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 획 ◦ 번 ◦ 역
지구적 세계에서 노동자의 권리(1)
라다 드 수자 (Radha D'Souza)
이 글은 ‘아시아-태평양 노동자연대회의’(Asia Pacific
Workers Solidarity Links : 이하 APWSL)에서 1995년 11월에
출간한 것이다. APWSL은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 16개국의
민주적-진보적 노동조합, 노동단체, 개인들이 기층노동자 권익을
옹호하고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를 강화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자본운동의 국제화-세계화와 더불어 하나의 지구적 세계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노동자계급의 권리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글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양상과 국제적
수준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운동과제 등을 파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본지에서는 이 글을 3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이다.
= 목 차 =
서언
1. 새로운 세계
2. 아시아냐 태평양이냐?
3. 자유노동시장, 누구의 희생 위에서?
4. 국제계약 : 구(舊)와 신(新)
5. 사회적 조항 : 북(北)과 남(南)
6. 세계의 노동자 : 통일성은 사라지고 있는가?
7. 비민주적 세계에서 노동자를 위한 민주주의
서 언
아우바이야르(Auvaiyar)는 중세 시대 타미르국의
시성(詩聖)이다. 표준적인 학교 교과서들은 등이 굽고 지팡이를
짚었으나 지혜로운 얼굴을 지닌 나이든 여성, 아우바이야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지혜로운 얼굴은 아우바이야르의 시, 곧
현명함을 이해하는 열쇠인 것이다.
어느 날 한 왕이 자기 왕국의 모든 시인과 작가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자신의 통치에 대해 매우 만족해 하고 있었다.
시인과 작가들은 왕의 통치를 찬양하도록 기대되었다. 왕국의
모든 지역에서 시인과 작가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은 왕에 대한
찬양의 시와 긴 축송의 글을 썼다.
아우바이야르가 참석하지 않은 것은 금방 눈에 띠었다.
“왜, 아우바이야르는 오지 않았는가? 그녀는 내가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지?” 하고 왕이
물었다.
그녀를 찾으려고 사자(使者)를 보냈고, 결국 아우바이야르는 그
위엄있는 회합에 참석하게 되었다.
“왕을 위해 노래 하나를 지어 부르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시인과 작가들이 요청했다.
“예, 그렇게 하지요” 하고 아우바이야르는 말했다.
“당신의 왕국에 있는 모든 논의 논둑들이 튼튼하고 높게 서
있을지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게 전부인가?” 왕은 약간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이건 시도 아니다” 하고 어떤 사람들이 말했다.
“이건 왕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이 말했다.
“이건 모든 시인과 작가를 모욕하는 것이다” 하고 다른
사람들은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우바이야르를 비난했다.
그런데 한 시인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대는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하고 왕은 그에게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저는 제가 들어 본 시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그 시인은 대답했다.
“왜 그런지 설명해 보아라” 하고 왕이 말했다.
“당신의 왕국에 있는 모든 논의 논둑들이 튼튼하고 높게 서
있을 지어다!
논둑들이 튼튼하고 높게 서 있을 때, 논은 더 많은 물을 머금고
있을 것입니다. 논이 많은 물을 머금고 있을 때, 곡식은
풍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곡식이 풍부해질 때, 신민들은
풍요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신민들이 풍요로워지면, 그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인민들이 행복해지면 그들은 왕을 찬양할
것입니다. ... 그리고 그 같은 찬양의 노래는 왕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찬양입니다. ... 그리하여, ‘당신의 왕국에 있는
모든 논의 논둑들이 튼튼하고 높게 서 있을 지어다’라는 노래는
당신의 통치를 가장 지속적으로 찬양하는 바램입니다.
나는 사회적 조항(clause)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논쟁들에 대한
이 글을 쓰며, 자꾸자꾸 이 오래된 잠언을 떠 올렸다.
사회적 조항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부가 국내법 및 국제법, 특히 무역법에 사회적
조항을 규정하길 원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에
필수적인 진정한 물적 조건의 창조를 주장하는 사람들인데,
이러한 자유 가운데에는 부채로부터의 자유, 자본 규제, 그리고
인민들의 주권을 박탈하는 무역법의 축소 등이 포함된다. 자유의
행사를 위한 조건이 존재할 때, 그 자유는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작업은 더욱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자유를 찾는 내
자신의 탐색 과정의 일부가 되어 왔다. 이 글을 쓰는 즐거움은
내 연구가 나 혼자만의 작업이 아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다.
1. 새로운 세계
경제적 지구화(globalisation)는 언제나 가치개입적인 단어였고,
그로 인해 이 단어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단어의 현재적 용법의 의미는
GATT-1994(1994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로 알려진
다자간 무역 합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GATT-1994는 125개 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국제무역협정을 통해서 정식화되었으며, 그
협정을 강제하기 위해 국제기구, 이른바 세계무역기구(WTO)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경제적 지구화는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전제에 토대를 두고
있다:
a) 모든 국가는 평등하고, 각국은 서로 평등한 주체로서 상호
이익을 위해 서로 무역한다;
b) 무역은 자유로워야 하고, 모든 국가 개입과 규제는
자유무역을 왜곡한다;
c) ‘자유무역’은 국가 개입이 없는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
시장이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그 내재적 가치에 기초하여
결정하는 ‘공정한 무역’이 될 것이다.
현재 이해되고 있는 경제적 지구화는 1994년에 열린 8차 라운드
다자간 무역협상(MTN)에 따라 종결된, GATT에서 정식화되었다.
GATT-1994는 지금까지 종결된 그 어떤 협상보다 가장 광범위한
무역 협상이고,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이전의 GATT
협정들은 상품무역에만 촛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GATT-1994는
지금까지 국가 주권의 배타적 특권으로 간주해 온 영역으로
무역의 범위를 확대한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특별한 보호를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무역 분야로 그 범위를 확대한다.
