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현/장/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구조조정 분쇄 투쟁
황 형 욱/민주노총 평택안성지구협 교육부장
IMF 체제의 극복을 명분으로 한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구조조정 저지를 목표로 한 많은 투쟁들이 철저하게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비록 경험이 없는
신규노조이며, 소규모의 지방공기업 노조이기는 하지만, 한 달
여에 걸친 파업투쟁의 성과로 구조조정을 분쇄한
안성축산진흥공사 노동조합의 투쟁은 우리에게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를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던져준다.
1. 2000년 노조설립, 1년 여 간의 교착국면
안성축산진흥공사는 1998년 4월 설립된 지방공기업으로, 도축
업무를 하는 회사다. 노동조합은 2000년 10월 31일 설립되었다.
안성축산진흥공사는 설립 직후인 98년 하반기에 민영화대상
기업에 포함되는 등 어처구니없게도 공사로 설립된 초기부터
민영화대상 기업이었다. 민영화는 시의회의 반발 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으나, 2001년 상반기에 민영화 대상
지방공기업에 다시 포함되고, 김대중 정권이 강력하게 민영화
추진을 압박하면서, 민영화는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노조는 2001년 3월 17일 안성시청 앞에서 처음으로 민영화 반대
집회를 개최하면서, 민영화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후 노조는 민영화 반대 투쟁과 임단투를 결합하여 투쟁을
전개하려 하였고, 4월경부터 임단협 교섭에 들어갔다. 임단협
교섭은 사측의 지연전술, 이에 대한 노조의 대응 미흡 등으로
진전 없이 지연되다 5․6월을 거치면서 쟁점이 형성되어
7월초에는 파업권을 따냈다. 그러나 노조는 파업준비 부족과
투쟁에 대한 부담 때문에 파업을 유보하였다.
2. 지지부진하게 진행된 임단협, 노조의 위기
한편 파업을 유보한 이후, 사장이 자격 문제 등으로 퇴임하고
신임 사장이 부임하면서, 임단협 교섭은 또 다시 지연되었다.
그러던 중 9월 초, 민영화 추진이 구체화되면서 노조의
민영화반대 투쟁이 재개되었다. 9월 3일 부분파업 후 안성시의회
앞 집회를 시작으로, 9월 5일 안성시의회 상임위에서의 표결시
표결저지 투쟁을 전개했다. 표결저지는 실패했지만,
상임위에서는 노조를 의식하여 입찰 예정가의 10% 이하로 매각할
수 없다는 결의를 했다. 9월 8일 안성시의회 본회의를 앞두고,
7일부터 전면파업에 들어간 노조는 집회와 시청 앞 천막농성을
전개했다. 그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본회의에서 축산공사
민영화방침이 통과되었다. 시의회의 민영화방침 통과에 맞선
투쟁은 결국 실패했지만, ‘10% 이하 매각 금지’라는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이후 민영화를 실질적으로 저지하는데
힘이 되었다.
이후 노조는 국면을 전환하여 “임단투를 중심으로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을 유지하며 민영화반대 여론을 확산시킨다”는
투쟁방향을 세웠다. 그러나 사측은 계속해서 불성실한
교섭태도를 유지하며, 노조탈퇴 공작에 혈안이 되었고, 9월
24일에는 9월초의 집회와 관련하여 위원장과 지구협 간부 등
3인을 체포하는 등 노조에 대한 입체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노조는 3인에 대한 구속시 무기한 전면파업을 결의하고,
석방 투쟁을 전개하여 3인은 9월 26일 석방되었다.
