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발언대
<다함께> 동지들의 응답을 환영하며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 신질서 5호에 실린「반전/반세계화 운동, 이대로
좋은가? - 반전/반세계화 투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시각」이라는 기사를 통해 현 시기 반전/반세계화 운동의 경향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기사가 나간 후, 우리가 기사에서
명시적으로 비판한 세력 중 하나인 <반전·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 다함께 서울대 지부> 동지들은 우리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보내왔다(이하 <다함께>로 표기).
(<다함께>의 반비판글 원문은, http://ssps.jinbo.net/psbbs/zboard.php?id=xn
board&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
e=headnum&desc=asc&no=662참조.)
전략논쟁은 고사하고 전술논쟁 마저도 가뭄에 콩나듯 하는 현
학생운동의 풍토 속에서 이루어진 답신이라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다함께> 동지들의 응답을 환영한다. <다함께>와 우리의
논쟁이 더욱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며, 논의를
시작해보자.
1. 혁명적 좌파를 자임하는 어느 민족주의자들에 관하여
우리는 크게 두 가지의 논의를 제기했다. 먼저 현 시기의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노정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 두 번째로 반전투쟁을 중심과제로 놓고 있는 몰정세적,
몰역사적 운동경향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우리는 <다함께>가
우리가 비판했던 양자의 경향 모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다함께는 반전/반세계화 투쟁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에는 동의한다고 밝혀왔으며, 논의를
반전투쟁으로 한정했다. 그런데 우리는 <다함께>가 우리의
민족주의 비판에 동의하는 것을 보면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함께>가 제반의 투쟁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실천을 조직한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APEC 투쟁을 상기해보자. 안타깝게도, 우리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에 공감한다는 <다함께>가, 지난 APEC
투쟁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어떤 다른 실천을 벌여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함께>는 민족주의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그저
‘반 부시’라는 슬로건을 외쳤을 뿐이다. 마치 부시만
때려잡으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갑자기 주한미군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여성문제 역시
민족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선동하던 자들이 생각난다).
부시가 세계화와 이라크 전쟁의 열렬한 추진자·대변자라는 것은
구태여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반
부시’라는 슬로건이 올바른 것일까? 물론, 아니다.
아마도 이들이 그토록 열심히 외치는 ‘반 부시’ 슬로건은,
부시를 타격하는 것이 세계화와 전쟁을 막아내기 위한 핵심
고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일 때에만 전술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반 부시→반전·반세계화 투쟁의 전진]이라는
도식, 혹은 [반 부시→국제적 계급투쟁의 전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세계화의 수혜자는 오로지 부시정권과
미국이며, 이를 제외한 제반의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은 모두
미국과 부시의 꼭두각시라는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쉽게
말해, 부시를 때려잡으면 전쟁과 세계화 추진의 흐름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물론 아니다. 파병정세
당시, 남한의 외교통상부 장관을 비롯한 관료들과 자본가들은
조건없는 파병을 이야기했었다. 파병이 무슨 부시의 압력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물론, 이런 정세관 속에서 열심히
부시반대를 외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다함께>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한총련을 위시한 우리의 민족주의자들, 곧
우리 운동의 수준을 식민지반봉건시대 정도로 되돌려놓고 있는
자들이다. NL이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다함께>는
상대적으로 화려하게, 그러나 재미없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다함께>는, 자신이 그 전통을 잇고 있다고 자부하는 ‘고전
맑스주의’를 어떻게 독해하는 것일까? 입만 열면
‘혁명적사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하는
<다함께>는 실상 민족주의자일 뿐이다. 아마 이들이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존재했다면, 이들은 자본주의국가권력들의
합작품인 제국주의 전쟁 자체를, 곧 자국의 자본가계급과
국가권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 반대’를 외쳤을
것이 틀림없다. 히틀러는 전쟁광이자 파시즘의 가장 악질적인
추진자이며, 그렇기에 국제적 반 히틀러 전선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들은 레닌의 혁명적 패전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야 말로 이들에게 혁명적 패배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다시 가르쳐주어야 할 것 같다. 어쨌건 이들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이른바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레닌의 정신을 요약하자면, 반전 운동을 계급투쟁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침략을 수행하는 국가들
내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주장하고, 전쟁으로 인해 격화되는 정치·사회적 위기를 자국
정부와 지배자들에 맞선 투쟁을 확대하는 데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혁명적 패전주의 정신이다.”」 - 다함께 서울대