이런 무역 분야는 그같은 조치에 의해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취약하여 특별한 보호가 필요할 때, 그
같은 보호를 해 주었던 무역 분야이다. GATT-1994는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 시장으로, 그리고 하나의 지구촌 경제로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무역에 대한 그같은 모든 장벽을 낮추고 있다.
GATT가 포괄하는 새로운 분야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a)
농업 생산자를 위해 국내 지지(支持)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농업과 같이 주권 국가의 배타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문제들, b)
양적 규제, 차별적 특허제도, 최저 수입 가격, 최저 수입 의무,
다양한 수입 부과 조건들, 수출 제한, 국가 무역, 그외의 국경
조치 등과 같이 무역에 대한 비관세 장벽의 제거를 요구하는
시장 접근 요구조건들, c) 모든 나라들에 대하여 모든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공정에 대해 20년 동안 특허보호의 제공을
요구하는 무역 관련 지적 재산권(TRIPS), d) 투자 규제 또는
국내 산업 보호를 인가하는 규제, 수입에 불이익을 부과하는
규제, 또는 쿼타와 같은 수량 제한과 수출입 면허 등을 금지하는
무역 관련 투자 조치(TRIMS), e) 은행, 보험, 관광업 ... 등과
같은 서비스 관련 무역에 대한 규제를 금지하는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S) 등이다.
특히, GATT-1994는 은행, 보험, 중개업무 등과 같은 금융 서비스
공급에서 국가의 독점권을 제거하고, 금융 서비스에서 국내와
외국의 공급자 차별을 금지하고, 금융 서비스에서 국경을
넘어서는 무역을 허용하고, 금융 서비스 공급에의 진입과 그
같은 금융 서비스의 운영 및 인력충원에 필요한 인사제도를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서비스 무역에 대한 일반 협정(GATS)이
항공운송에 대해서는 적용되지는 않지만, 컴퓨터 예약 서비스,
항공기의 보수와 유지 서비스, 항공운송 서비스의 판매와
마케팅과 같은 관련 서비스에는 적용된다. 그러나 GATS는 각국
정부의 이민 규제를 허용하며, 노동 시장을 통합하기 위하여 각
나라의 GATS 바깥에서 상호협정 체결을 허용한다.
또한 GATT-1994는 협상, 중재, 분쟁의 청문회, 분쟁 당사자에
대한 구속력있는 결정, 거중조정(arbitration), 무역 보복의
정도 등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는 분쟁 조정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조정은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서 수행될
것이다.
지구화의 의미에 대한 가장 훌륭한 표현은 세계무역기구(WTO)
설립 협정 문건의 ‘국가(country)’에 대한 정의에 구체화되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본 협정 즉 다자간 무역 협정에서 사용되는 ‘국가(country)’
또는 ‘국가들(countries)’이란 용어는 세계무역기구(WTO) 내
모든 독립적인 관세 지역 구성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나라 또는 국가란 세계무역기구(WTO)와 GATT-1994의
목적상, 관세 지역(customs teritory)에 지나지 않는다.
46년 동안의 탄생과정
WTO는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붕괴된 세계경제를 안정,
부흥시키려는 전후의 노력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전, 지배적인 경제 열강들의 경제 정책은 안정된 교환율의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금본위제와의 관련 속에서
수행되었는데, 금본위 제도는 금의 자유로운 수출입과 금과
화폐의 자유로운 태환을 허용하였다. 그런데 선진국들은 양차
대전 사이에 보호관세를 통하여 자국의 해외 무역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격렬한 시장쟁탈전과 유동성 문제, 금본위제의
붕괴, 그리고 전쟁의 발발과 함께 무역 그 자체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주요 국가들은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에서
만나, 국제연합기구(UNO)의 대행기구로서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개발부흥은행(IBRD) 국제무역기구(ITO) 등 세 기구의 건설을
제안했다. IMF는 국제 금융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1946년 설립되었다. 1947년에 설립된 IBRD는 당시에는 유럽
재건을 돕기위해 고안되었는데, 그 업무영역을 다른 나라들로
확장했고, 나중에는 세계은행(World Bank)이 되었다.
국제무역기구(ITO)를 설치하기 위한 헌장은 1948년 하바나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ITO는 주로 미국의 반대 때문에 그때
설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 주요 경제 열강은 당시의 세계
무역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특별 포럼을 설치하는데 합의했다.
이는 1948년부터 기능하기 시작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통해 수행되었다. 1948년 GATT가 설립되었을 때,
회원국은 모두 23개국이었다. GATT는 무역촉진을 목표로
설립되었고, GATT의 결정은 구속력이 없는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 이후 GATT는 모두 8회의 다자간 무역협상을 열었는데,
8번째이자 마지막 라운드인 우루과이 라운드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설치 합의에서 그 전성기를 구가했다.
GATT의 성격은 1948년 출범 이후 여러 번 변화했다. 이 같은
변화의 본질은 WTO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GATT 협상의 첫번째 라운드는 1947년에 개최되었다. 이
라운드에서 GATT가 설립되었다.
두번째 라운드는 1948년에 개최되었다. 이 라운드는 첫번째
회기에 참여할 수 없었던 국가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9개국이 새로 가입했고, 따라서 GATT의 회원국은 모두 32개국이
되었다.
세번째 라운드는 2년 후인 1951년에 개최되었다. 이
라운드에서는 낮은 관세를 부과하던 유럽 국가들이 GATT 협상은
그들에게 불리하다고 느꼈다. 결국 400개의 합의 사항 가운데
147개 사항만이 타결되었다.
5년 후에 열린 네번째 라운드에서는 관세 축소의 범위가 적다고
느낀 몇몇 국가들과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느낀 유럽 국가들이
협상에서 철수하였다.
4년 후(1960-61)인 다섯번째 라운드에서는 유럽 국가들이 EEC란
단일한 무역 집단으로 GATT 협상에 복귀하였다. 오직 38개
국가들이 이 라운드의 협상 구성원이었다.
여섯번째 라운드는 3년 후 시작되었는데, 협상종결까지
3년(1964-67)이 걸렸다. 50개 나라가 이 라운드에 참여하였다.
