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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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성성하다: "오늘 있은 이 일, 당신들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노동자가 쓰는 노동운동사

현장에서 미래를  제112호
정병모

지금도 성성하다:
“오늘 있은 이 일, 당신들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정병모/ 조선소 노동자




5. 배짱이

솔직히 말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노동자 생활을 할 때도 그리 열심히 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열심히 살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배우려 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더 배울 수도 없어 좌절했고, 현실을 탈출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 현실에 묻혀 살았다.
이상은 컸지만 노력은 하지 않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어 대충 살았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일해 봤자 돈도 모을 수 없었고, 일한 돈도 떼이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낄낄거리며 여자아이들을 희롱하는 재미에, 세상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드러내 놓고 광고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살아온 과거는 그랬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온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그저 노는 재미에,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삼아 노름하는 재미에 살아온 세월이었다.
특별히 재미난 세상도 아니었다.
죄 많이 짓고 산 세월이었다.
청춘의 젊은 시절을, 부끄럽고 부끄런 세월을 살아온 것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독한 마음먹고 내려온 울산에서, 서울서 살아온 엉터리 같은 삶을 살기 싫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나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난 흔들렸다.
뜬 눈으로 지새우며 다진 각오는 햇빛 아래에서 쉽사리 바스라졌다.
마음을 다스려 내 삶을 바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 넘쳐나는 정열을, 주체할 수 없는 젊디젊은 몸뚱이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퇴근 후 갈 곳 없어 쭈뼛거리는 허황한 마음을 다스릴 곳이 필요했다.

망설임 끝에 지금은 현대백화점 동구점이 된, 쇼핑 쎈타에 있는 ‘속독학원’을 찾아가 거금 3만원을 주고 속독을 배우기 위해 등록했다(1983년도).
마음이 흔들리면 더욱 더 학원에 매달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기를 쓰고 열심히 다녔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속독을 간단히 설명하면… 책을 빨리 그리고 폭넓게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인데, 난 솔직히 3년 가까이 다녔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만큼 열심히 책을 읽었던 적은 없었다.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는데, 우리 집에 있던 100권짜리 깨알 같은 한국문학전집을 다 읽은 것은 속독훈련을 한 성과라 생각한다.
사회과학서적을 만난 것도 그 때다.
내 안에 있던 모든 의문이 확 풀리는 느낌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세상은 요지부동이었다. '신발끈' 소리가 절로 났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산하고 바다하고

주말은 산으로 내뺐다.
어머니는 돈 아깝다 성화를 내셨지만 흔들리는 맘을 다잡는 곳으로, 산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배낭은 늘 꾸려져 있었고 정신없이 시외버스 정류소로 갔고, 산으로 갔다.
특별한 곳을 생각하고 갈 때도 있지만 발 닿는대로 갔다.
같은 산을 수십 번을 가도 진력나지 않아 좋았고, 동무 없이 가도 외롭지 않은 것이 산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산악회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소속감 때문에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리라 싶어 혼자 쏘다녔다.
신불산 가려 나섰다 가지산을 가도 걸릴 게 없는, 나 홀로 산행이 주는 맛은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회사에서 쌓인 울화통을 산에서 다 삭이고 내려오면 발이 가벼웠다.
사람 만나는 재미도 쏠쏠했다.
혼자 다니니 불쌍해 보이는지, 가는 산마다 사람들이 말을 건네 온다.
밥도 얻어먹고 얘기도 주절주절해주니 얻는 게 많았다.

85년 2월에 결혼을 했다.
집안 동생 소개로 아내를 만났는데 만난 지 한 달도 안돼 결혼을 했는데, 참 갈등도 많았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니 생각도 달라 서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난 머리가 복잡해 밖으로 쏘다니는 축에 속하고, 아내는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해 집안단속을 으뜸으로 치니 의견 다툼이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

난 노래 부르기를 참 좋아한다. 잘 못 부르지만.
특히 산을 쏘다닐 때 혼자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고 다녔는데, 대부분이 유행가였다.
그런데 산악회에 속한 친구들과 산행을 가면서 산 노래를 배운 이후에는, 산에 가면 산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굽이쳐 흰 띠 두른 능선 길 따라" 하며 길게 빼 부르거나 "산하고 바다하고… 요를레이" 하는 노래를 불렀다. 배우다 보니 아쉬움이 생겼다.

