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과
그 ‘비판’에 대해서
채 만 수
소 장
총선 자체는 그렇게 끝났다. 열린우리당은 애초에 탄핵정국을
기획하고 도발했던 목표를 달성하여 절대다수의 의석을 확보,
환호작약하고 있고, TV나 <한겨레> 등 노사모의 외곽
선정․선동기구를 형성했던 언론들은 즉각 “개혁의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며, 예측인지 주문인지 모를 소리를 하고 있다.
그 ‘개혁’이란 당연히 (독점)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고,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에게는 더욱
더 커다란 희생과 고통이 강요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 언론은 당연히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그 활동을 철저히
의회주의 내에 가두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예컨대, 4월 16일자 ꡔ한겨레ꡕ의 사설, “돌풍
일으킨 민주노동당에 거는 기대”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끝맺고 있다.
“그동안 원외에 있을 때는 투쟁 중심의 강경 일변도 목소리를
내 왔으나 이제는 좀더 책임있는 정당으로서의 유연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정치의 본질인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소외계층의 점증하는 불만이
사회불안 요소로까지 번지지 않도록 앞장서 합의점을 찾고
조정하는 창구 구실을 하는 것도 민노당에 지워진 책무다.
민주노동당의 신선한 활약을 기대한다.”
부르주아 착취 질서의 안정을 바라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원망(願望)이 이보다 더 진하게 표현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편,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노는 꼴이 하도 가관이라서 한 마디
보태고 넘어가자면, 열린우리당은 (그리고 한겨레 등은) 지금
청와대와 자신들이 총선전략으로 기획․연출했던
탄핵정국을 정리하기 위해서 “총선을 통해서 탄핵의 부당함을
국민이 심판했으므로 이제 국회가 탄핵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만의 하나 혹시나 있을지 모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가능성을 사전에 정치적으로 봉쇄하자는
것이고,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국회의 의석 과반수를
차지한 것을 ‘국민의 심판’이라며 그 구실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석 과반수라는 것은 물론 탄핵정국을
기획․연출함으로써, 즉 고도의 정치공작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물어야 할 그 정당성 여부는
묻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국민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낯뜨거운 농담이다. 왜냐하면, 저들의
농담에 따라서 이번의 총선이 국회의 탄핵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고 하는 사고에 따르더라도, 그 의석 과반수라고 하는
것은 ‘국민의 의사’를 그대로는 반영할 수 없는, 혹은
그대로는 반영하지 않도록 고안된 ‘선거제도’의 덕을 보아서
그러한 것이지, 결코 국민의 과반수, 혹은 유권자의 과반수,
혹은 4월 15일에 투표를 한 사람들의 과반수가 열린우리당에
투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탄핵 무효’와 ‘노무현 정권
반대’라는 구호를 분열증적으로 나란히 내건 민주노동당의
득표율까지를 ‘탄핵 심판표’라고 주장한다면, 정당투표에서는
그것이 51.3%이다. 하지만, 지역투표에서는 두 당의 득표율 합이
46.2%밖에 안 된다는 것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열린우리당은 물론 노사모와 그 외곽, 그리고
KBS․MBC․한겨레․오마이뉴스 등 주요 언론이
벌인 온갖 광란적 선전선동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40%에 가까운
사람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열린우리당 식으로
말하자면, ‘탄핵의 부당함을 심판’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망령이 힘을 써서든, 정동영이 ‘노인 폄하’ 발언으로 자해를
해서든, 아니면 부르주아 지배로서의 신자유주의적 노무현
정권을 혐오해서든, 국민은 결코 ‘탄핵의 부당함을 심판’하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국회에서의 ‘탄핵 가결’을 ‘다수당의 횡포’라고
몰아치던 자들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했다는 사실, 즉 자신들이
‘다수당’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대어 ‘국민의 심판’ 운운하는
것도 뻔뻔스러운 자가당착이다. 그들의 주장과 행동을 규율하는
것은 오로지 적나라한 권력욕 그것뿐인 것이다.