11개 선진산업 국가들은 실질적인 관세인하를 제안했고, 35개의
개도국들은 특별 절차 아래에서 참여했다. 나머지 4개 나라는
GATT 가입을 추구했다.
일곱번째 라운드는 6년간의 휴식기를 거쳐 1973년이 되어서야
개최되었다. 협상은 보다 길어졌고, 6년만인 1979년에
타결되었다. 이 라운드는 구성원이 99개국으로 늘어나, 많은
수의 개도국들이 협상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덟번째 라운드는 7년 후인 1986년에 열렸다. 협상은 더욱
길어졌고, 협상 종결은 1993년까지 7년이나 걸렸다. Ashish
Agarwal : "GATT and The Developing Counties" : Mohit
Publications, New Delhi, 1994.
GATT의 8차 라운드 협상은 한편에서 유럽과 미국의 현저한
차이와 다른 한편에서 개도국들의 반발 때문에 7년이나 걸린
것이다. GATT의 8차 라운드 협상에 대한 보다 심층적 분석은
WTO의 설치가 서로 다른 무역 불럭들과 서로 다른 국가들 사이의
화해하기 어려운 이익 갈등의 불안정한 타협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분석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하나의 지구촌 세계에 여러 개의 무역 블럭이 존재하는가?
국제 무역과 해외 투자 문제의 전문가인 티에리 노이엘(Thierry
Noyelle)은 이렇게 말했다. “8차 라운드는 시작부터 힘들었고,
몇 가지 결정적 쟁점을 둘러싸고 여러 번에 걸쳐 거의 붕괴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으로 드러난 농업 개혁의 정도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연합(EU) 사이의 비통한 대결이었다. 그것은 2년간
교착상태, 미국의 행정정책의 변화, 농업 정책을 둘러싼 유럽
연합 내의 준(準)위기를 몰고 왔고, 이 같은 교착상태를 풀고
결론에 이르는 문을 열기 위한 마지막 순간의 현실정치와 타협이
함께 어우러져 탄생한 것이었다.” Thierry Noyelle :
“Revamping World Tade : What`s in it for the South” :
reproduced in “Social Clause in Multilateral Trade : A
Dossier on Labour Standards, Environmental Standards and
Human Rights in Global Trade” : Centre for Education and
Communication : New Delhi, 1995.
미국 관리의 말에 따르면, “EC는 그것(WTO)을 301조(미국의
불공정 무역법)에 대한 일종의 제한으로 간주했다.” United
States Imfomation Service, Wireless File, Backgounder
January 7, 1994.
그러나 미국은 GATT의 설립을 국익에 유리한 것으로 보았다.
미국은 1948년 GATT 형성을 거부했으나, 국내 경제문제와
장기화된 경기 침체, 실업 및 대량의 재정적자와 국채 ... 등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는 그것의 형성을 강하게 밀어 부쳤다.
미국무성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우루과이 라운드의 즉각적이고도 성공적인 완결을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전 세계에서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낮추고,
세계 무역을 위한 새로운 다자간 무역 규칙을 설정할 것이다.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미국의 공산품, 농업 생산물과 서비스
등에 대한 해외 시장의 문을 열기 위한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될 것이다. ... 미국은 자신들이 포괄적인 농업무역
개혁, 상품과 용역에 대한 시장 접근의 확대, 지적 재산
서비스와 투자 같은 새로운 영역에서 의미있는 규칙의 확립과,
개발도상국들의 지구적 무역 체제에로의 보다 완벽한 통합 등을
추구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 왔다.” US Department of States
Dispatch Supplement, August, 1993, Vol 4, No 3.
빌 클린턴은 GATT 협정조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NAFTA가
중요한 이유, GATT가 중요한 이유, 우리의 아시아쪽 접근이
중요한 이유, 이번 아메리카의 정상회담이 현상적으로 중요한
이유 ... 는 다음과 같은 까닭입니다. 즉 우리가 파는 물건을 사
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까지 그리고 우리 국민의 노동이 더
많은 댓가를 돌려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미국은 성공할 수
없으며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나라 노동 대중의 생활
안정을 결코 회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노동에 대한 자유 시장과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허용하는, 공정하고 점점 더 개방적인
세계 무역 체계를 가질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GATT 협상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상호 만족스러운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끌며 지연되었다.
GATT가 다자간 무역 기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협상은 미국과
유럽 연합(EU) 사이의 양자간 협상이었던 셈이다.
일단 양측이 1992년 11월과 1993년 12월 14일 제네바에서 블레어
하우스 협정(Blair House Accord)에 조인함으로써 그들간의 상호
이해에 도달하자 마자, 8차 라운드의 협상은 1993년 12월 15일
신속히 종결되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타 다른 국가들은
이 새로운 ‘자유무역’의 세계에서 중요치 않은 존재임을
인식시켰다.
미국과 유럽이 WTO의 설립을 세계 무역 무대에서의 상호규제와
자국 경제의 부흥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개도국들은
WTO의 창설을 개도국을 지배하고, 개도국 시장과 물적, 인적
자원을 미국 및 다른 선진국에 기반을 둔 다국적 기업(MNCs)에
접근 가능하도록 하려는 미국의 수단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것을
탈식민지 시대에 이루어놓은 성과를 모두 되돌려 놓는 수단으로
보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도국들이 WTO를 그것의 자매 기구인
세계은행이나 IMF와 독립된 것으로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
자매 기구는 그 동안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의 형태로
제3세계로부터 제1세계로 부의 이전을 보장하는 철칙들을 강요해
왔다. 탈식민지 시대에, 이들 국가에서 이룩된 대부분의 경제
사회 발전이 국가의 후원하에 시작되고 수행된 이래, 이들
국가는 ‘자유무역’과 ‘탈규제’를 제3세계 국가를 겨냥하는
정책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북쪽의 나라들이 남쪽의 나라들을 재종속시키는데 주요한
도구가 구조조정이었다면, 그들이 NICs, 즉 “신흥 공업국”에
접근할 때에는 무역 정책이 그들이 선택한 무기였다.” Bellow
Walden : “Dark Victory : The United States, Structural
Adjustment and Global Poverty” : Third World Network :
Penang, Malaysia 1994.