어울리지 않게 ‘요들송’이 배우고 싶었다.
YMCA를 찾아가 요델 클럽에 가입해 요델을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 6시에 달동에 있는 YMCA회관에서 요델을 배웠는데 혓바닥과 목젖을 이용해 불러야 하는데, 영 진도가 안나갔다.
지금도 곤혹스러운 것이 요델 클럽을 다녔다고 하면 한번 불러보라는 건데, 흉내조차 못 내니 낭패 중 낭패가 아닐 수 없다.

YMCA에는 요델뿐 아니라 여러 가지 클럽이 있다.
울산지역에 있는 젊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클럽에 속해 있었고 덕분에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노래를 배우기보다는 사람이 좋아서 열심히 다녔다.
다행히 나처럼 결혼한 사람들이 몇 있어 좋은 친구가 되었고, 부부동반으로 갈 수 있어 부부관계 개선에 도움이 됐다.


6. 폭풍전야

86년도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연말이 되면 늘 현장은 뒤숭숭했다.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고과점수와 상여금과 진급에 쏠려있었고 확인되지 않는 얘기는 더 크게 부풀려진 채로 떠돌아 다녔다. 하지만 막상 연말이 되어 뚜껑을 열어보니 ‘신발 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상여금이 더 나올 것이라던 얘기는 당연히 빗나갔고, 차등지급도 여전했다.

뭐 떼고 뭐 뗀 얄팍한 기본금 300%를 받은 사람들과 기본보다 많은 350%의 상여금을 받은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표정관리하기 바빴다. 자기도 기분 무척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치미 떼던 동료를 탓할 수는 없었다. 어디 많이 받은 것이 그 사람 탓인가?
어쩌다 많이 받은 사람을 죄인 취급하니, 그 사람들은 동료 앞에서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없었고 숨조차 맘대로 쉴 수 없었다.

250%~150%를 상여금으로 받은 사람들은 맥 풀린 표정이 역력했지만 체념하는 듯 했다. ‘한 푼도 못 받은 사람도 있는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이쪽저쪽 눈치 보기 바빴다.
하지만 상여금 한 푼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뭐빠지게 일했는데 이럴 수 있나하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팀 반장을 찾아갔다. 팀 반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가 없었다.
분풀이로 사무실 유리창이 부서지고 멱살잡이가 벌어졌다.
아이가 다행히 요번에는 공부를 잘해 이번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려나 했더니, 아비의 고과 때문에 못 받으니, 참 허탈한 일이었다. 죽을 맛이었다.

속절없이 87년 새해는 밝아왔다.
그 당시에는 신정휴가를 3일 쉬던 시절이었다.
보통 신정휴가가 끝나면 연말에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대충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었다. 휴가를 마친 사람들이 돌아온 공장은 밀린 공기에 쫓겨서 정신없이 돌아갔다. 불과 며칠 전인 연말에, 고과와 성과금에 퉁퉁 달았던 일이 마치 십년이나 지난 일처럼 아득해져 다들 묵묵히 일을 했다.
화를 삭이기 위해 일에 열중하는 것이 훨씬 나았는지 모른다. 공장은 팽팽 돌아갔고 현장 탈의실에는 다시 공허한 헛 웃음소리만 크게 들렸다.

망각이란 때로는 어찌 보면 사람들의 건강에 꼭 필요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속 빠지고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삭히지 못하면 아마 스트레스에 몇 년 못 살고 자빠질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엉터리 고과를 받았거나 진급에 누락되어 펄펄뛰던 사람도 3일간의 휴가기간에 술로 화를 가라앉히고 왔고, 체념한 채 멍하니 일만 하였다.
영악한 자본가들은 이것조차 감안해 연말에 맞추어 집행했을 것이다.
장사치 저울에 속고 눈금에 속듯이 현장노동자들도 그것을 뻔히 알고 속아 넘어 갔다.