이후 10월을 지나면서, 노조는 ‘지역공대위 활성화’와
‘임단협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투쟁준비’라는 기조를 지니고
있었으나, 교섭과 투쟁, 지역 공대위 등 모든 계획들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조합원의 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조합원뿐만 아니라 간부들내에도 ‘민영화 투쟁과
임단협을 동시에 타결하자’는 주장과 ‘임금만 먼저
타결하자’는 주장이 엇갈렸다. 이것은 계속해서 투쟁을
해왔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전혀 없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11월초부터는 지역 선전전을 2~3차례 진행하고,
11월 9일, 12월 12일, 지역 연대집회를 개최하는 등 대외적인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탈하는 조합원들이 조금씩 늘면서
노조의 조직력은 약화되어 갔다. 특히 12월초의 상황은 자칫하면
노조가 와해될 수 있는 상황으로까지 몰렸다. 사측이 갑작스럽게
구조조정안을 발표한 것이다.
사측이 발표한 구조조정안
■ 12월 15일까지 소사장모집
■ 12월 20일까지 희망퇴직자 모집(2개월치
위로금지급)
■ 덧붙여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은 사원은 정리해고
하겠다는 협박
이에 불안을 느낀 상당수의 조합원과 일부 노조 간부들은 노조를
탈퇴하고 희망퇴직을 하기에 이르렀다. 노조와 조합원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러한 난국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면파업밖에 없었다. 그래서 17일 부분파업을 하면서, 위원장이
삭발을 단행했고, 18일 조합원 총회에서 무기한 전면파업을
결의했다. 그리고 19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3. 노조의 위기를 파업으로 극복
파업에 돌입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조합 간부들 중 이탈자가
생기는 등 간부진은 붕괴되었고, 대부분의 조합원들도 자신감은
없었다. 9월초에 파업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많은 조합원들은
파업을 통해 얻은 성과는 없이 조합원 탈퇴만 늘어난 것을
지켜보면서 파업에 대해 회의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는 절박감과 오기로 조합원들은 파업을
결의했다.
하지만 파업 진행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차츰 자신감과 힘을 얻게
된다. 20일 진행된 교섭에서 사측은 소사장제를 철회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은 매일 같이
사장실 앞에서 집회를 하면서 사측과의 전면전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장과의 교섭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의 성격임을 인식하고, 22일 시청 앞 항의 집회를 하기도
하였다.
주말을 지내고 12월의 마지막 주에는 조합원들이 사측과 시청을
보다 확실하게 압박하기 위해서, 오전에는 사장실 앞 집회,
오후에는 구조조정 정책의 핵심 입안자인 총무과장과 사장의 집
앞 항의 선전전, 시내 선전전 등을 진행했다.
파업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일전은 1월 2․3일에
있었다. 사측에서는 상당수의 비조합원들에게 희망퇴직을
받았고, 3명의 소사장들과 이미 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희망퇴직의 시점은 12월 31일이었고, 1월초부터는 소사장들이
작업을 하도록 계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희망퇴직자들과
소사장들의 출입을 막아 생산을 완전히 중단시키느냐 여부가
승리와 패배를 판가름하는 분기점이었다. 결국 1월 3일
소사장들과 희망퇴직한 비조합원들의 출입을 완전히 봉쇄하여,
노조는 공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시청 앞
집회를 3일․4일 연속해서 개최했다. 이 시기에 조합원들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하게 생겨났다. 결국 5일 교섭에서 회사는
구조조정을 철회하겠다고 입장을 전환했다.
이 때부터가 마지막 고비였다. 사측은 소사장들과의 계약을
완전히 뒤엎어야 하는 구조조정 철회를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입장이었고, 공기업의 특성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노조의 조직력이 약화되기를
기다리며, 교섭에 소극적으로 나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는 시청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는 전술을
사용하기로 했고, 1월 7일부터 거의 매일 시청 앞 집회와 시내
선전전을 진행하며, 시장과의 면담을 통해 시청과의 교섭을
요구했다. 결국 시청에서 담당 부서인 축산계장이 직접 노조와
협상을 했고, 시청의 강한 압박으로 사장은 교섭석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노조의 요구가 대폭 관철되고, 교섭은
타결되었다.
