 것처럼, 이렇다.
1. 대전제: “노동자계급은 결코 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에 투항․협력해서는 안 된다. 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에 투항․협력하게 되면 전쟁이라는 파멸적 재앙이 기다릴 뿐이다.”
생각해보라. 이 엄청난 과잉생산의 시대에 각국의 노동자계급이 ‘국가경쟁력’에 투항․협력한다면, 제1․2차 대전이 그랬던 것처럼, 대전이라는 참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 최근의 독점자본의 움직임, 특히 외국자본만 유치할 수 있다면 곳감 빼먹듯이 모든 것을 다 팔아먹을 수 있다는 매국적 움직임, 돈만 되면 그토록 유치하려는 자본․생산공장을 서슴없이 지구촌 어디로라도 빼돌리는 자본의 움직임에서도 명백한 것처럼, 자본은 결코 (자신들의 국가이면서도) ‘애국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은 노동자계급에게 적대적 애국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부추겨서 세계의 노동자계급을 분할․지배하여야 한다.
“세계화(global) 시대의 ‘민족경제론’이 시급한 시점”(p. 27)이니, “글로벌 시대의 민족경제가 갖춰야 할 기본 원리”니 하는 상투적 너스레를 떨면서도, 경제위기의 폭발을 계기로 공기업 해외매각 등 최근에 특히 강화된 독점자본(정권)의 매국적 책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이 “기업 차원에서의 효율성”을 운운하는 정 박사 같은 자야말로 바로 그러한, 자본의 이데올로그 혹은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전쟁이라는 파멸적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를 경계․거부해야 한다”는 명제를 ‘파멸적인 실천전술’로 매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노동자계급은 기만적이고 자해적인 이른바 ‘재벌해체․재벌개혁’과 같은 요구에 매달려 ‘정리해고제’의 합법화와 같은 것에 동의해서는 안되고,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요구의 중심에 두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 당장의 구체적인 대안으로는, 극히 제한적인 의의를 갖지만, “실질임금 삭감 없는, 생활임금을 보장하는 위에서의 노동시간의 대폭적 단축을 통해서 고용을 확보․확대해야 한다.”
― 정 박사가 “파멸적인 전술”로서의 “대투쟁을 설파했다”고(p. 30) 말하고 있는 부문인데, 노동운동 상층부를 기만․회유․매수하여 자본에 의한 무단의 대량해고제인 ‘정리해고제’ 등을 법제화하고, 덧붙여 잉여노동 착취를 보다 효율화․강화하는 구조로 ‘재벌개혁’을 단행하려는 것이 독점자본의 노림인데, 이를 거부하고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요구의 중심에 두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니, 더구나 “임금 삭감 없는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이라니 하는 것들을 말하니, 자본의 이데올로그로서의 정 박사의 계급적 안목으로 볼 때 이 얼마나 ‘파멸적인 실천전술’이겠는가?
참고로, 정 박사 류의 이른바 ‘재벌해체’론 혹은 ‘재벌개혁’론이 얼마나 반노동자적인 내용․성격을 가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15)에서 보다 자세히 밝히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참조하기 바란다.
3. “이른바 노사정위원회는, 김영삼 정권 시대의 이른바 ‘노개위’ 이상으로 기만적인 기구이므로, 그 참가를 거부하여야 한다.”
― 이 역시 감언이설로 노동자계급을 기만하여 노동자계급의 상층지도부가 독점자본에 투항하고 노동자계급을 배반하게 만들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는, 자본의 고급 이데올로그로서의 정 박사의 안목에서는 가히 ‘파멸적인 실천전술’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4. 이외에 나는, 그간의 정세변화를 반영하여, 정 박사가 보기에는 필시 ‘더욱더 파멸적인 실천전술’일 세 가지를 더 더하고 싶다. 하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물론 전체 노동자계급은 지금 독점자본(정부)이 강력 추진중인 이른바 ‘공기업의 민영화․해외매각’을 비타협적 투쟁으로 저지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노동력 배제를 핵심적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구조조정’을 반대․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실업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조직․교육․훈련하여 그 조직과 힘으로 국가(독점자본)에 대해서 일자리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정 박사, 아무리 ‘파멸적인 실천전술’로 보일지라도 이것들이 ‘파멸적인’ 것은 당신네들 동패들에게 뿐이니, 마치 노동자계급에게 ‘파멸적인’ 것 같은 기만적 언술일랑은 이제 그만두시오.
