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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최대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현장에서 미래를  제67호
안윤길


노동자 최대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안 윤 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편집차장





지난해 ‘호텔롯데’와 ‘의료보험노조’를 폭력경찰이 마구잡이로 짓밟은 것을 신호탄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폭행당하며 거리로 내쫓겨도 언론은 함구령이 내려진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초국자본에 길을 터주면서 공기업을 비롯한 알짜배기 기업들이 야금야금 해외자본에 잡아먹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대우자동차에서는 조합원 1,750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정권과 자본은 법의 정당한 판결문에 따라 노동조합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노동자들을 개 잡듯 때려잡았다.
저희들이 만든 법 조항을 스스로 찢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 이 땅 곳곳에는 허가받은 폭력이 판을 친다. 대우사태에서 폭력경찰에 대한 국민의 매서운 눈초리를 의식한 정권과 자본은 단위사업장 곳곳에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경찰은 그 뒤를 따라다니며 짓이겨진 노동자들을 무더기로 잡아 가둔다. 이른바 깡패와 경찰의 합동작전이다. 대부분이 노동으로 먹고사는 국민들은 무법천지가 된 이 땅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며 불안에 떨고 있다.
거리에는 노숙자들, 실업자들이 우글거리고, 살아남은 노동자들조차도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다. 게다가 날로 치솟는 물가, 무법천지의 세상,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 땅의 매판자본이 IMF를 불러 들인지 3년 반만의 일이고, 집권 초기부터 국민의 정부라 떠벌리다가 지금에 와선 국민에게 미친 개의 이빨을 들이대고 있다.

그러면 오늘의 사회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왜 우리 노동운동판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알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사회학자도 정치인도 아니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시 따위를 쓴다고 끄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작가 나부랭이도 아니다. 이제 노조 집행간부 임기가 끝나면 현장으로 돌아가 용접고대를 잡아야 하는 현장 노동자일 뿐이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눈으로 지금 세상을 바라본 생각과 느낌을 글로 쓰는 것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되풀이되는 피의 역사
해방 전후를 한 시점으로 볼 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우지 못한 탓이다. 그 과정에 원인이 어디에 있건 누구의 잘못이건 한반도에 미군이 들어와 허리를 동강냈다는 사실이다. 한 민족 한 땅덩이에 두 개의 정부가 선 것은 한반도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대신 오늘날의 ‘웬수’가 된 미국이 쳐들어왔다. 늑대가 물러간 뒤 호랑이가 들어온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ꡔ노나매기ꡕ, 창간호.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승만은 민주의 탈을 쓴 반공자본정부를 세웠다. 미국의 핫바지인 이승만 정권은 친일세력을 단죄하기는커녕 기득권을 주었고 그들에게 민중착취의 빌미를 주었다. 이런 상태에서 노동자 민중세력이 자랄 수 있었을까?
그 때 노동운동의 전신인 ‘전평’은 그야말로 수난 그 자체였다. 그 때 노동운동가들은 잡히면 빨갱이로 몰려 죽어버렸으니, 지금의 노동운동과 감히 견줄 수 있겠는가. 저기 저만큼 가면 죽는 줄 알면서도 목숨걸고 실천했던 노동운동 선배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더라면 오늘날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 이승만 독재에 끊임없이 피 흘리며 저항했던 민중세력의 결과로 4․19를 일구어냈으나 그것도 잠시, 5․16쿠데타로 노동자 민중은 다시 군홧발에 짓이겨졌다.
박정희 정권의 ‘새벽종이 울리네 … 잘 살아보세 …’ 따위 노래는 노동자 민중에게 끊임없이 허리띠를 졸라매게 했고, 반면 자본가들은 맘놓고 착취할 수 있었으니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그뿐인가. 박정희 군부독재는 노동자 탄압엔 이승만보다 한 술 더 떠, 노동자세력이 아예 자랄 수 없도록 체제를 착취구조로 바꿔놓았다.
우선 상급단체부터 어용으로(대한노총에서 한국노총으로) 만들어 버렸다. 단위사업장노조체제로 바꾸어 놓은 노동조합은 몇 개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나마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노동조합 만들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이란 그야말로 목숨걸지 않고는 도저히 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참으로 긴 어둠의 세월이었다. ‘권불 10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무려 20년이나 군사독재가 이어졌다. 그러다 1980년 초, 곪아터진 저희들끼리 기득권 싸움을 벌이더니 신군부세력이 등장했다. 그리고 한서린 5월의 피어린 항쟁은 다시 어둠의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7년 세월이 흐른다. 끊임없는 민중의 고통에 찬 함성은 1987년 6월 항쟁을 불렀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해방 직후부터 87년 노동자대투쟁 직전까지 이 땅 노동자들에겐 얼마나 고난의 세월이었던가. 또한 그 어둠의 시대에 전평의 노동선배 열사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해 노동운동에 피 흘리며 몸바친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는 지금 선배들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가
노동자 세상이 온 듯 싶었다. 노동자 민중의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외침에 열악했던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많은 것이 달라져 노동자도 살만하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아마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역사로 본다면, 잠시지만 87년부터 95년까지가 노동자 민중에게 가장 ‘밝은 세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95년 이후부터 자본의 총공세(신경영전략)가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독재’의 병폐도 함께 드러나면서 노동자들이 수없이 외치며 싸웠으나 집요한 자본의 총공세에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편, 97년 들어 뒤에서 원격조정 하던 초국자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IMF에 목덜미를 물렸다. 그리고 끊임없는 고용불안 속에 보낸 3년 반, 지금은 87년 이전보다 못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반세기 근대역사를 들여다 볼 때 지금이야말로 가장 어두운 시대이고 노동자 수난시대이다.


