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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나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93호
허은영


현장인터뷰 :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나다

면접자: 허은영(임노동노자관계세미나팀장)
면접에 응한 동지들:
1. 부산지역본부 조합원 이경미
2. 포항지부 조합원 김세인
3. 부산지역본부 대의원 김경아
4. 부산지역본부 조합원 조이화



▶먼저 장기간 지속된 투쟁이 마무리되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등이 있다면 간단하게 말씀해주세요.
▷노래한 기억이 남는다. 노래패가 이번 파업 4주차에 만들어졌습니다. 노래만 한 건 아니고 음주투쟁도 많이 했구요. 오래 안했지만 단식투쟁도 했구요. 많은 것을 경험한 것 같아요, 평생 못할 경험들을 한달 남짓 많이 배우고 생각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원장과 교섭위원들이 끌려 나왔을 때 너무 화가 나더라구요.
▷저는 단식투쟁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결의했구, 그런데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게 이용석 열사에게는 많이 미안하구, 투쟁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거 같은 느낌이었지요. 단식으로 압박을 받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공단 측이 생각보다 압박을 안 받더라구요, 그런데 그땐 너무 지쳐 있었구,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맘이었죠.
▷작전상 동지들에게 가장 실수로 남는 노동청 점거 투쟁이 기억에 남아요. 그게 너무 안타깝죠. 한바탕 결의를 떠나서 좋은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는데 아직까지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하지 못한 투쟁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우리 사업장에 들어가서 사업장 투쟁을 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또한 전국노동자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의 하나에요. 우린 전야제 밖에 못 갔었지만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모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구요. 그때 정말 연대의 정을 톡톡히 느꼈습니다.
▷장례식 한 날도 우린 끝까지 못 들어간 게 아쉽지요. 그리고 노동자 대회 지나고 계란 던지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통쾌했어요.
▷그리고 실제 담을 넘자는 등의 의견들도 현장에서 제출되었지만, 지부별로 편차도 다르고 위험성도 있다는 이유,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 등의 의견차가 많아서 결국 개인적 결의들을 모아서 집단 단식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법은 지켜야겠고, 법을 지키자니 우리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죠.
다음에 할 땐 정말 법을 무시하고 악으로 깡으로 전진할 겁니다. 교묘히 법망도 피해가면서 과격하게 할 방법을 연구해야죠. 법대로 하자는 논리에 대해서는 부산지부 같은 경우에는 집행부가 하자고 하면 따르는 방향으로 실천했는데, 다른 지부의 경우 법을 따지고 들어가는 거였어요. 서울 경인 쪽이 특히 법을 많이 내세우더라구요.
▷끝까지 함께 한 조합원들의 경우도 대전은 한 명 남았고 광주도 소수 남았구요. 100%는 아니지만 영남권의 경우도 복귀하는 조합원들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함께 하려 했습니다.
2주차에 지사 타격을 들어가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3주차에 귀향 투쟁하는 과정에서 독려를 하자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그게 실제 실행이 안되었어요, 그게 좀 아쉽지요. 적절한 시기였는데 실행이 안되면서 아쉽습니다.

▶그럼 앞서나가는 지부와 편차들이 있는데, 제안들을 하면 너무 선도적일 때 무리하다고 할 때 다같이 안하는 분위기인가요?
▷조합원들이 제일 심하게 지적했던 부분인데, 지부별로 편차를 줄이면서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부 조합원들을 섞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팔도 토론회를 하겠다는 시도를 했어요. 그런데 저희 지부는 결의를 하기도 했던 부분이에요. 그게 수렴되어서 집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다른 지부에서 우린 못하겠다며 반대를 해서 결국 반대의견에 밀려서 그걸 못하게 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평가도 했지만 차라리 우리 46개 지사들의 의견을 모아서 조금 더 적절한 방안으로 제출을 하던지, 집행부에서는 일부 집행부의 반발이 심하고 그들이 내려간다고 하니깐 단지 그들을 잡아두기 위해서 정작 우리가 나아갈 길을 조금 후퇴시킨 점이 있다고 봐요. 그 부분이 가장 기초이면서 가장 크게 놓친 부분이에요. 막판에는 전체토론을 몇 번 하긴 했었지만 파업 초기부터 결의 수준이 틀리다면 이것을 어우르는 작업이 필요하고 또한 지부마다 지역성 등을 터놓고 공유하고 전체를 위해 우리의 생각들을 모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데 전체 지부가 집단적으로 농성장에서 이탈해서 내려갈 때 우리들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본부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부자체가 그냥 결의해서 우리 집행부랑 의견이 틀리다. 그냥 단체로 내려가자 라던가, 지부장이 ‘나 하나 찍힐 테니 너희들 먼저 내려가라’는 식으로 했던 부분을 전체적으로 조직하는 부분이 미약했었죠.
전체적으로는 100여명, 150여명 남아서 힘들게 투쟁했었고 그래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걸 제대로 얻지 못한 게 있었던 거라고 봐요.

