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번.역
공격 이후,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
ꡔ먼슬리 리뷰ꡕ 편집부
* 이 글은 Monthly Review(Vol.53, No.6, November 2001)에 실린
“After the Attack … The War on Terrorism”의 번역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monthlyreview.org/nov2001.htm
인간에 대한 깊은 희생을 끼친 단호하고도 비인간적인 폭력이며,
어떤 의미로서도 방어될 수 없는 행동이라는 점을 제외하고서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펜타곤에 대한 9월 11일의 테러
공격에 관해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한
테러리즘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어려움은 세상에서
그것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놓여져 있다. 테러리즘은
보복테러를 양산하게 되며, 오랫동안 미국은 피해자로서보다는
가해자로서 더욱 자주 이 죽음의 게임 한편에 서 있었다.
테러리즘에 대한 지구적 전쟁의 형태로 이미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적 침공을 개시한 미국의 보복 전략은 몇 년
후에는 이러한 비극을 증가시킬 것이 확실하다. 이 같은 이유로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의 군사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 및
그것들을 자국 대중들의 감시로부터 차단시키는 선동의 역할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군사주의와 미국 자본주의
미국이 지배적인 세계 제국―근대 로마와 같은―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1940년대 이래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군사, 경제,
정치 강대국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심지어 이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오늘날 미국은 전세계 군비지출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주도적인 국제
무기판매상이기도 하다. 또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같은
기간의 어떤 다른 국가보다도 더욱 많은 지역의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다음을 참조하라. 미국은 CIA에 의한 대 무수한 게릴라 활동의
예를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1945년 이후 타국에 자신의 군사력을
70회 이상이나 배치하여 왔다. 지난 20년 동안 단지
중동․이슬람 국가에서만도 미국 군사력은,
1981년 리비아 제트기 격추
1982년 다국적 군의 일부로서 시나이 반도에 군사요원과 장비
파견
1982년 레바논에 해군 파견
1983년 리비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
AWACS(공중경계관제시스템) 전자감시항공기 급파
1984년 페르시아만에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이란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 AWACS 전자감시항공기 사용
1986년 리비아에 미사일과 폭탄 공격
이란-이라크 전쟁동안 쿠웨이트의 석유탱크 호위
1991년 이라크에 대항한 걸프전 수행
지난 10년 간 이라크에 대항하여 수 차례 미사일 및 폭탄 공격을
감행
1992년 쿠웨이트에서의 군사훈련 수행(이라크를 목표로 하여)
1992년 소말리아에 무장력 배치
1998년 수단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조제공장 하나를 파괴
1998년 아프가니스탄의 오사마 빈 라덴을 목표로 집속탄이
장착된 60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행동 개시
수십만명 이상의 이라크 시민들이 걸프전에서 사망했으며,
50만에 이르는 어린아이들이 전쟁 이후에 미국이 가한
제재조치로 인해 죽어갔다. 매해 군사원조의 명목으로 수십억
달러의 돈을 이스라엘에 지원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토적
야심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미국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에게 가해진 테러 전쟁의 주요한 당사자가 되었다.
무엇이 이러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설명하고 있는가? 우리가
오랫동안 주목해 온 바와 같이 미국 자본주의는 해외에서의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지원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대량의 군비지출에 의존하여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소련의 붕괴로 인한 냉전의 종말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긍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연간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한 군사예산이 “악의
제국”의 소멸과 함께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이와 연관된
것으로서, 냉전기간 동안에는 광범위한 냉전 동맹의 맥락 하에서
미국의 목적에 일반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던 자본주의적
경쟁국들로부터의 미국 경제력에 대한 도전도 증가하였다.
