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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제2의 사월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자

현장에서 미래를  제65호
홍근수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제2의 사월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자
권두언




홍 근 수
이사장




1. 시작하는 말: 실패로 점철된 과거 반세기 헌정사
동양 사람들은 ‘열흘 붉은 꽃이 없고 10년 가는 세도가 없다’(톨스토이)는 철학적 ‘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한 독재자가 10년 이상 절대적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해 온 것이 과거 엄연한 기록이라면 적어도 우리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이 ‘진리’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의 공화제의 역사는 실패로 점철된 부끄러운 역사였다. 공화제가 실시된 후 최초로 성립된 이승만의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했고 그런 헌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익 독재정권일 뿐이었다. ‘양의 가죽을 쓴 이리’란 표현이 있듯이 이승만은 그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가죽을 쓴 절대 군주였고 문민 우익독재자’였다. 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깨고 종신 대통령을 획책하여 헌법을 고치고 또 고쳐 장기독재를 일삼았으며 국민으로 하여금 ‘국부’(國父) 또는 종신 대통령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민의 열망이 마침내 화산과 같이 분출하여 사월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이 철저히 부패․무능했고 절대권력으로 화했던 이승만 독재정권을 붕괴시켰다. 그 혁명은 맨 손으로 해 냈다는 의미에서 평화적인 혁명이었고, 그 혁명의 주체가 학생들을 비롯한 민이었다는 의미에서 민(또는 민중)의 혁명이며, 그 혁명이 아무런 사전 계획이나 시나리오에 의한 거사가 아니었다는 의미에서 사필귀정의 역사적 혁명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행히도 역심을 품은 불순한 소수의 반역의, 반민주의 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불법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후 강제 집권하였다. 그들이 박정희와 김종필이었다. 20년 가까이 권좌에 있었던 박정희 정권은 개발독재라고도 하지만 실상 군사독재였다. 인혁당 사건 등을 비롯하여 온갖 죄악으로 점철되었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어두운 암흑시대를 기록하였다. 거의 20여년간 집권 끝에 독재자 박정희가 그 자신이 신임하던 부하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비로소 유신독재의 막이 내려졌다.
민주화와 민족자주를 갈망하던 민의 민주적-민족적 열망은 80년 5월에 다시 한번 분출되었으나 꺾일 수밖에 없었다. 광주 시민들은 민주화와 민족자주 통일을 위해 투쟁한 것이 ‘죄’가 되어 그들 자신들이 세금을 내어 국방을 담당시켰던 자국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권력에 눈멀었던 불순한 소위 ‘신군부’라고 칭하는 전두환 일당이 반역의 깃발을 들어 12․12를 일으켰고 수많은 광주의 민주열사들을 그들의 정치 제단에 제물로 삼고 집권하였다.
이들 광주의 ‘의로운’ 시민들은 민주화와 민족자주를 위하여 피 흘렸건만, 적어도 당시에는 학살을 당했을 뿐 민주 혁명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고 오는 후 세대들에게 피로서 그 불의와 범죄를 저지른 무리들의 악행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민족사를 공부하는 학도에게는 등산객들에와 마찬가지로 기억할 높은 봉우리들이 더러 있다. 그 중 한가지가 바로 이 달 4월에 있었던 ‘4.19 혁명’이고 ‘5․18 광주항쟁’이란 봉우리들이다.
1960년 4월 19일, 그 날 그 때 혁명의 함성이 온 강산에 울려 퍼졌다. 이에 절대권력으로 알려졌던 이승만 정권이 어이없이 무너졌다. 이 때를 우리는 4․19 혁명이라 부른다. 그 일이 일어 난지 어언 41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는 더 없이 깊은 감회에 젖게 된다. 그것은 오늘의 불행한 우리 민족의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 근본적으로 변화된 민족 정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정말 그렇다. 사월혁명의 그 날 이후 오늘날까지 40여년간 이 나라의 강산은 많이 변했다. 북한은 대홍수, 또 한발이라는 자연적 재앙으로, 또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 오랜 동안의 경제봉쇄와 개혁․개방이라는 외부적인 정치적인 압력으로, 땅의 모양도 사람의 체형도 크게 변했다.