▶연대하는 대오도 있었고, 간접적 전술 등 영향을 미치는 교육 등의 프로그램에서 기억에 남거나 아쉬운 부분들은?
▷정말 기억에 남는 건 간부의 역할과 자세에 대한 간부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그걸 들으면서 왜 간부가 있어야 하는지, 앞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지도부의 결의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 배운 게 가장 남습니다.
처음하는 파업이라서 모든 교육이 소중했고 얘길 많이 했어요, 그런데 토론만 했어요. 실행이 안 되었던 거죠. 얘기한 만큼 조합원 의견이 수렴되었으면 집행부 차원에서 실천계획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수렴되는 구조는 있었지만 무시되는 건지 소통이 안 되었죠. 쟁대위원들도 교육에 참여했지만 실제로 쟁대위와 조합원들이 따로 놀았던 거죠.
처음에는 몇 번 지부별 자체 토론을 할 때 본부장급들이 참여했지만 나중에는 거의 참석을 안했어요. 정말 중요한 교육은 간부와 조합원의 위치를 떠나서 함께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간부들은 회의 등 여타의 이유로 교육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의 문제의식들을 공감하고 반영하고 이끌어가는 부분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참여를 처음부터 끝까지 조합원과 함께 했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쟁대위는 항상 쟁대위끼리, 조합원들은 조합원들끼리 했고, 지부장이나 대의원을 통해서 의견을 전달해도 반영되지 않았죠. 회의 따로 조합원 교육 따로 된 거죠.
우리가 지부 등에서 의견을 올리는 경우에 올라갔는데 소식이 없는 거에요.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비판을 했지만 끝까지 조직력이 약했고, 처음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조직력 강화가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아닌가 생각이 되요.

