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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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 과정과 평가1
 투쟁평가

현장에서 미래를  제112호
이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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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투쟁평가
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의 과정 및 평가 1
우리는 수없이 투쟁하여 왔고 지금도 수많은 투쟁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현장은 힘이 빠져 있다고 합니다. 현장 투쟁력은 매말라 있고 조합원들은 ‘지치고 피로하다’고 합니다. ‘투쟁만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간부들이 세를 얻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 현장에서는,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듯, 몇 년 전부터 ‘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을 만큼 노동자들에게 고역의 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뼈 빠지게 일하고도 해고당하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 죄로 병들어 일터에서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현장에서는 끊이지 않고 투쟁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투쟁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임금노동자의 운명이라고 할 때, <투쟁 평가>는 노동자 계급이 내일을 열어가는 데서 결코 빼놓고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크고 작은 투쟁들에 대하여 <평가>를 조직합시다. 그럼으로써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시계바늘을 되돌려 세울 힘을 만들어 나갑시다. - 편집자 주


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의 과정 및 평가 1

이철의 /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쟁취 · 철도매점 파업투쟁 승리, 철도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조직국장

이 평가서는 공대위나 서울지방본부에서 검토하거나 총괄한 평가서가 아님을 밝힙니다. 공대위는 평가회 때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여과 없이 자료집에 수록하기로 하였으며, 이 평가서도 그 방침에 따라 작성한 것입니다. 평가와 관련한 다른 의견들은 각 단위 평가서와 자료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Ⅰ. 상황 및 조건

1. 해고통보와 그 배경

1) 여승무원 31명 계약해지 통보
2004.3.3 철도청은 서울열차 새마을호 여승무원 20명을 포함, 총 31명에게 해고(계약해지) 통보를 하였다. 해고 예정일이 04년 12월31일이었으므로 10개월 전에 통보한 셈이다. 해고통보를 당한 여승무원을 소속별로 보면 서울열차 20명, 부산열차 8명, 영주열차 1명, 순천열차 1명 등이다.

철도청은 04.03.12 채용전문 대행업체인 스카우트사를 통해 계약직 여승무원 51명을 새로 선발했다. 즉 새마을호 여승무원에 대하여 계약해지 통보를 한 뒤에 곧바로 신규자들을 선발한 셈이다. 31명을 집단으로 계약해지한 배경에 대하여 철도청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04.3월에 실시한 새마을호 여승무원의 공개채용은 당시의 기존 정규직 여승무원들의 지상근무 전환배치에 대비하고, 계약직 여승무원의 결원에 대비하여 인력수급차원에서 우수자원을 확보하고자 인력채용 대행 전문업체에 위탁시행하였던 것입니다.” 철도청 공문 계획조정과 4640(2004. 11. 24)에 기록된 내용이며 철도청 서울지역본부 및 철도노동조합으로 발송한 것이다.
또 “전항의 공개채용을 시행함에 있어 당시의 기존 계약직 여승무원들에게도 응시하도록 기회를 주어 전원이 응시하였던 바, 일부(1명)를 제외하고 36명이 불합격되었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철도청의 해명은 사실과 다르다. 해고 통보 뒤에 새로 채용한 것이므로 여승무원들을 물갈이하고자 한 것이다. 철도청이 여승무원들을 집단해고하고 새로 선발한 것은 “2년 이상 고용 시 직접고용으로 간주하는 노동관계법과 정부정책을 미리 피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 투쟁계획’(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2004.11.19) 1쪽.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 여승무원들 가운데 합격한 사람은 1명뿐이었다. 즉 해고 대상자들에게는 요식행위로 치러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고통보를 한 뒤에 선발절차를 밟은 것도 이 같은 판단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2) 계약직 여승무원 채용경과
본래 여승무원들은 전원 정규직 신분으로 충당하였다. 02년 2.25파업투쟁 뒤 열차사무소에 결원이 발생하였고 철도청은 철도전문대학 사비 졸업생들을 계약직으로 충원하였다. 이후 일반인들을 계약직으로 충원하였고 이후 결원은 모두 계약직으로 충원하게 되었다. 결국 결원이 생길 때마다 계약직으로 충원하여 전원이 계약직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표1> 사무소별 계약직 여승무원 채용 시기 및 인원(첨부파일 참조)
<표2> 사무소별 여승무원 인원 현황(첨부파일 참조)

계약직의 채용은 열차사무소별로 소장이 선발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철도직원들의 연고자들이 많았으며 노동조합에서도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다. 즉 철도노조 운수분과 지부장들이 “계약직 노동자들도 공개채용으로 선발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2. 해고통보는 단체협약 및 약속 위반이었다.

1) 철도 내 비정규직 집단해고 처음 사례
당시 서울지방본부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해고가 “철도 내 비정규직 집단해고 최초 사례”로 규정하였다. 철도청의 계약해지 통보는 계약기간을 10여 개월이나 남겨놓은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비인간적인 처사이다.

2) 단체협약 및 약속위반 내용
서울지방본부는 이번 집단계약해지가 03.4.20 단체협약 위반사항이고, 철도청장이 현업순회 간담회에서 약속한 사항을 위반하였음을 지적했다. 이 사태는 노동조합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판단하였다.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계획 2쪽 (2004.11.19 서울지방본부)

*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은 기관사 1인 승무를 시행하지 않음에 따른 인력 충원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03.4.20. 철도 단체협약)


<2004년 5월 철도청장이 현업 직원에게 구두약속사항을 정리한 철도청 문서>(계획조정과-2226호 04.5.14)
5. 새마을호 여승무원에 대한 고용안정대책 마련(운영팀)
☞ 본인의 희망 없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강제 퇴직은 없으며, 정부의 비정규직차별 개선 방침에 따라 고용안정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음
6. 12.31일자로 계약종료되는 새마을호 여승무원을 계약종료 후 역무분야전환, 계속 운용(운영팀)
☞ 영업분야 인력운용현황 및 예산운용 범위 내에서 전향적으로 검토하겠음(12월중)


3) 서울지방본부는 이 투쟁의 성패가 앞으로 비정규직 사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하였다.


