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병 현
교육위원장/홍익대교수 경영학
노동규율과 작업장 정치: 해고자 자택 대기?
권두언
유난히 무더운 여름이다. 높은 기온과 습도는 답답한 노동자
민중운동이 처한 어려운 국면을 더 힘들게 헤쳐나가도록 하는 것
같다. 그나마 간간이 내리는 소나기라도 있어서 더워진 몸과
마음을 식혀준다. 지난 4월 남북한 교류카드가 공개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모두 걱정했었다. 남북한 교류 분위기 속에서
공공부문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와 노동조합 길들이기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우려였다. 하지만, 롯데 노동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업장 노동자들이 강제적 해산조치에 맞서
의연하게 투쟁하는 모습은 그러한 우려가 지나친 것이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 노동현장의 사정은 그리 밝은 것 같지 않다.
90년대 초반부터 기업들에 의해 집요하게 추진되어 왔던
‘기업문화’ 통제와 임금 및 직급체계 개편이 실업의 공포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사주제’라는 유인을 앞세워 전면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동조합 대응은 무기력할 뿐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점은 많은 사업장에서 일반화된 양보교섭
관행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로서 그
동안 획득해온 많은 노사관계 제도적 관행들을 후퇴시키고자
하는 자본의 시도를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노동운동과 관련된
단협조항의 ‘자발적’ 개악혐의에 연루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우조선이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이미
‘무쟁의 선언’으로 87년 노동조합 운동의 영광을 훼손했던 바
있지만, 이번 경우는 노동운동을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한
협소한 관료주의적 조합운동으로 가두고 규율화하려는, ‘해고자
자택대기’라는 단협 조항을 두고 다시금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논란이 되었던 단체협약 잠정 합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협 제23조(징계)<별도 합의서>3호 신설(징계의 효력)
최종확정 때까지 징계의 집행을 유보. 단, 해고의 경우 자택
대기하며, 원심확정시 원심발령 일자 유효” 그리고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제23조 징계와 관련하여 갱신 요구안으로
1)징계위원회 노사 동수, 2)고의, 과실을 고의로 3)징계가
확정될 때(재심까지)까지는 징계의 집행을 유예한다”라는
내용의 협약 요구안을 교섭을 통해서 1)번 2)번안은 현행으로
(잠정)합의되었으며, 3)번안은 노조 요구안으로
(잠정)합의되었다.” 그러나, “단, 해고의 경우
자택대기하며”라는 삽입된 마지막의 단서 문구가 문제가 되고
있다. 잠정 합의안에 대해 대우조선 ‘현장중심의 민주노조
추진위원회’가 노동조합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는
우려 하에 진지하게 이의를 제기하였고, 현대자동차의
‘민추위’가 이에 가세하여 대우조선 노동조합 집행부와 논쟁을
벌였다.
최종 합의 결과와 무관하게 이 잠정 합의안 논쟁은 현 시기
우리사회 노동운동의 현 상태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둘러싼
작업장 정치지형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인 것 같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민주노총 합법화를
거래하면서 현장 노동자 및 활동가들의 정서와 동학을 배제한
채, 일부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 산별 노조화의 졸속 추진과 제도
정당정치에의 참여를 택한 민주노총 주도 세력들의 투기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에
분파적으로 방관하거나 무기력하게 대응함으로써, 조합관료와
현장 활동가 및 조합원들과 점차적으로 멀어져 가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런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대응해야 할 사안은 IMF
관리체제 이후 자본에 의해 빠른 속도로 추진된 관리 감독직에
의한 작업장 통제력 장악과 노동규율 강화 시도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전노협의 건설과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투쟁을 통해 세워냈던 작업장 규제력은 상당부분 저하되었고,
‘써비스 잔업’이 일반화되어 가는 듯하며, 심지어는 민주노조
운동의 중요한 토대인 활동가들의 활동을 봉쇄하고 작업장 동료
노동자들부터 분리, 고립시킬 우려가 있는 분할지배 노동통제
장치를 노동조합이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대우조선의 어느 노동자가 “민주와 어용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와 관심이라고 지적하였듯이,
자본에 의해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자 및 활동가들의
해고는 다른 아닌 노동자들에 의해 차단되어야만 하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보호해야만 하는 핵심적인 사안인 것이다. 이 사안은
다른 교섭사항들의 거래와 합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임금과 복지에 관한 노사관계 거래 및 협약은 오직
집단적인 노동조합과 집합적인 역량의 존재와 이에 대한 노사간
상호승인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교섭은 자본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교섭에 불과하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구성하는 주요한 토대인 동시에 조합의 역량을 구축하고
강화하는 핵심적인 활동으로서 자신과 동료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작업장 활동가들의 활동을 보호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은
조만간 스스로 존립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질 것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이미 상당부분 화석화되어 버렸다고 하는 서구
노동운동의 과거 역사로부터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본과
그들의 대리인들인 관리자들이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에 과연 누가 나서서 그것을 제한하고 규제할 것인가?
