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외교정책과 사회민주당의 움직임에 대하여
송 태 수/연구위원
제국주의 침략자가 된 소위 좌파정권
1. 들어가는 말
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 9월 23일, 독일 베를린의
사회민주당(SPD: 사민당)은 ‘9․11 사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으며, 그 한 달 후 치러진 선거에서 예상대로 통일 후
가장 좋은 선거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9․11 이전의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민당은 기독민주당(CDU: 기민당)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29%정도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9․11 이후 차이는 급격하게 벌어져, 기민당 지지율은
27%로 떨어진 반면 사민당은 33%로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으며,
민주사회주의당(PDS: 민사당)에 대한 지지도 9․11
전(21%)에 비해 17%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사민당에
대한 지지의 급상승 이면에는 9․11 이후의 사민당의
대응이 작용하고 있었다.
사민당 고위관료 페터 스트룩(P. Struck)은 ‘9․11 사건’
하루 후인 지난 9월 12일 “오늘 우리 모두는 미국인이다”라고
입을 열더니, 슈뢰더(사민당) 수상은 입만 열면 “우리의
문명세계”에 대한 테러․공격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러한 반응은 계속 고조되어 마침내 11월 초에는
아프가니스탄에 군병력을 투입하겠다고 나섰다.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녹색당의 지도부 14명이 병력투입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히고 나서자, 그렇다면 녹색당과의 연립정부에 연연하지 않고
아프가니스탄 파병문제를 내각에 대한 불신임 투표와
연결하겠다고 하며 녹색당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강요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했었다. 당 지도부를 위시해서 외부로
드러나는 사민당 슈뢰더 수상 정부의 정책은 그야말로 보수
기민당과 아무런 차별성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본에서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의 이른바 ‘베를린 공화국’
독일의 사민당의 외교정책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이를 위해 먼저
독일 전후 외교정책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독일 외교정책의 변화: ‘억제’에서 ‘정상화’에의 적극적
노력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역사를 가진 전후 독일의
외교정책은 ‘억제’에 입각한 외교정책으로 특징지워졌었다.
물론 이러한 ‘억제’ 노선 외에 다른 한 축으로 ‘정상화’를
추구하는 노선이 갈등관계에 있는 외교정책이었다. 1990년 2월
13일 오타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외상회의에서
독일통일협상을 위해 동서독과
영국․프랑스․소련․미국의 4대 강국이
참여하는 2+4회담을 진행하기로 합의한 후, 같은 해 9월 12일
소련의 고르바초프와의 회담 후 양국간 최종조약에 서명되었고,
다른 한편 유럽연합에 독일을 결속시키고 독일 마르크화를
약화시켜 독일경제의 패권을 약화시키려는 서방국들의 기획이
담겨진 유럽연합프로젝트 속에서 NATO에 잔존한다는 것을
서방국들에게 재확인시킴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독일의 통일은 이전까지의 억제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주변국들이 받아들인 후에 이뤄진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억제’에 입각한 독일의 이러한 외교정책은 통일
이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경제적
거인’이면서 ‘정치적 난쟁이’이던 독일에게 통일은 과거
연합국이 가지고 있던 유보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고,
독일은 완전한 주권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좌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수적 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는 더 이상
과거를 고려하지 않고 독일인들에게 민족적 자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정상화된 외교정책을 추진할 기회로 인식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서유럽과 동유럽의 중간에 위치한 독일은 경제력과
문화적․언어적 영향력을 등에 업고 동유럽국가들에게 다시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면서
거대한 판매시장과 투자대상 지역이 된 동유럽 국가들과 현재
긴밀한 경제협력을 유지하고 있고 또 이들의 유럽연합 가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독일은 최전방의
단순한 ‘안보 소비자’에서 유럽안보의 주요 ‘생산자’로
변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비록 좌절되었지만 독일이
유엔에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되려는 노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제연합의 평화유지 임무수행에서 보다 커다란
책임을 맡는다는 명분으로 독일은 연방군의 해외개입을 점차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국력에 입각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의 변화는 통일 이후
발칸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91년 12월
독일 보수당 콜 정부는 크로아티아와 그 지도자인 투지만(F.
