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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발생과 노동운동사적 의미

현장에서 미래를  제70호
유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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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발생과

노동운동사적 위치



유 경 순/연구위원







1. 서론

1980년대 전반기에 광주민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가들의 현장투신에 의해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가 형성됐다.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은 1980~85년경까지 1,000명 이상이 노동현장에 투신해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70년대 민주노조활동을 통해 배출된 선진 노동자들도 비공개적으로 사업장모임을 조직, 새로이 활동을 모색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의 차이 속에서도, 공통되게 노동운동의 고립분산성 극복 및 정치지향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노동자들의 연대성 확보를 위한 시도를 했다.

이러한 양 주체의 움직임은 구로지역에서 ‘1984년 구로지역 민주노조운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면서 대중과 결합해 나갔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이러한 학생운동출신 노동자 및 선진노동자들의 활동이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발전시켜 갔던 성과를 기반으로 발생되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직접적으로는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의 구속사건을 계기로 발생했다. 동맹파업은 6월 24일 4개 노조의 동맹파업을 시작으로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강제해산당한 6월 29일까지 6일간 전개됐다. 6일간의 투쟁은 5개 노조의 동맹파업과 5개 노조의 지지연대투쟁으로 확산됐고, 노동운동단체와 민중운동세력의 지지연대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구로동맹파업은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성과이자, 동시에 정부와 자본가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폭로한 투쟁이었다.

이 글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가능하게 한 주체역량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접근한다. 이어 구로동맹파업의 실제적 전개과정과 성격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동맹파업이 노동운동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2. 1980년대 전반기 전두환 정권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1) 1980년대 전반기 노동정책

12․12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17일 이전까지 나타난 폭발적 노동운동을 사회불안의 원천이며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요소로 간주하고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군사정권은 노동운동가들을 노동자와 분리시키고 민주노조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정치활동금지조치’에 이어 노조결성 금지, 한국노총 및 산업별 노조의 활동을 유보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노동조합활동지침’과 보완지침(1980.7.1.)을 10차례나 시달했다. 이어 ‘노동조합정화지침’(1980.8.21.)의 제1차 과정에서 민주노조간부 19명을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 순화교육을 시켰고, 제2차 정화조치 명목으로 노조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와 같은 제반 조치는 노동운동의 발전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군사정권의 안정화를 꾀하려 한 것이었다. 이후 군사정권은 1970년대 노동탄압정책을 계승․발전시키면서 탄압의 강도를 강화했다. 1980년 12월 31일 노동관계법의 개악을 통해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금지조항, 노조설립의 요건강화와 노동쟁의의 냉각․알선기간을 연장하여 노동자의 단결과 권리주장을 위한 쟁의행위를 봉쇄하려 했다.

전두환 정권은 직접적인 노동통제를 정당화시키고 정치문제화될 소지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선성장․후분배 이데올로기의 유포를 지속하면서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통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1980년대 새로이 추진된 노동정책은 ‘임금가이드라인정책’이었다. 1978년과 1979년 각각 20%, 15%이던 공무원 봉급인상률을 1980~81년에 10%, 1982년 9%, 1983년 6%, 1984년에 0%로 하고, 직․간접의 행정지도를 통해 민간부문의 임금인상을 억제했다. 이는 자본의 입장만을 반영해온 저임금구조를 다시금 정책적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압적 노동통제정책에 따라 1980~1983년까지 노동자들의 노조결성과 근로조건투쟁은 침체되었다. 그러나 유화국면 이후 일시적으로 열려진 활동공간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은 바로 표출됐다. 특히 노동법과 임금동결정책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최저생계비 확보와 노동악법’ 문제에 집중되도록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정권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 노동실태와 노동운동의 활성화

(1) 산업별 노동자구성과 노동조건

1970년대 후반의 중화학부문 과잉투자와 세계적 불황으로 일시에 자본축적의 위기를 맞았던 자본가측은 정부의 전면적인 지원 하에 산업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의 지속적인 강요로 위기극복을 도모했다. 1980년 전반기 노동자의 구성은 1981년 전체 제조업 총노동자 수 약 212만명으로, 이중 중공업이 36.1%, 경공업이 63.9%를 차지했다. 1985년 총노동자 수는 약 240만으로 증가하였고, 중공업의 비중은 40%로 증가하고 경공업은 60%로 감소했다. 이는 산업구조에서 점차 중화학공업 남성노동자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경공업 특히 섬유산업의 사양화 추세에 따라 여성노동자들의 비중이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구성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1960년대 중반 이래의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통해 정착된 저임금․장시간노동 구조에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초반 정부의 임금동결정책으로 1980~81년 2년 연속 실질임금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하였고 최저생계비 충족률은 40%에도 이르지 못했다. 총노동시간은 1981년 238.1시간에서 1985년 240.2시간으로 증가됐다. 장시간노동은 과로로 인한 노동자의 잦은 산업재해를 일으켜 산업재해 총 건수는 1980년 112,111건에서 1983년 156,116건수로 증가했고, 그 중 사망자수는 1980년1,273건에서 1983년 1,452명으로 증가했다. 산업재해 외에도 열악한 작업조건의 문제가 노동자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은 불만이 높지만 정부의 억압적 노동정책으로 집단행동은 오히려 감소했다. 집단행동은 1982~3년의 발생건수가 1980년의 비해 50%에도 못 미쳤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그만큼 내적으로 누적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만은 1984년 유화국면 시기에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투쟁 등을 통해 폭발적으로 표출됐다.


(2) 학생운동가들의 현장투신과 선진노동자들의 활동

①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와 선진노동자들의 활동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 이후 형성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경공업 위주의 여성노동자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유신체제에 의해 강요된 어용노조가 되기를 거부한 경인지역 10여개 노조가 종교계의 지원을 통해 새로운 노조운동을 모색했다. 이들 민주노조들은 사업장내에서 지속적인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투쟁을 벌임으로써 조합원들의 경제적 생활조건 개선에 집중했다. 그러나 민주노조들은 개별 노조차원으로 활동하였고, 그나마 연대도 개별적 지원수준에 머물렀으며, 지원세력인 종교단체들의 종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념에 제한되어 독자적 이념을 갖지 못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노조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학생들에 대한 연대거부와 정권의 탄압에 대항한 1981~2년 민주노조 사수투쟁에서 고립분산적인 조합주의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민주노조가 강제해산된 이후 각 노조별로 소모임이 운영됐다. 이들 소모임들은 정부의 탄압 때문에 비공개적인 활동을 했으나, 내적으로 노동조합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자 했다.

