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 전평의 계급정치
안 태 정 /역사학 연구소
이 글은 지난 9월 22일(토) 연구소 제61차 월례 콜로키움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머리말
한국의 근․현대사는 사회구성체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다. 근․현대사는 한편으로는 생산수단과 권력을
독점한 극소수의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라는 지배세력이
자신의 목적인 자본관계를 유지하고 자본축적을 확대하기 위하여
노동자와 민중에 대하여 노동현장과 생활현장에서 분열과 경쟁,
감시와 통제, 억압과 착취 등을 강화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인간적 ‘생존권’과 ‘생활권’을 유린 박탈하고
인류공동체와 생태계를 파괴시켜 온 ‘야만’의 역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근․현대사는 이러한 ‘야만’의
역사에 대항하여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민중이
생산수단과 권력을 탈집중화 시키고, 연대와 협동․자율과
자치 의 사회적 관계로 움직이는 인류공동체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공동체를 추구하는 역사이기도하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
되었다. 그러나 8․15 이후 남조선을 점령한 미국의 군사
정권 하에서 노동자들은 다수의 실업노동자들과 소수의
취업노동자들로 분할되어 극도의 고용위기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취업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기아수준으로 떨어져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등은 악화 일로(一路)를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노동자와 민중의 인간적 ‘생존권’과 ‘생활권’
여기서 ‘생존’은 생명활동을 통해 단지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상태, 즉 ‘생존’은 신체의 기본적 생리활동, 특히 먹고 마시고
수면하는 행위를 충족시킬 때 가능하다. 따라서 ‘생존권’은
건강과 육체적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한 권리이다. 이러한
‘생존’의 기반 위해서 영위되는 ‘생활’은 지적 발전 및
우의를 다지는 교류,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활동 등을
말하고 ‘생활권’은 이러한 것들을 확보하는 권리를 말한다.
그리고 ‘생존’과 ‘생활’은 인간의 두뇌와 위장처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최형익, ꡔ마르크스의
정치이론ꡕ, 푸른 숲, 1999, 209쪽,218-219쪽).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친일파를 비롯한 일제 파쇼잔재의
청산, 민족자주독립,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 국가권력의 민주화
등을 이룩하고, 연대와 협동․자율과 자치 등의 논리로
생동하는 새로운 사회와 국가의 수립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이와 관련하여 강정구는 ‘해방공간’의
민족사적 핵심과제로 첫째 식민지 잔재 청산, 둘째 민족통일정부
수립, 셋째 민족자주 구현, 넷째 민주주의 구현, 다섯째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민중권익의 구현 등을
제시했다(ꡔ현대한국사회의 이해와 전망ꡕ, 한울,
2000, 56-65쪽).
부응하여 8․15 이후의 노동자들은 전체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않는 미약한 객관적인 사회적 비중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보기 드물게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에게 심각한 도전’을 하여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문제들을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러한 운동의 전개과정을 통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노동운동의 쇠퇴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군정기의 노동운동이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객관적인
사회적 비중보다 훨씬 큰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내외적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의
주체인 ‘노동자대중과 그 일부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의 존재와 활동 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노동운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쇠퇴로 귀결되었던 내외적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역시
노동운동의 주체인 노동자대중과 전평의 존재와 활동 자체에
내재했던 문제점 등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자대중과
전평’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총체적
이해는 바로 미군정기 노동운동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관건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전평과 관련된 미군정기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성과도
상당히 축적되어 왔다. 이들 연구성과를 이념적 지향성을
기준으로 하여 반공주의적인 경향, 조합주의적 경향, 변혁지향적
경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반공주의적 연구경향과
조합주의적 연구경향을 간단히 보자. 전자는 전평을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권력장악을 위한 ‘보조조직’ 또는
‘종속조직’으로서 다루거나 사회적․경제적 혼란만
조장했던 단체로 파악하여 왔다. 후자는 전평의 정치적 활동은
노동자대중을 ‘기만’ 내지 ‘오도’한 것이었다고 파악했다.
양자의 공통성으로 노동조합운동의 목표를 자본주의하에서의
경제적 이익획득에만 두어 노동자들이 표출한 새로운 사회와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정치적 욕구와 열망을 무시하는 점등을 들
수 있다.
다음에 ‘당시의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일상적인 이해를
확보하기 위해서 싸워야 했던 경제적 주체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변혁을 수행해야 했던 혁명적
주체’라는 정해구, 「미군정과 좌파의 노동운동-정치적
상황과 전평의 운동노선을 중심으로」, ꡔ경제와
사회ꡕ 제2권 제1호, 까치, 1989, 111쪽.
입장에 선 변혁지향적 연구경향을 보자. 그 주요한 특징은
미군정기 노동운동의 ‘실패’를 기정사실화 해놓고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을 연구의 주목적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다. 이를 몇
가지로 유형화해서 보면 첫째 ‘실패’의 원인을 주로 전평
‘지도부’의 잘못된 지도나 운동노선, 즉 주체적 요인을
강조하는 경우, 둘째 ‘실패’의 원인을 전평 ‘지도부’ 등의
잘못된 지도나 운동노선과 더불어 미군정과 ‘우익’ 등의
폭력과 탄압, 즉 내외적 요인을 다 고려하면서도 전평
‘지도부’의 잘못된 지도나 운동노선에 무게 중심을 더 두려고
하는 경우, 셋째 미군정의 정책이 ‘결정적’인 ‘실패’의
요인이었다고 보는 경우 등이 있다.
물론 전평 노동운동의 ‘성공’과 그 요인에 대한 연구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조돈문은 치밀한
사회학적인 이론적 기반과 전평 관계 체험자 다수와의 면담자료
등을 이용하여 전평 노조를 중심으로 자본과 국가에 대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존재양식과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형성을
통한 노동계급의 형성을 규명하고 사업장에서의 당 세포와
작업반 모임이라는 두 가지 호응성(呼應性) 기제들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는 9월 총파업 이전에 “남한의 노동계급은 혁명적
존재양식과 더불어 조직적 형성과 이데올로기적 형성의 양
측면에서 계급형성을” 조돈문, 「전평 노동조합들과
노동계급의 계급형성」, ꡔ동향과 전망ꡕ 23,
1995, 213쪽.
이루었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혁지향적 연구성과를 통하여 우리는 미군정기의
노동운동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실패’ 요인 분석이나 또는 그 반대로
‘성공’ 요인 분석만으로는 미군정기 노동운동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사후적이고 결과론적으로 노동운동의 ‘실패’ 요인들을 주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1946년 ‘9월 총파업’, 1947년 3월 22일
‘24시간 총파업’, 1948년 2월 7일 ‘구국총파업’ 등의
‘운동과정 자체’와 이를 통하여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에게
심각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역시 노동운동의 한 과정에서 이룬 ‘성공’의 요인들을
주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미군정기 노동운동이 결국에는
‘쇠퇴’하게 되었던 사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미군정기 노동운동이 이러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함께 가지게 된 여러 가지 내외적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노동운동의 주체였던 ‘노동자대중과 그
일부인 전평’의 존재와 내외적(內外的) 활동 자체였다. 이렇게
당시 노동운동의 지형 변화를 가져오게 한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 가운데서 내적 요인을 더 중요시하는 것은 ‘외인은 내인을
통해서 관철’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노동자대중과 전평’이라는 운동주체의 ‘내적 속성(屬性)’과
이것에 입각한 객관적 조건과 변화에 대한 ‘주체적 대응’의
측면에 더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동일한 객관적 조건과
변화라도 이것과 대면하고 있는 운동주체의 ‘내적 속성’과
‘주체적 대응’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노동운동의 ‘발전’
상태가 ‘쇠퇴’ 상태로 전화될 수도 있고 반대로 ‘쇠퇴’
상태가 ‘발전’ 상태로 전화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노동운동의 지형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운동주체의 ‘내적 속성’ 및 ‘주체적 대응’이라고
강조할 때 가장 중요한 연구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미군정기 노동운동의 ‘발전’과 ‘쇠퇴’의 과정을
담지 했던 당사자인 노동자대중과 전평의 ‘내부구조와
운영논리’ 또는 ‘운동논리와 실천활동’ 등의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제대로 충분히 밝혀내는 작업’일 것이다.
