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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여성조사단이 목격한 한국전쟁(2)

현장에서 미래를  제64호
후지메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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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여성조사단이 목격한 한국 전쟁(2)** 현장에서 미래를 2000년 8․9월호에서 계속. 본 논문의 원출처는 여성․전쟁․인권 학회지 편집위원회『여성․전쟁․인권』3(2000년).



후지메 유키(藤目ゆき)**
** 후지메 유키는 현재 오사카 외국어대학 조교수로 재직중이며 전공은 여성사이다.





제3절 미군의 성폭력
1951년이라는 시점에서 행해진 조사단의 조사와 보고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군부에 의한 성폭력 그 자체를 중대한 전쟁 범죄로 간주하는 시점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보고서에는 성폭력의 문제가 독자적으로 취급되기보다는 잔혹행위의 일부분으로 취급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미군의 침략전쟁 범죄사중에서 불가시화(不可視化) 되어 왔던 미군에 의한 성폭력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한다.
미군의 점령 하에 체포되어 살해당한 여성의 다수는 잔혹한 성폭력의 희생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평양의 선산리에서 여성조직의 서기직을 맡고 있었던 어느 여성은 미군에게 알몸으로 끌려다닌 후에 불에 그을린 철봉으로 음부가 찔려 살해되었다. 그녀의 유아는 생매장되었다 보고서, 隣人․金性玉의 증언, p.21.
. 강원도 평양군 옥조리에서는 농민 여동조의 임신 8개월의 며느리가 미군에게 연행되어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져 나무에 묶여졌다. 미군은 그녀의 배를 찢어 아기를 꺼냈다 同前, 강원도민주여성동맹위원장, 권진희에 의한 공식보고, p.248.
. 같은 강원도의 철원군 이동면에서는 32세의 김학순과 그녀의 아이들이 미군에게 체포되어 발가벗겨진 채 총검으로 배가 찔려진 후 사살 당했다. 아이들은 그녀의 옆에서 굶어 죽었다 앞의 p.249.
. 원산에서는 여성단체의 의장직을 맡고 있던 25세의 여성이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체포되었다. 두 명의 미군 병사와 한 명의 한국 병사가 봉을 자궁에 곶아 태어나려고 하는 태아와 그녀를 살해했다 잎의 피해자의 시어머니 신영옥의 증언, p.250.
. 개천에서 여성운동의 임원이었던 농부를 체포한 미군은 그녀를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고 그녀의 남편과 단체에 대해 말하게끔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였다. 이를 보고있던 8세의 조카가 달려들자 사살하였다. 고문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수일간 계속되었고 그녀는 결국 사살 당했다 앞의 피해자의 언니 이진현의 증언 pp.25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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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속에서도 미군에 의한 강간과 성 고문은 빈번하게 행해졌다. 남편, 아기, 부모, 형제들을 모두 미군에게 살해당하고 혼자만 살아남은 송숙매(21세)는 해주에서 투옥되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져서 알몸이 되었다. 데리고 있던 아이는 굶어 죽었다 앞의 본인의 증언, p.225.
. 간호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던 20세의 김춘자는 발가벗겨져 이리 저리 끌려다닌 후 투옥되었다. 강간하려는 미군에게 저항한 춘자는 총검으로 살해당했다. 모친이 후에 발견한 춘자의 사체는 상처투성이로 몸은 두동강이 나 있었다고 한다 앞의 피해자의 모친 김숙선의 증언, p.230.
. 강원도 문천군 만선리의 감옥에서도 여성들은 구타당했고 그 중 20명은 폭행 당했다. 강원도 원산의 감옥에서는 미군이 밤마다 소녀들을 폭행하였다 앞의 원산의 감옥에서 20일간 수용되어 있던 탁옥순의 증언,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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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생식기와 유방에 대한 공격,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묶여지는 것 등은 여성에 대한 고문으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임신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위와 같은 고문이 행해졌고 태아가 살상되는 것도 드문 예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폭력은 활동가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점령군의 성적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선의 수많은 여성들이 희생된 것이다. 강간, 강간 치사, 강간미수 치사의 사례는 보고서 중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성폭력 피해를 수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국제여성조사단의 조사중에서는 일정의 통계적 수치가 기록되어 있는 지역이 있다.
