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위기인가 노동운동의 위기인가
권두언
백 기 완
자문위원,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자주 들려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점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느닷없는 물음이지만 나는 금새 짚어지는 것이 있었다.
노동운동의 위기이기 전에 노동자의 위기가 아닐까 하고.
그래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축(일단) 접어두고 딴 것을
물었다.
“자네 말뚝이 춤을 추어본적이 있는가” 하고. 그랬더니만 그런
춤은 추어본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본 기억도 잘 안 난다는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말뚝이로 말하면 머슴과 종, 아니 노비를 아우르는 일꾼의 총칭,
그 일꾼들의 예명에 가깝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현대판
노동자다.
그런 노동자가 말뚝이 춤을 추어본적도 없고 더더구나 본적도
별로 없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초라한 패배자처럼 고개를 절로
떨구고 말었다. 내 한살매(일생)는 역시 실패였구나. 더듬어
보잔 말이다. 내 입으로 또는 글로 말뚝이를 말해 온지가 그
몇해던가. 자그마치 마흔해가 더 지났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노동자가 실지로 자기 예명이나 다름없는 말뚝이를 잘
모른다고?
이 사태로 하여 추억은 향수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뉘우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우친 바 있었다.
어쨌거나 말뚝이 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춤의 하나라고 치켜세워도 결코 잘못되질
않는다.
첫째 말뚝이 춤은 이 세상에선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그
계급성이 분명한 춤이다. 얼핏보면 펄쩍 펄쩍 뛰기만 하는 것
같은 그 춤사위(동작)는 쇠사슬로 발이 묶이고, 끄나풀로 허리가
감기고, 멍에로 목덜미가 짓눌려진 것을 탕탕 끊어 팡개치는
온몸의 몸부림인 것이니 이점에서 세계 어느 곳 어느 민족의
춤에도 없는 계급성이 분명한 춤이라는 것이다.
둘째 말뚝이 춤은 그야말로 노동의 예술적 전개라고 할 것이다.
잘 아는바 모든 동작은 생산의욕의 산물이다. 따라서 생산과
연결되지 않는 동작은 한갓된 더듬이 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보면 말뚝이 춤이야말로 생산이 아닌 노동을 무너뜨리는 창조의
예술이다 이 말이다.
셋째 말뚝이 춤은 단순한 표현예술이 아니라 말뚝이의 염원을
몸으로 빚어 가는 세계, 즉 해방의 춤이라고 규정한다.
말뚝이 춤에 따를 것이면 손끝하나 까딱하는 사위에서
이룩되어지고 있는 새 세상을 느낀다고 했다.
떵~하고 드는 다리에 세상이 온통 들리고, 또다시 떵~하며
들썩이는 어깨짓 하나에 주어진 세상이 가로 가며 새판이
잡힌다고 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 입때껏 끌려만 다녀온
세상일랑은 박살을 내고 그 대신 말뚝이의 세상이 이룩되는
것이라고 했음으로 말뚝이 춤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말이다. 이
땅의 멍석말이 춤, 그 가운데서도 썽풀이 춤과 함께 가장 어기찬
해방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추고 있는 말뚝이 춤에 이런 제 모습, 제
원형이 발전적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 말뚝이 춤의
계급적 본질과 생산적 노동의 예술적 전개과정 및 그 해방의
세계는 박제된 채 춤의 틀거리만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즈음도 말뚝이 춤 하면 펄쩍 펄쩍 뛰긴 한다. 하지만 말뚝에
매인 사슬일랑은 이를 탕탕 끊어 팡개치질 못하고 마냥 말뚝을
맴도는 형상, 끊임없는 노예의 몸짓일 뿐 노예적
억압․착취의 굴레를 찢고 사람으로 다시 서는 모습이
애매함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땅불쑥하니(특히)
춤사위를 온몸으로 휘저으면서도 발끝 손끝에서도 그렇고 어깨짓
고개짓에서도 그렇고 도대체 그 춤엔 머슴 말뚝이의 염원을
형상화해 가는 해방의 세계가 아롱지지는 못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되어진 것일까? 간단한 것이다. 요즈음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동, 나아가 그 염원의 한계의 반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되어져 가분재기(갑자기)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온다. 보잔 말이다.