그런데 87년은 달랐다.
이상한 얘기가 들려왔다. 현대엔진에서 상여금 차등 철폐를 주장하면서 노동자들이 축구시합을 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노사협의회 위원들이 나서서 회사와 담판을 벌였다는 얘기였는데, 결과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중전기 쪽에서도 이상한 홍보물이 나돌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현장에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얘기에 분위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죽은 도시 같던 현장에 생기가 넘쳐났다.
자연스럽게 중공업 노사협의회는 뭐하는 놈이냐는 얘기도 서슴잖게 나오고 있었다. 이 큰 회사에 노동조합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거품을 물고 얘기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사실 나는 현대중공업(주)에 노동조합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해왔다.
나는 서울에서 조그만 보세공장 여러 곳을 다녔는데 노동조합이 대부분 조직되어 있었다.
물론 엉터리 같은 노동조합이 있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파업도 불사하는 힘 있는 노동조합도 많이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치하였지만 당당하게 파업을 일으켰고 요구조건을 따내기 위해 농성을 마다않는 여성노동자들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봤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던 어린 여공들이 똘똘 뭉쳐 단체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단한 여성들이라며 놀랐던 기억도 새롭다.
평상시에 미싱사들의 뒷치닥거리에 쩔쩔매던 여공들이, 조장들의 고함소리에도 움츠러들었던 여공이 파업을 할 때는 마치 딴사람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섬유산업의 특성상 여성노동자들이 공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9 : 1 정도나 되었을까? 저속한 표현이지만 남자들은 꽃밭에 파묻혀 일을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 만큼 남자들의 역할도 작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노조 일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가까운 친구는 이른바 구사대 역할을 할 정도였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굿이나 보고 떡만 먹는 즐거운 구경꾼노릇을 했다고 할까?
지나서 생각하니 참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하는 자책의 마음이 들었지만
그 당시 내 솔직한 마음은 ‘내가 꼭 할 필요가 있을까?’였고, 또한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했던 무지의 세월이었다.

M·T

그런데 현대중공업(주)에 노동조합이 없고 노사협의회만 있는 것이 이상했다. 이 큰 회사에, 국내에서 손꼽는 대기업 현대에 노동조합이 없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이 회사를 오래 다니고, 똑똑한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을 터인데 노동조합이 없다니,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조차 없다니 답답했다.
노사협의회가 뭐하는 것인지, 어떤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떻게 해야 노사협의회위원이 될 수 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하는 짓을 보면 울화통만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나조차도 방법이 없었다.
막연히 누군가가 노동조합을 만들지 않겠냐는 희망으로 위로하는 것으로 나를 달랬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앞장서겠지 하면서….

난생처음 M·T를 갈 기회가 생겼다.
내가 다니던 Y·M·C·A에서 새해가 되면 신입회원과 기존 회원들이 모여 단합을 다지는 행사를 갖는다.
다른 해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87년에는 경주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연합수련회’를 한다고 해서 참여하였다.
산에 가더라도 혼자 쏘다니고 어디 특별하게 속한 적이 없는 탓인지, 요델 클럽 회원을 제외하고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아내와 함께 갔는데 내가 속한 요델 클럽, 산악회, 독서클럽, 합창단 등 여러 클럽이 함께 모여 행사도 하고, 강의도 듣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100여명 이상이 참석한 수련회는 내가 상상한 이상이었다.

각자가 다니는 회사도 다르고 성별도 달랐지만 같은 Y·M·C·A회원이라는 동질성과 젊은이라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쉽게 가까워졌다.
서로 겨우 얼굴만 익힌 상태였는데 열띤 강의 탓이었는지, 강의가 끝난 후 즉석 토론회가 열렸다. 당시 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고, 현실에 관한 얘기도 많이 나왔는데, 역시나 독서회 사람들의 생각이 돋보인 토론회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중심이 된 독서회였는데, 죄송한 표현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유치한 수준을 넘지 못했던 토론회였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암담하던 현실을 탈출할 희망을 발견했다고 할까?
소중한 첫 M·T였다.
현실 문제를 나같이 비슷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울산에 돌아가 다시 만나서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세상은 여전히 빈틈없이 돌아갔다.
87년분 임금인상액을 노사협의회와 회사가 합의를 했고, 3월1일부로 적용되었다.
내 월급은, 아니 시급은 33원 올랐다.
솔직히 서로 속내를 털어 놓지 않아 누가 얼마가 올랐는지는 본인 외에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충 시급 27원, 30원, 33원, 37원정도 오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노사협의회 이 쓰발 놈들, 잘 먹고 잘 살아라.” 더러워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했으니 빨리 돈 벌어 도망가야지 하는 마음만 자꾸 생겨났다.
주말마다 배낭 메고 산으로 내빼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7. 87 민주화운동

