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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털이를 선언해야 한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31호
백기완

권두언






“빚털이”를 선언 해야 한다



백 기 완
자문위원





저고리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면 이를 얼핏 풀고 다시 끼우면 된다. 그러나 세상구조의 주춧돌이 잘못 놓여져 기우뚱 거릴땐 어떻게 해야 할까. 마땅히 주춧돌부터 다시 놓아야지 그 위에 삐뚤어진 벽돌 몇장만 바로 잡았다고 해서 기울던 집이 다시 서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우리들이 겪고 있는 경제파탄의 충격은 자못 심각하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보수 정치권과 제도언론까지 국제통화기금 식민지시대라고 개탄하리 만치 돼 버렸겠는가. 그러나 여기서부터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 경제파탄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이 말이다. 오늘의 돌발사태인가 아니다. 사실은 박정희식 “조국근대화정책”이 강행되면서부터 이 분단의 현실은 식민지적 구조로 철저히 재편 돼 온 것이며 그것이 김영삼정권의 이른바 “세계화정책”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경제의 자주성을 낱낱이 파괴, 국제 독점자본의 자본증식논리에 봉사하는 대가로 정권의 안보와 부패재벌의 안전조업을 뒷받침 해 오다가 이꼴이 된 것이다.
그런데 너도나도 경제의 어려움을 걱정하면서도 이점에 대한 구조적 검토나 반성이 있어 오는가 전연 없다. 검토 반성은커녕 너도나도 식민지적 상황이라고 개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식민지적 상황을 더욱 강화해가는 기막힌 현실이다.

그 증거의 첫째로 국제통화기금을 마치 신주처럼 모시는 여론 몰이가 그것이다. 철저한 이자놀이에 지나지 않는 그 빚을 감히 구제금융이라고 하기도 하고 따라서 그 기금과의 협약을 준수해야 우리 경제가 회복할 수가 있다는 투의 강변이 그것이다.
도대체 국제통화기금이란 무엇인가 이 말이다. 한마디로 미국 독점 금융자본의 위기해소를 위한 촉수에 지나지 않는다. 보길 들어 지금 미국의 산업생산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20% 안팎이다. 이 때문에 미국 경제는 30조불에 이르는 엄청난 금융자산의 돈놀이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으로 되어지고 있다. 그 위기를 앞장서 가로막아주는 촉수가 바로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무역기구” 그리고 이른바 “국제통화기금”이다 이 말이다.
그 명백한 증거로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돈을 꾸어다 쓴 나라가 경제파탄의 수렁에서 회복되었드라는 실례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요즈음의 정치권력이 총대를 메고 언론이 앞장서 “국제통화기금”을 신주처럼 모시는 오늘의 경제회복노력이란 사실은 국제 독점자본의 식민지적 지배를 강화해 주는 것이며 그 대가로 위기에 빠진 부패구조의 안정을 노리는 술수이지 결코 파탄난 민족경제를 살리자는 논리가 아닌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 능력으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가 없는데도 빚을 갚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경제에 대한 무제한의 착취를 용인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어째 그런가. 