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제106호 이전)

현장에서 미래를 > 특집 > 목록보기 > 글읽기

 
미 제국주의 보복전쟁과 동남아시아

현장에서 미래를  제72호
사사키 타쯔오(佐木辰夫)

특집(이현).hwp 특집(이현).hwp(43 KB)


미 제국주의 보복전쟁과 동남아시아*
사사키 타쯔오(佐々木辰夫)

* 이번 호 특집 “전쟁” 중 아프가니스탄에 관련해서는 ꡔ思想運動ꡕ에 실린 사사키 타쯔오의 글을 번역해서 싣습니다. 연재는 총 5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2회분은 2002년 1월호 국제노동에 실릴 예정입니다. 이번 호에 실린 부분은 ꡔ思想運動ꡕ 2001년 10월 1일자, 10월 15일자, 11월 1일자에 연재된 부분입니다.




1. 아프간 지배구조의 변천과 미 제국주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포함하는 아시아 남서부 및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른바 미국의 동시다발테러사건 이후 급속한 격변을 겪고있다. 현재 한시도 눈을 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 대하여 언급하려 한다. 다만 독자에게 미리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글에서 아프가니스탄을 다룬다고 할 때 미국 정부가 현재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하여 그를 고립시키기 위한 아프가니스탄에의 군사행동을 전개하려는 것에 대해 필자는 명확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9월 하순 미국과 그 동조국들 중 아프가니스탄의 북부동맹에의 공공연한 지지와 이 세력의 탈레반에 대한 반격의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다. 도대체 북부동맹이란 무엇인가? 이는 탈레반과 어떠한 관계인가?

아프간의 20년
아프가니스탄의 8~90년대를 간략하게 검토해보자. 1978년 아프가니스탄 인민은 ‘4월 혁명’에 봉기하여 다우드 정권을 타도한 후 혁명정권을 수립하고 반제, 반봉건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한편 소련은 그 혁명을 옹호하고 반혁명세력을 격퇴하기 위하여 군사지원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85년부터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의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유엔의 쥬네브협정’을 받아들여 89년 전면 철수하였다. 당시 인민민주당의 나지브라 정권은 소련 퇴각 후에도 3년간 미국, 파키스탄, 중국 등이 지원하는 반혁명세력의 공세를 견뎌냈으나 92년 마침내 굴복하게 된다.

6파연합의 형성
이 시기 무자헤딘의 육파연합체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육파는 73년의 궁정혁명에 반대한 왕당파와 반다우드 이슬람원리주의 및 그 흐름을 이어받은 반소이슬람 전사로 성장해온 이들이다. 그 주요한 구성조직은 다음과 같다.

브루하누딘․라바니(이슬람협회, 수니파, 타지크 인)
그루브딘․헤크마타르(이슬람당, 수니파, 파슈톤 인)
스이프가드․무자디디(민족해방전선, 수니파, 파슈톤 인)
하리리(이슬람통일당, 시아파, 하자라 인) 등

이러한 6파연합은 92년이래 무자헤딘 내각을 구성하여 유엔에 참가하는 동시에 피로서 피를 씻는 내부항쟁을 지속하여 결코 화해를 이루지 못했다. 무장파벌은 각각이 근거하는 민족의 경계를 지키는 것에 집착하여 아프가니스탄 인민 전체의 이익 등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94년 경부터 무자헤딘의 부패한 상황을 보아온 젊은 신학생들 사이에서 사회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현재의 이른바 탈레반이다.