세상은 들끓고 있었다.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에게 불법으로 강제연행 되었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 끝에 숨지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박종철군의 죽음이, 부검에 참여했던 의사의 증언에 의해 고문으로 밝혀지는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87년 2월7일, ‘박종철 열사추모대회’가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다. 연이어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에서 크고 작은 집회가 열렸다.
다급한 전두환 독재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국면을 전환하려 노력했으나 오히려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울산에서 언제 첫 집회가 열렸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두 눈과 귀를 쫑긋 세우고 집회에 관한 소식을 들으려 했지만 울산에는 소식조차 없었다. 마침내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보다 늦은 시기에 성남동에서 첫 집회가 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망설이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썩어빠진 세상, 고문으로 사람 죽이는 독재정권, 쎄 빠지게 일해도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더러운 세상을 끝내는 것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두렵기는커녕 잠 한숨 제대로 못 자도 신이 났다. 기다리는 사람도, 같이 갈 사람도 없었지만 들뜬 마음으로 집회를 기다렸다.

난생 처음 가본 집회장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났다.
처음 본 젊은 학생이 핸드마이크를 이용해 불같은 말을 토해낸다.
‘독재정권 타도하자!’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저절로 신이 나서 손이 부르트도록 손뼉을 치고 구호를 따라했다.
집회장에서 훌라 쏭과 여러 가지 노래를 배웠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하던 훌라쏭,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임을 위한 행진곡’,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성남동 일대를 뛰어다녔다.
최루탄이 터지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밤늦도록 돌아다녔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도망을 다니다 붙잡힐 고비가 있었지만 한 번도 잡히지는 않았다.

또, 학생들이 가르쳐 준 요령 덕분에 최루탄과 지랄탄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학생들은 최루탄이 날아오면 재빨리 되던지거나 발로 차거나, 발로 비비라고 하면서 시범을 보였지만, 난 지랄 같은 냄새에 한 번도 그러진 못했다.
눈물이 쏙 빠지고 얼굴 전체가 화끈거려 한동안 꼼짝을 할 수 없는데, 겁 없이 뛰어 다니며 짱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는 젊은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참 대단했다.
특히 조그마한 체구의 여학생들의 활동은 더 더욱 돋보였다.
짱돌을 던지는 솜씨하며 화염병을 던지는 여학생들 때문에 집회장은 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이른바 ‘6·29선언’이 있을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회장에 참여했는데 막판에 몇 번 공업탑까지 행진을 했다.
한번은 공업탑 부근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바람에 쫓겨 다니다가 YMCA회원을 몇 명 만난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쫓기는 신세라는 것도 잊은 채 슈퍼에서 음료수로 건배하고 낄낄거리다 헤어졌다.
거의 모든 날의 집회 마무리는 울산 성당에서 했는데, 밖을 에워싼 경찰 때문에 새벽이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었고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회사에 갔다.