소련 몰락 이후 미국의 지배계급은 따라서 자신의 제국주의적
설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냉전에 대한 대체물을 찾아내려
하였다. 다양한 대안들이 제공되었다. “문명의 충돌”(사뮤엘
헌팅턴이 제공한 이슬람․중국 그리고 서구의 대립구도),
전세계적 마약 거래에 대한 전쟁, 인도주의적 간섭. 지금까지
그것들 모두는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냉전
이후의 국방예산이 극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막기에는
충분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뜻하지 않은 행운이 사담 후세인의
1990년 쿠웨이트 침공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걸프전에서의
이라크 군사력에 대한 승리가 너무 완벽하고 파괴적이었던
까닭에 후세인은 미국의 전세계적 군사책임을 정당화하는데
필요한 믿을만한 위협세력으로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1년 콜린 파월 장군이 그 문제를 이야기했듯,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라. 나는 악의 화신들을 잃어가고
있다. 나는 악인들을 잃어가고 있다.”
미국 내 정치권력의 중심부에서는 확실히 이것을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로서 바라보고 있다. 단지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
미사일 방어 체계를 통하여 미국의 군비지출을 확장하고자
했던(소련과 합의한 AMB 조약을 파기하면서) 부시 대통령의
제안은 의회 내에서 몇몇 격렬한 반대에 부딪칠 것으로
보였다―물론 민주 공화 양당이 지속적으로 군비지출의 증가를
지지하여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시 프로그램은 결국에 가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채택될 것이다.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테러공격은 이제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21세기 최초의 전쟁이라 불리워지는 것에
대해 준비를 갖추고 있다. 경기 침체와 불확실성의 증대로
고통받고 있던 월스트리트에게, 군사 거래자의 주식이
치솟으면서 하룻밤 사이에 미국의 군비지출이 예상 이상으로
급상승한 것이야말로 정말로 좋은 소식 중 하나이다.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뒤따른 충격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지배계급은 이것이야말로 냉전에 버금가는 범세계적 규모의
새로운 성전을 위한 즉각적인 기회가 될 것임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들은 즉시 전쟁의 불꽃에 불을 당겼다.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건물이 무너지기도 전에 군사적인
대응방침이 확고하게 발표됐다. 2001년 9월 20일에 있었던 부시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에서, 그는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테러리스트 조직을 공격의 대상으로 지명했으며, 적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에게도
또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60개국 이상에 이 같은
수천의 테러리스트들이 존재한다 … 모든 지역의 모든 국가들은
이제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당신은 우리편에 서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들의 편에 서게 된다. 이날로부터 테러리즘에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모든 국가는 미국에 의해서
적대 정권으로 간주될 것이다.” 미국은 극적인 군사공격과
비밀공작을 포함하여 “우리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장기간의
군사행동”으로 들어갔다. 지상군이 투입될 것이며 손실이
예상될 것이다. 미국은 적들에 대항하여 “필요한 모든
전쟁무기”(핵무기 사용까지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를
사용하려고 한다. 부시는 “신은 중립적이지 않다”고 외치는데,
이는 죄인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익숙한 기독교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연설 뒤에는 더욱더 놀라운 사실이 존재한다.
의회는 오직 한 사람(캘리포니아 의원인 바바라 리)만을
제외하고서는 원하는 대로 이 같은 부정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 개념 자체를 정의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넘겨주었다. 전쟁은 수행되어야 하며 전쟁은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모든 국가들까지 확장되어―발생해야 함을
부시와 그의 행정부는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미국 대중들은
이러한 추가적인 적들―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 외부에 존재하는―이 누구이며 혹은 아프가니스탄 이후에
미국의 공격 대상이 될 곳은 어디인가에 관해 여전히 알지
못한다. 따라서 부시의 연설은 명확한 지리적 경계나 사용될
무기에 대한 도덕적 제한, 그리고 맞닥뜨리게 될 적의 수와
형태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없이 일련의 군사적 간섭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이것의 배후에는 대통령 고문단 수준의
국가안전국(Office of Homeland Security) 창설을 포함하여,
내부 안전의 유지를 위해 정부 권력을 거대하게 확대하고자 하는
계획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지배계급이 이러한 이슈들의 몇몇 부분들에서 의견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은 가능하다: 군사화의 정도, 이번
전쟁의 목표가 되는 국가들의 수, 그리고 미국 시민의 자유에
대한 침해. 아마도 동맹국들로부터는 군사주의를 유연화하라는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정도의 문제이다.