Tudjman)을 독일 외교정책의 하수인 정도로 간주하고 성급하게
크로아티아를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과
유고슬라비아회의 의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전의 관계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독일 내 보수세력의 압력을 추종해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성급한 승인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유럽연합국가들에게 압력을 가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승인하도록 했다. 이는 주변 강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전후 최초의 사건으로,
기민당의 드레스덴 당대회에서 콜은 ‘독일 정치 최대의
성과’로 선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일 콜 정부의 성급한
국가이기적 행위로 인해 유고 사태는 급속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상화된 외교에 대한 요구는 서서히 가시화하는 속에도
독일의 외교정책은 서구에의 통합과 범대서양 안보체제에의
편입을 기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외교정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이러한 연속성 속의 변화의 계기는 특히 전후
세대로서 최초로 집권한 적녹연정이 출범하면서 보다 더
부각되고 있다.
3. 독일 사민당․녹색당 적녹연립정부의 코소보 전투부대
파병
독일은 1999년 3~6월 사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에 참여하였고 국제평화유지군(KFOR)의 일원으로
코소보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코소보지역에 전투부대의 파병 결정은 보수 연정이 아닌 과거에
평화운동을 벌이던 사민당과 녹색당으로 구성된 적녹연립정부가
주도해서 이뤄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독일이
국외지역에 전투병력을 파견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적지 않은
논란을 초래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결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됐던 것은 독일 사민당의 국력에
걸맞는 외교의 ‘정상화’를 추구하는 노력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본적으로 유럽 속의 독일 정책을 유지한다고
표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경제적
힘에 걸맞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특히
사민당은 유럽연합 내에서 최대를 차지하는 경제력의 바탕
위에서 유럽 내 좌파정권 간의 정책적 협조관계를 강화해 독일의
정치적 위상을 제고하려 하고 있다. 슈뢰더는 대외적
안보협력관계 유지에 있어서 미국이 유럽에 비해 우월하지
않으며 대등한 동반자관계를 형성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NATO
중심의 유럽안보체제 건설을 희망하는 미국과 견해차를
노정했다. 슈뢰더는 유럽 차원의 안보기구인
‘서유럽동맹’(WEU)을 유럽연합 안에 통합시켜 유럽연합을
외교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공동체로 발전시키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외무장관 피셔(녹색당)도 유럽연합
외무장관회의에서 유럽이 위기관리를 위해 군사력을 포함한
적절한 능력과 구조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독자적인
군사기구의 설립을 제의하기도 했었다. 즉 독일의 적녹연정은
서유럽동맹의 역할회복을 통해 유럽의 NATO로부터의 군사적
자립화, 그리고 이러한 유럽 내 독일의 군사적 지위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독자외교의 강화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으로는 사민당과
녹색당 연립정부 구성원들이 전후 세대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들은 이전의 콜 정권 담당자들과 달리 대량학살과
전쟁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조건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과거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현상은 사민당에 두드러진데, 예를 들어 슈뢰더는
이러한 점을 ‘전후 세대가 독일의 외교정책을 과거에 소급해서
정의해서는 안 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등의 방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이들은 ‘성인이 된 국민의 자의식’을
강조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국익에 기초한 외교정책을 펼치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 열세로 인해 미국으로부터의 자립이 요원한
상태에서 여전히 미국의 보호우산을 필요로 하고 있는 독일의
사민당은 NATO가 유지하는 평화유지군에 적극 참여하는 쪽으로
결정했으며, 발칸 지역에서의 서방국가간 갈등확산이 국제적
질서정책구조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에 코소보
전쟁에 적극 개입했다는 우호적인 평가도 있으나, 이러한 평가는
궁색한 자기변명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사민당 당수직과 재무장관직을 사임한 라퐁텐(O. Lafontaine)의
지적처럼 유고공습은 목표와 계획은 물론 일관된 전략도 없는
패권적 공격이었다. 동시에 유엔헌장에 준하여 행동하며,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NATO가
코소보전쟁에서 그런 의무를 등한시했으며, 과거의 입장에서
선회한 집권연정의 지도자들도 독일의 참전을 도덕적으로
과장․선전했다는 라퐁텐의 비판은 지극히 타당하다. 즉
“NATO가 공습하기 전까지 코소보에는 난민이 40만명, 사망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상황이 없었다면 유고 공습은 없었을
것이다”는 국방장관 샤핑(R. Scharping, 사민당 소속)의 주장과
달리, “NATO가 공습을 하기 전까지 코소보에 인권 상황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 상황은 아니었고 …
실제 위기는 NATO가 개입하면 시작될 것이라고 모두 믿고
있었다”는 미국의 코소보 정책 담당관 노마 브라운의 주장이
타당하다 하겠다. 독일 정부에서 비밀정보를 다루고 있는 한
관료가 편지에서 폭로한 바대로 코소보 전쟁에 파병하기까지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는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작은
집단이 그렇게 큰 다수를 이렇게 완벽하게 기만한 예는 코소보
전쟁이 처음”이라는 한 연구자의 주장이 나올 정도의 심각한
정보조작을 통해서 전쟁참여의 합리화를 위한 기만행위를
했었다. 이런 배후에는 유고연방을 해체하려는 NATO의 전략이
숨어 있었고, ‘정상화’된 외교정책에의 욕구에 휩싸인 독일
사민당은 NATO와 함께 이를 적극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ꡔ시사저널ꡕ).