그러면 이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많은 민주인사나 노동운동가들은 나름대로의 논리로 주장을 펼치거나 혹은 논문 따위 글을 통해서 자기 주장을 펼치고 투쟁방법을 제시했다. 나 또한 그들의 논리나 글에 상당히 감명도 받고 공감되는 부분도 있지만 여기서는 내가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노조활동을 하면서 깨우치고 느낀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우선 나는 해방 직후의 전평 활동을 했던 노동 선배들이나 전태일 열사를 존경한다. 그분들은 운동의 논리보다 온몸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지금 상급단체나 유명한 노동운동가들은 선배 열사들에 견주면 훨씬 머리도 좋고 운동논리도 억수로 뛰어나다. 그러나 그들이 선배 열사들보다 훌륭한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 까닭은 운동이란 게 끊임없이 지식을 많이 쌓아 머리를 잘 굴린다고 노동운동을 잘하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벌써 노동해방이 되었어야 하질 않겠는가.
실천을 해 나가는 데 논리나 지식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 사람의 굳은 의지, 올바른 심성, 곧 사람됨됨이가 중요하다. 자본의 어떤 탄압에도 굽히지 않는 노동자의 혼,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우리는 선배 열사들이 온 몸으로 실천하며 어둠을 불살랐던 투쟁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탓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대 노동운동가들은 오늘날 이런 암울한 시대를 만드는 데 한 몫 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죄인임을 새겨두어야 한다.


자본의 탄압은 참으로 집요하다
자본은 자기네 기득권을 지키고 착취를 위해서는 참으로 집요하게 탄압했다. 그 집요한 정신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저놈들은 우릴 상하 좌우로 철저히 찢어 놓았다. 노동자가 모이면 그 힘을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린 자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 그것은 무엇인가? 동지애 곧 사랑을 빼앗긴 것이다.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그 노동이 세상을 열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노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노동은 어머니의 노동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생산하며 끊임없이 존재를 이어가는 어머니의 노동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노동이 아니겠는가.
그 어머니의 노동에 씨뿌리고 지키고 떠받치며 가정을 이끌어 가는 아버지 노동이 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노동이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역사를 일구어 왔다. 이같은 이치가 어디 인간만이 그런가?
이 세상 모든 것들, 즉 천지만물이 이 과정을 거친다. 온갖 초목들이 꽃피우고 열매맺고 다시 씨뿌려 존재를 이어가는 과정, 동물들이 먹이사슬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 생태계를 이루는 이 모든 것들의 원동력도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노동은 역사의 흐름이며 그 자체며 대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으로 존재를 이어왔듯이 모든 노동의 밑바탕엔 사랑이 깔려있고 사랑이야말로 노동역사를 일구어 온 원천이다.”

이것은 내가 노동으로 살아오면서 깨우친 노동에 대한 가치관이다.
그런데 노동을 상품화한 자본주의는 그 시작부터 모순을 안고 있다. 왜냐면, 어버이의 사랑으로 시작된 숭고한 노동이 한낱 상품으로 취급되어 임금노동으로 변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노동자는 근본부터 사랑을 잃으면 무너지게 되어있다. 사랑에서 동지애가 나오고 동지애는 노동자를 단결하게 만든다. 노동과 사랑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한다. 삭막하게 변해버렸다. 이렇듯 바탕이 무너진 상황에서 아무리 단결을 외치고 투쟁을 외쳐봤자 공허할 뿐이다.
이미 자본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철저히 연구하여 우릴 갈가리 찢어놓았는데, 우린 당장 눈앞의 탄압에도 대응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지 않은가.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안다는 것은 참 무섭다. 왜냐하면, 아는 만큼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실천해야 그것을 깨우칠 것이고 거기서 지혜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이것이 지식과 지혜의 다른 점이다. 실천은 않고 지식만 쌓는다면 가분수가 되는 꼴이다. 오늘의 운동판도 다들 실천투쟁은 하지 않고 머리만 커져 대가리만 굴리다보니 아옹다옹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원인은 아마도 노동조합이 자본을 상대로 협상에 나서면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협상이란 밀고 땡기는 과정에서 타협이 있게 마련이고 결과물을 조합원에게 챙겨주자면 자본에게 양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원칙을 주장하는 활동가들한테 욕을 먹고 비판도 받는다. 노동운동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관료화란 말이 나왔을 게다.
어찌 보면 민주노총이 합법으로 인정받으며 실천투쟁정신을 잃은 것이 가장 큰 손실이 아닌가 싶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투쟁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온 몸으로 실천했던 노동 선배들의 투쟁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가장 큰 것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지랄같은 자본주의 체제인 이 땅에서 노동자가 짱돌을 들지 않고는 세상을 바꿔낼 수 없다. 전노협시절에만 해도 자본을 상대로 철저한 실천투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이는 누구에게 책임지우기보단 모두가 함께 반성하고 풀어 가야할 우리의 과제라고 본다.
어쨌든 지금은 노동자 최대의 수난시대이다. 그러나 노동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해 왔듯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노동자 탄압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저놈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는 만큼 전력을 소모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실천투쟁이다. 실천투쟁을 위해서 단결해야하고 그 단결을 위해 우리 가슴 밑바닥에 묻혀있는 사랑을 끄집어내 동지애로 만들어 가야하지 않을까? 혹시 이 판국에 무슨 동지애냐 사랑이냐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린 뭉쳐야하고 투쟁을 해야하는데 방법이 없잖은가?
진리는 변하지 않는 법, 비록 늦더라도 가장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사랑으로 동지애로 다시 시작하면 우리의 앞날은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한/노/정/연

2001-06-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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