탈레반이란
아하메드 라시드는 자신의 저서 ꡔ탈레반ꡕ(일역본은 講談社에서 간행)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찍이 이상화된 무자헤딘 지도자들의 파벌주의와 범죄행위에 크게 환멸을 느껴온 이들 탈레반은 자신들을 타락한 게릴라전쟁, 부정한 사회시스템, 부패에 타협한 이슬람 생활 등을 청산하고 순화하는 자로서 본다. 그들 대부분은 파키스탄의 난민수용소에서 태어나 파키스탄의 마도라사(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무자헤딘의 각 정파로부터 전투기술을 배워왔다 …”

이들 탈레반은 곧, 무자헤딘, 다시 말해 그들의 선배이며, 스승으로서 숭배하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에게 총구를 겨눠, 96년 카불을 점령하여 국명을 ‘아프가니스탄 수장국’으로 바꾸었다. 당초 국민들은 무자헤딘의 행적과 비교하여 탈레반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공개처형, 여성의 생활과 권리에 대한 엄중한 제한, 오락의 금지, 남성의 머리를 늘어뜨리는 것 등의 강제 등, 이슬람 법의 엄격한 규제로 인해 국민들은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북부동맹의 형성
탈레반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자히딘 정권의 잔본부대를 북부방면으로 밀어붙였다. 올해 처음 탈레반은 지세가 험준한 바미안 협곡까지 진격하여 고대불교유적군을 파괴하는데 이르렀다. 북부지역으로 후퇴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총 면적의 10%도 안 되는 장소에 머무르고 있는 이전 자히딘 정권이 현재의 이른바 북부동맹이라 할 수 있다.
이 조직은 라바니 파(인도), 하리리 파(이란) 및 아프가니스탄․이슬람 운동 도스탐(러시아, 우즈베키스탄)으로 구성된다. 도스탐의 부대는 나지브라 정권의 민병조직이었으나 후에 배반하여 무자헤딘에 가담하였다.
이렇게 북부동맹을 구성하는 조직들은 92년이래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반탈레반으로 야합한 군사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맹은 탈레반에 비해 훨씬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떻게 공세로 돌아서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각각의 파벌, 무장집단을 미국과 연대한 지원국들이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지브라 정권 붕괴 후의 10년을 다시금 돌아보면 무자헤딘 6파는 서로 권력투쟁을 반복하다가 후배라 할 수 있는 탈레반으로부터 총공격을 받아왔다. 약체화된 북부동맹은 이제 그 여력을 짜내어 탈레반에 도전하고 있다.
그 10년의 전란은 주로 외국으로부터 무기지원을 받은 이슬람원리주의자전사들의 전쟁이었다. 더구나 전란으로 나날을 보낸 이러한 무장집단들―북부동맹은 물론 탈레반도 포함하여―은 아프간 인민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가져온 것인가?
중세적인 신권사상과 폭력지상주의에 기반한 통치는 아프간 인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어왔다. 이 세력들 중 누구를 지지하건, 그리고 누가 정권을 장악하건 간에 그것이 아프간 인민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할 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 당국자들은 빈 라덴을 체포할 뿐이며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 대한 위협 자체만으로도 이 나라에서는 국내, 국외에서 백만 혹은 2백만이라고도 말해지는 사람들이 난민이 되고 있다.
이 난민들로부터 또다시 ‘아프간 귀환병’ 혹은 ‘아프간 전사’가 배출되어 세계 각지에서 제2, 제3의 ‘알 카이다’를 만들게 될 뿐이다.

아프가니스탄 최근의 연표
1973 다우드에 의한 궁정혁명, 공화제 설치, 국왕 자비르 샤 국외추방, 왕정파 및 반다우드 이슬람 신학생 파키스탄으로 도주. 무자헤딘 결성.
1978 4월혁명.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수립.
1979 소련, 아프가니스탄에의 군사지원. 미 카터 대통령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코트.
1988 유엔,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체결.
1989 소련군 철수.
1992 아프간, 무자헤딘, 이슬람 동맹 나지브라 정권 타도.
1996 탈레반, 카불 탈취. ‘이프가니스탄 수장국’으로 개칭. 아프간 무자헤딘의 이슬람 동맹은 북부방면으로 후퇴, ‘북부동맹’으로서 탈레반에 저항.
1997 탈레반, 파슈톤 인 이외 소수민족 집단학살.
2001 탈레반, 파미얀 고대불교유적 파괴.
2001 9월 미국의 동시다발 폭탄테러 발생.