2. 노동자 계급의 전평 결성과 성격
1) 8․15 직후 노동자 계급의 활동 양상
기존의 일부 논의는 8․15 직후 조선사회를 “해방과
동시에 그때까지 경제의 80~90%를 점하고 있었던 일본 자본이
물러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본가 부재의 자본주의 사회”
中尾美知子, 「‘해방’과 전평노동운동」,
ꡔ한국자본주의와 임금노동ꡕ, 화다, 1984,
177쪽.
라는 입장에서 자본가들의 동향을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사실은
자본가가 부재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패퇴로 인하여 기존의 일본
자본과 친일매판 예속자본의 위상이 변하고 자본운동의 방향이
공장폐쇄와 조업단축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
중소자본의 위상이 부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자본은
경찰이나 군대 등 국가기구를 공장에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자본은 자기들의 정치조직인 한국민주당 등을 만들어
미군정의 권력기구에 진입하여 그것을 한편으로는 자본 관계
형성과 자본 축적에 이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계급의
역량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사용했다.
또한 8․15 직후 미군정이 실시되는 9월 9일 이전까지의
24일 동안을 ‘권력의 공백기’로 파악하는 기존의 일부의
견해와는 달리 일제 잔재권력은 38선 이남 지역에서의 조선
노동자 등의 민중에 대한 계급정치 행위로서 조선 ‘민중의
불상사’의 방지를 목적으로 한 ‘종전(終戰)정책’을 실시했다.
일제 총독부로부터 국가권력을 물려받은 미군정은 남조선에
미국에 종속적인 자본주의 경제와 부르주아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기본적인 정책 구도 하에서 중요한 적산기업을 접수하고
‘국가적 비상조치’로서 법령 제19호(1945.10.30.)를 공포하는
등 일련의 노동정책을 발표하여 노동운동의 발전을 억제하려고
했다. 한편 미군정은 적산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관리위원회
운동을 분열시키고 통제하기 위한 지배전략의 하나로서 사업장
수준에서의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을 일정하게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본과 국가의 계급정치에 대응하여 노동자 계급도
다양한 계급정치를 구사했다. 일부의 노동자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사업장으로부터 스스로 ‘탈출’하기도 했다. 이는 임금노동과
식민지 예속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다양한 유형의 공장관리운동 중에는 ‘노자(勞資)공동관리’,
그리고 미군정의 적산 ‘접수’와 노동자들의 ‘관리’라는
공장에 대한 권리의 ‘공유’를 통한 생산활동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대부분의 견해처럼 노동자 공장관리운동과
자본․미군정의 관계가 오로지 적대적 관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사업장 수준과 지역적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조직과 활동을 전방위적(全方位的)으로 왕성하게
전개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다양한 활동과정에서 일제잔재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타도,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중요산업은 노동자에게,
무산자의 해방, 농토는 농민에게, 남녀평등, 친노동자
정치세력인 조선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 지지 등 ‘자주독립과
진보적 민주주의’로 요약되는 새로운 사회와 국가의 수립을
지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노동자들의 계급정치 행위 범위는 개별
공장이나 회사, 좀 더 나가서는 지역사회로 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계급정치 행위과정 내부도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나 유기적 연관관계가 부족한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각개전투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자들의 밑으로부터의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조직적․행동적․이념적 표출을 모든
산업부문과 전국적인 수준에서 서로 연결시키고 체계화하여
통일시키는 문제가 객관적으로 제기되었다. 이것은 이미 전국적
차원에서 수행되고 있는 자본과 국가의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계급정치 행위에 맞서기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2) 전평의 결성과 성격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노동자들의 다양한 수준과
형태의 활동과 요구조건들에 결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1920년대부터 추구했던 전국적 노동자
대중조직과 산업별노조 조직활동 경험을 역사적 전제로 삼아
1945년 9월 26일에 선진노동자들과 친노동자
정치세력=조선공산당은 전평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이러한 준비위원회의 활동에 연대하고 협동하여 전국 각지의
중요 공업도시의 수십만의 조직 노동자들은 515명의 대의원들을
뽑았다. 이들 대의원들은 10월 26일부터 서울에 올라와 11월
4일까지 17개의 전국적 산업별단일노조
등(금속․철도․교통운수․광산․토건̶
8;화학․통신․식료․전기․섬유․출�
�․일반봉급자․목재․어업․조선․해
원항만․합동)을 결성했다. 이 산업별단일노조 등에는
215개 이상의 산업별 지부, 1천 194개의 분회, 그리고 조합원
21만 여명 이상이 결집되어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대의원들은 1945년 11월 5,6일에 전평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이상과 같은 상하향식 활동 방식을 통하여 조직 노동자들은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상 초유의 산업별 조직형태에 입각한 전국적
노동자 대중조직인 전평을 결성했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조선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자본과 국가가 조장하는 노동자들간의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여 연대와 협동, 자율과 자치의 사회적
공동체를 마련할 조직적 틀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과 국가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기 위한 노동운동의
구심체를 가지게 되었다.
전평 조직의 주체는 조합원 대중, 즉 평조합원들, 대의원,
집행위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일제 말의 남북조선의 노동자
총수는 212만 여명 이상이었다. 이것은 남북조선 인구 2천 500만
여명의 8% 이상, 경제활동 인구 1천 27만 여명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결성 당시 전평 조합원은 21만 7천 73명
이상이었다. 이는 전체 노동자들의 약 10%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전평은 조합비 부담 가능한 노동자들을 약 14만 여명으로
잡았다. 전평 조합원들의 거주지는 개성을 제외한 인구 5만 명
이상의 19개의
대도시(서울․인천․대전․군산․전주̶
8;목포․광주․대구․부산․마산․진�
�․해주․평양․진남포․신의주․원산
․함흥․청진․성진)와 3만 명 이상의 나진을
포함한 남북조선의 80 곳이었다. 이것은 당시 부(府-인구 3만 명
이상) 21개를 합친 239개 행정구역의 33% 이상을 차지했다. 이
가운데에서 38선 이남의 42 곳, 이북이 38 곳이었다. 그리고 1개
도시에 5개 이상의 산업부문에 전평 노조가 조직되어 있는 곳은
22개
도시(서울․인천․대전․전주․군산․
광주․목포․순천․여수․부산․마산&
#8228;대구․삼척․강릉․청진․성진․
;원산․함흥․흥남․해주․신의주․평
양)였다. 38선 이남은 14 곳, 이북이 8 곳이었다. 이렇게 전평
산하의 17개의 산업별단일노조 내부에는 전국의 중요
산업도시들의 조직 노동자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전평 결성 당시 ꡔ회의록ꡕ에 이름이 기록된
대의원들의 수를 보면 347명(38선 이남이 274명)이었다. 이들의
산업별 소속을 보면
교통운수․화학․토건․광산․출판․�
떫�․섬유․전기․식료․목재․통신
8228;일반봉급자 순으로 많았다. 그러나 조합원 수와 대의원
수는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조합원 500명 이상의
단위노조의 규모와 이에 준하는 직업적 노동운동가들의 산업별
소속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대의원들 가운데서 전평의
집행위원(81명)=‘지도부’의 산업별 소속을 보면
교통운수(26명), 금속(15명), 철도(11명)와 이밖에 6명 이하의
광산․토건․화학․출판․식료․섬유&
#8228;조선․합동 노조 소속이었다. 대의원들의 도시별
소속을 보면 서울(31명), 부산(4명)과 3명 이하의
인천․대전․군산․전주․광주․목포&
#8228;부산․마산․대구․삼척․원산․
;함흥․흥남․청진․성진․해주․평양
․사리원․진남포․신의주 등이었다.
여기서 보듯이 교통운수 등의 산업부문과 서울지역 등에서
활동하는 대의원들이 집행위원의 다수를 차지했다. 이것은
교통운수 산업부문 등과 서울지역 등의 운동정세가 전평의
정책결정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산업부문과 지역의 운동정세가 전평의
정책결정에서 소외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산업부문별, 지역별로 사회경제 발전과 노동운동 역량의
불균등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평 결성 당시 집행위원장(허성택),
부집행위원장(박세영․지한종)을 비롯한 81명의
집행위원들은 인구 5만 이상의 대도시 출신의 19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전형위원들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전평 결성 당시의
상임집행위원 26명은 10개의 상임 부서를 맡았다. 상임위원 26명
가운데서 일제시대의 운동경력을 알 수 있는 위원은 17명이었다.