정부발표에만 따르더라도 지금 외채는 모두 1,500억불, 이에 대한 이자만 98년엔 150억불, 내년엔 180억불 2천년엔 210억불로 늘어나게 된다. 이것을 30년 장기채로 바꾸어 주지도 않겠지만 설사 바꾼다 치더라도 30년동안 이자만 처도 6천억불이나 된다. 그런데 30대재벌의 매출액 대비 이윤율은 고작 0.3%이니 도대체 무엇으로 갚느냔 말이다.
때문에 아주 딱 까놓고 그것도 일초라도 서둘러 못 갚겠다고 디리 대야한다. 그러지 않는 한 우리 경제는 피와 살과 기까지 다 빼앗긴 나머지 뼈만 남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재벌들이 진 빚을 왜 우리 국민한테 떠맡기느냐 이 말이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화정책’이 발표되던 지난 94년부터 3년간 재벌들이 다투어 꾸어온 외채가 자그마치 1,000억불, 그 돈으로 도대체 무엇을 했던가. 다투어 중복투자와 과잉투자를 했고 또 다투어 해외 직접투자와 함께 동남 아시아에서 돈놀이까지 하다가 거덜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빚은 우리 경제의 빚이 아니라 바로 한국적 재벌의 부패, 그 비생산적 파국의 표현인데 그것을 우리 국민의 부담으로 떠넘기려는 작금의 작태는 무엇일까.
사태의 해결이기 전에 부패에 대한 항체로서의 우리 국민을 해체하자는 무서운 음모에 속한다. 아니 재벌부패 구조로 종속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또는 인습적으로 강제하자는 경제 외적 폭력이니 이에 승복하면 승복하는 사회가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네 번째로 잘못된 것은 재벌해체 문제다. 오랫동안 이땅의 양심들이 이땅의 재벌해체 문제를 들고 나온 까닭은 ‘한 재벌 총수가 재벌의 주식을 60% 이상 거머쥔 소유의 독점문제요’ ‘국제 독점자본의 수직적 분업체계인 예속경제의 실체가 바로 재벌이라는 것이요’ ‘금융특혜, 세제특혜, 땅장사 특혜 기업의 특권적 흡수합병 특혜 따위로 인한 거품경제의 장본이 재벌이라는 문제요’ ‘재벌자체가 사회적 불균등 구조라는 것’과 ‘재벌자체가 분단의 경제적 귀결’이기 때문에 이를 해체하여 민족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사회정의 실현의 요구였다.
그런데 요즈음 너도나도 내뱉는 말, 재벌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 뒤엔 실지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재벌들의 소유의 편중문제나 예속성의 문제 따위는 아예 제쳐놓고 그나마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간산업이나 주요산업을 외래 독점자본에 흡수시키는 것까지를 재벌해체인 것처럼 들고 나오고 있다.
이것은 재벌경제를 온 시민적 경제로, 아니 온 민족적 경제로 보편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외래 독점자본에 넘겨줌으로써 우리경제의 예속성을 합법화하고 나아가 분단의 현실속에서도 그나마 끈끈히 내재 돼 있던 자주성을 여지없이 파괴하자는 것, 다시 말해 외래 독점자본에 의한 우리경제의 재편 과정을 현 정치권이 대행 해 주자는 것이지 올바른 구조조정이 아닌 것이다.

