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최 갑 수
이사/서울대
올 노동절은 예사롭지 않을 조짐이다. 4‧19혁명이 있은 지
꼭 39돌이 되던 날,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은 전면파업을
개시하였다. 이미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민주노총’은
4월말에서 5월에 걸쳐 총력투쟁을 다지고 있으며, 정부는
강경대응을 공언하고 있다. 정치개혁, 재벌개혁, 정부개혁이
부진한 가운데 ‘IMF위기’의 부담을 홀로 짊어지게 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으며, 재계 역시 위기의식을
앞세워 노사정위의 탈퇴를 결의하면서 정면충돌을 부르고 있다.
현 정권은 출범 당시 ‘고통의 분담’을 사회적 합의의 토대로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치기반의 한계로 말미암아 개혁의
추진력을 상실한 채 노동자들을 파업의 대열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노동절(May Day)은 탄생할 당시부터 파업의 움직임과 숙명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잘 알다시피 그것은 ‘8시간노동제’를
요구했던 1880년대 미국의 노동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계급운동의 범세계적인 기념일인 ‘5‧1절’이 어떻게
태어나는 지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새로이 조명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리라.
1880년 당시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을 진행하면서 커다란
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1880년대의 10년간에 제조업에 대한
자본투자는 3배나 증가했고, 소규모 자본주의는 기업 합동과
합병, 독점의 세계로 변모하였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최대철강생산국이 되었고, 노동력이 270만
명에서 590만 명으로 급격하게 커졌으며, 1만 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는
‘도금시대(Gilded Age)’이자 ‘도적귀족 자본주의’의
시대였다. 노동인구의 절대다수가 끔찍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소수는 중세의 성을 방불케 하는 호사를
구가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입장을 사회적 다윈주의를 통해
정당화하였다. 이는 특히 ‘도적귀족들’의 요구에 잘
부합하였다. “빈곤이란 단지 게으름과 악덕의 증거일 뿐이다.
부는 소유자의 근면과 덕성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절대다수의 빈곤은 그들이 잘못을 저질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미국은 1870년대의 재정위기에서 막 벗어나고 있기는 했지만,
실업률은 여전히 20%의 수준을 유지하고 임금은 1882-86년에만
15%가 하락하였다. 노동시간은 주당 6일 근무에 일당
12-16시간에 이르러 예컨대 철강노동자들은 훨씬 뒤인
1920년에도 주당 평균 63.1시간을 일해야 했고, 아동노동 역시
일반적이었다.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산업재해율은 유럽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서도 높았다.
노동자들의 주된 투쟁수단은 파업과 불매운동이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공장폐쇄, 파업파괴자의 동원, ‘구사대’,
블랙 리스트의 작성, ‘황견계약’ 등의 관행은 보편적이었다.
비록 노동조합이 여전히 비합법적이고 음모의 주동자라는 비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배심원단이 점차 유죄 평결을 삼감에 따라
고용주들은 법원의 중지명령에 의존하게 되었다. 집세의 갈취
관행이 일반적이어서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만이 아니라
집에서조차 열악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유럽으로부터 이민노동자들의 대거 유입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1880년대 중반에 미국에 들어가던 사람들은 선상에서 일자리
알선업자들을 만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첫 번째 일자리가
파업파괴자로의 그것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비록
파업노동자가 이들에게 사태를 설명하여 그 가운데 직장을
그만두고 심지어 노동쟁의에 가담하는 예가 없지 않았지만,
파업파괴자로서 일터를 전전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었다.
노동자들의 인종적, 민족적 분열 때문에 노동현장에서 경제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이 거칠게
난무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노동자들이 생존조건을 지키는데 전혀 무력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거세고 노동대중이
치명적인 내분으로 분열되어 있기는 했지만, 1880년대에
전투적이고 대중적인 노동계급조직운동이 되살아났다. 그러한
움직임은 세 가지 형태를 띠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정당운동과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국제노동자협회’가 있었다. 1880년대
중반에 가장 중요한 조직은 개혁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 이하 ‘기사단’)’이었고,
노조운동을 대표하는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이하 ‘미노련’)’은 당시에는 규모가 작았지만 끝내
전국적인 노동조직으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서 왜 1880년대에 기사단이 더 강력하고 대중적인
조직이었는지, 그것이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미노련’이
살아남았는지 검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동절’의
탄생설화와 관련지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사단’은 1869년에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비밀조직으로
탄생했지만, 1880년대 초에는 공동체조합주의를 신봉하는
공개적인 노동조직으로 탈바꿈하였다. 노동자들의 연대와 평등을
믿었던 ‘기사단’은 숙련노동자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노동자층을 포괄하였고, 노동현장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행위의 유효성도 믿었으나 노동자정당의 건설에는
반대하였다. 그들은 임금체제에 반대하고 그것을 생산협동조합에
입각한 사회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 지도자인 파우덜리(Terence
Powderly)는 기계공 출신이었지만 보수적인 인물로서 파업행위에
적대적이었던 반면에, 지방조직의 간부들은 보다 급진적인
사회주
의자, 무정부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880년대에 시카고는 미국에서 노동운동의 진원지였다. 시카고는
거대한 철도망의 중심으로서 육류 및 식품가공산업의 집결지였고
대규모 농기계산업체인 맥코믹(McCormick) 회사의 소재지였다.