청계피복의 ‘청계모임’ 중심의 활동, 원풍모방의 ‘법외노동조합운동’ 등 다양한 사업장별 모임의 추진과정에서 일부의 노동자들은 다른 사업장에 재취업하여 활동을 했고, 일부는 블랙리스트에 의해 다시 해고되기도 했다.

개별 노조 내부의 모임 이외에도 YH,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고려피혁, 반도상사, 서통, 콘트롤데이타 노동자들의 공동모임도 진행됐다. 민주노조출신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활동은 1984년 3월 10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한국노복)’결성과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투쟁’ 역시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1980년대 전반기 선진노동자들의 밑으로부터의 활동모색은 80년 중반 유화국면을 통해 외화되면서,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일 역할을 하였다.


② 학생운동가들의 집단적인 현장투신과 노동운동의 새로운 모색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또 다른 방향모색이 새로운 주체들, 학생운동가들의 집단적인 현장투신에 의해 시도됐다. 그 계기는 학생운동 내부에서 1980년 5월 15일 학생시위대의 ‘서울역 회군’에 대한 반성과 광주민중항쟁에서의 노동자들의 선도성 및 투쟁성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었다.

1980년대 초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 진입은 학교 외부그룹과의 인맥적 연계라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1984~5년경 현장 내에 형성되기 시작한 노동운동그룹과 연계된 학교단위의 현장 이전방식이 가능해지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적 관계가 형성됐다. 이들은 서울과 수도권의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현장에 진입하여 소그룹을 통해 노동자들을 조직하면서, 1970년대 노조운동의 조합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의 현장투신 상황은 다음 <표 1>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 1>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의 현장투신 상황

 

자료 출처

학생운동출신(명)

현장근무여부

비고

1985.6

노동부장관보고

160명

71명해고/53명 자퇴

/36명 근무

?

1985.7

동아일보(7.26)

198명

95명 해고/72명자퇴

1개월동안 38명 증가

1985.12

동아일보(12.15)

302명

176명 해고/112명사직

/14명 근무

6개월동안 2배 증가

1986

?부천상의소식?

699명

?

약 1년동안 2.3배 증가


이외에 월간 ꡔ신동아ꡕ(1989.6.)에는 1980년 5․17 이후 1983년 대학자율화조치 이전까지 제적당한 1,363명의 상당수가 노동현장으로 투신하여 경인지역에서 활동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들은 가시화된 상태만을 계산한 것으로 실제 규모는 그 이상이라고 추정된다.

학생운동출신 노동가들은 현장에 취업하여 활동하면서 지역 내의 다양한 소모임을 통해 노동자들을 조직화했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노동운동의 당면과제가 전국적 조직의 구축이 아니라 운동역량의 축적이라는 주장이 일반화됐고, 이에 알맞은 조직형태로 ‘소그룹’이 제기되어 노동자들의 학습을 통한 정치의식화를 도모했다. 소그룹운동은 운동역량이 미약한 비합법 시기에 분산적 형태이지만 주체역량을 강화하는데 일정 정도 기여하여 유화국면 시기 노동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했다.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의 활동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1984년부터였다. 유화국면이 조성된 1984년 총 113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노조결성도 활발해져 1984년 9월 말 총 212개가 결성됐다. 이 중 택시운수사업체인 자동차노조가 146개로 가장 많고, 이를 제외한 66개중 서울, 부천, 안양 등 수도권 지역 신규노조가 약 30개였고 그 대부분이 직․간접으로 학생운동 출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1985년에 이르면 이 학생운동출신 활동가들이 주도한 노동쟁의가 두드러지게 증가하였다. 이는 다음의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국회보건사회위원회 회의록」(7.3.)에 기록된 노동부장관의 보고에는 “1985년 들어 지난 6월말까지 전국의 노사분규는 모두 145건으로, 전년 동기간의 65건에 비해 121% 증가했으며 … 이중 운동권 학생출신 위장취업자 관련분규가 54건”이라고 했다. 또 노동부장관의 민정당 노동특위 보고에 “1985년 7월 22일 까지 노사분규는 164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75건에 비해 119% 증가했다 … 이중 운동권 관련은 52건”이라고 했다.

이러한 현장 내의 노동자투쟁을 주도하는 활동 이외에 학생운동출신들은 제도개선투쟁 및 반공개 조직활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1983년 말 이리와 경인지역 해고자들의 블랙리스트 철폐운동,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의 결성 참여, 1985년에는 해고자들이 구로․경인지역에서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4월 10일)를 결성하여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지역연대와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을 모색하기도 했다.



3. 1980년대 전반기 구로공단 노동실태와 민주노조운동

1) 구로공단의 산업구성과 노동실태

(1) 섬유․전자산업 및 여성노동자 중심의 산업구성

동맹파업은 ‘구로공단’이라는 공간적 특성이 객관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공단의 조성으로 노동자들이 같은 지역에 밀집되면서 노동자들의 단결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동맹파업 사업장들이 의복제조업과 전자업종으로 집중되었던 사실도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과정에서 형성된 구로공단의 조건과 입주업체의 업종적 특성에 기인한 바 크다.

구로공단은 정부가 1965년부터 한국경제인협회에게 법적인 근거와 세제지원, 금융지원 등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조성됐다. 구로공단의 생산량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첫해인 1967년에는 0.3%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늘어 1972년 이후 줄곧 10% 내외를 기록했다.

