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시작?
정세초점 2
‘대공황’의 시작?
채 만 수 / 부소장
지난 10월 23일에 홍콩에서 시작된 증권시장 폭락을 신호로
불안정 상태에 빠진 자본주의 주요 국가의 증권시장은 10월
27일에 일제히 대폭락을 기록하였다. 이후 폭락과 작은 반등의
진동을 거듭하면서 지금 세계의 대자본가들은 자꾸만 떠오르는
1930년대의 ‘대공황’의 악몽을 떨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각국의 금융당국과 언론은 최근의 사태가 단순히 주가의
조정(correction)에 불과하다며, 애써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이번의 세계적인 주가의 폭락사태가
마치 동남아의 통화․금융위기를 보면서 생기는 투자자들의
‘심리적인 동요’ 때문이라며, 투자자들에게 ‘진정할 것’을
설교하고 있다.
그 외에도 그들은 여러 가지 ‘원인’과 ‘배경’을 들면서
나름의 대응책을 내놓고 있는데, 사실은 ‘사태’의 진짜 원인은
말하고 있지 않다.
1년이 조금 못된 지난 해 12월초에 나는 전국노동단체연합의
ꡔ월간자료ꡕ 12월호에 「환영(幻影)과 환상
: 한국 경제와 미국 경제에 대한 두 방향의 주관적 해석에
대해서」라는 글은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에서 당시
“한국에서는 전혀 위기가 아닌 상황을 갖은 구차한 개념까지
창작해 내면서 위기라고 우겨대는 데에 비해서, 미국의 자본은
위기가 임박했는데도 ‘미국 경제에서 경기 사이클이 사라진 것
같다’며 ‘장미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ꡔ월간자료ꡕ, 1996년 12월호, 31쪽
고 말했었다. 이는 당연히 미국 경제가 호황의 극에 달해 있어
미국 경제에, 그리고 따라서 자본주의 세계경제 전체에
‘공황’이 임박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경제에
대해서 썼던 바 같은 책, 34~37쪽
를 여기에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겨 보자.
* * *
미국 경제 향후 5년간 ‘장미빛’(?)
ꠏꠏꠏ 파국에 임박한 미국 경제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1930년대는 ‘위기’ 그 자체였고 수천만
명의 학살과 대대적인 파괴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는 그 ‘과잉생산’의 위기 상태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는,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1929년
말엽에 뉴욕에서부터 폭발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해 1929년에 미국의 대통령이 미국의 의회
연설을 통해서, 세계를 향해 “이제 미국의 미래에는, 공황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번영만이 있다”고 선언했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선언했었다. 자본주의적 경제위기, 공황은 그렇게
사람들이 ‘번영’의 환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번영’의 환상에 빠져 있을 때가 바로
위기가 찾아오는 때이기 때문이다.
보도(「조선일보」, 96. 12. 4.)에 의하면, 지난
11월 초의 대선 직전에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로버트 솔로우
MIT대 교수, 조셉 스티글리츠 경제자문위원장, 찰스 슐츠 전
카터 행정부 경제자문위원장, 로렌 스서머스 재무부 부장관,
앨리스 리블린 FRB(연방준비제도 이사회) 부의장, 에드워드 보언
필라델피아 FRB 행장, 기업연구소(AEI)의 허버트 스타인 등
한결같이 쟁쟁한 거물들인 ‘경제학자 8명에게 미국 경제의
중⋅장기 전망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문의 결과는 극히 ‘장미빛’이었다는데, 그 보도를 잠깐
보자.
전문가들이 제시한 미 경제의 청사진은 한마디로
‘장미빛’이었다. “향후 5년간 불경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인플레의 우려도 없다. 미국 경제는 저물가, 저실업률의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조심스럽게 “미국 경제에서 경기 사이클이 사라진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시계추처럼 호경기와 불경기 사이를
오가던 진동운동 대신, 낮은 물가 속에 일정 성장이 지속되는
장기 추세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경제는 5년 전의
불경기 사이클 이후 좀처럼 하강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기 사이클 소멸론’의 근거로 복합적인 요인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물가 안정이 10년 이상 계속되면서
인플레에 대한 불안 심리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70년대 말
15%선을 오르내리던 인플레율은 80년대 초 FRB의 강력한
물가억제 정책에 힘입어 5%내로 잡혔다. 그 대가로 한때
실업률이 10%까지 치솟기도 했지만, 이제 국민들은 ‘물가는
오르지 않는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됐다. 웬만한 동요에는
물가가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현재의 미국 경제를 보면, 이러한 환상이 얼마나 냉혹하고
위험한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현재 미국의 경제는 사상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호황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월
스트리트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주가(다우 존스
지수)로 축포를 터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모순을
간직한 채, 그리고 그 모순을 심화시키면서이다.
위 기사에서도 ‘한때 실업률이 10%까지 치솟기도 했지만’
운운하며 한편에서 꼬리를 사리기도 하지만, 현시기 미국의
‘호황’과 ‘번영’은 주민의 압도적인 다수의
절대적⋅상대적 빈곤화와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인플레이션율은 FRB의 강력한 물가억제 정책에 힘입어 5%내로
잡혔다”지만, “임금 인상률은 1980년의 9.5%에서 1987년에는
2.2%로 감소했다. 남자의 실질임금 평균은 시금으로 환산했을 때
1989년의 $11.98에서 1995년에는 $11.24로 저하하였다. 그에
비해서 기업의 세후(稅後) 수익률은 1952년에서 1979년까지의
평균이 3.6%였음에 비해서 1994년에는 7.5%로 상승하였다.