지부, [반전·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신질서>의 관점 비판 -
반제국주의 투쟁은 사회주의 활동의 핵심 고리다]
이들이 입으로(만) 그토록 섬기고 있는 레닌의 정신은, 이들이
입으로(만) 말하다시피, 반전운동을 계급투쟁과 연결시키고,
전쟁으로 인해 격화되는 위기를 [자국 정부와 지배자들에 맞선
투쟁]을 확대하는 데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다함께>는 침략전쟁에 동참하고, 세계화의 충실한 집행자가
되어 자본주의 강국대열에 합류하려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타격을 수행했는가? 타격하지 못했다면, 타격하려고 노력이라도
했는가? 왜 노무현이 그토록 WTO와 FTA에 목을 매는지, 왜
APEC을 그토록 성공시키려 하는지에 대해서 대중적으로 폭로하기
위한 선동을 수행했는가? 우리는 알고 있다. <다함께>는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반세계화 투쟁전선을 좌익화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민족주의자들의 전면적 장악력 속에서
‘반 부시’ 피켓을 드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것을. 이들의
언급을 보자.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반전 운동의 여러 동맹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물론 향후에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이라크 점령이라는 구체적 쟁점에
대해, NGO와 좌파 민족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다함께 서울대 지부, [반전·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신질서>의 관점 비판 - 반제국주의 투쟁은
사회주의 활동의 핵심 고리다]
그렇다! 이들의 말대로 반전운동의 현재 동맹들은 완전히 같은
방향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반 부시’와 ‘반미’라는
민족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NGO와 민족주의자들과
<다함께>가 서로 반대경향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반문은 완전히
정당하다. 다들 한마음 한 뜻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부시’에게로 몰아버리지 않았는가? 반전·반세계화 투쟁의
칼끝을 노무현과 남한 자본주의에게로 돌리려는 ‘반대방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 <다함께>는, 스탈린주의
인민전선을 레닌과 트로츠키의 노동자통일전선(공동전선)전술인
양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실천적 스탈린주의자인 <다함께>의
인민전선 속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그토록 강조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질식되어버렸다. 현재 반전·반세계화 투쟁의
구성주체는 소시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NGO, 농민, 민족주의자,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함께>는 이들과의
공동행보 속에서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념적 사회주의자인 이들은, 한
목소리로 ‘반 부시’ 슬로건을 외쳐도 한총련이 외치면
민족주의자의 실천이 되고, <다함께>가 외치면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민족주의자와 구분해주는 것은, <나는 사회주의자요>라는
스스로의 관념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회주의자라는 규정은,
그 사람이 스스로 걸고 있는 명찰이 아니다. ‘식량주권론’에
근거해 FTA반대 투쟁에 나선 <전국학생연대회의>나, ‘반
부시’를 외친 <다함께>나 모두 동일하게 실천적 민족주의자일
뿐이다. ‘저항의 세계화’니, ‘대안의 세계화’니를 늘어놓는
자들에게 권하노니, 껍질뿐인 국제주의를 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뿌리 깊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부터 돌아보라!
2. 고전 맑스주의의 매우 새로운 가르침 - 문제는 정세가 아니라
정치다?
고전 맑스주의의 전통을 잇는 <다함께>가 이번 논의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정세가 아니라
정치다”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고전 맑스주의자가 ‘문제는
정세가 아니라 정치’라고 말한 적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다함께>의 글을 옮겨보자.
「현재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는 이라크 점령 위기와
라틴아메리카 반란, 그리고 중국의 계급투쟁 폭발 가능성으로
요약할 수 있고, 이중 이라크 점령의 위기가 가장 핵심
고리이다. 이라크 점령의 위기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혁명적
위기와 다르다고 해서, 이것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아무런 기회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은 숙명론적 대기주의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이라고 볼 수 없었던 베트남
전쟁도 미국 지배자들의 극심한 정치 위기를 낳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유럽과 북미 등에서 대규모 반란을 낳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프랑스의 경우는 학생 반란이 노동자 투쟁의
방아쇠 역할을 하면서, 당시 대통령 드골이 국외로 피신하는 준
혁명적 상황까지 나아갔다. 제국주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는
지금, 문제는 정세가 아니라, 정치에 있다. 1968년 당시 프랑스
반란은 공산당과 사회당이 지배자들과의 타협을 추구하면서
사그라들었다. 준혁명적 상황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혁명적 위기로 더욱 몰아붙일 혁명적 조직이 노동 계급과
피억압 대중 운동 내에 뿌리 내리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 다함께 서울대 지부, [반전·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신질서>의
관점 비판 - 반제국주의 투쟁은 사회주의 활동의 핵심
고리다]
차분하게 조직규모를 늘려가다가 혁명기에 자신들이 ‘당’이
되어 혁명을 지도하겠다는 자가도취, 합법진보정당(민노당) 집권
이후의 무능력에 실망한 대중이 바로 전위당이 희망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무지막지한 주관주의로 무장한 대기주의의 챔피언,
<다함께>가 우리에게 숙명론적 대기주의라는 비판을 퍼붓는 것
자체가 황당하지만, “정세가 아니라 정치다”라는 명제에
비하면 양반이다.
