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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조합주의와 사회-정치적 '세력화',그리고 '국민정당화'

현장에서 미래를  제68호
박영균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진행됨에 따라 사회 전반의 보수성의 정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언론의 보도나 학계의 사회진단 등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IMF 초기 그것이 구조조정의 추진과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의 확립 등을 말하던 보수적인 논객들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온건하고 중도적인 논자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사회구조 개편에 대해 보다 온건한 개혁을 말하는 논자로부터 일견 급진적으로 보이는 견해들을 제출하는 논자까지 그 스펙트럼은 넓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여지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내용상의 차별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말해지는 필자들이 근래 들어 이러저러한 잡지나 신문을 통해 발표한 글들을 볼 때 그 내용이 갖는 친자본적인 성격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은 친자본 ‘진보’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의 특집을 기획하여 최근 들어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의 배경과 그 이면을 살펴보고, 쟁점이 되고 있는 각각의 사항들에 대한 ‘진보’ 지식인들의 논의를 차근차근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먼저 첫 글 “사회적 조합주의와 사회-정치적 ‘세력화’, 그리고 ‘국민정당화’”를 통해 정당 및 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들을,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의 본질은? - 부채는 밑으로 가라앉고 부는 위로 올라가는 것”을 통해 시장질서 확립에 관한 논의들을 검토하며, “자본을 위한 노동조합의 대응 - 「한국 조선산업 노동조합의 구조조정 대응정책」이 의미하는 것”과 “공기업 노동운동에서의 이념, 정책, 조직방식”을 통해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구조조정에 대한 ‘진보’적 논의들에 대한 비판지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회적 조합주의와 사회-정치적 ‘세력화’, 그리고 ‘국민정당화’

박 영 균/연구원




1. 최장집 교수의 훈수(?)와 ‘노동운동’ 내의 논쟁

지난 2월, 어느 노동운동연구소가 주최한 인터뷰에서 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장집 교수는 진보정당 운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 당은 추상적이고 이념 지향적인 정강을 너무 내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 당의 이념이나 정강이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개발하고 도덕적 리더십을 갖추는 작업이 시급합니다. 물론 계급 연합 정당으로서의 지향을 분명히 해 당의 외연을 확장해야 하고, 현실 정치에서 제도적 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능숙하고 세련된 협상 기술을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기존 정당과의 연합 전술도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는 최대한 유연성을 발휘해 기성 정당과 연계할 수도 있을 겁니다.” (ꡔ노동사회ꡕ 통권 52호)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정당이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에 대한 그의 답변 내용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간단하다. 첫째, “이념 지향적인 정강”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개발하고 둘째, “제도적 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능숙하고 세련된 협상 기술”을 갖추어야 하며 셋째, “계급연합정당으로서의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조언은 노동운동을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 단호한 대처를 주장하는 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인 황태연 교수보다야 나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주장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진보정당운동이 계급연합적 성격, 또는 탈계급적 성격을 지닌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단체들이 계급정당적 주장을 계속하니까 함께 갈 수가 없”(월간 ꡔ말ꡕ)다는 것이다. 그래서 DJ의 정책집단인들은 ꡔ노동사회ꡕ의 편집진이 너무나 정확하게 최장집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 제목으로 뽑은 바로 그것, 즉 “노동운동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이와 같은 ‘발상의 전환’(?)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 ꡔ노동자의 힘ꡕ 준비 18호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기아자동차의 ‘기아차 살리기’ 운동과 현대자동차의 ‘차선’적 정책 대안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이 시차를 넘어 완벽하게 맞물리는 구도를 띠”면서 ‘노동운동은 구태의연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투쟁을 위한 투쟁’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갖는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이와 같은 주장들이 공식적으로 소위 ‘계급연합적 성격을 지닌 정당’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정면 반대냐’, 아니면 ‘신자유주의 폐해 규제냐’는 식의 논쟁 구도를 형성하면서 제기되고 있는 현재의 노동운동 노선논쟁1)은 본질적으로 그 동안 가열차게 진행되어 왔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대한 정부의 ‘신공안’적 탄압을 계기로 ‘국민파’가 노동운동을 분열시키고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다. 즉, “정치적으로는, 적어도 그동안 노동운동진영의 신자유주의 반대 입장에 … 파열구를 내려 하고 있”으며 “그 파열구의 조직적 효과는 소위 ‘국민파의 전국적 완성’”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발상의 전환’이 노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최종 산물은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탈계급적 “계급연합정당”, 또는 진보정당의 ‘국민정당화’로 귀결될 것이다.



