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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나의 딸

현장에서 미래를  제74호
최애란

열.린.마.당

엄마, 그리고 나의 딸


최 애 란
노동자의 힘 인천준비모임(현재 육아휴직 중)





엄마, 그리고 나의 딸
친정엄마의 고향은 거제도에 파랑포라는 그림처럼 예쁜 어촌이다. 목소리 크고 억척스런 우리 외할머니는 본의 아니게 큰딸이 된(외할머니는 자식 열을 낳아 다섯을 떠나보내셨다) 엄마에게 물질 대신 미싱을 가르치셨다. 엄마는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만나 육지로 나왔지만 내가 열한살이 되어 도시로 나오기 전까지 시부모님에 시동생 둘, 나와 내 여동생까지 여덟 식구의 집안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도시로 나온 후 우리 네 식구 만 살게되었지만 도시생활을 위해 엄마는 식당과 방직공장을 거쳐 배워 둔 기술로 15년 동안 미싱사로 일했다. 엄마는 호기심으로 배우고 싶어하는 어린 내게 미싱을 가르치지 않았고 설거지나 빨래 같은 집안일도 시키지 않았다. 할머니는 엄마가 할머니처럼 살지 않기를 바랬고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그렇게 바라는 전문직여성이 될 수 있었으면서도 엄마 몰래 봉제공장에서 미싱보조 노동자가 되었고 또 피아노를 만드는 가난한 공장 노동자와 결혼을 했다.
(…) 나는 맏이였다.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친정엄마는 결국 탈진으로 병원에 실려 가셨다. 결혼식 날에 친정엄마는 2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이제야 가로막고있던 큰 산 하나를 넘은 듯 의기양양했었다. 신혼여행을 떠나서야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그 죄스러움이 가슴에서 북받쳐 통곡했었다.
(…) 4년 뒤 나는 친정엄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50시간의 진통 끝에 수술로 딸아이를 나을 수 있었다.


