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또 다시 경제위기의 희생제물이 될 수 없다
이 성 백
연구위원
시절이 하 수상하다. IMF 사태를 맞은 지가 겨우 엊그제
같은데 또 다시 제2의 경제위기가 몰려오고 있다는 불안감이
우리 사회를 엄습하고 있다. 방만하게 몸집불리기에만 급급했던
재벌기업들은 그들대로 삐걱거리고 있고, 테헤란 밸리의
벤처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하고 있다. 한빛은행, 동방금고 사건이
터져 세상을 시끄럽게 하더니 이 사건이 잊혀지기도 전에
정현준, 진승현 게이트와 같은 신판 금융비리가 불거져 나오고
있다. 주식시장 지수는 바닥을 헤메고 있고, 유가는 내릴 줄
모르고, 남대문 지하도에 노숙자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확실히 여기저기서 위기의 증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정치권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는지 모르는지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정쟁에서 못벗어나 국회를 파행으로 몰아갔고, IMF 위기를
극복했다던 대통령은 국내정치를 등한시하고 대북정책에만
관심을 쏟았다. 불안에 떨고 있는 민초들에게 그러기에
국제적으로 최대의 영예라 할 노벨 평화상 수상은 자신들도 같이
기뻐해야 할 영광스런 경사로 다가오지 않고 있다.
이렇게 팽배하고 있는 위기감 속에서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대목은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미명아래 결국 모든 피해가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전근대적인 족벌식 소유구조의 해체를
비껴가려는 재벌들과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선 강력한
구조조정밖에 없다는 정부 내 경제관료들은 대량 정리해고의
칼을 다시 들고 노동자들을 희생제물로 삼으려 하고 있다.
대우자동차와 한전 사태는 금속 및 금융 부문을 비롯하여
노동계에 불어닥칠 제2의 정리해고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번 단행될 대량 정리해고로 인해 내년에 실업률이 얼마나
높아지게 될 지 그 통계 예상치까지 벌써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버젓이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경제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수 근로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인가? 필요이상으로 많은 근로자들이 자리를 지키면서
월급을 받고 있는 것이 한국 경제의 국제 경쟁력과 경제적
효율성을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요, 닥쳐오고 있는 경제 위기의
주된 원인인 것인가? 한 노동자의 일자리는 그와 그에게 딸린
가족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를 잃으면
이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희망을 잃는다.
그런데도 굳이 이들에게서 이런 모든 것을 앗아가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다시 이렇게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나 언론은 한
마디로 구조조정이 불철저한 것이 원인이라고 하고, 해외의
경제전문가들도 한국이 살길은 구조조정 밖에 없다면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구조조정을
해야한다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구조조정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해당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데에 있다. 구조조정의 우선순위를 가리는 데에서
고려되는 것은 어떤 것이 우리 경제의 국제 경쟁력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데에 가장 책임이 있느냐는 점일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 경제가 비효율적인 데에 있어서 최대의
주범은 재벌이다. 군사 독재하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면서 성장한
재벌은 문어발식으로 기업의 외형적 규모만을 늘리는 데에
급급하면서 소유와 경영의 구조, 기술 개발, 기업 전문화 등
건전한 기업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키우는 데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재벌은 소위 세계화의 강화되는
국제경쟁 속에서 비틀거리며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병든
공룡이 되었다. 이 병든 공룡이 우리 경제의 비효율성의 가장
주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을 개혁하는
것이 구조조정의 첫 번째 핵심 과제이자,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다. 재벌을 제대로 개혁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어떤
것들을 백방으로 개선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구조조정은
미온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노동자들로서는 앞날이 더욱 염려스럽게 되는데, 설령 이번에
정리해고가 정부와 기업이 바라는 데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정리해고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벌
개혁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앞으로 계속하여
문제스런 상황이 발생할 것이고, 그때마다 정부와 기업은 제3,
제4의 정리해고를 들고나올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다.