세 분 교수님의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 운동
‘비판’에 대해서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탄핵․총선국면을 거쳐왔고, 또
아직도 그 국면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며, 나아가 이 국면에서
형성된 것들은 앞으로도 상당히 장기간 이 사회의 정세와 사고,
노동자․민중의 생활을 규정해 갈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에게 의외로 혹은 의아스럽게 생각된 것의
하나는 이른바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 이는
‘국민발의’․‘국민소환’이라고 하든, 곧 언급하게 되는
세 분 교수님에 따라서 ‘민중발의’․‘민중소환’이라고
하든, 혹은 나아가, 그 세 분 중의 한 분이지만, “…거의
대부분 동의합니다” 운운하는 순진한 댓글에 “답글
감사합니다” 운운하며 기고만장해 하시는 최형익 박사님에
따라서 ‘인민발의’․‘인민소환’이라고 하든 물론 모두
같은 말이다.
운동이다. 그 운동이 이 탄핵국면에서 꽤나 ‘큰소리’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 운동의 초심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만한 관록 있는 활동가들에 의해서도
이 정세국면에서 그 운동이 주요하게 전개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하여 ‘탄핵 무효’를 외치는
정치적 광기를 기본적으로 반대한 ‘another0415’를 주요한
연단의 하나로 하여 전개되었다는 점 등이 의외이고,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이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 운동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대의민주제에 대한 대안 정치제도”로서의
‘직접민주주의’이다. “국민발의권, 국민소환권 쟁취를 위한
네트워크” 홈페이지(www.democracy.or.kr) 참조.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몇몇 ‘비판’이 가해졌는데, 여기에서는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교수님께서
연서명으로 발표하신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 이 책 ‘자료’ 편 참조.
에서 표명하신 그것을 검토하기로 하자.
그런데 세 분 교수님의 ‘비판’을 문제삼기 전에, 그
‘비판’을 담고 있는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에 대해서 먼저 말해두어야겠다.
내가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7호(2004년 4월호) 참조.
는 글의 ‘필자 전주(前注)’에서 3월 17일에
민교협․학단협 등이 주최한 ‘탄핵 관련 긴급 토론회’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토론자들 각자의 정치적 성향과 ‘실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썼을 때, 그것은 물론 예컨대
국회에서의 ‘탄핵 소추안 가결’을, 정치적 선동이나
은유로서가 아니라, 정색을 하고 ‘의회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진지하게도 그렇게 ‘논증’하려고 드는 정치학 교수 등에 대한
경멸과 조롱의 표현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경멸․조롱받고 싶지 않거든 자신을 반성하면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어줍잖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나가자마자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교수님께서 역시
“합법을 가장한 의회쿠데타 이자 설익은 ‘테르미도르의
반동’기도” 운운하시면서 이를 정면으로 치받고 나오셨다.
세 분 교수님께서 연서명으로 발표하신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이 그것인데,
교수님들께서는 거기에서 ‘좌익공론적’이니, ‘정치적으로
유해하고 무책임한 것’이니, ‘좌익소아병적’이니,
‘양비론’이니, ‘이론적으로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이니, ‘좌파이론의 퇴보’니, ‘고립을 자초하여
실천적으로 정치적 자살로 이어지는 관점’이니, ‘노동자
운동을 협소한 노동자주의에 가두는 몰계급적 관점’이니,
‘반동적 사회주의’니, 등등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적대적
규정들을 다 동원하셨다. 그 글은 연서명을 통해서 그렇게
조직된 적대였다. 하기야 교수님들께서 “번뜩이는 혁명성”을
발견하면서 “민주주의와 계급투쟁을 예비하는 중요한
정치학교”라고 보고 있는 현상, 즉 춤추고 노래하며 ‘탄핵
무효’를 외치는 광화문 등의 촛불집회를 가리켜 감히
‘집단적인 정치적 광기’라며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고 했으니, 교수님들로서야 그만한 적대도 오히려
고매한 인품에서 우러나온 자제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수님들께서는 친절하시게도 “우리의 비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좌고우면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으셨으니, 나로서는 정말 더 이상은 좌고우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분들의 “올바른 접근”과 ‘비판’이란
것이 기껏해야 당구풍월(堂狗風月), 곧 서당개 풍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그러한 작업을 하고자 하며, 이 글 역시 그러한
작업의 하나다.)
