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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을 보내며

현장에서 미래를  제72호
박성인

2001년을 보내며
권두언




박 성 인
연구위원, 노동자의 힘 정책위원장





융단폭격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빈 라덴이 아프간 남부산악지대의 어느 동굴에서 미군의 폭격기와 특수부대에 짐승처럼 쫓기고 있다. 3개월 전에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타와 팬타곤에 대해 감히 동시다발테러를 범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무고한 아프칸 민중들이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죽어가고, 포로로 잡힌 탈레반 병사들은 집단학살당했다. 그리고 잿더미로 변한 아프간의 산하와 내팽겨진 주검들 위에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고 있다.

세계는 이 ‘성스런’ 반테러보복전쟁을 무조건 따르는 ‘정의로운’ 국가들과 ‘불량국가’로 나뉘어졌다. 뒤이어 군수 독점자본만을 살찌게 할 미사일방어망(MD)계획이 거침없이 추진되고, 이 틈에 독일과 일본은 군사력의 해외파병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금지됐던 족쇄를 벗어 던져버렸다. 이 파병에 소위 ‘좌파’를 자처하던 사민당, 노동당, 녹색당 정권들이 앞장섰다.

이러한 융단폭격이 아프간 산하에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권력과 언론에 의해 고취된 애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소위 테러‘용의자’에 대해 마녀사냥이 가능한 ‘반테러법안’이 각 나라에서 속속 통과되고, ‘공안’권력은 ‘반테러’의 명분으로 무소불위의 지위를 확보해 나갔다. 그리고 이 융단폭격의 포연 속에서, 99년 시애틀에서 반세계화투쟁 시위대에 의해 좌절됐던 WTO 뉴라운드 선언(도하 개발 아젠다)이 합의되고,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질서를 강제할 체제가 세워졌다. 미국은 자국의 시장에 대해서는 보호무역주의라는 MD로 방어하면서, 최첨단 상품과 자본으로 제3세계 민중들에게 다시 경제적 융단폭격을 가할 것이다. 그 결과 각국의 노동자 민중들은 더욱 거세어질 구조조정과 감원 등 생존의 위협 속에서 아프간 어느 협곡에서의 빈 라덴처럼 쫓기고, 제3세계는 감당할 수 없는 외채의 잿더미에 눌릴 것이다.

2001년은 이처럼 9․11 테러와 뒤이은 융단폭격의 포연과 잿더미 속에서 저물어가고 있다.


WTO 뉴라운드
아프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테러동맹국’들이 소위 ‘문명세계의 자존심’을 위해 가장 비문명적인 학살을 자행하여 탈레반을 굴복시키고 미국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자, 미국의 증시시장이 급등세를 타기 시작했다. 덩달아 세계 각국의 증시시장도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어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미국 국민들의 소비심리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2002년 하반기경에는 미국경제를 중심으로 세계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전망들이 제출됐다.

더욱이 테러와의 전쟁 비용으로 미국정부가 2,360억달러를 지출하여 일자리 창출과 소득 증대로 이어지고, 이는 최근 침체에 빠진 정보통신(IT)산업에서 경기를 부양시킬 것이라는 발표가 이어졌다. 올 들어 10차례에 걸친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금리인하와 유가하락 등에 힘입어, 2002년의 세계경제는 1%(OECD)~2.4%(IMF)의 성장을 할 것이며, 미국 경기의 회복으로 하반기에는 경기침체를 벗어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들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이 전세계 노동자 민중에게도 낙관적인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간 경쟁의 격화와 이에 따른 기업의 이윤율 하락으로 구조조정과 대량감원이 더욱 거세지고 있으며, 경제성장의 결과는 각국의 빈부격차를 더욱 구조화시키고 있다. 이미 미국과 일본의 실업률은 5%대를 넘어서고 있고, 민영화(사유화), 자본에 대한 탈규제화, 그리고 노동유연화는 더욱 거세게 전세계 노동자민중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부침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투자처를 찾지 못해 투기화된 거대한 금융자본과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는 실업자를 양산해 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세계화 시위대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제4차 WTO각료회의는 ‘뉴라운드’선언을 합의했다. 곧이어 뉴라운드가 “세계 경제회복에 큰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과는 달리, 이후 이어질 2~3년간 분야별․지역별 무역협상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세계시장을 둘러 싼 치열한 쟁탈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협상의 결과가 각 나라의 계급계층에 끼칠 영향력을 둘러 싼 일국 내 계급간 대립과 갈등으로 표현될 것이다.