구로공단 내 사업체의 업종구성은 조립금속(41.8%)과 섬유업종(37.4%)에 약 80%의 노동자가 집중되었고, 남녀 구성비는 약 38:62 정도이다. 규모별 가동업체 수를 보면 종업원 수 300명 미만의 업체가 71.6%를 차지하고 있어 규모면에서 중소기업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업종별로 보면 음식료품, 제지, 인쇄, 1차 금속업종의 기업체들은 대부분 중소규모이고, 원래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섬유, 조립금속 업종에서만 5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이 있었다. 이는 동맹파업 사업장이 섬유, 전자업종이고, 그 규모가 대규모 사업장인 것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표 2> 5개 사업장의 자본규모와 특징

 

설립연도

위치

자본규모

노동자 수

주요생산품

비고

대우어패럴

1968년 설립

1983년 원림산업 인수

본사,1,2,3공장(1공단)

25억 8,200만원

2,500명

메리야스 등

의류생산

83년 25억,

84년 36억 흑자

효성물산

1957년

가리봉동

(2공단)

2억 7,800만원

540명

신사복, 바바리

효성그룹(19개사) 계열사

부흥사

1964년

1,2,3공장

-구로공단

19억 2,700만원

1,500명

고급숙녀복,

신사복

 

선일섬유

1978년

양평동

3억 8,200만원

300명

메리야스, 내의

78~83년 흑자

가리봉전자

1983년 독산공장 설립,

1984년 구로공장 설립

본사 독산동, 구로공장,

가리봉공장

(2공단)

26억 8,200만원

800명

발광다이오드,

저항기 등의

전자부품생산

롬코리아와 같은

계열사. 기술, 원자재, 시장을 일본에 의존

출처: 매일경제신문, 1985, ꡔ사업체 총람ꡕ; 한국공단연구사, 1984, ꡔ한국공단연감ꡕ 참조 작성.


이런 구로공단의 특성을 반영하여 위의 <표 2>에 정리된 것처럼 동맹파업 참여 5개 사업장중 4개 사업장은 대규모 사업장으로, 그중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등은 재벌그룹의 계열회사였다. 5개 사업장은 대규모사업장이라는 특성과 공단 내 위치한다는 점에 의해 이들 사업장 내의 움직임은 공단 내 주변사업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노동자 상태

구로동맹파업에 참가한 사업장의 노동조건은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작업환경이나 기숙사 또한 열악한 상태였다. 그중 노동자들의 불만은 관리자들이 자신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비인격적 대우에 가장 집중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관리자들의 욕설, 폭행, 희롱, 멸시가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보통 “야, 너” 등으로 부르며, “배우지 못한 지지리 못난 것들”, “구더기보다도 못한 것들”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심지어 관리자들은 미싱하는 노동자의 등을 쓰다듬거나 미싱기사들이 미싱을 고치면서 치마 밑을 넘겨본다든지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의 반영으로 노동자들의 직장에 대한 선택의 우선기준은 ‘인간적 대우’로 나타났으며, 노동자들이 원하는 ‘인격적 대우’란 노동자들을 ‘같이 일하고 이야기해야 할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비인격적 대우의 문제와 연관되어 ‘관리자 및 사무직과의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도 높았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기숙사 시설과 운영방식에서도 나타났다. 기숙사에 입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노동자의 약 29.9% 정도였다. 열악한 시설,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사감의 사생활 침해 등은 기숙사의 주요 문제였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비인격적 대우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노동하는 노동자들은 불만이 쌓여도 집단적 행동으로 표출하기보다는 불만을 삭히든지 또는 이직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 및 권리행사 방법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사를 옮겨도 실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기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현실의 불만을 안으로 삭히고 오히려 겉으로는 회사측에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돈이라도 많이 모아 이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는 체념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됐다. 이는 여성노동자의 경우 대부분 장래 희망을 ‘결혼’에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여성노동자들은 결혼을 통해 현장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이상과 같이 구로지역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는 각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요구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활동에 참여하는 조건이 됐다. 또 사업장의 범위를 넘어 지역 내 노동자간의 연대활동에서 노동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2) 1984년 ‘민주노조’의 결성

(1) 구로공단 노동운동의 동향

1980년대 전반기 구로공단에는 다수의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이 진입했다. 구로지역은 서울이 갖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치와 특히 공단지역이라는 특성 때문에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의 중심적 활동공간이 되었다.

학생출신 노동자들은 자취방 야학, 교회 내 야학, 지역 정치소모임, 영등포 산업선교회 내 소그룹 등을 통해 활동하면서 노동현장에 진입했다. 이들 소그룹운동, 특히 야학운동은 1983년 말 ‘야학사건’으로 많은 운동가들이 구속․수배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지역 (정치)소모임은 1980년 구로지역에 진입한 이래 1983년 말경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롬코리아, 효성물산 등 6~7개 사업장으로 활동을 넓혀나갔다. 이들은 개별공장의 활동만으로는 대중역량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기에 대중을 광범위하게 조직할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법개선투쟁 등을 활동과제로 정했다.

이들의 활동방식은 지역 차원에서 각 사업장들이 동시다발적인 투쟁을 벌여나가도록 주요사업장을 포위해 갔다. 또한 노동운동가를 훈련하고 양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지역 소모임으로 각 노조의 열성조합원과 간부들을 모아 조직했다. 지역활동은 나아가 「공단소식」을 사업장, 공단주변과 거주지역에 배포했다. 지역 정치소모임은 1985년 임금인상투쟁 이후 6월 1일 가두시위를 통해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연합’을 조직했다.

이러한 지역노동운동의 흐름을 기반으로 1984년 노조결성의 움직임이 본격화 됐다. 구로지역에는 1984년 6~7월에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에 노조가 결성되어, 1985년 6월 현재 노조가 33개가 됐다. 그러나 정부는 학생운동출신이 가담하여 1984년 9월 협진양행, 유니전 등의 노조를 결성하자 노조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이 시기 구로지역 노동운동은 비공개 소그룹과 관계한 민주노조운동과 해고노동자들의 근거지인 노동운동단체를 통한 가두활동의 두 축으로 전개됐다. 동일제강, 성원제강 등의 해고자들은 탄압에 대응하여 경인지역 해고자들과 민한당사 점거농성(1985.1.14.)을 강행한 데 이어 ‘노동운동 탄압저지투쟁위원회’(1985.4.8.)를 결성했다. 노탄투는 지역단위 투쟁조직으로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지역적 연대와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을 모색했으며, 노동절에 영등포 가두투쟁을 통해 그 활동이 가시화 됐다. 또, 1985년 6월 1일 노조결성에 실패한 한국음향, 한국마벨, 서광 등의 해고자들은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연합’을 결성했다. 구민연은 지역 정치소모임의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가두에서의 정치투쟁을 시도했다.