2. ‘사회적 조합주의’와 진보정당 건설

1) ‘발상의 전환’과 ‘사회적 조합주의’

노동운동 내부에서 ‘발상의 전환’을 주창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최장집 교수의 훈수(?)에 의해서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며 최근에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발상의 전환’은 민주노총 1기가 표방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슬로건 속에서 이미 공개적으로 표명되었던 것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인 김유선은 “우리나라 노동조합운동이 새로운 도전을 이겨내고, 전체 노동자 대중과 국민에게 꿈과 희망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으로 사회적 조합주의를 정립해야 한다”(ꡔ노동사회ꡕ 통권 25호)고 주장했었다.2)

아울러 그는 “⑴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국민적 과제에 관심을 갖고 전체 사회의 이익과 국민생활 옹호에 앞장서야 한다고 판단했고, ⑵이를 위해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슬로건 아래 사회 개혁을 주요 투쟁 과제로 정식화했으며, ⑶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노사정 3자 기구를 통한 정책 참가와 경영 참가를 중시”(위의 글)하는 노선을 취했다는 점에서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사회적 조합주의’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적 조합주의’의 한국적 형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새롭게 제기된 것처럼 보이는 노동운동의 ‘발상의 전환’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며 현재 노동운동 내부에 ‘전환되어야 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도 제기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존재해 왔던 ‘국민파의 이념적 이데올로기’인 ‘사회적 조합주의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로, 이미 ‘낡아빠진’ ‘구태의연한 것들’의 재판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와 같은 주장들이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을 계기로 터져 나왔다는 사실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그것이 DJ의 신자유주의적 ‘불가피성’(?)과 경쟁적 시장질서로의 재편이라는 ‘개혁(?)’적 이미지를 이용하여 정권의 대노동 탄압과 구조조정의 강행이 빗어 내는 참혹한 노동 ‘현실’을 국민적․친자본적 운동으로 재편하려는 ‘국민파의 새로운 공세’라는 점에서 ‘새로울’ 뿐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조합주의가 내세우는 ‘발상의 전환’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최근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반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규제’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은 사회적 조합주의의 노동현장으로의 확대로서, 사회적 조합주의가 요구하는 ‘발상의 전환’이 근원적으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가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연구위원인 김영두는 “기업과 시장은 둘 다 중요한 자본주의 경제 구성단위”라는 인식 아래 “시장원리의 남용을 규제하고, 그 폐해를 고쳐 가는데 노조의 힘이 투여되어야만 고용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ꡔ노동사회ꡕ 통권 52호)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성재는 “‘공장 정상화’를 목표로 사업과 투쟁을 배치해야 하며, 비현실적인 요구나 과도한 전제를 달아서 정상화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면서 “노조․사무노위․회사 3자의 범대책위를 세”우고 “‘공장 정상화와 부평공장 사수와 발전’을 위해 노사가 합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발상의 전환’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본의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시장’을 통한 노동-자본의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합의적 메카니즘을 만들어 내는 계급 협조주의로부터 시작된다. 사회적 조합주의가 제시했듯이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쟁점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 세력화를 목표”로 하며 “정부와 사용자들과 협상하고 복잡다단한 협약을 감시할 능력”을 기르고 “사회경제적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ꡔ노동사회ꡕ 25호)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단위노조 또는 노동현장에서의 계급 협조주의, 또는 계급타협적 합의주의에서부터 사회 전체차원에서의 ‘사회적 합의주의’까지라는 외연의 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세력화’와 ‘정치세력화’는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합의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즉, ‘사회세력화’란 “‘임금인상 중시형’에서 ‘사회개혁ㆍ고용안정 중시형’으로 요구를 전환”(위의 글)라는 관점에서 1) 사회적 의제들에 노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주체로 나서는 것이며 ‘협상 능력의 강화’란 2) “‘개별 기업주를 상대로 한 기업별 교섭’에서 ‘정부와 사용자 단체를 상대로 한 중앙 교섭ㆍ산업별 교섭’으로 교섭 대상과 방식을 전환”하는 것(위의 글)이다. 따라서 ‘노사정위원회’에 적극적 참여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 조합주의’와 ‘국민파’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정치적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사회적 조합주의를 제창하는 김유선은 “노사정위원회가 실질적인 사회협약기구가 되기 위해서는, ①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정당이 존재하고, ②산별체제가 정착되어 있어야 하며, ③민주노총이 확고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고, ④조합원 대중이 지도부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를 적극 추진하면서, 어떻게 하면 지도부에 힘을 모아 줄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위의 글)고 주장한다. 이것은 결국, ‘노동운동의 전환’을 외치는 ‘사회적 조합주의’가 3) 산별노조 건설과 진보정당 건설을 주장하는 것 또한,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이후 사회의 대체 권력 또는 대안적 정치권력의 주체로 세우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국가-시장(자본)-노동의 3주체의 관계에서 노조의 협상능력을 강화하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의회 제도적 절차로 제한하고 이 안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해소하려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조합주의가 내세우는 노동운동에서의 ‘발상의 전환’이 노동자계급에게 요구하는 것은 첫째, 국가-시장(자본)-노동 3자 관계라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인정하고 시장질서 안에서 노동자가 현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불이익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이와 같은 구조조정은 단위 기업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이익만을 챙길 것이 아니라 노․사․정이 참여하는 전사회적인 합의체에 참여하여 사회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이런 협상 테이블에서의 협상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세력이 강대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강력한 힘을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 건설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이를 통해서 국가-시장(자본)-노동의 3주체가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적 합의 체계 안에서의 체제 내적인 사회․정치적 세력으로 정립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2) 사회 조합주의의 사회 세력화와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의 완성