3. 투쟁목표 수립과 결과

1) 투쟁목표 수립

서울지방본부는 투쟁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가.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의 전원 정규직화 쟁취
나. 철도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례를 창출
다. 투쟁과정에서 철도 내 비정규직 조직화
라. 이를 통한 철도 민주노조 운동 강화

<평가> 이 같은 투쟁목표의 수립은 타당하였다고 판단한다. 서울지방본부에서 수립한 투쟁목표나 방침은 공대위에서 그대로 인정하였으므로 공대위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다만 이런 투쟁목표들은 철도 내에 한정된 것이었으므로 공대위가 좀 더 적극적으로 판단하였다면 철도 밖의 비정규직 운동과 관련한 투쟁목표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계약직 여승무원의 전원 정규직화는 쟁취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1차 투쟁이 한 매듭을 지은 지금도 이 투쟁과제는 남아 있으며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철도노조는 2005년 정기단체협약에서 “철도공사는 새마을호 여승무원에 대하여 4.20합의정신에 따라 그 직을 정규직으로 원상회복한다.”는 요구안을 제출하였다.

2) 투쟁결과

요구안과 관련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투쟁결과를 끌어내었다.

(1)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의 정규직화와 관련하여
계약 해지된 새마을호 여승무원 31명 가운데 25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2명은 계약해지 통보를 받지는 않았으나 4.20합의 당시 근무했던 계약직 역무원이다.

우리 공사에서는 2003.4.20 정기단체교섭 시 부대합의 한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 전환에 대하여 그동안 귀 조합과 수차례 협의한 바와 같이 합의당시 근무 중이던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현재22명, 퇴직자 제외)을 2005.6월말까지 채용절차를 이행하고 결원발생시 순차적으로 임용하고자 하오니...... - 여객사업본부 계획조정처 2005.6.2


이 공문은 본부조합에 일방적으로 통보된 것이다. 본부조합은 이에 대하여 “인정할 수 없으며 여승무원 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새마을 여승무원 관련 합의 사항 이행 촉구>
한국철도공사는 일방적으로 계약직화 된 현재의 새마을호 여승무원직을 정규직으로 다시금 환원하고 정원을 배정함과 동시에, 정규직원으로 채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사의 사정에 의해 일방적으로 계약직원으로 채용되어 현재 근무하고 있는 모든 계약직 여승무원을 정규직 여승무원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함. - 위 공문에 대한 철도노조 공문


철도공사는 6월말까지 정규직화 계획을 이행하겠다고 밝혔으나 2005.8.1에 이르러서야 22명을 전원 운수직(역무원 및 수송원)으로 발령했다. 뿐만 아니라 “4.20합의는 이것으로 종결되었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철도공사 김해수 일반철도 사업본부장은 05.5.10 철도노조측과 가진 교섭에서 이같이 밝히고 노동조합에서 반대하더라도 22명에 대한 정규직화 계획을 이행할 것“이라는 문서를 조합에 발송했다.
철도공사는 이와 함께 “4.20합의당시 근무했던 22명을 정규직화하고, 당시 근무하지 않았던 계약해지 통보자 4명에 대하여는 단체협약에서 다루도록 하며, 정규직화 투쟁과정에서 일어났던 쌍방 간의 법적분쟁을 풀자.”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05.5.4 철도공사 대전지역본부 청사에서 가진 실무교섭에서 권순직 계획조정처장등이 주장한 내용이다.
그러나 서울지방본부 및 공대위는 이 같은 내용의 제안을 거부하고 여승무원직 및 근무 중인 여승무원들의 정규직화를 일관되게 요구하였다. 따라서 공사측이 일방적으로 27명에 대한 정규직화를 시행하였으나 노동조합측의 요구 및 정규직화 투쟁은 살아있는 것이다.

(2) 철도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례를 창출

4.20합의사항을 이행하라는 요구였지만 사실상 4.20당시 합의한 내용가운데 중요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4,400명이 넘는 결원 및 신규사업에 필요한 인력충원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으며 비정규직과 관련한 내용 가운데서도 “청과 조합은 정부의 비정규직 차별철폐정책에 입각하여 노사 공동으로 비정규직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최소화를 위해 공동 노력한다.” 2002년 철도노조 단체협약서 제 22조(2003.4.20합의)
고 하였으나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계약직 새마을호 여승무원 25명 및 4.20당시 여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역무계약직 노동자 2명의 정규직화는 투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3) 투쟁과정에서 철도 내 비정규직 조직화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성장한다. 투쟁 주체인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은 초기에는 소극적이었으나 첫 집회 뒤 활발하게 집회 및 투쟁사업에 결합하였다. 3, 4명은 주도성을 발휘하며 여승무원들을 조직하며 주도하였다.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던 여승무원들은 투쟁과정에서 모두 노동조합에 가입하였으며, 계약해지 통보를 받지 않았던 서울 열차사무소 소속의 여승무원들도 대부분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서울지방본부는 여승무원들에 대한 노동조합 가입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계약해지 통보되었던 여승무원 가운데 서울열차 사무소 소속 20명이 전원 노동조합에 가입하였으며 계약해지되지 않았던 여승무원 가운데서도 22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부산이나 영주, 순천지역은 가입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어 가입하지 못하였다. 이같은 지역은 투쟁기간 내내 새마을호 여승무원의 해고반대 및 정규직화 투쟁에 무관심하거나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42명 가운데 17명은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현재는 25명이 계약직 조합원으로 남아있다.