(2) 1984년 민주노조 결성

1984년 구로지역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한 사업장은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이며, 부흥사는 노조민주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들 노조의 결성과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4개 노조의 결성은 6~7월에 집중됐고 대체로 현장 내의 소모임이나 친목모임을 중심으로 섬유노련과 금속노련의 지원 속에서 결성되었다. 둘째, 노조가 결성된 이후에 자본가의 탄압에 맞서 끝까지 노조를 지킨 것은 소수의 열성조합원들이었다. 노조가 기업주의 탄압을 견디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여 교섭주체로 인정되면서 조합원의 가입이 증가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노자간의 역학관계에 따라 반응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셋째, 사업장마다 기업주의 탄압방식, 강도 등이 다르게 나타났다. 유화국면에 의해 정부의 간섭이 완화되면서, 개별기업주의 특성이 상대적으로 주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3) 민주노조의 1985년 임금인상투쟁과 지역연대활동

(1) 노동조합의 일상활동

구로지역 노동조합들은 기업주의 노동조합 탄압으로 단체협약 체결이 지연되면서 본격적인 노조활동의 전개가 다소 늦어졌다. 노조활동은 집행부와 조합원의 관계를 강화하고, 이 과정에서 조합원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반영되고 실천되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조직부 중심의 다양한 써클활동, 교육활동, 홍보․선전활동 등이 활발히 전개됐다.

특히 교육활동 중 ‘숙박교육’ 방식은 조합원간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노조간의 ‘공동숙박교육’은 노동자간의 친밀감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섬유노련하의 대우어패럴, 선일섬유, 효성물산 조합원들은 9월 22일~10월 7일, 연 3주간(1박2일)의 숙박교육을 했다. 노조와 노동운동에 관한 교육 이외 노조의 어려운 상황을 공동토론을 하면서 상호교류를 했다. 공동숙박교육은 조합원들의 관계를 돈독히 해주고 자연스럽게 노동자로서의 연대감을 형성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노조의 일상투쟁을 통한 노동조건 개선과정은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갖게 했다. 대우어패럴은 1984년 추가상여금확보, 월차(생리휴가), 의료보험 등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가리봉은 중식제공, 일요일 강제특근 철폐, 수습사원의 월차휴가 실시, 관리자들의 태도개선 등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부흥사도 잔업을 거부하고 ‘시말서폐지’ 투쟁을 했다. 이러한 일상적 노동조건 개선투쟁은 비록 작은 성과라도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교육활동을 통해 인식된 노조의 의미를 실천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노조의 일상활동은 활동기간이 짧고, 각 노조가 처한 상태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노조의 활동은 노동자들의 일상적 요구와 맞물려 부분적인 노동조건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조합원들은 교육․조직활동․단체행동을 경험하면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조에 대한 인식을 점차 변화시켜갔다. 일상활동의 성과를 통해 노조는 1985년 임금인상투쟁을 대중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2) 1985년 임금인상투쟁

1985년 들어 노동조합은 임금인상투쟁(이하 ‘임투’로 줄임)을 위한 준비를 했다. 임투준비에서 중요한 변화는 지역 내 노조들이 공동임투를 논의하여 동시교섭․동시투쟁을 계획한 점이다. 효성물산, 남성전자, 롬코리아, 가리봉전자, 삼경복장 등의 노조는 의견을 모아 5월 7일 동시교섭에 들어가기로 했다. 공동요구안은 결정하지 못했으나, 동시행동을 모색했다. 강력한 조직적 연대는 아니었지만 노조들이 같은 날 동시교섭에 들어간다는 것은 공단 내에서 최초의 시도였다. 이는 1984년 이후 노조운동 역량이 성숙되어 개별 노조 중심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극복하려 한 시도라는 의미도 있었다. 노동조합들은 1985년 임투의 목적을 노조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과 더불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의 질을 개선하는 데 두었다.

1985년 임투는 2월 준비 이후 대체로 5월 초․중순에 마무리되었고,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몇 가지 중요한 성과를 갖게 됐다.

첫째, 고율의 임금인상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게 됐고,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5.2%)을 무력화시켰다. 대우어패럴은 27%과 보너스 2만원 인상, 효성물산은 904원 인상, 가리봉전자는 17.5% 인상과 휴가비 1만원 인상, 선일섬유는 13% 임금인상을 확보했다. 이들 노조들의 임금인상은 주변사업장에도 영향을 크게 미쳤는데, 부흥사의 경우, 앞선 노조들의 투쟁에 놀란 기업주가 먼저 양보하여 높은 임금인상을 확보했다.

둘째,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단결의 힘을 실감했고 노조에 대한 인식 및 신뢰가 높아져 노조의 역량이 강화됐다. 조합원들은 노조에 대한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노조활동을 구체적인 자기 이익과 결부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조합원의 증가로 나타났고, 또 조합원간의 인간적인 신뢰와 유대(동지애)가 강화되었다. 임투 이후 효성물산은 조합원이 400여명으로 늘고, 가리봉전자도 600여명, 부흥사도 400명에서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셋째, 개별사업장 내의 임금인상과정에 정부의 임금동결정책과 노동관계부처의 개입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투쟁을 통해 기업주를 비호하는 정부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다. 노동자들은 정부와 기업주의 탄압을 경험하면서 연대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경험을 했다. 이는 노조간의 연대활동을 더욱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디딤돌이 됐다.


