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싶으세요?
세상만사
‘다른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싶으세요?
뻐꾸기
평양에 다녀왔다.
작년 한 해 동안 방문한 북한을 방문한 남한 사람의 수는
팔만명이 넘으며 이는 지난 50여년간 방북자 수를 다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서울 정동에 있는 현대사옥에서는 매일
아침 7시30분에 개성행 통근버스가 출발한다.(사진: 고려항공
비행기표는 저러코롬 생겼다.)
그러나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한에서 ‘허가’하고
북한에서 ‘초청’한 사람만이 갈 수 있다. 여러 종류의
방북경험담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굳이 새로운 여행기를 하나를
추가하게 된 것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에 가서 경험한 것을
기록해두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어린이 의약품 지원본부(이하 지원본부)라는 단체가 있다.
1997년 북한 아이들에게 비타민과 이유식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왕진가방 보내기 운동, 병원 현대화사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 최근 철도성 병원을 대상으로 지원 사업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철도위생방역소에 대한 지원도 요청받았다.
‘철도위생방역’이 무엇인지, 어떤 지원을 해야 하는지 판단할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이 단체의 모자보건사업에
대한 자문을 위해 방북했던 선생님이 뻐꾸기를 추천했다. 추천한
이유는 그와 가장 가까운 산업의학 전문의가 뻐꾸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평양에 들어가려면 여행용품과 비행기표 말고도 방북허가증과
‘공화국’이 발급한 입국허가증명서가 필요하다. 입국허가증은
심양공항에서 받았고 평양에서 나올 때 반납해야 한다고 해서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한편 방북허가를 받으려면
통일교육원에서 화요일마다 실시하는 교육을 오후 내내 받아야
한다. 교육장에 가보니 이백명 정도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은
개성공단에 일하러 가는 노동자들인 것 같았다. 교육내용은
남북한 교류현황, 세관통과에 관한 사항, 방북시 주의해야 할
언행 등이었다. 교육을 받고 나오는 길에 같은 방북단인 어느
교수는 ‘우리가 이제 정말 평양에 가는 걸까요?’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금강산 육로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뻐꾸기는 좀 심드렁하게 ‘그런가 보네요’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일주일 연기되었다. 3박4일이나
일정을 비울만한 여유도 없었고 액수가 꽤 큰 여비도
마음에 걸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어렵게 비운 시간이었다.
연기된 일정대로 따라가려면 둘째 아이 초등학교 입학식을
포기하고 여러 건의 교육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그래서 못
간다고 편지를 썼다. 그런데 결국 떠나게 되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한테는 다 이야기를 해 놓았기 때문에,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지인들의 부추김, 지원본부측 차장과
통화하면서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 이유도 많지만 결정적인 것은
북한 산업보건에 관한 호기심,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같다.
평양가는 길
순안공항은 전세기를 띄울 만한 사안이 아니라면 인천공항에서
중국 심양공항을 거쳐서 간다. 비행기를 두어 시간 타고 가서
서너 시간 심양공항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한 시간 남짓 또
비행기를 탄다. 심양공항에서 볼펜으로 좌석번호를 적은
고려항공 비행기표를 받았을 때, ‘아 이제 진짜 평양에 가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돌아가면서 중국에 지불하는
돈이 일인당 오육십만원 된다고 한다. 아깝다.
평양에서의 첫날밤
공항에 내려 만경대에 가서 헌화를 하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
대동강 지류인 보통강변의 보통강 려관에 짐을 풀었다.
첫날 저녁은 민족화해협의회측(이하 민화협)에서 내는 만찬이
잡혀있었다.
민화협은 남한의 대북지원단체들이 북측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이다. 대북 지원단체들은 19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기 긴급 구호를 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우후죽순으로 생겨 7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 단체의
공식적인 활동목적을 찾아보지는 않았으나 오가면서 들은 바로는
종교단체는 선교를 위해, 자본가들은 대북교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가지기 위해, 남측의 시민운동단체들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등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대부분은 의료지원이라고
하는데 북측은 병원건물신축이나 빵공장 건설 같은 지원 사업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지원본부처럼 일차 의료에 비중을 두고
지원하고자 하는 단체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날 만찬에서 지원본부를 담당하는 민화협 참사(직함의
하나이다)가 ‘쭉 냅시다’(건배에 해당함)하기 전에
‘큼직큼직한’ 지원을 기원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북한 주민에게 직접 다가서는 지원을 하고 싶은
지원본부측와 논쟁이 삼박사일 내내 계속되었다. 첫날 밤
만찬에서 중간 중간에 섞이는 요리에 대한 감탄과 평양소주 맛에
대한 찬사도 누그러뜨릴 수 없는 단단한 무엇이 느껴졌는데 그게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정신없이 바빴던 둘째 날
아침 일찍 만수대를 거쳐 철도성 병원에 갔다. 뻐꾸기를
평양까지 부른 곳이다. 방북단은 네 팀으로 갈라져 일을 했다.
