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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초기 노동시장정책

현장에서 미래를  제74호
송태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초기 노동시장정책



송 기 철/연구위원







1. 머리말

1920년대 독일에서는 노동시장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간섭주의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역사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과 1918․1919년의 혁명과정을 통해 독일사회가 겪었던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변혁이었다. 19세기식 자유방임주의가 쇠퇴하면서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과 노동의 대립적 이해관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고, 산업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이 혁명적으로 폭발한 후 노동시장의 불안, 특히 대량실업문제는 위기에 처한 부르주아지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자본과 노동간의 이해절충을 통하여 산업자본주의의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바이마르식 복지국가체제가 형성되었고, 그 관심의 초점은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시장 구조를 개선하는데 있었다.

현대적 노동시장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실업으로 나타나는 노동시장의 불균형을 노동력의 효율적 관리와 노동시장구조의 개선을 통해 최소화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전후 독일에서는 최초로 중앙정부의 주도 하에 노동시장의 동향에 대한 체계적 관찰과 분석, 노동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공적 직업소개제도의 확대, 일반직업교육과 실직자 재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 실업급여의 지급을 통한 실직자 가정의 생활안정, 대량실업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고용촉진정책들이 실시되었다.

특히 실업극복을 위한 정치적 의지는 고용확대를 위한 개별기업과 고용주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제도,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 재분배, 대규모 공공근로사업, 총 수요관리, 특히 공공투자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정책, 노동시장 활성화를 위한 공공주택사업의 지원 등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국가간섭주의는 1927년 여름 비스마르크식 노동자 사회보험제도의 완결 또는 바이마르 시대 사회정책의 결정판으로 평가받고 있는 “직업소개와 실업보험에 관한 법”(Gesetz uber Arbeitsvermittlung und Arbeitslosenversicherung: AVAVG)에 의해 그 제도적 틀을 완비하게 된다. 현대 실업보험제도의 모범이 된 AVAVG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산업자치주의 원칙에 따라 국가와 사용자 단체 그리고 노동조합대표에 의해 공동으로 관리 운영되는 독립적 노동행정조직에 있다.

1920년대 독일의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간섭주의는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기, 즉 1918․19년 가을 독일 혁명으로부터 1923년 겨울, 화폐개혁이 단행되기까지 중앙정부가 실시한 노동시장안정정책의 산물이었다. 패전과 혁명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1천만 명에 달하는 참전군인과 전쟁난민 그리고 군수산업노동자들을 위한 고용대책은, 초기 바이마르 정부의 최대의 정치적 과제였다. 놀랍게도 전후 독일 노동시장의 안정은 인플레이션에 의한 경제활성화 정책과 대량실업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통해서 이룰 수 있었다. 여기에는 1918년 11월 중앙노사공동체(Zentralarbeitsgemeinschaft) 협약을 체결한 대기업과 노동조합의 전후 이행기 경제정책에 대한 기본합의, 즉 전시경제식 국가관리체제의 해체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의 조속한 복귀, 그리고 무제한의 유동성과 적자재정에 바탕을 둔 경제재건에 합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노동과 자본의 전후 노동시장에 대한 기본합의의 형성과정과 이에 기초한 바이마르공화국 초기 중앙정부의 노동시장안정정책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1920년대 독일의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간섭주의의 한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2. 제1차 세계대전기간 중 전후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논의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의 참전군인과 전쟁물자 생산에 투입된 노동력의 총규모는 1천만 명을 훨씬 상회했다. 전쟁종료 후 다시 이들을 민간경제체제로 복귀시키는 문제는 전시경제체제가 평화경제체제로 환원되는 과도적 이행기경제의 최대 난제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단지 전선에 투입된 인력과 군수산업 종사자의 규모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초유의 대량물자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의 산업과 노동시장 구조가 극심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식통계에 의하면, 1917년 말 대표적인 군수 산업인 제철산업과 기계산업 그리고 전기 및 화학산업의 총 고용자 수는 전쟁전 수준에 비하여 대략 20%에서 50%까지 증가한 반면, 건설업, 목재산업, 섬유․의류산업의 경우에는 그 고용규모가 각각 1/3 내지 절반 가량 축소되었다.1) 전시경제의 급팽창으로 인한 노동시장구조 왜곡의 또 다른 특징적인 현상은 여성노동과 유년노동의 급격한 확대였다. 예를 들어 루르 철강산업의 경우 전체노동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20%에 육박했다.2)