(3) 민주노조의 지역연대활동

1984년에 결성된 5개 민주노조활동의 특징은 노조간의 연대활동을 일상적으로 모색했다는 점에 있다. 연대활동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조합 내부의 활동에 제한되었던 조합주의적 활동방식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연대활동의 기본조건은 ‘같은 공단에 있다는 공간적 특성’에서 일차로 주어졌고, 이를 추동한 힘은 노조간부와 노동운동가들의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지역연대활동의 모색은 단일하지는 않았다. 노조를 중심으로 사고하면서 이 틀을 활용하려는 경향과 노조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인식하면서 새로운 ‘지역노동운동의 틀’을 사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양자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계승하고 한계를 반성하는 속에서 모색된 새로운 실천이었다.

기업별 노조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었던 것은 노조설립 자체가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대상이 됐던 객관적인 상황에도 원인이 있다. 이런 상황은 노조의 연대방식을 정치적 탄압에 쉽게 대응할 수 있는 지역적 연대틀을 모색하도록 했다. 당시 민주노조의 지역적 연대활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은 대우어패럴 노조였고, 이에 지역 정치소모임의 운동가들이 결합되어 지역 노조간의 연대활동을 모색했다.

지역 정치소모임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의 확보를 활동방향으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공단 자체를 조직적 실천단위로 한 실천을 모색’ 했다. 이들은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의 민주노조와 노조 내에 민주파가 형성되어 있는 남성전기, 롬코리아, 부흥사 등을 중심으로 작업으로 활동했다.

지역 정치소모임 활동가들은 <표 3>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역의 여러 운동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 지역 정치소모임의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 이외에도 부흥사에 공계진, 장미희, 효성물산에도 3~6인, 가리봉에도 수명의 학생운동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노조간의 연대활동을 추진하는 기초가 됐다.


<표 3> 학생출신 노동자들의 현황

사업장

이 름

출신학교

입사-퇴사

지역관계

활동

대우어패럴

심상정

서울대 사대 3년 제적

1983.12~1985.4

지역 정치소모임

동맹파업 이후 수배

유인해

서울여대 가정과 졸업

1984.2~1985.4

관련

동맹파업 이후 수배

민경옥

서울교대 2년 중퇴

1984.2~1985.4

관련

 

최한배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81.4~1985.7

조직원

1985.7.23

시위주동으로 구속

박경희

서울대 3년 제적

1984.5~1985.7

조직원

구속

가리봉전자

서혜경

서울대 사대

?

조직원

부위원장/구속

롬코리아

장영인

서울대 가정대

 

조직원

 

부흥사

이선주

서울여대 가정대 졸업

1983.6~

관련

대의원/구속

공계진

고려대 화학과 4년 중퇴

1984.9~

야학

구속

장미희

고려대 화학과

1984.8~

야학

구속

전규자

한신대 야간

1982.11~

야학

구속

출전: 각인의 항소이유서, 구속자 명단, 심상정 면담 등을 참조 작성.


각 사업장에는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과 선진노동자들이 같이 있었다.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에 비교하여 선진노동자들은 현장에서 활동한 기간이 길고, 대중적 지도력도 있어 노조간부로서 노조활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표 4>처럼 노조결성 전부터 지역의 소모임과 지원단체에 결합되어 있었다. 학생출신 노동자와 선진노동자들은 사업장 내 열성조합원들을 자신의 지역모임으로 결합시켜 이들의 의식변화를 위한 노력을 했다.

<표 4> 노동자출신 운동가들의 지역소모임 및 지원단체와의 관계

관계

지역 정치소모임

도시산업

선교회

가톨릭

노동청년회

제일교회 야학

봉천야학

양평동야학

이름

김준용

(대우어패럴, 위원장)

추재숙, 안경환

(대우어패럴)

정필순

(효성물산, 대의원)

김영미

(효성물산, 위원장)

윤혜련

(가리봉전자, 사무장)

김선옥

(선일섬유,

위원장)

출전: 당시 효성물산 위원장 김영미 면담, 구속자들의 항소이유서를 참조 작성.


당시 지역 소모임활동에 참여한 선진노동자들은 직접적인 노동운동의 경험과 노동운동 내의 여러 논쟁과 흐름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해 당시 운동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각 사업장의 활동방식과 지역노동운동의 방향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해 노조간부들은 노조활동이 단위 기업에서의 노조민주화나 민주노조설립만으로는 노동운동의 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개별 노조를 강화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기업별 노조의 틀을 벗어나는 연대활동 또는 연대조직의 결성에 대한 필요성이 인지되어 있었다.

지역 소모임 활동가들은 운동가들의 결합 및 훈련뿐만 아니라 새로이 노동자들을 노동운동가로 훈련시키기 위한 비공개모임들을 조직했다. 야학 등의 지역 소모임은 관련 사업장의 노조간부 및 열성조합원을 모아서 사업장 중심으로 학습모임을 만들었다. 지역 정치소모임의 경우 노동자들의 소모임을 공장단위에서 벗어난 공단 내의 단일한 교육-훈련체계를 구상했다. 이들은 소모임 내 강사․학생(노동자)관리 프로그램을 지역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모색한 점과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같이 만날 수 있도록 조직한 점이 특징이다.

지역소모임을 통한 조직과 의식화는 새로운 노동운동가를 양성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조합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노조간의 지역연대활동에 중요한 기초가 됐다.

지역 노동운동가들과 노조간부들에 의해 추진된 조합원들의 연대활동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간의 교류는 신생노조로서 노조운영을 위한 정보교환과 자문의 필요에서 출발하여 노조운동방향에 대한 공유로 발전됐다. 부서간 교류는 각 노조에 대한 탄압실태의 사례발표를 통해 참여한 각 조합원들이 노동자로서의 동질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공동대처방법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또한 지역연대활동은 각 노조의 각종 기념행사와 문화행사에 같이 참여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1985년 5월 20일 한국노총이 주최한 ‘근로여성대회’에 전국에서 2천 5백명이 참여했는데 구로지역 노조들도 같이 참여했다. 문화행사를 통한 노동자들의 공감대는 감성적 연대의식을 갖게 했다. 또 연 1~2회 조합원 숙박교육, 월 1~2회 간부 숙박교육에도 같이 참가했다. 조합원들은 다른 사업장의 투쟁에 지원․연대하는 모습으로 발전했다. 4월 15~16일 한국음향조의 노조신고서 반려조치에 항의하여 금속노련 간부들이 농성할 때, 가리봉전자 조합원 20여명이 지원농성을 했고, 대우자동차파업 때도 노조원들이 직접 지원했다. 또 5월 11일 동일제강노조의 설립신고서가 반려된 것에 항의한 한국노총 간부들의 구청농성에 효성, 대우, 가리봉 조합원들이 지원 항의 농성을 했다.