운동 경력자의 연인원을 보면 노조운동 9명, 공산당운동 6명,
학생운동 5명, 농민운동 4명, 청년운동과 신간회운동은 각각
2명이었다. 이 중에서 집행위원장 허성택과 부집행위원장
박세영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각각 졸업하거나 수학했다.
전평의 조직체계는 종적계열인 산업별단일노조 조직형태와
횡적계열인 지방평의회(評議會) 조직형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이중적 조직형태를 채택한 것은 전평 조합원들을 종횡(縱橫)으로
더욱 결속하기 위한 조직적 장치였다. 그러나 전평 결성당시에는
산업별단일노조 조직형태만이 성립되었다. 지방평의회
조직형태는 결성 이후 조직체계의 정비과정에서 1946년 2월
무렵에 가서야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38선 이남에는
서울․인천․대전․대구․부산․마산&
#8228;군산․광주․목포․삼척․전주 등
11개 대도시에, 38선 이북에는
사리원․원산․함흥․흥남․평양․성�
�․청진․진남포․해주․신의주 등 10개
대도시에 지평이 설치되었다.
한편 38선 이북의 정치적․경제적 조건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전평은 1945년 11월 30일 ‘광범위한 자치권과 그 지역
내의 일체의 노동자 문제를 독자적으로 민활히 해결케’할
북조선총국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북조선총국은 스스로를
1946년 4월 북조선 노동총동맹, 5월에 북조선 직업총동맹으로
개편하면서 전평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활동했다. 이후 전평은
38선 이남지역만의 노동자 대중조직(1947년 4월 현재 조합원들은
약 26만 여명)이 되었다. 이렇게 전평과 북조선 직업총동맹이
조직적으로 분리 독립되었다고 해서 양자의 관계가 모든
측면에서 단절적인 관계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전평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과정에서 약화된 조직적 역량을 보강하기 위하여 1947년 2월
제2회 전국대회에서 기존의 지평 등을 산하에 두는
도(道)평의회의 결성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6월에 가서 38선
이남지역의 8개 도에 평의회가 성립되었다. 이렇게 전평이
도평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17개 산업부문 이외의
‘양화공’, ‘목공’, ‘이용직원’, ‘양복기공’, ‘약업’
노동자들까지도 전평을 자기 조직체로 삼게 되었다.
전평의 조직 운영은 민주집중제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평은 군사적․관료적 조직이 아닌 노동자들의
자율적 연대조직으로서의 전평 중앙집행위원=‘지도부’와 산하
조합과 평조합원들의 관계는 「일반행동강령」
등으로 나타난 공통의 목적과 수단과 방법론을 매개로 한 신뢰와
협동의 관계와 자율과 자치의 관계로 작동되는 조직을 지향했다.
전평 조직의 운영자금도 당연히 조합원 대중의 회비와
의연금으로 충당하여 노조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전평은 「전평 규약」에 의하여
자기들의 사업과 활동과제에 대한 의사를 결정하기 위하여
대회나 총회 또는 집행위원회 등의 의사결정기관을 가동했다.
이러한 의사결정기관 등은 사업장 수준․지역적
수준․전국적 수준에서 작동되었으며 상호간에는 유기적
연관성도 일정하게 지녔다.
전평의 의사결정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전평 ‘중앙’에서 미리 의제를 설정하고 이것에 대한 지역적
수준과 사업장 수준에서 표출된 조합원들의 의사를 반영해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는 1946년 4월의
제1차 ‘확대집행위원회’의 경우가 그러했다. 다른 하나는
사업장 수준에서 제출된 다양한 의제들과 이것에 대한 다양한
의사들이 지역적 수준을 거친 후 전국적 수준의 ‘전국대회’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방식으로 1946년 8월 중순 이후
제2차 전국대회 준비과정이 그러했다. 그러나 1947년 8월 전후
미군정 등의 파쇼적 탄압이 거세지는 상황이 전개되자 전평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노조 내부의 ‘절차민주주의’를 제대로
가동시킬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전평 내부의 절차민주주의의
결여가 있었지만 전평 ‘지도부’의 의사결정 내용은 조합원들의
권익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지도부’의 운신 폭은 어디까지나
조합원들에 의하여 선출된 대의원들이 결정한 전평의
「일반행동강령」 등의 범위 내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전평의 존재 목적은 결성대회에서 결정한
「일반행동강령」과 ‘대회의 결의 사항’ 등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전평은 1947년 2월 제2회 전국대회를
열었으나 ‘강령’ 등을 개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결성대회의
‘강령’ 등은 미군정기 전 시기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령’ 등은 전평 준비위원회에서 초안을 작성한 것을
대회에서 대의원들이 토의하여 결정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
‘강령’ 등은 전평의 구체적 사업이나 활동내용과 방식을
제약하는 것으로서 전평의 활동방향을 크게 틀 지우는 것이었다.
‘강령’ 등은 자본-임노동 관계를 근본적으로 지양(止揚)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최대한의 민주화를 지향했다. 즉
‘강령’ 등은 당시의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욕구와 열망인
‘인간적 생존권과 생활권의 보장’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1930년대 전반기의 조공
재건운동세력이나 혁명적 노조운동의 ‘사유재산 철폐나
노농소비에트 건설’ 등의 최대강령은 계승하지 않았고
1920년대와 1930년대 후반기 이후의 조공과 공산당 재건운동
세력과 혁명적 노조운동의 인민공화국 수립노선이나
‘반파쇼인민전선 또는 반제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최대강령으로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고 8․15 직후의 다양한 노동자
공장관리 유형 중에서 노자(勞資)공동관리를 중심적으로
수렴했다. 그리하여 전평은 무조건 ‘모든 자본’이나
‘미군정의 모든 정책’에 대하여 적대관계를 설정하지는
않았다. 전평 조합원들은 이상과 같은 ‘강령’과 「전평
규약」 등을 승인하는 조직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강령’ 등은 전평 조합원 대중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한 요소였다. 또한 이것은 조합원들간의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형성시켜 주는 매개고리의 하나였다.
3. 전평의 노동자 계급 내․외부 정치
1) 노동자 계급 내부 정치
결성 이후 전평의 노동자 계급 내적 조직활동의 과제로 크게 두
가지가 대두했다. 전평이 결성됨으로써 분열과 경쟁의 구조는
단순화되었지만 여전히 전체 노동자대중은 전평을 자기조직체로
한 수십만의 조직 노동자들과 그렇지 못한 수백만의 미조직
노동자들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를 면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하나는 미조직 노동자들을 전평으로 조직화하거나 연대관계를
맺어 전평을 양적으로 확대하는 과제였고, 다른 하나는 전평으로
결속된 조합원 대중 내부의 계급의식, 조직생활, 투쟁력 수준
등에서의 불균등 문제를 완화하여 전평을 질적으로 강화하는
과제였다.
이러한 전평의 확대 강화를 위한 조직활동의 공통성으로
‘대중노선’, ‘노조민주주의’, ‘독자성’,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 ‘투쟁의 종결문제’ 등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전평은 노동자들간의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굳건하게
하고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활동력을 고양시키려고 했다. 또한
전평이 산하 노조들에게 지시한 조직활동에 관한 방침으로는
분회총회와 위원회의 확립, 요구조건과 전략전술의 결정,
노동자통일전선 조직, 실업노동자 조직, 자위단 조직, 보조조직,
공장관리운동, 선전선동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양적 확대와 질적 강화를 위하여 전평이 산하
노조들에게 제시한 조직활동에 관한 방침은 주․객관적
조건의 변화와 새로운 당면 운동과제의 부상 등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45년 11월 전평
결성 이후부터 1946년 말까지로 노동자 공장관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산업건설운동’을 위한 조직활동에 관한 방침,
두 번째 시기는 1947년 1월부터 1947년 8월까지로
‘해고․테러반대투쟁’을 위한 조직활동에 관한 방침, 세
번째 시기는 1947년 8월 이후부터의 ‘파쇼반대투쟁’을 위한
조직활동에 관한 방침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기 전평의
산하 조직들의 활동에 관한 방침의 변화는 전평 결성대회에서
결정한 노조운동의 목적과 수단과 방법론인
「행동강령」과 ‘대회의 결의’ 사항의 범위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이와 같은 시기별 조직활동에 관한 방침의 상호관계도
따져보면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윤추구’가
산업건설의 근본 목적인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의 입장과는 달리
전평 노동자들의 입장에서의 공장관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산업건설운동’의 목적은 노동자와 민중의 인간으로서의
생존과 생활을 위한 노동권 확보와 사용가치 획득 등에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산업건설운동’의 순조로운 수행은 자본과
국가권력의 ‘해고․테러’와 ‘파쇼’적 탄압 등에 의한
생존과 생활의 불안이 없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고․테러’ 반대투쟁과 ‘파쇼’ 반대투쟁은 전평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산업건설운동’의 연장선상에 위치했던
것이다.