2. 아프간 4월 혁명의 의의를 되살리자
자비르 샤: 망령의 등장
10월 7일 미․영 양군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시작되었다. 이 군사작전의 전개에 의해 이 지역은 혼란에 빠지고, 파괴될 것이며 이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이 폐허와 시체 위에 포스트 탈레반 정권이 구상되고 있다. 그 중심인물에 구체제의 망령과 같은 인물, 모하메드 자비르 샤의 복권이 획책되고 있다. 도대체 이 자비르 샤라는 인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 이를 살펴봄과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의 반세기를 되돌아보기로 하자.
1933년 왕위에 오른 자비르 샤는, 왕관을 받으면서 제왕학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60년대에 이르러 서구화의 흐름과 함께 사회주의 국가들의 발전의 여파가 아프가니스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북쪽의 구소련령의 타슈켄트 시는 거대한 콤비나트를 건설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아시아․아프리카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진전하여 많은 지역이 독립하였다. 1960년대는 아프리카의 해로 불렸다. 자비르 샤 왕권, 파슈톤 족의 관습적, 봉건적인 부족장로 지배(지르가), 혹은 부족연합의 국가는 마침내 국제사회의 흐름에 일정하게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비르 샤는 64년, 입헌군주에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64년 헌법’은 전문 128조로 되어 있으며 첫 24조까지는 모두 왕권에 대한 조항이다. 예컨대 왕위, 섭정, 세습제, 왕족의 지배 등을 면면히 규정하였다. 인민의 권리는 어떠한 사항도 ‘법률이 정하고 있는 것에 따라’ 보장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체제 비판적인 정당, 예컨대 인민민주당 등은 70년대까지 비합법이었다(The Kabul Times Annual, 1970). 이 자비르 샤 왕권은 결국 시대착오적인 ‘절대왕정’에 지나지 않았다.

70년대: 전진하는 혁명세력
70년대에 들어서면 아프가니스탄 사회는 역동적인 변화를 달성한다. 71년과 72년 2년 연속의 흉작이 지속되어 각지에서 식량폭동, 노동쟁의, 수업 보이코트, 시위가 발생했다. 당시 카불대학에 재학 중이던 사사키 테쯔(佐々木撤)는 71년 대학 학생회 선거를 목격하였다. 그는 이 때의 주요한 정파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루크 파(인민의 뜻)과 파루참 파(깃발의 뜻), 후에 인민민주당으로 통합
이슬람 청년파(그루브딘-헤크마타르가 대표), 후에 이슬람 당을 결성하여 파키스탄에서 무자헤딘의 거점을 형성.
그는 이들을 ‘전학련(全學連) 3파’로 부르고 있다.
(ꡔアフカニスタン革命ꡕ, 十月社 발행)

또한 당시 카불대 신학교 강사였던 부르하누딘 라바니는 이슬람 연맹을 결성하여 헤크마타르 등과 함께 무자헤딘을 결성하여 아프가니스탄 반혁명의 선봉이 된다.
73년 7월 자비르샤의 사촌인 모하메드 다우드는 아프간 인민의 반왕정운동의 상승을 타고 입헌군주제의 타도와 공화제를 강요했다. 이러한 다우드는 당시 대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파루참 파의 칼마르는 당원을 공화국정부에 요직으로 보냈다. 이때 전 재일 아프가니스탄 대사였던 무차는 정보부장관으로 기용되었다.
쿠데타 발생시의 다우드의 라디오 방송과 기자회견을 살펴보면 자비르 샤 왕정지배의 마지막 10년간, 즉 입헌군주제 하의 왕의 집정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으로써 자신의 정변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민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길이 잘못된 민주주의로 변질되어 입헌군주제는 독재정권이 되었다. 불의, 음모, 기만, 위선이 횡행하고 특권계급의 이익이 확대되었다. 국민은 비참, 빈곤, 재난에 빠져 고난에 빠져있다. 타락, 부파한 정권이 이를 허용해온 것이다.”
(The Afganistan Republic Annual, 1974)