구조조정의 본질
요즈음 김대중 정권이 강행하고 있는 이른바 구조조정의 기본
성격이란 딴 것이 아니다. 이 땅의 노동자들을
미국금융제국주의에 영원히 종속시키자는, 실질에 있어 노동자
노예제도화다. 다시 말해 우리노동자들을 미국금융제국주의라는
말뚝에다 비끌어 매는데 어떻게 비끌어 매느냐.
첫째로는 노동자의 실체를 철저히 박제, 단순한 노동의 단위로
종속시키고 있다. 그 점을 입증하는 예는 여러 가지 들것도
없다. 우리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강제로 내쫓는 정리해고라는
것이 그것이다. 너희들은 경제활동은 하되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의 노예일 뿐 알기(주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독점자본에
이익이 되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자르는 노예. 설사
일시적으로나마 정리해고 대상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너희들은 한사코 노예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의 주역이자 역사창조의 알기인 노동자의 역사적
본질을 파괴․부정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반동적인
폭력이요, 가장 터무니없는 가치관의 전도로써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용납할 수가 없는 노동자 노예제도의 강행이지 결코
단순한 구조조정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우리 노동자들은 지금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혹시 정리해고에서만 비켜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다시금 일자리만
뺏어내면 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노동자 노예제도라는
함정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같은 사람은 몹시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다.
두 번째로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밥줄
끊기가 아니다. 이 땅 노동자 전체를 강제적으로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백치화 정책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노동의 본질은 생산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본질은 사람의 보편적
염원을 실현하는 알기라는데 있음은 노동자들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아는 바다. 그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이룩하는 실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실체는 한갓된
깨우침이거나 인식의 여울이기에 앞서 변혁의 총체다.
가령 역사를 일으킴에 있어서 독점자본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이
앞장을 선다는 것이요, 독점적 소유지배가 아니라 그것을 해체,
지배의 보편화 정신을 관철하는 것이요. 자연의
착취․훼손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룩해내는 총체적
힘이라는 점에서 비로소 우리 인류에게는 세계주의라는 실천적
명제가 제기 되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우리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강제로 쫓아내면서
뭐라고 해오고 있는가. 미국금융제국주의의 무제한의
착취․약탈․독점화에 지나지 않는 세계주의를 마치
우리 노동자들의 꿈의 세계인 것처럼 뻔뻔스럽게 바꿔치기
함으로써 우리 노동자 대중을 바보 멍청이로 만들어 가고
있다.
한마디로 범죄다. 남의 담이나 넘보는 것은 좀도둑이지만 멀쩡한
노동자의 혼백을 빼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범죄로 된다.
그런데 요즈음의 우리 노동자들, 맨날 만나는 우리 노동자들이
참말로 이점을 철저히 깨우치고 있는가. 그리하여 바보 멍청이
공작으로부터 자기를 일으키면서 아울러 역사를 일으키려고 들고
일어서는 것인가. 혹시 김대중씨를 보수여당․야당이라는
관계 속에서 상기도 상대적 우위성을 점치려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도 아니면 계급의식의 주적인 지역주의 연고주의에
빠져 파리하게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요즈음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서 노동자의식의 위기를
느끼고 있음을 솔직히 실토하고 싶으다.
세 번째로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이란 결코 딴 것이 아니다.
