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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와 한국통신 사태를 바라보며

현장에서 미래를  제1호
임채윤

현대자동차와 한국통신 사태를 바라보며

임 채 윤 (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


1. 분신, 파업, 침탈, 검거, 구속……

요즘 TV나 신문을 조금이라도 읽는 이라면 아마 연일 화면과 지면을 가득 채우는 이런 말들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년 8월 전국을 달구었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과 정권과 언론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무력적 탄압의 기억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지난 5월 1일 대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노동자들의 함성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이런 소식들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상황을 냉철히 관찰해보면 이 사태가 결코 급작스러운 것도 놀라운 일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남한의 현대사에서 정권과 자본이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 민중들에게 가한 폭력과 수탈은 현재의 상황과 비교해 보았을 때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유혈사태가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꼭 같은’ 일이 아님을 우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현대자동차와 한국통신 노동조합에 가해지고 있는 이러한 정권과 자본에 의한 무차별적 폭력의 배경과 앞으로의 전망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우대중의 실천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2. YS여! 정권의 전복을 막아라!
남한의 자본이여! 다시 없는 호기를 놓치지 마라!

지난 5월12일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 양봉수씨의 분신으로 촉발된 현대자동차의 파업, 그리고 한국통신 노동조합에 대한 회사와 정권측의 초강경 대응은 1995년의 남한 정국과 세계자본주의 질서의 상황 속에서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를 차분히 살펴보도록 하자.
1992년 대선을 통해 집권한 김영삼 정권의 등장 이후, 민중운동 진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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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진영에서 이루어졌던 공통적인 평가중 하나는 이제 남한의 질서는 과거와 같은 군부에 의한 파쇼적 폭압과 자본보다 우위에 선 정권의 형태가 아닌 부르조아적 합리성에 기반한 남한 독점자본의 이해에 따른 질서재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김영삼 정권 초기에 진행되었던 금융실명제를 중심으로 한 소위 각종 개혁사업들은 이러한 전망이 별로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집권 중반에 들어선 현재의 김영삼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상태이다. 개혁분위기의 급속한 냉각과 작년 김일성 사망과 맞물린 조문 및 주사파 파동, 전지협 파업에 대한 초강경 대응 등은 김영삼 정권이 그리 합리적이지도 그리 문민적이지도 않음을 스스로 밝혀 주었다. 또한 김영삼 집권 이후 계속된 엄청난 대형사고의 행렬과 그것에 대한 정부 차원의 미온적인 해결 등은 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을 급속히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6월로 다가온 지자제 선거와 앞으로의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지는 선거정국은 김영삼 정권으로 하여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임에는 틀림 없다. 김영삼이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움직임에 대해 ‘국가전복’ 운운하는 것도 결코 대통령이 무식해서도, 노조와 노동운동에 대한 관점이 올바르지 못해서도 아니고 정권 - 여기서 정권은 총자본으로서의 국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영삼과 민주계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무리들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에 대한 위기의식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올해 11월 건설될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목소리가 그에게 과연 어떻게 들렸겠는가? 한국노총마저 자신의 입지강화를 노리며 매년 해오던 노-경총 임금합의를 거부하고, 지방자치체 선거에 후보를 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80년대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흐름을 총괄해내는 민주노총의 움직임은 분명 김영삼 정권에게 눈엣가시임에 틀림 없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의식은 한편 자본의 입장과 맞아 떨어지면서 한층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바로 며칠 전 발표된 미국의 일본에 대한 무역보복조치와 일본의 강경한 맞대응으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무역전쟁이, 그리고 엄청난 엔고현상의 상황은 남한의 독점자본으로 하여금 이러한 호기를 놓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무역전쟁이 분명 남한 독점자본의 행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약간의 헛점이라도 놓치지 않는 자본의 본성상 이 국면을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김영삼 정권에 의한 ‘국가경쟁력 강화’나 ‘세계화’ 구호가 내용도 없고, 철학도 없는 빈껍데기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에게 그것은 절대절명의 과제였고,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는 삼성의 ‘세계 제일’, 대우의 ‘세계경영’이라는 구호는 김영삼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의 이러한 상황판단에서 노동자들의 목을 죄는 한이 있더라도 더욱 더 높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과 파업으로 인한 손실의 최소화는 그들이 반드시 쟁취해야 할 명제인 것이다. 이번에 한 노동자의 분신까지 불러 일으킨 현대자동차의 상황은 이를 가장 잘 반영해주고 있다. ‘생산제일주의’를 추구하는 남한 제1의 자동차 회사인 현대자동차는 노사협조주의를 포방하는 현 노조와의 담합 속에서 엄청난 노동강도의 강화를 진행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상에 명기된 주당 44시간 노동은 커녕 주 56시간까지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장의 컨베이어 속도의 상승과 ‘목표달성 못하면 죽음’이라는 슬로건이 잘 말해주듯 노동자의 피를 짜내며 알량한 생산성 향상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을 열사로 생각하는 것은 열사의 재출현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는 전태일을 ‘열사’라고 칭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본에게 생산성의 향상은 결코 악(惡)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선(善)인 것이다.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이다. 현대가, 대우가, 삼성이 세계 제일을 외치며 생산성 향상을 꾀하는 것을 우리가 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자본’주의 질서의 선두주자인 ‘자본’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현대자동차 노조집행부에 대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3. 노동자․자본가 사이엔 어쩌면 평화가 있을 수도 있다?