<표 1> 주요 제조업 부문의 여성노동자 수와 고용비율(괄호)3)

 

1913

1918

지수 (1913=100)

화학산업

26,744 (14.8%)

207,881 (43.1%)

777.2

기계산업

74,642  (6.4%)

492,194 (28.4%)

695.4

광업 및 제철산업

15,969  (1.4%)

109,703  (9.7%)

687.0

금속가공산업

81,993 (12.1%)

232,464 (32.1%)

283.5

식품산업

191,721 (26.8%)

231,200 (43.7%)

120.6

의류산업

260,260 (60.4%)

205,653 (71.6%)

79.0

섬유산업

461,607 (48.3%)

265,313 (66.2%)

57.4


전후 노동시장의 수요를 사전에 예측하고, 이에 따라 대량실업의 방지와 불가피한 실업의 사회적, 경제적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군수산업의 급팽창으로 심하게 왜곡된 노동시장구조의 재조정과 관련하여, 이를 원칙적으로 시장의 자율기능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후 노동시장에 있어서의 자본과 노동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함께, 전시경제를 통해 급격히 확대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 즉 국가와 경제의 기본관계를 설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후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17년 봄 프로이센 전쟁성의 전시동원령 해제계획 초안이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는데,4) 그 주요 골자는 참전군인의 제대시점을 전쟁종료와 함께 연령별로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제반 여건에 맞춰 탄력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대량실업 방지와 평화경제의 조속한 재건을 위해 중요 전문 인력의 우선 공급이라는 두 가지 기본원칙이 세워졌다. 이에 입각하여 공무원, 경영자와 기술자를 포함한 전문직 종사자, 자영업자, 숙련노동자, 학생 등에게 제대의 우선 순위가 주어졌고, 그밖에 미리 일자리와 생계유지의 기회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제대시기와 상관없이 4개월까지 더 군대에 잔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전쟁 동원령의 순차적 해제 계획은 전후 노동시장 상황에 대한 낙관적인 예측에 근거하고 있었다.5) 이는 전쟁기간 중 공식화된 입장으로서, 그 속에는 전후 사회정책에 관한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합리화하고 동시에 노동력에 대한 부분적인 통제를 통해 시장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을 계속 견지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었다.6)

이러한 노동자문제에 대한 관헌주의적 기본인식에 대한 일반 여론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7) 참전군인의 귀향시점을 직업과 경제력에 따라 차별해서 결정하는 것은 평화시에도 일정기간 국민의 주거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경제를 통해 이미 고사위기에 처한 수많은 중소기업에 일방적인 불이익을 가져다 줄 소지가 있었다. 또한 참전군인의 복무기간을 필요에 따라 연장함으로써 대량실업의 위험을 최소화하겠다는 계획은 비현실적이고 안일한 관료주의적 탁상공론으로 비판받았다.