엄마의 바램과 나의 바램
목소리 크고 억척스러운 할머니에 비해 조용하고 헌신적이었던 친정 엄마는 목소리 크고, 성깔 있는 나를 낳았다. 나는 어려서는 꽤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앞에서도 곧잘 대들고 골방에 틀어 박혀 책읽기를 좋아하는 내가 엄마와는 다르게 살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었다.
여덟 식구 먹고살기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군 하사관의 박봉에도 엄마는 하루종일 쪽가위로 실밥을 뜯으며 내게 위인전집과 어린이문학전집을 사다 안겼다. 엄마는 어떻게 살든 엄마의 딸만은 남자들에게도, 배운 사람들에게도 멸시받지 않기를 소원했었다.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사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고 나도 물론 엄마처럼 살기 싫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의 희망이듯 엄마는 나의 미래이고 나의 모델이었다.
정작 나의 희망은 엄마의 당당한 삶이었다. 엄마가 남편 앞에서 당당하기를, 보다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영위하기를 나는 진정으로 희망했었다.
부모님의 자식을 위한 희생과 기대는 어린 내게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아버지가 지시한 길 이외의 선택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나 또한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을 걷고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의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은 또 다시 엄마였다. 대학을 안가겠다고 선언한 내게 엄마는 건축학원 안내문을 가져왔다. 자격증을 따면 대학도 들어가기 쉽고 미술을 좋아했으니까 나한테 잘 맞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통사정을 했고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던 나는 취업률이 높은 전문대 건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엄마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삶의 지표가 세워졌다. 2년제 전문대학이라는 곳은 정말 형편없는 곳이었다. 한 반의 수업 받는 학생은 보통이 60여명이었고 복학생이 많은 시기에는 70여명일 때도 있었다. 시간표도 일괄적으로 짜여져 내려왔다. 2년 동안 총 89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전공외 교양은 고등학교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고 이수학점을 채우기 위해서 매일 5․6교시 수업이 있었다. 전공과목도 4년에 배울 것에 대한 속성 과정이었고 실기 위주의 “중견 기술 관리자 육성”이라는 전문대 고유의 목적을 지키기에는 턱없이 부실했다. 하루 5․6교시의 수업을 받고도 전문학원과 실기실, 독서실 등을 전전긍긍하며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을 한들 전문대졸업생들의 사회적 위치는 너무도 초라했다. 90%이상의 취업률을 자랑하지만 그 속에 70%의 이직율이 가리워져 있었다.
나는 대학을 나와도 엄마의 바램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시 공부를 해서 4년제 대학에 편입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처한 물질적 위치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신분상승의 꿈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도 알게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엄마의 삶과 엄마의 꿈이 어떤 것인지도 깨달았다. 나는 자본주의적 신분상승의 꿈을 버리기로 했다. 대신 그 야만성과 싸우기로 했다.
엄마는 미싱사부터 시작했었지만 아무기술이 없는 나는 미싱보조, 일명 “시다”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미싱보조의 생활, 한여름 50도를 넘나드는 작업환경에서 하루 10시간씩 아이롱(다림질)을 했다. 거기서 열다섯 교복을 벗어 던진 시다의 꿈을 보았고 그 꿈을 지나 나이 50이 넘도록 아직도 허옇게 새는 머리를 숙인 채 미싱을 타는 엄마도 보았다. 결혼을 할 즈음에야 내가 봉제공장 미싱보조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엄마는 쓰러졌다. 조그만 얼굴은 더 작아지고 기미와 주름살이 늘어 정말 2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엄마를 더욱 더 슬프게 한 것은 내가 결혼하겠다는 대상이 가난한 노동자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자본주의 문화가 추구하는 외모와도 무척이나 동떨어진 시커먼 얼굴에 작은 키! 그 동안 엄마를 버티게 했던 유일한 자존심은 산산이 깨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군생활 만 하신 아버지는 설득이 쉬웠다. 그러나 식당과 방직공장을 거쳐 미싱사로 이력이 난 엄마의 반대는 결사적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처음부터 엄마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문대를 졸업한 건축기사의 삶이나 봉제공장 시다의 삶이 나에게는 똑같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지금까지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잣대로야 그 차이가 분명했으니 단시간에 이해될 일은 분명 아니었다. 결국 자본주의 잣대로 나는 엄마와 똑같은 삶을 선택하였으나 반자본주의적 삶을 살기로 한 나는 분명 엄마와는 다르게 살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모성보호
공장을 다니며 노동자로써 엄마의 삶을 이해했다면 결혼하면서 주부 노동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능력을 정말 위대했다. 잔업을 하면 아버지의 눈치를 봐야하고 잔업을 안 하면 관리자의 눈치를 봐야 했을 엄마, 잔업을 하고 녹초가 된 엄마의 몸은 아빠의 눈치를 보며 집안 살림도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엄마의 생일날이었다. 모처럼 시간도 있고 엄마한테 미안한 일도 있고 해서 집안청소와 빨래를 해놓고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차려 저녁상을 봐놓은 적이 있었다. 엄마의 감격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엄마가 왜 그렇게 기뻐했는지도 결혼을 하고 나서 알았다.
녹초가 된 엄마가 집에 와서 청소를 하지 않고 빨래를 하지 않고 차려진 밥상을 받고 얻었던 휴식은 자식 키운 보람과 함께, 단 하루였을지언정 황금보다 귀했을 것이다. 그것이 주부노동자의 삶이었다.
물론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았다. 무슨 소린가! 말도 안 된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부모님께 모든 사실을 밝히고 현장은 정리했다. 하지만 지역노동단체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했고 그 또한 못지 않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들이었다. 남편보다 더 늦게 귀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남편의 눈치를 본 일은 없었다. 택시노동자들의 교대 시간에 맞춰 새벽 3시에 교육을 준비하며 집을 나설 때는 남편의 든든한 격려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집안 일도 빨래와 먹거리에 대한 것은 내 몫이지만 집안청소는 남편의 몫이었다. 가끔씩 친정엄마가 방문한다는 선전포고가 있는 날은 대청소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언젠가 공장에 있을 때 같은 라인을 타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가 참고 살면 그 복이 자식한테 간다고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줌마가 너무나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바람에 ‘아줌마 내가 울 엄마 딸이라서 아는데요. 아줌마 딸은 아줌마가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길 바랄꺼예요’라고 속으로만 얘기했었다.
엄마들의 사회적 위치는 그 어떤 것보다 평가절하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책임과 반성에 엄마들의 몫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싸우지 못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절대적이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그래서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해도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엄마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물며 형편없는 성의식을 가진 남자들의 권위주의와 폭력성조차도 그 엄마에게서 쉽게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때문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가.
나는 “모성보호”야말로 생명존중으로 시작해 건강한 인류를 탄생시키는 절대적인 과제라고 믿는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법적으로 보장 된 출산휴가조차 사용하기가 쉽지 않고, 자식에게 젖을 먹이기 위한 시간이나 장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이 땅 엄마들의 현실이다. 아니 이 땅 아가들의 현실이며 인류의 현실인 것이다.