전평은 하나의 통화(通貨)수단과도 같이 전평을 자기조직체로 한
의식수준이 다양한 노동자들간, 노조들간, 전평과 그 산하 각급
조직들간, 전평과 미조직 노동자들간 등의 수평적․수직적
의사소통의 수단과 역할을 통한 연대와 협동의 관계, 계급의식의
고양을 위하여 ꡔ전국노동자신문ꡕ을 발행했다.
결성대회에서 전평은 1만부의 ꡔ전노신ꡕ 발간을
예상했으나 1946년 5월 무렵에는 6만부 정도를 발행한다고 했다.
ꡔ전노신ꡕ의 발간은 처음에는 상임위원회의
선전부에서 맡았다. 그러나 1946년 3월 이후 선전부에서
기관지부가 분리 독립했다. 3월 하순부터
ꡔ전노신ꡕ을 확대강화하기 위한
일간기성(日刊期成)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전평과 산하 노조들은 교양강습 및 연예(演藝)활동을
통하여 조합원들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려고
했다. 전평은 5월 1일 노동절 기념대회를 1946년과 1947년에
합법적으로 개최하여 전평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과 계급의식의 고양을 과시했다. 그러나 1948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대회는 미군정의 불허로 열지 못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전평은
세계노동조합연맹과의 국제적 연대관계를 맺어 활동했다. 즉
전평은 1946년 6월 30일에 세계노련에 가맹하여 그 지부가
되었다. 1947년 3월말에 세계노련 극동조사단이 내조(來朝)해서
활동했다. 전평은 1947년 6월 체코의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노련의 집행위원회와 총회에 이인동․한철을 대표로
파견했다. 특히 세계노련 제1분과회의인 약소민족회의에 참가한
한철은 ‘약소민족 또는 국가의 노조운동을 원조 육성하는
문제를 토의하는 ‘약소민족노동회의’를 설립하는 결정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극동제국의 노조운동을 원조하고
세계노련과 연락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항구적 기관으로서의
‘극동서기국’의 설치를 주장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2) 노동자 계급 외부 정치
(1) 반(反)파쇼민주주의 세력들과의 연대
전평은 노동자들간의 분열과 경쟁을 방지하고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이룩하여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과 착취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확대 강화하는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노동자들을 포함한 인류 공통의 진보적
가치, 즉 당시로서는 ‘반파쇼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국내외(國內外) 반파쇼민주주의 정치․사회세력과 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즉 전평은 스스로의 구심력 하에 노동자 계급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그리고 이것의 구심력 하에 비노동자 계급과의
국내외적인 반파쇼민주주의 통일전선을 광범하게 결성하여
파쇼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세력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국내적 차원에서 전평은 노동자와 농민,
소시민과 ‘양심적’ 민족자본가 등을 비롯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사회세력들, 즉
조공․인민당․신민당․민전,
전농․청총․부총 등과의 연대활동을 통하여
친일파․민족반역자․파쇼분자․매판예속
자본가․모리배 등과 싸웠다. 1947년 8월 전후부터
미군정의 제국주의적이고 파쇼적인 탄압이 전면적으로
노골화되자 전평은 ‘양심적’ 자본 뿐만 아니라 대산업 자본과
금융자본에 의하여 ‘착취’ 당하는 중소자본도 민족통일전선의
아군으로 취급했다. 특히 정치세력 가운데서 이승만과 더불어
김구․김규식 등을 1946년 이후 파쇼분자로 규정했으나
1948년 4월 ‘남북협상운동’에 김구․김규식 등이
참여하게 되자 3월 하순부터 그들을 통일전선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전평의 입장 변화의 배경의 하나로 북조선이 3월 25일
김구와 김규식 등을 ‘남북대표자회의’에 초청했던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전평의 반파쇼민주주의 통일전선 운동과정에서 조공과의
관계는 주목된다. 이것은 전평 결성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준비위원회의 일부가 조공당원이었던 점, 전평
결성대회에서 긴급 제의로 조공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지지했던
점, 전평의 조합원들 특히 집행위원장 허성택과 부집행위원장
박세영 등이 각각 조공의 서기국원과 당원이었던 점, 그리고
일제시대 때부터 노조운동과 조공운동이 함께 민족해방투쟁과
민주주의운동을 전개했던 점등에서 전평과 조공은
조직적․정치적․역사적으로 긴밀한 상호유대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양자간에는 서로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가능성을
내부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평과 조공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서로의 기능과 독자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와 협동의
관계였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전평은 반파쇼민주주의 국제노선에 입각하여
「모스크바 협정」과 이것을 총체적으로 실천하는
국제적 차원에서 ‘좌우연합전선’격인 미소공위사업에 참여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전평은 ‘반탁’을 빙자하여 협정을
파탄 내려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파쇼분자 등을 반대하여
활동했다. 전평은 미소공위사업을 ‘자주성’에 입각하여
능동적으로 추동해야 한다고 했다. 전평에게 있어서
미소공위사업 참여운동은 국제적 차원에서의 평화공존운동과
반파쇼민주주의 통일전선운동의 일환이었다.
(2) 자본과 국가에 대한 계급정치
전평은 노동자들의 인간적 생존과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사자인 자본과 미군정에 대한 계급정치에서
‘좌․우 편향’의 극복을 강조했다. 기존의 일부의
견해와는 달리 전평은 ‘모든 자본’과 미군정의 ‘모든
정책’에 대하여 무조건 일방적으로 ‘협력’하거나
‘투쟁’하지는 않았다. 즉 전평은 자본과 미군정에 대하여
‘양면적’인 기본방침에 입각하여
사업장․지역사회․전국적 수준에서 계급정치를
수행했다.
전평은 자본을 ‘양심적’ 민족자본과 그 ‘이외의 자본’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 ‘양심적’
민족자본이란 노동자 계급의 기본적 권익을 승인하는 자본을
말한다. 기본적 권익이란 전평의 「일반행동강령」
등과 같은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의미했다. 이러한 자본에
대하여는 전평은 ‘협력’의 계급정치를 수행했다. 전평의
자본에 대한 ‘협력’의 계급정치의 대표적 경우로는 ‘양심적’
민족자본과의 공장공동관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기본적 권익을 부인하는 ‘악질’ 자본에 대해서는
‘투쟁’의 계급정치를 구사했다.
한편 전평은 자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군정의 정책 가운데서
반파쇼민주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협력’하고 파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반민주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투쟁’의
계급정치를 수행했다. 전평의 미군정에 대한 ‘협력’적
계급정치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례는 1946년 6월 13일 미군정이
전평에게 노동자대표권을 승인했을 때였다. 그러나 곧 이것이
기만적이고 허구적임을 깨달은 후에는 미군정에 대한 ‘투쟁’의
계급정치를 구사했다.
전평의 미군정에 대한 대표적인 ‘투쟁’의 계급정치는 1946년의
9월 총파업, 1947년의 3월 22일의 24시간 총파업, 1948년의
2․7 구국총파업, 5․8 단선단정반대총파업 등이었다.
예컨대 9월 총파업 발생 요인을 보자. 그것은 미군정 등에 의해
조성된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상황, 이것을 인간적 상황으로
바꾸기 위한 노동자들의 다양한 수준과 형태의 ‘투쟁’의
집적과 철도 총파업, 이것을 계기로 삼아서 전 산업부문의
전국적 총파업으로 확대 발전시키려는 전평 중앙의 총파업
결정과 조합원 대중과 노동자들의 호응 등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등은 조공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교사’에 의하여
9월 총파업이 발생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민당․사회민주당․사회노동당
등은 미군정의 반인민적 정책과 그것으로 인한 민생문제 때문에
총파업이 발생했다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생활권 요구에 빨리
응하라고 촉구했다. 이러한 총파업투쟁에 전평 산하 조합원대중
등이 많이 참여했다. 이것은 그들간의 연대와 협동의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었다.