‘사회적 조합주의’에서 핵심이 되는 3주체의 정립은 시장(자본)-국가-노동 3주체가 노사정 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협의체인 ‘정책 참여 기구’를 만들고 이 안에서 구조조정과 노동문제 전반을 해결해 가는 것이다. 이 때, 국가는 자본-노동의 이해 관계를 조율하는 가치 중립적 또는 사회 공익적 기구이며 이를 통해서 자본-노동의 대립은 해소될 수 있으며 해소되어야 한다. 최장집 교수가 말했듯이 독재국가에서의 문제는 시장(자본)-국가만이 있고 노동이 이 주체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참여연대의 박원순 사무처장의 말처럼 최장집 교수와 노동운동 내의 사회적 조합주의자들 또한 “노동문제와 관련하여 정부는 출범 초기 노사정위원회라는 탁월한 제도적 틀을 만들었”(ꡔ노동사회ꡕ 통권 53호)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제도를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 남한의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안정적인 제도적 틀로 정립해내는가이다.


“노사정위원회는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노동의 동의를 구하려 만든, 제도적 개선을 위한 고안물이라 할 수 있어요.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자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을 초래하는 문제들을 노동의 동의를 얻어 관철시켜 사회적 저항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장치입니다. 물론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기능하는 한편, 노동이 중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이기도 했습니다만, 후자의 성격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의 정책 참여 기구가 발전했습니다. 이를 두고 코포라티즘이라 하지요. 한국과의 차이점은 유럽의 경우 이들 기구들이 복지 정책을 주로 다뤘는데 반해 한국의 노사정위원회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기구였다는 점입니다.”  (최장집, ꡔ노동사회ꡕ 통권 52호)


결국, 최장집 교수의 주장은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도구’로서의 노사정위원회가 아니라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노사정위원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 앞에서 보았듯이 김유선의 주장 또한 결코 다르지 않다. 여기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적 진보(?)를 대변하는 최장집 교수와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박원순 변호사, 그리고 노동운동 내의 ‘진보’(?)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김유선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따라서 비록 다른 어법과 논리를 차용하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만남을 결합시켜 주고 그들을 묶어 주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의 완성 이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다.

