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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으악분업

현장에서 미래를  제63호
최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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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으악분업’


최 형 록
ꡔ진보평론ꡕ 편집위원





19세 소년이 오른쪽 콧구멍을 통해서 영양공급을 받고 있다. 수척한 모습에 눈은 초점을 잃었고 과도한 긴장으로 손발이 오그라든 채. 프랑스에서 TV를 통해서 방영된 어떤 환자의 슬픈 모습. 이 병의 희생자들은 불가피하게 정신능력과 신체기능이 저하된다. http://www.lemonde.fr, 2000년 11월 17일자.

2000년 9월 현재부터 2020년까지 영국에서만 앞으로 13만 6천명이 이 병으로 사망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병은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이라고 하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것으로도 부족해서 엉덩이에 뿔(?)까지 난, 니카라구아 혁명을 기억에서 이제야 지워버린 미국의 전직 대통령 레이건이 추진한 ‘별들의 전쟁’은 그 정식명칭이 ‘전략방위구상’(SDI, Strategic Defence Initiative)이었다. 별들의 전쟁에 상응하는 것이 ‘광우병’이라면 전략방위구상에 상응하는 것이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인데 의학적으로 보다 정확히 말해서 ‘우해면양뇌증’(牛海綿樣腦症, ESB, Encephalopathique Spongiforme Bovine)이라고 불린다.
이 병은 이미 16년 전, 1985년 2월 영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서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의 변종(vMCJ)으로서 ‘광우병’이 사람에게 전염되어 발병한다. 현재 그 전염경로와 발병과정이 자세하게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고 치료방법 역시 속수무책인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마비, 치매, 발광 등등이다. 이런 외적 증상을 확인하는 방법이 척수액 테스트이다. 그 결과 신경세포의 사망에 특징적인 단백질 14-13의 양이 증가했다면 감염이 거의 확실하다. ꡔ과학과 미래ꡕ, 파리, 2000년 9월호, 8면.
현재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 과학자들은 인간의 혈액이 전염경로에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혈액검사로 전염여부를 보다 용이하게 대규모로 식별할 수 있고 예방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로이 앤더슨에 따르면 ‘우해면양뇌증’의 잠복기가 길게는 60년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잠복기가 길다는 것은 그만큼 조기발견이 쉽지 않고 발견하더라도 치료의 시기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vMCJ에 중대한 요인인 프리온의 전염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프리온을 133℃의 고온과 3바(bar, 기상에 있어서 고기압이 1035mb 등등인 것을 생각해 보라)의 고압상태에 20분간 유지해야 한다. 위의 책, 9면.
그런데 이런 상황은 실험실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해결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쇠고기의 유통을 통제해야한다. 2000년 9월 현재 소의 뇌, 흉선, 눈알, 척추는 전염성이 크지만 비프스테이크의 주된 원료인 근육은 전염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쇠고기 식용을 피하고 있고 정부당국은 육우시장의 위기에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육우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정신적 강박상태에 빠져 있다고 한다. http://www.samizdat.net, hacktivist news service, 프랑스 농민총연맹의 발표문.