다섯 번째 지적해야 할 것은 너도나도 우리 경제를 시장경제의 원리에 떠맡기자는 논리인줄 안다.
묻노니 오늘날 빚으로 파탄난 우리경제의 논리는 무엇이던가. 시장경제였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시장경제의 원리에 떠맡기자는 것은 무엇일까.
보다 철저히 국제 독점자본의 자본증식논리에 우리네의 목숨도 정조도 다 바치고 심지어는 사람의 사람됨을 돈놀음으로 바꾸고 사람의 아름다운 하제(내일)에의 꿈과 이상을 돈놀음에 예속시키자는 터무니없는 몰가치이다.
백 발자욱을 물러서서 이야길 해보자.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르면 금융시장, 자본시장 따위를 모두 여는 것이다. 그리되면 국제 공금리 2%짜리 자본이 우리들 골수에까지 들어 오게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여기서 그 2%짜리 자본은 이자를 얼마쯤 챙기게 되는가. 놀랠세라. 이자 30%를 챙기게 된다. 이리되고서도 남는 경제가 있는가. 한마디로 없으렷다.
또 자본시장이 개방되면 들어오는 것은 직접투자나 증권투자로 기업의 시세와 주식의 값만 올려 속만 파먹고 달아나는 투기자금 뿐이다. 그 실태를 우리는 오늘의 미국경제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합쳐 3천억불씩 기록하던 미국이 90년대 중반을 고비로 적자폭이 줄게되면서 아시아는 어떻게 되었던가. 돌이킬 수 없는 빚쟁이가 되었다.
세계경제는 어떻게 되었던가. 파탄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시장경제의 원리가 영원한 보편적 원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다. 부패한 기득권층은 우리경제를 강제적으로 시장 경제원리에 내맡겨 구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생산적 목숨들이 전적으로 시장경제에 내몰릴 땐 오늘의 파탄처럼 속빈 강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여섯 번째로 정리해고를 강요한 측도 이를 받아들인 노동자측도 잘못 됐다는 것을 지적한다.
지금 이땅에 남은 자주성의 마지막 뚝방은 무엇일까 생산적 노동이요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무정부주의적으로 이윤에 이윤만 추구하는 몰가치와 부패에 맞선 독보적인 항체다. 따라서 오늘의 경제파탄의 덤터기를 씌워 이들 노동자들의 기본권과 생존권 박탈을 제도적으로 강요한 정리해고제는 이미 파탄난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 아니다. 항체의 말살로 하여 이윤에 이윤만 추구하는 국제독점 자본의 이익을 위한 최악의 착취지대를 만들려는 합작음모에 속한다.
이러한 최악의 범죄성을 뻔히 알면서도 강요되는 정리해고제에 동의해 준 노동계의 모양새는 무엇일까.
항체로서의 노동자임을 스스로 포기한 중대한 사태만이 아니다. 올바른 경제회복과 인류의 어기찬 전망까지를 파기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런 한때의 잘못 같은 것은 하루빨리 깨우쳐 정리해고제를 파기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경제파탄의 책임을 지고 쫓겨나야 할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말이다.
죽도록 일만 한 노동자들인가 아니면 그 아까운 노동의 열매를 모두 왜래 독점자본에 떠 넘겨 준 재벌들인가. 노동자들이 힘으로 대답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일곱 번째로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경제구조가 뒤바뀌다 보면 이땅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통일, 그 자주적 통일이 파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통일이란 무엇일까.
민족분단 그리고 그 내부의 사회적 분열을 강요하는 안팎의 물리적 힘을 자주적 역량의 성장으로 극복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경제회복이라는 명제 밑에 재편되는 경제구조의 실질로 보면 온 한반도를 국제 독점자본의 무제한의 자본증식권으로 강제 편입시키자는 것이지 결코 우리네 자주성의 온 한반도적 완결로서의 통일을 위한 준비작업이 아니다. 그것을 정치권력이 앞장서고 언론이 부추기고 어용학자들이 나발불고 이에 따라 자주성의 알짜요 역사진보의 알기(주체)인 노동자 양심적 시민들까지 어정쩡해 있는 동안 지금 역사는 거꾸로 흐르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치 파멸전야와 같은 긴장감을 온 몸으로 느끼게되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의 상황인식이다.
왜 그럴까. 경제건설을 하되 통일의 주춧돌인 자주성을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세상, 아름다운 세상의 모형이 제시되지 않아 그렇다고 생각된다.
그렇다. 가을에 열가마를 주기로 하고 봄에 쌀 한가마를 꾸어다 먹은 농부가 빚을 못 갚게 되자 농부의 아낙은 종으로 끌려가고 어린 딸은 몸종으로 끌려가고 농부는 곤장(사형)을 죽도록 맞었는데도 여전히 빚은 빚대로 남는 것에 부홰가 난 농부는 주인집을 찾어가 따졌드란다.
“당신네 광(창고)에 가득한 쌀은 수십년동안 모두 내가 지어 빚으로 갚은 낟알인데 어째서 나는 굶주리는가?” 또 “빚은 빚인데 어째서 우리 식구들 사람마저 잡아가는가?”
이때 주인의 대답이 “네 이놈 빚 진 죄인이란 말도 못 들었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때서야 농부의 귀가 번쩍 열리고 눈이 활짝 열리는 것이었다.
빚진 죄인이란 말은 장두쌀를 놔먹는 주인놈이 들씌운 잘못된 인륜도덕이구나, 하고.
그리하여 빚 장부를 뺏어 불살라 버리고는 쌀도 다시 찾고 식구들도 데리고 가 빚 없는 천지를 만들어 잘 살았더라는 이야기가 있어온다.
이것을 “빚털이”라고 한다.

이 역사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 우리도 나름의 빚털이를 해야한다.
땀 흘려 온 사람, 양심의 사람들은 차가운 거리로 내몰리고 돈놀이꾼들은 따슨방에서 뭉개는 세상의 건설은 참된 경제회복이 아니라는 빚털이. 한/노/정/연

1998-04-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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