▶많은 거점투쟁들이 그간에 있었는데, 발전 파업 당시에도 거점에서 산개투쟁으로 가면서, 반은 어용지부장들이었지만 지부장이 딴 짓 할 때, 그걸 다른 방식으로 조합원들을 투쟁으로 끌어내는 방법들도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내외부적으로 제안이 안되었나요?
▷연대단위의 경우에는 조합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전술 등의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제안된 부분들이 없구요, 쟁대위에서는 제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제안 토론되는 경우들은 거의 없었어요. 보고는 있었지만, 가능하면 연맹에서는 자체적으로 이끌어가라는 방향이었겠지만, 저희는 오히려 필요했던 부분이죠.
우리는 지역본부장 선에서 개인적으로 설득, 회유 협박 등의 개별작업이었으므로, 적절한 대응 등이 없었던 거 같아요.
이용석 동지 분신 이후 전화해서 올라오게 한 것 등 외에는 우리가 알아서 하는 방식이었죠.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정규직 노조와의 관계, 과정 등은 어떠했는지? 독자적 파업을 하게 된 배경은?
▷처음 파업 찬반투표 하는 날 우리 본부장에서 정규직 노조에게 연대를 요청했는지를 물어봤어요. 그런데 요청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몰랐지만 정규직 노조 측에서는 연대파업은 못하겠다면서 보이지 않게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저희 정규직은 상급단체 여부를 떠나서 어용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기들이 우리 파업에 도움을 주지 않는 조건으로 단체협약을 약속 받는 식으로 전혀 연대하지 않기로 결의하는 분위기였어요. 실제로 위원장이 분신 이후의 투쟁발언 하러 왔었는데, 요지도 그거에요. ‘여러분들과 우린 남이 아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도와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이미 우리 설립 초기부터 따로 놀기로 했고, 비정규직이지만 우린 정규직과 함께 노조를 만들기를 원해서 우릴 받아달라고 정규직노조에 요청을 했었어요. 그런데 정규직 노조는 우리의 예상치 못한 요구에 대해서 자체 총회를 거쳐서 안받은 거예요. 그전의 ‘근로복지공단 직원이면 조합원’이라는 규정을 바꿨어요. 그런 과정들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많이 상해있는 상태였고, 실제 지켜보니, 간부급들의 협의는 몰라도 어쨌건 그들은 우리는 도와준 게 거의 없구요, 겨우 투쟁 기금을 전달한 것도 아니고 유가족에 대한 위로금을 전달하려고 했던 거죠. 그 외에는 우리와 연대한 건 없어요.
지부마다 분위기는 틀리겠지만 우리 부산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로 우호적이고 형제 같거든요. 개인적인 관계는 그러하지만 정규직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하고 있다는 거죠. 물론 부산지역의 경우는 비정규직 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으니, 같이 참여를 하자는 투표를 했었어요. 그런데 부산지역본부만 그러했고 다른 정규직 지부들에서는 안그랬기 때문에 아무런 것도 하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부산지역 정규직 조합원들도 자기네 노조가 어용이라는 걸 확실히 느꼈다고 하더라구요. 많이 안타까워했죠. 비정규직에 연대할 건지에 대해서 찬성이 몇%가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반대의견이 다수였던거죠.

▶파업 후 조합원끼리의 규합은?
▷수련회 때 결의했었는데요, 소모임이 활성화되어야 된다는 데에 공감했지요. 친목도모 등의 기존 모임들이 있는데요, 차장 부장, 정규직 다 합쳐서 있는데 그것과 별도로 이제 노래패를 하기로 했어요. 소모임 활동하자는 것은 전지부가 수련회 때 다같이 공감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분산되어서 조직하는데 어려움은?
▷간부가 아니어서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대전은 본부가 공석이었고 전체적으로 비협조적이었어요. 관심도 없고 총대 메는 사람도 없고, 이런 분위기가 처음부터 농성 참여과정까지 계속 이어졌다는 거예요. 하루 정도 농성 참여했다가 모두 내려가 버리고, 충주지부의 경우도 지부장만 남아있었던 거거든요. 대전만 비정규직이 아닌 것도, 특별한 상황도 아닌데, 극복, 해결이 안되는 상황이죠. 우리 지부가 그렇게 지도부가 없거나 열악한 상황이라면 사다리 타기라도 해서 지도부를 세워야 한다고 봐요.

▶거점 농성하면서 요구나 결의, 단합을 모으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교육도 좋았어요. 모든 교육이 토론과정을 거쳤구요, 그렇지만 토론 따로 집회 따로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저녁집회 7시부터 1시간 반 정도 하고서는 초기에도 토론시간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규율과 투쟁전술 정립 등. 찬성과 반대가 치열하게 공방했으면 더 발전적이었을지 모르겠는데 우리 지부의 경우는 의견이 너무 동일한지라, 토론을 하면서 우리의 결의를 더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토론논쟁보다는 결의를 확인하는 방식이었구요, 토론이 제대로 안된 지부도 많았어요.

▶투쟁과정에서 아쉬움은?
▷공단 담 넘어가는 것을 못한 게 아쉽습니다.

▶한진중공업이 먼저 타결되었을 때 생각들은 어떠했는가?
▷한진의 타결이 정말 잘된 건데도 불구하고, 두 분의 열사가 계셨는데 우리의 투쟁이 더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 우리에게도 그러한 생을 요구하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
▷한진 부산 영결식에 참여했는데 유인물 하나가 인상적이었어요. 현안문제를 놓고 투쟁하는 걸로 볼 때 한진이 타결되어도 우린 계속 투쟁할 것이다라는 것이었어요. 거점투쟁이 가시화 되어야 하는데 우리도 잘 할 수 있을까, 우리도 극적 타결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었지요.