<표3> 여승무원 노동조합 가입현황 (2005.8월 현재)(첨부파일 참조)

여승무원들 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사업도 진행되었다. 서울지방본부는 비정규직 가입선전물을 작성하여 현장순회 시 배포하였으며 철도 비정규직 모임도 소식지 ‘권리 찾기’를 통해 여승무원 및 철도매점 투쟁을 알려 나갔다. 여승무원들 외에 노동조합에 가입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거의 없으나 분위기는 많이 무르익었다는 평가이다.
새마을호 여승무원의 정규직화 투쟁은 숱한 오해와 악선동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철도노조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는 투쟁을 비난하는 글이 연일 게재되었다. 초기에는 노동조합 현장간부들이나 본부조합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투쟁은 점차 고립되었다. 투쟁 당사자, 서울지방본부 집행부, 소수의 활동가들, 공대위 소속 활동가 및 학생들, 연대투쟁대오, 철도매점 노동자들이 투쟁의 주력이었다.

(4) 투쟁을 통한 철도 민주노조 운동 강화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과 철도매점 투쟁이 가져온 가장 큰 성과는 철도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조직과 투쟁 사업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 안게 한 데에 있다. 초기에 무관심하거나 비협조적이었던 본부조합은 점차 태도를 달리하여 04.12.28 소집된 임시대의원 대회에서 “철도 내에서 홍익매점,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이 벌어졌으나, 일련의 혼란이 조정되면서 해당투쟁의 지지·엄호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음.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비정규직 사업에 대한 철도노동조합의 중장기적 방침의 부재에 따른 제한성에 기인한 것” 철도노조 12.28 임시대의원대회 자료집 ‘사업계획’ 가운데 인용.
이라고 진단하고, 규약 및 규정의 개정을 통해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가입 및 노조활동에 대하여 제도적으로 보완할 것을 결의했다. 05.5.30 소집한 정기대의원 대회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한편 예산안을 포함하여 비정규직 사업을 결의하였으며 중앙위원회 등 회의기관에서 “희생자 보상규정” 개정 등을 통해 제도적으로 보완했다.
05년 정기단체협약 갱신을 앞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설문조사 작업을 벌였으며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 및 “단체협약 동일적용”의 원칙에 따라 비정규직 관련 단체협약 요구안을 확정했다. 또한 05년 하반기 안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대거 가입하도록 하는 사업계획안을 확정하기도 하였다.
이런 태도변화는 철도매점 및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이 가져온 성과이며 철도 민주노조 운동의 질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부조합은 04.12.3 단체협약에서 차별을 인정하는 내용의 합의안 “직접 채용한 비정규직의 최저임금은 공사 6급 1호봉 통상임금 60%이상이 되도록 한다. 이 기준은 최저기준이므로 이 기준을 이하로 저하시켜선 안된다.(2004 철도단체협약 제 162조. 2004 철도특별단체 협약서 118쪽)
을 작성하던 데에서 차별철폐의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현장 간부들의 비정규직 사업에 대한 인식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서 철도매점 파업투쟁 시 투쟁기금 지원을 위한 1,000원 모금 및 철도매점 이틀주점에서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1,000원 모금 및 호프에 참여하였다. 파업기간 중 철도매점본부에 후원한 기금 13,790,000원 중 철해투를 비롯 서지본, 현장조직 등 정규직 단위에서 모금한 액수가 970만원으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괄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1,000원 모금이나 본부조합 중집의 모금액수는 제외한 것이다.



4. 투쟁주체의 조건에 대한 인식

투쟁을 결의할 무렵 서울지방본부 및 공대위는 투쟁주체의 조건을 이렇게 보고 있었다.

1) 당사자(서울열차 여승무원)

- 상당수가 철도직원의 추천을 받아 취업함. 직접 고용계약직의 이런 조건은 철도 내 다른 직종에도 비슷한 것으로 드러났다. 05년 정기단체협약을 앞두고 본부조합 비정규국에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43%가 철도공사 직원의 소개에 의해 취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철도 내 직접고용 계약직 노동자 3,000여명가운데 670여명이 응답한 것이므로 실제 비율은 훨씬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 아직 계약연장, 혹은 계약직 역무원으로 전환 희망을 가지고 있음. 따라서 재계약에 영향을 미칠까봐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 조합에 대하여 일정한 불신이 있음(위원장 면담 후 해결전망을 보이지 못하였다는 점). 철도노조 김영훈 위원장은 04.4월경 권오석 서열 지부장과 함께 여승무원들을 면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영훈 위원장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좋겠다. 스스로 단결해서 고용 및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하자.”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2003.4.20합의에 대한 기대와 노동조합의 해결책을 기대했던 여승무원들은 실망하였다고 한다.

- 노동자 의식이 부족한 상태(한 번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례가 없음).
- 따라서 지부, 지방본부, 본부조합에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상태.
- 여승무원회가 있으나 행동에 소극적임(노조에 대한 불신, 가족 관련, 자포자기).

<평가> 처음에 이처럼 판단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여승무원들은 서울열차 지부에서 투쟁을 결의하고 서울지방본부에서 엄호할 의사를 분명히 하자 모두 투쟁에 참여했다. 취업과정에서 철도직원의 추천을 받은 것도, 두려움이나 노동조합에 대한 불신도 생존권의 위기 앞에서는 장해물이 되지 않았다. 불신은 서로간의 접촉을 통해 해소된다. 투쟁은 처음에 불씨를 만들었던 서열지부가 계기를 만들었고 서울지방본부 및 공대위가 받치며 급격히 타올랐다. 노동조합에 대한 불신은 계속되는 면담으로 일거에 해결되었다.

2) 서울열차 외 여승무원

- 집단해고(8명)가 발생한 부산열차를 포함하여 다른 열차사무소 여승무원의 조직도 차순위 과제임.

