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교차로에서
유럽여행기(10)
문명의 교차로에서
이 산 하
서울대 법대재학
아시아와 유럽은 5분 거리
나는 불가리아 소피아로부터 우여곡절 끝에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인류역사 속에서 갖은 영욕(榮辱)을 간직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문명의 교차로인 이스탄불에 드디어
발딛게 되었다. 유럽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이스탄불은 꼭 가보고
싶었던지라, 모든 것이 ‘역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환상에
젖는다. 기차역이 보스포러스 해협(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좁은
해협) 바로 곁에 위치해 있어서,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닷가로 내달렸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몇 개의 다리들도
보인다. 유럽 대륙쪽에 위치한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해협의
양쪽 모두는 마치 한강 고수부지의 형태로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길위에 이미 많은 여행객들이 진을 치고 유럽의 이단적
풍물을 즐기고 있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은 역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간의
전쟁과 갈등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 중심에 등장한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수백년에 걸쳐
오스만투르크 제국(지금의 터키)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서는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콘스탄티노플의 장악은 필수적인 요새였던 것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던 동로마제국이었지만, 콘스탄티노플만은
사수해야 한다는 집념은 대단한 것이어서 기세 등등한
오스만제국으로서도 결코 녹록치 않은 전쟁이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고, 이곳에도 이슬람교의 성경인 코란이
전해지게 되었지만, 동로마제국의 사수에 대한 집념은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반쯤 부서진 성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군사적인 열세를 성채와 같은 방어적 기지의 튼튼함으로
만회하려고 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때에도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십자군 세력의 중간기지였고, 베네치아가 동지중해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중개무역을 장악할
때도 이곳은 주요한 군사기지이면서, 상업기지였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이러한 역사를 뒤로하고, 지금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과
여행객들을 ‘평화롭게’ 맞이하고 있다.
대륙과 대륙사이를 5분만에
이스탄불은 도시 자체가 유럽과 아시아 양쪽 지역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기차역이 있는 유럽쪽에서부터
아시아쪽으로 건너가 보았다. 5분 정도의 거리다. 대륙과
대륙사이를 5분만에 건너갔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기반한 상호 협력과 연대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충분히 협력적이고 평화적일 수 있을
텐데......’ 이러 저러한 공상들이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인류의 공존 역시 계급투쟁의 결과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자본가들은 평화를 원하지 않으며, 민중들간의
평등주의적 연대만이 그 유일한 해결책임을 알지만, 보스포러스
해협의 물리적 거리만큼 인류사이의 연대감이 지척이었으면 하는
생각은 결코 나만의 공상은 아닐 것이다.
버스 타는 데 20만원? 20만 터키리라!
보스포러스 해협의 역사에 잠시 취해있던 나는 숙소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유럽쪽의 기차역으로 왔다. 돈이 없어서
현금서비스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 수고롭지 않게
현금 서비스 기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하루치 생활비를
뽑기로 작정하고 카드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기계는 고액만을 지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0(영)이라는 숫자가
한없이 이어져있었다. 그래도 가진 게 하나도 없었기에, 그중
제일 작은 금액을 눌러 현금을 뽑았다.
그러나 나는 그 금액이 버스와 전철 몇번 탈 수밖에 없는 아주
작은 금액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기 위해 티켓을 샀는데, 한장
값이 자그마치 20만 터키리라나 하지 않는가? 내가 인출 받은
돈은 고작 50만 터키리라였다. 그러니 버스 두번 타면 없어지는
돈이었던 것이다. ‘터키리라’는 원화와 대비하여, 약 100배
정도 화폐가치의 차이가 난다. 10만 터키리라면 우리나라 돈으로
약 만원정도이다(당시의 환율 기준). 그러니 웬만한 물건값은
대개 1000단위는 생략한 채, 앞 단위만 부르기 일쑤이다. 외국
관광객의 입장에선 화폐가치의 하락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터키 화폐에 비해 원화가치가 높기 때문에, 이익이 되는
측면이 많다. 예를 들면 서유럽에서 하룻밤 자는 데는 약
20달러(당시 환율 기준)가 들지만, 이곳 터키에서는 5달러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화폐가치의 변동 속에서
터키 민중들은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세계시장체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자국
화폐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수입품 가격의 엄청난 증폭을 감내할
수밖에 없어서 필연적으로 기본적인 생필품 값의 상승을 낳기
때문이다. 최근 인도네시아 민중들의 저항에서도 비슷한 예를 볼
수 있다. 우리는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한 인도네시아
화폐에 대한 평가절하 압력은 엄청난 생필품 가격의 상승을
가져왔고, 그것에 대항하는 인도네시아 민중들의 투쟁이 아직도
전개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터키 민중들도 이러한 고통의
연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설사 화폐가치의 하락에 의한
‘수출상품가격의 하락’으로 수출이 다소 증가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몇몇 자본가들의 배를 채우는데 이용될 뿐이다. 기차역
주변 곳곳에서 옷가지와 전통적인 공예품 등을 가지고 나와,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행위를 하는 터키 민중들 속에서 그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신용카드의 사회
이스탄불에는 유난히 신용카드 현금지급기가 많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인 듯하다.