그러나 변한 것은 그러한 지리적 ‘강산’이나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역사적-민족적 ‘강산’도 근본적으로 변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지나고 김정일 정권이 출범, 건재하고 있고 획기적인 정책들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데 남한에는 북의 권력승계의 적법성 문제와 정통성 유무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남한의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북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난 권력 변동 현상을 두고 두 정권과 체제를 수평적으로 비교하여 정통성 유무나 강․약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하지 않는가? 남한 쪽의 판단기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주체식 사회주의 방식에 따라 일어난 권력승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분단 55년이 되는 해인 작년부터 한반도의 정세는 근본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작년에 6월 중순에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실현되었고 소위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으로 남․북 화해가 오기시작하고 한반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의 체제가 해체되고 평화가 실현되고 나아가서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가 믿었다. 이산가족들의 상봉, 경의선의 복원 개시, 활발한 남․북 민간인 교류, 남․북 경제 교류 활성화 등 눈에 띄게 달라지는 한반도를 보면서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후보자 결정이 처음으로 공식 발표되어 온 남한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것이 작년 10월 12일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노벨 평화상을 받는 것이 최초라는 점에서 큰 흥분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지금까지 여러 제약이 있었겠지만, 명예스러운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 이상 이제 남한에서의 인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과 나아가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회를 살릴 때가 되었다는 데 대한 큰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연이겠지만, 같은 날에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어 또 온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 공동 코뮤니케에는 북․미 관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개선, 휴정협정 체제의 평화보장 체제로의 전환, 그리고 미 대통령의 북한 방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 대통령에 당선 결정된 공화당 후보 조지 부시의 반대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의 국무장관 메들린 올브라이트의 방북, 김일성과의 만남이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에게도 지각 변동 같은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소련연방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차례로 붕괴되었고, 대만은 유엔에서 쫓겨났으며 그 대신 공산당 중국이 상임이사국으로 들어앉았다. 미국에는 클린턴의 대북 햇볕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던 부시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서 힘으로 밀어 부치는 강력외교를 선보이고 있어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클린턴의 대북 합의를 재고할 수 있다는 발언, 새로운 대북 정책으로 엄격한 상호주의를 실시한다는 발언, 등 연일 강경 정책을 경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미국은 앞으로 초강대국으로 발돋움이 예상되는 중국을 막기 위해 소위 ‘중국 포위 정책’을 노골적으로 펴고 있어 앞으로 동북아에서 새로운 제 2의 냉전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다. 이 달 1일에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미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의 충돌사고를 계기로 중국 당국은 중․미 관계를 새로이 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는 듯 하다.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매듭지어 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중국측과 정찰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미국측이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반도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전문가들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의 상황이다. 특히 힘있는 미국을 표방하면서 부시 정권은 ‘일방적 양보불가론,’ ‘엄격한 상호주의,’ ‘철저한 검증론,’ 세계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NMD, TMD, BMD 등 개발계획의 추진 등으로 북한을 빌미삼아 군비확산 일변도로 나아가고 있는 지경이다. 이러한 미국의 대북강경 정책에 대하여 우려를 금치 못하는 우리는 정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내외 정세는 변했으나 우리는 우리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는 현실 때문에 더욱 걱정이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의존하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민족자주적이지 못하고 미국에 완전 종속되어 있는 정권과 그 아래 살고 있는 국민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사대 종속적인 의식이라고만 말하고 말 것인가?


3. 김대중 정권은 과연 민주, 민중, 민족 정권인가?
북한 정권은 접어놓고, 현재 남한의 김대중 정권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재 집권 중반기를 지난 이 ‘국민의 정부’는 한 마디로 하여 ‘웃기는 정부’다. 한편으로는 4․19를 의거나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수유리의 사월혁명 묘지를 ‘성역화’하고 예찬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사월혁명을 총칼로 짓밟은 김종필을 공동정권이란 미명 아래 이 나라의 정치를 쥐었다 폈다 하는 정치 권력의 실권자로 군림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노태우 정권 시절에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등 삼자가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결합했을 때 ‘야합’(野合)이라는 나쁜 표현을 사용하더니 지금 김종필의 자민련과의 공동정권 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자민련과의 결합은 야합이 아니라 ‘공동’ 또는 ‘공조’라니 이런 해괴망측한 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야합이든 공조든 언제나 ‘상수’(常數)적인 요소는 ‘김종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종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종필이 누구인가? 김종필은 1961년 군사 쿠데타 시작 때부터 오늘 21세기의 시대에까지 권력의 최상층에 건재함으로써 우선 ‘10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격언에 비웃음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민의 민주혁명이었던 사월혁명을 총칼로 뒤집어엎은 군사 쿠데타 세력과 유신독재 세력의 제 2인자의 위치라는 것과 ‘유신독재’의 주체라는 의미에서 ‘유신본당’이라고 자처한 자로써 오늘까지 권좌에 앉아있다.