정세가 아니라 정치다? 아니, 자신의 정치가 정세에 기반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이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은 닉슨이
패배를 승인하고 종전을 결정한 1973년까지, 근 10여 년간
계속된 길고 긴 전쟁이었다. 국제적 반전운동과 여론 역시
이라크 전쟁으로 촉발된 반전운동과는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2차 대전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지속된
자본주의의 호황이 뒷받침한 선진국 노동계급의 축적된 힘 역시,
1980년대 이후 퇴조에 퇴조를 거듭한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자본주의
이윤축적 시스템의 균열, 그리고 거기서 비롯한 계급투쟁 역시
자본주의의 위기를 부채질했다.
<다함께> 역시 이점을 모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이라크전이
1차 대전 당시의 혁명적 위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 이라크전이
베트남전으로 촉발된 준혁명적 상황과 다르다는 것은 <다함께>
역시 알고 있지만, 이들의 자본주의의 파국에 관한 숙명론적
이해는 이성의 작동을 가로막고 있다. 자본주의의 균열이
가시화되었던 당시의 조건과 어떤 유사한 조건도 없는 지금을
어떻게 ‘퇴조기’가 아니라 볼 수 있는가? <다함께>는
반전투쟁이 어떻게 노동계급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국제적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존재하고 있고, 이것에 함께하자고 말한다. 정세와
상관없이 반전운동이라는 정치로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이것을
위기로 연결시키자고 말한다. 마치 가까운 미래에 혁명이
임박했다는 투다. 그야말로 숙명론적 대기주의의 최강자다운
파국론·붕괴론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역시 대기주의의
최강자답게 혁명의 그날을 대비해 조직규모를 차분히
확장시키자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들의 정세관은 종교적 주술에
가깝다. 스탈린주의의 ‘일반적 위기론’은 이들의 주술에 의해
다시 태어나고 있다.
<다함께>는 도대체 어떻게 노동계급투쟁과 반전투쟁이 결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결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일말도 논하지 않은 채,
“오늘날 반전·반자본주의 운동과 노동 계급 투쟁의 관계는
독일의 위대한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승작용’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반전·반자본주의 투쟁은 정치투쟁이고, 노동계급투쟁은
경제투쟁이라는 투다. 로자의 『대중파업론』을 어떻게
독해했길래 이런 듣도 보도 못한 구분법을 구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과연, “서구 노동 계급
운동조차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으로 긴 잠에서 깨어나,
1999년 시애틀 반WTO 시위 이후에 급격히 성장한
반전·반자본주의 운동의 자양분을 바탕으로 서서히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유럽의 계급투쟁이 승리하고
있는가? 10여 년 전의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정도로 “유럽의
노동운동이 깨어나고 있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면,
남한이야말로 노동운동이 깨어나다 못해, 잠 잘 틈도 없을
정도의 상승기일 것이다. 1996-97년의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
이후, 98년의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철회투쟁, 99년의
지하철투쟁, 2001년의 대우차 투쟁과 한통계약직 투쟁, 2002년의
발전노동자투쟁 등 굵직굵직한 계급투쟁들이 벌어져왔지 않은가?
이제는 비정규직노동자들도 ‘불법파견 철폐’를 외치며 투쟁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모조리 패배해왔다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반전·반자본주의 운동의 자양분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의 몰정세적 감각에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다함께>는 필시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홍콩에서 삼보일배를 하고, 바다에
뛰어들었던 이들, 그 주요 구성은 농민이 아니었는가?
역사적으로 농민들은 스스로를 해방할 수 없었다는 것, 농민들의
해방은 노동계급의 해방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트로츠키주의’의 기본 아닌가? ‘쌀 수입 개방 반대’라는
나로드니키적 운동이 노동계급 투쟁을 성장시키기까지 한다?
이거야 말로 노동계급의 투쟁과 이해관계를 인민전선주의 속으로
용해시키고 있는 <다함께>에게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결국,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다.