작은 거인 권용목

그즈음 회사는 겉보기에 평온했다.
공장은 팽팽 돌아갔고 노동자들은 세상일에 무관한 듯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일만 죽어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현대중공업은 아침 7시30분에 시작해서 오후 4시30분에 정규 8시간을 마치는 근무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난 날마다 오후 4시30분에 퇴근을 했다. 4시30분에 퇴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잔업 안하곤 먹고 살기 힘든 때라 4시30분 퇴근하는 사람이 여느 때보다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에서 알게 모르게 일찍 퇴근하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에도 난, 지금도 일하는 특수선생산부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었는데, 일이 잘 연결되지 않아서 지원근무를 하러 다닐 때였다. 나뿐만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이 날품팔이 마냥 ‘플랜트사업부’ ‘조선사업부’ 쪽으로 지원 나가서 일을 했다. 심지어는 주식회사가 다른 ‘현대엔진주식회사’에도 지원 가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분명히 주식회사가 다른데 파견을 보냈고, 우린 아무런 이의도 달지 못하고 지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말만 다른 주식회사였지 몽땅 ‘조선소’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짧게는 한 달, 심하면 6개월 정도 지원 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난 ‘현대엔진’ 쪽에 가서 일을 했다.
담당반장은 조그만 체구에 뿔테안경을 쓴 순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내가 4시30분에 퇴근한다고 하니 묻는다.
“어디 가는데 매일 4시30분에 나갑니까?”
“시내 집회 가려고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나를 어처구니없는 듯 멍하니 쳐다보던 그 반장이 나를 보며 말한다.
“위험하지 않아요? 회사에서는 4시30분에 퇴근시키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왔는데.”
“위험하긴요. 같이 갑시다. 가면 참 재미있습니다.”
했더니 허허 웃더니 그런다. 자기는 요즘 뭣 좀 배우고 있어서 시간이 없어 못가니 나중에 시간을 내서 만나자고 한다.

뭘 배우냐고 물으니 풍물을 배운단다.
덩덩덩더쿵 사물놀이를 배운다고 그런다.
재미쪼가리 하나 없는 풍물을 배운다고 재미있는 집회에 안 간다는 반장이 답답해 보였다. 하지만 어쩌랴 그건 그것이고 난 시내 집회에 갈 시간이 되어 나가야 하니, 얘기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그 일이 있은 후 일을 하다 보면 그 반장이 내게 와서 이것저것 묻는 때가 많아졌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순한 얼굴의 그를 보면서 전날에 있었던 무용담을 부풀려 말하면,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조심하세요.” 하면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뻐기고 싶은 마음에 “다음에 같이 갑시다.” 말하면 허허허 웃으면서 나중에 같이 가자면서 손 사레를 친다.

어느 날 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했는데 아침 조회 현장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지원을 간 탓에, 부장인지 과장인지 모르는 사람이 나서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탓에 더구나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귀를 세우고 들어보려 했지만 토막토막 들리는 얘기는 조직변경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누구를 어떻게 하고 누가 공구실을 맡고, 공구실 사람은 어느 반의 반장을 맡는다고 말하고 조회를 마친다고 하는 순간, 앞쪽에서 손을 번쩍 올라간다.
내가 지원 나가 일하는 반의 반장이다.
한마디만 하겠단다.
“오늘 있은 이 일, 당신들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하며 또박 또박 힘주어 말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런 취지로 얘기를 끝마쳤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기세등등하던 부장인지 과장인지 하는 사람도 별달리 대꾸도 못하고 당황하는 기세가 역력했다.
옆에 있던 관리자들이 아침조회를 이만 마친다고 말하며 돌아가 일하라고 해도, 사람들은 가지 않고 웅성거리고 있기만 할 뿐, 분위기는 이미 엉망이 되어버렸다.

내가 일해야 할 작업장 분위기는 더 엉망이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순한 얼굴을 한 반장을 직위해제하고 공구실에 있던 사람이 반장으로 온 모양이다.
86년 연말 상여금 문제로 ‘현대엔진주식회사’의 노사협의회가, 회사를 상대로 단체 행동을 했는데 그 노사협의회 위원 중 한명이, 그 반장이란다.
순하디 순한 얼굴을 한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또 사실 회사를 상대로 단체행동을 한 것이 그렇게 엄청난 일이란 것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 까짓 것, 단 한차례의 단체행동이 뭔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 어리석은 탓이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실패로 끝난 그 일을 잘한 짓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름이 권용목이라 했다.
반장직을 뺏기고도 그는 태연했다.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새로 온 반장은 반장역할을 하기는커녕 물에 기름 돌듯 겉돌고 여러 사람에게 따돌림마저 당하고 있었다.
잘린 반장은 찾아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다들 찾아와서는 뭔지 모르지만 숙덕거리고 등을 토닥거리고 돌아갔다.
권용목이란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뭔지 모를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졌다.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닌 절로 우러나오는 마음과 정겨운 눈으로 위로하던 그들에게선 사람냄새가 났다.
내가 일하던 현장에서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한 동료애와 인간미를 난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일했다.
며칠 후 난 지원근무가 끝나서 특수선생산부로 돌아갔다.
마지막 날 권용목이 내게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나중에 시간 내어 만나자 그런다.
나 또한 바라던 일이라 전화번호를 주머니 속 깊숙이 갈무리했다.


