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간의 예비군 훈련을 김포로 다녀왔다. 이제 그만 부르겠지
싶은데도 몇 번 더 남았단다. 좀 늦은 나이에 군대를 다녀온
탓이다. 가고, 오고가 귀찮아서 그렇지 어찌보면 월급쟁이에게는
짧은 휴가일수도 있다. 산속에 들어가 좋은 공기 마시고, 햇볕도
듬뿍 쪼일 수 있다. 무리되지 않을 만큼의 운동을 시켜주고, 뭘
먹을지 고민 안 해도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준다. 현역 군인
시절에는 이런 단순함이 답답함으로 느껴져서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편하다. 세상살이가 복잡해서 그런가보다.
모든 일의 시작에는 이를 알리는 행사가 있기 마련이다. 예비군
훈련에도 시작을 알리는 입소식이 있다. 그리고 입소식을 위해
예비군들은 줄 세워진다.
우리는 흔희 줄을 선다. 이는 차례를 지키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군대에서의 줄은 차례뿐 아니라 개인행동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집단적이고 획일화된 행동을 하게 할
기본을 갖추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의 줄이란 군기의
상징 중 하나다. 그래서 군대에서의 줄은 절대 삐뚤어져서는 안
된다.
이런 줄을 서기 위해 항상 부여되는 것이 기준이다. 줄을 선
사람들은 지휘자가 정한 기준을 중심으로 통제된다. 전역한 후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타인에 의한 기준, 즉“네
기준”에 익숙한가 보다. 입소식 줄을 서며 “네 기준”에서
고작 반 발짝 비켜섰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줄을 맞추는 내
자신을 봤다. 예비군이 줄 좀 삐뚤게 섰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거늘. 마치 줄을 못 맞춘 것이 큰 죄라도 지은 듯이 행동하는
내 자신을 보며 쓴웃음이 났다. 하지만 더 우스운 꼴은 “네
기준”을 충족시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면의 비주체성
아닐까.
단지 군복을 다시 입었기에 “네 기준”에 따르고 있는 걸까?
저 군대 울타리 밖에서도 “네 기준”에 따르며 살고 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내 기준”은 무엇일까?
예비군 훈련 첫날 밤, 이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든다.
훈련 둘째 날쯤 되니 같은 내무실을 쓰는 사람들끼리 왠만큼
친해졌다. 저녁식사를 일찌감치 마치고 음료수를 사이에 두고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화제는 자신이
겪은 군 생활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어느새 직장
얘기를 거쳐, 재테크까지 나아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이런 대화 유형이 매해 예비군 훈련에서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아마 비슷한 연령대의 이들이 직장과
재테크를 주로 생각하며 살기 때문일 게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돈이라는 얘기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취업준비생들이 대화에 동참하지 못 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새로울 것 없지만 고민은 계속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사람의 명함을 받으며 그 이의 능력과 됨됨이를
판단할까?
왜 우리는 사람을 대하며 그 이의 인품, 성격 등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왜 우리는 이런 모습이 속물답다고 말하지만 속물이 되길
마다하지 않을까?
예비군 훈련 둘째 날 밤, 이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취업준비생들의 코고는 소리가 어제 밤보다 더 크게 들린다.
훈련 마지막 날에도 무료함은 주로 텔레비전이 달래준다.
내무실에 텔레비전이 한대이다 보니 다 같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뉴스에서 각종 기사가 이어지다가 평택 대추리 관련 보도가
나왔다. 보도내용은 윤광웅 국방장관이 대추리 일대를 방문했고,
경계와 시위 진압을 위해 예비비 100억 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100억 원은 시위 진압용 장비와
경계병 보급품 구입 등에 사용될 것이라고 덧붙여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을 같이 보던 사람들은 “대추리
주민들이 보상비 더 많이 받으려고 저렇게 난리다.”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경계와 시위진압을 위해 10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쓰겠다는 발표에 분위기는 바로 반전되었다.
사람들은 이 정도 예산이 있었다면 사전에 대추리 주민들과
민주적으로 협의할만한 행정비용도 충분했고, 보상도 더 충분히
해줄 수 있다고 말해대기 시작한다. 이 보도가 있기 전까지
대추리 주민들은 욕심쟁이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 보도 한
건으로 한국, 미국의 권력이 나쁜 놈으로 찍혔다. 역시 100억
원의 힘은 쎄다!
물론 대추리 사태는 단지 보상금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대추리 주민들의 저항은 더
많은 돈을 위한 투쟁으로 비춰질 뿐이다. 자본의 시대이므로
상품과 서비스가 넘쳐난다. 차고 넘치는 상품과 서비스가 사람
내면의 욕망에 까지도 주목한지 오래다. 돈이 개인의 욕망을
현실화시켜줄 절대강자로 굴림하고 있다. 소비가 자아실현의
가장 손쉬운 가능성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의
사람들에게 100억 원이란 돈은 대추리 주민들의 욕망 그릇을
가득 채우고도 넘칠 량으로 보여진다.
이 지경인데 06년 5월 대추리를 상징삼아 살펴본 진보의 내용은
어떠한가?
삶의 터전 보전, 인권과 평화 수호 그리고 폭력 반대, 반미와
미군기지 확장 반대 등.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누가 들어도
틀리다할 말 하나 없다. 옳으신 말씀을 넘어서 엄숙하고,
숭고하다.
그런데 이 엄숙하고 숭고함 가운데 개인이 지닌 욕망 그릇을
채워줄 그 무엇은 느껴지지 않는다. 몸은 머리에 의해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음이 동해야 몸이 움직여진다. 안타깝게도
구구절절이 맞는 말들 속에 마음을 움직여 끝내 몸도 움직이게
할 결정적인 그 무엇인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 일까.
우리 운동은 소비하다 공허해진 마음과 대화하기 보단, 이미
똑똑해질 대로 똑똑해진 머리에 대고 구호를 외쳐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구호는 설령 강요로 들려질 수도 있다.
우리 운동이 개인의 욕망을 외면하고, 집단에게 계몽질,
훈장질만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퇴소식을 위해 다시 줄을 선다. “네 기준”에 맞춰 똑바로 줄을
섰다.
퇴소식을 마친 일행의 승용차를 얻어 타고 오는 귀경길, 차
안에서는 펀드 얘기만이 가득하다. 2박3일의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난 다시 욕망의 도시 서울로 돌아왔다.(2006.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