맨주먹으로, 그러나 죽음으로 성취했던 우리의 성스러웠던 사월혁명을 총, 칼, 탱크로 짓이겨 미완의 혁명이 되게 했던 반민주적-반사월혁명적 세력의 대표이고 그 후 군사독재를 유신 정치로 정당화하고 미화하면서 ‘유신본당’으로 자처했던, 민주화의 적, 민족자주의 적, 햇볕정책의 적, 김종필씨를 김대중 대통령은 ‘동반자’ 또는 ‘동지’로 ‘모시고’ 있는 현실 때문에 우리는 김대중 정권 자체의 정체에 대하여 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자민련과의 공동정권이 탄생한 것은 소수당인 민주당만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고 본 김대중 대통령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김종필이 한국 정치에서 ‘결정권’(캐스팅 보트)을 행사하고 있다. 확실히 모르긴 해도 지난번의 3․26 개각에 김종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말도 있다.
또 5․18 광주 항쟁을 거룩한 민주항쟁이라고 하면서 국가가 이들 희생자에 대하여 명예회복과 보상 등을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직접, 최고의 범죄인이었던 전두환 일당을 민족화합 운운하면서 모두 감옥에서 석방하고 전직 대통령의 예우라며 청와대를 자유롭게 출입하게 하고 국정을 함께 논의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꼭 41년이 되는 금년에 남한에 사는 한국인들은 소위 ‘국민의 정부’ 아래 살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계속되었던 독재체제가 모두 무너지고 야당이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다 하여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를 의미한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이 정권이 과연 우리의 희망인가? 공명정대한 대선을 통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국민의 정부 하에 있다는 것 때문에 과거 그 어느 정권보다도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이 하라는 개혁은 하지 않고 엉뚱한 실정(失政)만 되풀이하고 있는 이 정권을 우리 국민이 어떻게 하여야 보고 대해야 한단 말인가?
남한에서는 국토개발이란 이름으로 논과 밭을 갈아엎고 공장을 지어 토지의 형질이 변했고 천민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사회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정권은 스스로 국민의 정부라고 우기고 있으나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의 정부인지 의문이 일고 있다. 이 정권은 지나간 3년 재임 기간 동안 반(反) 노동자, 반 민중의 정권임을 명백히 하였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조정을 앞세우고 1,750명의 대우자동차 노동자 정리해고에서, 그리고 제1차 민중대회를 경찰력에 의한 단호한 폭력적 진압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듯이 대범하게 반 노동자-, 반 민중 정권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무능한 정부라는 비판에 대한 대답인지 모르나 그렇다고 돈 없고 힘없는 민중들에게 강경 폭력으로 군림하는 것이 ‘강한 정부’가 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대미 종속적인 이 정권이 확실히 미국에 충성심을 보이는 길인가?
이 정권이 다른 분야에서는 모두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지만, 민족문제에 관한 한 확실히 과거와 달리 큰 공헌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인 모양이다.
그러나 민족자주란 시각에서 볼 때에 민족적인 정통성을 말할 수 있을까?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절대적인 공헌을 세웠다고 하지만, 김포공항에 도착한 때로부터 반 6․15를 일삼지 않았는가? 지금 6․15 선언이 그나마도 지켜지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북의 아량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연 통일이 된 후에도 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위해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쪽의 김대중 정권이 북한의 김정일 정권보다 더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지난달의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을 볼 때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대우자동차를 미국의 GM사에 매각하기 위해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 1,750명 정리해고를 ‘자랑스럽게까지’ 말했다는 것을 볼 때 과연 그는 어느 국민을 위한 대통령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러한 그의 ‘치적’을 볼 때 김대중 정권은 민주 정부도, 민중 정부도, 민족 정부도 아닌 것 같다. 여기에 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우리의 걱정이 있다.


4. ‘사월혁명’의 횃불은 아직도 밝게 불타고 있는가?