강원도 민주여성동맹의 권진희는 조사단에 대한 공식보고에서 점령기「13만의 주민이 있던 강원도에서만 2,903명의 여성이 미군과 한국군에게 폭행 당했다」라고 했다 앞의 p.249.
. 이 보고에서는 「안변군 안동면의 미연리에서는 농민 여랑선의 가족 중 3인의 여성이 방공호로 끌려갔다. 미군이 폭행하려 할 때 이를 거부한 그녀들은 유방이 잘리고 자궁에 뜨거운 철이 넣어져 살해되었다」라고 하는 사례와 「원산에 살고 있던 42세의 조옥리는 14인의 미군에게 폭행 당했다. 그녀는 생존하고 있으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지금은 동조촌에 살고 있다」라는 사례도 포함되어 있다 앞의 pp.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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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서의 공식보고와는 별도로 진행된 주민들의 증언에서도 성폭력의 피해를 접할 수 있었다. 전권화는 선교사로 49세의 여성이다. 형제 부부가 비행기의 기총소사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에 형제부부의 아이 여섯 명을 키우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시어머니 윤순자의 수난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어느 날 밤 자고 있던 있는 윤순자는 미군에 의해 「두 명의 창녀」와 함께 자동차에 실렸다. 순자는 도망쳤으나 따라온 미군 병사에 의해 폭행 당하고 사살되었다 앞의 p.249.
. 원산에 살고 있던 55세의 김성희는 50년 11월 일어난 이웃의 수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기독교인의 신봉균이 집을 있을 때 다섯 명의 미군병사가 집으로 들어와 제일 나이가 많은 신화순을 두 명의 여동생들 앞에서 폭행하였고 울면서 도망가던 동생들을 옆집 앞에서 사살했다. 신화순은 3일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앞의 p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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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적 숫자가 제시된 다른 지역은 평안남도 북부의 개천면이다. 이 지방의 인구(8할은 농민)는 원래는 8만 명이었지만 다수가 전쟁을 피해 개천면을 떠나 조사단이 방문한 시점에서는 6만 명이었다. 50년 10월의 4일간 개천을 점령했던 미군 제27장갑사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군인 9만 명에 의해 주민 1,342명이 살해당했고 성적 폭행을 당한 여성들은 86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창피해서 이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앞의 평안남도인민위원회장 김병오의 보고, p.254.
않을 것을 감안하면 860명이라는 숫자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개천에서도 조사단은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을 수 있었다. 오인분은 28살의 딸 김융주가 수명의 미군 병사에게 폭행 당해 익사 당했다고 했다 앞의 p.257.
. 이순실이라고 하는 젊은 여성은 알몸으로 12일간 병사들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앞의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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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보고서에서는 미군이 군부 「창가(娼家)」를 만들어 조선인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연행, 감금하여 성노예화했던 사실에 대해 3개의 지역이 언급되고 있다.
