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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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본 그람시
 젠더, 노동의 페미니스트 유물론적 재절합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
너부리

너부리의 다른 눈으로 보는 세상/

1975년 이탈리아 볼료나 근처의 한 지역에서 <그람시에도 불구하고>라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이 극은 전투적인 페미니스트 집단이 연출한 것인데,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유럽 맑스주의 사상의 주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람시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이론적 토대들에 대한 검토는 당시에도(1970년대와 80년대 말까지)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역사적 재검토에 기반한 미래 전망 건설에도 매우 중요했다.
이 퍼포먼스는 그람시의 저작을 이해하는데 있어 입때껏 누락되어온 응달지점에 착목한다. 즉, 그람시 연구에서 간과되고 억압되었던 젠더와 사랑과 혁명에 관한 질문들을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절합해 보려는 것. 이 퍼포먼스를 뒷받침했던 연구물들은 이듬해 76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월간지 편집장의 손을 거쳐 출판되었다(Adele Cambria, Amore come rivoluzione [Milano: Sugar Co., 1976]). "역사의 왼편"에 갇혀서 빛을 보지 못한 문서들을 통해서 그람시를 재조명하고 있는 이 책은 말하자면 우리도 쉽게 구해볼 수 있는 그람시의 <옥중수고>의 ‘왼편'이랄 수 있는데, 이탈리아 그람시 연구소 한 구석에 먼지 가득 쌓인 채 봉인되어 있던 이 기록물들은 그람시, 그의 아내 굴리아, 처제 타티아나가 주고 받은 편지들이다. 이탈리아 좌파 내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 7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를 다시 돌아봄시롱 새로운 전망을 내고자 하는 일환으로 주목했던 것은 바로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출판된 그람시의 행적이 아니라, 묻혀진 기록물들을 통해서 재구성해보는 그람시의 "정서적 전기"(affective biography)였던 것.

이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의 기획은 역사를 다시 쓰는 것, 무엇보다 여성들의 실종된 목소리를 통해서 그람시를, 역사를 다시 쓰는 매우 정치적인 기획이었던 것이다. 여성들의 실종되고 무시된 목소리를 통한다는 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랑과 혁명, 개인적/성적/정서적 욕구들과 정치적 전투주의의 관계들을 재검토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혁명적 투쟁의 동력이라고 보는 관계들을 여성들의 입장과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작업. 여성 (활동가들)은 줄곧 젠더와 노동/계급을 대립시켜 놓고 이 두 범주들 중 무엇이 더 우선적인지를 "고백"하도록 강요받곤 했다. 이런 폭력적인 작태는 여전히 은근스레 혹은 노골적으로 현재진행형이다. 여성혐오증을 내면화하도록 강제하는 구조 속에서 역시 이러한 관념론적인 대립은 민족주의나 국익, 진보진영의 단결 운운을 통해 여러 형태로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도전은 절박한 실천으로 남아있다. 다시 말하자면, 젠더와 노동의 이중구속을 근본적인 층위에서 급진적으로 재사유하고 재절합하는 과제는 우리에게 절박하고도 열린 기획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젠더, 노동, 섹슈얼리티, 몸을 우리 시대의 "현장"에 맞게 재절합하는 것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론적 전망은 시작될 것이다.

맑스나 맑스주의 주변을 배회하는 (자칭) 진보이론가들이 종종 드러내는 한계와 맹안은 ‘총체적 위기’를 ‘총체적으로 진단할 이론’을 믿는다는 것이다. 입장에 따라서 위기를 총체적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위기도 모순도 언제나 복잡하게 중층결정되어 있다. 또한 아무리 모순들의 중층결정성을 섬세하게 관찰, 분석해낸다 할지라도 어느 분석이든 스피노자가 바랬던 "제3의 인식"(무오류의 정합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다. 총체적 과학으로서 맑스나 맑스주의, 또는 그 어떠한 이론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좌파 이론 일반을 총체적 과학(알튀세르가 말한 일반성 III)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회변혁보다는, 총체적 과학 운운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식의 위계를 공고히 하는 것일 뿐이다. 반체제 지식인과 진보이론가들도 보수적인 지배 구조에 언제나 필요한 구조-내-일부였다는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여자 대 남자, 노동자 대 자본가, 소수/약자 대 다수/강자, 시민사회 대 국가, 진보 대 보수, 민주 대 비민주 등 -- 모든 것은 복잡하고, 개별사는 사회사보다 더 파란만장하기 마련이다)에 기반한 채 사회의 어느 한 부분만을 '해방'하려는 시도는 매우 비현실적이며 비정치적이다. 이런 단순하(여 겉보기상 명쾌)한 시도들은,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자의적으로 ‘구분’하고서 ‘타자’/외부를 맹근다음 쫓아내는(요것이 바로 폐제foreclosure 메카니즘) 지배구조에 직간접적으로 일조한다. 또한 이런 시도들은 주변화되거나 포섭당함으로써 억제된다. 내가 보기에 가장 심각한 부류는 이렇다. 어떤 운동이든 자기 활동과 관점에 대해 배타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극도로 오만하고 무감각하다. 그들은, 예컨대 여성을 위한 투쟁이 혹은 노동자 투쟁이, 다른 투쟁들과 길항관계라고 은근히 믿음으로써 자기들의 ‘영역’을 사수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여성/노동을 위한 투쟁이 생명과 존재의 철학이라는 점, 생명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을 알려고 하지 않다. 예컨대, 페미니즘의 철학과 노동계급의 원칙은 길항관계가 아니라, 종국적으로는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이든 노동해방운동이든, 그것의 미래는 전체론적이되 구체적인 가치들을 생산하고 동시에 그 구체적인 것들, 특수한 것들을 넘어서고 가로지르며 다양한 생명체를 포용하는 것일 때, 그라고 아직은 절합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젠더, 성차, 생태, 인종문화ethnicity, 계급, 인권 등에 대한 급진적 재절합rearticulation에 기반한 정치기획을 가동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우리가 무시하는 사이에, ‘차압’당하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란 갈등을 제도화하고 이견들을 끊임없이 경합시키는 제도다. 우리는 20세기 온통 억압뿐인 한 세기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 세기가 남긴 유산을 고스란히 우리 몸에 물려받았다. ‘갈등은 봉합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것이다. 우리들 안의 다른 소리들(heteroglossia)이야말로 우리를 전진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소리=갈등이라 인식하면서 후딱 언능 갈등을 봉합하려 한다. 갈등이란 봉합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결국은 터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핵심역량은 갈등을 다룰 줄 아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모순은 해소되지 않는다. 세상은, 그라고 변혁이란, 오히려 모순의 작동을 통해서 나아간다. 모순없는 사회에의 꿈은 그 자체로 관념적이며, 모순없음이라는 발상이야말로 지배에 봉사하는 가장 큰 이데올로기였다.

젠더를 핵심 개념들 중 하나로 하는 페미니즘은 사랑, 권력관계, 문화에 대한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자, 끊임없이 우리를 규율하고 개별화/각개격파individualizing하는 가부장적 남성지배에 대한 체계적 비판이다. 또한, 권력분석의 핵심 범주로서 젠더를 상정하는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가치들과 여성재현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안적이고 급진적인 여성주의 이론들, 문화들을 벼리어내는 2중의 기획이기도 하다.(http://blog.jinbo.net/neoburi)

2006-09-03 13: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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