빈부격차도 확대되었다. 1990년의 딸라 가치로 환산하여
1973년에는 전체 세대 가운데 소득 구분으로 상위 20%에 속하는
세대의 평균 소득은 $77,500 ― 하위 20%의 평균은 $10,400 ―
로서 그 무렵에 이미 7배나 격차가 있었다. 그런데 1992년이
되면 상위가 $98,000 ― 로 증가했음에 비해서 하위는 $9,700 ―
로 감소하여 그 격차도 10배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미국 인구 2억6,000만명 가운데 약 4,000만 명이 빈곤 상태에
있다고 얘기되고 있다. 그리고 노동력 인구 1억2,600만명 가운데
1,370만명이 실업자 혹은 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다.” 이상,
스기모토 요시오, 「戰鬪化するアメリカ勞動運動」,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96년 9⋅10월호, 82~83
쪽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와서 실업률이 5%대로 줄었다고는 하지만,
기업의 이른바 구조조정(restructuring), 감량경영(downsizing),
합리화 등등으로 매일매일 3,000여개씩의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일자리가 사라지는 대신에 새롭게 나타나는 일자리라곤
파트타임, 임시직, 일용직 등뿐이다. 그리고 30% 이상의 가정이
지난 수년 동안 가족 중 누군가의 실직을 경험하고 있고, 따라서
실직에 대한 공포가 광범히 유포되고 있다.
그나마, 미 노동부가 매달 초 전달의 노동관련 통계를
제시하는데, 만일 전달의 실업률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으로
발표될라치면, 월 스트리트의 주가와 채권 값은 곤두박질을
친다. ‘과열 경기의 억제를 위한 공정 할인율(이자율)의 인상’
우려 때문이란다.
지금의 미국의 ‘호황’과 ‘번영’은 그러한 성격의 것이다.
문제의 보도는 미국 경제에서의 이른바 ‘경기 사이클
소멸론’을 뒷받침하는(?) 여러 논거를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미국 경제 자체의 규모 확대와 ‘거의 완벽한 개방체제’가
수요의 제약 가능성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산과 소비간의 모순의 해소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보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미국 경제는 글로벌 체제 속에서 움직이며, 작은 충격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강해졌다. 가뭄이나 홍수 때
‘시냇물’보다 ‘강물’의 수위 변화가 작은 것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명백히 거꾸로 보고 있다. 가뭄이나 홍수 때
강물의 수위 변화는 시냇물의 그것에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큰 것이다. 그리고 시냇물의 범람은 작은 문제를 만들지만
강물의 범람은 엄청난 재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지금 실제 미국의 경제는 커다란 강물을 형성하고 있고,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월 스트리트의 주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물은 강둑에 넘실대고 있다.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주가의 폭등이란 것이
무엇인가? 호황이 극에 달해서 자본의 평균이윤율이 극도로
낮아진 결과 자본이 일확천금을 노리면서 대대적으로 투기에
나서고 있는 것의 표현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미국의 월 스트리트의 붕괴, 따라서 미국의
대호황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강물이 큰 만큼 그 범람이 초래할 재앙도 엄청날 것이다. 현재
미국의 사회⋅경제적 상황, 과학기술혁명 성과의
자본주의적 이용이 어느 사회보다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온
사회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격화 정도로 보아서,
미구에 미국 경제에 닥칠 이번의 공황은 미국 사람들과 나아가
세계인들이 가졌던 미국의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장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태도를 수정하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경제에서 경기 사이클이 사라진 것 같다”고? 그리고 그
전망이 ‘장미빛’이라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당장’이 아니라 상당 기간의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이고,
그것도 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는 전혀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라면, 미국 경제의 사이클은 미구에
‘나 여기 있노라!’ 외쳐 댈 것이고, 미국 경제의 전망은
‘흙빛’이다.
* * *
지금 뉴욕의 증시를 위시해서 세계의 주요 증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1930년대와 같은, 혹은 그보다 더욱 거대한
‘대공황’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대공황’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 아직은
아니어서 일시적인 경과성의 동요인지는 조금은 더 사태의
진전을 지켜본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분명한 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사태는 결코
통화․금융 부문만의 동요도 아니고, 또 통화․금융
부문의 동요현상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의 원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거꾸로 통화․금융 부문에 나타나고 있는
동요는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모순과 불안정
그것의 징후 혹은 표현에 불과하다.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투기자본의 거대한 축적이
있었고, 최근 2년여 동안 미국 경제의 극도의 호황으로 증권시장
등에서 대대적인 투기가 있었던 것은, 모두가 지난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항상적․만성적 과잉생산으로
자본의 이윤율이 현저히 낮은 상태로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과
최근에 미국 경제의 과잉생산으로 그 이윤율이 더욱 극도로
낮아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미국에 거대한 위기(=공황)가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경제에 고뿔이 들면 한국 경제는 폐병에 걸린다’는
시쳇말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 경제가 자본주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봐서, 그리고 미국 경제와 한국 경제간의
관계로 봐서, 미국 경제에 공황이 닥치면, 자본주의 세계경제
전체는, 그리고 한국 경제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 오면 당연히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정치적․경제적 공세가 강화되는데, 한편에서는 파시즘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름의
애국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를 고무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자 대중이 그에 굴복하게 될 때, 그들이 맞게 되는
운명은, 제1․2차 대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비극적인
전쟁이다.
평화를 향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어느 때보다도
강화해야 할 때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