미국의 권력 지도층은 확실히 미국의 군사적 역할의 팽창과
공격에 대한 냉혹한 세계적 보복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짜로스(Istvan Meszaros)가 그의 저서 ꡔ사회주의냐
야만이냐ꡕ(Socialism or Barbarism)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세계가 미국 권력의 지구적-제국주의적 투사로부터 비롯된
“잠재적으로 제국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국면”을 맞이하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제국의 선동
보편적인 성인 투표권에 의해 야기되는 자본주의 사회내의
긴장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을 형식적인 정치적 평등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놓여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그 문제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가진 것 없는 다수들로부터 어떻게
소수 부유층의 특권을 지켜내는가. 민주주의 하에서 그러한
해결책은 단지 구조의 위기의 순간에서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더욱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해결책이 이데올로기와 선동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핵심은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탈정치화시키거나
기만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또한 하나의 거대한 제국일 때 문제는
더욱 커진다. 대중들은 비록 자신들의 이익을 발견하기
힘들지만, 제국의 비용을 보조하도록 설득당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이 불가피해졌을 때 대중들은 제국을 위하여 싸우고 죽기를
강요받아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조건아래서는 제국주의의 목적과
본질에 관해 솔직하고 정직해지는 것이 이러한 목적에 역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제국이 자비심 많은
“백인의 짐”으로서 정당화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제국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전세계적인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의라는 대의를 수호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 외국 전쟁과 제국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일은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어 왔다. 19세기 후반 이래로 미국 정부는
수많은 경우를 통해 시민들에게 전쟁수행의 필요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걸프전 등의 사례들에서 정부는 대중들의
격정을 자극하기 위해 정교한 선동활동을 수행했다. 그것은
정부가 자신의 전쟁 목적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의지할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체제 내―계속하여 역사적으로
변화해왔다―에서 잘 이해될 수 있다. 미디어 체계는 모든
경우에 있어 군사주의 및 제국을 위한 탁월한 선동조직으로
증명되었다.
이것이야말로 9월 11일 이후 미디어 보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배경이 된다. 역사적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과
권력이 통제하는 반쪽 진실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이제껏 우리가 정확히 그래왔던 방식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 통제로부터의 독립을 자축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미국의 뉴스 미디어는 자신들이 군사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선동의 절대적 대행자가 되기 전까지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잇따른 선동의 정도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은 진실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언론을 가진 민주 사회가 9월 11일과 같은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질문해보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들에서, 민주적인 미디어 체계는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사실적인 정확성을 담보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필요가
있다. 또한 그것은 시민들이 문제를 이해하고 가능한 최선의
해결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배경과 맥락을 제공함은
물론, 위기 해결을 위한 정책제안에 대하여 광범위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각각의 모든 미디어가 이것
모두를 해야할 필요는 없지만, 공동으로 협력해 가면서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전반적으로 이것이 유용하게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연방대법원 판사인 휴고 블랙이 이야기했던 바,
그러한 자유언론은 “통치하는 이들이 아닌 통치받는 이들에
봉사”해야 할 것이다.
공격의 갑작스러움과 무자비함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9월 11일
이후의 몇 주 동안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이라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이러한 어떠한 반응도 미국
미디어 체계에는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미디어에 의해서는 다음과 같은 마니교도적
그림이 전달됐다. 자비심 많고 민주적이며, 또한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가 자유와 풍요로운 생활양식 때문에 미국을
증오하는 미치광이 악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야수적으로
공격당했다. 미국은 즉시 군사력과 비밀 공작력을 증강시켜야
하며 생존해 있는 범죄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박멸해야 한다.