특히 노동계는 군사상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 어떠한 다른 목적으로 참전군인의 제대시기를 연장하고자 하는 계획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1917년 여름 이행기경제의 제반문제에 대한 공동의 공식 입장을 정리한 노동조합들은 정부의 전후 노동시장 상황에 대한 과도한 낙관적 인식에 회의를 표시하며, 전후 대량실업 사태에 대비한 대규모 공공근로사업을 비롯하여, 1914년 여름 전쟁발발시 피고용상태에 있었던 참전군인과 군수산업노동자의 재고용에 대한 법적인 보장,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취업 알선 등 실질적인 고용안정책과 함께, 임금노동시장 구조의 제도적 개혁을 의미하는 실업보험의 실시와 기초자치 단체가 운영하는 중립적 비영리 직업소개소의 확충 등을 요구했다.8)

이러한 노동계의 입장은 제국정부 뿐만 아니라 사회개혁정책의 경제적 부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제계와 사용자측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특히 임금수준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실업보험제도의 도입과 공공직업소개제의 활성화에 관한 경제계의 반대 입장은 확고했다.9) 더 나아가 경제계는 전쟁종료와 함께 국가의 모든 규제와 간섭이 배제된 완전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즉각 복귀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자유시장주의 관점에서 보면 고용안정과 대량 실업의 방지는 실질적으로 기업활동의 자율성과 이윤동기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문제였다.

전후 노동시장정책의 향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았던 1918년 여름까지도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무엇보다도 당시 독일이 당면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불확실성이 문제였다. 이러한 총체적 불확실성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그 어떠한 장기적인 정책결정도 수립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국정부가 계속 공식적으로 견지하고 있던 노동시장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당초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적어도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미국의 참전으로 불리하게 전개된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1918년 봄에 무모하게 감행되었던 서부전선에서의 총공세가 실패함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국내정치 상황 또한 급속히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4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초유의 대량 소모전쟁으로 독일의 인적․물적 자원은 사실상 고갈상태에 빠지면서, 가중되는 식량난 속에서 군수물자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노동강도는 계속 증대되었고, 이미 1917년 봄부터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요사태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10) 1917․18년 겨울 26만 명의 민간인 생명을 앗아간 최악의 식량난과 함께 1918년 1월 베를린 군수공장 노동자의 대규모 불법파업이 발생함으로써 독일의 국내 정세는 더욱 혼미해졌다.

물론 당시 전후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논의에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독일 최대 단위 노조인 금속노동자연맹은 1918년 2월 베를린의 노동자 소요가 발생한 직후, 기존의 노조의 입장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이행기 경제문제에 관한 정책결정과 그 수행과정에 노동조합을 직접 참여시킬 것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노동조합과 기업가단체 대표로 구성된 “노동공동체”의 발족을 제안했다.11) 이러한 노조의 새로운 제안은 전후 노동시장 문제에 대한 점차 가중되고 있는 독일사회 전반의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이는 정치권의 태도변화에도 나타났다. 1918년 5월 초 독일제국의회는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를 비판하고, 실업급여의 제도화와 직업소개제도의 개혁, 그리고 기혼 참전군인의 재고용 의무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정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2) 제국의회의 이 결의안은 이미 1년 이상 답보상태에 있는 전후 노동시장정책에 관한 논의에 대해 제국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정부는 아무런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패전의 파국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급속한 전황 악화와 불투명한 전후 경제전망,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위기상황의 고조로 전후 사회정책에 대한 노동계와 경제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성공에 크게 고무된 독일의 급진적 노동운동이 급격하게 확산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조직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던 독일 중공업계는 노동자들의 사회적․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모든 사회개혁정책에 더욱 강경한 반대입장을 취했고,13) 이는 원활한 전쟁물자 생산을 위해 군수산업의 협조를 필요로 했던 정부의 정치적 운신의 폭을 더욱 축소시켰다. 당시 전후 사회․경제정책을 둘러싼 정부와 이익집단간의 갈등은 독일제국의 권위주의적 관헌국가체제의 사회적 통제력이 급속히 붕괴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1918년 여름 동부전선의 붕괴 이후 독일의 패전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독일의 입장에서 이러한 절망적인 사태 진전 속에 이행기 경제조직과 운용에 관한 제국정부의 기본방침은 관료주의적 통제경제체재를 강화하는 쪽으로 급속히 선회했다.14) 1918년 여름에서야 그 골격이 짜여진 제국정부의 계획안에 따르면 이행기 경제조직의 핵심목표는 예상되는 전후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기업의 생산활동과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를 통해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자재와 생필품의 분배와 군수산업 노동자의 수급 등 전시 지역경제를 총괄했던 전쟁보급국 지역조직(Kriegsamtsstelle)의 통제권한 확대와 함께 중앙과 지방정부 차원의 생산과 투자, 물가, 임금과 노동조건, 원자재의 분배 등 이행기 경제의 주요정책을 수립하고 조율하는 특별 부서의 구성이 추진되었다.14) 그러나 문제는 이미 1916~1917년 군수물자의 획기적인 증산을 위해 추진되었던 “힌덴브르크 계획”(Hindenburg Programm)의 실패를15) 통해서 그 한계를 들어냈던 관료주의적 통제경제제도가 평화시에도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계속 운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3. 1918년 11월 15일 중앙노동공동체 협약과 전시동원령해제부의 성립