여기서 뻐꾸기는 다른 산업의학교수와 함께 철도방역위생소장과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면담시간을 가짐으로써 임무를 끝냈다.
점심은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었다. 100g, 200g, 300g짜리가
있고 냉면, 온면, 쟁반국수 등을 취향대로 시킬 수 있고 소주를
곁들인다. 자주 와 본 사람들은 냉면 200g, 이런식으로 주문했고
초보자들은 각자 100g씩 주문했는데 그걸 다 먹느라 고생 좀
했다. 민화협 참사는 쟁반국수는 연인들이 함께 와서 머리를
맞대고 먹는 것이라 하면서 웃었다.
다음 방문지는 어린이 영양관리연구소. 지원본부가
알약생산설비를 지원했다고 하고 다른 단체에서 어린이 전문
병원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관계자들이 연구소 현황, 지원요청
사항 등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비타민 제제 생산설비를 돌아보니까 궁금한 게 많아졌다.
공장을 돌아다니는 의사라서 어쩔 수 없나 보다.
대동강구역병원은 남한으로 따지자면 보건의료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평양의 보통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 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반짝 반짝 빛나는 앰블런스가
있었는데 보건의료산업노조에서 지원한 것이라 한다. 일행인
보건의료 산업노조 통일관련 업무 담당자에게 얼핏 듣기로
만오천 킬로미터 정도 뛰었다는 것 같다. 대북의료지원사업의
제한점의 하나는 북측에서 지원사업의 효과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주지 않기 때문에 사업효과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행거리, 일 검사건수 등 구두로 묻고 들은 내용을
근거로 나름대로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앰블런스의
주행거리는 객관적인 간접 지표중의 하나이지만 그 효과에 대한
일행들의 판단은 다양했다.
대동강 구역병원(사진: 대동강 구역병원의 고려의학-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방- 약품 제조실, 병원 살림에 필요한
것부터, 약품제조까지 모두 병원에서 하는 모양이다. 철저한
자급자족 체계)에서 주로 한 일은 지원본부가 보낸 심전도,
위내시경, 초음파 등등의 진단장비를 점검하고 요청사항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대동강 구역병원에서 만난 의사들은
육년과정의 의과대학을 마치고 나서 수개월정도의 전문병원
훈련을 거친 삼십대 초중반이었다. 그들은 남쪽에서 보낸
전문서적을 읽고 스스로 배워서 검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에는 환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하루
검사건수를 물어보면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평균 15건 정도라고
했다. 손님이 와서 환자들을 통제하여 검사를 안 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지원본부가 보낸 진단장비덕분에 상급
병원으로 가는 환자가 줄었다고 말하는 의사의 얼굴에 자부심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는 정도이다.
저녁식사는 민족 식당(사진: 민족식당에서는 서빙하는 사람이
노래도 하고 춤을 춘다)에서 했는데, 고기를 지글지글
구워먹으면서 독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 ‘접대원 동무’들이 음식도 나르고 짬짬이
노래도 하고 춤을 춘다. 남성 접대원 동무들은 한 명도 없다. 그
분위기, 편하지 않다.
철도위생방역소장 이야기
철도위생방역소장은 내가 평양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인상깊은
사람이었다.
1936년 생으로 강원도 탄광촌에서 태어나 일자무식 광부로
살다가 해방이 되자 초등교육부터 받을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위생방역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탄광촌으로 돌아가 근무하다가 철도위생방역소에서 반생을 보낸
분으로 북한 방역위생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참고로 북한의 위생방역의사는 남한식으로 말하면
예방의학의사이다.
북한의 의과대학은 구강과, 임상과, 위생방역과, 약학과,
동의학과 이렇게 다섯 개 과가 있는데 이중 위생방역과와
임상과만 6년제이고 나머지는 5년제이다. 북한은
예방의학을 중요시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위생방역과가 가장
들어가기 어렵고 우수한 인재들이 가는 과 라고
한다. 북한에서 예방의학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 지는 병원
곳곳에 ‘사회주의 의학은 예방의학이다’라는 글귀와
보건교육자료가 게시되어 있는데서, 임상 의사들이
방역위생의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 나이에 무슨 사심이 있으랴. 우리를 만나러 온 이유에
대하여 퇴임하기 전에 방역소 현대화에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어서 왔다고 웃는 모습이 동네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 헤어질
때 보니 무릎 관절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다리를 절뚝거려
마음이 아팠다. 70살이 넘어서 협심증, 고혈압, 퇴행성
관절염 같은 병을 앓으면서도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묘향산, 주체탑, 개선문
셋째 날은 묘향산에 갔다. 19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으로
평양에서 버스로 두어시간 가야 한다. 동행한 참사에게 들으니
정상까지 가려면 꼬박 일주일 올라가고 일주일 내려온다고
하는데 손때가 묻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원래 험한 산이라
그런건가 모르겠다.