또한 시카고는 미국의 자본가가 말 그대로 경찰을 소유하여
그들을 사병으로 거느렸던 가장 약탈적인 형태의 치안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된 좌파 정치집단은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기사단’에 가입하였고,
성과 인종의 평등을 믿고 임금노예제를 폐지하고 그것을
연방주의적인 생산협동조합의 사회로 바꾸고자 했다. 시카고
노동운동의 지도자인 파슨스(Albert Parsons)는 인쇄공으로서
무정부주의자이자 ‘기사단’의 단원이었다.
당시 ‘미노련’은 소규모 노동조직에 불과했다. 그것은
1881년에 불과 150명의 회원으로 ‘미국 및 캐나다
노동조합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다. 그것은 노조주의에
대한 보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노선을 천명하였다. 그것은
‘기사단’과는 달리 임금체제에 반대하지 않았고, 영국의
노동조합운동을 본받아 노동계급의 연대보다는 가입 노조원들의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주력하는 ‘경제노조주의’를
천명하였다. ‘미노련’은 정당정치를 거부했지만 의무교육과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같은 현안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것은
1883년 제3회 대회에서 곰퍼스(Samuel Gompers)를 의장으로
선출했고, 1884년 대회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고 입법화의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것을 위한 총파업을 벌이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최종기한으로 선택된 날짜는 1886년 5월
1일이었다.
‘미노련’이 왜 하필 5월 1일을 골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날이 노동계약의 개시일 이라는 미국의 관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날이
유럽에서 전통적인 봄 명절이라는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본래는 풍요를 비는 종교적인 제례의
성격이 이 시기에 와서 거의 사라지고 단지 민중축제로
존속하기는 했지만, 총파업을 자연이 새로이 소생한다는 5월
1일로 잡은 일은 약간의 상상력만 발동하면 얼마든지 멋진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 노동절이 국제적인 노동운동의 공식적인
휴일로 채택된 이후에 붉은 카네이션이나 붉은 장미 또는
은방울꽃이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도 바로 그 날이 자유, 봄,
젊음, 희망, 새벽을 표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수많은 노동대중에게는 참으로 그러했다. ‘미노련’이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보다는
의회에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기사단’의 파우덜리도
그렇게 여겼던 반면에, 일반 노동자들은 그 결정을 열망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1885년 중엽에 이르면 거의 모든 도시에
‘8시간노동제 쟁취를 위한 동맹(Eight Hour Leagues)’이
결성되었다. 노동자들의 행동은 집회나 연설에 국한하지 않았다.
결과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파업의 물결이었다. 1886년에 전
노동인구의 10%가 넘는 61만 명이 파업에 가담하였다. 이
경제회복기에 파업은 임금의 삭감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8시간노동제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파업의 선두에 선 것은 굴드(Jay Gould) 소유의 남서부
철도회사에 소속된 ‘기사단’ 철도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임금
삭감에 대항하는 파업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기사단’의 단원수가 급증하여 불과 2년이 안되어 7만
명에서 1886년 봄에는 약 75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공은
파우덜리에게도 놀라
운 것이었고, 그는 심지어 가입을 통제하려고까지 하였다.
1886년 5월 1일에 가까이 갈수록 사태는 폭발적인 양상을
보였다. 이제 거의 모든 파업은 자발적이었고, 노동자들은
파업하고 공장폐쇄를 당하고는 조직화되어 ‘기사단’에
가입하였다. ‘1886년의 대격동’이 벌어진 것이다.
엥겔스(Engels)는 그 해 봄에 한 편지에서 “미국 노동대중의
운동 참여를 1886년의 주요한 사건의 하나로 간주한다”고
썼다.
자본가와 노동자 공히 1871년의 파리 코뮨이 되풀이된다고
믿었다. 노동자들은 파업과 행진을 벌였고, 자본가들은 경찰,
‘구사대’, 주방위군을 동원하였다. 5월 1일(토요일이어서
휴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에 전국적으로 34만 명이 행진에,
19만 명이 파업에 가담하였다. 시카고가 진원지였다. 그 날
8만여 명이 행진을 벌였다. 그것은 평화적이고 축제 분위기였고,
유혈사태도, 파리 코뮨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인
5월 3일에 맥코믹 회사는 파업에 맞서 공장폐쇄를 감행하였다.