<평가> 부산열차는 초기에 집회를 여는 등 투쟁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들의 투쟁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했던 지부, 지방본부의 영향으로 급격히 위축되었다. 지부, 지방본부의 태도에 따라 냉소적이었던 동료들의 태도가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한다. 개별적으로 노동하는 이들을 각개격파 하는 관리자들의 탄압 앞에 8명의 단결만으로 돌파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3) 서울지방본부

- 서울지방본부는 적극 대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서울 열차지부가 04.11.16 대의원·상집 연석회의에서 “서열 여승무원 해고반대투쟁”을 결의하자 11.19 지방본부 집행부회의에서 이 투쟁에 전면결합하기로 결의했다. 지방본부는 서울열차지부를 지도하면서 투쟁을 배치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또 비정규 관련단체 등 노동단체, 여성단체를 포함한 시민단체와의 연대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다. 집행부는 12.5 파업예정일을 앞두고 본부조합이 특별단체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행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특단협 전에 여승무원 해고반대 투쟁을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공대위 결성 및 투쟁일정을 가능한대로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4) 본부조합

본부조합은 특별단체교섭을 준비하는 도중이었다. 따라서 서지본은 본부조합이 투쟁을 지지엄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투쟁이 본격화하고 현안으로 부각되면 본부조합이 철도청과 교섭에 나서야 할 것을 인식하였다.


Ⅱ. 투쟁경과 개괄

1. 투쟁을 결의하기 전까지

투쟁은 급격하게 타올랐다. 11월 16일 서울열차 지부가 대의원·상집 연석회의를 통해 투쟁을 결의하고 25일에는 서울지방본부 및 공대위 주최의 첫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투쟁이 있기 전까지 8개월 동안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여승무원들은 지루하고 불안한 모색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여승무원들은 03.4.20합의에 따라 정규직화에 대한 꿈에 부풀기도 하였다. 계약해지 통보 직후 철도청의 방침에 따라 스카웃사에서 공개채용 하는 데에 응시하여 1명 외 전원 불합격하는 납득하지 못할 결과에 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승무원들은 울분을 품은 채 해고날짜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결과 발표 다음날 더 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루 만에 집으로 도착한 해고통지서였다. 이것은 분명 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정해진 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바로 다음날 전해질 수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속엔 절망감과 동시에 배신감만 가득할 뿐이었다.” - 새마을호 여승무원 서정은의 글(월간 ‘작은책’ 05.1월호)

<계약해지 여승무원 투쟁 전까지 경과>
03. 4.20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와 관련한 단체협약 체결
03. 6.28 “4.20합의이행을 위한 철도노조 총파업”
03. 7. 1 “선복귀, 후협상” 방침 아래 철도노조 현업복귀(합의사항 대부분 불이행)
04. 3. 3 새마을호 여승무원 31명 계약해지 통보(12월 31일자)
04. 3.12 신규 여승무원 채용선발(채용전문 대행업체 ‘스카우트’사-여승무원 1명 합격)
04. 4 서열 여승무원들 철도노조 김영훈 위원장 면담
04. 5.14 철도청 공문으로 “12.31 계약종료되는 여승무원 역무분야 전환방침” 통보


2. 서울열차지부 및 서울지방본부 투쟁결의에서 공대위 결성까지

04.11.16 서울열차 지부(지부장 권오석)가 대의원·상집 연석회의에서 ‘서울 여승무원 해고반대 투쟁’을 결의했다. 이어 11월 18일에는 서울열차 사무소 건물의 지부사무실 창문에 “철도청은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약속 이행하라!” “새마을호 여승무원 일방적 계약해지 철회하라!”는 2종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또한 서울열차 지부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라는 제하의 호소문을 발표하고 정규직 조합원들의 투쟁 동참을 호소했다.
이날 서울지방본부는 이찬복 부본부장을 팀장으로 하고 교육 1국장(최명호), 교육 2국장(이철의), 선전국장(이종규)을 성원으로 하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 대책팀’을 발족하고 여승무원 투쟁을 전담키로 결정했다. 서울 지방본부가 이같이 대책팀을 구성한 이유는 철도노조 특별단체교섭 투쟁에서 파업예정일로 잡고 있는 12월 5일이 임박하여 조합원을 총력으로 조직할 수밖에 없는 조건 때문이었다.

<새마을호 여승무원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서울열차의 한 구성원으로서 철도노동자의 길을 함께 걸어 왔습니다. 이들은 힘든 승무생활과 비정규직이란 이유만으로 받지 않아도 될 차별대우를 참고 견디며 그 누구보다도 더욱 열심히 일하며 지금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던 우리의 동료들입니다.

12월 31일 계약만료 통보서를 받고 절망의 늪에 빠져 2개월 후를 걱정하는 동료들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저임금과 해고의 위험에 노출된 동료들의 정규직화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노동자에게 노동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철도청의 행태를 바라보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우리 철도노동자들을 한낱 이윤을 뽑기 위한 기계나 부품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철도청에 여승무원들의 무권리 상태가 방치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되어 서울열차승무지부 쟁의대책위는 지난 16일 확대간부 회의를 통해 지부차원의 총력지원을 결정하였습니다.

서울열차승무지부 쟁의대책위는 새마을호 여승무원의 일방적 계약해지와 관련하여 철도 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철도청과 본조합에 쟁점이 되도록 할 것이며 철도 내 비정규직 철도노동자의 문제해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것입니다.

2004년 11월 18일

서울열차승무지부 쟁의대책위원회


서울지방본부도 11월 19일 집행부 회의를 열고 서울열차 계약직 여승무원 해고반대투쟁에 전면 결합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투쟁결의와 함께 제출된 투쟁계획서는 나중에 공동대책위원회에 제출된 투쟁계획서와 대동소이했다.(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계획 2004. 11.19 참조)

11월 20일 서울열차 지부는 행동지침 1호로 “22일 09:00를 기해 ‘새마을호 여승무원 일방적 계약해지 철회하라!’는 내용의 리본을 패용할 것”을 발령했다. 22일부터 시작한 리본 달기는 여승무원, 차장, 여객전무 등 서울열차 승무지부 전 조합원의 광범위한 참여 속에서 진행되었다. 지부가 앞장서서 호소한 것이 효과가 있었고 무엇보다 해고과정에 대한 반감과 여승무원들에 대한 동료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철도노조 홈페이지에는 서울열차 지부의 투쟁을 지지하는 글이 속속 올라왔으며 “여승무원들 힘내라.”는 격려 글이 뒤를 이었다.

