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
* 이번 호 ‘국제노동’에는 지난 12월호 특집 “전쟁”에
번역하여 실렸던 사사키 타쯔오의 글 뒷 부분을 싣습니다. 이번
호에 실린 부분은 ꡔ思想運動ꡕ 2001년 11월
15일자, 12월 1일자에 연재된 부분입니다. 전체 글은 총
5회분으로 이번 게재로 완료입니다.
미제국주의 보복전쟁과 동남아시아(2)*
사사키 타쯔오(佐々木辰夫)
4. 아프가니스탄 4월 혁명의 특징: 소련 군사지원과 허위
캠페인(campaign)의 전개
1917년 10월 혁명은 주지하듯이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소비에트에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7년 당시 영국의 반보호령적인 취급에 안주하던 아프간의
아마누라-한 왕은 1919년 그러한 종속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영국의 식민주의 세력은 신속히 ‘소비에트의 남하’,
‘사회주의의 그림자’를 감지하고 군대를 급파했다. 윈스턴
처칠 육군 중위는 그러한 침략에 가담하여 험준한 카이발
고개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아프간 측은 이를 제3의
반영독립전쟁이라 부르며 즉각적으로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진입은 갓 탄생한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제국주의의 간섭전쟁, 일본에서는 시베리아 출병으로 불린
반혁명전쟁의 맥락에 있었다.
독립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민은 국왕에 대해 수 차례에 걸친
‘헌법운동’을 전개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왕에게 헌법제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이 이를 받아들여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의회를 개설하지 않자 의회개설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 또한 의회를 개설한 이후에도 왕이
의원을 국회에 소집하지 않자 소집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파상공세는 20년대로부터 70년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외에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은 농민의
부족적 토지소유 폐지를 요구하는 투쟁이 헌법운동과 결부되어
전개되었다. 이러한 투쟁 가운데 4월 혁명이 준비된
것이다(「바브라크 칼마르의 보고」,
ꡔ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전국협의회 기록ꡕ,
1982 참고).
4월 혁명의 성격
칼마르 인민민주당 서기장은 활동보고 속에서 그 혁명의 특징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것을 요약해보면, “첫째
아프가니스탄은 매우 후진적인 사회로
전봉건적(부족적)․봉건적 제관계가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부족의 장로에 의한 토지지배 하에서 부족민의
농업수입은 수확고의 10~20%에 불과하며 더구나 문맹률은 70년대
통계로 95%에 달했다. 둘째 “파슈톤, 타지크, 우즈벡 및 하자라
등 민족과 종족, 유목민이 거주하고 있다.” 셋째 “인민 내에는
이슬람교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며 교리의 이해를 다르게 하는
수니파와 시아파가 존재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매우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를 아프간 사회에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상황을 급진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반봉건적 성격을 가진 민주주의
혁명”(ꡔ당행동강령ꡕ)이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4월 혁명의 필연성이 있다.
일본공산당은 1970년 처음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아프가니스탄은 부족사회이기
때문에 인민민주당은 당내에 부족제 사회의 폐해를 반영시켜
당내논쟁에 휩싸여 조정이 불가능하다. 그러한 이유로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련군의 침공을 유도하고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무지와 기묘한 수사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가 하는 모든 일을 비난하려는
끝에 아프가니스탄 민족해방과 4월 혁명에 이르는 투쟁까지 소련
비판의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된 것이다.
공산당의 이러한 견해는 현실을 무시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분명 부족제는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1954년
아프가니스탄을 현지조사한 이와나미(岩波 忍)는 그의 책
ꡔ아프가니스탄 기행ꡕ의 여러 곳에서 전봉건적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당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부족제가 잔존하는 사회는 혁명주체의 형성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혁명의 수행이 불가능하다면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중앙 아시아(투르크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지역에서도 혁명은 관철되었던 것이 아닌가? 또한
공산당은 아프가니스탄 인민이 4월 혁명에 선행한 부르주아적
변혁의 운동을 실행해온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예컨대 전술한
1920년 이래의 ‘헌법운동’과 그와 함께 전개되어온 민주주의와
권리획득을 위한 투쟁은 광범위하게 아프가니스탄 사회를 개발,
계몽해왔던 것이다.