4. 전평의 대안체제 수립 지향
1) 「남조선노동법령초안」 분석
전평은 이상과 같은 운동과정과 운동논리 속에서 ‘대안체제’
수립 지향을 대안의 사회와 이념의 필요성에 대한 다음의 언급이
주목된다. “대안의 사회와 이념이 분명이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지금보다 나은 대안의 사회가 존재하고 실현
가능하다는 믿음은 현재의 억압이나 착취를 벗어 던져야 할
이유와 자신감을 부여한다. 대안적 이념은 현재의 구체적인
정책과 실천 하나 하나에 일관성과 방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정영태, 「진보정치운동의 현재와 미래」,
ꡔ황해문화ꡕ, 2000 겨울, 81쪽).
나타냈다. 전평은 자본이 자신의 목적인 ‘이윤 증식’을
위하여 무산자들에게 노동을 강제하여 노동의 생산물을 착취하고
그들의 인간적인 ‘생존권’과 ‘생활권’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제도’에 근거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을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국가권력이
‘법적’으로 보장하여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평은 자신의 목적인 「일반행동강령」 등을
달성하고 지속적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인간적 ‘생존권’과
‘생활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인민공동소유화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경제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경제구조는 계급정치의 주체인
노동자․자본․국가 사이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가
‘법적’으로 보장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전평이 1947년 4월 19일 발표한
「남조선노동법령초안」은 전평의 목적인
「일반행동강령」 등을 법령화․제도화하려 한
것으로서 ‘노사관계’와 ‘노정관계’의 민주화를 지향했다. 즉
노조가 노동자와 이익과 권리 등에 대한 내용을 자본과 국가와
함께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규정했다는 점에서
‘절차민주주의’를 구현하려고 했다. 물론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의 존재를 전제했다는 점에서 한계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내에서나마 노동자들의 권익을 최대한으로
확보하여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확대를 일정하게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진보성을 가졌다.
「북조선노동법령」과 비교할 경우에도
「초안」은 더 민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초안」에는 북조선의
「노동법령」에 없는 ‘파업’ 등의 자유에 대한
규정이 있다는 점, 국영기업체의 임금을
「노동법령」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규정한다고
했으나 「초안」에는 노정이 협의하여 결정한다고
규정했다는 점등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초안」은
역사적인 진보성과 민주성을 가지고 있었다.
2) 인민공동소유화 지향
전평은 토지 및 중요 산업기관의 국유화를 지향했다. 그런데 그
국유화의 실질적 내용은 인민공동소유화였다. 인민정권에 의한
국유화는 생산수단에 대한 인민의 공동소유권, 즉 인민이
생산수단에 대하여 공동으로 통제․관리하는 권리를 정치적
권력의 수단으로 보장해주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전평의
생산수단의 인민공동소유화 지향의 배경은 일제 식민지시대의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국유화 정책과 8․15 이후 이것을
계승한 정치․사회세력의 국유화 정책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의 객관적 기반은 오랜 식민지 기간에 걸쳐서 조선의 토지와
중요 산업기관의 대부분이 일본인과 친일적 조선인의 소유로 된
데 있었다. 그리고 전평은 구체적인 산업현장의 공장과 기업에
대한 인민공동소유화 지향을 공장관리위원회 결성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다. 전평이 구상한 공장관리위원회는 사업장
내부에서 ‘양심적’ 자본․기술자․노동자 대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성원 서로간의 관계는 기능적
상호의존관계였다. 공장과 기업은 공장관리위원회 구성원의
공동소유였다. 공동소유권 행사는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의
통제․관리권을 의미했다. 노동자의 통제․관리권은
인민공동소유권 일부분인 동시에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입장에서 가능한 한 중심적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공장관리위원회는 공장과 기업 영역에서의 인민공동소유를
지향하는 산업공동체였다. 한편 공장관리위원회와 사업장 외부의
정치영역인 인민위원회의 관계는 노동자 대표도 참여하고 있는
인민위원회의 ‘지도와 감독’을 매개로 한 기능적 상호의존
관계였다. 인민위원회는 공장과 기업에 대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권의 전횡을 방지하고 인민공동소유권 행사를 보장하는
정치적 도구였다. 한편 전평의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의 배경의
하나는 8․15 직후의 공장과 기업에 대한 자발적인
노동자의 독점적 소유권 행사가 좌절된 데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들 자신의 주체적 역량의 미약 및 노동자들의 독점적
소유권 행사를 보장하는 사업장 밖의 친노동자
정치․사회세력의 취약성, 그 반대로 사업장 밖의
노동자들의 독점적 소유권 행사를 억압하는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와 국가의 존재 때문이었다.
3) 인민공동정권 수립 지향
전평은 국가권력으로서 인민공동정권의 수립을 지향했다. 이
정권은 ‘양심적’ 민족자본․노동자․농민 등으로
구성된 민족통일전선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다. 정권의 형성과
운영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중심적 지위’를 추구하려고 했다.
이러한 인민정권의 수립 지향의 배경은 일제 식민지시대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의식 및 8․15 직후 전국에 걸쳐서
수립되었던 인민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의 경험과 인민들의
정치의식에 있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도
단독으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는 계급역량의 취약성도 한 배경이
되었다. 전평은 미군정 하에서의 인민공동정권 수립은
정치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세 가지 방법을 구사했다. 첫
번째는 1945년 11월 초순의 전평 결성 이후부터 12월 하순
「모스크바 협정」이 발표되기 이전까지로, 이때의
전평은 9월 6일 창건된 조선인민공화국과 전국 방방곡곡에
건설된 인민위원회를 지지하고 여기에 참여하려고 했다. 두
번째는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의해 파괴된
1946년부터 1947년 7월까지로, 이때의 전평은 민전에 기반하여
「모스크바 협정」의 총체적 실천에 의한
노동자․농민 등 인민이 참여하는 조선민주임시정부 수립을
매개로 민전의 「지방선거강령」을 실시하여
인민공동정권을 획득하려고 했다. 세 번째는 1947년 미군정의
진보적 민주세력에 대한 파쇼적인 ‘8․15 폭압’ 정책으로
제2차 미소공위사업이 결렬된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하게 되는 1948년 9월
9일까지로, 이때의 전평은 미소양군을 동시 철퇴시킨 후
남북조선의 총선을 통하여 인민공동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5. 전평의 계급 정치의 문제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연대와 협동의 사회적 측면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에 의하여 쟁취되어야
한다’라는 자율과 자치의 사회적 측면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연대와 협동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 없이
자율과 자치의 관계를 형성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형성이야말로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를 넘어서기 위한, 그리고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핵심적인 기제라는 관점에서 ‘노동자대중’과 그
일부인 전평’의 계급정치의 문제점을 짚어 보자.
우선 노동자대중과 그 일부인 전평의 계급정치에 내재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미군정기 노동자 계급이 처한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사회적 존재조건의 일단을 짚고 넘어가자.
자본주의의 저발전으로 인하여 8․15 이후의 전체
노동자대중은 인구의 10% 미만으로 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 90%
이상이 비노동자 계급에 속했다. 이러한 소수의 노동자대중 조차
단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노동자대중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였다는 점에서 동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노동자대중은 성별․연령별․민족별 등의 태생적인
분열상태로 생산되고, 여기에다가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에
의하여 조장된 사업장 내의 직종별․직급별, 사업장별,
산업별, 지역별, 자본규모별, 임금구조별, 학력별,
고용형태별로, 그리고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 사이 등으로
분열되어 경쟁하는 상태가 추가되어 생산된다. 이러한
노동자들간의 분열과 경쟁 상태의 사회적 존재조건이야말로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분열과 경쟁’의
상태에서 ‘연대와 협동’의 상태로 전환시킬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첫째, 이렇게 분열되어 경쟁상태에 있었던 전체 노동자대중
가운데서 상당수는 전평이라는 자기조직체를 만들어
노동자들간의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자본과
국가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할 수 있는 운동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전평을 자기조직체로 한 조직 노동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미조직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와 같이 노동자대중 자체가 전체 인구에서 소수라는 점,
여기에다가 조직 노동자들이 소수라는 점등은 노동자들의 힘의
근원의 핵심이 “머릿수”, 맑스,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 맑스․엥겔스 지음/이경숙 옮김,
ꡔ맑스․엥겔스의 노동조합이론ꡕ, 샛길,
1988, 66쪽.