거리거리마다 10여m 건너서, 하나씩 있다. 여행객의 입장에서 볼
때, 편하기 그지없다. 현금은 위험하고, 여행자수표는 환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반면, 신용카드는 현지에서 곧바로
현지통화를 뽑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특히 내가 유럽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파리였다. 이곳에서 나는 전철표 1장을
사야했는데,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신용카드로
지불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된다면서 웃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신용카드란 것이 ‘고액’을 지불할 때 주로 사용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용카드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에 덧보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카드공화국’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신용카드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만큼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사용에 의한 파산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에 대해 언론은 한국인들의 무분별한
소비행태를 꼬집기도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신용카드로는
‘고액’만을 결제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구조가
아닌가 한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는,
비싼 술을 먹거나 혹은 고가의 옷을 살 때 등이다. 왜냐하면
소액의 경우에는 신용카드로의 결제를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필품 등을 사는데 있어서 조그마한 액수라도
별다른 수수료 없이 현금대신 결제하고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거래 문화가 형성된다면, 신용카드 문화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쿠르드 민족에게 해방을!
이스탄불을 걷다 보면 군복입은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다른 유럽국가에서 정복(正服)을 갖춘 경찰만 보아온
여행객들에겐 또 다른 풍경으로 비춰질 정도다. 뜨거운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두터운 군복을 껴입은 젊은 군인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죽어간, 아니 터키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쿠르드 민족의 전사들을 떠올리면, 군인들의
모습이 결코 낯선 이국 풍경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쿠르드 민족은 메소포타미아 초원과 이란-이라크-터키로
이어지는 비옥한 고원지대인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약 2천2백만명의 민족이 터키에
1천1백만명, 이란에 5백50만명, 이라크에 3백50만명, 그리고
나머지 인구는 시리아와 아제르바이잔에 흩어져 산다.
쿠르드족의 비극의 역사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때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부족국가 쿠르드족이 이슬람에
정복당하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
지배하에 들어갔고, 1639년 오스만제국과 이란의 협약에 따라
준국가적인 독립지위마저 박탈당하고 만다. 1차대전 이후
1920년에, 오스만제국이 붕괴하자 연합국과 아랍의 회교군주들은
아르메니아 남쪽에 쿠르드 국가를 창설한다는 세브르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쿠르드지역에서 발견된 석유 때문에 23년에
다시 체결된 로잔조약에서 쿠르드 국가 건설 조항이 빠져버리고
만다. 2차대전 직후 전설적인 영웅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을
세웠지만, 소련이 이란으로부터 석유이권을 넘겨받는 대가로
쿠르드를 배신하여, 첫 독립국가는 11개월만에 무너지고 만다.
특히 터키에서 쿠르드인들이 받는 박해의 상황은 대단히
심각하다. 고유어 사용이 금지되고, 자신들의 터전에서 쫓겨나
터키 내륙으로 강제이주 당하기도 한다. 이란과 이라크가
자국내의 쿠르드 민족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터키는 소수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여,
이들에 대한 말살․동화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란, 이라크도 이들의 독립국가 건설은 인정해주지 않으며,
이들도 터키 정부와 공모하여 쿠르드 민족주의자 말살정책에
공공연히 보조를 맞추어 왔다. 일례로 96년 3월 터키 정부군이
쿠르드 민족주의자 소탕작전을 벌일 때, 이라크의 후세인은
터키군의 월경(越境)을 묵인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쿠르드
민족전사가 최소한 4백 17명은 사살당했으며, 50여 쿠르드족
마을이 초토화됐고, 난민이 3만명이나 발생했다.