8. 들 불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들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학생들과 지식인이 중심되어 시작한 처절한 저항이, 먹고 사는 것에 골몰하며 애써 모른 체하던 국민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무모하리만큼 어리석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마침내 산을 이루고 강이 되어 넘실거리며 세상을 갈아엎고 있었다.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덮으며 도도히 흘러갔다. 수천의 광주시민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집권했던, 천년만년 갈 것 같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쉽사리 물러갈 놈들도 아니었다.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경찰을 동원해서 집회 예정지를 원천봉쇄하고 무차별 강경진압에 나섰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갈 때까지 간, 망나니는 저리가라 할 만큼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평화로운 집회에도 최루탄과 지랄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곤봉 세례와 발길질이 무차별로 퍼부어졌고 곳곳에서 끌려가는 사람이 셀 수 없으리 만큼 많아졌다.
그런다고 그만 둘 국민도 아니었다.
이대로 물러서면 민주화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언론자유가 물거품 되고, 되돌아올 피의 보복이 광주시민이 흘린 피의 수백곱절은 될 것이 뻔했다. 최루탄이 쏟아지면 골목으로 흩어졌다 다시모여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반격에 나섰다.
이미 군사독재정권의 지옥을 수십 년 경험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6월 10일 있은 범국민대회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동참 아래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에서, 부산 서면과 남포동, 광주 금남로에서, 울산 성남동에서 공업탑 로터리까지 사람들이 넘쳐났다.
아무 죄 없는 학생을 끌고 가 물 고문해 죽이고 성 고문하는 군사독재정권, 체육관에 거수기를 모아놓고 대통령을 뽑는, 체육관대통령을 더 이상 모시고 살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세상에 살고 싶었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아는 정치인을 뽑을 수 있는, 올바른 선거 제도를 국민들은 원했다. 썩은 세상을 갈아엎고 제대로 된 나라에서 살자고 하는 일에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분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불길은 점점 커져 들불처럼 번져갔다.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큰소리 한번 못 냈던, 세상일에 무관심하게 보였던 작은 규모의 읍 단위에도 독재타도의 함성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군사독재정권은 이미 발밑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또 다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연세대 학생이던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참변이 벌어졌다.
시위 진압의 원칙을 어긴 경찰관이 쏜 최루탄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피 흘리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간 이한열군이 끝내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바로 명동성당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농성이 시작되었고, 이날 이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5일간 지속된 명동성당 농성은 시위 열기를 지속시키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박종철군과 이한열군의 죽음 이후 이른바 ‘6·29선언’이 있을 때까지 ‘87년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덩달이와 6·29선언

