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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드러낸 위선의 사회원로들

현장에서 미래를  제100호
채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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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드러낸 위선의 ‘사회원로’들
144명 ‘사회원로’의 정규직 임금 동결․삭감 요구에 대해서


채 만 수
소 장






144명의 사회원로! 이 사회의 양심과 도덕 그리고 권위의 상징이다. 아니, 자본의 언론이 그렇다고 선전하고, 또 지금 문제가 되는 자신들의 행동을 “도덕적 싸움” 운운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인들도 필시 그렇게 자부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다.
바로 그런 분들께서 지난 6월 10일에 이 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의 하나인 ‘비정규직’ 문제에 팔을 걷고 나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줄여야’ 한다.”며 말이다.
그런데 이 분들 양심에 털이 나도 정말 시커멓게 난 모양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 대안”이란 게 다름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삭감이라니 말이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정규직화만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기업의 해외이전만 가속화 시킨다”며 그들은 아예 드러내놓고 비정규직의 철폐를 반대하고 있다. 아니,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위해서 비정규직을 확대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지나는 길에 하는 말이지만,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의 조건 대신에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내세우는 것이야 이 자본 지배의 사회에서 ‘사회원로’로 대접받는 저들의 계급적 색깔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자. 하지만, 저들은 눈도 귀도 다 먼 모양이다. “수출 실적의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는 게, 그리고 삼성, 현대차 등등의 독점자본이 천문학적인 순이익을 내고 있다는 게, 요즘 자고 나면 듣고 보는 뉴스인데,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수출 실적, 엄청난 순이익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논평은 단지 악선동을 위한 저들의 파렴치한 거짓을 들어내기 위해서일 뿐이기 때문에,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거나 이른바 ‘지불능력’이 약화되면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즉 저임금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른바 ‘임금지불능력론’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 이른바 ‘임금지불능력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채만수, ꡔ노동자 교양경제학ꡕ(제3판),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 2003, pp. 134~142 참조. (제1판 및 제2판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아무튼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는 ‘대기업 노조의 이기심’에 대한 도덕적 싸움”이라며, “비정규직 문제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대화, 즉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 방안을 찾기 위한 대화를 민주노총에 요구하고, 민주노총이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민주노총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고 엄포까지 놓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물론 “조선일보” 등 자본의 언론에 의해서 크게 환영받고, “사설”로까지 다뤄졌다.
도대체 이들 144명의 ‘사회원로’들이, 그리고 자본과 그 언론이 노리는 게 무엇일까?
색깔 드러낸 위선의 ‘사회원로’들
물으나 마나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임금 삭감, 비정규직 확대 등 노동조건의 더 한층의 가혹화, 자본의 이윤 증대이고, 그를 위해 한 몫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몫이란 다름 아니라 ‘양심과 도덕, 권위의 상징’으로써 언론과 사회에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의 자료를 제공하고, 또 대기업 조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이간․대립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이기적인 고임금’이 저들의 고결한 양심과 도덕관념을 괴롭히고 있다! 다만 그 양심과 도덕관념은 무척 편리한 것이어서 연간 수조 원에 달하는 독점자본의 순이익이나 연간 수백억․수천억에 달하는 재벌가들의 수입, 그리고 하다 못해 보통 수억, 드물지 않게는 10억이 넘는다는 재벌 임원들의 연봉 등에는 전혀 무감각하다.