개도국들은 또한 ‘자유무역’의 새로운 슬로건과 경제적
지구화를 유엔이란 국제적 장, 특히 UNCTAD와 국제연합 개발
프로그램(UNDP)을 통해 그들이 얻은 이익을 반전시키려는
수단으로 보았다. 개도국들은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NIEO)에서 그들의 요구를 표출하였다. NIEO 선언에
포함된 원칙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개도국들의 불만족스러운 무역 조건을 지속적으로 개선시킬
목적으로 개도국이 수출하는 원료, 일차 상품, 공산품과 반제품
등의 가격과 그들이 수입하는 자본재와 설비제품 등 가격 사이의
공정하고 평등한 관계 ...”
“모든 국제 협력의 분야에서 실현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실현가능한 때면 언제나, 개도국을 위한 특혜적 그리고
일방적(non-reciprocal) 대우”
제 2차 UNCTAD 회의에서 선진국들은 일반특혜체계(GSP)에
합의했는데, 그것은 개도국과의 무역에서 특별한 관세특혜를
양허하는 것이었다. United Nations : “The history of UNCTAD
1964-1984, New York”, 1985.
개도국들은 그 같은 특혜 대우를 그들의 오랜 식민지 역사에
근거하여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그들은 독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무역 조건이 본질적으로 식민지 이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말하자면 그들은 대체로 여전히
선진국들의 산업에 필요한 일차 상품과 원료의 원천이었으며,
크게 보아 여전히 선진국들이 생산한 공산품의 시장이었다.
그들은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지금까지 얻을 수 있었던 특권이나 양해 사항을
온통 제거해 버리는 것으로 보았다.
자유무역: 새 병에 오래된 술인가?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화 그 자체가 시작된 이후 계속해서 자본주의 발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다. 산업 발달의 초기, ‘자유 방임(laissez
faire)’의 개념은 서구의 국민국가 내부와 국민 국가들
사이에서 산업의 완전 경쟁을 의미했다. 그러나 국가는 해외
무역과 식민지 자원의 식민화를 지원했다. 만약 그 같은 지원이
없었다면, 이들 나라의 산업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제학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자유무역 이론 옹호자로 간주되는
아담 스미스는 한편으로 영국이 그 본성상 해외 상업에 매우 잘
맞는 위치에 있다고 선언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적
차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항해법은 ... 대영 제국의
선박과 선원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 금지를 통하여,
자국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하고, 다른 경우에는 외국 선박에
대해서 무거운 부담을 적절하게 부여하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국방 뿐만 아니라 무역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영국의 해양 최고권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항해법을 지지했다.
Mehmet Ozay, “Westerning the Third World : The
Eurocentricity of Economic Development Theories”,
Routledge, London and New York,1995.
또 다른 경제학의 창시자이며 자유무역 이론을 제안했고, ‘비교
우위’에 입각한 무역 이론을 제창했던 리카르도가 그의
이론에서 염두에 둔 것은 오직 유럽 국가들 사이의
무역만이었다. 식민지 사람들과 관련하여 그는 그들의 저발전을
원주민들의 무지와 나태, 그리고 야만성탓으로 돌렸다. quoted
in Mehmet Ozay : ibid
그 당시 덜 발전된 유럽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독일 경제학자 리스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현존하는 세계의 조건하에서, 일반적 자유무역의 결과는
보편적인 공화국이 아니라, 반대로 보편적 종속이 될 것이다. 즉
덜 발전된 국가는 우월한 공업 생산력과 상업적, 해양적 힘을
가진 열강(예컨대, 영국)의 최고권 아래 종속될 것이다. ...
보편적 공화국 ... 즉 지구상 국가들의 연합은 ... 오직 다수의
국가들이 가능한 한 거의 같은 수준의 산업과 문명화, 정치적
힘과 정치적 개명을 달성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List, 1837)
그러나 그는 진보를 달성한 아시아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quoted in ...ibid
“그리하여 아시아 국가들 전체의 해체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시아의 재생은 오직 유럽의 생동감있는 힘의
주입, 즉 기독교와 유럽의 도덕법과 질서의 일반적 도입과
유럽인들의 이주와 유럽식 정부 제도의 도입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List, 1987) quoted in ...ibid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의 사상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동기에 내재하고 있는 갈등, 모순, 긴장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이 새롭지 않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나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자유무역과 지구화’의
범위와 영역은 오히려 그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격렬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는
양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자유로운 것이든 아니든, 그 같은
무역과 지구화에 기초한 ‘발전’이 도대체 좀더 오래 지속될
만한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일단의 논쟁이 초래될 만큼 최소한
양적으로는 다르다.
자유무역의 흥망성쇠
그러면 왜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는 무언가 새로운
것처럼 등장했는가?
이는 주로 2차 대전 후에 나타난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의
부분적인 쇠퇴에 기인한다. 초기의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는
무역 전쟁, 몇몇 국가들 영향권역으로의 세계 분할, 유럽의
선진산업 국가들 간의 격렬한 경쟁을 초래했는데, 이 모든 것은
세계 전쟁에서 절정에 달했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에 대해 가장 일관되고 비타협적인
비판이었다. 전후, 공산주의 정부들은 세계의 1/6에서 정권을
잡았다. 전쟁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적 저항과 사회적 불안정이 있었다.