* * *
이제 자본의 고급 이데올로그로서의 정 박사가 어떠한 감언이설로 노동자계급을 기만하여 노동자계급의 상층지도부가 독점자본에 투항하고 노동자계급을 배반하게 만들려 하는지, 혹은 그와 한 동아리들이 어떤 감언이설을 동원하여 그렇게 상황을 몰아 왔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 부분은 동시에 돈돈키키호호테로서의 정 박사의 진면목을 소설보다 더욱 진하게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위에서 나는 정 박사가 “(은행은 기본적으로 은행원들이) 소유하고 통제해야 한다”라든가, “(기업의 통제권 일부가) 노동조합에 맡겨져야 한다” 등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해야 한다”, “맡겨져야 한다” 등의 당위적 표현에 강조 표시를 해 두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조합에 의한 기업 통제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주장하셨을 때 “지극히 현실적” 부분에도 강조표시를 해 두었다. 이들 부분이야말로 화려한 정 박사의 언설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무대책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방법과 경로를 통해서 “해야 하고” “스스로 할 수 있기에” 그러한 언술을 농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한 그의 기만성 혹은 돈키호테성은 그가 “(국제 금융위기의) 근본적인 치유는 물론 금융자본에 대한 국제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p. 27)라고 태연히 주장할 때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도 인정하는 것처럼, “이들(국제 금융투기자본)이야말로 이른바 세계화(…)의 진정한 주체이자 수혜자”(p. 26)이고, 또 유력한 지배자인데 누가 나서서 그들에 대한 ‘국제 규제’를 만든단 말인가? (혹시 돈돈키키호호테 정 박사께서 갑옷에 말 타고 손수 나서시면 모를까......) 국제적 투기․금융자본에 대한 ‘규제’ 장치의 필요성은 정 박사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악명 높은 투기왕초인 조지 소로스16)가 얘기했던 바이고, 이는 바로 그 실현불가능성에 기대서 나온 기만적 얘기가 아니었던가?
결국 정 박사는 현실성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거꾸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마도 “공산당 선언” 탄생 150주년을 기념이라도의 하듯이(?) 그 첫 구절을 어설프게 흉내내서, 다음과 같이 썼을 때에도 그는 이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간의 도착(倒錯)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왈,
“전 세계에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다. 금융자본이라는 유령이다.”(p. 27)
1848년의 공산주의는 아직 비현실적 존재인 ‘유령’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이 아무리 멋있게 보였더라도, 현실적으로 “각국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한다”고 스스로 쓰고 있는, 엄연한 현실적 존재로서의 금융자본을 가리켜 ‘유령’이라니?! ― 이것이 바로 정 박사의 부르주아 박사다운 수준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기만과 돈키호테적 언동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 거기에만 머물기에는 그는 너무 영특하고, 또 계급적 사명감에 불타고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왈,
“큰 밑그림에 동의해서 국민이 스스로 참여할 때에만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과거의 강제동원에 대비해서 ‘민주적 동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동원에 의해서만 기존 이익집단의 저항을 무력화할 수 있다.17) 재벌과 보수 정치세력의 구미를 맞추면서 발본색원의 개혁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18)
즉 국민의 에너지를 동원해서 기존 구조를 개혁하고, 그 힘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길이다. 그리고 그 참여는 새로운 경제의 운영원리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노사정위원회는 중요한 제도일 수 있다.”(p. 33)
여기 또한 그의 장기를 발휘하여 ‘큰 밑그림’이란 것이 무엇인지 말이 없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기만과 우회로를 거친 끝에 드디어 본론․본색을 드러냈다. 바로 ‘노동자계급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물론 자본의 고급 이데올로그로서의 그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는 노동자계급 내부에 이른바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강한 경계․거부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 본색을 드러내기까지 ‘민주적 동원’이니, ‘국민의 에너지 동원’이니, ‘새로운 경제의 운영원리’니, 뭐니 뭐니 하는 기만적 상투어들을 동원했고, 또 더 나아가고 있다. 그 나아가는 꼴을 한번 보자. 정 박사 왈,
“현 정부가 외자 유치를 위해서 ‘정리해고제’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위원회를 활용하는 한 한국경제의 회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p. 33)
이 뻔뻔스러운 기만을 보라. 주지하는 것처럼, 그가 문제의 이 글을 쓰기 훨씬 전에 이미 “현 정부는 외자 유치를 위해서 ‘정리해고제’를 조기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위원회를 활용”했다. 그리하여 그가 인간다운 인간이었다면, 그리고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마땅히 “‘정리해고제’를 조기 관철시키는 데에 활용된 노사정위원회는 해체되어야 하고, 이제 한국경제의 회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써야 했다.19)
그러나 그는 그렇게 쓰는 대신에, 마치 ‘정리해고제’가 아직 관철되지 않았다는 듯이 “노사정위원회는 중요한 제도일 수 있다”고 쓰고 있다. ― 에라, 이 몹쓸 인간아!
