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0월
남 구 현
연구위원
1979년 10월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아니
새삼스럽게 무슨 그해 10월에 대해 글을 써’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5월에 대해서는 수 없이
이야기하였지만 10월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가 없는데, 나도
이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10월은 잊혀졌다.
역사적으로 10월이 의미하는 것이 망각되면서 박정희 신드롬이니
어쩌니 하는 현상까지 벌어진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그해 10월’을 되돌아보자.
1979년 10월 26일 20년에 가까운 긴 기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독재자 박정희가 저격당해 사망함으로써 4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4공화국은 소위 유신독재시기로 불리워지던
시기였다. 그나마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민주주의의 기본틀마저
유신이라는 이름 아래 왜곡되게 된 것은 1972년의 일로, 대통령
직접 선거가 폐지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에 이를 가당찮게도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일컬었다. 우리는 박정희의 치적으로 일컬어지는
경제 발전이 오직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을 대가로 민주주의를
억압함으로써만이 가능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1971년 1,656건에 이르는 노사분규(전년
대비 10배 증가), 철거민으로 이루어진 3만명의 성남지역 주민의
폭동 등은 이러한 모순의 결과이다. 또한 1971년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은 43.6%의 득표율을 보였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은 이전의 44석의 두 배를 넘는 89석을 획득하여
헌법 개정을 막을 수 있는 69석을 넘겼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1972년 10월의 유신은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마치 4․19 학생혁명
이후 점차 학생, 노동자들의 민주화와 통일 요구가 거세어져
민주당 정부의 관리 능력을 넘어서자 일종의 반혁명으로서 이를
무력으로 억누르고 권력을 장악하였듯이, 박정희는 1963년 민정
이양 이후 껍데기로나마 명목을 유지해 오던 민주주의조차
벗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딱딱한 껍데기 역시 70년대 말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함께 증대하는 모순에 의해 파열된다. 동일방직, YH
여공들의 투쟁과, 야당 당수인 김영삼의 제명으로 이어지는
정치위기는 급기야 1979년 10월 15일 부마민중항쟁으로
이어졌고, 10월 26일 이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강경, 온건
입장으로 갈려 논쟁하던 중 탱크로 밀어 압살하자는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중앙정보부장이 살해함으로써 일단 유신체제는
종식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집시법, 반공법
등 반민주악법을 제정해 반대자들을 극형에 처하고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던 독재자가 체제를 위협하던 정치적
반대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바로 측근에서 정보 정치를
지휘하던 중앙 정보부장에게 피살된 것은 일종의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민주화’는 시대의 언어가 되었으며, 군부와
관료들도 유신 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 헌법 아래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던 신군부는 같은 해
12월 12일에 군부 내 온건파를 군사작전으로 제압한 후, 다음해
5월 17에는 항쟁에 나선 민중을 학살하며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다. 민주화 요구에 대해 ‘질서’와 ‘안전’ 그리고
‘사회 정화’로 화답한 것이다. 3김으로 대변되는
보수정치세력들은 이 와중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 그에 따라
치루어질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될 것을 꿈꾸면서 민주화 절차를
둘러싸고 서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샅바 싸움을 하다가
무력하게 정치 무대에서 물러났다.
20여 년 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몇 가지 다시금 생각해 볼
점들이 있다. 매 시기 모순을 해결하고 역사가 앞으로 진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설 때에야 비로소 과거의
껍데기는 벗겨져 나간다는 것, 매 시기 일정 정도의 진보가
있으면 이에 대한 반동이 꼭 따르며 이러한 점에서 역사의
진전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고 진퇴를 거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실제로 역사를 진전시키는
동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항시 투쟁의 결과물이나
따먹으려는 세력과 지배계급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 투쟁의
한계는 어김없이 다음 시기에 역사의 진전을 막는 족쇄로 다시금
작용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유신체제의 붕괴가 민중항쟁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박 정권은 직접적으로는 측근에 의한 암살의 형태로
몰락함으로써 권력의 정점을 이루는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모든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남아있게 되었고, 민주화의 과제는 다음
해로 넘어가 ‘서울의 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동적인 힘을 거꾸러뜨리지 못함으로써 역사는 다시 거꾸로
흘러갔다(물론 이때 광주 민중의 피 값으로 전두환 정권은 다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투쟁의 주체가 전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 실패함으로서 당시의 등장
인물들이 아직도 정치무대에서 활약중인 것을 볼 수 있다.
부마와 광주에서의 항쟁의 주체는 각 지역의 민중들이었다고
하더라도 각 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서 서지는 못하였다는 점과
이러한 측면이 각각의 정치세력에 의해 왜곡되어―예컨대
지역주의의 형태로 증폭되어―정치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쟁의 주체로 섰던 부산, 마산과 광주의 민중의
관점에서 10월과 5월을 연결지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유신이라는
압제를 종식하는 역할을 했던 10월과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새로이 등장하려던 전두환 군부독재체제를 막으려던 시도로서의
5월을 하나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01.10.5)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