예컨대, 세 분 교수님께서는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을, “현재 사태의 핵심이 과연
민중탄핵을 주도하는 좌파일각의 주장처럼 탄핵반대 시위가 단지
빈사상태에 빠진 노무현과 열우당을 기사회생 시킨 것이냐 하는
점이다”(원문대로!) 운운하시면서, 풍차에 돌진하시는 라만차의
기사도(騎士道) 즉 돈키호테 기질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셨고, 엉뚱하게도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운운하시는 야마시(山師) 기질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주장과 결론을 정당화하려고 하셨다.
당구풍월 수준의 독해력, 그러한 학문적 태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문제제기이고 논증이다.
이제, 이른바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 운동에 대한 세
분 교수님의 ‘비판’에 대해서 보면, 그들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진보적 정세분석론의 원칙과 전제”
운운하며 풍월을 읊조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구체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 운동을 비판한다는 것이 기껏
이렇다.
“민중탄핵, 민중발의, 민중소환 모두 좋은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입되는 게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소환해야 할 대상, 즉 대표자가 있어야 소환탄핵도 할
텐데, 이는 결국 대표를 선출하는 의회주의를 인정해야 현실화될
수 있는 주장 아닌가?”
극히 짧은 ‘비판’이지만, 여기에는 세 분 교수님 특유의
기질들이 유감 없이 발휘되어 있다.
우선, 이른바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거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구나 그렇게 주장하면서 그러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 세 분 교수님들께서는 “그것이 도입되는
게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비판하고 계시니, 이는 분명
라만차의 기사도의 발휘 아닌가?
마찬가지로,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 누가 ‘소환해야 할 대상, 즉 대표자’ 없는
‘소환탄핵’을 주장하고, “결국 대표를 선출하는 의회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을
주장하는가? 그들은 바로 그러한 ‘대의민주주의’를 전제로
그러한 운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예컨대 “국민발의권,
국민소환권 쟁취를 위한 네트워크”가 그 홈페이지에서 설령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을 “대의민주제에 대한 대안
정치제도”로서의 ‘직접민주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문필상의 미숙과 혼란의 표현일 뿐,
‘대의민주주의’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그런데도 마치 그 반대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환해야 할 대상,
즉 대표자가 있어야 소환탄핵도 할 텐데, 이는 결국 대표를
선출하는 의회주의를 인정해야 현실화될 수 있는 주장
아닌가”라고 소리치고 계시니, 이 역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용맹스러운 기사님들의 모습이 아닌가?
나아가 세 분 교수님들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에 대한 당신들의
짧은 ‘비판’을 마무리하고 있다. 즉,
“그리고 소환의 결과가 항상 진보적이라고 볼 근거도 없다.
국민소환이 도입되어 있는 미국 켈리포니아주의 경우 전직
주지사 소환탄핵 결과, 우익정치인인 터미내이터가 선출되지
않았는가? 결국 제도, 슬로건 그 자체가 진보정치, 계급정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원문대로!)
참으로 재미있다. 서당개의 안목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
“켈리포니아주의 경우 전직 주지사 소환탄핵 결과,
우익정치인인 터미내이터가 선출”된 사실을 ‘국민소환권’
운동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터미네이터는
‘소환의 결과’가 아닌 정기적인 선거에서도 주지사로 선출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결과가 항상 진보적이라고 볼 근거가
없는’ 것은 국민소환제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주아) 대의제
일반의 문제 아닌가? 엉뚱한 문제를 끄집어다가 ‘국민소환제’
운동을 비판하고 있는 것 아닌가?
혹시 세 분 교수님의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은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을 비판하는 것이 그 주요 목적이 아니어서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식으로 비판했던 것인데 그것을 부당하게 문제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의가 있을지 모르겠다.
만일 그러한 이의․항의가 있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즉,
그들의 ‘비판’이 단지 ‘미흡’했다면, 나는 그것을
지적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비판하며 당구풍월로 규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에 대한 세 분
교수님의 ‘비판’의 문제점은 결코 짧고 간략해서
‘미흡’하거나 ‘부족’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짧고
간략하면 짧고 간략할수록, 비록 미흡하고 부족할지는 몰라도,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비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세 분 교수님의 ‘비판’은 온통
쓰레기를 토해 놓았을 뿐 어느 한 마디도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 아니 ‘최소한 필요한’ 것조차 없다.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러면서도 “환상을 경계하자는 취지 정도로 인민소환제,
인민발의제를 비판한 것” 운운하며 으스대고 있는 꼴이라니!