첫 번째 지역은 평양이다. 강복선의 일가는 세 살과 8개월의 아이를 포함해 5인 가족으로 평양민주여성동맹 본부의 파괴된 건물 지하, 길이 1미터, 폭 2미터의 좁은 공간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강복선의 딸로부터 미군의 「창가」가 존재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그녀에 의하면 미군은 오페라 하우스와 그 주변의 주택을 「군용창가」로 하고 거리에서 여성들을 붙잡아 강제적으로 「창가」로 데려 갔다고 한다. 「창가」로 끌려갈 것이 두려워 그녀는 40일간 좁은 반공호에서 나오지 않고 몸을 숨겼다. 그녀의 친구는 몸을 숨기고 있던 중 그녀의 남편이 처를 숨겼다는 이유로 미군에게 구타당했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 평양시로 온 권선곽이라는 노동자도 조사단에게 이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보증했다 앞의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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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지역은 신주지방 사삼리이다. 사삼리의 김숙선은 여성단체의 활동가였다. 마을에서는 240명이 학살당해 그녀의 아이와 남편도 살해당했다. 그녀에 의하면 미군은 「창가」를 만들어 소녀를 포함한 여성들을 붙잡아 강제로 데리고 가서 「아름다운 여성은 미군과 영국군에게 그 이외의 여성들은 한국군에게 보내졌다」라고 한다. 김숙선은 「창가」에 있던 3명의 소녀가 생존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여성들은 살해당했다고 했다 앞의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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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지역은 개주이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개주에서는 860명의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보고된 지역이다. 개주군 장리가 2번지에 살고 있는 이진현의 증언에 의하면 미군은 「여자 사냥」을 하여 그녀들을 「창가」에 집어넣었다. 진현과 그 밖의 젊은 여성들은 얼굴에 흙칠을 하고 노인과 같은 옷을 입음으로서 미군의 폭행을 피하려고 했다고 한다 앞의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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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미군은 조선전쟁 중 북한의 여성을 성폭행하고 「창가」라고 하는 강간센타를 설치하였다. 뒤에서 살펴보는 데로 같은 시기의 남한에서도 미군의 강간 범죄는 다발하였고 미군주재지역 주변에는 군부 매춘가가 형성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연행에서 상징되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미군의 침략과 점령에 의해 한반도는 새로운 제국주의의 폭력에 놓여졌고 그 폭력은 여성의 신체로 향해져 있었다.


제3장 국제여성조사단의 방한 이후의 한국전쟁
앞에서 살펴본 데로 국제여성조사단은 구체적인 조사를 통해 미군이 한민족을 절멸하려고 한다는 점을 세계에 고발하였다. 조사단은 보고서의 「결론」에서 한국인민에 대한 UN군의 잔혹행위는 인도에 원칙에 반할 뿐만 아니라 국제법에도 위반하는 전쟁범죄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잔혹행위를 명령한 것은 전선의 장교일지라도 그 책임은 유엔군을 자칭한 침략군의 미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등의 사령관과 자국 군대를 한국에 파병하고 유엔에서 한국전쟁에 찬성 투표를 한 나라의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 책임자들을 전쟁범죄자로서 고발하여 세계의 인민에 의해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보고서 결론 pp.264~265.
. 재판은 오늘날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으나 조사단의 결론의 정당성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전쟁의 즉시 종결, 외국침략군의 즉시 철퇴, 침략의 결과로서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 인민에 대한 즉각적인 원조를 「보통인의 이름으로 세계의 모든 인민에게」 호소했다 앞의 결론 p.265.
. 조사단에 참가했던 여성들은 귀국 후 한국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 이를 이유로 고소와 투옥이라는 정치적 박해를 받기도 했다 前揭 ꡔ平和와 幸福을 위하여ꡕ, p.50.
. 여성조사단의 파견 이후에도 국제민주여성연맹은 한국의 평화를 위한 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조사단의 방한 후 「유엔군」의 전쟁범죄는 한층 노골화되어 휴전과는 거리가 먼 상태가 계속되었다.
네이파암탄 공격과 무차별 폭격이 보다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여성조사단이 한국을 떠난 후부터였다. 지역 전체를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네이파암탄의 사용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은 휴전까지 네이파암탄을 한국에 퍼부었다. 52년 1년간 북한에는 1,500여만 발이 투하되었다고 한다 김희일/재일본조선인 과학자협회 역사부회 역, ꡔ미국 조선침략사ꡕ 雄山閣, 1972, pp.290~291.
. 52년 9월 평양을 방문한 모니카는 여성조사단의 일원으로서 방한했을 때에는 폐허가 되기는 하였으나 건물의 잔해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의 잔해조차 보이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前揭, 「내가 본 조선」, p.124.