일상적이고 다양한 연대활동의 과정에서 민주노조들은 1985년 임금인상투쟁의 공동준비를 시도하기도 했다. 1985년 임투 이후 노조들은 현장내의 역량 강화와 조합원들의 의식 변화를 통해 보다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추진했다. 1985년 6월 1일 가리봉5거리에서 있었던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연합의 횃불시위에 다수 참가하면서 점차 교류․연대의 폭을 넓혀나갔다. 연대활동은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구로지역노조협의회’를 추진하면서 지역조직으로의 발전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노조간 연대활동이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정부의 대우어패럴노조 탄압이 발생하게 됐다.



4. 구로동맹파업의 전개와 사회운동세력의 지지연대투쟁

1) 정부의 민주노조운동 탄압과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

정부의 노동정책은 유화국면기에도 학생출신 노동자들이 관련된 노조결성에 대해서는 설립신고필증을 내주지 않고 이들을 해고시켜 대중과 분리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폭력적 탄압은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을 기점으로 다시 본격화됐다. 탄압정책은 구로지역 등에서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이거나 노조결성에 적극적인 노동자는 이유불문하고 해고시켰고, 그리고 이에 불복하면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는 구속시켜 노동운동의 잠재적 요인까지도 모조리 제거해 버리겠다는 정책을 썼다. 수도권 지역이 1980년 이후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 진입을 통해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추구해 나가는 실질적 토대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폭력적 탄압과 병행하여 학생운동출신 노동자에 대해 ‘위장취업자’, ‘불순세력의 침투’, ‘삼민투와 연계된 조직적 활동’ 등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을 통하여 노동자와 국민에게서 이들을 분리시키고, 일면으로는 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학생운동출신 노동운동가와 1970년대 선진노동자들이 주도하고 있던 민주노조운동도 탄압을 시작했다. 구로지역의 민주노조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이라는 합법적 방식을 통해 나타났다. 특히 이들 민주노조 내의 대우어패럴은 1984년 노조결성 이후 6차례에 걸친 농성투쟁을 해왔고, 11월에는 신한당점거농성을 하여 정치문제화되기도 했다. 대우어패럴노조의 활동은 구로공단의 동일제강, 성도섬유 등 많은 사업장에 영향을 주었다. 더욱 조합간부 및 열성조합원들이 대개 ‘학생운동출신’과 연계되었거나 ‘청계피복’, ‘도시산업선교회’ 출신 등으로 당시의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추구하는 세력과 연계되었기에 정부에게는 위협적 요소였다.

구로지역의 민주노조들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방식은 오히려 그 반발이 클 것이기에, 정부는 민주노조들을 개별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방식을 택했다. 정부는 노조탄압의 파급을 최소화하기 위해 탄압의 시기도 고려했다. 노조간부들이 구속된 6월 22일은 국회가 6월 20일부터 휴회상태였으며, 학생운동도 5월 미문화원점거농성투쟁 이후 탄압을 받고 있었고 기말고사 기간에 접어들던 시기였다. 정부는 이 시기가 노조탄압에 대한 사회여론을 일정 차단시킬 수 있는 시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2) 지역연대투쟁 조직의 구성과 동맹파업의 준비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등 노조지도부 3인이 구속된 사실은 대우어패럴에 1985년 6월 22일 오전에 알려졌다. 노조는 6월 2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24일 출근 후 파업을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노조 사무직원인 박경희는 심상정 등과 논의하여 효성물산 위원장을 만나 간부구속사건을 알리고 연대투쟁을 제기했다.

6월 22일, 안양 기독교원로원에서 진행될 한국노총 지원의 ‘조합간부 합동교육’에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노조들과 해고자 및 노동운동가를 비롯한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 효성물산 노조위원장을 통해 김준용 위원장 및 노조간부 구속사건이 전달됐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하여 연대투쟁으로 대응하자는 결의를 했다.

이어 23일 대우어패럴, 청계피복,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세진전자 해고자 1인, 심상정 등이 청계피복 노조사무실에 모였다. 이들은 대우어패럴노조가 파업을 하기로 한 6월 24일 오후 2시를 기해 사회적 파급력인 큰 동맹파업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연대투쟁위원회’를 구성(연대투쟁위원장에 효성물산 위원장 김영미)했다. 이어 노조위원장들은 각 사업장에서 조합원들과의 토론을 거치기로 했다.

각 노동조합들은 비상간부확대회의 등을 통해 조합간부들의 결의를 모은 이후, 24일 임시총회를 통해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기로 최종 결정했다. 시간상 그 조직과 준비가 체계적이지는 못했으나 투쟁의 결정과정은 조합 내의 여론을 중시하는 노력이 있었다.

이처럼 신속하게 동맹파업이 결정되고 조직된 것은 구로지역 노조간부들과 지역노동운동가들이 노조간부 구속사건을 ‘1970년대 민주노조파괴책동의 재판’이며 ‘민주노조에 대한 각개격파를 통한 조직적 탄압의 시발점’이라고 탄압성격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로서 ‘공동대처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결의됐다.

그러므로 1980년 초와 같이 개별 노조의 조직보존에 매몰되지 말고 노조간의 연대를 통해 탄압에 대항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투쟁의 목적은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연대하며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여 정부탄압의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노조운동의 ‘조합주의’와 고립분산성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데 두었다. 그렇기에 “간격을 두고 차례로 당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싸우자”는 투쟁방침을 결의했다.