‘코포라티즘’은 국가가 노/자 갈등을 협상을 통해 제도적으로 해결해 가는 것으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노조가 국가 운영의 하위 파트너로 참여하여 국가 전체의 공익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협소한 이기주의를 포기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 가는 제도이다. 따라서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에 대한 사회적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더 이상 생존권과 경제적 이해를 따르는 비현실적 ‘투쟁’은 종결되어야 하며 ‘코포라티즘’으로 재조직화된 진일보(?)한 사회를 향해 노동자계급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대신에 전 사회의 공익과 시장의 변동에 따라 노동자계급에게 부과되는 현실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한다! 따라서 이들이 모색하는 ‘사회적 합의’는 제도적으로 국가-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상층 ‘합의체’의 건설일 뿐이다. 이것이 사회적 조합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발상의 전환’의 전모이다.

물론 이것을 3주체의 대등한 삼분 정립의 과정으로 생각해서 그만큼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세력이 확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관념적일 뿐만 아니라 문제의 사태를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자본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노조는 정책적 결정 과정에서 하위 파트너로서의 지위만을 가질 뿐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것이 결국 노동운동 자체를 관료적 통제, 관료적 장치를 통한 포섭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노조 상층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사회적 합의’는 결정될 것이며 이 때 배제되는 것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지와 권리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노동운동 내의 조합적 지배에 의해 지배계급적 관점에서 ‘통제’되고 이런 ‘통제’는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조의 상층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이것은 김대중 정권이 신자유주의 ‘개혁’(?) 과정에서 동의를 얻기 위해 취해 왔던 계급 포섭 전략의 완성을 의미한다. 사실, 97년 IMF 위기관리체제로 등장한 DJ 정권은 과잉자본 해소 및 외자유치를 위한 ‘구조조정’과 ‘노동의 유연화’, ‘노동 배제’ 정책을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추진해 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최장집 교수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노동자 집단이 국가 정책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고 이런 측면에서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노동’을 포섭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시장-경쟁력’ 중심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시장 메카니즘에 따른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는 족벌경영과 재벌체제로 대표되는 남한 독점자본에 대한 ‘개혁’의 칼날로 작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합의’와 ‘경제적 합리성’에 따른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구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자유‘시장’질서에 동의하는 중도 보수적 및 개혁적 자유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그리고 일부 노동운동 내의 ‘조합주의’와 ‘의회주의’ 세력은 김대중 정권의 이와 같은 대노동 포섭 전략의 적극적 연대세력인 셈이다.

최장집 교수는 바로 이와 같은 정권 내부의 ‘개혁’(?)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한 포섭 전략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남한에서의 코포라티즘의 완성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위해 노동자계급을 포섭하는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공공연맹 연구전문노조 산업연구원 지부장 박태주는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면서 “코포라티즘은 기본적으로 조직 노동이 정치적 힘을 동원하여 자본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조합주의의 연장이자, 그 일부분을 이룬다. 이러한 사회 협의의 정치는 먼저 국가가 자본과 노동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조직을 인정하고 교섭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운용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ꡔ노동사회ꡕ 통권 54호)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김대중 정권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즉 대노동 포섭 전략의 전도사들이라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3) 탈계급적 연합 지배 블록의 형성과 지배 포섭 전략의 완성