그런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 분 교수님의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라.
“소위 ‘민중탄핵’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정세에서는 결코
현재 의회탄핵과는 다른 구체적 대안, 정치적 절차를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설사 그것이 실제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노동자들의 힘만로 이루어 질 수 있는 혁명을
의미하지 않는 이상 타계급과 동맹/연대/연합을 해야 탄핵가결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원문대로!)
탄핵정국에서 제기된 ‘민중탄핵’의 문제를 정치적 은유,
선전과 교육을 위한 ‘개념 차용’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현실적․법률적 개념으로 해석하여 그
가능․불가능성을 논하면서 “그것이 노동자들의
힘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혁명을 의미하지 않는 이상
타계급과 동맹/연대/연합을 해야” 한다고 논하는 저 학자적
그리고 실천적 진지함!!! ― 당구적 독해력, 사고
능력․습관이 아니고서야 누구에게 그토록 진지한
학자적․실천적 상상력이 가능하겠는가!? 어떻게 그렇게
법률주의의 틀 속에 상상력을 가둘 수 있겠는가!?
이른바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에 대해서
이른바 ‘국민발의권’ 및 ‘국민소환권’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고 그만큼 민주주의를
확대․심화시키는 것으로서 바람직하고, 따라서 그들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은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탄핵․총선국면에서 전개된, 혹은 전개되고
있는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은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비판되어야
한다.
첫째, 탄핵․총선국면이라는 특정한 정세 속에서 그것은,
그 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토록 주요하게,
그렇게 우선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은 아니었다. ‘탄핵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예컨대 세 분 교수님 같은
분들에게야 ‘좌익공론’이나 기타 온갖 ‘유해한 것’으로
들리겠지만, 이들 세 분 교수님과 같은 분들의 사고의 계급적
성격과 혼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물론 다룰 것이다.
탄핵․총선이라는 이번 국면에서는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에
의한 권력 강화와 그에 따른 파시즘의 위험을 저들의
반노동자․반민중적 개혁들을 구체적인 예로 들면서,
그리고 이라크 파병이나 FTA 강행 등등 반민족적․반민중적
정책을 구체적으로 예로 들면서 폭로하고 그와 싸우는 것이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자 대응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은,
비록 ‘부안 사태’ 등을 통해서 그 필요성이 크게 인식되고
제기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탄핵․총선국면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정세에 조응하지 않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정세의 성격을 흐리는 역할을 했고, 또 하고 있다.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필시 이 운동이야말로 정세에 적합하다고 주장하겠지만, 이는
그들이 ‘3․12 탄핵’을 “국민의 의사․의지에
반하는 ‘의회 쿠데타’”라고 규정․선동하는 저들
노사모나 그 외관단체들과 정세인식을 사실상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탄핵국면의 본질을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충돌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운동의 주요 주체인 “국민발의권, 국민소환권 쟁취를
위한 네트워크”의 홈페이지를 보라. 거기에는 자신들을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
현재의 상황에서, 탄핵을 반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한다고 보며, 국민이 직접 법을 만들 수
있는 국민발의권, 국민이 공무원을 임기 전에 해임시킬 수 있는
국민소환권이 조속히 도입되기를 바라는 개인과 단체들의
모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국민소환권’ 운동과 관련하여 보자면,
그들은 현재의 정세 대응에서 분명 자가당착의 모순을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그들은 필시 특히 ‘부안
사태’를 겪으면서, 즉 군민 절대다수의 필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수 김종규가 ‘방폐장’의 유치 의사․정책을
굽히지 않고, 그런데도 그를 현직에서 해임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사태를 겪으면서 그 소환권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김종규는 하수인에 불과하고
그 배후는 부안을 사실상 ‘경찰계엄’의 상태로까지 몰아간
노무현 정권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국민소환권이 조속히
도입되기를 바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보면,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이 이렇게 “탄핵을 반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벌이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탄핵무효화’ 소동에
비판적인, 그리고 그러해야만 그 존재 의의가 있는
‘another0415’가 그들을 위해서 주요한 연단을 제공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코미디이다.