그런 후에 테러리스트라는 암세포를 지구적으로 뿌리뽑고 그것을
소멸하기 위한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보복을 위한
미국의 전쟁을 원조하지 않는 자들은―이는 국제적으로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해당된다―범죄 집단의 공범자로 간주될
것이며 이들과 똑같은 운명을 경험해 마땅하다.
이러한 엄청난 왜곡 보도의 이유는 음모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소수의 거대하고 강력한 이윤추구 기업에
의해 우리의 주요한 뉴스 미디어가 통제되고 있음을, 또한
지금까지 미국에서 실행되어 왔던 전문적 저널리즘의 취약성을
반영하고 있다. 전문적 저널리즘(professional journalism)은 약
백년 전에 탄생했으며, 자신의 사업이 침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믿을 수 있는 “편파적이지 않은” 저널리즘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던 독점적 신문의 소유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편파성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전문성은 공식적이거나 신임을
얻고 있는 자료들을 기사거리로 삼는다. 기자들은 권력자들이
이야기하고 논쟁하는 것을 보도한다. 이는 뉴스에 편향성을
가져다주는 경향이 있다. 한 저널리스트가 지도층이 이야기하고
논쟁하는 것을 보도할 때 그녀는 전문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녀가 만일 대안적인 관점이나 지도층이 토론하기 싫어하는
문제를 제기하려고 이러한 공식적 논쟁의 범위 바깥으로
나가버린다면 그녀는 더 이상 전문적이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들은 자신의 역할을 공식 자료의 속기사로서 강하게
내면화하여왔기 때문에 그것을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공식 자료에 대한 이 같은 의존에 더하여 전문가들은 특히 이번
사건과 같은 복잡한 이야기에서 정책을 설명하고 논쟁하는데
있어 또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자료들처럼 전문가들도
그들의 목적이 권력층 내부의 합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미디어 체계로부터 철저한 부름을 받는다. 9월 11일
이후로 “전문적” 분석은 대개 군사와 정보기관 및 그들의
후원자들에 의해 한정적으로 실행되어 왔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명확한 이해관계를 내세워, 제대로 인식되지도 비판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군사적 해결책을 부과해 왔다. 민주당과 공화당
간에 적절한 대응방식에 관한 토론이 부재했기 때문에, 군사적
접근만이 유일한 선택방안으로 간주되었다. 진정한 언론이라면
응당 가장 먼저 제기했어야 할 명확한 문제가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다. 즉 무슨 근거로 100억 이상의 돈만 군과 CIA―이미
그만한 돈을 갖고도 9월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바로 그
사람들―에 쏟아부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가라는 문제.
몇 주 혹은 몇 달 후에는 엘리트층에서 논쟁이 보다 포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아마도 누군가는 “자유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중동과 세계에서 미국의
장기적인 이해관계에 위해가 될 만한 총력전 양상의 군사주의나
강경정책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월등한 군사력에
호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세련된 평화적 전술을 통해
잠재적인 적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미완인 채로 남게
될 것이다. 권력의 대권으로서 군사력의 역할에 관한 한 이견이
없을 것이다. 또 미국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의를 집행한다는
인식 역시 논쟁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미국, 아니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에 대리시키지 않는다면 오로지 미국만이
자신이 원하는 언제 어느 나라에라도 침범할 권리를 갖는다는
전제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국제법을 위반할 것이라는 우려조차도 원칙에 입각하여
제기되는 것이라기보다 그러한 인식이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미국을 위법자로 바라보게 하여 결국 미국의 이해관계에 위해가
되기 때문에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관한
매체의 역할을 다시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1965년부터
1967년 후반, 혹은 1968년 초반까지 미국이 지상군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뉴스 보도는 모든 전쟁 선동에 관한
“커다란 거짓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전쟁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주변화되고 왜곡되거나 무시되었다. 1968년에
이르자 언론은 전쟁반대의 입장에 대해 보다 온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것이 전쟁에 대해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반대여론을 일정정도 반영하고 있긴 했지만, 이 같은
보도는 당시 미국 지도층 내에서 떠오르고 있었던 의견에 의해
더욱 크게 영향받은 것이다. 정․재계의 몇몇 인사들은
앞으로 예상되는 이익을 미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전쟁의
비용이 막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뉴스 보도는 지도층
의견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었다. 미국은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어떤 국가에라도 침입할 “007”식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관한 유일한 논쟁은 그것이 이러한 권력의 적절한