엄마의 역할과 자아실현
나는 한 인격체로써 자아실현의 욕구가 엄마가 되면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딪치는지를 아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얘기하려고 한다. 사회적인 모권의 노동력 착취와 가사노동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더욱 더 깊은 얘기를 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친정엄마에게 자아실현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는 십대가 되면서부터 밖에서 일하고 들어와 권위적인 아버지의 그늘아래서 살림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자식에게는 큰소리 한 번 못치는 것이 자식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며 항상 대들었다. 당시 내 주장의 목적은 “그러니까 그런 이유로 나에게 부담 주고 구속하려하지마!”라는 매우 극악무도하고 불순한 태도였지만 말이다. 내가 얼마나 극악무도했는지도 결혼하고 애 낳고 알았다. 어쩌면 우리 옛말은 어디하나 틀린 구석이 없다. “너도 자식 낳아봐야 안다. 너도 너랑 똑 닮은 자식 낳아서 살아봐라”라는 엄마의 말은 수세기를 거쳐 딸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노동단체 상근활동을 만 4년 동안 했다. 실무간사 1년, 편집부장 1년, 조직부장 2년 … 스스로 인정할 만큼 일 욕심이 많았다. 남편은 집에서까지 24시간을 일만 생각하는 일 중독자 취급을 할 정도였다. 꿈에서도 관련 사업장에 노조건설을 구상했다. 그런 나는 아이를 낳고서야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처음의 유년으로 돌아가 그 시간들을 한번씩 되새김질하며 내려 올 수 있었다. 사회활동을 자아실현을 위해서 하고있다는 것조차 나의 엄마보다 분명 진일보했으며 또한 행복한 일이다. 문제는 육아기간이 사회적인 활동, 나의 자아실현에 미치는 영향이다.
자아실현의 중요한 성취감 중 하나는 주변으로부터 지위를 인정받고 그것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책임감들이 점점 커지고 또 그 책임을 이루어 내는 성취감이 또 다른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4년의 상근활동, 나는 올해로 서른이다. 한참 일을 배워서 겁 없이 추진하고 정말 한창 일할 때이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정말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출산 휴가로 10달이나 휴직중이다. 얼마전 남편이 몸담은 현장조직의 발대식에 아이를 안고 참여했었다. 남편의 활동은 현재 생계문제로 머물고는 있지만 자신의 위치가 보장되어있으며 주변의 활동가들도 내가 휴직에 들어가기 전보다 눈에 뜨이게 진일보해 있었다. 문득, 한쪽 쇼파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싶었다. 그리고 순간 불안해지도 했다. 육아기간 이후 다시 돌아가려 했을 때 나의 자리가 있을까? 더욱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애 낳더니 최애란, 아무것도 아니군”이라는 자괴감이었다. 이 말은 외면하면 주저앉는 것이고 집착하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과제일 것이다.
그렇다. 내가 육아기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서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는 돌아가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집착하지도 않아야 하며 포기하지도 않아야 한다. 아니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도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집착하지 않는 방법으로 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진정한 자아실현은 무엇인가.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많은 일들을 성사시키고, 온몸의 세포들이 손톱 밑에서부터 파닥거리는 생동감을 잊을 수 없다. 그 속에서 1등이 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엄마가 되고 보니 안보이던 것이 수도 없이 보인다. 20대의 좁은 틈 사이를 빠르고 세차게 흐르다가 이제 여기저기서 그렇게 흘러온 다른 물줄기들을 만나 보다 넓고, 깊게 천천히 흐르려한다. 옆길로 새고, 주저앉아 바다까지 못 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을 수도 있지만 하던 일을 더 깊고 넓게 하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나는 아직도 서른이다.
더구나 친정엄마의 삶이 나에게 중요한 모티브였듯 나의 삶이 나의 딸에게 중요한 모티브가 될 것이라는 경이로운 에너지원을 얻었다.