소수민족들의 자치권은 무조건 인정되어야 한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원주민,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동티모르 민족,
나이지리아의 오고니족 등 전세계 많은 소수민족들은 각국
정부와 초국적 자본에 의해 부당하게 정치적 문화적 자치권이
억압당하고 있다. 많은 경우, 이러한 억압의 근저에는 각각의
소수 민족들, 원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자연자원들
때문이다. 추악한 자본의 이윤논리에 의해 정당한 자치권이
억압당해서는 안된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군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쓴 ‘제4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는 글은 우리에게
원주민과 소수민족 억압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국제노동기구의 중앙아메리카 사무국장 아이언 챔버스는
전세계적으로 3억에 이르는 원주민들이 지구상에 있는
자연자원의 60%를 보유한 지역에 살고 있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이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수많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아메리카에서 석유나 탄광 등
자연자원 개발사업과 관광사업은 원주민 지대를 위협하는 주된
산업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공해와 매춘과 마약이 뒤따르는
것이다.”
쿠르드 민족에게 해방을! 모든 억압받는 소수민족, 원주민들에게
정당한 정치적 문화적 자율공동체를!
‘솔로몬이여, 나 너에게 이겼노라!‘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이다. 거리상으로는 지척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지만, 각자가 갖는 역사적, 예술적 의미는 사뭇 차이가 크다.
“새로운 제국의 도시를 상징하는 공간은 새로운 구조원리를
필요로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지은 신로마(콘스탄티노플)의 첫
성당을 부수고 유스티아누스가 다시 세운 소피아 성당은 새로운
구조로 지어졌다. 둥근 지붕(돔)을 정사각형의 평면 위에 세워
그때까지 없던 새로운 스타일의 내부 공간을 실현한 것이다.
단순한 필요의 공간이 아니라 모든 필요를 넘어서는 원형의
공간이다. 건축의 실재는 내부공간에 있다. 인간이 만든 건축의
내부공간은 자연에는 없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이다.”
김석철 선생은 성소피아 성당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을 땅위에 옮겨 놓은 이 형식은 기독교의 영적 관념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고 한다. 원형의 공간. 시작이면서도
끝이고, 끝인가 하면 다시 출발점에 되돌아와 있는 영원의
공간이다. 나는 건축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건축에 정신이
들어있다면 바로 이 성소피아 성당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한다.
‘우주를 땅위로 옮겨놓았다’는 점에서 소(小)우주를 인간이
실현할 수 있다는 인간의 야릇한 오만함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그들은 모든 인간과 개인들 속에 이미 ‘우주’가 존재함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유스티아누스는 이 성당을 지은
뒤 이렇게 말했다.
‘솔로몬이여, 나 너에게 이겼노라!’
【그리스편】
포세이돈 신전에서의 일몰
오늘은 수니온 곶에 갔다. 이곳은 두가지로 유명한데 하나는
포세이돈 신전이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일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포세이돈 신전은
삼지창을 들고 해마를 타고 다니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로마에
있는 트레비 분수도 포세이돈을 모델로 구상된 것이다. 기둥들만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큰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푸른 지중해를 앞마당으로 삼은 것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답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문화는 ‘인본주의’의 근원으로 인정된다.
그렇게 사고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리스 신(神)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느 국가의 신과는 다르게 인간의 얼굴, 인간적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을 이루고 있고,
인간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랑, 미움, 질투, 전쟁 등등이
신들의 사회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것으로 기술되기 때문이다.
신들에 의해 인간이 억압당하던 암흑의 시대에, 신을 인간과
똑같이 기술하고 사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 혁명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포세이돈 신전 그리고 아테네 신전에서 느낀 감정은
이러한 일반적 사고와는 조금은 다른 것이었다. 수니온 곶에서
내가 한국의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 나의 도발적 생각을
적어보았다.
“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이라지만......’
그리스는 인본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를 이루고 있는
문명이다. 특히 신조차도 가장 인간답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인본주의는 더욱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꼭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본주의에 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엽서의 사진이
그렇듯,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을 모시기 위한 이 엄청난 신전들을
짓기 위해 숱한 인간들이 힘들여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신전을 짓기 위해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차라리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소박한 소망을 빌 수 있는 신앙.
가장 인간 가까이 있는, 인간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신이
오히려 인본주의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인본주의적인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다. 처음은
소박하더라도 나중에는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이 신이며,
신앙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의
‘반인간성’을 고발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스 아테네, 수니온 곶에서”
그리스는 온통 파란색 볼펜
그리스 공산당에 인터뷰를 하러 가는 도중에, 길위의 조그만
점포에서 볼펜을 하나 사야했다. 점원이 집어준 것은 파란색
볼펜이었다. 원래 내가 파란색 볼펜을 자주 애용했던 터라, 내
맘을 꿰뚫어 본 점원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총총 걸음으로
우체국으로 향했다. 오늘 한국으로 소포와 엽서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우체국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즉 우체국의 모든 문서들이 파란색 볼펜으로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우체국 직원이 나의 사인을 요구하며 건넨 볼펜 역시
파란색이었다.