회사는 300명의 경찰과 파업파괴자들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구타하였고, 경찰은 끝내 발포하여 6명을 사살하였다.
무정부주의자인 스파이즈(August Spies)는 다음날 시내의
헤이마킷트 광장(Haymarket Square)에서 항의 집회를 열자고
제안하였다. 그 날, 토요일과 비교하여 모인 군중은 작아
3천명에 불과했다. 연사들은 청중을 가두 투쟁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오히려 평정으로 이끄는 듯하였다. 그렇지만 집회가
끝나갈 무렵 경찰이 뜻밖에 군중을 향해 돌진했고, 거의 동시에
누군가 경찰 쪽에 폭탄을 던졌다. 광포해진 경찰이
집회참석자들에게 구타를 가하고 발포하였다. 경관과 시민 6명이
죽고 50여명이 다쳤다.
집회는 비극으로 끝났고 그 영향은 더욱 심각하였다. 미국
최초의 전국적인 ‘적색공포’가 나타났다. 시카고 당국과
중‧상류층의 시민은 반란으로 이어질 폭력사태가
임박했다고 확신했다.
노동운동을 분쇄할 구실이 생겼고, 반격은 빠르고 어김없었다.
도처에서 체포가 벌어졌다. 시카고에서만 수백 명이 검거되었다.
결국 경찰은 파슨스와 스파이즈를 포함하여 8명을 폭탄 투척과
그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했지만, 사실은 그 가운데 오직
1명만이 집회에 참석했고 그마저도 마지막 연사로 연설 중이었던
것이다. 피고 가운데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에 관한 모든 사법적 항소가 실패로 돌아간 다음, 한
사람은 옥중에서 자살했고 위의 두 사람을 포함하는 4명은
1887년 11월 11일에 당당한 자세로 교수형에 임했고 나머지는
1894년에 일리노이 주지사의 과감한 조치로 사면되었다.
스파이즈는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의 침묵이
우리의 말보다 더욱 웅변적인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미국에서
8시간노동제가 달성되는 것은 1세기에 걸친 오랜 투쟁 끝에
1938년에 ‘공정노동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이
통과된 뒤였다.
이른바 ‘헤이마킷트 사건’의 주동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면서 감형을 호소하는 청원이 미국 내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러시아, 쿠바 등지에서 답지하였다. 그러한 범세계적인
연대의 움직임은 주지사로 하여금 사면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8시간노동제를 국제적인 노동운동의 구호로 만들고, 5월
1일에 동시적인 연대의 움직임을 국제적으로 조직하자는 생각을
탄생시켰다. ‘미노련’은 1888년의 대회에서 8시간노동제를
위한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1890년 5월 1일에 벌일 것을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바로 이 시기에 ‘제2차 인터내셔널’이 조직되지
않았더라면 ‘노동절’은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미국이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5‧1절’을 기리지 않고 9월 첫
번째 월요일을 ‘노동절’이라고 하여 공휴일로 삼고
있음이(마치 우리가 1992년이 될 때까지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삼았듯이) 그 점을 시사한다. 1889년 7월 14일, 그러니까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를 함락시켜
절대주의를 끝장내고 프랑스혁명을 구한 지 꼭 1세기가 지난 뒤
파리에서 ‘통합사회주의자 대회’가 열렸다. 명칭이 이러했던
것은 같은 시기에 파리에서 열린 다른 개혁주의자들의 사회주의
대회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이 ‘제2인터’의 창립대회는
국제적인 수준의 노동입법, 작업장에 대한 감시, 요구조건의
실현을 위한 방법과 수단, 상비군 및 전쟁 등에 관한 4개의
의제를 채택하여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논의‧결정하고,
보르도 출신의 프랑스대표인 라비뉴(Raymond Lavigne)의 제안에
따라 1890년 5월 1일에 8시간노동제의 쟁취를 위한 국제적인
시위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는 이미 ‘미노련’의 결정을
알고 있는 터였고, 또 미국에서 5월 1일이 노동계약의
개시일임을 제안근거로 내세웠다. 4명의 대표가 “총파업이란
사회혁명의 개시를 뜻한다”는 점을 들어 그 제안을 비판하는
주장을 내걸었지만, 대회는 ‘5‧1절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운동의 구체적인
연대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엥겔스는 한 편지에서
“이것이 이 대회에서 성취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적었다.
그렇다고 라비뉴나 제2인터가 처음부터 ‘5‧1절’의
제도화를 계획하거나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우선, 그 결의안은
단지 일회적인 국제적 시위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연례적인
행사로 되풀이될 것임을 시사하거나, 그것이 특별하게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해 낼 것임을 암시하는 문구는 찾아볼 수 없다.