오늘의 노동자들을 아주 까놓고 한 초라한 소비의 단위, 소비의
포로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싶으다. 즉 노동자의
소시민화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자식을 둔 어느 정리해고 노동자의 푸념인즉
끼니가 어렵고 푼돈 차비가 어려운데도 막대한 돈을 들여 그
녀석을 영어과외공부를 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영어과외를 안 시켜 영어실력이 떨어지면 애들한테 따돌림(그의
말은 왕따)을 당하게 되니 애비로서 그 어린것의 아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하고 울부짖다 말고 눈에 불을 밝힌다.
김대중씨는 우리 노동자들의 밥줄을 끊어 놓고서는 또
한편으로는 필요치도 않은 영어공부를 위한 돈을 반드시
필요하게끔 만드는 이중 오라를 쥐어트는 점에서 노벨평화상을
탔으나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란다. 우리 노동자들의 평화를
파괴하고선 있는 놈들의 부귀․평화만 이룩해준 희대의
반평화분자라고 열을 올리는 것을 보고선 아, 우리 노동자들!
아직도 희망은 있구나 하고 생각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늘의
현실에 자기도 모르게 몰입돼 가는 한 단면에서 안쓰러운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어느 노동자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감옥이라고
갔다와 보니 괴로운 것은 일터에서 떨려난 것보다도 집세 값이
엄청나게 오른 것이라며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어즈버 지금 우리사회에서 한 생활인의 고뇌는 돈이다. 그런데
그 돈은 벌면 벌수록 휴지처럼 되어 가는데도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한 소비의 단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은
무엇일까.
두말할 여지도 없이 한 인간을 노동의 단위 또는 소비의 단위로
종속시켜야만 지속할 수 있는 미국금융제국주의 및 그것의
국내표현인 재벌지배의 모순, 자본주의 문명의 악덕이다.
그렇다, 김대중 정권의 그 구조조정이란 바로 이들 독점자본의
살인적 이익을 보장해주고 있는 권력의 발악이자 폭력의
폭동화인 것이니, 이때 우리 노동자들은 어찌해야 할까. 조작된
소비의 단위, 창조적 알기의 소시민화라는 자본주의 문명과 맞서
싸워 노동자 자신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넷째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은 아주 까놓고 우리 노동자들을
기회주의, 비겁자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대기의 밝음과 밝은 사람의 목숨은 결코 딴 것이 아니라 하나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과 올바른 세상 길도 아무려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면서도 올바른 길을 내(만드는)는 것이거늘 김대중 정권은
먹고사는 것을 위해서는 어두운 암흑과도 타협해야 한다고 하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정과도 동침해야 한다는
미금융제국주의의 인간파괴, 지배논리를 대행 우리 노동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어떤 철학,
어떤 사상, 어떤 종교, 어떤 지배이념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악의 논리이자 반역의 망발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땅에
노동자들은 이점에 대하여 어더렇게 대항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만에 하나 속아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이면 이것은 노동자의 위기이자 사람과 그 문명의
위기이니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노동자들은 감연히 일어나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을 깨트리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구조조정 반대운동이어서는 안 된다. 곧바로
김대중 정권 타도투쟁이요, 나아가 구조조정의 원흉 왕초인
미금융제국주의의 해체를 위한 싸움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민주노총 중앙위에서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을 결의한 것은 그동안 침체됐던 노동자의식을 일깨우고
당면과제를 올바로 세운 것으로 노동운동사와 사회변혁운동사에
빛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만 김대중 정권의 퇴진은 오늘의 지배체제의 치명적 타격을
주는 것이지 그 지배체제의 근본적 변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김대중 정권의 퇴진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고 한다면
노동자투쟁이 참된 변화․변혁의 실체, 다시 말해 우리
인류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되어야 하나니. 민주노총을
비롯한 모든 노동자와 노동운동세력은 바로 그 수준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현 단계 5월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없는 자는 가슴을 디리대고 있는 자들은 칼을 디리댄다.
그러나 칼은 피를 낼 수는 있어도 펄펄 끓는 가슴을 이겨낸
실례가 없었던 것이 인류의 역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