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의 쟁점과 전망
이 해 영
연구위원
김정일 방남이 먼저인가, 김대중 방미가 먼저인가 다투더니 지난
3월 DJ 방미직전 한국 정부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탄도탄
요격미사일협정(ABM) 체제를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을 내놓았다.
지난 50년의 대미종속외교로 비추어 놀라운 일이었다. 나 자신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지난 1월 한국은 미국의
전역미사일방위(TMD)계획에 반대한다는 천용택 국회
국방위원장의 로마 발언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까닭에,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도 기대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비록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의 종속변수이며, 부시 집권 후 어떤
형태로던 ‘햇볕정책’의 궤도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나로서는 제법 흥분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날부터 미국의 항의와
보수언론의 집중공세가 시작되자, 현 정권은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처음 한국의 고위당국자는 ABM과 NMD가 별개
문제라는 식으로 어처구니없는 ‘무지’를 드러내더니, 급기야
대통령은 방미중 수차 ‘유감’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외교용어로 ‘유감’은 보통의 사회생활에서는 거의 사과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한국외교는―러시아라는―정부(情夫)와의
간통현장을 들킨 바람난 여자처럼 연신 굽신거렸다. 어찌 보면
본국에 소환당한 대사가 석고대죄라도 하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DJ와의 회담과정에서 부시는 심지어 김정일을 가리켜
‘독재자’라 부르면서 노골적인 불신을 나타내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만나지 말라는 말이다. 미국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먼저 달려가는 것이 무슨 큰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뽐내는 정부당국이었으니, 오죽 당혹했으랴 미루어
짐작이 된다.
김정일의 방남 일정 조정은 DJ 방미외교의 영향이다. 지난
6․15 공동성명 당시 “앞으로 적절한 시기”로 언급된
김정일 방남 일정은 뒤이은 9월의 임동원-김용순 제주회담에서는
“꽃피는 시기”로 구체화되는 듯 하다가 올해 3월 27일 임동원
통일부 장관 취임 기자간담회에서는 “솔직히 날짜를 합의해
놓은 게 없어서 답방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다”로 후퇴하였다.
그러다 4월 23일자 ꡔ뉴스위크ꡕ와의 회견에서 DJ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연내 서울을 답방할 것으로 믿고
있으나 북미관계가 변수가 되고 있으며, 거기에 불확실성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꽃피는 봄”과 “연내” 사이의 간극은
결코 적지 않다. DJ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북미관계가
변수”이다.
그런데 북미관계는 미 vs 중․러 관계와 함수관계에 있다.
미국 부시정권의 NMD/TMD 추진은 단일 제국 미국을 견제하려는
중․러를 급속히 접근시켜 이른바 ‘항미(抗美)연대’를
가능케 하였다. 미국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위험한 곰”으로
인식되고, 중국은 정치 군사적으로 “전략적 경쟁자”이니
양국의 접근은 어쩌면 부시외교의 당연한 결과이다. 중․러
양국은 대만의 TMD 편입문제 반대와 ABM 유지에 있어 공조를
취하고 있고, 심지어 2001년 7월에는 군사분야 까지를 포함한
‘선린우호조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말하자면 준군사동맹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반면 클린턴 정권 당시 친중노선은 친일노선으로 대체되고
미․일 군사동맹체제가 다시금 강조되고, 일본 자위대의
무장력은 현저히 강화되고 있다. 미국의 군사전략이 기존 2개
전장 동시 승리전략인 윈․윈전략을 폐기하고 아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사전략으로 전환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일본을 기축으로 저지하겠다는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지난 남중국해 상공에서 발생한 정찰기 충돌사건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변화함으로써 급격히 강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군비경쟁의 예고된 결과라 하겠다. 특히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영유권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남중국해에서의 중국과 일본사이 해군력
경쟁은 앞으로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준군사동맹관계로의 중․러관계의 발전과 미․일
군사동맹 강화는 필연적으로 남북한에 선택을 강요한다. 여기서
북의 핵․미사일 문제는 한편으로 중․러를 겨냥한
NMD 계획추진과 다른 한편으로 일본을 TMD계획에 끌어들이기
위해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세계전략적
새판짜기라는 퍼즐게임에서 없어서는 안될 퍼즐조각이라는
것이다. 북이 핵탄두를 보유했는지, 했다면 몇 개나 되는지 또
언제 배치가능한지 따위의 질문은 그 본질에 있어 우문에
불과하다. 북이 미사일 실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클린턴 정권 말기 북․미간 미사일 협상이
사실상 타결 일보직전까지 가있었다는 데에서 확인되듯이,
미국은 당분간 이 협상을 타결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적어도 NMD/TMD 계획이 국제적으로 충분한 탄력을 받았다고
판단될 때, 그래서 미국 군수산업의 이해가 필요 충분하게
반영되었다고 확인될 때, 그 때 협상에 나서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 때까지는 ‘깡패국가’ 북한은 계속 ‘깡패’로
남아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NMD 추진을 위해 ‘깡패국가’
북한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한 관계는 NMD의 추진폭과 속도에 따라 조율될
것이다. 아무튼 그 때까지는 남북관계가 미국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도로 ‘과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의 속셈일
것이다. 다시 말해 남북한간의 적절한 긴장은 우리의 그것이
아니라, 미국의 국익에 유리하다. 최근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대북 ‘재포용(reengagement)’을 시사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우리가 일희일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러시아와의 ‘간통’ 미수사건으로 말미암아 DJ 외교는 미국에
목덜미를 잡혀버렸다.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그나마
한반도 주변 열강의 틈새에서 어렵사리 확보한 남북한만의
국제적 자율 공간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곧 어떤
형태로든 ‘햇볕정책’의 노선수정이 기정사실화됨을 의미한다.