자유무역과 경제적 지구화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들은 그것에
내재하는 핵심 원칙들을 절충해야만 했고, 대신 더 많은 국가
규제, 평등한 사회 프로그램, 좀더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통치를
통한 경제적 발전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하여 서구에서는 복지
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한층 약화된 선진국들은 식민지에서 더 이상 그곳 인민들의 국가
독립에 대한 열망에 반하여 군사적인 방법으로 식민지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 후 식민지 엘리트들은 대체로 국가를
통제함으로써 이들 사회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통제는 초기
단계에서 국가 독립에 대한 사회의 나머지 부분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탈식민지 세계에서 보다
평등하고 공평한 사회의 기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식민지 정부는 해방 후의 시기에 국가 보호와 규제를 통해 경제
발전을 추구했고, 또 사회적 평등 프로그램과 사회 개혁을
도입했다.
“남쪽의 신생 독립 사회에서 토지, 자원, 기업의 사적 소유는
규칙이었고, 경제적 교환은 주로 시장에 의해서 중개되었다.
그러나 경제 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침투력이 강했고,
국가는 경제적 전환에 있어 전략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역할은 산업의 경우에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산업발전은
전략적 계획, 발전을 위한 금융, 보호주의 무역, 결정적 사업에
대한 국가 투자 ... 등을 통해 국가에 의해 활발하게 때로는
매우 공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 현상이었던,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이종접합적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공공 부문과 사적 영역 사이의 상승작용의 효과가
자유시장에서 자생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자본축적을 수행했다. Bellow Walden, Dark Victoy: The United
States, Structural Adjustment and Global Poverty, Third
World Network, Penang, Malaysia 1995.
그것은 무역 또는 지구화가 그 우월성을 잃은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반공과 자유주의는 식민지에서 출현한 나라들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정의(定義)하는 두 가지 구성 요소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들 국가를 냉전의 결정적 각축장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러한 갈등에서 힘이 결정적 중재자가 된다고
믿는 한편, 성장하는 제3세계 시장들은 미국 자본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제3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풍요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으로
대항세력의 무장 반란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제3세계에 대한 원조는 이 전략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폴 호프만의 관점에서 볼 때, 전후 외교정책의
형성에 있어 핵심적 특징이요, ‘안정과 경제 성장의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Bellow Walden ...ibid
그 같은 ‘원조를 통한 무역’의 증진을 위해 상당 수의 국제
기구가 설립되었다. IMF, 아프리카 개발은행(African
Development Bank), 아시아 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 ank) 등이 그
현저한 예이다. 그 같은 원조를 통한 무역은 저가 정책, 고가
정책, 기업간 가격이전 정책, 원조를 증여국으로부터 기계류와
다른 군수품의 구매와 연결시키는 ‘연계 원조’, 그외 이와
유사한 관행들에 기초한 가격 및 시장의 조작을 통해
수행되었다. 이 모든 것이 개도국의 부채 증가와 지속적인 대외
무역수지의 위기로 귀결되었다.
80년대 중반에 분출한 부채 위기는 선진국, 특히 미국 경제에
주요한 위기를 제기했다. 부채 위기는 두 가지 더 심각한 발전을
동반하였는데, 하나는 이른바 개도국에서 국가가 지원하는 발전
전략이 산업 기간 시설과 생산 기지의 발전을 낳은 것과 다른
하나는 선진국 경제, 특히 미국이 높은 재정 적자, 국가 부채,
무분별한 국방비 지출로 인한 지속적 불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 밖에 있는 중요 소비재 산업을
저임금 경제로 밀어 부쳤다. 그리고 이는 유럽과 일본의 경제
회복,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재 이들 나라에 넘치고 있는 과잉
자본을 초래한 것이다.
부채 위기가 국가 지원형 발전을 통해 제공된 원조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해결은 ‘자유무역’과 ‘새로운 모습의
지구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80년 대 초,
자유무역과 ‘지구화’로의 그 같은 ‘역전’은 세계은행과
IMF가 배분하는 원조 조건을 재정식화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이후 원조는 수혜국이 그 조건, 이른바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에 동의할 경우에만 추진되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은 개도국 경제의 구조를 변경시키도록 입안된
프로그램이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의 신조는
‘자유무역’과 ‘지구화’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데, 국가보다는
‘시장’자원 배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수입에 대한 국가 통제를
제거하고, 수출을 위해 국민 생산을 증진시키고, 공업과
서비스에 대한 외국의 투자 규제를 제거하고, 수출 촉진을 위해
통화가치를 절하하고, 국가 부문을 사유화하고, 경제 활동을
탈규제하는 것이다.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은 또한 IMF가
제공하는 원조 조건의 적응 여부을 엄격히 감시하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GATT-1994는 구조조정 프로그램(SAP)의 뒷면인 것이다.
지구적 경제정책 형성의 보다 높은 일관성 달성을 위한 세계
무역 기구의 기여에 관한 선언(The Declaration on The
Contribution of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to Achieving
Greater Coherence in Global Economic Policy making)은 (각국
재무장관들의) 각료 선언이며, GATT-1994 협정 당사자들에 대해
구속력이 있다. 이 선언은 특히 WTO 정책들이 세계은행과 IMF
정책들과 일치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이 선언은 “더
나아가 지구적 경제정책 형성의 보다 높은 일관성 달성을 위해,
(각국 장관들의) 각료 회담은 IMF의 관리 이사, 세계 은행의
총재와 함께 브레튼우즈 기구들과 협동을 위한 WTO 책임의 함의,
그같은 협동이 취하게 될 형식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WTO의
사무총장을 초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경제적 지구화는 공산품, 서비스, 농산물 무역에 대한 자유로운
지구적 접근을 허용하기 위해, 관세 및 비관세 규칙, 상품과
용역에 대한 투자, 지적 재산권, 수출입 규제 등과 관련된 국가
규제로부터 경제의 탈규제를 의미한다.
현재 이해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제적 지구화는 지구적 맥락의
한편에서는 선진국 경제들 사이의 경쟁 격화, 다른 한편에서는
선진국과 저발전 국가들 사이의 갈등 증대에서 생겨나고 있다.
2. 아시아냐 태평양이냐?