▶12월초에 공단측과 노조가 잠정합의가 이뤄지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부끄럽지만 저희들의 조직력은 아닌 것 같아요. 공공연맹에서 노동부 장관 면담, 차관 면담 등을 추진해온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오히려 정부가 공단에 압박을 가해서 이루진 것이라고 봐요. 우리의 결의도 막바지에 다다랐고, 우리의 투쟁도 앞만 보고 달리는 상황, 여론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있었다고 봐요.

▶노조 측에서도 중간에 수정안을 제출한 적이 있는데, 수정안을 만들 때 노조 내부의 조직과정은 있었는가?
▷7급 신설-정규직화 등 차선안은 우리 모두가 충분히 공감한, 토론을 거친 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의원한테 저는 건의할 때, 우리는 정규직이 안되면 가장 정규직화에 근접할 수 있는 수준, 예를 들면 2년 계속 근무시 무조건 자동으로 정규직화 한다는 등의 내용이 두 번째 안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노조의 수정안은 1안과 2안 간의 괴리가 너무 컸던 거죠. 저희가 그런 문제제기를 할 때에는 이미 쟁대위와 연맹측이 우리에게 알려진 노조의 수정안을 놓고서 이미 협상을 하는 중이었어요. 지난번 토론회에서 평가하는 과정에 일부 지부에서 그런 문제제기를 했거든요. ‘우리에게 교섭안을 결정지을 수 있는 과정을 붙였어야 했다’. 조합원들에게 충분한 의견수렴이 앞으로는 있어야 할 거라고 봅니다.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성은 높은 비율로 가결되었는데, 찬성과 반대 입장에서 문제점으로 제기된 부분은 무엇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이용석 동지 배상문제가 허술했고, 이미 열사에 대해서 노동부 고위급들과의 협의를 통해서 예산 남는 범위 안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노동부가 중재했다는데, 공단 측에서는 감사 등 이유로 회피했다고 하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게 싫었습니다. 당시 전체 표정은 찬성이 대다수라는 것은 읽혀졌어요. 그러나 잠정합의안에 대해서 높은 비율의 지지로 가결시켰다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저만이라도 반대표를 던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잠정합의안이 미리 나왔다는 것도 알거든요. 미리 사측에서 그런 안을 제시했는데, 마지막에는 너무 힘들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힘들어서 더 이상 투쟁에서 이것만이라도 우리는 승리하고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투쟁 이후의 노무관리도 달라지는 모습들이 있는 게 대부분인데, 달라진 점이 있는가?
▷긍정적인 부분은, 예전에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가만히 묵인했던 것들, 잡일을 다 했거든요. 그런 부분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우리가 처리했었는데, 이렇게 투쟁을 하니깐 우리도 거부하고 그럴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겁니다. 상급자들 또한 우리를 이제는 무시하지 못하고, 우리도 한마디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달라진 점입니다. 파업 이후 정규직과의 문제도 앞으로 있을 텐데, 그런 차이들이 개개인으로는 친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문제가 많이 부딪칠 거 같아요.
▷파업 후 1주일이 되어 가는데, 오늘 이용석 열사 49제에 참석하기로 한 조합원을 회유와 협박으로 못 가게 하더라구요. 그걸 보니, 우리가 50일 가까이 투쟁하면서 투쟁 결의와 조직력이 상당히 발전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일개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보고, 어느 정도 그들이 치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상당히 불쾌하고 우리가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소한 것이라도 쟁취하는 게 너무나 힘들고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구나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 조합원과 본부장에게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조직적인 대응을 해서 이제 고통 없이 일 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어요. 계속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거 같습니다.