그러나 이러한 다우드 정권의 정책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토지개혁을 어떻게 실행하였는가? 이는 우선 ‘정부가 소유한 토지를 무토지 농민에게 적당한 조건으로 분배한다’로 알려졌다. 그러나 다우드 정권은 봉건적 토지소유자(‘쟈민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기자회견에서 다우드는 ‘구왕족의 신분과 재산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이 나라에서 생활을 보장받을 것이며 달리 처벌받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바꿔 말하면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토지 소유자인 왕족들의 토지를 온존시키면서 그들의 토지는 단 한 평도 무토지 농민에게 분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다우드 정권으로부터 균점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70년대 후반이 되면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가 심화되고 74, 75년 공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프간 경제수준을 어떻게 유지하고 향상시켜 나갈 것인가? 이에 대해 ‘근대주의자’ 다우드는 인접국가인 이란의 팔레비로부터 경제개발계획을 받아들였다. 그 계획이란 10월 사회주의 혁명이래 소비에트와의 제휴 속에서 진행되어온 경제기반(infrastructure)의 정비를 미국의 ‘그랜드디자인’과 이란의 오일달러로 교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계획 위에 진행된 ‘백색혁명․근대화정책’에 대해 노동자, 지식인,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은 날로 증대되었다. 하르쿠와 파르참 파는 통합하여 인민민주당을 결성했다. 78년 봄 이 당의 유능한 활동가 하이발이 다우드 정권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그 때 인민민주당은 이대로는 당의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아프간 민주주의 운동이 크게 후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침내 78년 4월(‘사우르’), 타라키, 칼마르, 아민 등이 중심이 된 인민민주당의 지도 하에 민족민주혁명이 수행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근로인민의 전위당인 인민민주당의 지도를 바탕으로 군사혁명평의회가 ‘절반왕정’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4월 혁명, 그 내용과 평가
먼저, 이 혁명이 처음 내렸던 포고를 살펴보자.

포고 1, 혁명을 수행한 군사평의회를 혁명평의회에 흡수, 합병한다. 이 평의회 및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수립이야말로 아프간에 있어 역사상 처음으로 창출된 ‘가장 민주적인 정체(政體)’이다. 그것은 또한 기존의 권력과 정치기구를 배제한 ‘가장 값이 싸게 먹히는(역주: 즉 착취하지 않는) 정부’이다.
포고 2, 혁명정권의 조각
포고 3, 민주적 법제도의 창출
포고 4,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 및 민족문화의 도입
포고 5, 시민권의 보장
포고 6, 8, 가장 수탈당한 농민의 해방. 농민에 토지를 분배, 토지소유자는 30 제리브(1제리브는 약 2헥타아르) 이상의 소유금지
포고 7, 남녀동권, 가부장제의 폐지, 결혼결납제(結婚結納制: ‘도우리’)의 개선 등, 이하 생략
(Democratic Republic of Afganistan Annual, 1979)

독자들은 분명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혁명정권의 지향한 것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강령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으로 나타났는가를 여기서 상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8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알기 위한 모임’ 등 처음으로 우호방문단과 유지들이 종종 현지를 방문한 방문보고와 증언, 영상 등이 남아있다. 그것들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면 당시의 아프가니스탄은 명실상부하게 민족민주혁명이 실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제 갓 성립된 혁명의 성장과정 상에서 약점과 오류가 존재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도 여기서 자세히 서술하기는 어렵다.
이 혁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다음의 관점에서 냉정히 그러나 능동적으로 이를 살펴보고 싶다.
아프간 인민은 19세기 말 영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처음으로,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는 독립전쟁을 치뤄 모두 승리했다. 그리고 쟈비르 샤의 ‘절대왕정’과 다우드의 반봉건․반군주․매판정치에 대한 투쟁 끝에 도달한 지점이 4월 혁명이었다.
즉 아프간 인민의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그것은 필연적이며 불가역적인 혁명이었다. 그것은 또한 세계인민의 투쟁에 합류하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투쟁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 혁명은 인민이 스스로의 운명과 삶을 결정하고, 결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인민주권을 보장하는 정체를 인민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 혁명은 문자 그대로 민족민주혁명이었던 것이다.