한 달 전쯤 현대자동차 사장과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인 이영복씨가 깨끗하고 흰 체육복을 입고, 둘이 손을 잡은 채 성화를 꼭 쥐고는 먼 곳을 응시하며 달리는 사진이 각 일간지 전면광고로 실렸던 일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세계화! 현대자동차 노조가 앞장 섭니다.”라는 구호도 큼직하게 박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를 전후해서 파업만 연상시키던 현대에서도 드디어 ‘발전적인’ 노사화합의 분위기가 가득하다는 해설기사와 이영복 위원장과의 인터뷰가 자주 실렸었다.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의 본질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노사화합주의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그들간의 타협은 노동자의 피를 담보로 한 것임에 틀림 없었던 것이다.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항의하면서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수백번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생산중단 불가’라는 이유로 늘상 거부되어졌고, 도리어 10분간 라인을 정지시켰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안전사고가 발생하여 조합원의 생명이 위태로와 라인을 정지시켰는데도 해고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누구와 누구의 화합이었던가? 보수 언론에서는 이번 현대자동차의 상황을 ‘노-노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아무런 대표성도 없는 대책위에 의한 파업주도는 명백하게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 물어보자. 적법한 과정을 통해 선출된 한국통신 노조의 활동에 대해선 왜들 그렇게 난리인가? 그리고 한국통신 노조가 ‘국가전복’은 커녕 아직 파업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왜들 이렇게 난리란 말인가?
이영복씨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현대자동차 노조 집행부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평화를 통해 서로 잘 되면 되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회사측에서 작년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안보다 무려 1만원이 많은 임금인상을 수락했을 때 노동자들은 순간 좋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노동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이제 한발짝 떼지 못한 채 엄청난 노동강도를 아무말 못하고 감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노조 집행부가 임금인상에 합의하면서 다른 것들도 합의했기에…. ‘목표 달성 못하면 죽음’이라는 구호가 섬뜩하지 않은가? 이러한 노사협조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경제활동―그것도 단순한 노동자복지의 문제―만으로 한정시키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측면을 조금 깊숙히 생각해 보자. 지금 가장 많이 얘기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제3자 개입금지’라는 독소조항을 들먹거리며 이루어지는 민주노총(준)의 활동에 대한 탄압과 그에 대응한 민주노총(준)의 악법 어기기 투쟁이 그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제3자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된 논리이다. 경제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당사자들(해당 자본가와 노동자) 외에는 개입해서는 안되며 하물며 민주노총(준)과 같은 재야 불법 노동운동단체가 개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정치활동이 근원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남한 상황이다. 이는 같은 자본주의국가들에게서조차 비웃음을 사는 독소조항들이다. 바로 며칠 전 UN에서 ‘한국의 정부가 파업에 대해 너무 지나친 개입을 한다’라는 내용의 권고를 했다고 한다 (김영삼은 정말 세계화를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추구한다. 현존 사회주의권에서처럼 당에 의해 모든 것이 직접적으로 통합되고 관리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생산영역에서 나오면 모두가 ‘1인 1표’의 투표권을 갖는 평등한 시민이라고 불린다. 자본가든 노동자든 모두 한표씩 찍으니 이 얼마나 평등한 사회인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하면서 민주노총(준)을 비롯한 여타 노조들이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는 것은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공언한다. 그들의 언어로 한다면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위협해서는 안된다’일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남한에서 이것이 곧이 곧대로 이루어진 적은 한번도 없다. 정권과 자본은 끊임없는 밀월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가끔씩 사랑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칼로 물베기’인 부부싸움처럼 지속되고 있다. 얼마 전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의 민자당에서의 정치활동 선언은 그의 말처럼 ‘정경일체’가 아닌가? 자본가의 정치활동은 ‘구국의 결단’이고 노동자의 정치활동은 ‘망국의 조짐’이라는 남한 정권과 자본의 발상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남한의 자본가는 노동자와의 평화를 원치 않는데 노동자가 뭐하려고 평화를 외치겠는가? 전세계 자본가들 중에서 가장 전투적인 자본가와 가장 전형적인 부르조아의 집행기구로서의 정부를 가진 ‘자랑스런’ 남한 사회에서 노사화합주의는 왜소하기 짝이 없는 외침인 것이다.