새로운 세계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동질적 지역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지역의 정체성(identity)은 그 촛점이 ‘아시아적’
정체성에서 새롭게 획득한 ‘태평양’이란 정체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왔다. 이 지역은 몇 가지 특징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이 지역에는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의
문제와 그에 따른 부채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역은 다른 제3세계, 특히 남아시아와
구별된다. 일본을 제외하면, 이 지역 대부분의 국가는 전후에
그리고 전후 등장한 정치적 관계의 결과로써 산업화되었다. 그
중 많은 국가는 일반적으로 경제적 성공 여부의 측정에 사용되는
이른바 GNP, 해외 무역, 투자율, 일인당 소득 ... 등 경제적
기준에 의거하여 판단할 때, 경제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내부적 중력(重力)을 지닌 몇 가지
중심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같은 핵들은 다른 중심의 궤도
안에서 외부로 향하는 강제적인 원심력(遠心力)과 함께
작용한다. 가장 초기에 탄생한 공식적인 지역 경제집단은
아세안(ASEAN) 그룹의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부루나이, 필리핀
등의 핵심적인 6개 동남아시아 국가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트남은 아세안 국가 그룹에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버마가 이 그룹에 가입하고자 하는 압력도 존재한다.
아세안은 지역 내에서 특혜관세, 규모가 큰 벤쳐 산업의 공동
생산, 자원의 공동 이용, 시장 공유 협정 등을 채택하여
지역경제의 발전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형성되었다. 경제적
기준에서 볼 때 싱가포르는 이 지역의 중심핵인데, 그 경제는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이 지역의 유일한
신흥공업국(NIC)이다. 필리핀은 세계 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종속된 다른 제3세계 국가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부채
문제를 안고 있다. 태국은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오랜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지리적으로는 이 지역과
인접해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른 그룹은 한국, 홍콩, 대만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이다. 이 지역의 모든 국가는
신흥공업국(NIC)이고, 강력한 산업 경제로 성장했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만, 경제적으로 천천히 이 지역으로
끌려 나오고 있다.
중국의 동남부는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경제적 통합 및 지리적
인접성을 고려할 때, 동남아시아 지역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다른 부분은 경제 및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 지역과
통합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은,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규모,
시장, 인구의 측면에서 여전히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는 여러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있는 거대한 국가이다.
또한 이 지역에는 과거 냉전시대에 ‘공산주의 블럭’에 속했던
국가, 서방 세계에 속했던 국가와 비동맹에 속했던 국가들이
있다. 또한 남-북 중심적 쟁점에서 스스로 ‘남쪽’이라고
생각하는 국가와 “북쪽”이라고 여기는 국가, ‘남-북’
차별화의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국가들이 있다.
이 지역 전체에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은 이 지역의 모든 나라는
경제발전을 지도하는 강한 개입주의적 국가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들 나라가 대체로 경제 성장과 산업에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지역은 국가
개입주의적 정책들이 그같은 거대한 성공담으로 여겨지지 않는
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과는 다르다. 이 지역의
산업 성장과 경제 발전의 주요한 이유는 일본이다.
동아시아 위로 떠오르는 일본이란 태양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경제적 중핵은 일본이다. 일본은 이
지역에서 경제적 선진국가 집단인 OECD의 유일한 회원국이다.
동남아시아의 발전은 크게 보아 일본의 대규모 자본 및 기술의
침투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1985년 엔화의
대폭적인 절상 이후, 저임금 생산기지를 찾아 나선 일본의 투자
형태로 거대한 해외 자본의 침투가 있었다. 1985-90년 사이에 약
미화 150억 달러에 상응하는 일본의 투자가 이 지역에 몰려
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등에서 고도의 또는 중간 정도의 성장율을 유인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 말레이지아는 현재 10%의 성장율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보아 80년대 동안 이루어진 일본 자본의 유입
결과이다. 1985-90년 사이에 약 22억 달러 즉 말레이지아 인구
일인당 100 달러가 넘는 돈이 유입되었다. ... 1985-90년 사이에
5-6%에 이르는 인도네시아의 성장율은 ... (중략) ... 같은
기간에 이루어진 거의 40억 달러에 이르는 일본 투자의 유입과
강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 그것은 구조 조정이 아니라
일본이 남아시아 운영의 지렛대로 태국을 선택한 데 따른 막대한
해외 자본의 유입이었는데, 태국은 80년 대 후반 세계를 놀라게
했던 8-10% 성장율로 이끄는데 중심이 되었다.”(Bellow, 1995)
80년대에는 일본 기업 수익의 2%만이 아시아에 기원을 둔
것이었는데, 1993년에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경상 이익은
미국에서 얻는 이익을 넘어섰다. 이 지역에 대한 일본 투자의
결과로 동남아시아의 전 지역은 산업 성장뿐만 아니라 지역의
경제적 통합을 경험하고 있다. 아세안의 구성과 그것을 지역발전
조정의 효과적인 장(場)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은 위와
같은 지역의 경제적 통합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한편, 한국, 대만, 홍콩 같은 동북아시아 국가는 6,70년대
사이에, 보다 일찍 발전했다. “그러나 외교정책 면에서
와싱톤의 봉쇄적 자유주의자와 현실정치의 옹호자들은 60년대와
70년대 동안, 신흥공업국의 두드러진 국가주의적 정책을
과소평가하였는데, 양자는 모두 공산주의와의 지구적 투쟁에서
전선에 서 있던 이들 국가와 정치적 동맹에 지나친 우위를
두었다. 다른 길을 찾는 것에 대한 잇점은 신흥공업국들(NICs)이
고임금을 피하려고 하는 미국 기업에게 저임금의 천국으로
추가적인 봉사를 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재수출되는 상품의
조립을 위해 ‘수출가공지역’에 세워진 초국적 기업의 제조과정
운영은 초국적 생산 과정의 결정적인 요소였다.”(Bellow, 1995,
73쪽) 80년대 이후, 이 지역은 기술적으로 훨씬 정교한 제조
분야에서 이전보다 더 큰 규모의 일본에 의한 투자를 목도했다.