노동운동 내의 진보를 자처하는 김유선과 진보적 ‘개혁’ 세력을 자처하는 최장집 교수의 ‘만남’은 결코 갑자기 일어난 우연적 만남이 아니다. 물론 김유선은 “사회주의”를 목표로 명문화하고 있는 반면 최장집 교수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대안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아닌 ‘어떤 자본주의냐’(which capitalism)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질적으로 이 둘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최장집 교수는 서구 사민주의적 코포라티즘 체제를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김유선은 이것을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의 완성을 위해서는 계급적 이해를 의회 공간 안에서 부르주아적 법질서로 해소해 갈 수 있는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최후의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는 노사정 협력체제의 제도화가 실패로 끝났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실패의 원인을 ‘정치세력화’와 ‘노조의 노동조직 장악’의 미흡으로 진단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제안한다. 그는 유럽식의 코포라티즘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이유로 “노동자 대표가 노동조직 전체를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고, 노조 조직률이 대단히 낮으며, 노동자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계급적 참여’가 아닌 ‘대표만의 참여’였다는 점”에 있다(ꡔ노동사회ꡕ 통권 52호)고 진단하며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제도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자본이 노동을 진정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노동의 정책 결정 과정 참여를 인정하며, 노동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화하는 수준이 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의 힘 역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3)

그런데 이것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과 참여연대의 박원순 변호사가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이제, 이 흐름은 비록 ‘징후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공통 지점을 만들어 내면서 상호 수렴의 지점을 찾아가고 있다. 국가-시장(자본)-노동의 사회적 합의 체계의 수립에서 시작한 이 수렴의 흐름은 첫째, 계급 이기주의를 넘어선 ‘사회세력화’ 또는 ‘사회적 합의’라는 공통의 지점을 만들어 내면서 둘째, 진보정당 건설을 통한 의회 진출이라는 ‘정치 세력화’의 관점에서 탈계급적 연합정당, 또는 중도적 국민통합정당화의 길을 모색한다. 탈계급적 또는 국민 통합적 정당화의 길은 일차적으로 계급의 협소한 이해를 벗어난 ‘사회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박원순 변호사는 “한국 시민들의 이기주의를 인정하지만, 노동운동 역시 국민과 함께 가려는 노력을 제대로 기울였는지 곰곰이 돌아봐야” 한다고 하면서 “노동운동이 사회개혁에 이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내”주어야 한다(ꡔ노동사회ꡕ 통권 53호)고 지적한다.

“노동운동이 자기 목적에서 사회개혁을 제외하지 않는 한, 시민운동과의 연대는 여전히 유효하다.”(위의 글) 그리고 김동춘 교수는 “한국 노동운동의 기본적인 행태, 즉 ‘전투적 경제주의’는 변하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한국 노동운동이 90년대 초반 이후 ‘전투적 경제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사회 운동적 조합주의’ 기조로 변화했어야 한다”(ꡔ노동사회ꡕ 통권 51호)고 주장한다. 바야흐로 ‘사회세력화’ 또는 ‘사회적 합의’라는 공통의 지점 속에서 박원순 변호사, 김동춘 교수 등의 시민운동 세력이, ‘정치세력화’라는 공통의 지점 속에서는 최장집 교수와 민주노동당 내의 우파, 그리고 전국연합과 참여연대의 일부 세력들이 합류의 흐름을 만들어 내면서 ‘불륜’이 시작된다.