미국의 경기침체를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의 동시불황 속에서, 세계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축하려는 WTO 뉴라운드 선언이 각 나라와 자본간 무역전쟁과 각 국내 계급간 대립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킬 것이 예측되는 가운데, 2001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승부수
정현준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등 3대 게이트의 재수사와 수지 김 간첩조직사건의 폭로,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사건 등으로 권력의 핵심부인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최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 지난 1년 간 조기 레임덕 현상에 시달려 온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이 승부수가 의도하는 효과는 금새 나타났다. 9․11 테러와 세계 경제의 동반 불황의 영향도 있었으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따른 경제위기가 곧바로 정치적 위기와 결합하는 것을 차단하여, 정치위기와 경제위기를 분리시켜 냈다. 물론 이 성패는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동시에 이 승부수는 보수정치권 내에서 악몽처럼 현 정권의 발목을 붙들었던 DJ 대 반DJ의 구도, 호남 대 반호남의 구도를 반전시켜 이회창 대 반이회창의 구도로 전환시켰다. 물론 이러한 구도를 눈치챈 한나라당은 검찰총장의 탄핵, 교원정년연장법 개정안 등으로 현 정권의 핵심부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보수 정치권 전반의 재편은 불가피해지고 있다. 더욱이 김대중의 당 총재직 사퇴 이후 중도포럼과 쇄신연대간의 양대 세력을 중심으로 권력투쟁을 벌여 온 민주당이 당총재제도의 폐지, 당권과 대권의 분리, 예비선거제 등의 보수정당구조의 개혁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이에 한나라당의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개혁 흐름에 가세하면서, 보수정치권 전체는 정계 개편과 정치개혁의 급류를 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보수정당간의 이전투구와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보수정치세력 전반에 이반되는 국민들의 관심과 시선을 다시 2002년 양대 선거에서의 정치개혁으로 흡수하여 보수정치 자체를 위기의 수렁에서 건져내려는 몸부림이다. 한편으로는 2002년 양대 선거에서 보수정치세력간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정치 자체에 대한 국민적 혐오와 이반을 체제 내로 재흡수하기 위해 던져진 승부수가 과연 어떠한 결과로 귀결될지 아직 예측할 수는 없다.

이 승부수는 2002년 양대 선거를 통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하려는 시민운동진영과 진보정치운동진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보수정치권 내에서의 정계개편과 정치개혁이 개혁정치 혹은 진보정치의 공간을 더욱 협소화시키면서 2002년 양대 선거를 보수양당 구도로 만들어 낼지, 아니면 개혁적 보수신당의 출현으로 시민운동진영의 일부와 진보정치진영의 일부가 이러한 흐름으로 흡수될지 아직 분명하게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단, 2001년 하반기에 들어 급속하게 전개되는 보수정치진영의 재편과 개혁이 노동자민중들의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와는 무관하게 위로부터의 ‘승부수’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1년 노동자민중진영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이 전체 계급역학관계를 변화시켜 내지 못한 결과이다. 단병호 위원장의 재구속은 이러한 힘관계의 상징적 표현이다.

노동자민중진영이 다시 한 번 노동자와 민중의 생존권과 기본권 요구와 투쟁에 기반한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을 현실화시켜 낼 것인지, 승부수에 의해 던져진 보수정치진영의 재편과 개혁의 급류에 휘말리면서 그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데 만족할 것인지의 선택의 기로에서, 2001년 한 해는 노동자민중진영이 한국사회 전체를 향해 어떠한 ‘승부수’를 던질 것인지를 되물으며 저물어가고 있다.

12월 들어, 정부와 관변 연구단체, 그리고 경제단체들이 2002년의 경기전망에 대해 앞다투어 발표하고 있다. 대체로 3% 안팎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고, 상반기에는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 하반기에는 다시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거꾸로 2002년의 한국경제가 이러한 수준의 성장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감면하며 재벌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02년 양대 선거 때문에 구조조정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2002년 경제전망에 대해 이미 노동자민중진영은 그 어떤 장밋빛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이 3%가 되던 5%가 되던 그 경제성장의 결과가 생활의 향상과는 무관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오히려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위기의 처방으로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일상화․제도화․법제화되면서 노동현장은 일상적인 전쟁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성장이든 후퇴든 결국 결과는 빈부격차의 구조적 심화로 귀결될 것이며, 나아가 비정규직과 실업자를 더욱 양산할 것이라는 점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2001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의 과정에서, 비록 그 투쟁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자체’를 저지시켜 내고 김대중 정권을 퇴진시켜 내지는 못했지만, 구조조정과 그를 통한 경기회복의 결과가 노동자민중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제 분명하게 대중적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최근 철도와 가스공사 노동자들의 민영화․구조조정 저지투쟁, 오리온전기와 대우자판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저지투쟁 등은 2001년 노동자투쟁에서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중적 자각의 표현이다. 2001년 벽두에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저지투쟁, 1년이 넘게 끈질긴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 등이 그 투쟁의 직접적인 성과는 없었음에도 바로 이러한 현실을 전체 노동자들에게 생생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2002년 양대 선거라는 권력의 재편을 앞두고, IMF체제와 그 유일한 처방으로 강요되어 왔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성패 여부가 전사회적으로 정치적 쟁점을 형성할 것이다. 의보수가만을 인상하여 그 비용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한 의료보험 개혁의 실패, 교육을 시장원리로 재편하려는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문제,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보완하려 했던 생산적 복지의 한계가 전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노동유연화 공세와 비정규직 양산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고, 여전히 노동기본권을 수호하고 확장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끊기지 않을 것이다. 농민과 빈민들 역시 생존권을 사수하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 동력 자체에 있지 않다. 이러한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민주적 기본권 쟁취투쟁을 어떠한 정치적 전망과 연결시켜 나가는가에 있다. 이러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사회적 쟁점이 보수정치진영의 정계개편과 정치개혁의 급류에 휘말리면서 유실되어 버릴 것인지, 아니면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전망 아래 노동자 민중 스스로가 그러한 전망의 능동적인 주체로 설 것인지에 달려 있다.

2001년 한해를 보내며, 만약 우리가 지난 한 해로부터 희망의 단초를 얻어낼 수 있다면, 바로 한국의 노동자 민중들이 2002년의 거센 풍파 속에서도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정치조직을 가져갈 것이라는 점이다. 한/노/정/연

2001-12-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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