3) 동맹파업과 사회운동세력의 지지연대투쟁

동맹파업의 실제적 전개는 <표 5>에서처럼 각 노조들이 투쟁에 참여하는 방식과 참여 조합원 수 그리고 참여기간 등에 차이를 보인다. 각 사업장의 동맹파업 참여자 수의 차이는 각 노조의 대중적 기반을 반영하는 것이다. 파업 초기에는 각 노조에서 대부분(50% 이상 100%까지) 조합원이 참여하여 투쟁의 필요에 대한 대중적 공감의 폭이 넓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투쟁이 지속되면서 투쟁을 위한 구체적 준비가 미흡하여 조합원들은 지치고, 여기에 회사측의 탄압에 의해 끌려나가거나 어쩔 수 없이 농성장을 떠나면서 투쟁대오는 초기 참여인원의 약 20%로 줄었다. 동맹파업의 참여기간도 차이를 보이는데 대우어패럴 6일, 부흥사 1일, 효성물산 사업장농성 3일, 신민당사 농성은 6일,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4일로 나타났다.


사회운동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연대투쟁은 민주통일민중운동단체연합(이하 민통련)을 중심으로 한 종교단체 및 지식인단체의 활동이었다. 이들의 투쟁방식은 각 단체 회원들이 참여한 지지농성과 공동성명서 및 선전물 배포 등으로 나타났다. 26일부터 민통련 등 18개 단체가 50여명의 농성을 시작했고, 27일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위축된 데 반하여, 민중민주운동단체의 지지농성이 확대되어 가면서 사회여론 또한 확산됐다. 동맹파업의 양상은 노조간부 구속에 항의하는 노동자의 투쟁에서, 민중민주운동세력이 민중운동탄압중지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확산되어갔다.

6월 24일 4개 사업장으로 시작된 동맹파업은 근 6일 동안 굶주리면서 싸운 대우어패럴 노동자 80여명이 강제해산됨으로써 일단 막을 내렸다. 이날까지 5개 사업체 6개 공장에서 약 1,4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였고, 5개 사업장에서 지지연대투쟁을 벌여, 총 2,500여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노동운동단체 주도 하의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구로지역은 선전물이 대량 배포되어 공단 내 노동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의 노동운동단체와 민통련을 위시한 청년, 농민, 여성의 제반 운동세력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지지농성 및 성명서를 발표하여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제한적이나마 민중연대가 시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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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맹파업 이후 ‘구로노동자 연대투쟁연합’ 결성

정부는 5월 이후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의 탄압을 강화했고, 6월 동맹파업을 통해 ‘공식적’으로 노동운동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공격하면서 이데올로기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을 가했다. 더욱 자본가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을 방조했다.

동맹파업 강제해산 이후 관련 5개 사업장의 기업주들은 노조가 정상화되지 못한 상태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에게 보복조치를 했다. 기업주의 보복조치는 기업별로 부분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해고, 강제사표, 구타, 감금, 휴업의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각 노조의 조합원들은 동맹파업 이후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각 사업장 모임에서는 복직투쟁 및 소식지 발간 등 노조복구를 위한 노력과 내부의 역량강화를 위한 학습을 했다. 그러나 동맹파업 이후 사업장중심의 모임과 활동은 현장노동자들과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지역차원으로 모아져 ‘구로노동자 연대투쟁연합’을 발족했다.

동맹파업의 결과 구속자가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하여 총 1,5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했다. 동맹파업 이후 일부 간부 및 열성조합원들이 참여 외에는 일반노동자들의 참여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동맹파업이 투쟁 이후의 조직화대안을 갖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5. 구로동맹파업의 성격과 노동운동사적 위치

1) 노동조합차원의 지역연대투쟁(동맹파업)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부의 민주노조탄압을 저지하고 그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과 계급성을 지킨 비타협적 투쟁이었다. 그리고 사업장간 연대투쟁은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주변 노조들의 지지농성, 점심식사 거부투쟁 및 노동운동단체의 가두시위, 지지농성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개별적 이해를 넘어 노동자 일반으로 이해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한 투쟁이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1980년 초 정부의 탄압에 개별노조로 대응하면서 와해됐던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보존논리와 조합주의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었다.

동맹파업의 형식은 당시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 사회적인 영향력이 매우 컸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생산활동을 정지하고 각 현장을 점거하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동맹파업은 사회 제계층의 지지투쟁으로 확산되고, 이에 놀란 정부가 일시적으로 노동법개정을 고려해 보겠다는 태도를 보일 정도였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연대의식을 고취시키고, 단결의 힘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노동자들은 해방춤, 탈춤, 즉흥 촌극, 장기자랑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의 운용과 상호지원을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았다. 또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찰 및 노동부 등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을 보다 분명히 하게 했다. 농성장에는 조합원토론이 항상적으로 열려 노동자들의 탄압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인식해 갔다. 당시 토론의 내용은 ‘투쟁의 의의와 민주노동운동’, ‘관리자의 태도’, ‘노동운동사강의’, ‘10․26사태를 풍자한 연극과 토론’, ‘왜 동맹파업을 하는가’, ‘신민당의 태도’ 등이었다. 또한 파업과정에서의 토론은 매 사안에 대해 노동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민주적인 훈련과정이기도 했다. 이렇게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규율을 만들어 감과 동시에 ‘투쟁대상’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동맹파업은 노동조합이 기업별노조의 제약을 뛰어넘어 연대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노조가 대중조직, 지역별 투쟁조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었다.


2) 동맹파업의 요구사항

구로동맹파업은 민주노조세력이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정부의 노조탄압에 정면으로 대응한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었다. 즉 투쟁의 대상을 개별 기업주를 넘어 정부에 두고 정부의 노조탄압정책을 폭로해 들어갔다.

이러한 투쟁의 성격을 집약해서 나타낸 것은 투쟁에서 제기된 요구사항들이다. 구로동맹파업의 요구사항은 정부의 탄압에 의한 ‘노조 존립위기’의 상황에서 탄압의 수단이 된 제반 악법의 개정․폐지요구와 결합되어 제기됐다. 즉 각 사업장에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요구’가 정부의 탄압에 대항하는 ‘정치적 요구’와 결합된 것이다.