4. 싸움은 시작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현대자동차와 한국통신노조에 대한 정권의 협박과 공갈, 구속과 검거, 침탈의 소식을 우리는 보수일간지들 덕택에 꽤나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물론 그들은 위의 용어들을 쓰지 않는다). 보수일간지들 사설을 읽다보면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고맙게도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법을 지켜라! 노동운동단체들은 정치활동을 하지 마라! 이런 호황기에 웬 파업이냐!” 그들 눈에는 불꽃에 휩싸인 노동자는 보이지 않고 멈춰진 라인에 줄세워진 자동차들만이 아까울 따름이다. 당연하다. 그들에겐 당연하다. 가장 전투적인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바랄 것인가? 그들은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아니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자본가들의 노동자에 대한 본능적 멸시와 거부를 잊지 마라. 자본가들의 이윤추구에 대한 본능적 탐욕을 잊지 마라. 그들은 결코 피를 두려워하거나 불쌍해 하지도 않는다.
신문을 거꾸로 꼼꼼히 읽자. 보수일간지에서 우리는 가장 적나라한 이데올로기․실제적 계급투쟁의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 하고, 무엇을 걱정하는가를,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싸움이 시작된 현장을 피하지 말고 읽자. 누구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피하지 말고 보자.
지금 관악 곳곳에선 투쟁 속보와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나치지 말고 꼼꼼히 읽자. 당신이 오늘 아침 읽은 보수 일간지의 기사와 한번 비교해 보자. 옆의 친구들에게, 선배들에게, 후배들에게 얘기해 보자.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살피자. 우리는 결코 싸움을 먼 곳에서 바라볼 수 없다.
노동자의 활동은 분명 정치이다. 결코 경제적 영역으로 한정할 수도, 한정해서도 안된다. 부르조아들에 의해 분리된 정치와 경제는 노동자들의 활동을 통해 통합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계급에 의해 자의적으로 분리되고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변혁적으로 통합되는 노동자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의 싸움은 분명 정권과 자본의 의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를 바라기에 이루어지는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수세적 탄압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변혁적 실천을 두려워하며 이루어진 노동자계급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분명한 공세적인 선전포고인 것이다. 그들이 부르고 있는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노동자․자본가 사이엔 결코 평화란 없다”라는…….
현총련과 민주노총(준)이 총파업을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정권과 자본은 결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그것만으로 한정해서 사고하지 않는다. 올해의 임금투쟁에서 선수를 점하고, 내년 이후 노동운동에도 쐐기를 박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된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어설픈 노사화합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확실히 폭로해 내야 한다. 이제까지의 어용노조를 물리치고 겨우 민주노조의 깃발을 올린 한국통신 노조는 사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노동자계급 전체의 투쟁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만약 여기서 물러서 고스란히 지도부만 연행된 채 멈춘다면 누가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투쟁이 파국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설픈 타협이 파국을 불러올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권이 중립적이라는 말은 믿지 말자. 우리에게 장미빛 미래를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 역시 하지 말자. 그들이 우리에게 줄 것은 장미가 아니라 단지 장미빛 ‘피’일 뿐이다.
얼마전 성황리에 끝난 ‘서울 국제 모터쇼’에 참가한 현대자동차의 모토가 ‘Creating Future with Hyundai'(현대와 함께하는 미래창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는 미래를 맞기도 전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die).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과 사장이 함께 든 성화를 꺼버리고 노동자계급의 들불을 지피자.

1995-07-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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