즉 ‘다수 노동자들’의 연대와 협동에 있다고 볼 때 미군정기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객관적 한계로 작용했다.
둘째, 노동자대중 가운데서 대다수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상당부분은 일단 자본과 미군정의 분열과 경쟁, 위계와 차별
등의 지배논리를 ‘비규범적’으로 나마 내면화한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자대중의 일부인 전평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조직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활동력의 수준을 고양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 내적 활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조직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 노동자들의 일부도 자본과 미군정에 대한 ‘투쟁’에서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셋째, 이러한 조직 노동자들의 자본과 미군정에 대한
‘투쟁’에서의 연대와 협동의 결여는 물론 자본과 미군정의
물리적․이데올로기적인 분할 지배전략과 조합원들의
의식과 행동이 유동적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을 돌파하기 위한 전평
중앙집행위원회=‘지도부’의 주체적 대응활동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도 노조 내부의 절차민주주의의
‘충분한 실천’의 결핍을 들 수 있다. 전평 중앙은 산하
노조들에게 ‘대중노선’과 ‘노조민주주의’ 등에 입각한
조직활동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그러나 ‘지도부’ 스스로도
객관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절차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장 노동자들과의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한층
강화시킬 계기를 적극적으로 확보하지 못했다. 예컨대 객관적
상황이 상대적으로 좋았던 1945년 11월 전평 결성 당시
집행위원장을 조합원 대중이 직접 뽑지 않고 19명의 지방대표가
선출했던 점, 1946년 9월의 총파업 당시에도 실질적
민주주의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지만 평조합원들이 의사결정
과정에의 참여 없이 전평 중앙이 일방적으로 총파업을 결정했던
점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조합원 대중 등의 자율성과 자치성을
경시하는 전평 중앙의 권위주의적 행태의 표현으로서 미군정기
노동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걸림돌의 하나로 작용했다.
넷째, 전평의 기본적 방침은 결성 당시에 결정된
「일반행동강령」 등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서
자본-임노동관계를 근본적으로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내에서의 최대한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본과 미군정에 대한 태도에서는 ‘협력’과 ‘투쟁’의
계급정치의 수행이라는 ‘양면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전평의 자본과 미군정에 대한 대응태도는
‘노자관계’의 근본적 지양을 추구하고 미군정을 일제와
다름없는 제국주의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개량주의’적
노선으로 그 한계는 분명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전평의
기본적 원칙 또는 방침에도 불구하고 조합원 대중의 실천적
활동과정에서는 끊임없이 ‘좌․우 편향’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도 결국은 전평 조합원 대중의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취약하게 하는 한 요소로 작용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전평은 조공(남로당)과
조직적․정치적․역사적으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활동했다. 그 관계의 성격은 각각의 조직활동의 ‘독자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와 협동의 관계였다. 전평 조합원 대중(‘평
조합원’과 ‘지도부’)의 일부가 조공 당원이었으며, 동시에
조공 당원이 전평 조합원이었다는 정체성의 중첩성은 내부
구조적으로 전평의 입장이 조공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조공의 입장이 전평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었음을
말한다. 전평 중앙은 산하 노조들에게 사업장 밖에서 비노동자
계급 등과 함께 활동을 할 때에도 노조는 조공의 하부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노조 조직체계 내의 상부조직의 ‘지시’를 받아
독자적으로 조직활동을 하도록 했다. 또한 전평은 경제투쟁만
해야 한다는 부르주아적 노조운동관을 부인하고 노조운동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을 처음부터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전평의 조직활동과 정치투쟁은 스스로의 기본적
방침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평의 운동에 대한
조공의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전평 운동에 ‘내재’해 있는 욕구와 열망을
‘표출’시키거나 이미 ‘진행’되고 있는 전평의 운동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차원에 있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전평 중앙의 조직활동 방침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 중에는 사업장 밖에서 비노동자 계급 등과 함께 활동할
때 노조는 조공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든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분리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노동운동 내부에서 싹터 나오는 자율성과 자치성을
헤치는 경향이 또한 전평 조합원들간의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균열시키는 작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여섯째, 전평은 노동자 계급의 권익뿐만 아니라 당시의 인류가
공통으로 확립해야할 보편적인 진보적 가치는 반파쇼민주주의의
구현에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하여 국내외의 반파쇼민주주의
정치․사회세력들과 연대하여 파쇼세력과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했다. 반파쇼민주주의는 ‘세계평화와
민족해방 그리고 진보적 민주주의’ 등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평이 당장 구현해야 할 가치는 한편으로는 자본과
미군정의 파쇼적이고 반민주적인 지배논리를 내면화한 일부
노동자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반파쇼민주주의 자체를 넘어서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의 즉각적인 실현을 추구하는 일부
노동자들과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즉 전평이
당장 구현하려고 했던 가치는 ‘샌드위치’처럼
‘좌․우’에 적(敵)을 둔 형국이었다. 이것이 또한
노동자들간의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취약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곱째, 전평이 수립하려고 하는 대안체제는 사회나 국가
영역에서 자본, 즉 ‘양심적’ 민족자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 일반이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부르주아
독재체제’라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노동자․농민․소부르주아지․‘양심적’
민족자본 등 전체 인구의 절대 다수가 사회와 국가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의미에서 ‘인민공동체제’, 즉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러도 아주 빗나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심적’ 민족자본도 자본인 이상
그들의 목적인 최대한의 이윤추구를 계속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평 노동자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심적’ 민족자본의 그러한
목적을 계속 억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즉 당시의 전평이
지향했던 대안체제는 노동과 자본간의 대립과 갈등 현상이
근본적으로 해소된 사회와 국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전평의
대안체제가 수립된다고 하더라도 다음의 운동과제는 이러한
노동의 목적과 자본의 목적간의 상호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벌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전평이 지향했던 대안체제는 전체
노동자대중 내부에서조차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독재체제에
흡수당한 일부 노동자들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수립 가능성을 지향하는 다른 일부 노동자들로부터
‘협공’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이것이 또한 노동자들간의
분열과 협동의 관계를 취약하게 했다고 본다.
여덟째, 전평은 인민공동정권의 수립과 운영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중심적 지위’를 상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즉 조공(남북로당)
등의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이념조직들의 구성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실제의 노동자 대표들은 소수자의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자율성과 자치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자기역량의 부족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연대와 협동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홉째, 국가권력 장악 방식에서 전평은 임시정부 수립을 매개로
대의(代議)주의적인 ‘선거정치’를 선호했다. 총파업이나 시위
등의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실천 과 같은 ‘대중정치’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대의주의적인
‘선거정치’를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압력 수단으로만 활용하려
했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국가권력의
장악 방식의 경시는 전평이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데 긍정적인
작용만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6. 맺음말
미군정기 초에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은 산업별노조 조직형태와
지방평의회 조직형태가 종횡(縱橫)으로 연결된 전국적
조직체계인 전평을 결성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 스스로의
연대와 협동, 자율과 자치의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여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주체가
되었다. 전평 조합원들은 자신을 비롯하여 노동자대중의
‘인간적 생존권과 생활권’의 획득이라는 기본적 목표와 방침
아래서 국내외적으로 광범한 정치․사회세력과
반파쇼민주주의 통일전선 운동 등의 다양한 사회적 실천활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이러한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는 대안
체제로서 노동자와 민중, 즉 인민이 공동으로
통제․관리하는 사회와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뚜렷한 전망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전평이 미군정기에
노동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전평이라는 자기 “조직”에
의하여 통일되고 ‘기본적 방침과 대안이념’이라는 자기
“지식”에 위와 같음.