1918년 가을, 이행기 경제정책과 전후 노동시장문제를 둘러싼 정부와 이익집단들간의 대립과 갈등은 패전과 혁명의 와중에서 그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었다. 1918년 10월 초, 독일 총사령부가 패배를 공식적으로 자인한 직후, 제국의회 다수당의 신임을 받는 독일 최초의 대의주의 내각이 구성되었고, 그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이행기 경제정책의 상세한 내용이 발표되었다.16) 그러나 전쟁종료 후에도 기존의 관료주의적 통제경제방식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제국정부의 계획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거대 군수산업가들은 패전으로 인해 곧 자신들에게 어떠한 재앙이 밀어닥칠지 간파했다. 그들은 “잘못 준비된 전시동원체제의 해제는 혁명과 그로 인한 (독일)산업의 파괴로 … 이어지리라는”17) 점을 인식하고, 그 동안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었던 노동조합과의 타협만이 유일한 현실적 위기타개책으로 판단했다. “어떻게 하면 산업을 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전 경제분야에 밀어닥칠 사회화와 국유화 그리고 코앞에 닥친 혁명의 위협으로부터 기업을 구할 수 있을까?”18) 독일 대기업가들은 “흔들리는” 국가 권력기구나 “경제 문제에 대해 표리부동한” 독일의 시민계층에게서 그 해답을 찾지 않았다. “강력한 영향력은 오직 조직노동자 집단만이 행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가권력의 붕괴 상황에 봉착해서 기업의 강력한 연대세력은 오직 노동자층, 즉 노동조합들이다. 만약 이 거대한 조직노동자 대중에게 중요한 경제문제와 관련하여 기업에 대한 연대와 일체의식을 일깨울 수만 있다면, 독일 기업의 미래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길 또한 열리게 될 것이다.” 독일의 대기업가 집단은 혁명에 대한 방패막으로 온건 개혁주의적 노선의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해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대 타협을 제안했다.19) 이러한 계급타협의 목적은 반혁명이었다. 그리고 이는 자본과 노동간의 실질적인 협력과 이해 절충을 담보할 수 있는 노사관계와 시장질서의 개혁, 즉 임금과 노동조건의 집단적 결정방식, 노동시장 구조의 개혁, 그리고 사회․경제문제 전반에 걸친 노사협력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패전의 정치적, 경제적 결과에 대한 극도의 위기의식에 휩싸이기는 노동조합조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족주의적 노동조합지도부는 패전 독일의 상황이 이미 혁명과 내전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발전할 수 있으며, 전시동원령 해제에 따른 경제위기와 사회적 갈등의 심화가 곧 통제 불능의 국가적 재앙을 촉발할 것으로 예측했다. 독일의 노조지도자들은 국가권력이 사실상 붕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조직과 노동시장구조의 개편, 그리고 기근과 대량실업의 방지 등과 같은 이행기 경제정책은 기존의 전시경제조직을 통한 관료주의적인 시장개입과 규제, 또는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직접적인 생산통제로는 수행할 수 없는 과제이며, 오직 기업과 조직노동자집단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해서만 현실적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로 판단했다.20) 독일의 노동조합대표들은 대기업이 제안한 집단적 산업자치주의(industustrielle Selbstverwaltung) 정책을 단지 이행기 경제에 국한된 위기관리방식으로서만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노사관계의 개혁을 통한 점진적 사회발전의 계기로 인식했다.