그리스 사람들, 넓게는 지중해 연안 국가의 사람들은 하나의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파란색 바다위에 하얀
집’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갖는 정도가 될 듯 싶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근해의 섬, 산토리노 섬 등에 가면 해변의 절벽위에 하얀 색깔의
집들이 단정하게 널려있다.
지중해의 바닷물은 우리의 동해처럼 ‘짙푸르지’ 않다. 옅은
파란색이며, 그 위에 7월의 강렬한 햇빛이 촘촘히 박혀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말 그대로 한폭의 그림같다. 그래서 강렬한
태양, 지중해의 맑은 파란빛, 그리고 하얀 집들이 빚어내는
파노라마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맑고 고운
심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자연지리적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수량으로 측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지리적
환경에 의해 영향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가
‘검은색’ 볼펜, 혹은 만년필로 모든 공문서를 작성하는 게
‘상식’이듯이, 그리스인들은 파란색 볼펜으로 공문서를
작성하는 게 또한 그들의 상식이다.
내가 사소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이처럼 길게 뽑고 있는 것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존중’의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분쟁과 갈등이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연유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인류
사회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상품’으로 만들어, 초국적
자본들이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각국 민중들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문화적
자율성,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각국 민중들의 고유한 삶과 문화를 파괴한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더 많이 팔기 위해서는, 세계 모든 인류가 자신들의 공동체가
보유하고 있는 전통적 음식, 문화 등을 ‘햄버거 문화’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되듯이 말이다.
그리스에서조차 모든 공문서가 다시 ‘검정색 볼펜’으로
쓰여진다면, 세상은 너무 황량해지지 않을까.
낯익은 동상 하나
유럽에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좌파정당들(사회당, 공산당
등)의 건물은 모두 으리으리하다. 또한 건물에 출입하는 것도
절차가 다소 까다롭다. 우익 파시스트들의 항상적인 위협에
시달리는 특수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대중들과 유리된 자신들만의 성(城)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자치체선거 이후
민선 구청장들이 추진 한 것 중 하나가 구청 담벼락을 헐고,
구민들과 일상적인 접촉이 가능한 공간으로 개조한 것이 그 첫
번째 사업이 아니었는가. 아무튼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럽 좌파정당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의
공간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그 역의 과정이겠지만.
우익파시스트들의 위협도 그때가 되면 그리 두렵지는 않으리라.
건물 앞뜰에는 낯익은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레닌동상이었다.
그 자신이 태어났던 사회주의 조국에서는 철거된 그였지만,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스에서는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한다. 어느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역사에 대한 평가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평가는 어느 한
시대를 완전히 폐기처분할 수 없듯이, 그 인물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적 한계와 함께 얘기되어져야 할 것이다. 혹시 우리가 그런
전철을 밟지는 않았나 되돌아보게 된다.
건물안으로 들어가 국제부 간부를 만났다. 내가 유럽통합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반대한다’고
말했다. “자본가들을 위한 통합에 다름 아니며, 지금처럼
진행되는 유럽통합에서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내의 주변부적
국가들(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등)은 사실상 독일, 프랑스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제국주의와 평화’의 문제에 대해 보다 첨예한
입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연유한 듯 했다. 즉 인류의 마지막 화약고라는 발칸반도 -
구(舊) 사회주의유고연방, 알바니아 등 - 와 중동에 지리적으로
인접해있기 때문에, 미국을 배후에 둔 NATO 등에 의해 끊임없이
군사적 지배와 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리스 공산당은 「발칸 및 중동지역 좌파정당
연대회의」를 개최하여, 제국주의의 간섭에 대한 공동의
대응, 평화체제의 확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그리스내 미군사기지의 철수, 미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에의 간섭 반대, 중동의 아랍국가들에 대한 억압 반대 등을
자신들의 원칙으로 갖고 있다.
어찌 보면 그리스 공산당은 유럽통합에 대해 가장 원칙적이고
급진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조금은 공허한 입장이 아닌가, 혹은
민족주의적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고뇌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가 실제로 유럽통합의
과정에서 독일의 경제적 식민지로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
군사적으로 미국의 직간접적인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 인류의
화약고라는 중동과 발칸반도에 인접해 있다는 점 속에서, 이들은
‘유럽통합에 대한 분명한 반대,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통해 그리스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남는다.
이들은 얼마나 그리스 민중들과 실질적으로 연대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그리스 민중들의 자율적인 대중투쟁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하에 묶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가 구(舊) 사회주의체제와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비단
그들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