의하여 스스로를 지도하여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상 보기 드물게
‘자본과 미군정에게 심각한 도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군정기의 자본주의의 미성숙의 결과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존재’인 노동자들 자체가 전체 인구
가운데서 소수에 불과하여 객관적으로 취약한 사회적 역량을
가졌다는 점, 이러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비규범적’이나마
자본과 미군정의 지배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는 미조직
노동자들이었다는 점, 전평을 자기조직체로 한 노동자들도
소수였다는 점, 노동운동 내부(‘평조합원’과
‘지도부’)에서도 연대와 협동의 관계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하여 실천적으로 공고하지 못했다는 점등의 노동자 계급 내적
요인과, 이러한 상태에서 점차로 미군정과 자본에 의한
제국주의적이고 파쇼적 탄압이 강화되어 가는 노동자 계급 외적
요인 등에 의하여 전평 조합원들의 일부조차도 대부분의 미조직
노동자들처럼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논리를 점차로
내면화하여 자기조직체인 전평에서 이탈해 갔다. 이렇게 하여
조합원들간에, 그리고 노동자들간에 그리고 노동자들과
비노동자들간에 연대와 협동의 관계가 취약해져 갔다. 그리하여
미군정기 노동운동도 후기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질문: 조공과 전평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상호기능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는 관계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분석을
하시게 된 근거가, 예를 들어 현장단위에서의 전평의 활동을
분석한 속에서 나온 결론인가? 예를 들어 조돈문교수 논문의
경우는 노동계급 형성과 관계된 논문에서 당세포 모임과 작업장
모임의 호응성 기제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면서 적극적으로 그
관계를 현장단위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발표자께서는 어떻게 분석하셨는지 궁금하다.
답변: 전평과 조공의 관계는 8월테제에서 박헌영이 말했듯이
노조는 조공을 보조하는 관계였다. 노동자들은 의식이 없으니까
계급의식을 전평에 주입하라는 입장에 대해서 본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박헌영은 노동자를 주체로서 보기 보다는
대상화시켰다.
이러한 입장이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해당되어
당세포활동가들이 자신을 상위조직으로서 또한 지시자로서
활동하려 했다면 그것은 전평의 일반방침하고는 맞지않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상당히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예로서,
일부 노조원들 중에서 사업장 단위 안에서는 당연히 노조활동이
우선이지만, 사업장을 넘어서는 지역사회에서는 실업자
조직운동이라든지 비노동자계급, 일반주민들과 공동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전평 노조의 활동이 부족하다면서 조공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평 지도부에서는 안된다,
안이든 바깥이든 노조는 노조조직체계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한 부분이 일부 조합원들과 전평 일반방침과의
갈등으로 보일 수 있다.
질문: 조공이 이념적 조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가 당시
상황에 대한 판단에 따라 나온 것인지, 당개념 자체를 이념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답변: 계급조직과 이념조직은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계급조직은 그야말로 운동의 사회적 주체가 노동자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내에서 취업 노동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의 정치노선과 계급의식은 사회주의적일
수도 자본주의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성과
계급조직은 분리되어있는 동시에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념조직은 계급적인 조직이 아니다. 노동자로부터 농민,
지식인, 양심적 민족자본가까지 계급 구성은 다양하다. 사실
조공은 양심적 민족자본가로부터도 많은 지원을 받았다. 조공의
노선이 당시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노선인 동시에 반제반파
노선이었으며 그런 입장에서는 자본을 일방적 적대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자본가가 노동자적 입장을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자본가야말로 가장
계급적인 집단이며 분열적인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해방공간의 미군정기 당시에는 자본가들중에서 민족자본가들이
일정부분 존재했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조공도
다계급조직이라는 것이다. 1947년 11월에 인민당과 신민당이
합치면서 조선공산당이 3당 합당을 해 남조선노동당이 되었는데,
이때 인민당과 신민당은 주로 양심적 자본가로 구성되었으나
이름은 남조선노동당이었다. 이름과 실제 당의 계급적 성향이
다른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이념조직과 계급조직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이념조직은 철학자적 입장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조건을 기반으로 대중과 결합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순수한 의미도 역사현실적으로
보면 이념적인 조직이 실제적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며 계급조직의
노동자들은 정치 대상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이후
역사현실적 조건이 변화한 때문으로도 볼 수 있으나 동시에
권력을 잡기 이전에,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념주의자로서 박헌영
등의 경우와 같이 노조는 보조조직이며, 노동자들에게는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무언가가 발현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노동자계급하고 자신들 집단과는 뭔가 다르다는 인식이 철저히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이 권력을 장악하고 난 후 그대로
연속되면서 북조선노동당에서도 노동자들이 대상화되고 당이
권력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실제 사회주의와는 다른
것이라고 본다. 이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해 쟁취되는 것이라는 맑스의
고전적인 명제에 입각해서 봤을 때도 맞지 않는 것이다.
질문: 발표자가 말했듯이 문제는 조공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공과의 관계의 그 출발점이 조공, 보다
일반화해서 노동자 정당 혹은 공산당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제가 듣기에는 발표자가 전평을 성격지우면서
조금은 생디칼리즘적이고 노동자적인 시각에서 조공을 분석하고
그 틀에서 전평을 분석했기에 독자성이라는 문제의 규명에 있어
내용적, 실질적인 부분에서 현실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관계로
가는 것 아니냐라고 보고, 그리고 발표자의 분석틀에서 전평의
민주성과 관련해서,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어려워진 속에서
중앙으로부터의 일방적 결정이 많아진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과정에서 발표자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인정하고 계신 부분과,
조공이라든가 레닌 등의 당은 그렇지 않다고 시사하는 것은 그
내용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라고 본다.
바로 그러한 충돌 때문에 9월총파업에서의 조공과의 관계를
문제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9월총파업에서의 조공과
전평과의 관계는 오히려 미군정의 선전(?)이 보다더 현실에
접근할 것이라고 본다. 조공에서 자기네 입장을 어떻게 표명하고
또 전평에서 어떻게 하든지에 상관없이 현실의 실제 관계는
그렇다. 전평이 결성될 때 8.15 이후의 짧은 기간에 그렇게
광범한 조직이 가능할 수 있던 가능성과 조건 자체가 사실은
1920년대 이후부터 40년대까지 조공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의
운동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이를테면 조공의 핵심적인 간부가 전평의 위원장을 하면서도
양자 종속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조공이라든가 일반적인
공산당에서의 자기들의 원칙에 따른 것이지 전평 고유의
독자성을 내용적으로까지 강조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답변: 방금 노동자주의라고 했는데,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정치문제 사회문제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노동자 이외의 다른 계급계층을 결합시키는
것이 노동자자체 내부의 정체성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노동자주의는 제 입장과는 정반대로 노동자의 일방적 주체성에
입각해서, 이때 일방적이라 하는 것은 공장 내부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안에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노동자계급이 처해저
있는 그곳의 이익만을 관철 할 때를 말하는 것이지 전평처럼
노동자뿐만 아니라 반파쇼민주주의 세력 등의 다른 부분과 함께
하면 노동자주의가 아닌 것이다.
질문: 노동자주의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공과의 관련 속에서의 문제이다.
문제는 바로 노동자의 협소한 이익만을 대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조합을 통해서 자신의 직접적 계급정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다. 거기에 발생하는 문제는,
노동자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어떠한 수단과 통로와 조직을
통해서 대변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다. 전통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노선 속에서는 노동자들은 바로 공산당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대변한다. 그들의 출신 자체를 문제삼으면 문제가
된다. 출신자체를 문제삼을 경우 맑스나 레닌 역시
부르주아다.
답변: 나의 이 발표문은 노동자들의 말 등을 무시하고 전부
조공의 입장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기존의 입장에 대한
문제제기적 성격을 하나의 측면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양적
문제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노동자들은 다수이고 단결해야 하며,
그것도 의식적으로 단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양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 최상위 권력수준이든 밑의 권력이든 다수당의
뒷받침이 필요한 것이다.
파리코뮨과 관련해 이야기하면, 계급적으로 노동자들이 다수니까
선거하면 당연히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 이해를 대변하는 사람을
찍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이런 문제들인 것이다. 여기서
양적문제와 질적문제의 갈림 및 구분문제가 생길 수 있겠지만
그래도 기본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다수라는 입장 속에서
다수를 어떻게 보다 많은 계급의식적인 다수로 묶는가의 문제가
중요하지 소수를 갖고 아무리 계급의식적으로 만들어봐도 다수를
계급의식적으로 만드는 것과 비교한 힘의 차이는 크다.
실질적 민주주의 문제에서,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의 내용만 갖고
있으면 다른 구분과 과정 절차는 무시해도 된다는 것의 문제가
지적되어야 한다. 현실 속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그런 것이
감지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좋을 때는 그것들을 다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너무 실질적 민주주의만 강조하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
질문: 그런데 용어 선택이 적절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뽑아주지는 않았지만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라는 의미는 상당히 정치해야할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또한 그것이 실질적 민주주의였느냐의
문제도 있다.