결의안은 단지 “자국의 상황이 요구하는 방식에 따라 이 시위를
조직할 것”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 조항이 당시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탄압법’ 하에서 불법적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처지를 고려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울러
위의 엥겔스의 편지 문구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결의안을
특별하게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증거도 찾기 쉽지 않다. 한
부르주아 언론을 제외하고 당대의 어떤 언론도 이 결
의안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인 바이양(Edouard Vaillant)은 몇 년 후에 “누가
5‧1절의 급속한 부상을 예측할 수 있었는가?”라고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5‧1절의 급부상과 제도화는 확실히 1890년의 첫 번째
시위의 대성공에 기인한다. 수천 명이 참여하는 노동절의 시위,
모임, 파업이 프랑스,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에스파냐,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포르투갈, 루마니아, 폴란드, 미국, 아르헨티나,
멕시코, 쿠바에서 열렸다. 5월 4일,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는
무려 30만 명이 운집하였다. 엥겔스는 감격하여 「런던의
5월 4일」이라는 제목의 한 단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메이데이 기념일은 그것을 전투적인 노동계급의 첫 번째 국제적
행위로 만든 보편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획기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개별 국가에서 가장 만족할만한 진보를
기록하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1891년의 제2인터 브뤼셀
대회는 5‧1절의 연례적인 행사를 결정하였고, 그 해에
러시아와 아일랜드가, 1893년부터는 그리스가 행사 개최국의
대열에 가담하였다. 메이데이 1백주년이 되는 1990년 현재
공식적으로 그것을 공휴일로 정한 나라는 107개국에 이르며,
우리 나라는 1992년이 되어서야 그것도 공휴일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로 정해 놓고 있는 실정이다.
8시간노동제는 초기의 모든 5‧1절 시위의 공통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노동자들은 또한
노동조건의 개선, 사회보장, 사회권과 민주적 자유의 확대,
보통선거권의 보장과 군비 및 군사력의 감축 등을 요구하였다.
메이데이의 시위는 사회주의의 이념과 노동대중의 국제적 유대를
선전하고 사회주의 정당의 정책을 설명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5‧1절은 곧 혁신이라”고 메이데이의 행진은 소리 높여
외쳤다. “나무에 물기가 오
르면, 사상이 두뇌에 전달이 되고 사회주의가 성장한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벨기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등지에서 당국은 5‧1절 행사를 강제로 중단시키려고 했고,
그것은 노동자들과 경찰 및 군대와의 충돌을 야기하곤
하였다.
노동절이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에 시위와 파업을 벌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890년에 5월 1일은 목요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정당과 노조는, 미국의 ‘전미련’과 같이
노골적으로 적극적인 산업투쟁에 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왜
당원이나 노조원들이 상징적인 행위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5월의 첫 날이 아니라
첫 일요일에 시위를 벌이기를 바랐다. 바로 이것이 영국이 5월
4일에 첫 번째 메이데이를 벌인 이유였고 독일의 사민당 역시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독일에서 영국과는 달리 처음부터
우세한 것은 5‧1절이었다. 이 문제가 1891년의 브뤼셀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을 때, 영‧독과
불‧오의 선택이 맞섰고 후자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날짜의 국제적 선택 역시 우연의 산물이었다. 처음의 결의안에는
작업의 중단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들어있지 않았다. 문제는
단지 첫 번째 메이데이가 주중이기 때문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신중함이 작용하기는 했지만, 끝내 메이데이는 실제적인 요인을
넘어서서 상징적 선택이 되었다. 노동절을 하나의 시위, 또는
기념행사 이상의 의미로 승화시킨 것은 바로 노동행위의
중단이라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메이데이가 참으로 노동계급의
삶과 노동의 정체성 확립에 핵심적인 부분이 되는 것은
사회당들이 망설이는 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징적인 파업을
벌일 수 있었던 나라나 도시에서였다. 영국은 엥겔스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었다. 휴일이 아닌 날에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힘의 과시이자, 이
마의 땀을 거두고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하기를 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의 정체성과
투쟁을 확인하는 몸짓이자, 노동의 해방에 뒤 이어 올 ‘자유의
왕국’의 예고편으로서의 진짜 공휴일이자 축제인 것이다. 이
점에서 노동절은 열정과 희망을 나르는 풍성한 수레였던
것이다.
우리의 메이데이는 아직도 ‘근로자의 날’에 머물러 있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공휴일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노동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진정한 자유를 이룩하고 있지 못하다. 정식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우리의 노동절은 마치 우리의 노동계가
처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전면파업과 세기말의
방황과 망설임을 넘어 메이데이가 제시했던 ‘희망의 원리’를
북돋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