독일 제2제국의 마지막 정부의 존립 기간을 한 달여 남짓 예측한 대기업과 노동자 대표들은 실무협상을 시작한지 불과 2주 후인 10월 말, 독자적인 이행기 경제계획에 전격 합의하고, 정부는 키일(Kiel) 수병반란이 발생한 3일 후인, 11월 6일 이를 수용했다. 노사가 합의한 전시동원령해제 계획의 핵심은 일반 행정조직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제국전시동원령해제부(Reichsamt fur wirtschaftliche Demobilamchung: DMA)의 설치였다. 동수의 사용자단체와 노동조합대표로 구성된 이 조직은 “노동력의 재분배, 직업소개소 설립, 실업급여제 실시, 공공근로사업, 생산조직의 재편 그리고 군수물자 전용” 등, 이행기 노동시장정책의 제반문제를 총괄하는 일종의 “경제총사령부”(wirtschaftlicher Geralstab), 또는 과도기적 “경제독재”(Wirtschaftsdiktaur) 기구의 성격을 띈 것이었다. 제국 전쟁동원령 해제부는 이를 위해 독자적인 입법권 이외에도 중앙부서로부터 기초자치단체에 이르는 전 행정조직을 직접 지휘 감독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렇듯 대기업과 노동조합 대표들은 제국 전시동원령 해제부라는 초법적 반혁명 국가권력을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18년 11월 15일 중앙노동공동체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시장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사관계의 개혁방안과 이행기 경제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최종 확정하는데 성공했다.21) 독일 노사대표들은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 단체협약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자 직장위원회와 공동 쟁의중재위원회의 설치, 실업보험제도, 공적 직업소개제도, 참전군인에 대한 취업 보장, 8시간 노동제 등 노동시장 안정을 위한 기본원칙을 수립했다. 또한 중앙노동공동체협약을 조속히 정착시키고, 전시 동원령 해제기 경제문제와 노동자 생활안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동수의 사용자 단체와 노동조합의 대표가 참여하는 중앙노사공동위원회(paritatischer Zentralausschuß)와 직역별 산업별 전문위원회(paritatischer Fachausschuß der Industrien)의 설치를 결정했다. 이러한 집단적 노사관계에 기초한 산업자치조직의 결성 목적은 중앙노동공동체 정관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독일의 경제․사회문제, 그리고 이와 연관된 입법 행정상의 제반 문제를 (노사가) 공동으로 해결”하는 데 있었다.