“민주화의 소망과 민족통일의 열기가 드높았던” 1988년 6월 18일에 “사월혁명을 중심으로 근대부터 오늘까지 정치, 사회, 문화의 역사진행 방향을 깊이 연구하며 그리하여 민족통일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을 모색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사월혁명연구소’가 그 깃발을 올렸다. 혁명 당시 사월혁명의 영웅들인 교수, 학자 등이 중심이 된 지성인들이 이 혁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를 널리 국민들에게 지성적인 호소로 알린다는 것이 주 취지였다. 사월혁명이 있은 지 28년 만이었고 광주의 민주항쟁으로 민의 민주화 역량이 다시 한번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6월 항쟁이 있은 지 꼭 1년만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연구소’로 출범하여 존재하였으나 속세를 떠나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오랜 세월 고목 밑에 줄곧 앉아 있다가 신선이 되었다는 초속세적, 초시간적 존재처럼 살아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역사 현실은 그런 선비나 신선이 되는 사치를 허락하지 않고 그 대신 투사로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에서인지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고 신뢰하던 동지들 가운데 중도에서 혁명의 대열을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권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고, 혹은 과거의 여당―사실은 군인 정당의 후예들―이었다가 지금은 야당이 된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 양자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나름대로 사정과 이유가 다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은 존중받아야 할 그들의 자유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오랫동안의 세월과의 싸움에서 지치기도 하고 젊었던 피끓는 청년시대의 혁명정신이 세월의 비바람에 ‘순화’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늙어 뒷방시님으로 들어앉고 역사적 퇴물로 밀려가기 전에 마지막 발악으로 한 자리 해보거나 칼자루를 한번 휘돌려보기라도 해야겠다는 동기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행위가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사월혁명의 시각에서 보고 엄격히 말한다면, 유감스럽게도 41년 전에 높이 들었던 사월혁명의 횃불은 꺼져버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혁명의 주역들이 보수화되고 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그들은 41년 전 그들 사월혁명의 주체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민주화와 민족자주와 민중 권력에의 갈망과 정의감과 애국애족심에 불타는 젊은 세대에 의해 타도의 대상으로 퇴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월혁명의 주체라는 사람들이나 오늘의 혁명의 대오라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농민-빈민들 등 이 나라의 민중이 불사조처럼 살아남아서 한국 정치를 주름 잡고 있는 김종필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현 국민의 정부의 우두머리라는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의 명예회장이 되는 것이나 이를 위해 500억원을 모금할 수 있도록 하는 국무회의에서의 안건 통과나 국고 지원 200억원을 승인하는 국회의 예산 결의를 막지 못했다. 박정희가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는 나라, 김종필이 어둡기 전에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법이라는 등의 ‘불경’한 말을 하고 있는 한 사월혁명은 부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월혁명의 영웅들은 처음 정열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식에서인지 몰라도 이 때로부터 10년 후인 1998 년에 이르러 이 단체는 ‘사월혁명연구소’에서 ‘사월혁명회’로 탈바꿈을 하였다. 그러나 이름만 바꿔졌지 정말 달라진 것이 있는가?
지금은 과연 재야나 예언자의 목소리가 필요 없는 요순의 태평성세나 유토피아 시대가 되었단 말인가? 우리가 앞장섰던 사월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그대로 남아있고 현재의 정권이 반민주적, 반민족자주적, 반평화적 정권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지금의 국민의 정부를 미화하거나 맹목적으로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민주화와 함께 실현하려고 했던 꿈인 민족통일이 모두 실현이 되었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이 기막힌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내세웠던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화, 민족통일, 그리고 민족 평화가 만족할 정도로 실현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혁명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적 소임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우리의 혁명적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국민의 정부라는 이 정권으로 정권교체가 된 것으로 ‘다 되었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지난 3월 31일 민중연대(준) 주최로 열렸던 민중대회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시인하고 받아드리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국민의 정부라는 이 정권으로 ‘다 되었다’고 여긴다면, 대우 자동차에서 보듯이 1,750명이란 노동자들을 과감하게 한꺼번에 정리해고한 이 친미사대주의적이고 반민족적인 정권에 대하여 ‘아멘’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현상에 만족하고 현 반민중적인 정권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민중혁명에 의한 민주화와 민족자주적 통일 추구를 중단 또는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5. 맺는 말: 제2의 사월혁명의 깃발을 들자
‘사월혁명연구소’가 창립되던 때에 “사월혁명은 1960년 4월에 완결된 것도 아니었고 오늘의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고, 민족통일이 달성되는 그 날 비로소 그 이념이 정립되는 현재진행형의 혁명”이다 라고 명백히 선언하였다. 그렇다.
41년 전에 시작했던 사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이고 기껏해야 현재 진행형의 혁명이다. 그러나 사월혁명을 그러한 미완의 혁명으로 그냥 남겨 둘 것이 아니고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 ‘민족화해, 자주, 평화, 민생복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일이라는 미결된 민족적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제2의 사월혁명 운동에 나서라는 역사의 엄숙한 명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명령을 듣는 자 누구든지 우리와 함께 혁명의 대열에 어깨를 걸고 행진하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제2의 사월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자. 한/노/정/연

2001-04-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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