잠깐이라도 산행을 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사진: 묘향산 보현사에서. 비석에 희끗하게 보이는
점들은 무엇일까? 전쟁의 흔적-총탄자국이라고 한다.)
세계 각 국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호칭이 예민한
문제라고 하는데 이렇게 부르면 되는 건 지 자신이 없다.)에게
보내온 십 만 점이 넘는 선물들을 진열한 선물궁전을 장장 세
시간을 돌아보고 보현사 구경을 한 시간 정도 했다. 목탁소리만
들으면 신경이 곤두선다고 하던 민화협 참사가 보현사에 바람이
불 때 탑에 장식된 작은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참
아름답다고 했다. 마침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그 맑은 소리는
풍경소리는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게 뭐냐고요? 역시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돌아오는 길 기념품 상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 여기서 공식적인
화폐는 유로이다. 눈길을 끄는 상품은 네오비아그라이다.
비아그라 카피약인지 생약성분의 유사한 효과를 나타내는 약인지
모르겠으나 의약품을 상점에서 판다는 것도 신기하고 이걸 사는
북한 주민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졌다.
넷째날 오전엔 주체탑에 갔다. 주체탑은 높이가 150미터인
석탑인데 꼭대기의 횃불 모양은 유리로 만들었다고 하고 소음
하나 없이 매끄러운 엘리베이터가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개선문에서는 몸도 마음도 지쳐서 그런지 안내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내 거리촬영이 허가된 유일한 곳이라 거리
풍경을 몇 장 찍었다.
평양의 거리 풍경
길은 널찍하고 전차, 이층버스, 두 대를 연결한 버스, 그냥 버스
등이 가끔씩 다닌다. 트럭 뒤에 사람이 탄 모습도 볼 수 있다.
출퇴근시간엔 정류소마다 아주 반듯하고 긴 줄이 이어진다.
교차로에는 여경이 수신호를 보내는 풍경이 이국적이다.
건물들은 낡았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두세 블록마다
도서관이라고 써 붙인 곳이 건물 일층에 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
도서관은 어떤 이들이 드나들고 무엇을 읽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아직은 만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
평양사람들과 수다 떨기
평소 수다를 즐기는 뻐꾸기, 3박4일 동안 같이 다녔던 민화협
참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 가운데 두
장면만 그려보고자 한다.
장면1. 대동강 구역병원에서 남북의 임상의사가 모자보건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민화협 참사 중의 한 명이 따분한
표정으로 빨리 끝내라고 독촉하는 것을 보고 분위기 경색을
‘예방’(참고-예방은 뻐꾸기의 전공임)하느라 수다를 떨었다.
누구를 만나면 직업력부터 물어보는 습관이 있는지라 확인해보니
20년 전 부터 이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지원 단체를
접해보셨을 텐데 우리 지원본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더니 “착하디” 하고 씩 웃는다. 뒤이어 지원본부가
사업규모는 너무 적고 말은 너무 많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지원규모 못지않게 누가 어떤 마음으로 주는가를 헤아려달라고
하면서 그게 바로 통일을 앞당기는 것 아닌가하는 뻐꾸기의
의견에 대한 그의 답변은 “그런다고 통일은 되는 게
아니지”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장면2. 셋째 날 저녁 지원본부가 내는 만찬에서 조선문학을
전공했다는 동갑내기 참사하고 문학에 대해 엄청나게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누군가 북한에서는 피임을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고리, 고리를
끼웁네다”. 루프, 즉 자궁내장치를 말하는 것이다. 정관수술을
하거나 콘돔을 쓰는 사람도 있지 않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없습네다. 기런 것은 여자들이 하는 것이디 왜 남자들이
수술같은 것을 합네까?” 한다. 출산을 장려하는 사회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를 상상하니 마음이 무겁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천공항에 저녁 8시가 넘어서 내렸다. 드디어 집이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평양거리가 희미하게 겹쳤다. 분명히 ‘다른 세계’였다.
바라던 ‘다른 세계’는 아니지만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만 하는 곳이다.
짧은 기간 코끼리 다리 만지듯 잠깐 들여다보았을 뿐인
방북경험을 근거로 무엇인가 주장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기록해두는 일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