4.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중앙정부의 실업정책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기의 독일사회는 패전과 혁명으로 극심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22) 내전을 방불케 했던 극렬한 좌우의 대립과 독일의 전쟁배상을 둘러싼 첨예한 외교적 갈등으로 공화국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은 극도로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정부는 노동시장 안정이라는 당시 정치적 최우선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노사간의 합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노동시장구조개혁과 고용안정정책은 1918․19년 독일 혁명기 대기업과 노동조합이 묵시적으로 합의한 공동위기관리정책의 핵심 요소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기의 노사협력체제는 전시 관료주의적 통제경제의 조속한 해체와 자유시장경제의 부활, 패전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전쟁보상비의 사회적 분담문제, 노동계급에 대한 적극적 유화정책을 통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질서의 안정화, 독일 산업 생산력의 회복과 국제경쟁력의 유지, 승전국의 경제봉쇄정책에 대한 공동대응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전후 독일의 대기업과 노동조합은 이러한 공동의 목표를 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시장이 안정되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고, 이같은 노사공동의 이해관계는 고용안정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노동시장 개입정책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안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구체적인 실업자정책은 별개의 것이었다. 중앙정부의 실업정책은 전후 독일 노동시장 위기의 성격과 자본과 노동의 세력관계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했다.23) 1918년 가을 종전협정 체결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공표되었던 1919년 여름은 전후 가장 강력한 고용안정정책이 실시된 시기였다. 자유시장경제의 조속한 활성화를 위한 경기팽창정책과 병행해서 자본주의적 임금노동관계의 구조적 안정을 위한 노동시장 질서의 개혁이 단행되었다. 동시에 노동시간단축과 자유고용계약원칙의 한시적 제한을 통해 참전군인과 산업노동자에 대한 적극적인 고용보장정책이 실시되었고, 미취업자, 실직자, 단축노동자에 대한 후한 생계보조비가 지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계급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정책은 급진적 노동자운동의 쇠퇴와 인플레이션 경제에 의한 노동시장의 급속한 안정에 따라 점차 축소되었다. 특히 혁명의 실패에 뒤이은 독일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과정 속에서 실직자 가정의 생활안정이라는 실업급여의 기본목적은 화폐가치의 폭락에 의해 퇴색되고, 유휴 노동력에 대한 통제 기능은 강화되었다.

1920년 여름 이후 독일 노동시장의 상황이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전쟁배상을 둘러싼 외교적 갈등의 여파로 급속히 악화되자, 이에 노동계는 다시 노동시간단축, 대규모 공공근로 사업과 공기업의 투자정책 조정 등과 같은 위기해소책을 제안하지만, 이는 생산성 저하라는 이유로 정부와 경제계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나 재정긴축정책을 통해 대량실업의 위험과 노동계와 정면대결을 불사했던 영국, 미국과 달리, 독일은 적극적인 공공투자 확대정책을 통해 불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인플레이션에 의한 생산확대정책은 대량실업의 방지목적 외에도 독일경제의 조속한 재건을 위한 것이었다.

1923년 초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전쟁배상의무를 관철시키기 위해 독일산업의 심장부인 루르지방을 강제점령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항하여 독일의 기업계와 노동조합은 조직적인 작업거부와 태업으로 맞섰다. 이러한 자본과 노동의 “민족주의적” 공동대응을 가능하게 한 것은 루르 지역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임금보전정책이었다. 그러나 6개월 이상 지속된 루르 강점에 대한 “소극적 대항”은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독일의 국가 재정과 화폐가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1923년 여름, 루르 투쟁의 실패 이후 독일의 노동시장은 인플레이션 경제의 파국적 종말과 화폐개혁, 그리고 공공재정의 건전화를 위한 초긴축정책으로 전후 최악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노동조합과 기업계는 실업급여의 축소, 노동시간연장, 실직자에 대한 한시적 의무노동제의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제정상화에 다시 묵시적 합의를 하게되는데, 이는 1923․24년 겨울 단행된 화폐개혁의 성공과 초긴축 정책으로 야기된 경기침체의 조기 극복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5. 맺음말

바이마르시대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간섭주의의 한계는 그 바탕에 깔린 노사협력체제의 구조적 취약성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었다. 전후 독일의 고용안정은 주로 화폐가치의 지속적인 폭락에 기인한 것으로서, 이는 실재 덤핑수출을 통한 실업의 수출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노동자의 실질임금의 감소, 중산층의 경제적 몰락, 국가제정의 파탄, 그리고 전후 유럽 경제침체의 주요원인이었던 보호무역주의의 심화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19년 겨울 독일혁명기에 형성된 중앙노사공동체제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4년 화폐개혁 이후 자본과 노동의 자율적 이해절충의 대안은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간섭주의의 강화였으며, 이나마 1929년 세계경제공황 이전까지 유입된 대규모 해외자본의 덕으로 이룩된 독일경제의 상대적 안정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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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rl v. Tyska, “Der Arbeitsmarkt nach dem Kriege”, Jahrbucher fur Nationalokonomie und Statistik, 111/1918, pp.641~688, p.647.