김동춘 교수는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이 “80년대의 정치주의”와 “중앙 권력 패권주의를 비판”하면서 “지방의 반란을 주도”하고 “노동세력의 체제통합의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진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한국사회운동의 현주소」, ꡔ황해 문화ꡕ)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희연 교수는 “참여연대의 성격을 ‘민중적 시민운동’, ‘시민적 민중 운동’, ‘진보적 시민운동’으로 규정”하고 “민중운동과 ‘개량적’ 시민운동(특별히 진보적 성격을 갖는 시민운동)의 연합모델” 또는 “전투적 민중 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의 동맹모델”(ꡔ노동사회ꡕ 통권 53호)을 제시한다.4) 따라서 ‘사회개혁’ 또는 ‘사회적 합의’라는 관점 속에서 시민운동은 1기 민주노총이 표방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과 사회적 조합주의의 ‘사회세력화’와의 정치적 합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최근 노동운동 내부에서 최근 사회적 조합주의가 다시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이와 같은 ‘불륜’을 부추기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이해’라는 조강지처의 생활고에 대한 ‘가장’의 권위를 명분으로 하여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 안에 투항함으로써, 그 안에서 신자유주의적 ‘정권’의 시장적 ‘개혁’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노동운동 세력 내부의 ‘불륜’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김유선과 같은 ‘사회적 조합주의’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은 이 ‘불륜’의 공모자들이다. 이들은 김동춘 교수가 제기하는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와 최장집 교수가 제기한 ‘코포라티즘’에서 ‘협상’과 ‘타협’, 그리고 정치권 내에서의 소위 ‘진보정당’을 통한 의회적 법제화를 꿈꾼다. 그러면 마치 자본이 노동을 천년만년 사랑해 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륜’에서 시작된 ‘로맨스’의 애틋한 꿈은 결국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정책의 하위 파트너로의 편입에서 마무리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이 말하는 ‘사회 개혁’ 또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조직적 블럭의 형성은 결국 지배 포섭 전략의 사회적(노사정 위원회)-정치적(진보정당) 차원에서의 제도적 완성을 의미할 뿐이다.



3. ‘국민파’의 정치 제도적 완성으로서의 ‘국민 정당’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장상환 교수는 예전에 “종합적 시민운동 중 보수적인 부분은 노동운동과는 대립적인 측면이 있으므로 보수 여야당으로 흡수되어” 가는 반면 “노동운동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시민운동단체의 구성원 상당수는 노동자, 민중 중심의 진보정당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면서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은 시민운동단체들에 대하여 단체의 간부들이 정당의 당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을 규제하는 내규를 완화하거나 철폐함으로써 단체 회원들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ꡔ산업사회학회ꡕ 학술대회 2000년 5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투쟁을 통해 조직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데, 이와 같은 ‘투쟁’은 끊임없는 일상적 대중과의 지속적인 득표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존 보수 여야 정당과 다른 정책 정당이라는 점을 민중들의 의식 속에 심어 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단순히 노동자뿐 아니라 중소 상인, 중산층에도 그들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당은 민주노동당이라는 선전을 해 나가야 할 것”(위의 글)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 민주노동당의 재창당과 정부의 의회 일정과 관련되어 전국연합과 시민단체를 포함하는 ‘당 외연 확장’에 근거한 실질적인 진보정당으로의 조직적 합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2기 당대회를 통해서 ‘최대한 진보 진영의 역량을 총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의 외연을 확대하는 재창당’을 결의하였고 전국연합은 지난 2월 18일 있었던 10기 대대를 통해서 ‘지방 선거’ 참여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적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정치적 진출’을 결의했으며 시민단체들도 ‘낙천․낙선 운동’ 평가와 관련하여 현실 정치권으로의 진입을 위한 선거 참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지난 4월 11일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수련회에서 정성희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은 최대한 외연의 폭을 넓혀 ‘전국연합, 한국노총, 시민단체 등’을 포함하는 재창당 계획안을 제출하였다. 물론 이것을 현 시점에서 민주노동당의 ‘국민 정당화’라고 단정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노동운동 내의 ‘사회적 조합주의’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 내세우는 정치-사회적 제도화의 정점이 진보정당이고 사회 ‘개혁’적 관점에서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사이의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노동운동 내부의 정황들을 고려해 본다면 현재 이루어지는 만남의 최종 결정판은 탈계급적 국민정당으로의 결집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게다가 장상환 교수가 제기하는 관점에서 민주노동당의 ‘재창당’의 방향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애초에 내세웠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관점에서의 계급성의 폐기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계급 화해와 국민 통합을 내세우는 국민 정당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륜’의 본격적 전개를 의미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민주노동당은 이런 ‘불륜’의 본격화를 제어할 수 있는 계급투쟁의 접합지점을 상실한 ‘선거 정당’으로부터 출발했다.