동맹파업에서 제기된 ‘정치적 요구’는 ‘노동운동 탄압말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언기법 폐지하라, 노동부장관 물러나라, 최저생계비 보장하라’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제도개선을 요구한 정치투쟁이라도 당시까지 노동자의 의식상태, 노동운동역량의 발전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상당한 발전적 의미를 갖는다. 당시 노동자들은 낮은 권리의식의 상태에 있었고, 동맹파업 이전의 노조활동은 현장 내의 노동조건 개선투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동법개정투쟁 등의 제도개선적 정치투쟁은 개별 노조차원에서 간헐적으로 제기되었고, 주로 노동운동단체를 중심으로 가두에서 제기됐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을 대상으로 제도개선을 요구한 ‘정치투쟁’이 ‘대중의 동맹파업’을 통해 제기된 것은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투쟁과정 중 일부 노동자들이 전투경찰과 사복경찰의 폭력을 직접 당하면서 ‘폭력경찰 물러가라’, ‘살인정권 물러가라’는 요구로 표출되기도 했고, 동맹파업 해산 이후 노동자들이 7월 23일 가두시위 과정에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발전되어 나타나 의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

구로지역의 노동자투쟁은 경제적 요구와 제도개선의 정치적 요구가 결합된 성격을 보여주었고, 이는 ‘동맹파업’이라는 투쟁방식과 결합되면서 그 정치적 의미가 확대됐다.

3) 구로동맹파업에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의 전환

구로동맹파업이 전체 노동운동과 구로지역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맹파업은 투쟁을 통해 다수의 선진노동자들을 배출했으며 구로지역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동맹파업을 경험한 노동자들이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에 참여했으며, 1985년 8월에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결성에 중심이 됐다.

또 한 축으로 동맹파업에서 노조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효성물산 위원장, 가리봉전자 2인, 선일섬유 1인 및 지역노동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1986년 5월 ‘노동조합결성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구로지역 및 전국적으로 노조교육과 지원활동을 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구로동맹파업을 경험한 선진적 노동자들은 구로지역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일 역할을 했다. 당시 서노협 사무처장은 청계피복노조의 사무국장이었던 김영대였으며, 쟁의국 간사로는 전 효성물산위원장 김영미 등이 맡았다. 1987~88년 투쟁과정에서 동맹파업을 통해 배출된 다수의 선진적 노동자들이 투쟁을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하려 시도했다. 또 이들은 지역운동단체를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해고자들이 1987년 7월 19일 ‘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복직투쟁․구속노동자 석방투쟁과 노조투쟁을 지원했는데, 위원장은 김준용(전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이었다.

이처럼 구로동맹파업 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은 동맹파업 이후에도 지역활동과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 활동 등을 통해 1987년 대투쟁 이후 ‘지역노조협의회’ 건설과 이후 활동에 결합하여 민주노조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둘째, 동맹파업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발전을 위한 실천적 계기점이 됐다. 동맹파업은 투쟁 직후 평가논쟁을 통해 당시 노동운동의 방향모색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동맹파업에 대한 평가는 주로 동맹파업의 성격과 동맹파업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 파악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건설’을 중시하는 입장과 대중정치노선으로 그 입장이 서로 크게 구별되었다.

이런 평가 논의는 당장의 실천과제로서 어떠한 조직을 건설해야 하는가와 맞물려 진행됐다. 즉 노조를 넘어서는 조직의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이는 그간의 고립분산적인 소모임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지역적 운동틀’을 모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제반 논쟁은 현실에서 서노련의 결성과 운동주도로 나타나 외적으로는 논쟁이 일단락됐다. 서노련은 동맹파업이 보여준 대중투쟁의 위력과 노조의 대중조직으로서의 가능성을 일면 부정하고, 동맹파업의 정치적 성격, 지역 정치소모임 활동가들의 역할 등을 강조했다.

서노련의 해체 이후 노동운동 내부에서 동맹파업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있었다. 이는 서노련의 정치투쟁중심의 활동을 비판하는 기조와 맞물려 동맹파업의 대중적 연대투쟁의 성격에 주목하며, 그를 현실 운동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이에 대해 민주노조 건설론-자주적 노조의 지역연맹 건설주장-대중적 정치조직 및 공장정치소조론 등이 제기되었고 그에 준한 활동이 모색되었다.

수도권 중심의 노동운동의 다양한 논쟁과 실천의 모색과정 중에 발생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조합을 대중조직으로 일반화시켰고, 경제투쟁의 의미가 인정되면서 현장 내 조직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 됐다.

동맹파업의 성과를 실천적으로 계승하려던 1980년 중반기 노동운동진영은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에의 결합과 아울러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의 과제를 직접적으로 실천하려 했다. 이러한 모색은 노조결성과 운영에의 참여, 반공개 운동단체 활동 그리고 물밑으로 비합법적인 정치조직건설과 변혁운동이념의 구체화를 위한 활동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나타났다.



6. 결론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적 동맹파업이었다. 대중적 동맹파업이 가능했던 것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극복하려 한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새로운 활동의 성과였다. 당시 학생운동출신 운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노동조합을 통해 대중의 요구와 결합되면서 투쟁의 주체역량이 형성됐다.

구로동맹파업의 의의와 한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맹파업이 노동조합에 기반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당시 노동운동에 노동조합의 대중조직으로의 발전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동맹파업이 경제적 요구를 바탕으로 정치적 요구를 제시한 점에서 대중적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셋째, 동맹파업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향성이 선진노동자들의 대중적 지도력과 결합하고 그를 통해 대중과 결합할 때, 대중적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넷째, 동맹파업은 노동운동이 부문운동으로서가 아닌 변혁운동의 중심임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동맹파업은 연대투쟁조직의 지도력부재, 투쟁 이후 엄청난 피해가 양산되고 그 사후조직이 미흡한 점 등의 한계를 보였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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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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