2) Martin Sogemeier, Die Entwicklung und Regelung des Arbeitsmarktes im rheinischen-westfalischen Industriegebiet im Krieg und in der Nachkriegszeit, (Jena 1923), p.38.


3) Chalotte Lorenz, “Die gewerbliche Frauenarbeit wahrend des Krieges”, P. Umbreit et al. eds., Der Krieg und die Arbeitsverhaltnis, (Stuttgart 1928), pp.307~391, p.348.


4) 이행기 경제에 관한 제국의회 경제위원회(RAfHG) 3차 보고서, RT-Bd.321, Akt. Nr.749, pp. 1422~1423.


5) Ibid., pp.1123.


6) Friedrich Zunkel, “Industrie und Sozialismus”, Der Kampf um die Wirtschaftsordnung in Deutschland, (Dusseldorf 1974), p.117.


7) RAfHG 5차 보고서, RT-Bd.321, Akt. Nr.875, pp.1635. Akt. Nr.875, pp.1634. Adolf Lowe, “Der Entlassungsplan”, Labor/Lowe ed., Wirtschaftliche Demobilization, (Berlin 1916), pp.57~62.


8) 1917년 6월 30일 제국의회에 제출된 이행기경제에 관한 독일 노동조합의 공동 탄원서는 Herman Weber, Quellen zur Geschichte der deutschen Gewerkschaftsbewegung im 20. Jahrhundert, Vol.1: Die Gewerkschaften im Weltkrieg und Revolution 1914~1919, (Koln 1985), pp.360~370. 에 수록되어 있다. 이행기경제정책에 관한 독일 노동조합의 입장은 Paul Umbreit, “Arbeitsbeschaffung und Arbeitslosenunterstutzung nach dem Kriege“, P. Umbreit, ed., Der Tag der Heimkehr: Soziale Frage der Ubergangswirtschaft, (Jena 1918), pp.21~30을 참조할 것.


9) 전후 경제정책에 관한 독일 사용자단체연합회(VDA)의 요구, “Foderungen der Ubergangswirtschaft und Friedenswirtschaft”, 연방문서보관소 베를린 지국 (BA Berlin), Giesbert 유고(Nachlass), N 2097, Bl.41. 이행기 경제문제에 대한 경제계의 입장은 F. Zunkel, pp.119~121 을 참조할 것.


10)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발생한 노동자 파업의 원인과 그 규모, 그리고 국가의 대응은 Hans-Joachin Bieber, Gewerkschaften in Krieg und Revolution: Arbeiterbewegung, Industrie, Staat und Militar in Deutschland 1914~1929, Vol.1, (Hamburg 1981), pp.416~486. 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1) 1918년 2월 12일 제국 내무성에 제출된 독일 금속노동자연맹의 탄원서, “Forderungen und Richtlinien fur die Ubergangswirtschaft”, BA Berlin, R 3101, Bd.7286, Bl.6.


12) 1918년 5월 8일자 제국의회 결의안, BT-Bd. 312, p.5043.


13) 1917년 봄 이후 전황에 악화되면서 전후 사회정책을 둘러싼 갈등도 점차 첨예화 했다. 그 자세한 내용, 특히 사회정책에 관한 독일 중공업계의 반동적 입장은 Ludwig Preller, Sozialpolitik in der Weimarer Republik, (Dusseldorf 1949), 문고판 reprint, pp.43~54, 81~85. F. Zunkel, ibid. pp.162~170. H.-J. Bieber, ibid., pp.384~416.을 참조하라.