사용이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베트남과 같은 국가들을
침범하고자 하는 미국의 바로 그 생각이 도덕적으로
잘못이다라는 식의 사고는 금지되었다. 비록 그러한 사고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것임을 조사결과들이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위와 같은 저널리즘의 또 다른 결점은 그것이 전염병과도 같이
맥락화를 피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의 이유는, 사건에
대한 의미 있는 맥락과 배경을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전문적 저널리즘이 피하고자 하는 자유롭고 공개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결국 저널리스트들을 제한된 위치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잘 보도되지 않는 주제들보다도 중동 문제와
같이 더 자주 보도되는 주제들에 대해 미국 대중들이 오히려
더욱 무지한 까닭은 이에서 비롯된다. 저널리즘은 이해와 정보에
근거한 행동보다는 혼란, 냉소주의, 그리고 무관심을 일으키려고
한다. 보도는 연관되지 않은 사실들의 조합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대중 무력화를 위한 확실한 처방이 된다. 전문적
저널리즘이 맥락화를 거의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것이
지도층의 전제에 순응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9월 11일 이후로 저널리즘에서 맥락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은
거의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놀라운 사실이다.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공개된 테러리스트 연계조직 및 아프가니스탄에의 군사적
침공의 성공 혹은 실패에 관련한 요인의 연관조사를 보도하는
수없이 세세한 기사들이 존재했음에도 정작 알맹이는 빠져있다.
다음을 고려해 보라. 세계의 주도적인 테러리스트 조직으로서
미국의 역할을 다룬 주제에 대한 발표금지 조치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98년에 국제 사면 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미국이 어떤 정부나 조직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전지구적인
극단적 인권침해―고문, 테러리즘, 그리고 국가 폭력의 사용
증가를 포함하여―에 책임이 있음을 명확히 드러내는 기사를
발표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의 부패 정권 수립에
있어 미국의 역할 및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지원하고 이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끔찍한 기록은 대부분의 미국
주민들이 접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에 관한 정보, 즉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에 대항한
전면전에서 이전에 그가 파키스탄을 통해 CIA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거의 언급되거나 강조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뉴스 매체로부터 이슬람 및 아랍 세계의 이질적 문화에 관한
단서를 얻는 사람은 드물다. “정상적인 국가”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사이의 단순한 구별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전문적인 기호를 넘어, 미국의 미디어 기업은 미국이라는 제국에
대한 지원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제도적 맥락 내에 위치한다.
이들 거대 기업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미국 외부로부터의
수입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는 중이다)와 주도적인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역할에 의한 주요 수혜자들 중 하나이다.
사실 미국 정부는 무역거래와 지적 재산 협정이 논의될 때
지구적 미디어 기업을 주되게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기업이
미국 군사력 및 자본주의가 악의적인 세력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리라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정부, 군부, 그리고 미디어 기업 모두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수행되는 테러리즘에 대한 제한 없는 전쟁의
필요성과 필연성, 미덕을 선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대중적 지지를 필요로 하나 단순한 사실조차도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많은 미국 대중들은 그러한 지겨운
군사주의적인 응답에 관해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결국 선동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 군사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평화를 증진시켜 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 앞에 놓인 길은
분명하다. 우리는 군사주의적 거짓말을 폭로하며 전쟁활동을
저지할 수 있을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머뭇거려 워싱턴의 전쟁지도자들이 저지되지 않는다면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한 대가는 계속하여 증가할 것이며, 특히
그 대가는 지구상의 가장 착취 받고 가난한 지역에 있는 무고한
이들의 핏값으로서 지불되어야 할 것임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한/노/정/연
번역: 성준규(연구기획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