기업의 직접 투자 이외에, 동아시아 전 지역은 1991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유주의적 공식발전지원(ODA)의 수혜자가 되었다.
전세계 ODA 상위 10개 수혜국 가운데, 1993년 일본의 ODA 60%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말레이지아 등을 비롯한 아시아
정부에 주어졌다. Human Rights Watch Asia : Human Rights in
the APEC Region 1994: November 1994, Vol 6, No 13.
팍스 아메리카의 석양인가?
사실상의 일본 경제 팽창과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통합은 그
자체가 미국과의 갈등-협력의 이중적 관계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다섯 가지 주요 영역-GNP, 외화, 무역수지의
균형, 해외 원조, 군비-에서 자국의 우월한 힘이 지지하는
팍스-아메리카의 유지를 통하여 세계 경제를 이끄는데 기관차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은 나머지 네 가지 영역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상실한 채, 오직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방법으로 열강으로서 자국의 특권과 세계의 평화, 세계
경제질서를 유지하는 위치로 전락했다. 2차 대전은 43개국을
미국에 대한 채무국으로 만들면서 종료되었다. 이것은
팍스-아메리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당시, 미국은
세계 전체의 금, 은, 외화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전세계 생산량의 50% 이상을 기록하고 있었고, 이것들은 미국을
세계 경제의 유일무이한 지도국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 체제는 50년도 안되는 미국 지도하의
세계경제에서 수 십년 동안 누적된 무역과 재정 적자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 세계 경제는 70년 전
스털링(파운드) 체제에서 달러 체제로 이행하던 시기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달러는 국제 통화체계로서 일본의
엔화로부터 도전받고 있으며, 국제 통화체계는 불가피하게
당분간 두 가지 통화의 공존을 요구하고 있다. ... 전 아시아가
현재 일본의 엔화 블럭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 Lee Chong Hoon : “Multilateral
Economic Co-operation in Northeast Asia” : East Asian
Review, Seoul, Korea, Vol 6, Number 4, Winter 1994, pg17.
“... 레이건-부시 행정부는 냉전을 추구하기 위해 대부분
미국의 제일 경쟁자로 떠오른 일본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되는
대규모 적자에 의존했다. 1992년 적자는 4000억 달러, 곧 GNP의
6%를 기록했다. 국채 규모는 3조 5천억 달러에 달하고, 매일
10억불씩 증가하고 있다.” (Bellow, 1995)
결과적으로 미국내 경제 기간시설과 조사 연구 및 발전에 대한
투자 등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89년 일본은 플랜트, 자본
설비, 연구개발(R&D) 지출에 GNP의 23.2%를 투자했다. 반면,
미국은 11.7%를 투자했다. 1980년대 국방 분야가 아닌 영역의
연구개발(R&D) 지출에서 미국의 비용은 GNP 대비 1.8%에 이른
반면, 서독과 일본의 수치는 각각 2.8%였다.” (Bellow,
1995)
“정치는 제일이다!”
미국은 그들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점점 더 정치,
군사적 힘에 의존하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자유무역과
탈규제란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타국에 대한 정치적 공격은 이
지역에서 미국 상품과 용역의 시장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미국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되었다. 그 같은 이데올로기적
독단은 이 지역 전체에서 반복되는 무역 제재조치에 의해 강화된
반면, 정치적 양해가 가능한 곳에서는 그러한 양보를
허용하였다. 미국은 1988년 ‘무역과 경쟁성을 위한 다목적
법안’의 통과와 함께 그 같은 행위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것은 미국 무역대표부에 불공정 무역관행의 경우,
보복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은 일반특혜체계(GSP)의 지위를
상실했다. 한국은 TV, 브라운관, 섬유 제품의 쿼타 등에서
광범위한 반덤핑 관세에 묶여 있고, 불공정 무역법 슈퍼 301조의
무역 규제조치로 협박을 당하고 있다. 1989년 한국은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자유화하였다. 1991년 한국은 다시 슈퍼 301조 무역
보복조치 하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는 추가적인 개방으로
이어졌다. 1992년 미국은 다시 한 번 한국을 슈퍼 301조 무역
제재조치 하에 몰아넣고, 추가적인 양해를 얻어 내었다.
“1990년대 초반, 미국 경제의 공격은 농업, 텔레콤, 해양
서비스, 금융 서비스, 수산업, 화장품, 정부 취득 관행 등의
영역에 촛점을 맞춘 포괄적인 기습으로 터져 나왔다. 미국은
심지어 건강 검진 규제조차도 ‘접근을 금지하는 또는 건전한
과학적 근거 없이 출항허가 절차를 금지하는 다양한
장벽들’이라고 선언했다”(Bellow, 1995, 76쪽)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 태국, 중국은 모두 미국에 의한 일방적인 무역
제재조치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양해를 허락해야
했다.
점증하는 일본의 미국 경제로부터의 자율성은, 미국이 이 지역
국가들에 취하고 있는 점점 더 공격적이며 일방적인 보복행위와
함께 일본으로 하여금 아세안(ASEAN)을 넘어설 수도 있는 경제
협력의 지역적 장(場)을 형성하도록 부추키는 결과를 낳았다.
1989년 에이펙(APEC) 구성을 위한 초기의 제안들은 그같은
고려에서 생겨났다.
아세안(ASEAN)에서 쿠데타
가장 강력한 경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국제 관계에서
공개적으로 일본 무역블럭을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힘을 갖지
못했다. 일본의 주도권은 보조 열쇠였고 조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레일리아가 APEC 구성에서 일본으로부터
주도권을 탈취했다. 이는 재빨리 APEC의 촛점을 아시아
회원국에서 새롭게 추가된 ‘태평양의 회원국’으로 이동시켰다.
1989년 APEC 최초 각료회담 당시에는 12개 창립 회원국이
있었다. 그 당시 비아시아 구성원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였다.