서울본부는 11월 20일 성명을 발표하여 투쟁의지를 분명히 했다. 성명서는 “오래전에 해고예고가 있었고, 당사자들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만나 문제해결을 건의했던 사실에 비추어 대응이 늦었던 점을 반성하고, 노사합의위반이자 약속위반인 처사에 대하여 규탄”하였다. 성명은 또 “서울지방본부는 양심적인 노동, 시민,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여승무원에 대한 부당해고를 철회하고, 나아가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철폐와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할 것”을 밝혔다. 뒤에 묶은 04.11.19 서울지방본부 성명서 참조할 것.


한편 서울 지방본부는 11월 19일부터 서울열차 여승무원들과 차례로 간담회를 열어 투쟁의지를 북돋웠다. 간담회는 11월 22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후에도 여승무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투쟁의지를 높이는 중요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간담회에는 불안정 노동철폐연대, 노동자 정치신문, 미래를 여는 노동자연대(준), 사회진보연대, 민주노총 평등노조 등 공대위 결합단체들이 참여하여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
한편 서울지방본부는 노동-사회단체들에게 서울지방본부의 투쟁방침을 알리고 제안서를 보내어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을 호소했다. 11월 22일 마침내 서울지방본부 회의실에서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 쟁취 및 철도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창립회의를 가졌다. 이날 공대위는 최명호 교육국장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조직담당 이철의, 선전담당 이종규, 교육담당에 노동자 정치신문과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으로 역할분담을 하였다. 공대위에 참여한 단위는 다음과 같다.

<공동대책위원회 초기 참가단체 현황>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철도해고자 원직복직 투쟁위원회
공공부문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
민주노총 서울본부 평등노동조합
노동자 정치신문(노동자 정치협회)
노동자의 힘
미래를 여는 노동자연대(준)
전국 불안정노동 철폐연대
사회진보연대
민주노총 공공연맹
서울대 사회대
전국학생연대회의
노동해방학생연대

<11월 22일 투쟁 상황일지>
- 공대위 결성회의
- PC 7개 제작
- 여승무원 면담
- 조합 운수국장 면담: 운수국장 “나는 이 투쟁에 결합하지 않겠다.”
- 집회 포스터 제작
- 스티커 발주(1만개)
- 시민선전물 발주(5만부)
- 대자보 발주(500부) -동광
- 서명운동 취지문 및 양식 준비

11월 23일에는 서울지방본부에서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속보’ 1호를 발행하였다. 투쟁속보에는 여승무원들이 투쟁을 시작했음을 알리고, 공대위 결성, 25일 집회예정 등이 실려 있다.
새마을호 승무원 유통기한은 12월 31일

4월에 해고 통지서라는 걸 받고......... 교육받을 땐 기다려라 될 것이다. 기다렸습니다.
정규직 해주었습니다. 철도대 사비생들.. 그들을 보내놓고 받은 것이 해고통지서... 4년 배울 거 배우고 철도 사비생보다 못했구나 싶었습니다. 우리가 왜 투쟁에 동참을 못했을까요.
계약직은 리본이라도 달면 당장 짜른다고 으름장 놓는 팀장. 고분고분 있음 어떻게든 해준다고 달래 놓고선.. 아무 말이 없습니다.
아니란 거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 못한 여승무원, 혹시나 하는 맘에 리본 달기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나서야 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맘도 알아주십시오.
그것이 계약직입니다. 리본 달았다고 쫓겨나는 것이 계약직입니다. 한 달을 남겨 두어도.....
<투쟁속보 1호에 실린 여승무원의 글>


한편 서울본부는 12월 23일 역사에 붙일 대자보와 시민에게 배포할 선전물도 발행했다.
한 달에 300시간을 일했습니다. 이렇게 쫓겨날 수는 없습니다.

몸이 아파도 웃어야 했습니다. 집안에 슬픈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손님을 맞았습니다. 사람이 부족해서 한 달에 300시간을 노동했습니다. 실컷 부려먹고, 갖은 거짓말로 회유하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소모품처럼 내 쫓아도 되는 것입니까? 저희는 노동조합도 없습니다. 계약직이라 눈치 보며, 차별을 묵묵히 감수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이런 식으로 쫓겨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저희들이지만, 최소한의 의사표시로 리본을 달게 되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시민선전물 “우리는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계약직 여승무원의 눈물을 안고 달리는 새마을호”인용>


서울지방본부는 객차 내에 붙일 스티커도 제작에 들어갔다. 이 스티커는 투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7종을 만들었다. 종류는 7종이었지만 계속 내용을 바꾸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11종이 발행된 셈이다. 서울지방본부와 여승무원, 그리고 공대위의 유력한 투쟁전술로 자리 잡았는데 “스티커 말고는 다른 전술이 없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첫 번째 나온 스티커의 내용은 시민 선전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 내 대자보도 스티커를 1절지 크기로 확대한 것이었다.

<11월 23일 투쟁 상황일지>
- 상황팀 회의: 일정 및 사업공유
- 공대위 결성 회의록 이메일 발송
- PC 배포(량기는 저녁 때)
- 여승무원 면담
- 서지본 수련회(14개 지부장에게 협조부탁)
- 매일노동뉴스 광고 발주
- 스티커 발주(1만개) -1만개 추가발주
- 시민선전물 발주(5만부) -도착
- 대자보 발주(500부) -도착
- 서명운동 취지문 및 양식 준비

<11월 24일 투쟁 상황일지>
- 여승무원 집회조직(5-6명 예상)
- 여승무원 회장 집회 발언
- 부열 지부장 통화-선전물 배포 정도
- 7개역 중 서울역 플래카드 미게출
- 25일 집회 조직 동원 예상
(외부-60여명, 내부-40여명)
- 비정규직 집회 참석: 공대위집회 참여호소
- 매일노동뉴스 광고판: 카페공유
- 카페회원 관리: 현재 16명 가입
- 집회 플래카드 제작
- 대시민 선전물, 대자보 배포-서열,서울역,청량리지구,고철열차,고철승무,부산열차


11월 25일 첫 집회, 여승무원 투쟁주체로 서다.