그는 계속해서 기만을 농하고 있다. 왈,
“(‘정리해고제’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노사정위원회를 활용하는 대신에) 오히려 노동자와 국민의 힘을 이용해서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을 제압해야 할 것이고, 온 국민의 아이디어를 모아서 새로운 축적 체제를 만든다는 관점을 취해야 할 것이다.”(p. 33)
“새로운 축적 체제를 만든다”니? 정 박사는 노사정위원회를 활용하여 사회혁명이라도 하시려는 모양이지? 또 모르지. 또 정 박사께서 갑옷에 말 타고 나서시면 풍차들이 일어나 사회혁명으로 ‘새로운 축적 체제’를 만들지 누가 아나?
그러나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심오해서, 이 현실에서 정 박사의 돈키호테적 상상과 기만은 여지없이 깨지고 폭로되고 있다. 노사정위원회는 그가 역겨운 상투어들을 동원하여 “글로벌 시대의 민족경제가 갖춰야 할 기본원리”라고 주장하는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내부 금융, 모든 조직의 내부 통제에 의해 균형을 맞춰 가는 경제”의 방향으로가 아니라 그 정반대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은가? 노사정위원회 내부에 ‘공공부문 어쩌구’ 하는, 또 ‘금융부문 뭐래든가’하는 언필칭 ‘특위’들을 두고 있지만, 금융부문의 ‘퇴출․구조조정’, 공공부문의 ‘퇴출․구조조정․민영화․해외매각’ 등은 이들 특위나 노사정위원회에서의 논의와 상관없이, 실제로는 사실상 논의다운 논의 한번 없이 독점자본(정부) 자신의 임의 의지대로 처리되고 있다. 그리고 수천․수만의 노동자들은 그 직접적인 결과로 실업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또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정 박사와 같은 자들은 뒤통수치기와 왜곡, 그리고 기만적 언사들을 농해서 민주노총을 그러한 기만적 기구에 참가시킴으로써 민주노동운동, 자주적 노동운동을 거세․무력화시켜야 하는 사명에 불타고 있는 자들이다. (아니거든, 증명해 보라!) 노동운동 내부의 반노동자계급적, 기만적 조류를 청소하는 것 ― 이는 오늘날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갈수록 긴요한 문제로 되고 있다.
* 이 글은 6월 29일 민주노총 정책토론회 「IMF체제하의 정세전망과 민주노총의 대응방향」에서 토론문으로 발표되었던 글이다.
1)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강단에 매달리고도 혹시 아직 박사가 못되셨다면, 빨리 박사가 되시길 바라는 표현 정도로 이해하십시오.
2) 정태인, “IMF 관리 체제 반년 점검, IMF체제와 한국경제의 개혁”, ꡔ노동사회ꡕ 1998년 6월호, 30쪽(이후 정태인의 이 글에서의 인용은 인용의 말미에 페이지 수만 괄호 속에 넣어 밝힌다).