‘광우병’ 사태는 인간의 뇌손상 등 치명적인, 생명의 차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공동농업정책에 대한 대개혁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농축수산물 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정부당국이 예방조처로서 외국산 육우에 대한 ‘검역’을 과연 실질적으로 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오히려 ‘미친’ 것과 관련해서, 특히 민중의 건강과 관련해서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미친’ 것은 ‘의사(疑邪)들과 약사들의 고봉밥 챙기기’에 따른 의약분업의 형해화(形骸化)가 아닐까? 이 ‘으악분업’은 해방 반세기에 이른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한강의 기적’이, 경제발전이 과연 무엇인지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는 경종이 아닐까? 이 ‘으악분업’은 지식인의 이성의 도구화, 긍지가 아닌 오만과 사회적 책임이 아닌 철면피, 자신을 둘러싼 자본에 의한 병리적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아닌 자본주의적 시장 범주에 따른 공급자-수요자 관계에의 매몰,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적 문화산업의 ‘피조물’화 되어가고 있는 민중의 맹목성이라는 한 경향 그리고 과학주의적이고 환원론적 세계관의 신전에서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긴장, 상대적으로 ‘순수한’ 이론과 ‘불순한’ 실천의 긴장을 풀어버린 일부 혁명적 지식인들 등등, 대한(大恨)민국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편의 ‘비극’이 아닐까? 특히 사망자에 대해서 허위 의료보험비를 청구하는 것은 조선시대 말기 삼정의 문란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백골징포’(白骨徵布)의 현대판이 아닌가? 바로 이러하기에 ‘비(非)의사들’이 ‘의사(疑邪)들’에 무력하며 준비된 정권은 좌충우돌하고 ‘으악대생들’은 의(疑)롭게 봉기하며 병원노련(老鍊)은 의사들에 대한 ‘항의파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의료자본에 대한 투쟁을 보다 현명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참고할만한 것이 프랑스의 보건의료 상황이다. 세계보건기구는 2000년 6월에 191개국의 보건의료체제를 조사한 결과 프랑스를 최우수국가로 판정했다. 그러나 이런 자랑을 무색케 하는 ‘보건의료의 사회적 불평등’이 밝혀졌다. 프랑스의 보건 및 의료연구 국립연구소(lnserm)는 9월 12일 위와 같은 제목의 집단저작을 출간했다. 이 저작에 따르면 사회계급적․직업적 범주에 따라서 사망률, 질병, 장애에 현저한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학이 지향하는 예방의학의 혜택이 노동자들이나 사무직 종사자들보다는 회사의 간부직 종사자들에게 더 많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일간 ꡔ르몽드ꡕ, 파리, 2000년 9월 13일자.

실태를 보면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최악의 상태로 드러나는 것이 사망률에 있어서 사회적 범주에 따른 불평등의 골이다. 즉 프랑스의 인접국가들에서 생리적 취약성이 현저해지는 45세~59세의 사망률이라는 지표에서 육체노동자들의 비율이 비육체노동자들의 비율에 비해서 33%~55% 높은데 비해서 프랑스의 경우에는 71%나 더 높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간부직원이 노동자보다 6년을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한국은 과연 그 격차가 얼마나 클까? 그리고 이런 비율은 남녀의 성별에 무관하다.
이 저작의 집필자들에 따르면 사회계급적 불평등이 사망률에 그치지 않고 관상혈관질환, 프랑스에서 사망의 제1원인인 암, 구강-치아건강, 교통사고시 출혈정도와 사망 그리고 질병과 장애에 따른 사회적 결과에 있어서도 현저하다고 한다. 유아사망률에 있어서도 중간계층의 경우 신생아 1,000명당 6.1명, 사무직 종사자들의 경우 6.6명임에 비해서 농민의 경우 8.5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계급․직업적 불평등은 노후생활에 있어서도 계속되며 그런 불행은 특히 능력과 관계가 있다. 오늘날 반민중적 ‘사유화’(privatization) 민영화라는 말은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관계를 은폐하고있다. 이런 교활함은 ‘관치금융’의 폐해를 들면서 국책은행을 비롯한 은행들의 매각․합병추진에서도 드러난다.
에 따른 ‘산업예비군’ 즉 실업자들의 전직(轉職)훈련이 부재한 상황에서 향후 노동민중의 생활에 시사하는 바가 충분하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민중은 3중의 착취를 당하고있다. 노동과정에 있어서의 착취, 조세와 예산집행에 있어서의 착취(각종 조세불의 그리고 최근 안기부자금의 선거자금으로의 유용), 사회보장제도에 있어서의 착취(‘으악분업’, 사실상 국공립이지만 재단이사회가 전횡을 부리는 각급 사립학교들의 부정․비리들)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사회가 자본주의적인 한,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도 사회계급적 불평등은 계속된다. 둘째, 한국에서는 꿈같은, 프랑스에서는 환자가 의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함에도 프랑스의 보건의료현실은 불평등하다. 그러나 이곳보다는 훨씬 덜 악질적인 보건의료체제의 건설을 위해서 프랑스 노동민중은 1848년 2월혁명 이래 가열찬 투쟁을 전개해왔다. 즉 ‘하느님이 보우하’신 것이 아니었다.

사족: 참고한 일간 ꡔ르몽드ꡕ지에는 1950년 9월 13일에 샤를 파브렐이 쓴, 굶주린 30만의 한국인들이 ‘공포의 계곡’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전재되어있다. 그는 그 참상을 단테의 ꡔ신곡ꡕ 중 일절을 인용하며 끝맺고있다. “여기 들어오는 그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50년이 지난 오늘날 정녕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01. 2. 4.) 한/노/정/연

2001-02-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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