11월 25일 오전 10시 30분 철도청 서울지역본부 앞마당에서 ‘새마을호 여승무원 해고반대 및 비정규직 철폐투쟁 결의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날 집회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120여 명이 참석했다. 여승무원, 서울열차지부 조합원, 철도 활동가, 서울지방본부 간부, 그리고 공대위 참가단위 동지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폐업철회투쟁을 진행하며 상경투쟁, 서울지방본부에서 숙박하던 금강화섬 동지들이 20여명 결합했다. 본부조합에서는 조직국장과 대외협력국장,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고종환 본부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 집회에서 장순옥 서울열차 새마을호 여승무원 회장은 “철도청 공무원 조직의 일원으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지난 3월 해고통지를 받아본 부모님들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졌다는 동료들이 많다.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우리를 길바닥에 내모는 철도청에 맞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발언하여 힘찬 박수를 받았다. 이날 여승무원들은 21명의 해고 대상자들 중 비번자 전원에 가까운 10명이 참석했다. 여승무원들은 처음에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두려워하였지만 이날집회를 계기로 자신감을 갖고 투쟁의 주체로 서게 되었다. 집회 뒷줄에서 모자를 눌러쓰고 쭈볏거리던 여승무원들은 정규직 노조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엄호한다는 것과 참석자가 많았던 데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김정민 본부장, 고종환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장, 금강화섬위원장, 평등노조 위원장 등이 차례로 발언을 통해 투쟁의 승리를 다짐했다.
집회 도중에 공대위 대표단(임미령 평등노조 위원장, 최명호 집행위원장, 이철의 조직담당, 권오석 서울열차 지부장)이 지역본부 관계자와 면담을 가졌다. 공대위 대표단은 새마을호 여승무원 집단해고사태에 대하여 항의하고 해결될 때까지 투쟁할 의지를 전했다. 지역본부측은 “우리는 권한이 없고 본청에 의견을 전달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날 집회 뒤 참가자들은 서울역에서 “우리는 겨우 2년을 일했습니다.”는 내용의 스티커를 열차 내에 부착하였으며 점심식사 후에는 각 역사에 흩어져 대자보 부착작업에 들어갔다.

집회는 11월 30일 2차 결의대회까지는 철도청 서울지역본부 앞에서 진행되었으며 30일 집회 뒤에는 서울역대합실에서 약식집회를 가졌다. 이후 매주 화, 금요일에 서울역 대합실에서 집회를 가졌으며 대합실 집회의 전형을 만들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집회를 연 이유는 서울역이 가지는 상징성을 고려한 것이었고,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데에 착안한 것이었다.


3. 투쟁은 고양되고 정세는 유리한 국면으로

철도청: 여승무원 희망지 조사, 해고철회 불가능 등 우왕좌왕

한편 철도청은 11월 24일 철도청 서울지역본부와 본부조합에 공문을 보내 “3월에 실시한 새마을호 여승무원 공개채용당시 기존 계약직 여승무원들에게도 응시하도록 기회를 주어 전원이 응시하였던 바 일부(1명)를 제외하고 36명이 불합격되었던 것으로서 2004. 12월 31일자 해고철회는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다만 위의 계약해지자에 대하여는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차원에서 향후 역무분야 계약직 채용 시 철도 업무경력을 감안하여 가점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으니 이해와 설득을 당부드립니다.”는 입장을 밝혔다.

투쟁의지를 다져가고 있던 여승무원들에게는 사무소 관리자들이 “역무계약직으로 채용할지도 모르는데 희망지를 조사하겠다. 희망지를 밝혀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공대위는 여승무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투쟁방침에 따를 것”을 문자메시지나 전화로 알리기로 했다. 또한 관리자들의 교란에 대비하여 매일 오후 세시에 서울열차사무소에서 여승무원 간담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간담회는 최명호 집행위원장을 중심으로 거의 매일 이루어졌다.

현장을 순회하며 서명운동을 조직하다.

11월 26일부터 현장순회에 들어갔다. 현장순회는 시민선전물, 서명취지문을 들고 여승무원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서명을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여승무원들은 현장을 방문하고 지부장이나 지부 간부들을 만나 서명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민주노총 산하 각 노동조합의 집회 현장이나 민주 노동당 집회에 참여하여 서명을 받기도 하였다.

<취지문> “4.20합의이행 촉구및 새마을호 여승무원 집단 계약해지 반대및 정규직화 쟁취투쟁”에 뜻을 함께 합시다.
<전 략>
이미 철도에는 수많은 계약직등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외주, 비정규직 채용이 늘어날 것은 철도청의 계획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힘없는 계약직 여승무원들의 해고를 그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앞날이라고 믿기에, 철도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일이라고 믿기에 처음으로 계약직 노동자들의 해고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합니다.
서울열차사무소 지부가 이미 투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조합원은 물론 계약직 여승무원들도 깃달기, 집회 등 투쟁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들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성원합시다. 그 첫 번째 실천으로 서명운동에 동참합시다. 비정규직 투쟁의 첫걸음을 시작한 이들에게 힘을 줍시다. 감사합니다.
2004년 11월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어서 12월 9일까지 2,518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 가운데 철도 노동자들의 서명은 대략 1,500여명 정도였다. 서울지방본부는 11월 22일 본부조합 확대쟁의대책위원회를 앞두고 조직실에 “서명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정식안건으로 다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부조합은 21일 중상집회의에서 서울 지방본부의 이같은 요청을 부결하여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을 앞두고 갈등이 확대되었다. 이같은 갈등은 본부조합 담당자(운수분과국장)가 11월 22일 최명호 집행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 투쟁에 관여하지 않겠다.” 하여 더욱 증폭되었으며 이후 본부조합이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을 계속 방관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본부조합이 이처럼 4.20 단체협약을 이행하라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을 방관한 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에는 “여승무원들이 관리자들의 딸이다. 운수쪽 지부장들이 반대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말하였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신광순 청장, 여승무원 대표를 면담하다.