아시아-태평양 조직을 구성하는 움직임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면, 자국이 경제적 불황에 직면해 있던 매우 적절한 순간에
찾아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자국을
위해 보다 큰 역할을 찾고 있었다.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 경제의 의존은 60년대 이후, 특히 80년대 이후
현저하게 이동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일본 수출과
동아시아로부터의 수입은 이 나라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만약 APEC이 지역적 경제협력의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면,
그것은 미국에게 이 지역에서 그 자신을 재설정하고 일방적인
무역제재보다 훨씬 정당한 수단으로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길이 될 것이다.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는
경제적으로 미국과 더욱 통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중요한 정치적 동맹국으로 여겨진다.
중국은 이 같은 지역적 밀고당김과 압력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요인으로 등장했다. 앞서 논의한 모든 국가에게 중국의
가장 큰 매력은 눈에 환히 보이는 시장의 규모이다. 세계 은행의
평가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미국, 일본 다음이며 독일에 앞서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경제규모를 갖고 있고, 12.8%의 비율로
성장하고 있다. 2010년에 이르면, 중국 경제는 미국보다 커질
것이라고 평가된다. “China`s Boom Economy” : Asian Workers
Organising : December 1993, Vol 11 Nos 9-10.
슈퍼 301조를 사용하는 쌍무적 무역 제재조치와 인권침해를
근거로 한 제재조치로 인해, 중국의 경제적 성장이 멈추거나
다른 나라에 대한 중국 경제의 중요성이 축소되지는 않는다.
세계 은행은 중국에 대한 지원을 지속해 왔다. 1994년 6월말
현재, 중국은 30억 7천만 달러 이상을 받았고, 1995년에 대해
30억 달러에 대한 약속도 받았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그외의 유럽 국가들은 계속해서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 중국은 수출입을 합해 40억 달러에
이르는 가장 큰 수출 시장의 하나로 등장했다. 1994년 중국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출은 모두 22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은
지속적으로 일본에게 중요했다. 일본의 공식발전지원(ODA)은
중국 한 나라에 대해서만 1992년 10억 5천만 달러였고, 1995년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1993년 중국은 APEC 그룹에 가입하였다.
미국은 1993년 APEC 내에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주도권을
탈취했고, 이는 역내 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부분으로 확고하게 굳어졌다.
출발점에 다시 서서
미국의 APEC 진입은 처음 APEC을 설립하려 했던 바로 그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APEC의 설립을 초래했던 본래의
모든 압력들이 이번에는 APEC 내에서 다시 작용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아세안(ASEAN)을 통한 그들의 노력이 미국에
의해 공중납치되는 것을 보았고, 그들 사이의 무역특혜 조건을
위한 ‘ASEAN 자유무역 지대’(AFTA)의 창설을 통해 그것을
맞받아 치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APEC 내에 동아시아
경제그룹(EAEG)을 창설하려고 했다. 미국은 일반적으로 자유무역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들과 친미(親美)라고 알려진
이코노미스트들에 의해 주도되는 저명인사그룹(Eminent Person
Group)을 추진했다. 중국은 대만과 경제적 연결고리를
증가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는 홍콩의 재통합과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태국 등에서 상당한 규모의 해외 중국인들의 사업
및 무역과 더불어 몇몇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경제 블럭”의
성장을 예측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이 APEC에 합류하기 바로 직전,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지대(NAFTA)의 창설은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에게 NAFTA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NAFTA는 멕시코를 포함하여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이미 존재하던 미자유무역 지대(AFTA)의
확장이다. 멕시코의 합류는 무엇보다 낮은 비용, 노동 집약적
생산 공정을 북미 경제 지역에 통합시키려는 것이었다. NAFTA의
창설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잠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왜냐하면 멕시코와 동아시아 국가 양자는 모두 섬유, 전자,
자동차 부품 등과 같은 제품의 주요 수출시장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투자가 아시아로부터 미국을 거쳐
멕시코로 다변화할 것이란 우려를 낳고 있다. Weston
Ann(Editor) : The NAFTA Papers-Implications for Canada,
Mexico and Developing Countries, North South Institute,
1994.
NAFTA는 지금까지 어떤 집단의 국가들에 의해 조인된 협정보다
가장 포괄적인 자유무역 지대 협정이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관세와 농업 제품에 대한 모든 세금 및 통신, 투자, 보험 시장의
개방을 목표로 하고 있다. NAFTA는 또한 분쟁 해결 절차와
노동협력과 환경협력에 관한 추가적인 협정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경쟁의 한계”
이 모든 것들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전례없는 수준의 경쟁을
격화시켜 왔다. 경쟁은 개별 국가들 사이에서, 작은 국가 집단들
사이에서, 국가 집단과 미국 사이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진행된다. 그러나 미국은 유럽연합(EU)의 경우를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경제집단에서 제외되기를 거부하며, 이들 동심원의
모든 원위에서 자국을 위한 발판을 확보해 왔다. 유럽연합의
경우에는 미국의 관심과 영향력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미미했었다. 왜냐하면 유럽연합(EU) 안에는 미국,
독일과 함께 선진 경제들이 국제적 장에서 선진국 경제의 정책과
이해를 조정하는데 관심이 있는 OECD의 회원국들이 있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양해사항들이 국가적 및 지역적, 지구적
수준의 각 단계에서 ‘경쟁성’ 증진을 위해 추구된다.
경제적 지구화는 경쟁을 격화시키려는 속성(速成)의 목적을
지니고 채택된다. 시장을 향한 경쟁, 낮은 생산비를 향한 경쟁,
서비스, 투자, 농업에 있어서의 경쟁,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경쟁 ... 이 끊임없는 임금 낮추기에 의해, 직접
간접으로, 복지와 사회보장의 형태를 띠고 채택된다.
환경의 악화가 ‘유지가능한 발전의 한계’에 대한 보편적
관심을 제기한다면, 경쟁적이기 위한 만족할 줄 모르는 현재의
저임금에 대한 충동은 ‘경쟁의 한계’에 대한 관심을 제기한다.
한/노/정/연
*옮긴이 : 전인권(회원,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