3. 그람시에 대한 난도질을 경고하며
그람시만큼 난도질당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또 있을까.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혁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던져버린 남한의
지식인들은 그람시라는 붉디붉은 혁명가를 허여멀겋게 탈색해서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경화된 자신의 모습을 합리화하기
위해, 먼저 그람시를 우경화했고, 그 우경화된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는, 그것을 그람시 사상의 요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임노동의 판매자라는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생산의
주체로서 노동자 스스로를 전화시킬 ‘신국가의
핵(core)’으로서의 공장평의회와 유기적 집중주의에 의해
구성된 혁명적 전위당의 지도력의 융합이라는, 그람시가 그토록
강조한 의식성과 자생성의 변증법적 융합이라는 사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진지전과 시민사회론, 그리고 헤게모니론의
본질인 <과정으로서의 혁명론> 역시도, ‘기동전에 대한
거부’와 ‘인민전선’으로 이해되었으며, 가장 어처구니없게도
‘시민운동’으로 왜곡 당했다. 진지전과 헤게모니론은,
<다함께>식의, 공동전선을 가장한 인민전선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람시가 했던 다음의 말에
진지전의 요체가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첫째, 혁명은 그것이 부르주아 권력의 전복을 내세우고
달성한다고 해서, 둘째, 중앙정부가 부르주아의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대의제도와 행정기구들을 타파한다고 해서, 셋째,
대중적인 봉기를 통해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권력이 주어진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적이며
공산주의적인 혁명이라 볼 수 없다.」- A.그람시, 『옥중수고』
기동전을 통한 국가권력의 접수는 혁명의 완수가 아니라 혁명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 곧 사회전반에 대한 끊임없는 대체권력
침투의 과정으로서의 진지전을 국가권력탈취의 기동전과
융합하여 사고한 것(그렇기에 넓은 의미의 진지전은 기동전을
포괄한다), 즉 새로운 권력질서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한 어떤 권력접수도 성공한 혁명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람시의 진지전이다. 그렇기에 그람시에게 가장 중요한 진지는
바로 공장평의회였다. 그람시는 생산현장이야말로 노동계급의
대안적 권력주체로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보았으며,
이것은 생산이 자본주의의 핵심원리라는 것 자체에서 출발한다.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 자본주의의 권력질서가 일상적으로
재생산되는 공간. 그 공간이 바로 <다함께>를 비롯한
스탈린주의자들, 인민전선주의자들이 무지 속에 폄하하는
‘현장’이다. 생산현장에서의 대안적 권력질서의 형성과
노동계급의 권력주체로의 형성, 그리고 이 관계망이 당의 지도력
속에 전국적으로 확장되는 시기가 바로 ‘위기’의 시기이며,
이를 바탕으로 했을 때만 기동전이 가능하다. 사회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 이 전략을 ‘소비에트 혁명전략’이라 불러왔다.
공장평의회와 소비에트에 근거한 혁명전략은 생산단위를
장악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며, 지역구 체계가 아닌 생산단위에
근거한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속에서
착취당하는 직접생산자들에 의해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지양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생산현장에서의 권력장악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이다. 생산현장은 혁명을 사고하는 한
반드시 사수해야하는 전략거점이자, 정치와 경제의 분리의
지양이 시작되는 신질서의 공간이다.
현장에서의 투쟁을 ‘경제투쟁’이라 말하는 <다함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제와 정치의 본질, 더 나아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본질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임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진지하게 권하건대, <다함께>는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을 다시 읽기 바란다. 만약 로자의 저작의
존재가치가 있다면, 다함께와 같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반전·반세계화투쟁은 정치투쟁,
현장투쟁은 경제투쟁이라는 맑스주의 역사에 유래가 없는
구분법을 들이대는 <다함께>와 같은 ‘자칭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위해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영국이
어쩌니, 프랑스가 어쩌니, 레닌이 어쩌니, 트로츠키가 어쩌니
하면서도, 구체적 실천에 대해서는 자보 붙이는 것 이외에는 한
없이 무능한 우리의 <다함께>를 위해 덕담 한마디 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겠다.
「이들은 남들이 제자백가의 한 글자라도 거론하면 곧 책을
통째로 떠올리면서 하나라도 알지 못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정작
자기 집안일을 물으면 아는 사람이 없다. 종일토록 남의 보물을
세면서 정작 자기는 반전의 돈푼도 없는 셈이라고 하겠다.」 -
大慧(중국 송대의 선승), 『대혜어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