실제로 최장집 교수에서부터 박원순 변호사, 김동춘 교수, 그리고 김유선과 장상환 교수까지를 포함하여 이들이 말하는 정치세력화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해를 부르주아 의회-선거 질서 안에서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선거 정당의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거에서의 전략은 특정한 계급적 이해보다 국민적 공동 이해, 또는 이들 식으로 표현하면 ‘사회 개혁’적 관점에서 ‘공공선’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선거 정당의 모든 활동이 표를 통해서 표현되며 이 때 표는 노동자든 아니든 동일하게 일인 일표라는 등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 정당은 굳이 노동자 계급 정당이라는 이념을 고집함으로써, 다른 대중들과의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자신의 외연을 축소시킬 필요가 없다. 여기서 선거 전략은 계급 화해와 국민 통합을 선전해 내면서 사회 발전의 경쟁력과 효율성의 증대를 주장하며 당의 외연을 확장하고 전문적인 정치꾼들의 리더쉽을 통해서 무차별적, 무계급적 대중을 장악하는 발전 방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이 점차 계급 정당으로부터 ‘국민 정당화’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적극적 정책 입안자들로 변모해 갔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선거정당의 집권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보다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 낸다는 관점에서 이들이 ‘당의 외연을 확장’하고 당의 대중화를 선언하지만 결과는 노동자들에게 ‘파국’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현 시기 우리의 ‘진보정당’ 운동이 ‘사회적 조합주의’와의 ‘만남’을 통해서 가시화된다면 그것은 중도 통합 정당 또는 탈계급적 ‘국민정당’이며 이것이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계급연합정당’이다. 예기에는 계급도, 현장투쟁도 없다. 오직 국가-시장(자본)-노동의 3주체 관계에서 협상 주체로, 시장의 게임 룰에 따르는 노동자라는 자본의 하위 동맹자가 있을 뿐이다. 김동춘 교수는 우리나라 시민운동이 ‘노동세력의 체제통합에 대한 비판’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 체제 통합의 하위 파트너, 특히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하위 파트너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시민운동이다. 왜냐 하면 이들은 3주체 모델에 따라 자본과 시장 계약적 협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만남’이 진보정당 운동과 결합된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시민운동의 시장적 게임 질서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발상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된 ‘불륜’은 노동운동에 있어서는 ‘파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애초에 ‘불륜’이 꿈꾸었던 ‘로맨스’는 결과가 ‘배신’과 ‘파국’인 것처럼, 이 또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한 정치-사회적 제도화와 지배 포섭 전략의 완성을 의미한다. 즉, 노동자계급의 생생한 투쟁력과 생명력, 그리고 생존권 투쟁을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과 시장질서의 협상 메카니즘 안에 제도화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신자유주의적 협상 파트너가 되어 노동자를 지배 계급을 위한 ‘제물’로 삼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점에서 조강지처인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이다. 또한,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경제합리성을 마치 ‘진보’의 절대적 가치인 것처럼 호도하고 자본이 내세우는 ‘공공선’과 ‘시장질서의 게임’을 마치 ‘현실적’이고 ‘정책적 대안을 지니는 것’처럼 선전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친자본적 이해로 수렴시켜 가고 노동운동을 노동운동의 대부를 자처하는 그들 스스로 체제 내적 질서 안에 포섭시켜 간다는 점에서 ‘발상의 전환’은 노동운동의 ‘파국’을 생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배신’과 ‘파국’의 결말은 결코 노동자계급 운동의 ‘파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위기’는 노동운동을 넘어선 노동자계급 운동의 임박을 알리는 종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내에서의 친자본적, 계급화해적, 체제통합적 운동의 종말은 그들 스스로 신자유주의적 포섭의 하위 파트너로 정착됨과 동시에 ‘불륜’이 빗어낸 ‘밀월’의 ‘로맨스’도 종말을 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신의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시작은 ‘대체’이며 진정한 ‘혁신’의 시작이 될 것이다. 노동운동은 지역적․단사적 형태의 이해를 벗어나 ‘사회적 주체’, ‘정치적 주체’로 자신을 세력화하는 운동을 ‘시작’하지만 이번에는 ‘자본의 하위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대체 권력’으로서 노동자계급 자신이 스스로 대안 권력의 주체로 조직되는, 전국적이고 단일한 정치적 계급으로 일어나는 운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노/정/연



》참고문헌《

김유선,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제언」, ꡔ노동사회ꡕ 통권 25호.