11월 26일 서울, 용산 지구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오후 세시부터는 여승무원들이 어깨띠와 몸벽보를 하고 서울역 앞에서 승객들에 대한 선전전에 들어갔다. 차량기지에서는 시민선전물과 스티커가 일제히 배포되거나 부착되었다. 숙명여대 학생회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으며 공대위는 여승무원 부당해고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처럼 투쟁이 확산되어 가자 신광순 철도청장이 서울지방본부 위원장과 여승무원 면담을 요청했다. 11월 27일 서울역에서 김정민 서울지방본부장, 여승무원 회장 장순옥, 권오석 서울열차 지부장이 철도청장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민 본부장을 비롯한 대표들은 “이번 사태가 4.20 합의사항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해고를 철회하고 합의를 이행할 때까지 맞서 싸울 것”을 분명히 했다. 청장은 “원만히 해결되도록 노력하자.”며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한다. 청장의 이런 태도는 11월 30일 2차 집회 바로 다음날인 12월 1일, 철도청에서 부랴부랴 공문을 보내 미봉하려는 결과로 나타났다.

철도청 12월 1일 공문의 요지: 여승무원 재계약은 불가능하고 역무계약직이나 자회사 우선채용 보장

“새마을호 여승무원 고용불안 해고건의에 대한 회신” 제하의 공문에서 계약해지된 여승무원 31명(서울 20, 부산 9, 영주 2명)은 전문채용 대행업체에서 시행한 여승무원 선발시험에서 불합격되었으므로 다시 여승무원으로 채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역무분야 임시계약직 역무원 충원 시 우선 채용보장, 자회사 (주)KSN및 (주)파발마 근무희망자에 대하여 취업보장토록 하겠다.(자회사와 구두합의)는 답변을 보내왔다. 또한 관리자들을 통해 “이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회를 박탈할 것”이라며 회유를 하기도 하였다. 철도청의 이런 태도는 예상외로 투쟁이 급속도로 확산되는데 대하여 매우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서울지방본부와 공대위는 공동명의의 성명을 내어 “철도청의 이같은 태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여승무원들을 회유, 압박하는 태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성명은 또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결연히 투쟁할 것”을 다짐하였다.

언론을 타며 투쟁열기가 더욱 고조되다.

12월 1일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기자가 여승무원들을 인터뷰했다. 또한 KBS1 라디오에서 최명호 집행위원장과 여승무원들을 인터뷰했다. 12월 3일에는 한겨레 서수민 기자가 서울열차사무소를 방문하여 여승무원들을 취재했다. 이미 미디어 ‘참세상’이나 ‘민중의 소리’와 같은 민중언론에는 여승무원 투쟁을 취재하고 보도하였지만 영향력 있는 매체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매체의 이같은 보도는 공대위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의 영향도 있었지만 집회장소가 서울역이라는 점, 그리고 새마을호, 무궁화호를 비롯한 본선열차, 수도권 전동차에 일제히 부착된 스티커의 위력 탓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12월 1일 철도청의 공문이후 여승무원들 사이에 약간 흔들림이 있었지만 매일처럼 진행하는 간담회를 통해 정리해 나갔다. 철도청에서 여승무원들에게 “역무분야 계약직 채용 희망원”을 제출토록 하여 몇 명이 제출한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공대위는 ‘계약직 역무원 채용희망 의사 철회’라는 양식을 배포하여 역무 계약직 희망원을 제출한 여승무원들에게 서명하여 서울열차 사무소장에게 내도록 하였다. 또한 여승무원들에게 ‘서울열차 계약직 연장 희망부’를 제출하도록 지침을 주었다. 전 여승무원들이 이 지침에 따랐다.
계약직 역무원 채용희망 의사 철회

본인은 지난 12월 일 귀 사무소에서 제시한 ‘역무분야 계약직 채용 희망원’에 서명하여 제출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그마저도 제출하지 않으면 여승무원으로 재계약은 물론 일체 고용보장이 불가능하다.’는 부당한 강압에 의한 본의 아닌 의사표현이었음을 통보합니다. 또한 별도로 제출하는 ‘서울열차 계약직 연장 희망원’ 내용과 같이 본인은 새마을호 계약직 역무원으로 계약연장을 희망합니다.
서울열차 승무사무소장 귀하


불발로 끝난 12.3 특단협 투쟁의 영향

12월 3일 특별단체교섭이 타결되었다. 확대쟁의대책위원회에서 재적 204명, 표결 164명 가운데 21명의 위원이 합의에 반대하였다. 그중 20명은 서울지방본부 소속 위원들이었다. 합의안은 12월 2일 있었던 중앙노동위원회의 안보다 더 후퇴된 안이었다. 교섭의 흐름으로는 당연히 파업에 들어갈 안이었으나 파업투쟁의 준비는 전혀 되지 않았다. 불만과 무기력이 노동조합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공대위는 이같은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전혀 흔들림 없이 예정된 투쟁과 일정을 진행하였다. 투쟁의 주력도 서울지방본부 전임간부들과 소수의 철도 활동가들, 그리고 공대위에 소속된 활동가들과 학생들이었으므로 12.3 특단협 투쟁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12월 3일 여전히 서울열차 여승무원들과 간담회가 진행되었고 12월 5일에는 민주노동당 집회에서 여승무원들이 선전전과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12월 7일에는 3차 집회가 서울역 대합실에서 강행되었다. 여승무원 해고예정일정, 고양되는 투쟁의 열기, 흔들리기 시작하는 철도청의 태도를 감안할 때 투쟁의 고삐를 더욱 잡아채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