싸워야만 하는 모성의 자아실현
요즘에 와서 “결혼은 여자를 변하게 할 수 없지만 아기는 여자를 변하게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은 새벽 5시다. 아기가 자는 동안에야 내 일을 할 수 있는 나는 새벽 세․네시가 되어야 잠을 자고 아침에는 먼저 일어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누워서 버티다가 10시쯤 아가의 응아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깬다. 씻겨야 하니까 … 아기를 씻기고 등에 업는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아기 이유식을 만들고 남편(아침에 퇴근해 자고있다)과 나의 밥상을 차린다. 정오가 지나서 남편을 깨우기 위해 아기를 투입한다. 아기를 낳고 가장 편해진 것은 남편을 깨우는 일이다. 9개월 된 아기는 남편을 잠에서 깨우는 효과 만점의 비결이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동안 아기는 잠깐 남편이 봐준다. 아니 내가 떠넘긴다고 해야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동안에도 남편은 몇 번씩 엄마를 찾아 절규하는 아기를 데리고 온다. 또는 내가 일을 하고 있는 중인데도 “애 오줌쌌다!”며 고함을 치기도 한다. 와서 나보고 갈라는 소리지만 어림없다! “기저귀 그 위에 있어요.” “나 갈 줄 모르는데!” 한번 더 버티기로 나오는 남편! 그러나 씨도 안 먹힐 소리다! “애도 못 낳고, 젖도 못 먹이고, 그럼 할 줄 아는 게 뭐얏!” … 그러나 아기는 곧 내게로 온다. 기저귀를 가는 동안 눈물 콧물 흘리며 엄마 찾아 절규하는 아기를 달랠 수 있는 무기는 나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5년째, 평생 노동운동을 결의하고 만난 남편이 의지를 가지고 투쟁해야 할 대상임을 깨달았다. 아예 가사노동과 육아는 자신의 일이 아닌 것으로 입력되어있으며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자신의 유리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전혀 노력하지 않기도 한다. 특히 가사노동이나 가정경제, 육아에 대해서는 자기 일이 아닌 것으로 몸에 배어있다. 문제는 보통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고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것이고 때문에 기득권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남편은 해고된 지 2년이 되어간다. 식구가 하나 늘고 보니 복직투쟁과 보급투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은 잠시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곧 복직투쟁에 전념하기 위해 생계를 접어야한다. 2년 동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극도의 긴장감 속에 생활해 온 남편의 사정을 알기에 이 기간만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다. 더구나 남편이 하루 12시간 운전하고 들어와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 쉬게 놔두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과의 싸움 역시 사소하게 대충하고 싶지는 않다.
여성의 자아실현, 자신의 의지와 배우자의 협조와 사회적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말 어느 것 하나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배우자의 협조 또한 쟁취해야 할 몫이다. 그들은 애초 잘못 입력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성이 육아기간을 거쳐 사회활동으로의 복귀를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와 사회적인 조건 그리고 배우자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신의 의지와 배우자의 협조를 접어두고라도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육아기간을 계획하는 엄마의 철저한 사전준비가 있어야한다.
남편과 나는 육아기간을 철저히 계획하지 못한 이유로 얼마 전에야 가족계획을 둘째까지로 동의했다. 그리고 출산 휴가 열 달만에 그 결과를 조직에 통보했다. 나의 복귀와 자아실현은 조직과 동지들을 제외하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직에서 내가 책임져야하는 부분까지도 간과하고 말았다.
육아기간을 준비하면서 그 부분을 놓치고 보니 나는 철저하게 나의 전망에 대해서만 이기적으로 생각한 꼴이 되고 말았다. 내 스스로 활동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육아에 필요한 시간과 그 이후에 대한 자세한 계획들을 조직과 함께 세우고 내 역할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안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아기를 가지면서부터 조직과 개인생활의 갈등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지만 아직까지 우리의 형편은 기혼여성들의 육아기간에 대한 구조적인 대안이 없다. 엄마들이 보다 빨리 복귀하고 싶은 경우나 충분한 육아기간을 누리고 싶은 경우나 마찬가지다. 내 경우는 육아에 필요한 시간을 될 수 있으면 길게 잡고 싶었다. 육아기간에 대한 생각은 서로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만족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나는 상근활동 속에서 주부회원들의 활동을 4년 동안 지켜봤었다. 내 스스로 아이가 있는 처지에 놓이기 전까지는 주부회원 스스로의 문제가 더 많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부회원들의 활동을 보장할 수 없는 조직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보편적인 자본주의 구조에서처럼 “아이와 좀 더 많은 시간 함께 하고싶다면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한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아기를 키우면서 아기에게 필요한 시간들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조직이 주부회원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 한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엄마들은 밤늦게 까지 활동 할 수 없으며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개인의 의지문제로 떨어지면 주부회원들의 역량은 계속 평가 절하될 것이며, 조직은 조직원들에게 결혼하지 말 것과, 자식 낳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내게 현실로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기가 더욱 어렵다. 다만,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며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의 딸이 어떻게 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삶이 나의 딸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살 것이다. 한/노/정/연

2002-02-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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