뒤돌아보면, 작년에 이미 언론은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간 임금 총액이 6,000만 원이나” 되느니 어쩌니 하면서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바 있고, 조흥은행과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에 격앙되어 노무현 대통령 역시 “노동운동은 도덕성 잃었다”며 노동자들에 대한 여론의 공격을 선도한 적이 있다. 144명 ‘사회원로’들의 성명 역시 그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데, 양심과 도덕 그리고 권위를 대표하는 ‘원로’들답게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의 축소”를 들고 나옴으로써 이들의 공격은 한층 더 위선적이고 악질적이다.
저들이 주장하는 바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간 임금 총액이 6,000만 원이나” 되기 때문에 이를 동결․삭감하여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를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악선동이다.
악의적으로 과장되긴 했지만, 그 어름의 ‘고임금’(?)을 받는 극소수의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 중에는 연간 4,000만 원이 넘는 ‘고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임금은 정말 고임금인가?
그렇다. 그러나 다만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에 비해서 그럴 뿐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우리 사회의 저임금이 얼마나 심각하고 광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 가계의 생계비, 노동력의 재생산비에 비해서는 어떤가?
노동력의 재생산비 자체가 상당히 탄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임금이 그들 노동력의 재생산비에 비해서 ‘고임금’이라고 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오히려 그에 비하면 여전히 ‘저임금’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인 대답일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저들 ‘고임금 노동자들’이 그 ‘고임금’을 어떻게 해서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저들은 주당(週當) 법정노동시간은 물론이고 법이 허용하는 최장노동시간을 훨씬 넘어서 잔업․특근․야근을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1년 365일 중에 360일을 노동하는 사람조차 있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러한 ‘고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다 짧은 노동시간에 대한 저들의 임금이 자신들의 재생산비에, 즉 그 가족의 생활비에 충분해도 저들은 그토록 장시간 노동을 하겠는가?
저들 노동자들이 장시간의 잔업․특근․야근을 그만두고 법정노동시간만 일하게 되면, ― 사실은 그 시간에 노동력의 충분한 재생산비, 즉 충분한 가족 생계비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 그들이 받게 되는 임금은 현 수령액의 사실상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저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지금 저들 고매한 ‘사회원로’들과 자본 지배의 언론에 의해서 ‘고임금’으로 지탄․매도당하고 있는 노동현장의 현실이다. 바로 저들 고매한 ‘사회원로’들께서 비열하게도 애써 외면하면서 결코 말하지 않고 있는 바로 그 현실이다.
나 역시 이미 1년 반(半) 전에 저들 대기업 노동자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노동시간, 임금, 이윤, 그리고 초과노동 할증률”,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2003년 1월호. 이 글은 수정․보강되어 ꡔ노동자 교양경제학ꡕ(제3판, 2003)에도 “제3강․제4강에 대한 보론”으로서 실렸다.
그러나 나의 비판은, 저들 고명하신 ‘사회원로’들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그 막강한 조직력, 그 잠재된 막강한 투쟁력에도 불구하고 저들 대기업 노동자들이 왜 그토록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 근골격계 질환자는 물론 심지어 과로사․사고사조차 속출하는 그러한 장시간 노동을 통해서만 그 임금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 법정노동시간에 자신들의 충분한 재생산비를 확보하는 대신에 잔업․연장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그 할증률의 인하 저지에 투쟁을 모으려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들은 법정노동시간에 ‘정당한’ 임금을 자본에 강요할 막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혹은 그러한 힘을 현재화시키기를 거부 혹은 주저하면서 그렇게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감수하는 그러한 장시간 노동과 그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그들의 저임금은 단지 그들의 문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실상 사회 전반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크게 잘못된 것, 싸워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아니다. 잘못된 것, 고쳐야 할 것은 사실상 기아임금이라고 해야 할 전반적인 저임금이고, 장시간 노동이다. 저들 ‛사회원로’들이 위선적으로 들고 나온 비정규직은 말할 나위도 없고, 정규직 노동자들, 조직노동자들, 대기업의 조직노동자들도 지금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혹은 많은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광범한 비정규직화, 장시간 노동의 문제와 더불어 이 전반적인 저임금 상태를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오늘날 노동운동에 주어진 가장 긴요한 경제적 과제 중의 하나이다.