물론 정부가 얼마 전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강한 압력을
행사해 재벌 기업들을 몰아세우는 듯한 시늉을 하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신문들이 분석 보도했듯이 재벌 개혁은 결국 변죽을
울리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또 한가지 한심스러운 것은
그나마 이루어졌다는 재벌 개혁의 내용을 보면 평상시 현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샀던 재벌은 해체되는 등 재벌개혁이
개혁의 기본 성격마저도 현 정권의 선호에 따라 적지 아니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재벌 개혁은 실제적인 개혁과는
거리가 먼 재벌 길들이기에 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재벌 개혁 다음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은 군사독재
시절부터 관행이 되어온 정경유착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승현 게이트를 위시하여 요즘 터져
나오고 있는 금융비리들의 원인을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국민의
정부가 등장한 이후로 생겨난 신종 정경유착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 사건들과 관련하여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연루설을 부인하고 있으나, 신종 정경유착을 주장하는
이들 경제 전문가들의 분석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 21세기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제고시키기 위해 쉴새없이 기술혁신을 선도해야
할 벤처산업은 기술 개발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주가조작 등을
통해 수백억대의 자금을 챙기는 악성 벤처기업가나 금융업자들의
투전판이 되어있고, 또한 이들이 챙기는 자금의 일부는 이들의
뒤를 봐주는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재벌과 신종 정경유착이 한국경제가 비효율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최대의 장애 요인들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재벌을 어떤 형태로든
근본적으로 해체하지 않고, 또한 국민의 정부 하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결코 어떤 구조조정이나 개혁도 그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구조조정을 하려 한다면, 그
정부는 우선 이 문제들부터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
전에는 어떤 정부와 기업도 노동자 정리해고를 말할 자격조차
없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미뤄둔 채,
모든 고통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려는 정리해고에 결사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노동자는 자신들을
정리해고하기 전에, 먼저 재벌을 해체하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척결하라고 정당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고 노동자만을 경제위기의 희생제물로 삼으려는 어떠한
기도에도 힘껏 맞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정리해고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이
제기되는데, 왜 굳이 노동자의 숫자를 감축하는 정리해고의 길을
택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이미 IMF위기 때부터 노동계는
정리해고를 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노동시간의
단축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을 정부와 기업계에서는 별로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고 있다. 얼마전 프랑스에서는 오랜만에
나라 전체가 경사스런 분위기로 들떴다. 사회당 정부가 실업률을
줄일 방책으로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여 주당 노동시간을
2시간 단축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그 결과로 실업률이
기대이상으로 하락했다는 것이었다. 노동시간이 길기로 다른
나라에 앞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왜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에는
그리도 인색한지 도대체 납득이 안간다. 말인즉슨 해고하는
것보다 노동시간을 줄이게 되면 기업 재정상의 손실이 더 크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수십조원에 달하는 공적 자금은 두었다
뭘하나? 재정지원 정책을 마련하여 정부가 정리해고보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기업들을 유도하는 데에 공적
자금을 투여하는 것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한 기업 부채
이자를 메우는 데에 쓰는 것보다 백번 현명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해결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 정부와 기업들이
현재의 어려운 형편상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논리를 갖고서
정리해고를 밀어붙이려고 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논리는 단지 논리일 뿐 결국 결정적인 것은 밀어붙이는 힘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근본적인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는
정리해고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밀어붙이는 힘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없으면 밀리고 만다는
것은 정치학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이 얼마나 뼈저린
진리인가를 서구에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던 때의 미국과 영국의
정부와 노동조합의 힘겨루기가 잘 보여준다. 1980년대 초 당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인 레이건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조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그 최대의 걸림돌을 노동자들의
조직적 저항으로 보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첫 단계로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는 노사관계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미국 항공교통관제사들의 파업이었는데, 이
힘겨루기에서 이들이 레이건에 패배하게 되면서, 이후 공화당
정부는 노동조합의 저항을 억누르면서 구조조정을 수행하여
왔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도 보수당의 대처 수상은 의회에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들을 제정하는 등 모든 가능한
강권적 방법을 동원하여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보수당 정부들과의 힘싸움에서 밀리고 난 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10여년간 계속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정리해고가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그 결과가 영국과
서구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2~3%에 지나지 않던 실업률은 10%를
넘어서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IMF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IMF 체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종결된 것이 아니고, 올
겨울의 ‘제2차’ 정리해고와 함께 끝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그러기에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해
두려움이 앞서고,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이미 우리보다 20년
앞선 서구에서의 신자유주의의 경험을 돌아보면, 우리나라의
앞일이 어떻게 될지 미리 예견할 수 있다. 서구에서처럼 밀리면
우리도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정리해고는 계속될
것이고, 실업률은 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서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의 희생제물로
바치지 않으려면, 힘을 키워 신자유주의의 압력에 맞서야 한다.
나를 엄습하는 해고의 두려움을 해고와 맞서 싸우는 용기로
전환시켜야 한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