둘째,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은 그 방식도 대중을 철저히 합법주의의 틀 속에 가두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을 요구하는
서명에 참여”하자거나, “4.15 총선에서 투표용지와 함께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을 요구하는 공동행동 용지를 투표함에
넣읍시다” 등등이 그 주요 운동방식인데, ‘another0415’가
이러한 거세된 운동, 헌법 교과서 속의 여담으로나 있을 법한
운동을 위한 주요한 연단의 하나가 되고 있다는 점도 역시
코미디이다.
셋째, ‘국민발의권’ 혹은 ‘국민소환권’을 논의할 때는,
그것이 적극적인 논의의 전개이든 그에 대한 ‘비판’이든,
무엇보다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국가’의 계급성과 관련한 그
한계와 가능성이 지적되고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경우에나 그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고 강화하는
제도이지만, 부르주아 국가에서의 그것의 한계 및 가능성과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그것은 판연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국가에서의 ‘국민발의권’과
‘국민소환권’은 한편에서는 민주주의를 확장․강화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지배라는 계급성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의 일이고, 그리하여 다른 한편에서는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더욱 강고히 하는 제도이다.
사실이 이러한 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은 마치 그것들이
전적으로 계급 중립적인 것인 양, “직접민주주의의 엔진을
돌려라”(인권운동사랑방)거나 “국민발의로 국가를
재구조화하자!”(최원)는 식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이성보다는 맹목적인 열성과 주관이 지배한다면, 그것이
부르주아 지배를 강화함은 물론, 그 역시 파쇼의 교활한 수단의
하나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노무현 정권은, 김영삼 및 김대중 정권에 이어서,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구조조정․FTA 강행 등
반노동자․반민중적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강행해 온
정권이다. 그 정권은 오늘날 노동자․농민에게 커다란
고통을 강요하고 있고, 그리하여 심지어 일가족 동반자살조차
드문 얘기가 아닌 상황이 되어 있다. 또한 그 정권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종속적 파트너가 되어 이라크 파병, 추가파병을
강행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노무현 정권은
탄핵받아 마땅한 정권이고, 그 탄핵이 누구에 의해서 실행되든
그것은 사실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 탄핵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수구꼴통’은 더욱더 대중적 영향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설령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광화문의 군중이
모두 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분열증적으로 내거는 ‘탄핵 반대-노무현 반대’의
깃발보다는 ‘탄핵 당연-수구 꼴통 반대’가 훨씬 더 정세에도,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대의와 그 정치의식의 발전에도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탄핵받아 마땅한 정권이 탄핵을 받은 것인데도,
‘국민’은, 대중은 노사모와 그 외곽 선전․선동도구
역할을 하고 있는 TV․한겨레․오마이뉴스 등의
선동에 넘어가 광란을 벌이고, 적잖은 ‘진보적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탄핵을 반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무언가
‘직접민주주의’를 하자고 야단야단을 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이라면, 그들의 수중에 ‘직접민주주의’가 쥐어져 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 무기를 휘두르겠는가?
단지 ‘직접민주주의’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독점자본의 거대하고 막강한 대중매체가 대중의 영혼을
장악하여 조작․조종하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그들
대중매체를 동원하여 정치적 여론을 조작하는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국민발의권’이나 ‘국민소환권’조차 파쇼 지배의
강화․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전형적인 형태의 하나인
‘국민투표’가 적잖이 파쇼 지배와 그 강화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쓰여 왔다는 사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열광적으로
‘하일, 히틀러!’를 외쳐대던 저 군중집회도, 미친 듯이 춤추며
‘탄핵 무효’를 외치는 광화문의 저 촛불집회도, 모두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충분히 경계하는 위에서
추진되고 이루어지는 직접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확대․심화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보다 심층적인 논의․분석이 필요하지만, 지금
‘진보적 지식인’ 그룹이나 활동가들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대중지상주의나 직접민주주의 지상주의는
노동자․민중운동이 극복해야 할 일종의 소부르주아
무정부주의이다. 그것을 혹시 ‘대중노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환상이고 궤변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