고 했다. 그리고 여성조사단의 방한 당시는 세균병기와 독가스의 사용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었지만 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 6월에 국제과학 조사위원회의 조사단의 방한에 의해 세균전과 독가스 사용의 증거가 제출되었다. 포로가 된 미군의 자백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세균전을 위해 미군은 조선인민군, 중국의용군의 포로를 인체 실험에 이용했다고 한다 前揭, ꡔ세균전흑서ꡕ 및 林茂夫 ꡔ주「한」미군ꡕ, 二月社, 1978, pp.84~96. 미국정부는 세균병기 사용을 부정했다. 그러나 세균전에 대해 자백한 38명의 포로 중 석방, 귀국 후에 자백을 취소한 것은 10명에 지나지 않는다.
. 포로학대가 노골화된 것도 국제여성조사단이 한국을 떠난 후 부터였다. 원래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조사단의 사정외 (射程外) 였지만 휴전회담이 시작된 51년 7월 이후 미군 및 한국, 대만의 관계기관에 의한 포로에 대한 반공 「심사」가 시작됨과 동시에 수용소내의 포로학대는 격화되었다. 포로는 고문을 받고 북한과 중국에의 귀환을 거부하게끔 강제되었고 스파이가 될 것이 강요되었다. 포로들은 이름뿐인 「석방」으로 제네바 협정서에 규정된 모국 피송환권이 빼앗겨 한국군․대만군에 강제 편입되었다 前揭, ꡔ주「한」미군ꡕ, pp.98~108.
. 52년에는 거제도 수용소의 포로에 의한 저항투쟁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포로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휴전은 연기되었다. 53년 5월 미군에 의해 평양근교의 담이 폭격 당해 대홍수가 발생하여 한국민중은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前揭, ꡔ한국전쟁ꡕ, pp.221~224.
. 국제민주여성동맹은 제 단체와 협력하여 한국 휴전을 위한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조사단 보고서의 배포 행위를 시작으로 「전쟁으로 황폐한 나라에 전염병을 발생시키는 것은 지역주민 전체를 절멸시키는 것으로 그 어떤 방법보다 비열한 것이고 증오 받을 행위이다.」 前揭, ꡔ平和와 幸福을 위하여ꡕ, p.51.
라고 세균전쟁 반대 캠페인을 시작으로 한국에 원자폭탄의 투하를 준비하는 미국에 대해 스톡홀롬 집회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53년 6월에는 코펜하겐에서 70개국의 대표의 참가로 세계여성대회가 개최되어 한국의 즉시 휴전을 호소했다. 동 대회에 조선으로부터 파견된 5명의 대표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대표와 함께 덴마크 정부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러나 대회의 연단에는 공화국의 깃발이 게양되었고 평화와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의 연대를 호소하는 조선여성의 메시지가 대독되어 참가한 여성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대회는 한국휴전을 기필코 쟁취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同前 p.151.
식민지종속국의 여성해방운동과 결합되어 있던 냉전체제형성기의 국제여성평화운동은 서구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의 시점에서는 간과되기 쉬운 한국의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한 국제여성조사단과 국제민주여성동맹의 활동은 현대 세계여성사에 선명한 광채로 남아 있다.
반면 「국제여성조사단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으로서 남한의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남한의 상황은 북한만을 방문한 여성조사단과 국제민주여성동맹의 시야에는 쉽게 들어오지 않았으나 민중의 수난은 남쪽에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전쟁초기의 4개월간 미군의 소이탄과 네이파암탄에 의한 공격에 의해 남한의 50개의 도시와 1만 2,460개의 농촌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인민군이 남한에 들어오자 이승만정권 하에서 지하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남조선여성민주여성동맹은 부활하여 각지의 인민위원회와 연대하여 공개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의 진격으로 인민군이 후퇴하자 인민군과 인민위원회를 지지하여 활동했던 사람들은 북으로 가던가 아니면 남에 남아 죽음을 기다리던가 빨치산에 참가하여 싸울 것인가라는 극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예를 들면 婦總, 남조선여성동맹에서 여성운동을 담당해 왔던 김사임은 미군의 서울침공 후 동생의 집에 잠복해있었지만 50년 11월 이승만 정권의 特務에 체포되어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유아와 함께 학살되었다. 前揭, ꡔ아리랑의 女ꡕ, pp.190~200.