3.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파슈톤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연일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에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다. 일반시민들의 희생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한편, 포스트 탈레반 정부구성을 둘러싸고 어지러운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필자는 그러한 여러 가지로 나오고 있는 방안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인접해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서 그 복잡한 양국의 현실을 규정하는 요인들을 살펴보려 한다.
영국식민주의의 유산
19세기 처음으로 몇 개의 번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 아대륙(亞大陸)을 지배 하에 두고 서쪽방면의 아프가니스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였다. 같은 시기 러시아의 짜르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여 이란, 아프간에 촉수를 뻗치려 노리고 있었다. 이란과 아프간을 노린 영국과 러시아의 야망과 정략은 ‘그레이드 게임’(grade game)으로 불렸다. 영국은 세포이(인도용병) 부대를 동원하여 인도 측으로부터 아프간에의 침략을 시작했다. 아프간인, 주로 파슈톤인은 전력을 다해 이에 대해 반격하였다. 이를 반영아프간 독립전쟁이라 부른다. 이는 제1차 1839~42, 제2차 1878~79 및 1919년의 제3차 등 세 차례에 걸쳐 약 백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대영제국은 후진지역이었던 파슈톤인의 민족주의에 굴복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 것이다(Kabul New Times, 86년 2월 16일자, ‘카이발 고개의 사건들’). 이러한 파슈톤 반제 민족주의의 영광과 명예는 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침내 영국은 재인도 영국관리 모티마 듀란드로 하여금 아프간 왕과 영국령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국경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듀란드 라인’이며 현재 파키스탄과의 국경으로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아프간인, 즉 파슈톤인과 파크도니스탄인은 어떠한 논의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를 승인하지 않고 국경선철거 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또한 양국의 유목민과 대상(隊商=caravan)은 국경을 무시하고 왕래하여 왔다(大野盛雄 著, ꡔアフカニスタンの農村からꡕ).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후
영국령 인도의 인민은 오랜 반영독립운동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1947년 바로 그 해 인도,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이라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물론 영국 식민주의의 ‘분리통치’ 정책이 주요한 요인이었으나, 1930년대의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이슬람 건국운동으로부터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처럼 파키스탄의 건국되는 시기, 그 듀란드 라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했다. 더욱이 그 국경 양측에 있는 파슈톤, 파크도니스탄인의 지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파키스탄 태생의 파슈톤인인 칸-아브도르-카파르-칸(1890년 생)은 양국정부에 대해서 파슈톤 국가창설과 듀란드 라인의 불승인을 요구했다. 당시 파키스탄 측에는 전인구의 15%, 아프가니스탄에는 40%에 이르는 파슈톤이 있었다. 이 비율은 오늘날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카파르-칸의 기본적인 발상은 인도 아대륙(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을 각각 민족, 언어를 단위로 하는 주가 아닌 국가로서 수립하여 다시 이를 하나의 연방국가로 묶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하자라, 타지크, 우즈벡 등의 소수민족 및 부족도 각각 자치권을 갖는 아프가니스탄 국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카파르-칸의 구상은 민족자치구․민족공화국을 포함하는 소연방의 구성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현재 인도에서는 독립 후 언어 교육규칙(敎則)을 만들고 있다. 인도 아대륙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국제주의를 지향한 칸의 웅대하고 합리적인 구상은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슬람의 경건한 신자였던 그는 정치에 종교를 개입시키지 않는 세속주의와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여 양국을 오가며 몇 번씩이나 체포되었다. 그는 만년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에 거주하여 88년 사망하였다. 이때 99세였다.