4. 부시에 맞서는 ‘유럽식 NMD’ 구축을 향한 서구 사민당
독일은 과거 유산으로 인해 전후 ‘억제’에 의한 외교정책을
펼쳐 왔으나 그 이면에는 정상화된 외교에 대한 욕구가 잠재해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냉전 해체 이후 통일이 달성되면서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었다. 보수적인 정치집단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민당도 이러한 욕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국력에 걸맞는 정상화된 외교정책을 전개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코소보 전쟁에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행했고,
9․11 이후에는 녹색당으로 하여금 사민당의 이러한
정상화에의 지향 앞에 무릎을 꿇어주기를 강요하는 슈뢰더
정부의 외교정책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지난 5월 10일 독일공영 제1TV방송(ARD)이 방영한 시사분석
프로그램 ‘파노라마’는 독일 군부가 지금까지 1급 기밀로
묶어서 국회에서도 극소수 의원들만 알고 있다는 전략문서를
폭로하고, 이 전략문서의 핵심이 바로 미사일 방어체제(MD)와
직결되어 있다고 밝혔다 한다(ꡔ시사저널ꡕ).
그 중 대표적인 구상이 방공시스템을 현대화하고 독일에 이미
배치되어 있는 전투기 요격용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일부를
미사일 요격용으로 개량한다는 것이다. 한 분석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의 실현에 예상되는 소요자금은 250억 달러가
넘는다(1년 독일군 장비개선 자금 35억 달러). 미국이 MD 구축은
더 이상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실현하는가’가 문제일 뿐이라고 못박은 것이 올 2월 초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국제안보회의에서였는데, 이 때만 해도 독일
정부는 미사일방어체제가 러시아를 자극해서 긴장을 조성하고
핵군비 통제나 지역 정세에도 좋을 것이 없는 구상이라고
반대하고 있어, 독일과 미국 사이에 마찰이 있다는 보도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독일 정부는 왜 이런 이중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던가. 독일 정부의 발언을 자세히 추적해 보면
우선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한 달 전(2월 28일) 슈뢰더
총리는 “독일의 미사일 방어 참여를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독일 기업이 첨단기술개발흐름에서
밀려나지 않고 국제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미사일 방어 참여도
고려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의 진실 여부는 검증을
요한다 하겠다. 왜냐하면 1980년대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동맹국의 참여를 설득한 후 내세웠던 조건․약속(선의의
동반자 관계 보장 및 원활한 기술․정보교류)도 지켜지지
않았던 사실을 고려할 때, 슈뢰더 총리가 미국의 기술이전을
기대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슈뢰더가 이렇게 말을 바꾸어서 미사일방어 참여의
여지를 남겨 놓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유럽 스스로가 1980년대 초부터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역미사일방어(TMD)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안보전문가들의 말이 의미를 얻는다 하겠다. 이들에 따르면 전역
미사일 방어가 미사일 요격시스템과 우주군사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와 다를 바 없으며, 동서냉전이
끝난 뒤에는 서방의 군사투입작전과 맞물려 더 절박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즉 유고 전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서방은 그들을 위협하지 않는 주권국가도 공격하는 무력개입
전략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개입범위는
중동․아프리카․아시아를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서방의 위협을 느끼는 국가들이 자구책으로
미사일을 개발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면, 보수당과
사민당 가릴 필요 없이 서방국가들은 바로 이러한 자구책을
무력화하고 해외에 투입하는 군대를 보호하려고 미사일 방어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독일의 사민당에 제한하여 변화하는 외교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기실 앞에서 연역할 수 있는
결론은,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서유럽 거의 모든
사민당에 적용된다 하겠다. 미국과 유럽은 전지구적인
개입전략을 둘러싸고 물밑에서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미사일 방어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갈등은 유럽의
해외개입전략을 뒷받침하는 ‘유럽식 NMD’를 관철하려는
움직임에 다름 아니리라.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