▶연대투쟁을 직접 경험했는데 의미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인적 생각이고, 우리 내부적인 치부일 수도 있는데, 초기부터 연대하는 부분이 많으니까 조합원들이 그걸 너무 익숙하게 당연시했거든요. 부산 조합원들의 경우에는 연대하는 단위들과 간담회를 해서 그분들이 경험한 부분을 서로 공유하고 우리의 고충도 나누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지부의 경우는 부담된다면서, 우리는 내일 모레 내려갈 건데 왜 하느냐는 반응도 있으면서 중앙에서는 간담회 자체도 커트 시키고 단순히 집회에 함께 구호 외치고 노래하고 연대발언 해주시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덧붙여서 그분들이 몸소 경험한 부분들을 함께 공유하지 못했다는 게 정말 많이 아쉬워요.
▷경기보조원 노조의 파업투쟁을 교육으로 참여할 때에는 정말 좋았거든요. 연대하러 오시는 분들이 정말 살아 있는 파업을 전해 주셨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파업 불참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는가?
▷처음에는 ‘동지가 돌아가셨는데 설마 오겠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아무리 우리가 얘길 해도 안 먹혀 드는 그 때부터는 이미 우리도 화가 났었죠. 체결 할 때 단서조항을 넣어서 파업 참여자에게만 메리트를 주자는 것을 결의하자고 했었고 중앙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활용해서 오히려 ‘동지들 열심히 합시다’라고 하기도 했죠. 그런데 우리가 장기간 파업을 하면서 스스로 깨달았어요. ‘그게 아니구나, 우리가 이번 파업으로 모든 걸 얻지 못하는 걸 보면서 다음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끌어안아야 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머리로라도 그렇게 하자’고 결의했었어요. 그러나 나도 인간인지라 그게 어렵긴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조직적으로 모아서 우리의 의견과 그들의 의견을 교류하면서 우리의 정당성을 자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거든요. 벌칙보다는 동일하게 대우받는 것으로 우리가 역으로 활용해서 함께 하자고 한거죠. 교육의 효과죠. 힘들고 원망이 컸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끌어들이지 못한 부분, 우리가 역량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반성도 했죠. 또한 선배 운동가들께서도 그런 부분을 많이 교육해주셨어요. 그래서 그걸 받아들인 거죠. 실천하는 일만 남았지요.
▷이용석 동지는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을 위해서 분신하신 게 아니고 1,300만 노동자 중에서 800만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우린 그나마 비정규직 중에서는 상위클래스고 우리보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투쟁하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우린 열사의 정신을 1/10도 계승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열사의 뜻을 제대로 살리고 우리가 배우고 느꼈던 부분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연구도 필요하고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당장 없다면 노조 할 필요 있느냐는 생각을 처음에는 가졌어요. 그런데 내가 일평생을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계속 투쟁해야 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한/노/정/연




<별첨>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사합의 사항

◎ 고 이용석 동지 분신대책 관련 사항
△고 이용석 동지 분신과 관련해 노사가 공동으로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와 사내통신망에 유감 발표
△고 이용석 동지 6급 명예정규직지원 증서 추중
△정규직 6급에 해당하는 산업재해보상법으로 산정한 금액을 치료비, 장례비 등으로 지급

◎ 비정규직 해소와 정규직 전환을 위한 보충 협약
△공단은 향후 비정규직 직원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으며 단계적으로 정규직 전환
△단협 체결 이후 노사 동수의 비정규직제도개선위원회 구성
△향후 정규직 직원을 채용할 경우 채용예정인원의 50%는 비정규직에서 채용

◎ 재계약과 고용안정 관련 조항
△2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 조합원 계약기간 3년 갱신 체결
△1년 이상 근무한 일용직 조합원 계약기간 6개월 갱신 체결

◎ 임금협약
△임금 총액 3% 인상, 일용직은 현행 일급 3,000원 인상
△비정규직 처우개선비 월 3만원 지급
△일용직 초과근무 수당 지급
△일용직 계약직으로 채용이 경력 인정

◎ 조합활동 관련 조항
△무급 전임자 1인, 근무협조자 2인
△노조 사무실, 노조 집기 지원

◎ 부대 약정서
△쟁의행위와 관련한 민형사상 책임 묻지 않는다
△조합원의 고 이용석 동지 장례식 참여 협조
△향후 부당노동행위 금지

2003-1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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