필자는 1983년 카불의 교외의 농촌에서 밭에서 양배추를
수확하고 있는 농민 일가에 질문을 던질 기회가 있었다. 이 밭은
20년 쯤 전에 인근의 지주로부터 유료로 입수한 것이었다. 당시
소작인들은 정부에 요구하여, 정부의 원조자금으로 연부(年賦)로
밭을 구입한 것이었다. 이는 명확히 봉건적 지주-소작
관계로부터 부르주아적 자작농제로의 이행이다. 이는 단지
일부의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선진지역에서는
이미 부족제 사회의 많은 잔존부분이 극복되어져 왔다.
미국, 파키스탄의 반혁명 간섭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사회주의 세력, 세계의 진보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그 60년
후의 아프가니스탄 혁명도 동일한 구도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일본공산당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요청으로
반혁명세력과 외국군사간섭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군사지원한
것을 ‘대국주의적 간섭’으로 비난한다. 당시 언론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군사 침공해왔기 때문에 반소 아프간 독립의
지하드가 발생했다”는 논리를 폈다. 결국 처음으로 소련의
‘침략’이다. 일본공산당도 이러한 캠페인에 동참하여 소련을
비난했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73년 다우드가 일으킨 궁정혁명에 대하여 그 이듬해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 원리주의 ‘동포’당이 반다우드 친왕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어 75년 판제셰르 협곡에 진을 친
그루브딘 헤크마티르 등의 이슬람 당이 반다우드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활동은 실패하여 파키스탄으로 도주했다.
이윽고 이들은 파키스탄과 미국 CIA의 지원을 받게된다. 후에
반혁명 게릴라가 되는 세력은 이미 4월 혁명 수년 전부터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태의 전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78년 4월 혁명 발생
79년 남부에서 원리주의 지하드가 시작됨, 아프간 반혁명 게릴라
발생
79년 12월 소련의 군사지원.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12월
성명은 소련의 군사진공을 비난하지만 원리주의자들과 CIA가
결탁하여 반혁명 아프간 게릴라를 육성해 온 사실은 철저히
은폐했다.
사태의 순서는 이상과 같은 것으로 언론이나 각종 캠페인이
허위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문제는 소연방이 해체하여 나지브라
정권이 붕괴한 후 10년 간이다. 반소전쟁에 승리한 무자헤딘,
그에 이른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엇을 했는가? 단지
살인과 파괴뿐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어떠한 인간적인 대의도
창조하지 않았다.
5. “탈레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에 아프간의
미래는 맡길 수 없다
무자헤딘이 지배한 5년간
북부동맹은 96년 탈레반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육파연합 무자헤딘
정권(이하 무자헤딘으로 부른다)의 일부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국내 정치세력은 당면한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북부동맹과
약간의 지방군벌이다. 보도에서는 유누스-하리스파가 잘랄라바드
및 장악하는 중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 하리스 파는 전
무자헤딘 내의 한 분파였던 그루브딘 헤크마티르의 이슬람
당으로부터 분열된 군단이다. 96년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할 때
하리스 파는 무자헤단으로부터 탈락했다. 또한 헤라토에서
탈레반 군을 대체했다고 말해지는 이스마일 한도 무자헤딘
시대의 그곳의 군벌이다. 지방에서 동시진행적으로 UN 그 이외의
기관 및 아프가니스탄 민족 제 단체가 아프간 정부구성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읽힐 즈음에는 상황은 이미
많이 변해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일단 북부동맹을
중심으로 (정부 구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즉 그들을 둘러싼
몇 가지 주어진 조건들에 대하여 검토해보고자 한다.
우선 첫째로 북부동맹의 전신인 무자헤딘의 통치능력에 대해
살펴보자. 전술한 대로 무자헤딘은 92년부터 5년 여,
아프가니스탄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 시기 그들은 무슨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본래 물과 기름과 같은 원리주의
집단과 보수반동적인 민족단체로 구성된 무자헤딘은 예상한대로
이데올로기, 이념, 정책 및 군사적인 측면에서 거의 일치하지
않았다. 이들은 인민의 일상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거의
무능했다. 그들 각파는 준동하여 다만 정권장악을 둘러싼 분쟁을
반복해왔을 뿐이었다. 예컨대 라바니 대통령파(이슬람 협회)와
헤크마티르.
수상파(이슬람당)의 투쟁은 최후까지 이어졌다. 결국 94년부터
시작된 탈레반의 강력한 포화로 라바니파는 북부로 도주하게
되고, 헤크마티르파는 둘로 분열하여 그 일부는 탈레반 측에
투항했다. 전술한 유누스-하리스파는 이때 파키스탄으로
도주했다.
무자헤딘 각 파는 이 전투에서 어떻게 싸웠던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차마 입으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잔학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싸웠다.