1월 14일 잠정 합의가 이루어진 타결안은, 15일 조합원 토론과
찬반투표를 거쳐 최종 확정되었다. 찬성 34표, 반대 1표로
압도적인 찬성으로 타결된 임단협 안에 노사가 조인함으로써,
파업은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주요 합의 사항
■ 소사장제 철회, 이후 노사합의없이 구조조정 불가.
■ 파업기간 고소고발 취하, 파업으로 인한 민형사상 책임
없음.
■ 파업기간 임금 손실분: 전액을 생산격려금으로
지급한다.
■ 임금 3만 5천원(2001년 1월 1일부로 소급적용).
■ 단협 주요내용
- 전임자 1인.
- 생산과 작업장 업무, 인력배치는 노사협의.
- 해고는 노사합의 한다.
- 일용직 등 비정규직 채용시 노사 합의.
- 휴페업, 분할, 합병, 양도, 이전 등 조합원 신분변동이
초래될 경우 노사합의로서 가능.
- 유급휴일 노조창립일 포함.
4.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교훈
이번 투쟁으로 노조는 구조조정을 분쇄하고, 지지부진하던
임단협을 성과적으로 쟁취했다. 또한 투쟁의 와중에 민영화를
위한 3차례의 입찰이 있었으나, 유찰됨으로써 사실상 민영화도
저지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성과는 투쟁을 통해서
노조의 와해위기를 극복하고 강고한 조직력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투쟁 없이 조직강화도, 성과도 얻을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라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말이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말임을 입증하였다. 또한 안성지역의
전투적인 연대 기풍의 확립 및 전투적, 민주적 노동운동의
기반구축도 중요한 성과이다. 안성축산 투쟁은 노조의
조합원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파업투쟁에 밀착
결합한 지구협 간부들의 헌신적인 노력, 지역 차원의 적극적인
연대투쟁이 큰 힘이 되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인 안성에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 노동운동이 거둔 성과는 이후
지역의 노동운동 판도를 바꿀만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노총
안성지부에서 파업기간 내내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도,
조합원들의 투쟁력, 단결력이었다.
축산노조의 조합원들은 여느 신규노조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투쟁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파업을 결의할 시점에는 어려움도
존재했으나,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여기에는 동요하던
조합원들이 대거 탈퇴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파업을 결의한
35명의 조합원은 알짜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지구협의 적극적인 결합이 큰 힘이 되었다.
파업 직전 상당수 간부들의 이탈로, 노조의 간부만으로는
파업지도부를 구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택․안성지구협은 파업투쟁에 밀착 결합했다. 주요
고비마다 지역의 역량이 결합된 파업지도부는 파업대오의
버팀목이 되었다. 물론 파업과정에서 새로운 간부대오의
구축까지 이루려는 노력을 통해, 조합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높여내었다.
셋째, 민주성의 사수이다.
투쟁 전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하려는 관점을
유지했다. 그래서 주요한 결정은 조합원들의 분임토론과 그것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에는
파업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상태, 의식흐름 등을 면밀히 판단하고,
현실성 있는 지도를 수행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합원 스스로 투쟁전술을 마련할 정도로 책임있게 파업에
임했으며, 스스로 파업의 전망을 세워나갔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합원들의 힘을 믿었기에 민주성을 사수할 수 있었다.
넷째, 사측의 무리수와 자충수.
노무관리가 탄탄한 여느 사업장 같았으면, 이번 안성축산 사측과
같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측은 구조조정의 강행을 통해
노조를 완전히 와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무리수였다. 더구나 파업이 지속되면서, 사측은 노조와 소사장
및 희망퇴직자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합원들의 투쟁력에 지역의 역량이 집결된 지도력이
결합되어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의 투쟁
승리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자만해서는 안될 것이다. 대다수
조합원들이 인식하고 있듯이, 아직도 노조의 역량은 미약하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또한 인식하고 있다. 단결과 투쟁, 이것이
노동자의 무기이며, 그 무기를 버리지 않는 한 패배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그 무기를 갈고 닦아야 녹슬지 않는다는 것을!
한/노/정/연