물 만난 고기처럼 덩달아 바빠진 사람도 있었다.
역시 선수는 선수였다. 발 빠르게 변신하는 기술은 탁월했다.
하늘이 준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정치꾼은 아무도 없었다.
80년 광주시민학살이후 자의반 타의반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지나간 정치꾼과 ‘민정당 2중대 3중대’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개점휴업상태에 있던 정치꾼들이 호기를 놓칠 리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괜찮다는 평을 들은 거물 정치꾼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모여 작당하며 정치일선에 복귀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였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이후 재빠르게 ‘통일민주당’을 만든 정치꾼들은 재야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아직도 이분들에 대해서 꿈을 못 깬 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구세주처럼 떠받드는 사람이 많은 탓에, 다른 말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 역시 그랬다.
말 잘못하면 간첩 중에 상 간첩이 되는 분위기라 별종이 아닌 다음에야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이분들의 관심도 사회민주화와 대통령직선제, 언론자유 보장 등을 비롯한 정치개혁에 있다고 찰떡같이 믿은,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의 정치복귀를 환영했다.
단지 흠이라면 무덤에나 들어가 있어야 할, 나머지 한 ‘김씨’만 빼고 사회민주화를 막 이룬 것처럼 반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세상을 움직인 것은 국민이었지만 국민을 상대해 줄 군사독재정권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혀 준비도 안 된, 선수도 아닌, 다스릴 대상을 상대하기는, 그런 생각조차 하기도 싫었으리라.
버들은 버들끼리 부딪쳐 소리 내고,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탓인지 정치꾼들만 살판이 났고 주가가 올라갔다.
죽 써서 뭐 준 꼴이 되었지만 그것도 하는 수 없었다.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갔지만 국민들은 정치현장에서 늘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피 터지는 싸움은 국민이 하고, 폼 나는 협상과 떡고물은 그들 차지였다.

통일민주당은 6·10대회 관련 구속자의 석방, 김대중 연금 해제, 민주정의당의 일방적인 정치일정 백지화 등을 전제조건으로 여·야 영수의 실질 대화를 요구했다.
미국 국무장관 슐츠도 17일 여·야 대화 재개와 시위 중단을 요구했다.
6월 18일, 민주정의당 노태우는 김영삼과 회담을 추진하겠다고 하면서도, 4·13호헌조치를 유지하는 선에서 개헌논의 재개를 허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통일민주당은 20일, 4·13호헌조치의 철회와 영수회담 개최를 재 촉구했고, 같은 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4·13호헌조치의 철회, 양심수 석방, 집회·시위·언론의 자유 보장, 최루탄 사용 중지 등 4개항을 정부에 촉구했다.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청와대회담이 이루어졌으나 4·13호헌조치의 철회만이 확인되었을 뿐, 김영삼이 요구한 국민투표와 직선제 개헌이 수용되지 않아 결렬되었다. 26일,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4·13호헌조치 철회와 개헌논의 재개라는 부분 양보안을 제시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통일민주당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26일 대회는 이제까지의 범국민 저항운동을 총결산하는 대규모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시작해 ‘고문추방 민주화대행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는데, 26일 대회에 가장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곳곳에서 시위를 저지하던 경찰력의 한계가 드러났다.
시위대에 포위된 경찰병력이 곳곳에서 무장해제를 당할 만큼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었고, 달아날 곳이 막힌 경찰병력은 무기를 버리고 내빼기 바빴다.
정부는 또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국가질서가 혼란에 빠졌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로 내정되어 있던 노태우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대통령직선제 수용, 대통령선거법의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 관련 양심수 석방,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 등 8개항을 약속했다.
노태우의 결단으로 6·29선언이 있었다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어제까지도 우리를 폭력집단이라 부르며 폭력시위를 멈추라던 그 입으로 매스컴은 나불댄다.

노태우 한마디에 자축하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서로서로가 모두 수고했다고 등 두드리며 좋아한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뤘다고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얼싸안으며 좋아하고 막걸리를 내고 생맥주를 내고, 갈비탕을 공짜로 돌리는 잔치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난 허탈했다. 내 처지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숨 가쁘게 진행되어온 민주화를 향했던 열망이, 최루탄에 곤봉에 두드려 맞으며 어깨동무하던 함께했던 순간이, 겨우 이것 때문이었나?

매일같이 집회가 열리던 성남동 집회장에 출근하듯 퇴근길에 들렀는데 무심히 지나는 사람만 있을 뿐, 마이크 소리도 선동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최루탄이 날아들고 짱돌이 날아가고, 꽃병이 날고 구호소리 활기차던 성남동거리는 너무나 깨끗했다.
두 시간 동안 거리를 노려보며 기다렸지만 선무 방송 차만 한번 지나갔을 뿐,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난 모든 것이 씁쓰름했다. 겨우 이것뿐이란 말인가?
개 코나 달라진 것이 없는데... (다음 호에 계속)

2005-09-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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