그 경우에 당연히 노동자들 및 활동가들이 스스로가 나서야만
하며, 노동조합이 이를 조직적으로 지원해야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자본과 국가를 대리해서 노동자 및
활동가들을 규제하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장치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 노동조합 운동은 숙련노동자 층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했다. 상대적으로 자본과 관리장치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그들은 미숙련 노동자과 자신들을 분리시킴으로써
노동시장에서 배타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자본과 거래했다. 이들에게서 해고는 사실상 도급 계약의 파기와
유사한 것이었고, 그것을 자신들에게 종속된 반숙련 /미숙련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집단적인 파업으로 연결시키는 전통적,
제도적 자원들을 갖고 있었다. 반면 반숙련/ 미숙련 노동이
지배적인 현대 노사관계 하에서는, 그리고 각종 노동악법이
존재하고 실질적인 산별노조가 아직 요원한 한국적 노사관계
상황에서 노동조합 활동 및 노동자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을
이유로 이루어지는 해고는 실질적이고 민주적으로 기능하는
노동조합의 존립에 엄청난 해악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작업장과 동료 노동자들로부터의 분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해고 사유를 은폐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자본에 의한
자의적 노동력 이용에 대한 집합적 대응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갖는다. 고도의 결합노동이 이루어지는 현대적인
노동과정에서 동료 노동자가 처한 문제는 바로 자신의 문제이며,
설사 자신과는 사소한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 문제는 다른
형태를 취하여 자신에게도 다가올 문제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
노동조합 운동의 기본 전제가 아닌가?
자본과 그 대리인들의 분할지배 통치는 항상 집합적인
노동문제를 개별적인 이해관계 혹은 인간관계 혹은 사실상
저자거리 깡패들의 의리 논리에 불과한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노동조합을 통해서 그리고 노동자들의
상호 민주적인 소통과정 속에서 작업장 문제에 집단적으로 준비,
대처하고 해결해야만 자본권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은가?
의사들의 집단적 폐업에 정부당국이 당황하는 것에서 볼 수
있고, 수많은 파업 점거 농성 투쟁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듯이, 노동자들이 일상 속에서 자발적으로 연대하고 단결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보호하며 올바르게 대표한다면, 노동조합은
그 집합적 힘을 바탕으로 해서 자본에 강건히 맞서 요구하고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실업의 공포를 이용한 작업장 장악
시도는 노동운동 및 노동조합 운동의 토대를 장악하려는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일상화와 관료주의적 부패
고리의 확산을 통한 노사관계 통제를 위한 토대를 다지려는
술수일 수 있다. 노동운동의 토대인 작업장과 헌신적인
활동가들을 조합운동으로부터 고립, 분리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노동통제정책은 노동현장에 단지 특정한 정치적
색조를 가진 비민주적이고 반 노동자적인 노조운동 세력을
이식시키려는 술수로 의심받을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업현장에서의 노동조합에 대한 일상적 비판은 건강하고
민주적인 노조운동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조합 운동이 갖고 있는 체제 재생산의 모순과 대중적,
개방적 지향성에서 오는 그 고유한 한계로서 어쩔 수 없는
‘불순성’에 대한 철저한 각성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건강한 민주노조운동을 기대하기란 요원할 것이다.
노조집행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해고자 자택대기’와 같은
혹시라도 모를 현장 비판세력의 억압과 격리 시도는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남한 사회의 노동조합운동의
건강성을 위험에 빠트리고 말 것이다. 그래도 현재의 논쟁이
전개되는 양상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나마 우리사회
노조운동에서 건강성과 연대성, 계급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조운동의
노선과 정파적 이해대립에 기반한 조합조직 내 의사결정과
그것의 집행과정을 지켜보면서 그것의 효과가 이제는 도를
지나쳐 이념적으로 심각한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가고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현 시기 노조운동에 필요한 것은 굳건히 현장에 기반을 둔
조직기반 강화와 노동조합 및 활동가들에 의한 작업장 규제력
회복이다. 작업장에서 멀어진 추상화된 단계론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노동운동 및 노동조합운동과 그들의 논리는
신자유주의적 유혹에 걸려들 염려가 있다. 이미 유연 노동시장에
대한 불명료한 입장에서도 드러났듯이, 민주노조운동이 항상적인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풍파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란 점이 명약관화하다. 지난 2년 여간
노동조합의 투쟁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효과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저항이 가능했던 것은 작업
현장에 초점을 둔 굳건한 일상투쟁과 조직활동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투쟁이 없는 작업장에는 자본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규율화된 노동기계만이 있을 뿐이다.
IMF의 경험은 우리 노동자들에게 실직의 공포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유동하는 투기적 금융자본의 운동과 관련된 경제
이데올로기를 한층 강화된 형태로 경험하게 하는 것 같다.
화폐물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유혹은 노동자의
일상에도 강하게 촉수를 뻗치고 있다. 글로벌 미디어들이
지배하는 획일화된 소비 대중문화와 언론권력에 의해
노름(유식하게 투기 혹은 투자) 잘하거나 비판적 사회의식 없는
사람이 ‘신지식인’이고 잘난 사람으로 신화화되는 가운데
“한탕주의”가 판친다. 지구상 가장 거대한 몸집을 가진 흰수염
고래가 가장 조그만 어패류에 속하는 크릴새우를 먹이로 하듯이,
거대 다국적 금융자본은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진 호주머니
푼돈을 먹이로 하고, 거대한 몸집의 대자본들 사이의 투쟁과
약육강식은 “쎄 빠지게” 일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육체와
피땀을 희롱하고 집어삼키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작업장과 지역현장에서의 일상적인 투쟁이 민주노조운동의
초석임을 잊지 않고, 추상화된 이데올로기에 유혹되지 않으면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노동 규율화에 반대하는 투쟁에 보다
더 큰 힘을 모으고 연대해 나가야 할 시기인 것 같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