답변: 그것은 전평이라는 계급조직 안에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과 연결시키기 이전에 전평조직 내에서의 절차와 실질이
결합되는 것의 문제를 봐야 한다.
질문: 파리꼬뮨의 예를 드셨는데, 파리코뮨 내에서
부르주아지들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민주주의, 그게 말씀하신대로 보통선거가 더 내용을 찾은
선거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질서가
가지고 있는 억압적 체제가 분쇄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것을
빼고 말하는 경우 선거만 하면 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물론 뒷
부분만 이야기하면 선거만 폐지하면 될 것 같은 반대편향도 생길
수 있다.
답변: 제가 생각하기에는 맑스는 부르주아적인 질서가
타파되어서 실질 민주주의 단계를 쟁취하기 이전에, 권력을
장악하는 방식 속에서 아직 부르주아지들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피티독재가
완전히 실시되는 시기에 있어서의 보통선거가 아닌, 피티독재로
가기 위한 과정 속에서도 맑스는 보통선거를 생각하지 않았던가
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다수가
노동자대중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민주주의 선거는 다수결이니까,
단순히 생각해서 투표를 통해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장악
방식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와 관련해서, 물론 노동자들을 실제로 정치
주체로서 참여시키기 위한 방법 중 직접민주주의에는 선거 등도
있겠지만 집회나 시위도 포함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며, 이런
부분들을 권력장악의 방식으로서 활용을 해야 되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10월 파업에서 보여지듯 대중들은 앞서가는데 이
부분을 자꾸만 억압하는 방식으로 가면서 직접민주주의와
괴리되는 부분이 생겼다.
답변: 한편 파업권을 제도적으로 명시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는 차이가 많은데 일단 북한에는 파업권이 없다. 북쪽
노동자들이 46년 이후에 일제시대에 비해 상당히 좋아졌던 것은
사실일텐데,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는 파업권 같은 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폭이 좁은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융통성 있게 법적으로 파업을 보장을
해주는 것이 올바르다. 그리고나서 실지로 파업 할 거리가
없으면 파업을 안 하는 것은 가능할 텐데, 법적으로 조항 자체를
두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현상을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의 차별성을 근거로 들어 합리화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질문: 그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파업이라는 것이
어떠한 생산관계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냐가 문제다.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관계 속에서 파업이 상정될 수 있을텐데, 그쪽의
현실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그쪽에서
표명하는 바로는 그쪽의 생산관계가 자본-임노동 관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파업권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 상황과 유리되어 있을
가능성까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업권이라는 형식적 법적
논리를 가지고서 이 부분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답변: 북조선의 생산관계가 당시 자본주의성을 가지고 있었고
완전히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본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일정하게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영국의 일부
사회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북한이 국가자본주의라는 관점도
있다. 당시 북조선에서의 양심적 민족자본가라는 부분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등의 문제는 사회성격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며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질문: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발제문 속에서 당시의
전선조직과 전평과의 관계 속에서 주도성의 문제와 중심성의
문제가 약간 혼재되어 있다고 본다. 발표문 속에서는,
전선조직에서는 전평의 대표자들이 몇명 들어가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머리수의 문제만으로 중심성이나
주도성의 문제를 판가름 할 수 있는가? 어떤 지역에 따라서는
전평이 발달하지 못하고 조공이 발달했을 때 그곳에서 형성되는
전선조직은 조공을 중심으로 한 전선운동으로 발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주도성의 문제를 분명하게
판가름 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 반면에 주도성의 문제와는
다르게 중심성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전평이면 전평, 조공이면
조공, 어느 한 주체만의 경향성문제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의 전체 운동상황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중심성을
고수하는 것 또한 힘의 관계의 변화에 따라 중심성의 형태와
내용이 바뀔 수 있는 것이지 그게 과연 주도성과 중심성의
문제로 같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답변: 주도성과 중심성의 문제에 관련한 차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주도성은 헤게모니적 성격이 있는 것 같고 힘을
외부로 뻗쳐낸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중심성은 외부를
자기입장으로 흡수하는 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사실 조금 헷갈린다.
당시 헤게모니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류라든지
중심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주류와 중심은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요새식으로 말하면 헤게모니가 될 것이다.
당시 맑스, 레닌, 스탈린 등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람시 이야기는 그 당시에 없었다.
질문: 지금 조공과 전평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이 대상도 다르고
조직원리도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발제를 들으면서 배운 부분이다. 그런데 크게 보면
전평이 독자적으로 갈려고 하는 노력도 있었고, 전평이 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중에 총노선의 문제, 어떤 면에서는
조공에서 박헌영 노선(8월테제)에서 표현되고 있는 2단계
혁명론, 인민전선론을 크게 보면 채택을 한 속에서의 여러 가지
주장을 하고 있다. 위의 질문과는 좀 다른 맥락에서 2단계
혁명론과 인민전선론의 총노선 자체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해야하지 않는가 한다. 시기구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시기구분해야할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고
이는 역사학자들이 해야할 과제라고 보지만 분명한 것은
미군정에 대한 문제, 우익세력에 대한 문제 등이 그 당시 초기에
생각했던 것하고 달리 여러 가지 인민전선, 2단계 혁명,
말하자면 소비에트 중심으로 나왔던 그런 입장들이 그 당시
우리나라의 노동자 정치, 또는 좌파정치에 있어서 미군정과
이승만 우익정권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흐리게 한 측면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초기에는 같이 갈 수 있는 것으로 봤다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로
된다. 그런 속에서 볼 때 인민전선론이나 2단계 혁명론을 다시
한번 봐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답변: 전평의 총노선은 박헌영의 8월테제에서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후 정치세력들의 입장이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는데, 8월테제의 총노선이 반노동자적이라고 한다면은 반대를
해야겠지만 친노동자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노선은 비슷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 질문은 전평과 조공 내지는 남로당이 모두 한몸이다,
아니면 다른 몸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총노선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에 관한 것이다.
답변: 이 부분도 사회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및 주체적인
욕구와 관련되는 문제인데, 사회성격이 아무리 요즘처럼
물질적으로 사회주의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풍부한 조건이어도
노동자들의 주관적인 욕구가 거기까지 가있지 않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질문: 전평사람들이 박헌영의 8월테제를 보고 저건 우리랑 맞네,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부에서도 뭔가
있었느냐는 문제가 있고, 토론이 있고 갑론을박이 있었다면 저게
우리랑 맞다 안 맞다 혹은 대등하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역사 속에서 그냥 8월테제 노선을 접수한 것을
유추해서 해석한다면 그것은 양방이 다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답변: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 철저한 민주주의 토론을 했느냐
하는 점, 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노선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일제시대부터 계속 조공이 활동해온 과정
속에서 계속 이런 문제들이 연결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노선에 대한 일정부분의 토론은 존재했고 따라서 이 부분이 굳이
논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그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
논쟁을 충분히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수의 노선은 이
부분을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PT노선을 주장하는 부분도
있었다.
전평준비위가 운동하는 과정 속에서도 산업별 노조의 조직형태에
입각한 정치적인 노동자 단일대오를 만든다는 조직적인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다 했다. 그러나 강령 문제 등에
대해서는 합의를 다 하지 못했다. 당시에 다수들은 재건파
조공의 정치노선, 특히 그 중에서도 반파쇼 민족통일노선을
지지했다. 대립적인 논점을 형성할 수 있는 주객관적인 조건이
없었다. 장안파도 처음에는 의견이 달랐지만 나중에는 그쪽으로
다 갔었다. 논란의 여지가 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수십년간의
자본가, 자본주의국가라는 세력에 대한 반대라는 대전제
하에서의 공통성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안되고
오히려 조직운영 과정 속에서의 민주주의 부분에 대해서 많은
갈등을 가지는 것이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2단계 혁명론 등은
그다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
전평도 그 대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또, 조공과 전평의 노선 관련해서 보면, 제2차 전국대회를
열지만 결성 당시의 노선과 변화는 없는 것 같다. 45년 7월과
47년 사이에는 객관적 조건이 변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변화를
노선상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총노선에
집착해서 확대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못보는 것은 문제일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