14) 제국 경제성은 1918년 봄과 여름 노동시장정책에 관한 서로 상의한 내용의 내부문서를 작성했다. 첫 번째 문건에서는 통제경제의 조속한 해체의 필요성이 강조된 반면에 두 번째 문건에서는 이와 정반대 되는, 즉 기존의 전시경제조직의 존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Denkschrift “Demobilmachung der Arbeiterschaft und der Arbeitsmachweis”, BA Berlin, NL Giesbert, N 2096, Nr. 37, Bl. 93~104. Richtlininie uber die Umorganisation der Kriegsamtsstellen zu Demobilisationsstellen, BA Berlin R 3101, Bd.7286, Bl.69~73.


14) Richtlinie uber die Umorganisation der Kriegsamtsstellen zu Demobilmachungsstellen.


15) 힌덴브르크 계획의 성과와 “보조근무법”(Hilfsdienstgesetz)에 의거한 전시강제 노동력동원체계는 Gerald D. Feldman, Army, Industry and Labor in Germany 1914~1918, (Princeton 1966), 독일어 번역본, pp.133~206, 218~223. H.-J. Bieber, ibid., pp.296~383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16) 1918년 10월 11일열린 제국 중앙부처와 연방국가 대표자 회의기록, BA Berlin, R 3101, Bd.7286, Bl.140~142.


17) 베를린 지멘스 공장장 Otto Henrich이 1918년 10월 20일 독일 기술자 연합회에서 행한 연설요약문은 Gerald D. Feldman, “The Origins of the Stinnes-Legien Agreement. A Dokumentation”, unter Mitarb. I. Steinisch, Internationale wissenschaftliche Korrespondenz zur Geschichte der Deutschen Arbeiterbewegung, H.19~20, pp.45~103, p.64에 수록되어있다.


18) 독일 철강산업회 전무인 Jachob Reichert가 1918년 12월 30일 루르지역 상공회의소연합회에서 행한 연설. F. Zunkel, ibid., pp.174~175에서 재인용.


19) 독일 대기업의 반혁명정책과 관련하여 특히 Werner Richter, Gewerkschaften, Monopolkapital und Staat im Ersten Weltkrieg und in der November Revolution, (Ost Berlin 1958)와 Gerald D. Feldman, “The German Business between War and Revolution. The Origins of the Stinnes-Legien Agreement”, G. A. Ritter, ed., Entstehung und Wandel der modernen Gesellschaft. Festschrift fur Hans Rosenberg, (Berlin 1970) pp.312~341을 참조할 것.


20) 1918/19년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기 노동조합지도부의 반혁명적 노사협력정책에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다음의 연구서들은 그 대표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W. Richter, ibid. Heinrich Potthoff, Gewerkschaften und Politik zwischen Revolution und Inflation, (Dusseldorf 1979). Gerald D. Feldman/I. Steinisch, (1985), Industrie und Gewerkschaften 1918/1924, Die uberforderte Zentralarbeitsgemeinschaft, (Stuttgart 1985). H.-J. Bieber, ibid.


21) 중앙노동공동체협약문과 노동공동체조직의 정관은 G. D. Feldman(1985), ibid., pp.135~141에 수록되어 있다.


22)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독일 사회의 “대혼란”에 대해서는 G. D. Feldman(1996), The Great Disorder. Politics, Economics and Society in the German Inflation 1914~1924, (Oxford/New York 1996)을 참조할 것.


23) 1918년 11월 종전 협상체결로부터 1924년 봄 화폐개혁의 성공까지 독일 노동시장정책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변화과정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Die staatliche Arbeitsmarktpolitik in Deutschland zwischen der Revolution 1918/19 und der Wahrungsreform 1923/24, Moglichkeiten und Grenzen des arbeitsmarktpolitischen Staatsinterventionismsus in der Weimarer Republik(미출간)에 상세히 분석되어 있다.


2002-02-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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