무자헤딘 집권시기 동안 인민들은 부분적으로는 각각의 지역에서
극히 한정적인 행정적인 편의를 받았으나 전체적으로는 행정이
당연히 보장해야 할 사회복지 및 그 이외의 편의를 전혀 누릴 수
없었다. 인민에게 무자헤딘 정권은 증오와 모욕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인민민주당 시기에 눈을 뜬 노동자계급의 시선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무자헤딘의
통치능력은 전무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신뢰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북부동맹을 구성하는 제 세력들은 누구인가
둘째로, 북부동맹을 구성하는 조직상의 문제를 살펴보자.
북부동맹은 다음의 세 단체로 구성된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운동, 라시드 도스탐 장군파로도 불린다.
아프간 전 인구의 약 10%, 200만명에 해당하는 소수민족,
우즈벡인 출신의 부족이다. 이들은 이슬람 교리를 축으로 결집한
것이 아니다. 그 성립과정을 보면, 먼저 북부의 군벌이었던
도스탐은 소련과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강화하였다. 소련 등은 아프간 반소 지하드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스탐에게 ‘검역지대’의 역할을 맡겨놓고
있었다(아마드 라시드, ꡔ탈레반ꡕ 참고). 소련
후퇴 후(89년) 그들은 반소 지하드 측에 전향했다.
라바니 파, 브루하누딘-라바니 당수. 인구의 1/4을 점하는
소수민족 타지크인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슬람 협회를
칭하며 헤크마티르의 이슬람 당과 함께 아프간 지하드의 가장
극단적이고 과격한 집단으로 불린다. 고 마스도, 더구나
탈레반의 최고지도자 오마르도 여기 속해있었다.
이슬람 통일당, 카림-하리리 당수, 시아파. 아프간 인구의 약
300~400만 정도에 해당하는 하자라 족으로 편성되어 있다.
시아파 신자도 아프가니스탄 무슬림 중에 소수이다.
이들 세 집단은 모두 소수민족 혹은 종족에 속해있다. 그들이
카불 남부 및 동부에 거주하는 대 파슈톤 민족에게 수용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칼마르 인민민주당
서기장은 “아프가니스탄 사회는 민족적인 다양성이 극히
불균형(multi and heterogeneity)하다”고 전국협의회(82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다수인 파슈톤인과 소수인 여러 종족 사이의
불평등과 대립은 그 뿌리가 깊다. 필자는 이전 영국에 망명한
아프간인의 “조국에 대한 심포지움”이라고 하는 TV 프로그램을
본적 있다. 처음 온화한 논의로 시작하였으나 이윽고 이민족
출신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또한 파슈톤인의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 및 우월감은 매우 강하다. 이와나미 씨는 그의 책
ꡔ아프가니스탄 기행ꡕ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소수민족이 결집한 집단인 북부동맹 자신이 먼저 결속하는 것,
그리고 불균질한 민족감정을 조화시키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북부동맹의 외국세력에 대한 종속적인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북부동맹은 그 전신인 지하드 시기 “일체 외국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전하면서 미국,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및 중국 등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았다. 75년부터
시작된 반 다우드, 반소 지하드 전쟁에서 이들은 약 백억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이번에도 탈레반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공습의 엄호를 받았으며, 더구나
주변국들로부터 거액의 원조를 받고 있다. 국토의 5~10%밖에
지배하지 못했던 반 탈레반 연합은 불과 한 달만에 형세를
만회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인 종속적 성격, 그것 없이는
절대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이러한 본질은 결국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들의 매판적이고 이중적인 언행불일치, 어떠한
정견도 없는 무책임한 용병적 군대에 아프가니스탄 인민이
진실로 신뢰를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아프가니스탄은 아래에
언급하는 대로 명예와 유서 깊은 국가였다. 긍지 있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결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부족제 지배의 타도와 철저한 민주화
여기서 필자는 아프가니스탄의 향후 전망에 대해 개인적인
전망을 서술함으로서 문제제기에 대신하고자 한다. 논의해온
바와 같이 북부동맹 및 지방군벌은 집권능력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민들로부터 결코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러한 세력을 끌어모아 “탈레반 이후”의 신정권 구성을 위한
교섭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구성된 새로운
정부는 결코 아프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진정으로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제들이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아프간 사회에 뿌리깊은 부족제 지배와 민족불평등의
통치형태를 폐절하고 철저한 민주화를 달성하는 투쟁이다.