.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남한의 빨치산 부대는 재편성되어 많은 여성동맹원이 빨치산에 참가하였다. 빨치산의 수는 2만에서 15만으로 추정한 기록도 있지만 중간 규모의 읍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거점지역의 토벌작전으로 51년 말부터 52년 초에 걸쳐 2만에 가까운 빨치산이 체포․살해되었다. 다수의 여성들을 포함한 게릴라 부대가 험한 산지의 조건하에서 본거지의 주민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 2년간 살아남아 52년에도 활동하였다고 한다 前揭, ꡔ남부군ꡕ, pp.279~281. 前揭, ꡔ한국전쟁ꡕ, pp.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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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토벌작전의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부근의 거창군 신원면, 산청군 금서면, 함양면 유림면, 남원군 주천면, 함평면 월야면 ,라산면, 순창면 동계면, 쌍치면 등에 있는 산간 부락에서는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지리산에 가까이 있는 경상남도의 산청, 함양, 거창 지역의 학살행위는 가장 가혹한 예로서 알려지고 있다. 토벌대가 이 지역의 주민이 빨치산을 지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51년 2월경 4일간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인구 1,400명 정도의 거창에서는 주민의 3분의 1 또는 3분의 2에 해당하는 주민 5백~천명이 살해되었다. 유아를 포함한 아이들 227명, 60세 이상의 노인 180명과 거의가 여성과 아이들만의 촌민 663명이 「통비분자(通匪分子)」로서 남김없이 기관총으로 학살되었다. 제1장에서 살펴본데로 인천상륙에 앞선 국민보도연맹사건과 함께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한의 민간인 사상자수는 99만 명을 넘고 그 중에서 전라남도는 20만 명이 넘는다 前揭, 「冷戰期에 있어서 人權侵害와 그 보상문제」, p.223. 前揭, ꡔ주「한」미군ꡕ, pp.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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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미군이 일시점령했던 북한 지역에서의 성폭력 상황을 살펴보았지만 이는 남한의 상황의 표현이기도 하다. 남한에서는 미군의 강간사건과 매춘은 미군정 하에서 다반사였고 미군정 하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미군기지주위의 매춘가인 「기지촌」은 한국전쟁 하에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졌고 전쟁에서 부와 남편을 잃은 여성과 피난민 여성들이 한 미군 관리매춘의 희생자가 되었다. 미군정 하에서 체포․살해되었던 좌익운동가의 여성들을 노린 매춘업자가 군부․경찰․우익테러리스트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前揭, ꡔ아리랑 고개의 여자ꡕ, pp.147~148.
. 한국전쟁 중에는 난민 중에서 생활이 어려운 소녀들을 매춘숙소에 팔았다고 한다 前揭, ꡔ한국전쟁ꡕ, p.160.
. 「기지촌」은 일제시대의 공창지구․일본군 매춘지구가 그대로 기지촌이 된 경우가 적지않다. 일본군 「위안부」가 된 조선인 여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군기지촌에서 매춘을 하였다고 한다 주한미군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 編/ 徐勝외 역, ꡔ주한미군범죄 백서ꡕ, 靑木書店, 1999년, pp.160~161.
