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새로운 ‘신탁통치’
월든 벨로/필리핀대 교수, 사회학
ꡔ한겨레신문ꡕ 2002년 1월 14일 해외논단
미국의 B-52 전략폭격기와 전투기, 공격기, 순항미사일 등이
힌두쿠시 산맥이 가로지르는 아프가니스탄의 하늘을 날아다닌 지
단 몇 주만에 탈레반이 무너졌다. 미국은 아프간 북부동맹군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정밀유도 폭탄으로 무장한 공중전력을 주로
활용해 대대적인 지상군 투입이나 이렇다할 직접적인 교전도
없이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또한 미국은 자국이 지배하는
세계질서에 훼방꾼 노릇을 할 수 있는 세력이나 나라에 대한
공격과 전후처리 방법을 실험하는 효과도 얻었다.
미군은 아프간에서의 승리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들떠 있다. 1970년대 베트남에서 패한 뒤
시달려온 후유증을 지난 91년 걸프전에 이어 이번 아프간
보복전쟁을 통해 완벽하게 털어버렸다. 소련군이 참패한
아프간에서 승리함으로써 “사막이든 험준한 산악지대든 미군은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미국이 지난 99년 코소보사태 때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최첨단 무기를 무차별적으로 투입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전쟁수행 방식의 효용성이 아프간에서 재확인됐다. 따라서 전사
전문가 러셀 위글리가 ‘미국의 전쟁수행 방식’이라고 개념화한
이 방식은 21세기 미군의 주요한 전쟁방식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은 전쟁을 벌이면서 더 이상 인권이나 전쟁포로 보호, 주권
등 거추장스러운 근대시민사회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국내에서는 불법적인 도청과 인신구속 등이 테러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신속하게 합법화됐다. 테러의혹이 있는 이민자는 즉각
체포․구금할 수 있고, 비공개 재판을 통해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50년대 미국 사회를 얼어붙게 하고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매카시즘이 부활한 듯하다. 미국 동맹국들도
인신의 자유 등을 제한할 수 있는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다행이
미국 의회보다는 애국주의에 덜 취한 영국과 독일 의회는
비인간적인 입법에 소극적이다.
아프간 전장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한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비인간적인 집속탄(클러스터) 등의 오폭으로 숨졌고, 포로로
잡힌 탈레반의 병사 수백명이 폭동을 이유로 무참히
살해됐는데도 국제사회는, “우리는 3천명 이상이 테러로
숨졌다”며 눈을 부라리는 미국의 위압에 눌려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는 것과 함께 정치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신탁통치’ 모델을 개발해 적용하고
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치능력이 떨어진 나라나 지역에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유엔의 권위를 빌려 일정기간 실시했던
신탁통치를 21세기 환경에 새롭게 적용한 것이다. 미국은
장기간의 내전으로 갈등과 반목이 심한 아프간 정치세력들을
통합해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고, 영국 등
유럽은 군대를 장기간 해당 지역이나 국가에 상주시켜 아프간
치안과 질서를 담당하는 모델이 확립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이런 행태를 비판하는 세력은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힘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동안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면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세계화가 낳은 극단적인 과잉생산과 독점강화,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구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반세계화
단체들은 테러사태 이후 미국의 공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테러리즘 제거’를 앞세우고
공세를 펴는 데 대응할 논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동시다발
테러가 낳은 역풍인 셈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한 테러에 반대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새로운 전쟁수행 방식과 신탁통치를 다른 중동 국가나
아프리카 지역에도 적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구의 눈에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아프리카와 중동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했으며, 테러범들의 텃밭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세계
정치․경제의 질서에 해로운 존재가 된 양 비춰지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적절하게
개입해 ‘지도․관리’할 경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세계평화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사적 자신감에 들떠 있는 미국을 활용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국가들도 나타나고 있다. 남미 콜롬비아는 자국내 무장
게릴라와 탈레반이 똑같은 테러범들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미국은 콜롬비아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있다. 아프간의 험준한 산맥이나 콜롬비아의 정글이 더 이상
첨단무기에는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이런 무모하면서도 무제한적인 확전 움직임에 냉담한
반응을 보고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