무자헤딘 후의 파슈톤인
필자는 지금까지 양국관계를 파슈톤의 반영․애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관계를 한층 복잡하고 위험한 것으로 만들어 온 것은 이슬람화운동으로 정치에 종교가 개입하는 제정일치의 보수반동화이다. 더구나 이러한 이슬람화의 흐름은 급속히 변화하여 파슈톤 민족주의를 변질시켜갔다. 이제 이 점을 간략히 살펴보자.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방글라데시에 거점을 둔 파키스탄의 쥬드 자본은 발전경로가 봉쇄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 세계공황과 유가인상 등으로 파키스탄의 면방직업을 위시한 민족자본은 정체하게 되었다. 즈루히갈 부토 정권의 부패와 행정비효율에 분노하고 있던 지아울 하크는 77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이슬람화 정책을 위로부터 도입하였다. 전수상 부토 처형으로부터 시작된 하크 군사정권의 이슬람적 국가테러는 파키스탄에서 민주주의 운동을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이어 79년 말 아프간 반소․이슬람 원리주의와 반체제 보수성향의 파슈톤 종족 장로가 지도하는 난민들이 파키스탄 북서접경 주에 피난하여 왔다. 지아울 하크, 그리고 이어지는 즈루히갈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 정권은 미국, 서독, 중국 등으로부터 자본, 무기 및 정보수단을 대량으로 공급받았다. 이때 설치된 파키스탄 군정보국(ISI)은 CIA의 사업방식을 본떠 아프간 지하드의 사령부 겸 병참부가 되었다. 100만 혹은 200만이라고도 말해지는 아프간 난민은 듀란드 라인 인근의 양 국경지역에 모여들었다. 80년대의 난민들을 구분해보면, 아프간 동부(주로 파슈톤인), 서쪽의 이란(이란계 하자라인)의 흐름이 있다. 북부의 타지크, 투르크멘의 난민 수는 소규모였으며 있다고 해도 구소련령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마자르이샤리프 시 이북의 도스탐 장군은 민주공화국의 일부로서 그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파키스탄령으로 피난한 파슈톤 난민이 도착하는 곳은 북서접경주였으며, 여기에는 8개의 파슈톤 민족자치구가 있다.

파슈톤 민족자치구
이 자치구는 듀란드 라인 확정 시기부터 주민의 저항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해방구였다. 영국에 대해서도, 파키스탄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일종의 대리구(代理區)가 되어 실질적으로는 최고위의 족장이 지배한다. 중앙정부의 시책 중 도로건설, 복지 관련 정책은 수용하지만, 경찰 및 세무서의 설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족지구’(Tribal Area)인 것이다(土屋六郞, 「アフガン ノ-ト」, ꡔアジア․レブュ-ꡕ, 78년 1호).
수도 페샤와르는 자치구의 교류센터이다. 이 지역 일대를 유랑하던 파슈톤 난민 중에서 80년대 무자헤딘의 예비군이, 나아가 90년대에는 탈레반의 전사들이 생겨났다. 탈레반은 이 자치구를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심지어 이 자치구를 통해 파키스탄 중앙정부의 정국을 뒤흔들어온 ISI를 온존시켜 온 것도 탈레반의 전략이었다.
또한 이 자치구의 파슈톤 주민 및 난민이 파키스탄에 있어 최대의 반미, 반무샤라프, 친탈레반 운동의 중심이 되어왔다. 한편 무샤라프 군사정권은 건국이래 최대 숙원인 이 자치구를 통제하는 문제를 놓고 애를 먹고 있다. 이는 정권의 존망과도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당분간 양국관계는 파슈톤 민족주의를 표현하는 이 자치구를 축으로 하는 동향에 규정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장기적인 시야에서 보면, 이는 파키스탄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국제금융자본, 다국적기업에 어떻게 대응해 가는가 하는 발전도상국 공통의 과제에 회귀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이에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다음 호에 계속) 한/노/정/연



번역: 이현(연구원, 연구기획실)

2001-12-10 00:00:00

의견글쓰기 프린트하기 메일로 돌려보기
이 글에 대한 의견보기  다른글 의견보기
아직 올라온 의견글이 없습니다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구)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0-272) 서울시 중구 필동2가 128-11 상전빌딩 301호   Tel.(02)2277-7957(팩스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