. 미군은 남한 지배에 일본이 남기고 간 억압기구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공창제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의해 한반도의 전화는 꺼졌으나 조선의 남북분단은 고정화되고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되었다. 소수이지만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남한의 빨치산 존속세력은 휴전협정의 대상이 되지 못하여 공식적인 철수가 불가능하게 되어 남쪽에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 죄 없이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은 반공체제하에서 「빨갱이」,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어져 정치적으로 박해 당했다. 이들에 대한 국가배상은 현재까지 실현되고 있지 않다. 「기지촌」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역대의 친미방공정권의 정책에 의해 존속되고 있다. 92년의 윤금이 사건으로 대표되듯이 미군에 의한 범죄․인권유린 상황이 반복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제여성조사단․국제민주여성동맹이 보지 못했던 한국전쟁중의 남한 민중의 수난은 오늘날 위와 같은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끝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일제시대의 식민지지배 기구와 친일파를 이용하여 남한을 지배했다. 또한 미국은 남과 북 민중의 조국통일에의 노력을 군사력으로 억압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였다. 미국이 지출한 군비는 200억불 이상이었고 네이파암탄을 시작으로 사용된 군비품은 대일전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7,300만 달러 이상, 병력은 2백만 명 이상에 달했다. 무차별 폭격․집단 학살에 의해 남과 북의 120만 호가 넘는 가옥이 파괴되었으며 1천만 명 이상이 이산가족이 되었다 前揭, ꡔ미국조선침략사ꡕ, pp.321~322.
. 3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살해되었다.
일본은 한국전쟁의 전과정을 통해 미군의 출격과 보급을 위한 기지였다. 일본경제는 미군의 「특수」에 의해 다수의 일본인이 군수산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부대의 이송, 무기탄약 등의 적재와 운송, 무기의 정비와 수리, 소해(掃海)작업등 미군의 작전에 불가결한 작업에 종사했다. 비인도적 병기에도 일본은 깊게 개입하였다. 네이파암탄은 일본에서 제조․조달되었다. 세균전에는 구 일본군 관계자가 협력했다. 북한․중국인 포로의 일부는 일본에 납치되어 학대 당했다라고 한다. 일본은 한반도에 유산을 남겨 미국의 남한지배의 토대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한국전쟁 수행을 전면적으로 도왔다. 형식상 일본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으나 적은 병력을 파병한 「유엔군」참전국 보다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질참전․침략전쟁 범죄에의 가담한 것은 확실하다. 국제여성조사단의 「수천 수만인의 남녀노소에 가해진 고문과 학살의 이야기, 물질적 파괴의 이야기」는 일본인의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의 발발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려고 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 당시 동서냉전의 서방제국에서 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조사단의 멤버가 박해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제3장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군점령하의 일본에서는 일본민주부인협의회가 1951년 12월에 조사단 보고서를 번역 ꡔ피의 외침ꡕ이라는 제목으로 발행, 배포한 것을 이유로 서기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도『전후 일본여성사』大月書店, 1974년, P84.
. 미군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탄압을 자행하였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탄압은 행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전쟁의 사실을 일본 국민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 사실의 정당한 결말, 즉 한국에 출동한 유엔군의 책임자가 세계인민의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아 처벌되었는가. 일본은 한국 식민지지배의 죄업에 더해 한국전쟁의 가담한 범죄를 인정하여 보상했는가. 모두 아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구축된 아시아 냉전구조의 중심이 되었던 일미안보체제는 미소냉전의 종언으로 해소되었으나 97년의 신일미방위 협정을 위한 가이드라인에 의해 오히려 강화되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99년의 주변사태법 성립을 시작으로 북한을 가상의 적으로 규정하여 제2차 한국전쟁을 상정한 전쟁체제의 확립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고 있지 않다. 일본정부는 미군․한국과의 군사적 동반을 강화하여 전쟁의 재편에 맞추어 일본 국민은 한국전쟁에 관한 인식을 결여한 체 북한 위협론의 집요한 선전과 민족배외주의의 선동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 치마저고리의 여성을 시작으로 재일한국인이 공격당하는 등 흉악한 사건이 반복되어 왔다. 국제여성조사단에 의해 반세기전에 기록된 이야기를 오늘날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다름 아닌 일본인의 이야기, 일본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노/정/연


번역: 박선영(해외연구원) s ypark0318 @ yahoo.co.kr

1970-01-01 04: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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