3) 그가 어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과 성향, 발언 등에 비추어 그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지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의 과문의 탓인지, 당시 그의 공개적인 발언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경제위기가 폭발․심화되자 그는 누구보다도 강하게 “봐라, 경제위기였지 않느냐?!”고 왜장치며 나서고 있다. 그런데 아직 상황의 성격이 누구에게나 명확해지기 전에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의 등뒤에 숨어서 기껏 속삭이고 있다가 논쟁과 상황이 농숙해지자 벌떡 일어나 그가 코미디를 ‘엮고’ 나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89 ~ 90년의 치열했던 공황논쟁 때에도 그는, “자본주의 경제는 경기순환 과정에서 필연적인 팽창․수축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축적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러한 축적의 위기는 오늘날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적 개입에 의해 고전적 의미에서의 공황(Crisis; 원 필자 정건화 교수께서 여기에 이 영어 단어를 병기했는데, 이 또한 이 문장의 앞뒤 맥락으로 해서 ‘축적의 “위기”는 공황 즉, crisis가 아니다’는 명제로 되면서, 앞서의 ‘엮어진 논리, 하나의 논리’의 선구적 형태를 보여준다.: 채)의 전면적 전개가 저지되면서 불황의 상대적 장기화로 표출되어 왔다”며, 89~90년의 상황은 ‘공황’이 아니라 ‘산업구조조정’일 뿐이라던, “국가독점자본주의 공황저지론 = 국가독점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의 배후에 웅크리고 있다가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공황이 아니라 ‘소공황’일 뿐”이라는 ‘엮어진 코미디’를 들고나선 바 있다.
4) 채만수, “‘경제위기’ 공세와 노동운동의 대응방향”,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997. 5. 2, 특히 17~21쪽 참조.
5) 그러한 태도가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나의 97년 5월 글 17~18쪽 참조.
6) 당시에 ‘경제위기’를 말하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당시 정부측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70년대 이후의 여섯 번째 순환”운운하고 있었다.
7) 실제 수직각은 90도인데 100도인 것처럼 가정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게는 매 각도에 100/90을 곱해야 하지만, 그것이 논리 결과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는 않는다.
8) 물론 저들 부르조아 경제학자들과는 다른 준거에서이지만 김성구 교수 역시 여러 글에서 지난해 4/4분기에는 경제위기가 ‘표출’ 혹은 ‘현재화’되었을 뿐이라며, 그 전의 국면을 위기 국면으로 규정했던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화’ 혹은 ‘표출’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위기’란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고, 당시 논쟁의 대상으로 되었던 것은 현실 그것의 문제였다. 또한 1930년대 이후, 그리고 특히 1970년대 이후 ‘항상적 혹은 만성적 위기’, 즉 만성적 과잉생산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리고 나의 경우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이를 인정하고 있지만, 96~97년 당시 논쟁의 대상은 그러한 항상적 혹은 만성적 위기가 아니었다.
9) 또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정 박사는 문제의 글을 집필하실 즈음에 나의 글을 수배하고 있었다.
10) 거대한 번영기에 이윤율의 하락으로 극심해졌던 부동산․증권투기의 공황에 따른 파탄.
11) 채만수, “현시기 외환․금융위기의 배경과 의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 주최 정세토론회(97. 12. 14) 자료집 ꡔ한국경제의 현황과 노동운동의 대응방향ꡕ, 12~13쪽.
12) 이 글은 요청이 있으면 하시라도 컴퓨터 파일 형태로 보내줄 용의가 있다.
13) 그러나 이는 권력적 ‘개혁’ 작업에서 소외된 정 박사의 투정 내지 트집일 뿐, 김대중 정권의 ‘개혁’ 작업은 최근의 ‘부실기업 퇴출’, ‘부실은행 퇴출’ 소동에서 확인되는 바대로, 정확히 정 박사께서 교시하신 방향․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가, 드러내놓고 발설하진 않았지만 내심 예정하고 있었을 대량해고, 대량실업을 유발하면서 말이다.
14) 그는 다른 곳에서는 이른바 ‘moral hazard’를 짐짓 의식적으로 ’기강 해이‘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는데(특히 p. 28 참조), 여기서는 왜 ‘도덕적 해이’로 쓰고 있을까?
15) 채만수, “‘재벌해체!’ 감미로우나 빗나간 외침”, ꡔ당대비평ꡕ 제4호, 1998년 여름호.
16) 물론, 무언가 한참 거꾸로 가고 있는 이 땅에 오셔서는 극진한 ‘국빈대우’를 받으셨지만!
17) 그가 생략한 말 : “노동조합, 노동자계급의 저항도 무력화할 수 있다.”
18) 그들의 구미를 맞추지 않아도 정 박사가 말씀하시는 방법․경로에 따라서 발본색원의 개혁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19) 다만, 정 박사에게 반론의 탈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점자본(김대중 정권)은 ‘외자유치를 위해서’만이 ‘정리해고제’를 관철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사정위원회는 그보다 훨씬 더 반노동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