80~90년대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은 금융자본의 범지구적 지배의
근간인 변제불가능한 대량의 채무로 고통받아왔다. 아프간에
대해서는 UN과 NGO를 통해 당장의 식량, 텐트, 모포, 석유 등의
긴급물자가 제공될 것이다. 그 뒤 인프라 스트럭쳐의 부흥,
재건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융자될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자금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기보다는 현지 지배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지출되어 횡령되는 상황이 예측된다. 즉 부족의
장로에 의한 지출이다. 89년 나지브라 대통령은 국민화해와
난민귀환 정책 추진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반대파의 지도자(무자헤딘)은 페샤와르 저택에
살면서 난민들의 대표자로서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손에
넣어왔다. 이러한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 난민들의 귀국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있다.”(89년 4월, 4월 혁명 11주년 기념
연설회)
10부족의 장로와 무자헤딘의 지도자들은 해외난민에 있어서도 그
수탈과 지배를 관철하고 있다. 이것이 부족적(전봉건적)
지배이며 그 폐절이 최대의 중요과제인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은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화 없이는 일보도 전진할 수 없다.
또한 전 국왕 및 국왕지지자들은, 부족제의 혜택을 어떻게 받게
되는가, 이들이 그 옹호자인 이상, 이에 대한 입장은 명확하게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모든 세력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 없이는 평화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총구로부터 정권이 탄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와 영국을 비롯한 외국들로부터의 무기제공을 일체
금지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북부동맹의 구성원은 모두가
한결같이 총을 쥐고, 그 감각이 오로지 무력을 추구하는
폭력주의자로 만들어왔다. 또한 예컨대 탈레반이 사라진다해도
파슈톤인의 상당수가 있는 파키스탄령의 부족지대(tribal area:
민족자치구)에서는 19세기의 반영독립전쟁 이래 소형 무기가
자유롭게 제조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페샤와르의
거리를 다녀본 기록문학자 V. S. 나이폴은 그 부근 한 모퉁이를
돌아본 사이에만 40여개의 소형무기제조점을 볼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ꡔ이슬람 재방 下ꡕ, V. S. 나이폴).
이러한 전통의 흐름을 단절하고 아프간 민족, 원리주의 조직간의
상호 복수의 연쇄를 끊는 것, 이를 위해서라도 우선 북부동맹이
소유한 무기를 버리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국제적인 여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무장해제가 진전된다면 해외난민은 안심하고 귀국할 것이며
유랑민들은 거칠 것 없는 초원, 대지에서 양을 칠 수 있을
것이다. 부시나 블레어와 같은 호전적인 지도자들과 죽음의
상인들에 통타를 안겨주자. 세계의 노동자, 인민은 환호하며
그것을 맞이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인민의 일치된 바램은 무기
없는 국가로 되는 것이다. 필자는 결코 몽상하고 있는 것도,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프간과 유사한 상황은 중남미에서도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생산과잉된 무기의 방출시장으로서 미국의
군산복합체 기업은 중남미를 목표로 삼았다. 중남미에서는
수십년에 걸쳐 그 무기로 내전이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전란
끝에 코스타리카는 무기 없는 국가가 될 것을 결정하여 이미
실시하고 있다.
인접한 과테말라에서도 코스타리카의 선택을 추구하여 90년대
후반부터 내란, 학살의 원인구명이 재건국가의 사업으로서
진행되고 있다(94년 발족). 과테말라 역시 역사로부터의 교훈에
따라 무기 철폐까지 도달할 것이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의 논의로 돌아가면,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파시즘과 반파시즘으로부터의 참전유혹을 거부하고
중립을 지켰다. 이러한 흐름은 곧 비동맹운동 설립의 일역을
담당하게 하였다(ꡔ비동맹운동기본문헌ꡕ 참고).
이러한 존엄과 유서 깊은 국시를 가진 나라의 인민은 반드시
비무장, 반전을 지지하고 그것을 견지하는 일을 서약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말해둔다면 나지브라 대통령은 89년 UN총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중립, 비무장화‘를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소련위협론이 아직 잔존했을 당시 이는 묵살당했다. 물론
당시와 현재의 상황을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쟁과 테러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길은 단 하나, 무기를
버리는 것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해 가는 과제가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프간에 있어 부족제 지배를 온존시키고 무자헤딘 세력에
대량의 무기를 공급하고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민주화를
추구하는 흐름을 봉쇄해온 것은 다름 아닌 제국주의자들이다.
이러한 반동세력과 제국주의자 간의 연관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