<12.3 특단협을 전후로 한 투쟁의 흐름>

12.1 철도청 여승무원 고용대책 정식공문 답변
12.2 서열 여승무원 간담회, 철도 총파업 전야제
12.3 서열 여승무원 간담회. 공대위 집행위원회
12.5 민주노동당 집회(전진대회) 여승무원 선전전 및 서명운동
12.7 3차 투쟁 결의대회(서울역 대합실), 관계부처 팩스신문 1호 전송
12.8 팩스신문 2호 전송
12.9 서열 여승무원 재계약 희망원 일괄제출, 서명부 관계부처 발송, 팩스신문 2호 전송

철도청을 압박, 교란하기 위해 탄원서 및 팩스신문을 발송

팩스신문은 총리실, 건설교통부, 철도청 등 수십 개 관계 처에 일제히 발송했다. 서명부는 총 2,518명분이 취합되었다. 철도청이 노사합의를 위반하고 비인간적으로 여승무원들을 해고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와 함께 서명부를 취합하여 청와대, 총리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건교부, 노동부, 여성부, 철도청 등에 발송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제소를 하였으며 나머지는 탄원서와 함께 제출한 것이었다. 모두 철도청을 압박하고 교란하기 위해서였다. 팩스신문은 4호까지 만들어 발송했다. 이같은 전술은 사측이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방대한 공무원조직의 관료주의와 보신주의를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썼던 것이다. 초기 철도청의 대응을 볼 때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판단한다.

투쟁은 고양되고 사측은 더욱 당황하였다. - 철도청, 지역본부에 여승무원 역무계약직 채용 지시

12월 8일 철도청 서울지역본부 관리국장, 영업국장, 노정과장이 서울지방본부를 방문하여 김정민 본부장과 최명호 집행위원장등 관계자가 배석했다. 방문자들은 서울본부의 정확한 요구안을 알고 싶어 하였다. 본부장 및 간부들은 “해고를 철회할 것이며 4.20 합의사항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오후 철도청은 서울, 부산, 순천, 영주 등 각 지역본부에 공문을 내어 “계약해지 예고된 여승무원들을 역무계약직으로 채용하라.”고 지시했다. 공문은 또 “고용불안 해소를 위해 개인별로 근로계약을 사전에 체결하라.”고 하였으며 “해당 여승무원들에게 여승무원으로 재계약은 불가능하니 이를 설명하고, 희망하는 근무역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 공문에 따라 각 열차사무소 관리자들에 의해 여승무원들에 대한 교란작업이 들어갔으며 영주열차사무소의 여승무원등 공대위 활동에서 소외된 여승무원 소수가 역무원 계약의사를 밝혀 투쟁대열에서 이탈했다. 부산열차사무소 8명은 잠시 동요가 있었으나 수습하여 이에 응하지 않았다.
12월 10일 4차 결의대회를 서울역 대합실에서 열었다. 또한 이날 밤 각 전동차 기지에서 야간 스티커 작업을 진행했다.

12월 13일 각 언론사에서 취재요청이 폭주했다. 철도청은 당황하기 시작하여 이날 저녁 일곱시부터 여덟시까지 이천세 일반철도 사업본부장 외 6명이 서울열차사무소를 방문하여 여승무원 6명과 면담했다. 이날 철도청과 여승무원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철도청은 또한 이날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내어 “4.20합의사항은 정원확보를 할 수 없어 부득이하게 이행하지 못하였으며, 여승무원의 정규직화 합의는 사람의 정규직화가 아닌 인원의 정규직화”라고 답변하여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철도청은 나중에 “정원의 정규직화가 아닌 4.20 합의 당시 근무자에 대한 정규직화”로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 관련 회의결과 통보 (2004.12.13 철도청 계획조정과 4857)>

- 계약해지가 예고된 여승무원이 12/15까지 본인 자유의사로 희망근무지를 제출할 경우 희망지(역 또는 승무)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이를 전면 수용한다.
- 4.20단체협약건에 대하여는 철도노조(본조합)과 유권해석에 대하여 협의 후 조치한다. 끝.


12.10 공대위 4차 집회, 공대위 회의, 시민방송 촬영, 여승무원 서열재계약 희망원 제출
12.11 이화여대 여성학과 조순경 교수 면담, 성차별에 대하여 국가인원위 진정서 제출키로 함
12.13 한겨레 왜냐면, 사설, 사회면 보도, MBC TV('아주 특별한 아침'),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
KBS 1라디오, CBS, 오마이 뉴스등 취재
12.14 MBC TV및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 KBS 1라디오 방송, 5차 결의대회, 팩스신문 6호 전송, 서열 여승무원 18명 노동조합 가입

지방본부 및 공대위는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여승무원들에게 “열차사무소로 재계약을 해야 정규직화를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또한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한다.”고 가입을 권했다. 12.14일 여승무원 18명이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제출하여 계약직으로는 처음으로 조합원이 되었다. 이후 서울열차사무소의 계약해지 예고자 20명이 전원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러나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부산 열차사무소 여승무원들은 끝내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하였다. 방관하는 지부와 무관심한 정규직들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매일노동뉴스 12월 15일자에 여승무원의 노동조합 가입이 보도되었다. 한편 공대위는 고조되는 분위기를 타고 대전 및 부산지역의 별도집회를 공공연맹 및 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추진했다. 이와 함께 철도청을 더욱 몰아붙이기 위해 15일 각 차량기지 내 야간스티커작업을 강행했다.(다음 호에 계속)

2005-09-29 1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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