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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50주년

현장에서 미래를  제39호
인권운동사랑방


올해는 세계 인권선언 제정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추적하여 ‘인권하루소식’이라는 일일 팩스정보를 통해 진보진영에 보편적 인권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주고 있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자료를 빌어 인권선언의 내용을 실었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50주년 특집
세계인권선언50주년

1998년 11월 18일
인권하루소식
세계인권선언의 탄생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장은 ‘경이로운 성취’라는 의장의 연설로 술렁였다. ‘모든 민족과 모든 국가가 성취해야 할 공동의 기준’으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날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들의 조직체인 국제기구가 인권이 무엇인가를 적어 넣은 보편적인 문서를 만든 것이다. 이 선언의 등장으로 자국민을 대우하는 문제가 그 국가만의 관할사항이라고 말할 근거는 설자리를 잃게 되었고 인권의 국제적 보장은 필연적 추세가 되었다.
이 선언은 6년여에 걸쳐 6개 대륙과 모든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잉태되었다. 약5천만 명에 이르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2차 대전의 참상과 나치가 저지른 만행은 국내에서 자국민의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는 인류 모두의 인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것이다.
이 교훈에 기초하여 1945년 창설된 유엔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과 준수(제55조)”라는 목적과 그 성취를 위한 행동 서약(제56조)을 헌장에 담았다. 유엔은 이 약속을 지키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1946년 1월에 열린 제1차 유엔총회는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문서를 기초하기로 했고, 그 인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유엔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 1947년, 유엔인권위원회는 지역적 안배를 고려하여 8개국으로 구성된 '기초위원회'에 초고작업을 맡겼다.

선언은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로 삼아야 할 지침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을 만들어서 회원국의 서명을 받아내는 일에 비해 선언을 만드는 것이 훨씬 쉬워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논의의 시작부터 문서의 형태를 둘러싼 대립이 생겼다. 인권의 일반적 원칙 또는 기준을 담은 선언이냐 아니면 구체적인 권리와 제한범위를 명시한 조약이냐가 문제였다.
기초위원회는 두가지 형태의 문서를 다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말 유엔인권위원회는 기초위원회가 준비하고 있는 문서에 '국제인권장전'이란 이름을 붙이기로 하고 선언을 위한 작업집단, 조약을 위한 작업집단 및 그 이행 조치에 관한 작업집단을 각각 만들었다(UN, The International Bill of Human Rights, 1988).
1948년 5월에 모인 인권위원회는 '선언기초위원회'가 제출한 초고를 수정하고 각국 정부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때 '조약화'의 문제나 '이행'의 문제를 고려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선언만이 유엔총회에 제출되어 투표에 부쳐졌고, 결과는 찬성 48, 반대 0, 기권 8이었다.
기권표는 세계인권선언의 의의를 인정하는 속에서도 불충분하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권을 인권으로 명기(제17조)한 점이나 사회권 보장에 대한 권리가 충분치 않다는 점 등이 구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기권표를 낳았다. 이는 선언의 기초 과정에서 가장 달아올랐던 논쟁, 즉 보편적인 인권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한정되느냐, 아니면 경제적․사회적 권리도 포함하여야 하느냐는 논쟁의 일면을 보여준다. 후자를 지지한 것은 구 사회주의 국가였다. 결과적으로 사회보장의 권리, 노동에 관한 권리,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 충분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선언에 포함되었다.
긴 산고 끝에 탄생한 세계인권선언은 뒤에 만들어진 유엔의 인권관계 조약들의 뿌리가 되었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인권과 기본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인류는 선언이 채택된 12월 10일을 '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인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강제력 있는 조치의 마련은 먼길을 재촉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의 정신: 전문(前文)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며,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로 귀착되었으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와 신념의 자유를 누리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은 보통 사람의 지고한 열망으로 천명되었고,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통치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며,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며, 유엔의 여러 국민들은 그 헌장에서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였으며, 더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개선을 촉진할 것을 다짐하였고, 회원국은 유엔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준수의 신장을 성취할 것을 서약하였으며,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이 서약의 이행을 위해 가장 중요하기에, 그리하여 이제 유엔총회는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이 선언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채,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점진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조치를 통하여 회원국 국민과 회원국 관할권 아래에 있는 영토의 국민들 양자 모두에게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인정과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힘쓰도록, 모든 국민들과 나라들이 성취해야 할 공통의 기준으로서 본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세계인권선언(이하 선언)은 내용상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언의 정신을 설명하는 전문(前文)
△다른 조항들의 대전제인 1․2조
△시민․정치적 권리(자유권)를 다룬 3-21조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사회권)를 다룬 22-27조
△모든 권리의 향유에 관한 일반규정을 정리한 28-30조다.

선언이 사회권에 대해 일정하게 배려를 하고 있는 것(30개 조항 중 6개 조항)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전체 30개 조항 중 19개 조항에 걸쳐 시민․정치적 권리를 다룬 것에 비하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조항은 지나치게 빈약하다. 선언이 기본적으로 서유럽 자본주의국가형의 인권체계를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선언의 전문은 매우 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내용에 따라 △인권의 개념과 가치 △인권의 목표 △인권 실현의 방법 △인권의 국제적 보장 △회원국의 의무 등 5개의 문단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먼저, 전문은 인권이 모든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에 기반한다는 인권의 원천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깔린 철학적 바탕은 자연법 사상이다. 실체법보다 우위에 있는 자연의․불변의․궁극적인 법을 얘기한 자연법 사상은 17세기 사회계약론과 18세기 절대주의에 대한 투쟁의 토대가 되었다. 자연권 이론은 권력보다 더 우위에 있는 권위에 호소하여 인권 보장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였다. 그러나, 자연권 이론은 '자연법으로 고려할 규범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누가 어떻게 결정하느냐'는 비판을 받았고, 19․20세기 동안 실증주의의 공격 속에 위축되었다.
자연법 사상의 부활은 역설적으로 2차대전의 참상을 통해 이뤄졌다. 개인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실증주의 체계에서 파생된 공포와 나치즘에 대한 극도의 혐오가 자연권의 부활을 가져온 것이었다. 이렇게 부활한 자연권 사상은 전문에 등장하는 ‘타고난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문구를 통해 선언에 투영된다.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과 그 존엄성에서 기원하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는 '양도할 수 없고, 시효로 소멸되지 않는, 법령으로 움직일 수 없는, 불가침의,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국가 권력을 비롯한 모든 권력에 우선하는 것이며, 국가권력은 조절은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권을 폐기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못박은 것이 전문의 첫 문장이다.
전문은 또한 이러한 인권의 원칙을 무시한 2차대전의 참화를 환기시키고 있다. 인류의 평화를 위협한 것은 전체주의였으며, 그것은 곧 자국민의 인권을 무시하는 속에서 등장한 ‘야만적 행위’였다. 따라서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곧 ‘전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라는 답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는 선언의 채택과정을 살펴볼 때 불가피한 결과이기도 하다.

1948년 9월에서 12월까지 열린 제3차 유엔총회는 선언의 초안을 아주 면밀히 검토했다. 모든 단어와 모든 문장이 샅샅이 검토되었고, 무려 1천4백 회의 투표에 부쳐졌다. 다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세계인권선언이 12월 10일에 반대 없이 채택된 것은 이러한 고된 타협의 결과였다. 선언에는 매우 다양하고 심하게 갈등하는 정치․철학․종교 체계와 문화적 전통을 넘어 하나를 이룬 승리의 나팔소리가 묻어있다. 이런 까닭에 선언 전문은 ‘모든 국민들과 나라들이 성취해야 할 공통의 기준’으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하고 있다.

1998-12-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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