______, 「2000년 노사관계 전망과 노동조합운동의 과제」.

김동춘, 「노동운동, 사회 운동성 회복해야」, ꡔ노동사회ꡕ 통권 51호.

______, 「한국 사회 운동의 현주소」, ꡔ황해문화ꡕ.

최장집, 인터뷰 「노동운동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ꡔ노동사회ꡕ 통권 52호.

김영두, 「대우차 사태, 평가와 노조운동의 과제」(1)(2), ꡔ노동사회ꡕ 통권 52호.

박태주, 「노동조합 민주주의-분권화된 집중화의 모순을 넘어」(1)(2), ꡔ노동사회ꡕ 통권 52호.

______, 「비정규직 노동자-잊혀진 존재에서 중심의 한 축으로」(상)(중)(하), ꡔ노동사회ꡕ 통권 54호.

조희연, 「노동계급은 일반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시민운동을 보는 민중적 관점」(상)(하), ꡔ노동사회ꡕ 통권 53호.

이성재, 「대우차투쟁, 반성과 전망」(상)(중)(하), ꡔ노동사회ꡕ 통권 53호.

박원순, 인터뷰 「대중적인 섬세함과 감수성을 가져야 합니다」, ꡔ노동사회ꡕ 통권 53호.

장상환, 「4․13 총선 평가와 민주노동당의 진로」, ꡔ산업사회학회ꡕ 학술대회 2000년 5월.

정종권, 「‘시민연대’와 ‘민중연대’의 간극에 대하여」, ꡔ문화과학ꡕ.


1) 이에 대한 최근의 비판 글은 김혜란, 「‘신자유주의 규제론’을 전면 비판한다 - 새롭게 전면화 되는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노선 논쟁을 보며」, ꡔ노동자의 힘ꡕ 준비 18호를 참조할 것.


2) 사회적 조합주의라는 이념을 김유선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조합원들의 직접적 관심사뿐만 아니라, 광범한 사회적, 정치적 쟁점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변혁을 위한 사회 세력화를 목표로 한다. 사회적 조합주의의 목표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이다. 사회적 조합주의의 사회적 영향력은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힘, 대중 동원 능력, 사회경제 강령과 정책, 정치적ㆍ사회적 동맹에의 참여에 기초한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노동자 통제와 민주주의 및 운동성의 견지를 약속한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진취적이고 효율적이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정부와 사용자들과 협상하고 복잡다단한 협약을 감시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사회경제적 발전에 크게 기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ꡔ노동사회ꡕ 통권 25호)


3) 노사정 위원회의 실패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조합주의와 최장집 교수 양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는 사회 협약의 정치가 출현하고 안정화되기 어려운 구조다. 노동조합의 낮은 조직률과 기업별 노동조합체계, 취약한 진보정당과 총연맹의 분열은 코포라티즘 기구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공한다. 노사간의 장기간에 걸친 대립 구도와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배제 역시 협약 정치의 출현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박태주, 「비정규직 노동자 - 잊혀진 존재에서 중심의 한 축으로」, ꡔ노동사회ꡕ 통권 54)


4) 이와 같은 시민운동의 평가는 최근 건설된 ‘시민연대’와 ‘민중연대’ 양 조직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내포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조희연 교수의 입장에 대한 비판은 정종권, 「‘시민연대’와 ‘민중연대’의 간극에 대하여」, ꡔ문화과학ꡕ을 참조할 것.


2001-07-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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