한편, 정말 조그마한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도덕관념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저들 ‘사회원로’들이 전반적인 저임금과 기아임금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른바 ‘노동의 유연화’와 그에 따른 비정규직의 광범한 확산을 문제 삼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꾸로 “대기업 노조가 임금을 동결하고 비정규직 임금을 올려 임금격차를 줄이는 것이 근본적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바로 저들은 명백히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간질시켜서 서로 반목하게 할 목적을 감추고 있지 않다.
저들 ‘사회원로’들과 ‘조․중․동’ 등 자본의 언론, 특히 경제신문들이나 이들 지면에 칼럼을 쓰고 TV 등에서 논평을 하는 지식인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넌지시 주장하는 바는, “정규직이 이기적으로 고임금을 강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비정규직의 임금이 저임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정규직의 광범한 확산도, 그들의 기아임금도 그 책임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슴이 뜨거운 정규직 노동자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저들 ‘사회원로’들을 포함한 자본의 이데올로그들, 그 선전수단이 노리는 바의 하나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저들 ‘사회원로’들이나 이 사회 이 시대의 이데올로그들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임금학설사상의 저 반동적인 ‘임금기금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저 반동적인 ‘인구론’으로 악명 높은 승려 맬더스(T. R. Malthus)에서 발단하여 밀(J. S. Mill)에 의해서 정식화되었다가, 밀 스스로 그 파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런 ‘학설’이다. 명단을 보나마나 저들 ‘144명의 사회원로’들에는 여러 종교, 여러 종단의 ‘원로’ 승려들이 망라되어 있을 터인데, 이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임금기금설’에 의하면, ‘일정 시기의 한 사회의 임금 총액은 미리 결정되어 있어서, 각자의 임금 수준은 이 임금총액을 노동자 총수로 나눈 값’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은 노동자계급 전체적으로 보면 아무런 실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과 인상은 결국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분의 임금을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 내부에 적대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이는 당연히 자본의 입장에서는 무척 달콤한 ‘학설’이고, 그리하여 그 이론적 파탄과 상관없이 여러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오늘날 저 ‘사회원로’들을 위시한 자본의 수많은 이데올로그들이 파렴치한 궤변과 위선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임금기금설’이 설파하는 바는 전혀 진실이 아니다. 임금과 대립하는 것은 다른 노동자의 임금이 아니고, 잉여가치 즉 자본의 이윤이다. 노동을 통해서 생산되는 가치, 즉 가치생산물 혹은 부가가치 가운데 얼마만큼이 임금으로서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가고, 얼마만큼이 잉여가치로서 자본의 이윤으로 돌아가는가의 문제이며, 노동력의 재생산비, 즉 노동자 가계의 생활비가 얼마인가의 문제여서, 임금은 결코 사전(事前)에 결정된 고정액이 아니다. 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이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노동력의 정상적인 재생산에 필요한 임금을 확보하느냐, 아니면 취약한 투쟁력 때문에 노동력이 위축된 형태로밖에는 재생산될 수 없느냐의 하는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은 절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나 임금 보전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그것을 포함한 임금의 전반적인 인하로 귀결될 뿐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은 결국 노동자계급의 대(對) 자본 투쟁 일반의 약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사실 저들 ‘사회원로’들이 문제로 제기하는 것도 사실은 ‘비정규직의 저임금’이 아니라 ‘정규직의 고임금’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 임금을 낮추기 위해서 민주노총 앞에서의 시위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 아닌가?
대기업의 조직 노동자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결코 임금을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은 실질적인 노동시간을 법정노동시간으로 줄이면서도 ‘생활임금’을 확보하는 것이고, 비정규직과 함께 광범하게 조직 활동에 나서 임금은 물론 기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과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근본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변혁적 정당을 건설하여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로 나서야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일부 일간지의 보도를 통해서 밖에는 저들의 ‘성명(聲明)’을 접할 수 없었던 나는 144명의 빛나는 이름 가운데 단지 세 사람의 이름, “‘비정규직 문제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비정규직 시민모임)’의 서경석(목사) 대표와 송월주 지구촌공생회 대표이사, 손봉호 한성대 이사장” 밖에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저들의 ‘성명’ 전문(全文)과 144명 모두의 이름을 확인해 데이터베이스화함으로써 역사에 기록해주는 것은 노동운동이 저들 ‘사회원로’들에게 해드려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한/노/정/연

2004-06-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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