미국의 한반도정책의 최종방향은 사실 미국의 국내정치적
역관계에 의해 규정될 문제였다. 현시점에서 그것은 보수
강경파와 보수 온건파사이에서 지금도 요동하고 있다. 조금만
사려 깊었더라면 이러한 미국 내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권력다툼을 이용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미국의
NMD론자와 결탁되어 있는 미국의 무기업자로서 상황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것’이며, 국민의 혈세를 거둬 정부는 못해도
수조원 어치의 미제무기를 구입해야 할 것이다.
한국외교는 러시아와의 공동성명을 성명서에 잉크도 채 마르기
전 그것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식 부인하는 오류를
범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더 이상 DJ외교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곧 북한과 중, 러의 관계 강화를 의미한다. 미국이
요구하는 이른바 한․미․(일) 공조가 강화될수록,
그에 비례해 북방의 북․중․러의 동맹 역시 강화될
것이고, 정확히 그만큼 통일은 멀어진다.
최근 ‘국민과 함께 하는 대북정책’을 내세우면서 대북 20만톤
비료지원을 결정한 현정부내의 고위 당국자는 “남북당국 대화가
원만히 이뤄져야 북미관계도 진전이 있다는 점을 북한측에
비공개 채널을 통해 설득하고 있다”(ꡔ중앙일보ꡕ
2001년 4월 19일자)고 하지만, 미 vs 중․러 관계가
긴장국면으로 가고, 중 vs 일 군사관계가 대치되는 국면에서
이는 남한 당국의 소박한 희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남북관계의
열쇠는 현재의 조건에서 보자면 북․미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이 지난 1994년 북․미간에 합의된 핵
동결협정의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북․미관계의 중요한 디딤돌 가운데 하나인 제네바 협정과
관련 미국은 지원키로 약속한 경수로의 한 개 또는 두 개 전부를
비핵 화력발전소로 대체하고, 당시 합의된 핵사찰을 훨씬
넘어서는 더욱 강력한 사찰조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으로서 이러한 제네바협정 재협상 요구는 사실상 협정
파기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ꡔ한겨레신문ꡕ
2001년 4월 3일자). 남한 당국이 물론 재협상에 반대하는
비망록을 미국에 전달했다고 하지만 미국의 압력이 거세질 때
어디까지 버틸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이미 합의된 협정틀 마저
뒤흔드는 미국의 이러한 시도는 다분히 의도된 도발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즉 언젠가는 재개될 대북 미사일협상을 자국에
더욱 유리하게 끌어가고,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남북한의
독자적 협상입지를 사전에 단속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 단계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정치 군사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의 분리이완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경의선
복원, 개성공단과 임진강 공동 수해방지 대책, 이산가족 문제,
민간차원 인적 교류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이
올 신년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높이에서 보고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대내적
절박함으로 경제회생을 위해 대외 경협은 지속될 것이다. 5월로
예정된 주한 미상공회의소(AmCham) 대표단과 일본 시찰단의 대북
산업시찰의 방북이 그 단적인 예이다.
돈줄이 막혀있는 북한으로서는 ‘통미용남(通美用南)’을 완전
포기하지는 않으면서, 한편으로 중․러 관계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한국내 야당의 ‘공조’(?)로 인해
압박당하고 있는 DJ 정부로부터 더 많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김정일 서울 답방 카드를 계속 활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DJ
방미 이후 국제정치시장논리로 볼 때 김정일 방남의 가격이 더욱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한․미공조가 민족간 즉 남북공조보다 더 중요한 남한 내
일부 특히 보수야당의 입장에서 DJ 외교의 ‘파탄’은 내심
즐거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외교전략 속에 그 무슨
미래의 비전이 들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현재 예상되는
남북관계의 ‘보수화’속에서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반사이익이
목표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과연 ‘햇볕’정책에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NMD, TMD 문제를 고리로 더욱 한국 정부를
압박할 것이고, 김정일의 실리외교는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면서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할 것이며, 남북관계에서의
보수회귀는 더욱 세를 얻어갈 것이다. 애초 DJ 정부의 역사적
임무는 남북간에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예비하는 데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바닥난 정권의 능력으로 보아 이제는
이도 벅차 보인다.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뚜렷이
확정된 무엇이 없이 경쟁, 경합하는 다수의 흐름들이 조수간만을
되풀이하는 지리한 ‘참호전’ 양상을 보일 예정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민중의 외교, 즉 ‘국제적 정치투쟁’ 역량을 긴
호흡으로 성장․진화시켜내는 일이 관건으로 다가온다.
NMD/TMD 반대 운동은 그 첫 번째 고리라 하겠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